비평 교환
쓰레기를 쓰레기라 불러도 될까?
1.
서울 성동구의 사업장 일반폐기물은 2018년 연간 51.2톤이었다. 그러다 2022년에는 518.6톤이 됐다. 오 년 만에 약 열 배. 업계에 따르면 33㎡, 즉 10평짜리 팝업스토어 하나를 철거하면 대략 1톤의 폐기물이 나온다.1) 패널, 가벽, 현수막, 플라스틱 등 대부분 재활용이 안 되는 일반쓰레기에 해당한다. 업계 추산으로는 전국 팝업스토어의 절반이 성수동에 몰린다. 하나당 평균 2-3주 운영되다 철거되고 그 자리에 다음 팝업이 들어온다. 그 사이에 1톤, 또 1톤, 또 1톤.
현재 이 폐기물에 대한 처리 기준은 없다. 건설폐기물의 재활용촉진에 관한 법률이 있지만, 팝업스토어 폐기물은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2) 관련 기업과 업체의 자율에 맡긴다. 자율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무력하게 쓰이는 경우도 드물다.
팝업 쓰레기에 대한 기사는 주기적으로 나온다. 제목은 대체로 비슷하다. “성수동 팝업 열풍의 그늘” “화려함 뒤에 남는 것” “MZ세대의 소비문화가 낳은 환경 문제”. 기사 말미에는 어김없이 전문가 코멘트가 붙는다. 예를 들어 지속가능한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탄소발자국을 줄여야 한다. ESG 관련 법률이 제정돼야 한다. 재활용 가능한 소재를 써야 한다. 텀블러를 들고 다녀야 한다. (그놈의 텀블러는 왜 매번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이 글은 그런 목적은 아니다. 쓰레기를 줄이자는 글이 아니고, 성수동의 팝업 문화를 비판하는 글도 아니다. (누가 누구를 비판하리……) 오히려 ‘쓰레기’라는 단어 자체의 타당성을 묻는 1톤짜리 질문이다. (실은 그보다 더 무서울지 모른다) 우리가 어떤 것을 “쓰레기”라 정의할 때 그 판정이 그 물질의 본질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이념의 한계에 대한 고백인지 따져보자는 것이다.
좀 거창하게 들릴 수 있다. (그렇다고 치자.)
2.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2008년 다큐멘터리 〈성찰하는 삶 Examined Life〉에서 뉴욕의 쓰레기 매립지를 걸으며 석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편다. 석유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생물학적 재앙이 남긴 찌꺼기다. 수억 년 전 엄청난 양의 생물이 죽었고, 그 사체가 땅속에 쌓이고, 눌리고, 썩어버린 것. 이후 수만 년 동안 지구의 찌꺼기인 채로, 어떤 생물도 거들떠보지 않을 무렵 갑자기 인류가 나타나 석유를 자원으로 삼았다.3) 오늘날 인류는 그 재앙의 잔해를 태워 자동차를 굴리고, 비행기를 띄우고, 플라스틱을 만들고, 난방을 땐다.
지젝의 논지는 이렇다. 자연은 우리가 지켜야 할 균형 잡힌 어머니가 아니다. 자연은 재앙의 연속이고, 우리는 그 재앙의 수혜자다. “자연의 균형”이라는 관념은 종교적 타락 서사의 세속 버전이다. 그는 원래 좋았던 자연을 인간이 망쳤다는 전제를 통째로 거부한다. 원래 좋았던 상태란 없다. 자연의 어머니(mother nature), 즉 대자연이 진정 어머니라면, 그 어머니는 꽤 나쁜 년일지 모른다는 주장까지 내세운다. 마치 이상적인 자연이 따로 존재하고 그 밖에 선 인류가 그것을 파괴한다는 구도는 허구다. 자연은 태초부터 폭력적이었고, 그 폭력 위에 우리가 올라타 있을 뿐이다.
지젝은 같은 맥락에서 재활용을 미신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웃집 할머니가 성실하게 분리수거를 하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그 행위가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면죄부를 발급하는 의례라 주장한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만 소비와 생산량이 그대로인데 재활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편안하게 만든다. 마음 놓고 소비해도 된다는 허가증처럼. 최근 자주 언급되는 “넷 제로”(net zero) 혹은 “제로 폐기물”도 같은 선상이다. 실행할 의지가 처음부터 없는 슬로건이다. 쓰레기를 제로로 만들겠다는 건, 생산을 멈추겠다는 뜻인데, 생산을 멈추고자 주장하는 이들은 없다. 그러니 멈출 수도 없다. “제로”는 도달 가능한 목표가 아니라 신앙 고백에 가깝다. 나는 쓰레기가 나쁘다고 믿습니다. 나는 깨끗한 세상을 원합니다. 아멘. 내일도 여전히 팝업은 열린다.
“쓰레기를 줄여야 한다”는 말이 자명하게 들리는 바람에, 정작 “쓰레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성립하지 않게 된다. 쓰레기는 쓰레기지, 무슨 질문이 필요한가. 바로 그 자명함이 이 시대의 이념이다.
3.
그러면 석유는 언제부터 자원이었나.
1859년 에드윈 드레이크가 펜실베이니아에서 최초의 상업 유정을 뚫은 해. 그 이전에 석유의 수요는 미미했다. 수억 년 동안 땅속에 있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간혹 땅 위로 새어 나오면 거무튀튀한 찐득한 액체가 물을 오염시킨다고 불평하는 정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방수재로 조금 썼고, 중세에 가끔 약재로 팔렸지만, 본질적으로는 쓸모없는 것이었다. 땅의 찌꺼기. 지질학적 부산물이자 자연의 노폐물. 상업 유정이 뚫리고 정제기술이 생기고나서야 고래를 잡아 기름을 얻던 시대가 가고 땅에서 연료를 뽑는 시대가 왔다.
그러다 내연기관이 등장했다. 석유를 태워서 동력을 만드는 시스템. 그 순간 수억 년간 쓸모없던 찌꺼기가 지구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고, 전쟁의 원인이 되는 자원으로 변모했고, 미국은 페트로달러를 통해 경제 패권을 장악했다. 찐득했던 그 물질 자체는 한 방울도 안 변했다. 달라진 건 오로지 그걸 소화할 수 있는 시스템이 나타난 것이다.
4.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들이쉬고 있는 공기의 약 21%가 산소다. 너무 당연해서 일상에서 인지하지 못하는 물질이다. 그런데 지구 역사 대부분의 시간 동안 산소는 대기에 거의 없었다. 약 24억 년 전, 시아노박테리아(cyanobacteria)라는 미생물이 광합성을 시작하면서 산소를 대량으로 뿜어냈다. 이걸 대산화 사건(Great Oxidation Event)이라고 부른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당시 지구 생물 대부분의 입장에서 이건 사건이 아니라 재앙이었다. 왜? 당시 생물 대부분은 혐기성이었다. 산소가 없는 환경에서 살도록 진화한 미생물인데, 이 생물들에게 산소는 독가스였다. 실제로 대산화 사건은 지구 역사상 최초의 대멸종 중 하나로 분류된다. 산소가 대기 중에 축적되면서 혐기성 생물이 대규모로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산소는 결국 오염물질이었다. 독이었다. 쓰레기였다.
그러다 호기성 생물이 나타났다. 산소를 호흡해서 에너지를 만드는 시스템. 그 시스템이 등장하는 순간, 수십억 년간 독가스였던 물질이 생명의 전제 조건이 됐다. 물질 자체는 O₂ 그대로다. 달라진 건 역시 그걸 소화할 수 있는 시스템의 등장.
패턴이 보이기 시작한다. (안 보인다면 한 번 더 한다.)
5.
2008년, 《와이어드 Wired》 매거진 편집장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이 「이론의 종말 The End of Theory」라는 글을 썼다. 부제가 특히 걸작이었다: “데이터의 홍수가 과학적 방법을 쓸모없게 만든다(The Data Deluge Makes the Scientific Method Obsolete).” 빅데이터가 충분히 크면 가설도, 모델도, 이론도 필요 없다. 상관관계만으로 충분하다.4) 학계는 즉각 반응했다.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는 2009년에 앤더슨이 과학도 과학적 방법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과학은 패턴을 찾는 게 아니라 패턴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2013년, 나심 니컬러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는 《와이어드》에 「‘빅데이터’의 큰 오류들을 경계하라 Beware the Big Errors of ‘Big Data’」를 기고했다. 빅데이터는 산업화된 체리피킹이다. 변수는 많은데 변수당 데이터 포인트는 적으니, 허위 상관관계가 실제 정보보다 빠르게 증가한다. 데이터가 많아질수록 소음이 더 빠르게 자란다.5)
둘 다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게다가 공유하는 전제도 있었다. 이 데이터는 읽을 수 없다. 너무 크고, 너무 지저분하고, 너무 구조가 없다. 모인 데이터는 인간이 소화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그래서 쓸모없다고 주장됐던 것이다.
그리고 2020년대 대규모 언어 모델(LLM)이 등장한다.
갑자기 “읽을 수 없는 데이터”가 “훈련 데이터”로 재분류됐다. 아무도 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던 그 거대한 텍스트 덩어리가 GPT의 원료가 됐다. 탈레브가 “소음”이라고 불렀던 것, 앤더슨이 “이론 없이도 충분하다”고 선언했던 것 둘 다 같은 대상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하나는 쓰레기라고 했고 하나는 금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금이 맞았지만, 그건 금이어서가 아니라 재료로 쓸 수 있는 방안이 도착해서였다.
6.
세 사례에서 쓰레기는 존재론적 범주가 아니라 시간적 범주다.
어떤 것이 ‘쓰레기’인 건, 그것 자체의 본질적 속성 때문이 아니다. 그걸 소화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석유에게는 내연기관이, 산소에게는 호기성 생물이, 빅데이터에게는 LLM이 그 시스템이었다. 쓰레기라는 판정 어디에도 물질 자체의 본질은 없다. 그렇다면 쓰레기는 결국 유통기한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석유는 수억 년 걸렸고, 산소는 수십억 년 걸렸고, 빅데이터는 십 년 걸렸다.
7.
자, 철학은 여기까지다. 사실 건축학교야말로 쓰레기 공장이다. 건축학과 학기 말 복도를 한 번이라도 본 적 있으면 알 거다. 스티로폼 가루, 우드락 자투리, 레이저커팅 아크릴 조각, CNC 밀링 후 남은 목재 분진, 본드 자국이 덕지덕지 붙은 폼보드, 발사우드 토막, 3D 프린팅 실패작. 한 학기에 스튜디오 하나가 배출하는 폐기물량을 정확히 측정한 사람은 없지만 체감상 상당하다. 학기 끝나면 복도에 모형 잔해가 쌓이고, 학교 청소 인력이 며칠에 걸쳐 치운다. 매 학기 반복적으로 거론되는 이 문제는 학과 내 심각한 민원이 됐다. 시설관리팀 입장에서 건축학과는 기피 대상이다.
그리고 매 학기, 누군가가 말한다. 이걸 줄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디지털 모델링으로 대체할 수 있지 않느냐고. 친환경 소재를 쓰면 되지 않느냐고. 이 논의가 반복되면서도 결론이 안 나는 이유가 있다. 건축 설계는 시뮬레이션이다. 시뮬레이션은 이터레이션(iteration)을 먹고 자란다. 1:50 모형을 한 번 만들어서 끝나는 게 아니라, 만들고, 부수고, 수정하고, 다시 만들고, 다시 부수는 과정 자체가 교육이다. 스케일 감각은 손으로 잘라봐야 생기고, 구조적 약점은 모형이 실제로 무너져봐야 보이고, 공간의 질은 빛을 직접 넣어봐야 판단할 수 있다. 매 이터레이션마다 폐기물이 나온다. 열 번 반복하면 열 배의 쓰레기가 나온다. 이걸 줄이려면 이터레이션을 줄여야 하고, 이터레이션을 줄이면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 양자택일이다.
비외른 롬보르(Bjørn Lomborg)와 그가 이끄는 코펜하겐 컨센서스(Copenhagen Consensus)가 기후 논쟁에서 반복적으로 펼치는 논점이 있다. 기후에 직접 투입되는 자원의 비용 대비 효용은 의외로 낮고, 같은 돈을 빈곤 퇴치·아동 영양·교육에 쓸 때 비용 대비 효과(ROI)가 훨씬 크다는 것이다.6) 영양 결핍과 교육 부재로 사라지는 인적 자본을 끌어올리는 쪽이, 장기적으로는 직접적 기후 개입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는 계산. 거칠게 풀면, 아동 영양을 충분히 개선해서 천만 명의 천재가 더 나온다면 그중 한 명이 기후 해결책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이 논리 구조는 건축학교 쓰레기에 정확히 적용될 수 있다. 건축학교에서 스티로폼 사용량을 10% 줄이는 것보다, 그 학교에서 양성한 건축가가 건물 수명을 10년 늘리는 구법을 개발하는 게 총량적으로 훨씬 많은 폐기물을 줄인다. 건축학교의 쓰레기는 투자다. 소량의 폐기물을 투입해서 대량의 폐기물을 줄일 수 있는 인재를 만드는 과정. 교육에서의 제로 폐기물은, 교육의 종말과 같은 말이다.
이 논리는 건축학교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성수동 팝업 하나가 열리고 닫히는 과정은 이렇다. 공간 임대 ― 인테리어 설치 ― 가벽, 패널, 현수막, 조명, 소품 설치 ― 운영, 평균 2-3주 ― 철거 — 1톤 트럭 분량의 폐기물. 다음 팝업 입주. 반복. 한국 건물의 평균 수명은 약 30년이다. OECD 국가 중 가장 짧은 축에 속한다. 영국 100년, 미국 55년, 일본 30-40년. 성수동 팝업은 그 30년짜리 사이클을 2주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뿐이다. 구조가 같다. 설치 — 운영 — 철거 — 재설치. 타임라인만 다르다. 30년이냐 2주냐. 규모만 다르다. 철근콘크리트냐 가벽이냐.
이 점에 비춰보면 오히려 모든 한국 건축이 같은 일을 하면서 영속적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인 셈이다. 아파트 분양 광고에 “랜드마크”라는 카피가 붙지만 30년 뒤에 재건축 조합이 결성될 전제를 가지고 있다. 팝업은 이 위선을 거부한다. “나는 2주 뒤에 없어집니다”라고 처음부터 선언한다. 팝업의 폐기물은 “문제”이고, 아파트 단지의 철거는 “개발”이다. 같은 행위에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 이게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이다.
성수동의 쓰레기가 한꺼번에 보이는 건 그래서다. 30년짜리 건물은 30년에 걸쳐 나눠 나올 뿐이다. 그리고 문제가 가시화되는 곳에서 솔루션이 먼저 나온다. 2주마다 철거가 일어나므로 2주마다 데이터가 나온다. 가벽 모듈화, 자재 표준 규격화, 철거 자재 순환 시스템. 실패해도 2주 뒤에 다시 시도할 수 있다. 30년짜리 건물에서는 꿈도 못 꿀 실험 반복의 속도다. 건축학교는 실험적 반복을 먹고 자란다고 했다. 성수동은 한국 건축의 시뮬레이션 환경이다. 쓰레기가 가장 많이 나오는 곳에서 쓰레기의 재해석이 가장 먼저 만들어진다.
사실 가장 정직한 진술은, 우리는 모른다는 것이다. 1톤 트럭에 실린 그 패널이 5년 뒤에도 1톤짜리 쓰레기일지, 아니면 무엇으로 환원될지 지금은 알 방법이 없다. 그러나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하는 건, 그것이 영원히 쓰레기로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판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도 성수동에서 팝업이 철거되고 있다. 1톤 트럭에 패널과 가벽, 현수막이 실린다. 지금 이 순간, 이것들은 쓰레기다.
아직은.
서울 성동구의 사업장 일반폐기물은 2018년 연간 51.2톤이었다. 그러다 2022년에는 518.6톤이 됐다. 오 년 만에 약 열 배. 업계에 따르면 33㎡, 즉 10평짜리 팝업스토어 하나를 철거하면 대략 1톤의 폐기물이 나온다.1) 패널, 가벽, 현수막, 플라스틱 등 대부분 재활용이 안 되는 일반쓰레기에 해당한다. 업계 추산으로는 전국 팝업스토어의 절반이 성수동에 몰린다. 하나당 평균 2-3주 운영되다 철거되고 그 자리에 다음 팝업이 들어온다. 그 사이에 1톤, 또 1톤, 또 1톤.
현재 이 폐기물에 대한 처리 기준은 없다. 건설폐기물의 재활용촉진에 관한 법률이 있지만, 팝업스토어 폐기물은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2) 관련 기업과 업체의 자율에 맡긴다. 자율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무력하게 쓰이는 경우도 드물다.
팝업 쓰레기에 대한 기사는 주기적으로 나온다. 제목은 대체로 비슷하다. “성수동 팝업 열풍의 그늘” “화려함 뒤에 남는 것” “MZ세대의 소비문화가 낳은 환경 문제”. 기사 말미에는 어김없이 전문가 코멘트가 붙는다. 예를 들어 지속가능한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탄소발자국을 줄여야 한다. ESG 관련 법률이 제정돼야 한다. 재활용 가능한 소재를 써야 한다. 텀블러를 들고 다녀야 한다. (그놈의 텀블러는 왜 매번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이 글은 그런 목적은 아니다. 쓰레기를 줄이자는 글이 아니고, 성수동의 팝업 문화를 비판하는 글도 아니다. (누가 누구를 비판하리……) 오히려 ‘쓰레기’라는 단어 자체의 타당성을 묻는 1톤짜리 질문이다. (실은 그보다 더 무서울지 모른다) 우리가 어떤 것을 “쓰레기”라 정의할 때 그 판정이 그 물질의 본질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이념의 한계에 대한 고백인지 따져보자는 것이다.
좀 거창하게 들릴 수 있다. (그렇다고 치자.)
2.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2008년 다큐멘터리 〈성찰하는 삶 Examined Life〉에서 뉴욕의 쓰레기 매립지를 걸으며 석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편다. 석유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생물학적 재앙이 남긴 찌꺼기다. 수억 년 전 엄청난 양의 생물이 죽었고, 그 사체가 땅속에 쌓이고, 눌리고, 썩어버린 것. 이후 수만 년 동안 지구의 찌꺼기인 채로, 어떤 생물도 거들떠보지 않을 무렵 갑자기 인류가 나타나 석유를 자원으로 삼았다.3) 오늘날 인류는 그 재앙의 잔해를 태워 자동차를 굴리고, 비행기를 띄우고, 플라스틱을 만들고, 난방을 땐다.
지젝의 논지는 이렇다. 자연은 우리가 지켜야 할 균형 잡힌 어머니가 아니다. 자연은 재앙의 연속이고, 우리는 그 재앙의 수혜자다. “자연의 균형”이라는 관념은 종교적 타락 서사의 세속 버전이다. 그는 원래 좋았던 자연을 인간이 망쳤다는 전제를 통째로 거부한다. 원래 좋았던 상태란 없다. 자연의 어머니(mother nature), 즉 대자연이 진정 어머니라면, 그 어머니는 꽤 나쁜 년일지 모른다는 주장까지 내세운다. 마치 이상적인 자연이 따로 존재하고 그 밖에 선 인류가 그것을 파괴한다는 구도는 허구다. 자연은 태초부터 폭력적이었고, 그 폭력 위에 우리가 올라타 있을 뿐이다.
지젝은 같은 맥락에서 재활용을 미신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웃집 할머니가 성실하게 분리수거를 하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그 행위가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면죄부를 발급하는 의례라 주장한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만 소비와 생산량이 그대로인데 재활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편안하게 만든다. 마음 놓고 소비해도 된다는 허가증처럼. 최근 자주 언급되는 “넷 제로”(net zero) 혹은 “제로 폐기물”도 같은 선상이다. 실행할 의지가 처음부터 없는 슬로건이다. 쓰레기를 제로로 만들겠다는 건, 생산을 멈추겠다는 뜻인데, 생산을 멈추고자 주장하는 이들은 없다. 그러니 멈출 수도 없다. “제로”는 도달 가능한 목표가 아니라 신앙 고백에 가깝다. 나는 쓰레기가 나쁘다고 믿습니다. 나는 깨끗한 세상을 원합니다. 아멘. 내일도 여전히 팝업은 열린다.
“쓰레기를 줄여야 한다”는 말이 자명하게 들리는 바람에, 정작 “쓰레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성립하지 않게 된다. 쓰레기는 쓰레기지, 무슨 질문이 필요한가. 바로 그 자명함이 이 시대의 이념이다.
3.
그러면 석유는 언제부터 자원이었나.
1859년 에드윈 드레이크가 펜실베이니아에서 최초의 상업 유정을 뚫은 해. 그 이전에 석유의 수요는 미미했다. 수억 년 동안 땅속에 있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간혹 땅 위로 새어 나오면 거무튀튀한 찐득한 액체가 물을 오염시킨다고 불평하는 정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방수재로 조금 썼고, 중세에 가끔 약재로 팔렸지만, 본질적으로는 쓸모없는 것이었다. 땅의 찌꺼기. 지질학적 부산물이자 자연의 노폐물. 상업 유정이 뚫리고 정제기술이 생기고나서야 고래를 잡아 기름을 얻던 시대가 가고 땅에서 연료를 뽑는 시대가 왔다.
그러다 내연기관이 등장했다. 석유를 태워서 동력을 만드는 시스템. 그 순간 수억 년간 쓸모없던 찌꺼기가 지구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고, 전쟁의 원인이 되는 자원으로 변모했고, 미국은 페트로달러를 통해 경제 패권을 장악했다. 찐득했던 그 물질 자체는 한 방울도 안 변했다. 달라진 건 오로지 그걸 소화할 수 있는 시스템이 나타난 것이다.
4.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들이쉬고 있는 공기의 약 21%가 산소다. 너무 당연해서 일상에서 인지하지 못하는 물질이다. 그런데 지구 역사 대부분의 시간 동안 산소는 대기에 거의 없었다. 약 24억 년 전, 시아노박테리아(cyanobacteria)라는 미생물이 광합성을 시작하면서 산소를 대량으로 뿜어냈다. 이걸 대산화 사건(Great Oxidation Event)이라고 부른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당시 지구 생물 대부분의 입장에서 이건 사건이 아니라 재앙이었다. 왜? 당시 생물 대부분은 혐기성이었다. 산소가 없는 환경에서 살도록 진화한 미생물인데, 이 생물들에게 산소는 독가스였다. 실제로 대산화 사건은 지구 역사상 최초의 대멸종 중 하나로 분류된다. 산소가 대기 중에 축적되면서 혐기성 생물이 대규모로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산소는 결국 오염물질이었다. 독이었다. 쓰레기였다.
그러다 호기성 생물이 나타났다. 산소를 호흡해서 에너지를 만드는 시스템. 그 시스템이 등장하는 순간, 수십억 년간 독가스였던 물질이 생명의 전제 조건이 됐다. 물질 자체는 O₂ 그대로다. 달라진 건 역시 그걸 소화할 수 있는 시스템의 등장.
패턴이 보이기 시작한다. (안 보인다면 한 번 더 한다.)
5.
2008년, 《와이어드 Wired》 매거진 편집장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이 「이론의 종말 The End of Theory」라는 글을 썼다. 부제가 특히 걸작이었다: “데이터의 홍수가 과학적 방법을 쓸모없게 만든다(The Data Deluge Makes the Scientific Method Obsolete).” 빅데이터가 충분히 크면 가설도, 모델도, 이론도 필요 없다. 상관관계만으로 충분하다.4) 학계는 즉각 반응했다.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는 2009년에 앤더슨이 과학도 과학적 방법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과학은 패턴을 찾는 게 아니라 패턴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2013년, 나심 니컬러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는 《와이어드》에 「‘빅데이터’의 큰 오류들을 경계하라 Beware the Big Errors of ‘Big Data’」를 기고했다. 빅데이터는 산업화된 체리피킹이다. 변수는 많은데 변수당 데이터 포인트는 적으니, 허위 상관관계가 실제 정보보다 빠르게 증가한다. 데이터가 많아질수록 소음이 더 빠르게 자란다.5)
둘 다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게다가 공유하는 전제도 있었다. 이 데이터는 읽을 수 없다. 너무 크고, 너무 지저분하고, 너무 구조가 없다. 모인 데이터는 인간이 소화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그래서 쓸모없다고 주장됐던 것이다.
그리고 2020년대 대규모 언어 모델(LLM)이 등장한다.
갑자기 “읽을 수 없는 데이터”가 “훈련 데이터”로 재분류됐다. 아무도 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던 그 거대한 텍스트 덩어리가 GPT의 원료가 됐다. 탈레브가 “소음”이라고 불렀던 것, 앤더슨이 “이론 없이도 충분하다”고 선언했던 것 둘 다 같은 대상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하나는 쓰레기라고 했고 하나는 금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금이 맞았지만, 그건 금이어서가 아니라 재료로 쓸 수 있는 방안이 도착해서였다.
6.
세 사례에서 쓰레기는 존재론적 범주가 아니라 시간적 범주다.
어떤 것이 ‘쓰레기’인 건, 그것 자체의 본질적 속성 때문이 아니다. 그걸 소화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석유에게는 내연기관이, 산소에게는 호기성 생물이, 빅데이터에게는 LLM이 그 시스템이었다. 쓰레기라는 판정 어디에도 물질 자체의 본질은 없다. 그렇다면 쓰레기는 결국 유통기한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석유는 수억 년 걸렸고, 산소는 수십억 년 걸렸고, 빅데이터는 십 년 걸렸다.
7.
자, 철학은 여기까지다. 사실 건축학교야말로 쓰레기 공장이다. 건축학과 학기 말 복도를 한 번이라도 본 적 있으면 알 거다. 스티로폼 가루, 우드락 자투리, 레이저커팅 아크릴 조각, CNC 밀링 후 남은 목재 분진, 본드 자국이 덕지덕지 붙은 폼보드, 발사우드 토막, 3D 프린팅 실패작. 한 학기에 스튜디오 하나가 배출하는 폐기물량을 정확히 측정한 사람은 없지만 체감상 상당하다. 학기 끝나면 복도에 모형 잔해가 쌓이고, 학교 청소 인력이 며칠에 걸쳐 치운다. 매 학기 반복적으로 거론되는 이 문제는 학과 내 심각한 민원이 됐다. 시설관리팀 입장에서 건축학과는 기피 대상이다.
그리고 매 학기, 누군가가 말한다. 이걸 줄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디지털 모델링으로 대체할 수 있지 않느냐고. 친환경 소재를 쓰면 되지 않느냐고. 이 논의가 반복되면서도 결론이 안 나는 이유가 있다. 건축 설계는 시뮬레이션이다. 시뮬레이션은 이터레이션(iteration)을 먹고 자란다. 1:50 모형을 한 번 만들어서 끝나는 게 아니라, 만들고, 부수고, 수정하고, 다시 만들고, 다시 부수는 과정 자체가 교육이다. 스케일 감각은 손으로 잘라봐야 생기고, 구조적 약점은 모형이 실제로 무너져봐야 보이고, 공간의 질은 빛을 직접 넣어봐야 판단할 수 있다. 매 이터레이션마다 폐기물이 나온다. 열 번 반복하면 열 배의 쓰레기가 나온다. 이걸 줄이려면 이터레이션을 줄여야 하고, 이터레이션을 줄이면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 양자택일이다.
비외른 롬보르(Bjørn Lomborg)와 그가 이끄는 코펜하겐 컨센서스(Copenhagen Consensus)가 기후 논쟁에서 반복적으로 펼치는 논점이 있다. 기후에 직접 투입되는 자원의 비용 대비 효용은 의외로 낮고, 같은 돈을 빈곤 퇴치·아동 영양·교육에 쓸 때 비용 대비 효과(ROI)가 훨씬 크다는 것이다.6) 영양 결핍과 교육 부재로 사라지는 인적 자본을 끌어올리는 쪽이, 장기적으로는 직접적 기후 개입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는 계산. 거칠게 풀면, 아동 영양을 충분히 개선해서 천만 명의 천재가 더 나온다면 그중 한 명이 기후 해결책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이 논리 구조는 건축학교 쓰레기에 정확히 적용될 수 있다. 건축학교에서 스티로폼 사용량을 10% 줄이는 것보다, 그 학교에서 양성한 건축가가 건물 수명을 10년 늘리는 구법을 개발하는 게 총량적으로 훨씬 많은 폐기물을 줄인다. 건축학교의 쓰레기는 투자다. 소량의 폐기물을 투입해서 대량의 폐기물을 줄일 수 있는 인재를 만드는 과정. 교육에서의 제로 폐기물은, 교육의 종말과 같은 말이다.
이 논리는 건축학교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성수동 팝업 하나가 열리고 닫히는 과정은 이렇다. 공간 임대 ― 인테리어 설치 ― 가벽, 패널, 현수막, 조명, 소품 설치 ― 운영, 평균 2-3주 ― 철거 — 1톤 트럭 분량의 폐기물. 다음 팝업 입주. 반복. 한국 건물의 평균 수명은 약 30년이다. OECD 국가 중 가장 짧은 축에 속한다. 영국 100년, 미국 55년, 일본 30-40년. 성수동 팝업은 그 30년짜리 사이클을 2주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뿐이다. 구조가 같다. 설치 — 운영 — 철거 — 재설치. 타임라인만 다르다. 30년이냐 2주냐. 규모만 다르다. 철근콘크리트냐 가벽이냐.
이 점에 비춰보면 오히려 모든 한국 건축이 같은 일을 하면서 영속적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인 셈이다. 아파트 분양 광고에 “랜드마크”라는 카피가 붙지만 30년 뒤에 재건축 조합이 결성될 전제를 가지고 있다. 팝업은 이 위선을 거부한다. “나는 2주 뒤에 없어집니다”라고 처음부터 선언한다. 팝업의 폐기물은 “문제”이고, 아파트 단지의 철거는 “개발”이다. 같은 행위에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 이게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이다.
성수동의 쓰레기가 한꺼번에 보이는 건 그래서다. 30년짜리 건물은 30년에 걸쳐 나눠 나올 뿐이다. 그리고 문제가 가시화되는 곳에서 솔루션이 먼저 나온다. 2주마다 철거가 일어나므로 2주마다 데이터가 나온다. 가벽 모듈화, 자재 표준 규격화, 철거 자재 순환 시스템. 실패해도 2주 뒤에 다시 시도할 수 있다. 30년짜리 건물에서는 꿈도 못 꿀 실험 반복의 속도다. 건축학교는 실험적 반복을 먹고 자란다고 했다. 성수동은 한국 건축의 시뮬레이션 환경이다. 쓰레기가 가장 많이 나오는 곳에서 쓰레기의 재해석이 가장 먼저 만들어진다.
사실 가장 정직한 진술은, 우리는 모른다는 것이다. 1톤 트럭에 실린 그 패널이 5년 뒤에도 1톤짜리 쓰레기일지, 아니면 무엇으로 환원될지 지금은 알 방법이 없다. 그러나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하는 건, 그것이 영원히 쓰레기로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판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도 성수동에서 팝업이 철거되고 있다. 1톤 트럭에 패널과 가벽, 현수막이 실린다. 지금 이 순간, 이것들은 쓰레기다.
아직은.
전재우
전재우는 하이퍼스팬드럴(HYPERSPANDREL)의 대표이자 건축가다. 하이퍼스팬드럴은 2021년부터 건축·전시·글쓰기·공간 개입을 넘나들며 한국 건조 환경의 제도적·경제적 조건을 비평적으로 다루고 있다. 관심의 대상은 건축의 본체를 넘어 그 부산물―잉여 공간, 파생 형식, 우연한 구축물―이며, 이를 독자적 문화 생산물로 다루는 데서 작업이 출발한다. 전시, 파빌리온, 퍼포먼스, 기념품 등을 매체 삼아 건축이 건물 너머에서 유통되는 방식을 추적한다. 현재 연세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2026/07/01
80호
- 1
- 환경부, 「전국 폐기물 통계조사」 2018, 2022. (원자료, 연도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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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민서, “[환경톡톡] 폐기물 문제 모르쇠 하는 팝업스토어”, 환경일보, 2024년 9월 6일. 바로가기
- 3
- 본 글에서 인용되는 지젝의 논점들은 아스트라 테일러(Astra Taylor)가 감독한 〈성찰하는 삶 Examined Life〉(2008) 및 지젝의 LSE 강연(2010) 등 여러 자리에서 반복적으로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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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 Anderson, “The End of Theory: The Data Deluge Makes the Scientific Method Obsolete”, Wired, 2008-06-23. 바로가기
- 5
- Nassim Nicholas Taleb, “Beware the Big Errors of ‘Big Data’”, Wired, 2013-02-08. 바로가기
- 6
- Bjørn Lomborg, Cool It: The Skeptical Environmentalist's Guide to Global Warming, New York: Alfred A. Knopf,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