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월. 유정의 마음은 한여름 과일처럼 부풀었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몸은 학교에 둔 채 마음은 둥실둥실, 산으로 들로 바다로 날아갔다. 붙들고 있으면 어디 한두 군데가 폭삭 썩어버릴 것만 같았다.
  놀러 가고 싶다. 떠나고 싶다.
  유정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기에 친구들은 ‘쟤 또 역마살 도졌구나’ 하며 가볍게 넘겼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지구의 이곳저곳. 여기가 아닌 거기가 강한 힘으로 끌어당기는 기분. 유정은 잠을 설쳤고 입맛도 없었다. 심장이 난데없이 뛰고 배가 살살 아팠으며 괜한 짜증이 늘었다. 남들 다 겪고 지나간 사춘기가 이제야 오나. 유정아, 너 내년이면 성인이야. 다 늙어서 왜 이러니. 스스로를 진정시켜봐도 잘되지 않았다.
  6월 모의고사 전에 딱 하루라도 좋으니, 아니 하루는 너무 짧고, 1박 2일만.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할 테니 어디로든 가고 싶었다. 어떤 밤의 꿈속에서는 울기까지 했다. 그 눈물이 치성이 되어 하늘에 닿은 걸까. 유정에게 천금의 기회가 왔다. 수목원 생태 탐방 프로그램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눈여겨보았을 것 같지 않은 교육청 주관의 캠프였다. 재미보다는 의미에, 휴식보다는 지식에 방점이 놓이는 3박 4일이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유정은 홀린 듯이 신청서를 썼다.

선발 인원은 학교당 한 명이었다. 유정의 담임은 후배들에게 양보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유정은 준비한 대답을 했다. 생기부에 꼭 넣고 싶은 활동이어서요. 담임은 신청서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행정학과 가겠다면서 생태 탐방이 꼭 필요하니? 너는 등급이 애매해서 정시도 챙겨야 한다고 학기 초부터 말했잖니? 유정의 머릿속에 담임의 압박 질문이 시뮬레이션으로 돌아갔다.
  뜻밖에도 담임은 치사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 꼭 가고 싶으면 가야지. 말한 다음 도장을 찍어주었다. 동그란 원에 들어간 담임의 한자 이름 세 글자를 유정은 가만히 보았다. 눈시울까지 붉히면서. 누가 보면 대학 붙은 줄 알겠다고 옆 반 담임이 놀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정은 담임에게 충성을 다하기로 했다. 수목원 기념품 숍에서 제일 멋진 굿즈를 구해 조공하리라, 마음먹었다. 유정은 안내문에 볼드체로 적힌 수목원의 이름을 주문처럼 되뇌며 얇고 거칠한 중질지를 품에 안았다.

여벌 옷과 속옷, 양말, 세면도구, 수건, 필기구, 비염약, 치약, 칫솔…… 유정은 필요한 물건을 꼼꼼히 챙긴 다음에 사치품도 하나 챙겼다. 아빠의 위스키잔이었다. 아랫면 가운데가 반구체 형태로 볼록하게 튀어나온 술잔. 전용 나무 받침대 위에 올려서 돌리면 팽그르르 돌아갔다. 잔 속의 얼음과 액체가 회전하면 테이블에 영롱한 무늬가 새겨졌다. 유정은 캠프 기간에 한 번은 그 잔을 쓸 셈이었다. 보리차가 위스키와 색깔이 비슷하니 기분을 내기에 괜찮을 것 같았다. 혹시나 누가 이상하게 쳐다본다면 그 시선을 즐기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가뿐하고 빈틈없이 꾸려진 유정의 가방 속을 침범한 건 할머니의 손이었다. 유정이 현관에 앉아 신발을 신는 사이에 할머니는 옥수수 두 개가 담긴 지퍼백을 가방에 쑥 집어넣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집합 장소인 교육청으로 가는 시내버스 안에서였다. 가방을 끌어안고 잠시 눈을 붙이려다 ‘가방이 왜 이리 뜨끈하지?’ 생각했고 옥수수를 발견한 것이었다. 짜증이 나기도 하였으나 할머니가 귀엽기도 해서 유정은 피식 웃고 가방을 닫았다. 보리차 위스키와 옥수수. 나쁘지 않겠는데.


2

45인승 관광버스 안에서는 들뜬 마음도 잠이 들었다. 처음 보는 어색한 얼굴들. 아직 통성명도 하지 못한 채 같은 목적지를 향해 실려 가는 서른여섯 명의 소녀와 소년들. 개중에는 벌써 인사를 나누고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리다 이따금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얼떨결에 버스 맨뒤의 가운데 자리에 앉게 된 유정은 이어폰을 꽂은 채 다른 학교에서 온 아이들을 구경하다가, 이 중에 3학년이 또 있을까, 그애랑 친구가 될 수도 있을까, 생각했다. 여기서 굳이 친구를 만들 필요가 있나. 스스로가 이상했다. 평화로운 것을 생각하자. 수목원에서 보게 될 이름 모를 풀과 나무,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다. 짧고 달콤한 잠. 그리고 돌연히 깼다.
  유정이 탄 버스 앞으로 포터 트럭이 갑자기 끼어들었고 버스 기사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유정의 몸이 앞으로 크게 쏠렸다가 안전벨트에 붙들렸다. 문제는 가방이었다. 가방은 중앙 통로를 힘차게 미끄러졌다. 인솔 교사가 제지할 틈도 없이 유정은 안전벨트를 풀고 가방을 주우러 갔다. 버스 기사의 경적 소리에 화가 난 포터 운전자의 보복 운전 탓에 유정은 가방이 있는 곳까지 거의 굴러갔다. 부끄럽고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는데 눈앞에 가무잡잡한 얼굴이 나타났다.
  “괜찮으세요?”
  까만 눈동자에 담긴 걱정에는 조금의 비웃음도 없었다. 유정은 큰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생각했다.
  어? 너는?
  그리고 그 아이도 이렇게 말했다.
  “유정 언니? 맞죠!”

선영이.
  유정은 꽤 오랫동안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주룩주룩 울었다.

첫 만남은 유치원 소풍날이었다. 한유정과 현선영은 인원이 홀수였던 기린반과 사슴반의 마지막 이름들이었고 원장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짝이 되었다. 내 동생이면 좋겠다. 유정은 선영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을 했다.
  얼굴이 팽팽해질 정도로 머리를 당겨 포니테일로 묶은 유정과 달리 선영은 눈썹 선에 맞춰 앞머리를 정리한 바가지 머리였다. 날카로운 느낌이 드는 자신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던 유정이었지만 무심한 얼굴로 귀여운 선영에게는 그저 항복이었다. 마음을 홀딱 빼앗긴 유정은 선영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지나온 인생 모든 순간에 선영이 함께 있었던 것 같았다.
  둘은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동물 소리를 내고 나란히 앉아 김밥을 먹고 물을 마셨다. 마차에 나란히 앉아 회전목마를 탔고 대관람차에서도 같은 칸에 들어갔다. 그날 찍은 사진 일곱 장에는 유정이 선영을 꼭 껴안고 있는 장면이 담겼다. 유정은 의심의 여지 없이 활짝 웃고 있었고, 유정의 턱에 이마를 눌린 선영은 좋으면서도 아픈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소풍이 끝나고 밤이 되었을 때 유정은 선영이 보고 싶어 늦도록 울었다. 가슴을 토닥이는 엄마의 손길도 허전하기만 했다. 내게도 동생이 있었으면. 나도 누군가의 언니였으면. 생각하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유정이 선영을 다신 만나지 못하고 그리하여 소풍의 기억이 유정의 마음에 일생의 그리움이자 찰나의 찬란한 추억으로 남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풍이 끝난 뒤에도 유정과 선영은 같은 유치원을 다녔다. 그리고 여름이 오기 전에 선영의 가족이 유정의 아래층으로 이사를 왔다. 907호와 807호의 딸들이 된 둘은 유정이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꼭 붙어다녔다. 동네 사람들이 ‘두 쌍의 부모가 딸 둘을 함께 키운다’ 할 정도로 서로의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날들은 어느 날 뚝, 끝났다. 처음 듣는 이름의 질병과 함께 온 세상이 멈춰버렸던 겨울에 선영의 가족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야밤도주? 유정은 아버지가 말한 단어를 그렇게 따라했다. 밤이 아니고 반. 어머니가 고쳐주었다. 그러면 뭔가 다른 뜻이 되나 하고 기대를 걸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유정은 더 크게 실망했다. 유정은 유치원 소풍날의 밤보다 더 크게 더 오래 울었다.

버스 뒷자리로 돌아간 유정은 도착할 때까지 선영만 보았다. 선영은 휴대폰을 보는지 책을 읽는지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딱히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한번 돌아봐주지. 그러면 나도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 텐데. 그렇게 시간을 건널 수 있을 텐데. 유정의 아쉬움과는 무관하게 버스는 그대로 수련관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때에야 유정은 아침에 받은 활동기록장에 방 배정이 나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부랴부랴 확인했다.
  107호: 한유정, 현선영.
  유정은 그 우연을 보고도 믿기지 않아서 평소에 좋아하지 않던 운명이라는 단어까지 떠올렸다. 책장을 덮었다가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다시 펼쳤다. 두 사람의 이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인솔 교사에게 몸 상태를 확인받느라 유정은 선영보다 늦게 방에 갔다. 호실 번호에서 숫자 7만 금색 칠이 벗겨져 있었다. 어떤 예감을 느낀 유정은 문고리를 손에 쥔 채 잠시 심호흡을 했다. 막상 문을 열면 선영이 거기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어린 유정과 선영이 머리를 풀고 주사위를 굴리며 놀고 있을 것도 같았다.
  방에서 인기척이 났다. 놀란 유정은 자기도 모르게 문을 벌컥 열었다. 문 안쪽에는 선영이 서 있었다.
  “아, 언니.”
  그렇게 말하고 선영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낡은 화장실 문이 삐걱거리며 닫혔다. 경첩에서 나는 불쾌한 소리가 멎고, 유정은 문득 선영이 이 방에 없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왜 자꾸 이런 생각이 들까. 그건 선영에게서 느껴지는 낯선 기운 때문이었다. 오 년이면 잘 알던 사람도 못 알아보고 지나칠 만했지만 못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 같은 데서는 몇십 년 동안 쌓인 시간의 벽도 한순간에 무너지던데. 아니 그렇다고 우리가 진짜 자매는 아닌 거니까. 아, 언니. 말하던 선영의 말투와 표정을 다시 떠올리며 유정은 조금 더 가라앉았다. 내가 어색할 수 있지. 그 사이에 선영도 많은 일을 겪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유정의 머릿속에 몇 번의 ‘그래도’가 지나갔을 때 선영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유정은 아무렇지 않은 척 짐을 풀었다. 선영도 자신의 가방을 올려둔 침대 쪽으로 갔다. 아니. 선영은 유정에게 다가갔다. 유정의 뒤에서 배를 감싸고 꼭 안았다. 유정은 깜짝 놀랐지만 잘 참고 선영의 깍지 낀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리고 선영이 하는 말을 들었다.
  “우리 지금 만나면 안 되는 건데. 그쵸?”

그런데 선영아. 너 왜 자꾸 나한테 존댓말을 쓰니? 유정은 그런 게 궁금했다.
  “바르셀로나에서 만나기로 했잖아요.”
  뭐? 어디? 유정은 몸을 돌려 선영을 마주보았다. 안 쓰던 존댓말도 모자라서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니. 선영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기억 안 나요?”
  기억이라면, 났다. 선영이 열 살 생일에 받은 지구본을 돌리며 놀던 가을의 오후. 두 사람은 별처럼 많은 도시의 이름들 사이에서 다섯 글자로 된 지명 하나를 발견했다. 어린이의 구강 구조로는 유려하게 발음하기 쉽지 않았던, 바르셀로나였다. ‘바르, 셀로나’라고 한 건 유정, ‘바르셀, 로나’라고 한 건 선영이었다. 둘 다 자연스러운 발음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두 사람은 자신들이 낸 소리 중에 반드시 답이 있을 거라 생각했고 몇 분을 티격태격했다.
  그리고 이 년이 흘러 선영이 떠나면서 남긴 편지에는 이런 문장들이 적혔다.
  언니. 우리 바르셀로나에서 만나자.
  누구 발음이 더 진짜 같은지 확인하러 가자.
  내가 먼저 가 있을게.

유정의 기억이 다 돌아왔다. 이것 봐. 마지막 편지에서도 넌 나한테 반말 썼다니까? 그렇지만 유정은 선영이 쓰는 존댓말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선영은 바르셀로나 생각에 꼭 붙들린 것처럼 보였다. 이미 그곳으로 떠난 것 같았다.
  너에게 그렇게 중요한 곳이라면.
  내가 잘못한 걸까. 조금만 참았다면. 그랬다면 우연이 우리를 이곳이 아니라 그곳, 바르셀로나에서 만나게 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너를 실망시켰구나. 때에 맞지도 않은 여행을 가겠다고 무리를 하는 바람에. 무리를 하면 부러진다. 그건 우리 할머니의 말. 아, 할머니. 선영이 너 할머니가 주는 간식이라면 뭐든 좋아했지?
  유정은 가방을 열었다. 그런데 없었다. 가방 속에서 제일 먼저 손에 잡혀야 할, 옥수수가 사라진 것이었다. 아빠의 위스키잔과 함께.


3

유정의 오른 손목 안쪽에는 흉터가 있다. 크기는 작지만 다쳤을 때 피하지방층이 보일 정도로 상처가 깊게 나서 살이 다시 차오르는 동안 조금 볼록하게 튀어나온 모양이 되었다. 다친 곳은 수영장이었다. 삼복더위 중의 어느 하루. 야외수영장에서 네 시간을 놀고 물에 불은 몸으로 탈의실에 달려가던 유정과 선영은 다리 길이 차이 때문에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조급해진 선영이 유정에게 손을 뻗었고 그 순간, 선영이 예쁘게 기르고 있던 검지 손톱이 유정의 손목을 할퀴고 말았다.
  선영이 엉엉 울었다. 유정은 괜찮아, 괜찮아, 말하며 선영을 달랬다. 손목을 쥐고 있던 왼손을 펼쳐보니 500원 크기의 선혈이 고여 있었다. 그걸 보는 선영의 마음이란, 괜찮지만은 않았다.
  상처는 오래갔다. 열한 살 유정의 몸. 어지간한 부상은 금세 나았지만 그 상처는 달랐다.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고 꼼꼼히 소독을 해도 나을 기미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아팠다. 다친 자리의 색깔도 어딘가 꺼림칙해졌다. 그렇게 되도록 유정은 부모님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유정도 선영도 혼내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유정은 요령껏, 어쩌면 필사적으로, 상처를 감추었다. 그러다 그 여름이 끝날 즈음 상처에 고름이 고였다. 유정은 고열로 끙끙 앓았다. 수액 한 병과 항생제의 힘을 빌리자 곧 나았다.

유정은 상처가 낫는 과정을 선영이 모르게 했다. 선영이 조금의 미안함도 갖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병원의 도움을 받고 나니 어딘지 모르게 허탈해졌다. 그간의 노력이 덧없게 느껴졌다. 그런 한편, 정말 아무것도 모를 수가 있어?, 선영에게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 때문에 유정은 선영 앞에서 펑펑 울었다. 숨기고 싶었던 마음. 잠그고 싶었던 눈물. 유정은 자신이 어디까지 잘 해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흉터가 옛날처럼 욱신거리고 쓰라렸다. 아니나 다를까. 피가 맺혀 있었다. 언제 또 다쳤지? 옆 학교에 다니는 친구 방에 다녀온다던 선영은 취침 시간이 가까워오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유정은 불도 끄지 않은 채 잠에 빠졌다.
  새벽 2시. 유정은 선영이 남긴 쪽지를 손에 들고 어두운 방에 서 있었다. 유정의 머릿속은 꿈과 현실이 뒤섞인 듯했다. 모든 것은 예정대로. 유정은 홀린 듯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퉁. 107호의 철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그 문을 다시는 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감. 하지만 유정은 걸음을 옮겼다. 여행을 막 시작한 기분이었다.

어디로 가야 선영을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하기 전에 유정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복도 끝의 창문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사락사락. 밤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사이에 사람의 목소리가 섞여든 듯도 했다. 유정은 그쪽으로 걸었다. 창문을 넘어서 밖으로 나갔다. 초여름이어도 깊은 밤이라 조금 쌀쌀했다. 걸칠 만한 옷이라도 하나 챙겨서 다시 나올까. 유정은 창문 쪽으로 돌아섰다. 그 사이에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몇 개 켜져 있던 복도의 형광등도 다 꺼져서 건물 내부가 어두컴컴했다. 될 대로 되라지. 유정은 소름이 올라오는 팔을 문지르며 건물을 등지고 섰다. 이번에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것 같았다. 밤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 너머로 보이는 작은 언덕. 그 위의 노란 불빛. 유정아, 저기에 선영이 있다. 나이를 먹은 유정이 어린 유정에게 보내는 계시 같았다.

길잡이도 있었다. 불빛처럼 노란색으로 빛나는 뱀이었다. 유정의 팔뚝 정도의 길이에 유정의 손가락 마디처럼 가느다란 뱀. 뱀은 혀를 날름거리며, 쉭쉭 소리도 내며, 유정을 이끌었다. 그뒤를 따라가는 유정의 걸음이 바빴다. 걸음과 뜀 사이 어딘가의 속도와 자세로 유정은 뱀을 쫓았다. 호흡이 차오르고 정신은 맑아졌다. 유정은 눈앞의 노란 뱀이 낮에 들었던 ‘우리 수목원의 식생’ 시간에 본 적이 없는 종류라는 걸 생각했다. 그 사실이 유정을 조금 불안하게도 하였으나 길쭉하고 매끈하게 8자를 그리는 뱀의 걸음걸이에 시선과 마음을 자꾸만 뺏겼다.
  유정은 선영을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품에 꼭 안을 때마다 선영의 정수리가 유정의 코에 닿았더랬다. 봄 햇살이 머물러 고소하고 바삭한 냄새가 나던 선영의 조그맣고 뽀얀 정수리. 그래서였을까. 선영의 가족이 떠난 뒤로 선영과의 날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쨍하니 맑은 낮의 순간만 기억이 났다. 밤의 선영. 어둠 속의 선영. 습기에 잠긴 선영. 차가운 선영. 그런 선영은 어떤 선영일까. 유정이 생각을 주워담으며 걷는 사이 노란 뱀은 일정한 속도로 숲을 지나고 언덕을 올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불빛 아래에 유정을 데려다 놓았다.
  “고마워.”
  유정은 뱀에게 인사를 했다. 뱀이 유정을 향해 다가왔다. 유정의 다리를 감고 올라 등을 타고 목덜미를 돌아서 오른팔로 내려왔다. 도착한 곳은 유정의 손목이었다. 뱀은 차가운 혀를 내밀어 유정의 상처를 핥았다. 유정은 뱀이 길을 알려준 값을 받아 갔다고 생각했다. 얼마간 그렇게 있다가 뱀은 땅으로 소리 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왔던 길을 거슬러, 예의 8자를 그리며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유정은 불빛을 올려다보았다. 오른 손목을 만져보니 피가 멎어 있었다.

불빛은 가까이서 보니 주황색에 가까웠다. 돌로 지은 성당의 첨탐 바로 아래의 창문에서 나오고 있었다. 무척 밝아서 주위의 어둠을 꽤나 환하게 밝혔다. 빛이 닿은 곳에 무지개색으로 칠한 대관람차와 백마와 흑마가 오르내리며 돌아가는 회전목마가 보였다. 고개를 들어 첨탑을 바라보았다. 있을까. 선영이. 저기에.
  유정은 성당으로 들어갔다. 나무로 된 문은 무척 무거워서 온몸으로 밀어야 열렸다. 문 안쪽에는 유정이 상상했던 예배당이 아닌 작은 로비와 벤치 하나, 그리고 고어텍스 등산복을 갖춰 입은 중년의 여자 한 명이 있었다. 상하의가 모두 검은색인데 티셔츠 옷깃만 흰색이었다. 그녀는 유정이 로비 중앙까지 걸어들어가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놀란 기색도 반기는 기색도 없었다. 그럼에도 유정은 그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느꼈다.
  “위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여자는 유정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앉아 있는 여자와의 눈높이 차이 때문에 유정은 자신의 키가 갑자기 3센티미터쯤 커진 기분이었다.
  “잊은 거 없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목소리. 유정은 그녀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 가만히 유정을 쳐다보던 여자는 발치에 있던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렸다. 가방이 열리고 그 속에서 나온 것은 위스키잔이었다. 유정이 챙겨왔던 것과 똑같은. 유정이 그것을 받자 여자는 그 안을 진한 보리차 색깔의 액체로 채웠다. 유정의 아버지가 마시던 술과 비슷한 향이 났다.
  “마셔. 버번이야.”
  저 미성년자인데요. 하지만 유정은 잔의 4분의 1 정도 들어 있는 술을 훌쩍 마셨다. 먹을 만했다. 아니 곧바로 생각이 바뀌었다. 이런 걸 대체 왜 먹지? 그런데 묘하게 은은하게 그리운 맛이 나는 건 왜일까.
  “느껴지니?”
  “뭐가요?”
  “옥수수맛 말이야.”
  옥수수?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술맛을 어떻게 알아. 유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가 처음으로 웃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정의 손을 잡고 벽으로 데려갔다. 센서등이 켜지고 벽이 열리더니 엘리베이터가 나왔다. 유정은 손에 위스키잔을 꼭 쥐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여자와 인사를 나누자 문이 닫혔다.

버튼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엘리베이터가 위로 움직였다. 그저 올라간다는 느낌만 있을 뿐 층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시간과 세월을 거쳐 영원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즈음,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유정은 침을 꼴깍 삼켰다. 문이 열릴까. 유정은 선영에게 하고픈 말을 골랐다. 나는 여행을 하고 있어. 즐겁고도 그리운 이 여행은 모험과도 같아서.
  “덜컹.”
  그리고 철컥. 문에서 소리가 났다. 저 너머에 선영이 있을까. 이제는 정말 만날 수 있을까. 문이 열렸다. 유정의 눈 속으로 엄청난 양의 빛이 쏟아져들어왔다. 유정은 손 그늘을 만들어 안쪽을 보았다. 몇 명의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장례식인지 혼인식인지 알 수 없는 의식을 하고 있었다. 유정은 눈을 감았다. 귓전으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들었다. 아득하게 아련하게 들리는 가사는 ‘世界の約束(세카이노 야쿠소쿠; 세계의 약속)였다.


4

알람 소리. 유정은 눈을 떴다. 알람은 선영의 전화에서 울리고 있었다. 유정이 꿈속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멜로디와 목소리였다. 선영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편안히 잠에 빠져 있었다. 유정은 침대에 걸터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얼굴을 가볍게 두드려도 봤다. 이곳은 틀림없이 107호. 저기 곤히 잠든 아이는 분명히 선영이. 나의 동생, 선영이.
  유정은 선영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선영의 머리맡에는 위스키잔과 반쯤 먹은 옥수수가 놓여 있었다. 잔을 들어보니 버번 향이 났다. 유정은 뭔가 생각난 듯 손목을 감싸쥐었다. 팔딱팔딱. 정직하고 빠르게 뛰는 맥박. 선영이 눈을 떴다. 두 사람, 시선이 부딪히고.
  “여행은 어땠어?”
  선영 물었고,
  “즐거웠어.”
  유정 답했다.

강석희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쓴 책으로 소설집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장편소설 『꼬리와 파도』 『내일의 피크닉』 등이 있다.

저와 함께 모험 같은 소풍을 다녔으나 흐르는 시간만큼 멀어진 이들을 떠올리며 썼습니다. 나는 너를 자주 그리워합니다.

2025/05/07
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