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교환
어른 없는 만화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되는 걸까요? 높게만 느껴졌던 천장에 머리가 가까워지고, 해마다 나이를 먹어가지만 문득 삶의 일부는 어떤 시기에 머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번 호 ‘비평 교환’에서는 두 비평가가 각각 영화와 출판만화에 나타난 청소년(성)의 재현을 살피고, ‘성장’이라는 기준을 다시 돌아봅니다.
“세상은 항상 고등학교 같을 거야.”
―하이메 에르난데스, 『사랑에 서툰 사람들 Love Bunglers』
어른다운 어른을 본 기억이 얼마 없다. 하여튼 어른 행세를 해야 할 나이에 이런 말을 하는 게 별로 좋지 않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정말로 그렇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사랑과 별개로 그다지 좋은 어른이 아니었으며, 같이 살고 있는 아버지는 제대로 된 어른이라고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초등학교 다닐 적의 교사들은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제 기분에 따라 학생에게 매질을 했고, 고등학교 다닐 적의 교감은 내가 해임교사 복직 요구를 위한 시위에 나갔다는 이유로 생활기록부를 빨간 줄 범벅으로 만들고 급우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었다. 법적 성년이 된 직후에도 그리고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법적 성년이 되었기에 더더욱 어른들의 ‘어른답지 못함’이 잘 감지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여튼 나의 현실에서 어른다운 어른을 본 기억은 얼마 없다.
현실이 이렇다면 픽션은 어떨까. 사실 온갖 감정과 사건이 격하게 출렁거려야 재밌는 픽션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 읽은 몇 가지 ‘청소년 추천 문학’들을 떠올려보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선 모든 주역이 답답하거나 음흉했고,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선 오히려 어른들이 훨씬 자연스럽게 실책과 악행을 저질렀으며,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섹스라는 건 여러모로 하찮은 동시에 중요한 거구나’ 정도의 감상만 당시의 내게 남겼다. 어른들의 어른답지 못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작품들이 ‘청소년 추천 문학’이라니. 이제 와 돌아보면 퍽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한편으론 갈등과 충돌 없이는 어떤 배움—“고전에서 배울 수 있는 삶의 지혜” 따위의 상투구를 떠올리며 쓴 건 아니다—도 불가능하다는 ‘면역’의 차원에서라면 이해가 아예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이 가장 심한 건, 당연하게도 만화다.
그렇지 않은가? 만화에 등장하는 어른은 거진 악당 혹은 (상황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나아가 악화시키는) 적대자(Antagonist)다. ‘사악한 어른 악당에 맞서는 어린이·청소년’이란 클리셰를 떠올려보자. 만약 어른이 우호적으로 다뤄진다면 그는 일찍 죽거나(『스파이더맨』의 벤 삼촌), 어린 주인공과 비슷하게 유치하고 단순한 면을 지녔거나(『크레용 신짱』의 어른들), 소수만 등장하거나(『표류교실 漂流教室』과 『아즈망가 대왕』의 교사들), 그냥 극 중 비중이 적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어른을 어른답게 표현하는 건, 적어도 대부분의 만화에 있어서는 썩 어울리지 않는 일인 것이다. 아니면 거꾸로 뒤집어봐도 좋겠다. 우리가 아는 만화의 주인공은 거진 미성년자거나(《주간 소년 점프》나 《하나토유메》의 캐릭터들1) 나이가 납득되지 않는 엉뚱한 지성/심성의 소유자이거나(‘고바우 영감’이나 ‘쌉니다 천리마마트’의 캐릭터들) 일반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는 철저한 소수적 인간이다(DC 코믹스/마블 코믹스의 슈퍼히어로들이나 『코르토 말테제 Corto Maltese』 시리즈의 주인공 코르토 말테제). 주인공이 어른다운 어른인 만화를 찾기란 어렵다. 요컨대 만화는 어른을 혐오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단언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토리야마 아키라처럼 쭈글쭈글한 노인을 그리길 좋아한 만화가는 어떤가? 『시마 과장 漂流教室』 시리즈나 『울버린: 올드맨 로건 Wolverine: Old Man Logan』처럼 중노년이 주인공인 만화는 또 어떻고? 게다가 어른을 혐오한다는 건 사실 만화보다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더 적합한 말이 아닌가? 하지만 이는 오히려 어른 혐오라 할 만한 경향이 ‘일반성’에 가깝단 사실을 어리석게 반증할 뿐이다. 그보다는 여기서 ‘어른’이란 말이 불분명하게 쓰이고 있음을 지적하는 게 좋겠다. 실은 쭉 ‘어른다움’을 들먹이면서도 ‘어른다움’의 의미를 명확히 풀어 쓰지 않았으니 말이다. 어른은 법적 성년의 나이가 된 사람을 이르는 (생물학적 맥락의) 말인가? 아니면 가족이나 사회에서 분명한 지위와 체면과 책임을 지닌 사람을 이르는 (사회심리학적 맥락의) 말인가? 아니면 점잖음과 지혜를 두루 갖추어 모범으로 삼을 만한 사람을 이르는 (교훈적 맥락의) 말인가? 이도 아니면 사고와 행동에 있어 사회의 우위를 자연스레 상정하고 따르는 사람을 이르는 (도덕주의적 맥락의) 말인가? 사실 나는 이 모든 의미를 불통합적으로 뭉뚱그린 채 ‘어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저 각각의 의미들을 은근히 붙여놓은 채 ‘어른’을 떠올리곤 하며, 나아가 만화가 이렇게 ‘어른’에 뭉뚱그려진 의미들 전부를 (때에 따라 정도를 달리하며) 혐오하는 듯이 굴곤 하기 때문이다.

[그림 1] 인간 얼굴 아이콘
이 혐오의 정체를 분명히 하기 위해, 먼저 만화가 어째서 이토록 어른을 혐오하는지에 대하여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성장서사에 매료된다’ 같은 상식적인 얘기는 제쳐두고) 추론해보도록 하자. 일단 그리기 번거롭고 어렵다는 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설이다. 인간적 연상작용의 가장 흔한 예시, 원 안의 점 두 개와 선 하나가 구성하는 인간 얼굴 아이콘을 떠올려보라[그림 1]. 만화가이자 만화 연구자인 스콧 맥클라우드가 말했듯, 만화를 그려야 하는 자는 주름도 머리카락도 치아도 기미도 굴곡도 없이 무시간적으로 추상화된 이 아이콘을 만화적 얼굴의 기초로 삼는다.2) 눈매, 헤어스타일, 흉터 같은 개성적인 요소들의 부착에 따라 그 얼굴의 주인과 정체성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얼굴 말이다. (예컨대 ‘안경 쓴 미소녀’ 클리셰를 떠올려보자) 그리고 이에 대응하기 쉬운 게 바로 어린 인간의 얼굴이다. 이에 비하면, 나이가 많을수록 주름처럼 그리기에 번거로운 요소는 많고, 개성적인 요소를 덧붙이는 게 ‘현실적’ 통념상 어려운 어른의 얼굴은 지속해서 잘 그리기가 어렵다.3) 즉 어른의 외양을 한 캐릭터는 만화에 있어 번거롭고 어려운 대상인 게다. 일본 만화에서 종종 주인공에게 시비를 거는 적대자의 얼굴을 극화체―상대적으로 사실적인 데포르메로 그리는 건 이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만화의 성질은 젊음에 대한 현실적 강박과 물신화(fetishization)에 공명한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다.
다음 가설은 만화적 독법에 관한 것이다. (그림책의 연장선에서) 강렬한 그림과 간결한 글이 고도로 결합하여 이야기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만화는 나이 어린 인간에게도 효과적일 만큼 독법의 난이도가 낮으며, 또 그만큼 난이도가 낮은 주제와 연출을 주로 끌어들인다. 단순하거나 과장된 서사, 감각적인 표현, 즉각적·효과적인 연상작용.4) 거꾸로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만화의 주 독자층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애들’이다. 그리고 ‘애들’은 자기 또래 혹은 자기와 비슷한 사고 수준의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작품에 쉬이 동일시를 경험하거나 흥미를 갖는다. 즉 주 타겟이 아닌 만큼 만화에 있어 어른 독자까지 포용할 만한 어른 캐릭터는 굳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하지만 만화의 난이도 낮은 독법이 꼭 어린 독자들에 적합한 주제나 이야기만을 끌어들이는 건 아니어서, 『블랙 키스 Black Kiss』 『사채꾼 우시지마 闇金ウシジマくん』 『마이 Favorite 舞Favorite』 『빨간 방 Red Room』 등 청년/성인 만화 장르에 속하는 다종다기한 작품들에서 우리는 지나칠 만큼 노골적으로 표현된 폭력과 섹슈얼리티를 마주치기도 한다. 어른의 영역에서 ‘단순하거나 과장된 서사, 감각적인 표현, 즉각적·효과적인 연상작용’은 종종 외설성에 맞닿은 채로 소화되는 것이다. 하여튼, 만화적 독법에 따른 타겟팅은 대체로 주류 만화를 어린이·청소년 문화에 결부시키게 된다.
다음 가설은 앞엣것과 상당한 연관이 있다. 얼마 전 쪽프레스에서 ‘달아나는 타카노’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만화가 타카노 후미코에 대한 특강을 진행한 만화가 란탄은 만화의 독자성(readership)에 대한 재밌는 견해를 들려주었다. 만화가 제공하는 허구적 경험에 있어 일탈로서의 만화(‘잠시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안전하게 벗어났다가 돌아올 수 있게끔 하는 만화’)와 도피로서의 만화(‘내가 살고 있는 세계로부터 벗어나 아예 그 속으로 빠져버리고 싶게 만들거나 그런 경험을 보여주는 만화’)의 분류를 제시한 그는 이런 분류를 가능케 하는,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아웃사이더적 기질”을 지적하며 이런 기질이 선천적으로 주어질 때도 있고 사후적으로 연마될 때도 있지만 하여튼 보편적인 것 같다고 논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그의 논리 전개를 거꾸로 뒤집어보고 싶다. 그러니까 만화는 어째서 또 어떻게 아웃사이더적 기질을 자극하는가? 나이, 취향, 태도, 버릇, 외모, 성적 지향/정체성, 가치관 등에 있어 아웃사이더 내지 마이너리티들이 (창작이든 감상이든) 만화에 쉬이 이끌린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는 만화의 즉물적이고도 간편한 표현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웃사이더들은 만화에서 유치하거나, 과도하거나, 오글거리거나, 변태적이거나, 반(反)사회적인 상상력을 (다른 매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무리 없이 시각적으로 소화하거나 충족할 수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만화가 독법의 난이도는 낮고, 창작에 있어 자본과 노동력 그리고 사회적 관계의 제약은 덜 들며, 비현실적인 사건을 (물질적 대상의 미메시스이기도 한 이미지를 적극 활용한다는 점에서) 즉물적인 리얼리티와 함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런 성질로 인하여 만화와 아웃사이더들 사이에 상호피드백과 같은 긴밀한 영향이 오고 가면서 아웃사이더적인 (더 적나라하게 말해, 오타쿠적인) 것이 만화에 단단히 들러붙는다. 요컨대 ‘어른이 아닌 녀석’으로서 아웃사이더들의 ‘장소’가 되기에 만화는 가장 용이한 매체인 것이다. 일반 사회에 속할 수 없(거나 속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쉽고 강력하게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장소. 말하자면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한 게토화(ghettoization).
그런데 이로 인하여 만화는 몹시 외설적인 면을 내포하기도 한다. 바로 (영화나 드라마가 현실적인 이유로 하기 어려운) ‘어린이·청소년이 나오는 어린이·청소년의 서사’를 어느 정도 성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째서 외설적인가. 한편으론 어린이·청소년 캐릭터의 (젊음보다도) 어림을 (종종 실재와 완전히 동떨어진) 도착적이고 화려한 기호로 환원해 활용한다는 포르노그래피적 층위에서, 다른 한편으론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으로 느끼는 유소년기적 정동을 어린이·청소년 독자에게 승인해준다는 유아론적(唯我論的) 층위에서 그러하다. 가까운 사례로, 2010년대 가장 흥행한 일본 소년만화인 『진격의 거인』과 『주술회전』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여기서 원치 않게 ‘높으신 분들’—곧 어른의 책임과 의무(전자는 박멸과 다를 바 없는 전쟁, 후자는 주술계의 안녕)를 거의 떠맡은 청소년 주인공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의 운명을 건 사투(전자는 땅울림, 후자는 인외마경 신주쿠 결전)를 벌인다.
이런 ‘왕도적인’ 전개는 캐릭터의 어림과 그에 따른 성장을 (시각적 구성과 서사를 아우르는 차원에서) 작품에의 연료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포르노그래피적 층위와 맞닿고, ‘어른은 할 수 없는 것’ 혹은 ‘어른이 떠넘긴 것’을 어쩔 수 없이 필사적으로 (또 나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캐릭터들을 따라감으로써 아웃사이더 독자가 (비틀린 어른 선망과 대리만족으로써) 적극적으로 이입할 여지를 만든다는 점에서 유아론적 층위에 맞닿는 것이다. 고취와 착취가 함께 일어나는 기묘한 장소랄까? (그러나 이 자체에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이 부여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가장 외설적일 지도 모르는 가설이 있다. 『레제르 만화 컬렉션 Reiser』이나 『닥터 슬럼프』 같은 코미디 만화의 황당무계한 신체 묘사를 떠올려보라. 가령 어떤 출혈도 없이 눈알을 잃어버리고 귤을 눈구멍에 끼우는 식의 황당한 장면이 줄곧 나오는 후자. 혹은 액션만화에서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상처를 입었는데도 금방 회복하여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캐릭터를 떠올려보라. 이런 경우들은 단지 만화의 허구성을 이용하거나 노출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여기서 펼쳐지는 것은 만화적 신체의 근본적인 허구성이 노출되는 광경이기도 하다. 나는 말장난을 하는 게 아니다. 아주 사실적이고 관능적으로 그려질 때조차 만화적 신체는 두 겹의 허구성을 갖는데, 하나는 그것이 만화 속에 그려진 이미지라는 데서 기인하는 허구성이요, 다른 하나는 그것이 유동적·초현실적으로 표현되곤 한다는 데서 기인하는 허구성이다. 즉 만화적 신체는 그것이 신체의 모양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칸의 내부 혹은 칸과 칸 사이에서 대체되거나, 변형되거나, 재구성되는 등 몹시 추상화된 신체성과 함께 나타나곤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는 함께 제시될 뿐 서로 분리되어 있는 시각적 이미지들 사이에 정신적인 관계를 구성함으로서 만화가 성립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우리는 한 캐릭터가 어떤 장면에서 갑자기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고 해도―가령 단단한 체구의 캐릭터가 한여름에 물을 너무 오래 못 마셔서 마른 나뭇가지 마냥 변하는 클리셰―특징적인 요소만 공유한다면 여전히 그 그림을 그 캐릭터로서 인식하지 않던가? 이렇듯 만화적 신체는 항구성과 가변성을 동시에 지닌 채 우리 앞에 나타난다.5)
그런데 (어른다운) 어른은 존재 자체로 만화적 신체를 모순에 빠트린다. 나이듦에 따라 몸에 노화가 드러난다는 것은 곧 항구성과 가변성 모두가 불가능하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대체/변형/재구성되지 않는 신체는 만화적 신체에, 나아가 만화 자체에 내재적인 위협이 된다. 아니면 거꾸로 말할 수도 있겠다. 우스꽝스럽거나 멋진 신체 연출로써 길들이고 은폐한 시간의 흐름을 만화 속에 누출시킨다는 점에서, 어른 캐릭터는 허구성을 상실했으며 또 그 상실을 주위에 파급시킬 수 있는 존재다. 원치 않게 죽음의 상징이 되는 어른. (‘유소년기에 누린 환상적 경험을 박탈당한 어른’ 클리셰가 이쯤에서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만화적 신체의 허구성을 지키려 만화는 어른을 혐오하는 역학을 내재화하고, 만화가들은 이를 무의식적으로 체화한다. 만화 속에서 어른다운 어른이 일찍 죽거나 진작에 일선에서 물러난 이로 나타나는 것, 혹은 유치하고 단순하며 노화가 겉에 보이지 않는 등 어른답지 않은 어른이 자꾸 서사 전면에 나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6) 『원피스』의 ‘흰 수염’ 에드워드 뉴게이트가 작중 등장과 동시에 죽어가고 있었으며 또 결국 도중에 죽었다는 사실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으리라. 그렇다면 만화에 있어 주인공의 (육체적·정신적) 성장이 서사의 끝을 장식하는 보편적 현상은, 19세기 유럽 교양소설(Bildungsroman)에 대한 프랑코 모레티의 말처럼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순과 더불어 사는 법을, 심지어 그 모순을 생존의 도구로 바꾸는 법” 7)을 배우는 과정의 종결을 육화한 것뿐만 아니라, 허구성을 연료 삼아 성숙을 쟁취하고 연료가 바닥난 뒤엔 서둘러 그 세계에서 퇴장해야 하는 만화적 신체의 고투를 육화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아주 모호하고도 다중적인 의미에서, 만화는 어른을 혐오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창작자든 독자든 무관하게) 만화에 미친 어린이·청소년은 살아있는 한 성인 이행기, 즉 하여튼 어른으로 살거나 어른다움을 수행할 준비의 시기로 떠밀려갈 수밖에 없다. 몇 겹의 어른 혐오를 천연덕스럽게 즐길 수 있는 어른은 모순적이거나, 가증스럽거나, 불쌍하기 마련이다. (당장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보라) 그러면서 크게 세 가지 루트가 주어진다. 만화와 적당히 혹은 완전히 거리를 두는 ‘어른다운’ 어른이 되거나, 키덜트(Kidult)란 말이 있듯 쭉 만화와 나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지 않고 오타쿠/아웃사이더로 살며 ‘어른답지 않은’ 어른이 되거나, 그도 아니면 하여튼 만화로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어서 ‘어른 취급은 받는’ 어른이 되거나.
그러나 이 루트들은 각자의 운명적인 선천성으로 인해 선택될 수만은 없는 대상이 되며, 결국 만화와 일반 사회 사이의 긴장은 ‘우리’에게도 자연스레 파급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인가?’를 (암시적으로라도) 주제로 가져가는 만화들이 여기저기에 즐비하단 사실은, 이런 맥락에서 결코 기막힌 우연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장에 대한 만화적 불안. 하지만 다수의 만화는 ‘~~를 해야 어른이 되는 거야!’라고 섣불리 결론을 내리는 등 이 불안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서 (엉성하게) 은폐하기에 바쁘다. (이상적인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공포를 겪던 1960-1970년대생 중년 남성들에게 볼썽사나운 만족감만 심어준 『20세기 소년』을 떠올려보자)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평범한’ 다수의 만화들처럼 만화적 불안에 단지 시달리는 걸 넘어서, 이와 적극적으로 대면하고 대결하려는 만화는 어디에 얼마나 있을까?
시이나 우미의 『아오노군에게 닿고 싶으니까 죽고 싶어 青野くんに触りたいから死にたい』 후반부에서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주인공 중 하나인 아오노 류헤이의 엄마 아오노 히토미다. 미숙한 걸 넘어 통제 불능의 ‘멘헤라’8)인 그는 변덕스러운 자기 기분에 따라 자식들을 물리적·정신적으로 학대하고, 어른으로서의 책임은 전가하거나 회피하며, 죽고 나서도 귀신의 형태로 (마찬가지로 귀신인) 아들 주위를 섬찟하게 맴도는 등 참고 보기 힘든 수준의 죄를 자꾸 저지른다. 그런데 히토미를 두려운 존재로 만드는 것은 그의 죄뿐만이 아니다.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독자에게 공개됐던 41화를 떠올려보면, 교복을 입고 있는 히토미에겐 주름이나 헤어스타일처럼 ‘어른다운’ 요소가 없어 이 얼굴을 맞닥뜨린 순간에 ‘이 캐릭터가 아오노 엄마 귀신이구나’라고 이해하기가 몹시 어렵다. 나중에 류헤이가 ‘죽은 어머니가 쫓아오는 걸지도 몰라’라고 말한 뒤에야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후에 긴 플래시백이 펼쳐질 때에도 히토미는 줄곧 ‘어른답지 않게’, 아주 어린 얼굴과 제스쳐의 캐릭터로 묘사되며, 류헤이가 어릴 때나 청소년이 되었을 때나 비슷한 모습으로 (즉 고등학생 캐릭터들과 별 차이 없는 데포르메로) 칸과 칸 사이를 배회한다. 그런 캐릭터가 아들에게 “텟페이[둘째 아들]를 버리고 와. (…) 류헤이라면 이해해줄 수 있지?”라고 부탁(을 빙자한 명령)할 때의 답답함과 공포는 웬만한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요컨대 히토미는 어떤 의미에서도 성장하지 않는 것이다.9) 여기서 시이나 우미는 만화의 어른 혐오와 그에 따른 성장에의 불안의 육화, 즉 외양도 태도도 어른답지 않은 상태로 존재하는 어른의 출현이 얼마나 외설적이고 부조리한 현상인지를 (불로불사 같은 서사적 설정을 경유하지 않으면서) 지나칠 정도로 잘 보여준다.

[그림 2] 『사랑에 서툰 사람들 Love Bunglers』 중
그리고 이 반대편에는 하이메 에르난데스의 『사랑에 서툰 사람들 Love Bunglers』이 있다. 1982년부터 시작된 미국 독립 만화계의 금자탑 『사랑과 로켓 Love and Rockets』 시리즈의 일부이자, 치카노계(Chicano) 친구(겸 때때로 레즈비언 커플)인 매기와 호피 그리고 그 주변인들이 영유하는 미 서부의 펑크적 삶을 다루는 스토리라인 ‘로카스’(Locas)’의 후기작인 이 작품은 중년의 매기를 구심점 삼는다. 젊었을 적엔 정비공이자 펑크 록 밴드의 일원으로 활약하고, 격렬한 만남과 다툼과 이별을 수도 없이 경험했던 그는 『사랑에 서툰 사람들』에 이르러선 단정한 머리와 통통한 체구의 아파트 관리인이자 여러 사람의 느슨한 친구, 그리고 삶에 뚜렷한 모험이 점점 사라져 ‘평범하게’ 정착하길 요구받는 여자가 되었다. 54쪽에서 (젊었을 적 잠깐의 연인, 오랜 친구, 그리고 매기의 새 연인이 되고 싶어하는 ‘썸남’) 레이의 내레이션이 말해주듯 “냉정하고 안정적”이며 “긴장하고 불확실한 어릿광대가 필요”하지 않은 ‘어른’ 여자 말이다. 하지만 매기는 그런 어른다운 어른이 되기를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히 거부한다.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굳이 레이에게 털어놓고,10) 자신과 불편한 관계인 여자를 위로해준답시고 “최고의 키스 기술자”답게 대뜸 키스를 하고[그림 2], 직원에게 자신을 “사장님” 말고 이름으로 불러 달라 요구하는 식으로 말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어른다움에 대한 매기의 거부에 어떤 저항이나 체념의 정서도 없다는 것이다. 저항(‘난 절대 그따위 어른은 되지 않을 거야!’)과 체념(‘난 절대 어른이 될 수 없을 거야……’)이 모두 푸코적 의미에서의 통치술, 즉 또 다른 착취를 자연화하는 기술로 변환된지 오래인 오늘날에(가령 ‘도지사의 격노’란 제목의 동영상을 한 번 검색해보시라) 매기/에르난데스는 어른답지 않은 삶의 방식으로 어른을 수행하는 삶을 제시해본다. ‘어른이 된다는 건 ~~하는 거야!’라고 결론을 내리는 대신, 바보 같고 문란한 삶의 주체가 이미 그냥 어른으로 사는 광경을 무심하고 단순히 그려내는 것이다. 이는 어떤 어른도 항상 어른답게만 살지는 못한다는 숙명적인 사실을 환기하는 동시에, 바로 그래서 우리가 어른 되기를 줄곧 새로이 정의하고 수행해야 한다는 (묘하게 데리다적인) 통찰을 던져준다. 어른이 발명된 개념이라면 그것을 다시 재발명할 것을 독자에게 요청한달까? 여기서 성장에 대한 만화적 불안은 아주 태연자약하게 해체되어버린다.
물론 이것만으로 만화에 엮인 어른 혐오와 불안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앞서 말했듯 어른다움에 대한 저항과 체념은 통치술의 일종이 되고, 성인 이행기는 청소년기의 너저분한 연장이 되는 오늘날엔 더더욱 말이다. (그런 만큼 요즈음엔 『무직전생 ~이세계에 갔으면 최선을 다한다』나 『나 혼자만 레벨업』처럼 ‘다른 삶’에서 아름답고 존경도 받는 완벽한 어른 되기를 추구하는 작품들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두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만화에 있어 어른 혐오와 성장에의 불안이 그 자체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면하고 대결하려는 시도는 ‘우리’에게 계속 필요하다는 것. 나는 그런 시도들을 좀 더 기대하고, 또 기대해보려 한다.
윤아랑
비평가. 2020년부터 ‘공식적인’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감각을 문제시하는 문화 비평에 관심이 있다. 현재 영화평론 팟캐스트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과 작업실 겸 상영공간 키니마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악인의 서사』(공저), 『라임 앤 리즌 2호 : 오컬트』(공저, 근간) 등이 있다.
‘성인 이행기’라는 대주제를 좀 우회하여 초역사적인 관점만을 취한 글이 된 게 퍽 아쉽습니다만, 이는 나중에 다른 자리에서 보충하거나 보완할 지점이겠지요. 귀중하고 통렬한 감상을 전해준 M에게 한없는 감사를 표합니다.
2025/05/07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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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이는 좀 더 주의 깊게 논해져야 한다. 예컨대 골든 에이지(Golden Age, 1938-1956) 시기의 미국 슈퍼 히어로 만화의 경우, “거의 모든 초기 슈퍼히어로는, 대부분의 코믹 스트립 속 영웅들이 그랬듯 막연한 20대 후반의 나이[로 설정되었]다. 모두 기본적으로 20대 후반으로, 분명한 성인이 될 만큼 나이를 먹었지만 늙었다고 하기에는(OLD old) 어린 나이였다. 기본적으로 프로 야구 선수의 전성기 [나이대]가 슈퍼히어로의 전성기의 전성기였다. 슈퍼맨, 배트맨 등에게 27-29살 즈음의 시기가 대체로 그랬다.” 즉 당시 어린이·청소년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청년 세대의 나이대가 슈퍼히어로 캐릭터들에게도 반영된 것이다. 1940년에 마블 보이(Marvel Boy)가 14살의 나이로 단독 슈퍼히어로 데뷔를 하긴 했으나, 오늘날 그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10대 미성년자 캐릭터가 슈퍼히어로로서 인기를 얻은 것은 마블 코믹스에서 『판타스틱 4(Fantastic 4)』의 휴먼 토치와 『스파이더맨』의 스파이더맨이 등장한 1961-1962년 이후, 즉 수정주의적이고 (자기)비판적인 만화들이 대중화된 실버 에이지(Silver Age, 1956–1970) 초기의 일이다. Brian Cronin, “Who Was the First Teen Superhero in Comic Books?” CBR, 2022. 3. 26.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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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콧 맥클라우드, 『만화의 이해』, 김낙호 옮김, 비즈앤비즈, 2020, 39-50쪽. 하지만 이런 얼굴이 주로 ‘일반적인’ 남성을 상징하곤 한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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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기 어렵고 번거로운 건 BL 만화에서 허구한 날 등장하는 근육질의 몸매 역시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으나, 그런 대상은 대부분 주름이나 기미와 달리 만화가에게든 독자에게든 육감적인 만족을 주기 때문에 본문의 맥락에 부합하는 사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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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이제는 컷툰 포맷에 익숙해져 스크롤형 웹툰조차 난해하다고 말하는 어린이·청소년도 있긴 하나 당장 여기서 다룰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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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맥락에서, 로봇이나 괴물이나 외계인처럼 만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불로불사(不老不死)적 존재들은 이에 대한 비유적 형상이자 동시에 이 신체성을 독자에게 적당히 납득시키려는 서사적 설정이라 할 수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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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나는 여기서 오츠카 에이지가 제시한 ‘아톰의 명제’, 즉 전후 일본 만화의 ‘미학적/감성학적(aesthetics)’ 성장 불가능(한 남성)성에 관한 담론과 그에 대한 이토 고, 아즈마 히로키, 후쿠시마 료타 등의 추가 논의를 의식하며 말하고 있으며, 다른 자리에서 이를 고찰해본 적이 있다. 윤아랑, 「만화라는 이상한 관계」,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 민음사, 20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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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코 모레티, 『세상의 이치 - 유럽 문화 속의 교양소설』, 성은애 옮김, 문학동네, 2005, 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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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メンヘラ, 우울, 도피, 가피학, 광기 등 정신질환 증상의 소유자를 모에화하는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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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화에선 몇몇 대사를 통해 이런 상태가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조숙하게 자신을 돌보는 류헤이에게 “류헤이, 남자가 되지 마. 계~속 어린애로 있어”라고 조른다거나, “엄마는 애 같아!”라는 자식들의 말에 “응. 어릴 때부터 난 언제나 나야”라고 대답한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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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이어 그녀는 지난 17년간의 삶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 짧게 끝난 호피와의 재결합이며, 그보다 더 짧게 끝난 어느 나이 많은 스케이트보더 폭주족과의 결혼 생활까지도 말이다. 최근에는 여행 중에 하마터면 물에 빠져 죽을 뻔했고, 그 일과 관련된 악몽을 계속 꾸고 있다는 말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하이메 에르난데스, 『사랑에 서툰 사람들』, 박중서 옮김, goat, 2020, 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