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로
관리되는 몸, 웰니스라는 이름의 자기 착취
1. 새벽 다섯 시의 러닝화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로 일하면서 노동자 건강 상담을 한다. 건강진단 결과지를 앞에 두고 검사 결과를 함께 확인하는 일이다. 그 자리에서 많은 노동자는 자기 아침 루틴과 먹고 있는 영양제, 주말에 다니는 헬스장 이야기를 꺼낸다. 노동자 건강 단체 활동가로서 청년 여성 건강 문제와 관련해 진행한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러닝을 하고, 단백질 셰이크를 마시고, 출근 전 명상 앱을 켜는 이른바 ‘갓생러’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적 실천을 일종의 ‘웰니스’이자 건강을 위한 노력으로 묘사하는 데 익숙하다. “지금의 몸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 “더는 피곤해하고 싶지 않다” “완벽한 컨디션을 유지하고 싶다.”
아마도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혹자의 말을 빌리자면, ‘자기 관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이자 구원의 은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업무와 관계에 지친 이들이 건강기능식품 정기구독에 기대를 걸 때, 기업들은 직원 개개인의 혈당과 걸음 수, 심지어 웃은 횟수까지 추적하는 사내 복지 프로그램을 도입한다. 새벽 러닝 크루가 한강 변에서 인증샷을 찍고, 고가의 요가 스튜디오들이 ‘웰니스 라이프 스타일’을 표방할 때, 보험사들은 건강 점수에 따라 보험료를 차등화하는 상품을 내놓는다. 이런 현실에서 명상과 러닝을 통해 ‘더 나은 나’를 꿈꾸는 일은 그저 자연스럽다.
자기 관리의 언어는 언제나 지금의 나에 관한 판단, 더 나아질 미래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다. 이들이 경험하는 지금의 나에 관한 판단은 전형적이다. 만성적 탈진, 불안, 집중력 저하, 생리불순, 출근하기 싫음. 하지만 많은 경우 이들이 꿈꾸는 미래에 대한 소망은 소박하다. 완벽한 몸과 건강을 가지겠다는 마음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더 좋은 건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최소한 지금의 ‘가라앉는’ 상태를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몸 상태를 원한다.
30대 후반의 콜센터 상담원 A는 “대단한 몸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월요일 아침에 이불 속에서 울지 않기 위해” 몸 관리를 한다. 이들이 좇는 ‘웰니스’라는 관념은 결국 완벽한 건강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몸 때문에 더는 무너지고 싶지 않다는 소박한 바람인 셈이다. 야근과 과도한 업무로 인한 몸의 소진을 걱정하고, 불안정한 노동조건 속에서 삶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불안해하며 웰니스에 뛰어드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관리에 대한 열망에는 많은 경우 ‘뒤처짐’에 대한 공포가 은밀히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마지못해’ 웰니스 문화에 뛰어든 이들에게 발견되는 공통적인 정서는 현재의 삶에 대한 불안이다.
2. 헬시즘의 역설과 도덕이 된 몸
이러한 논의는 사실 진부하다. 전 세계적으로 노동 강도는 심화되고, 일자리는 불안정해지며, 국가가 책임져야 할 영역들이 점점 더 개인의 어깨 위로 옮겨지는 현실 속에서, 건강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상당 부분 변화했다는 진단은 여러 차례 제기되어왔다. 오늘날의 문화에서 건강은 ‘개인의 성실성과 도덕성을 증명하는’ 지표로 간주된다.
사회학자 로버트 크로퍼드는 1980년에 이러한 개념을 ‘헬시즘(건강 지상주의, healthism)’으로 명명했다. 헬시즘은 건강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을 넘어 ‘도덕적 의무’가 되어버린 문화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흥미롭게도 이 개념은 200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인용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인 통치 원리로 자리 잡은 시기와 겹친다. ‘사회적인 것’의 축소와 자기 책임 담론의 부상, 건강을 개인의 도덕적 성취로 번역하는 문화적 전환은 같은 사건의 다른 세 얼굴인 셈이다.
30대 초반 여성 B는 대형 병원 간호사로, 3교대 근무를 오 년째 이어오고 있다. 건강진단에서 수면장애와 생리불순 소견을 받은 그녀는 수면 앱과 여성 건강 앱을 사용하고, 영양제 구독 서비스를 통해 매달 건강기능식품을 구매하고 있다. 새벽 퇴근 후에도 러닝을 거르지 않는다는 그녀는 그런데도 더 피로해지는 것 같다며, 더 비싼 영양제와 더 정밀한 수면 추적 기기에 의지한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자신의 건강을 무너뜨리는 교대근무 자체는 건드릴 수 없는 조건으로 받아들인 채, 그 근무를 견디기 위한 관리에 또 다른 시간과 비용을 쏟아붓는 것. 병원의 현실상 야간노동은 피할 수 없지만, 그나마 덜 해로운 야간노동의 방식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현장에서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B는 과연 어떤 해결책에 기댈 수 있을까?
20대 후반 계약직 여성 C는 회사의 사내 웰니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어차피 복지로 제공되니 가벼운 마음으로” 웨어러블 기기를 받았지만, 이제는 걸음 수와 스트레스 지수가 기록되고 감시되며 경쟁의 지표로 활용된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공식적으로는 직원 복지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실증적 근거는 빈약하며, 실제로는 고용주가 직원의 신체와 정신, 심지어 기분까지 관리 대상으로 삼는 새로운 통제 장치로 기능한다. 일터의 스트레스 요인 자체는 건드리지 않은 채,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 개인의 회복탄력성만을 훈련하는 것이다. “계약 갱신이 얼마 안 남아서” 불안하다는 C에게, 웰니스라는 사내 복지가 열어주는 미래는 어떠한 모습일까?
1980년대 이후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복지국가의 축소와 건강 책임의 개인화, 전 세계적 건강 및 웰니스 산업의 부상을 이끈 핵심 동력이었다. 그런 점에서 불안과 피로에 휩싸인 몸에 대한 해법을 웰니스 산업에서 찾는 접근은, 자신의 조건을 악화시킨 구조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기묘한 실천이 된다.
“야간근무를 줄이세요” “스트레스를 덜 받으세요”라는 권고가 그 자체로는 의학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노동자가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이러한 권고는 결국 ‘당신의 건강은 당신 책임’이라는 기존 관념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몇몇 개인이 러닝과 명상으로 건강해질 수는 있겠지만, 악화하는 노동조건, 사회적 관계의 질 저하는 여전히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이 ‘남겨진 것들’은 계속해서 삶에 달라붙어 관리의 비용을 높이고 관련된 시장을 창출하는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경쟁에서 뒤처지는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웰니스 산업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기꺼이 지갑을 연다.
3. 보편성의 정치, 함께 건강할 수 있는 조건
어쩌면 우리는 개인적 차원의 합리적 실천과 사회적 차원의 비합리적 결과 간의 모순이라는, 자본주의에서 반복되어온 익숙한 문제와 다시 한번 마주한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웰니스와 자기 관리가 자기 착취일 뿐이고 관련 산업의 노예가 되는 것이라면, 모든 자기 관리를 내려놓는 것이 답일까? 역사적으로 자기를 돌보는 실천이 항상 억압적이거나 착취적으로 작동해온 것은 아니다. 미셸 푸코가 말한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본래 외부의 권력이 나를 규정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내 삶의 예술가가 되어 자신을 빚어나가는 윤리적 실천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다. 흑인 페미니스트 오드리 로드가 자기 돌봄을 “정치적 전쟁의 한 형태”라 부른 것도 같은 맥락 위에 있다. 차별과 소진의 조건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일은 체제에 복무하는 순응이 아니라, 체제에 포섭되지 않은 자신을 지켜내려는 해방적 실천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잠재력이야말로 오늘날 웰니스 산업이 전유해 상품화하고 있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문제는 자기 돌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누구의 언어로, 누구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는가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관리냐 포기냐 혹은 개인이냐 사회냐는 이분법적 선택에 놓여 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핵심은 현재 개별화되고 특권화된 형태로 이루어지는 건강과 자기 관리를 어떻게 집합적이고 보편적인 권리로 재구성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아닐까? ‘모두’의 이름으로 점유될 수 있는 텅 빈 자리로서의 보편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몇몇 이들의 특권으로 주어지던 보호와 권리라는 선택지가 모두가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로 제기된 것은 근대의 혁명적 아이디어였다. 현재 웰니스 산업 주변을 부유하는 ‘건강하고 멋진 삶’이라는 기표 역시, 소수만 이용 가능한 특권화된 상품과 서비스라는 선택지를 넘어 모두에게 제공되는 보편적 권리의 언어로 재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개인이 떠안는 식단 관리의 압박이 아니라, 학교와 직장의 급식을 양질의 공공 인프라로 재구성하는 것은 어떨까? 운동과 명상을 비싼 회원권으로 구매해야 할 상품이 아닌, 누구나 접근 가능한 도시의 공유지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도 가능할 것이다. 기업의 명상 앱 구독이 아니라 야간노동 규제와 노동 시간 단축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정신 건강 정책이라는 오래된 주장을 다시 진지하게 검토해볼 수도 있다. 청년 여성의 건강 문제를 개인의 ‘자기 관리’ 실패가 아니라 저임금·감정노동·돌봄 부담·주거 불안이 교차하는 구조의 문제로 재정의하고, 이를 사회정책의 의제로 올리는 사회운동은 어떤가? 건강을 개인의 책임과 선택에 의한 결과로 보기보다는 모두를 위한 제도와 권리의 문제로 재정의하는 이러한 실천들은, 새삼스럽지 않지만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보편성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재구성은, 개별적 탈출의 실천이라기보다는 ‘함께 남아 있기 위한 조건을 수선하는’ 실천에 가깝다. 누군가는 완벽한 몸으로 앞서나가고 다른 이는 ‘자기 관리에 실패한 자’로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각자의 취약함 속에서 함께 돌봄 받는 방법을 모색하기. 소수의 건강 최적화가 아닌 모두가 ‘함께 건강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고민하기.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에 대한 자신의 답에서 출발하되, 그 답이 나 혼자가 아니라 곁의 사람들과 함께 건강해지는 방향을 향하도록 ‘자기 관리’의 방향을 열어두기. 진료실에서 노동자 건강 문제를 마주하는 의사로서, 그리고 노동자가 더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오늘날 웰니스를 둘러싼 정치가 시작되어야 할 지점은 어쩌면 바로 여기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로 일하면서 노동자 건강 상담을 한다. 건강진단 결과지를 앞에 두고 검사 결과를 함께 확인하는 일이다. 그 자리에서 많은 노동자는 자기 아침 루틴과 먹고 있는 영양제, 주말에 다니는 헬스장 이야기를 꺼낸다. 노동자 건강 단체 활동가로서 청년 여성 건강 문제와 관련해 진행한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러닝을 하고, 단백질 셰이크를 마시고, 출근 전 명상 앱을 켜는 이른바 ‘갓생러’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적 실천을 일종의 ‘웰니스’이자 건강을 위한 노력으로 묘사하는 데 익숙하다. “지금의 몸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 “더는 피곤해하고 싶지 않다” “완벽한 컨디션을 유지하고 싶다.”
아마도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혹자의 말을 빌리자면, ‘자기 관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이자 구원의 은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업무와 관계에 지친 이들이 건강기능식품 정기구독에 기대를 걸 때, 기업들은 직원 개개인의 혈당과 걸음 수, 심지어 웃은 횟수까지 추적하는 사내 복지 프로그램을 도입한다. 새벽 러닝 크루가 한강 변에서 인증샷을 찍고, 고가의 요가 스튜디오들이 ‘웰니스 라이프 스타일’을 표방할 때, 보험사들은 건강 점수에 따라 보험료를 차등화하는 상품을 내놓는다. 이런 현실에서 명상과 러닝을 통해 ‘더 나은 나’를 꿈꾸는 일은 그저 자연스럽다.
자기 관리의 언어는 언제나 지금의 나에 관한 판단, 더 나아질 미래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다. 이들이 경험하는 지금의 나에 관한 판단은 전형적이다. 만성적 탈진, 불안, 집중력 저하, 생리불순, 출근하기 싫음. 하지만 많은 경우 이들이 꿈꾸는 미래에 대한 소망은 소박하다. 완벽한 몸과 건강을 가지겠다는 마음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더 좋은 건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최소한 지금의 ‘가라앉는’ 상태를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몸 상태를 원한다.
30대 후반의 콜센터 상담원 A는 “대단한 몸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월요일 아침에 이불 속에서 울지 않기 위해” 몸 관리를 한다. 이들이 좇는 ‘웰니스’라는 관념은 결국 완벽한 건강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몸 때문에 더는 무너지고 싶지 않다는 소박한 바람인 셈이다. 야근과 과도한 업무로 인한 몸의 소진을 걱정하고, 불안정한 노동조건 속에서 삶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불안해하며 웰니스에 뛰어드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관리에 대한 열망에는 많은 경우 ‘뒤처짐’에 대한 공포가 은밀히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마지못해’ 웰니스 문화에 뛰어든 이들에게 발견되는 공통적인 정서는 현재의 삶에 대한 불안이다.
2. 헬시즘의 역설과 도덕이 된 몸
이러한 논의는 사실 진부하다. 전 세계적으로 노동 강도는 심화되고, 일자리는 불안정해지며, 국가가 책임져야 할 영역들이 점점 더 개인의 어깨 위로 옮겨지는 현실 속에서, 건강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상당 부분 변화했다는 진단은 여러 차례 제기되어왔다. 오늘날의 문화에서 건강은 ‘개인의 성실성과 도덕성을 증명하는’ 지표로 간주된다.
사회학자 로버트 크로퍼드는 1980년에 이러한 개념을 ‘헬시즘(건강 지상주의, healthism)’으로 명명했다. 헬시즘은 건강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을 넘어 ‘도덕적 의무’가 되어버린 문화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흥미롭게도 이 개념은 200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인용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인 통치 원리로 자리 잡은 시기와 겹친다. ‘사회적인 것’의 축소와 자기 책임 담론의 부상, 건강을 개인의 도덕적 성취로 번역하는 문화적 전환은 같은 사건의 다른 세 얼굴인 셈이다.
30대 초반 여성 B는 대형 병원 간호사로, 3교대 근무를 오 년째 이어오고 있다. 건강진단에서 수면장애와 생리불순 소견을 받은 그녀는 수면 앱과 여성 건강 앱을 사용하고, 영양제 구독 서비스를 통해 매달 건강기능식품을 구매하고 있다. 새벽 퇴근 후에도 러닝을 거르지 않는다는 그녀는 그런데도 더 피로해지는 것 같다며, 더 비싼 영양제와 더 정밀한 수면 추적 기기에 의지한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자신의 건강을 무너뜨리는 교대근무 자체는 건드릴 수 없는 조건으로 받아들인 채, 그 근무를 견디기 위한 관리에 또 다른 시간과 비용을 쏟아붓는 것. 병원의 현실상 야간노동은 피할 수 없지만, 그나마 덜 해로운 야간노동의 방식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현장에서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B는 과연 어떤 해결책에 기댈 수 있을까?
20대 후반 계약직 여성 C는 회사의 사내 웰니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어차피 복지로 제공되니 가벼운 마음으로” 웨어러블 기기를 받았지만, 이제는 걸음 수와 스트레스 지수가 기록되고 감시되며 경쟁의 지표로 활용된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공식적으로는 직원 복지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실증적 근거는 빈약하며, 실제로는 고용주가 직원의 신체와 정신, 심지어 기분까지 관리 대상으로 삼는 새로운 통제 장치로 기능한다. 일터의 스트레스 요인 자체는 건드리지 않은 채,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 개인의 회복탄력성만을 훈련하는 것이다. “계약 갱신이 얼마 안 남아서” 불안하다는 C에게, 웰니스라는 사내 복지가 열어주는 미래는 어떠한 모습일까?
1980년대 이후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복지국가의 축소와 건강 책임의 개인화, 전 세계적 건강 및 웰니스 산업의 부상을 이끈 핵심 동력이었다. 그런 점에서 불안과 피로에 휩싸인 몸에 대한 해법을 웰니스 산업에서 찾는 접근은, 자신의 조건을 악화시킨 구조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기묘한 실천이 된다.
“야간근무를 줄이세요” “스트레스를 덜 받으세요”라는 권고가 그 자체로는 의학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노동자가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이러한 권고는 결국 ‘당신의 건강은 당신 책임’이라는 기존 관념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몇몇 개인이 러닝과 명상으로 건강해질 수는 있겠지만, 악화하는 노동조건, 사회적 관계의 질 저하는 여전히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이 ‘남겨진 것들’은 계속해서 삶에 달라붙어 관리의 비용을 높이고 관련된 시장을 창출하는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경쟁에서 뒤처지는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웰니스 산업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기꺼이 지갑을 연다.
3. 보편성의 정치, 함께 건강할 수 있는 조건
어쩌면 우리는 개인적 차원의 합리적 실천과 사회적 차원의 비합리적 결과 간의 모순이라는, 자본주의에서 반복되어온 익숙한 문제와 다시 한번 마주한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웰니스와 자기 관리가 자기 착취일 뿐이고 관련 산업의 노예가 되는 것이라면, 모든 자기 관리를 내려놓는 것이 답일까? 역사적으로 자기를 돌보는 실천이 항상 억압적이거나 착취적으로 작동해온 것은 아니다. 미셸 푸코가 말한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본래 외부의 권력이 나를 규정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내 삶의 예술가가 되어 자신을 빚어나가는 윤리적 실천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다. 흑인 페미니스트 오드리 로드가 자기 돌봄을 “정치적 전쟁의 한 형태”라 부른 것도 같은 맥락 위에 있다. 차별과 소진의 조건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일은 체제에 복무하는 순응이 아니라, 체제에 포섭되지 않은 자신을 지켜내려는 해방적 실천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잠재력이야말로 오늘날 웰니스 산업이 전유해 상품화하고 있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문제는 자기 돌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누구의 언어로, 누구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는가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관리냐 포기냐 혹은 개인이냐 사회냐는 이분법적 선택에 놓여 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핵심은 현재 개별화되고 특권화된 형태로 이루어지는 건강과 자기 관리를 어떻게 집합적이고 보편적인 권리로 재구성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아닐까? ‘모두’의 이름으로 점유될 수 있는 텅 빈 자리로서의 보편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몇몇 이들의 특권으로 주어지던 보호와 권리라는 선택지가 모두가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로 제기된 것은 근대의 혁명적 아이디어였다. 현재 웰니스 산업 주변을 부유하는 ‘건강하고 멋진 삶’이라는 기표 역시, 소수만 이용 가능한 특권화된 상품과 서비스라는 선택지를 넘어 모두에게 제공되는 보편적 권리의 언어로 재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개인이 떠안는 식단 관리의 압박이 아니라, 학교와 직장의 급식을 양질의 공공 인프라로 재구성하는 것은 어떨까? 운동과 명상을 비싼 회원권으로 구매해야 할 상품이 아닌, 누구나 접근 가능한 도시의 공유지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도 가능할 것이다. 기업의 명상 앱 구독이 아니라 야간노동 규제와 노동 시간 단축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정신 건강 정책이라는 오래된 주장을 다시 진지하게 검토해볼 수도 있다. 청년 여성의 건강 문제를 개인의 ‘자기 관리’ 실패가 아니라 저임금·감정노동·돌봄 부담·주거 불안이 교차하는 구조의 문제로 재정의하고, 이를 사회정책의 의제로 올리는 사회운동은 어떤가? 건강을 개인의 책임과 선택에 의한 결과로 보기보다는 모두를 위한 제도와 권리의 문제로 재정의하는 이러한 실천들은, 새삼스럽지 않지만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보편성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재구성은, 개별적 탈출의 실천이라기보다는 ‘함께 남아 있기 위한 조건을 수선하는’ 실천에 가깝다. 누군가는 완벽한 몸으로 앞서나가고 다른 이는 ‘자기 관리에 실패한 자’로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각자의 취약함 속에서 함께 돌봄 받는 방법을 모색하기. 소수의 건강 최적화가 아닌 모두가 ‘함께 건강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고민하기.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에 대한 자신의 답에서 출발하되, 그 답이 나 혼자가 아니라 곁의 사람들과 함께 건강해지는 방향을 향하도록 ‘자기 관리’의 방향을 열어두기. 진료실에서 노동자 건강 문제를 마주하는 의사로서, 그리고 노동자가 더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오늘날 웰니스를 둘러싼 정치가 시작되어야 할 지점은 어쩌면 바로 여기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공동대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의사이지만, 사회적 고통을 의료나 건강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회의적이다. 상업화·산업화되어 가는 건강관리 생태계 바깥에서, 노동자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조건을 만드는 일에 함께해왔다. 비정규직·작은 사업장·이주·여성 노동자의 건강권 활동에 중점을 두고 있다. 지금은 청년 여성 노동자들이 마주한 현실 앞에서 이를 개선하는 방향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묻고 듣는 중이다.
이 글은 답하지 못한 질문들에서 시작되었다. 일터에서 다치고 지친 노동자들이 진료실에서 묻는 것은 대개 영양제나 운동 등 개인적 해결 방법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고통의 근원은 장시간 노동, 불안정한 고용, 자기 통제권 없는 업무, 권위적이고 고립된 직장 문화에 있다. 개인의 처방으로 메울 수 없는 자리에서 무어라 답해야 할지 늘 망설인다. 글을 마치고도 답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다만 함께 묻고 함께 고민하고 모색해나가는 것에서부터 길이 열릴 것이라는 예감, 그 작은 믿음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다.
2026/07/01
8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