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교환
이 실패를 멈추지 않기
(반)성장담으로서의 워크숍 영화
0.
이곳은 교토의 도심 어딘가이고 스크린 도어가 없는 승강장이 낯설다. 빈 선로를 내려다보면서 아찔함을 느끼는 건 오랜만이다. 열차를 기다린다는 건 이렇게 문턱 앞에 선 사람처럼 발끝에 힘을 주어 버티는 감각이었지. 이미 지나간 열차와 다음 열차 사이에서, 앞으로 올 사건과 이미 지나간 것 사이에서 버티는 동안 시간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건 열차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약간의 공백 속에서, 이 기다림이 결말 없이 계속될 거라는 어렴풋한 예감 속에서 교차하던 생각들을 한데 불러 모으기 위한 후술법에 가깝다. 어떠한 중재나 소속 없이 만나 교차로에서 잠시 접속하고 떨어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교토에 온 것은 최근에 맡게 된 한 다큐멘터리 촬영 때문이다. 작년 9월부터 나는 학생들의 워크숍을 따라다니며 기록을 남기고 그 기록을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물론 나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다큐멘터리란 이러해야 한다는 출처 미상의 지침을 흉내 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사실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는 항상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롤플레잉의 감각.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면서 워크숍이라는 개념이 내가 관찰하는 대상으로부터 나에게로 옮겨붙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적어도 워크숍을 시행착오, 연습, 성장과 같은 청소년의 테마와 연결 짓는 관점에서 말이다.
내가 참여했던 현장에서 워크숍은 학생이라는 조건과 떼어낼 수 없어 보였다. 참여자 대부분이 대학교 1학년부터 4학년까지였고, 제도적 나이로는 청소년에 해당하지 않지만 이제 막 청소년기를 지났거나 졸업을 앞두고 어떤 이행기를 보내고 있었다. 현장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느꼈던 것은, 이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물음표로 끝나는 문장이 많았다는 점이다. 어떤 말에 결론을 내지 않고 질문으로 남겨두거나 질문에 질문으로 화답하는 대화가 끝없이 이어졌다. 이들은 제도적 나이의 청소년이 아닐지라도, 여전히 그 감각은 청소년기에 가깝게 느껴졌다. 공교롭게도 나는 KMDb에서 연재한 비평 에세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청소년 영화의 한때를 떠올리며」라는 글에서 “청소년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게 아닐까?”라는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1)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청소년기가 아직 지속되고 있다는 지연의 감각 속에서는 우리가 급진적이라 불리는 작업들이 자연스럽게 수용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영화를 비롯한 예술 전반에서 워크숍이 자주 활용되거나 언급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청소년기가 아직 끝났다고 믿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결론짓지 않은 채로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이 글은 어떤 미학적 효과로서 워크숍 영화를 다루기보다는 집념과 질문이 해소되지 않길 바라는 청소년기의 감각이 실현되는 장소로서 워크숍 영화를 살펴보면서 워크숍이라는 개념을 최대한 흐트러뜨리는 데에 소소한 목표를 두고 있다. 워크숍 영화는 영화의 표현 방식과 효과인 동시에 그것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영화를 보는 관점을 재고하게끔 요청하는 상호작용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가 무수한 실패의 반복과 미완결, 결핍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믿음으로 세계를 교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1.
대상을 관측하려는 순간 그 대상이 변해버리기에 온전히 관측할 수 없다는 불확정성의 원리는 청소년기를 묘사하는 일의 곤란함을 대변하는 요소 중 하나다. 그러니까 청소년들의 TRPG(Tabletop Role Playing Game) 게임 플레이 워크숍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에스퍼의 빛〉(2024)에서 청소년의 이미지에 가장 근접한 순간을 꼽자면 아마도 이런 장면일 것이다. 극중에서 ‘롤라’라는 캐릭터를 만든 장본인으로 추정되는 아이의 스마트폰이 울린다. 게임에서 알람이 온 걸 테다. 하지만 아이는 흥미가 없다는 듯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다시 책상을 향해 돌아앉는다. 무신경해보이는 뒷모습. 이 뒷모습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지만, 오히려 그러한 공백이야말로 청소년기의 진실에 가깝게 느껴진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한 가지 행위를 향해 질주하는 뒷모습, 멍하니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는 뒷모습, 엎드려 자고 있는 뒷모습, 당장이라도 어깨를 흔들어 캐묻고 싶은 뒷모습. 뒷모습에는 대상을 향한 응시의 애정만큼이나 아무리 가까이 가도 대상과의 거리를 결코 좁힐 수 없다는 불안이 투영되어 있다.
〈에스퍼의 빛〉에서 청소년들은 대체로 익스트림 클로즈업되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옆얼굴이나 스마트폰 타자를 치는 손으로, 멍하니 차창밖을 바라보거나 걸어가거나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자캐커뮤니티’(자작 캐릭터 커뮤니티: 자신이 만든 캐릭터를 공유하고 세계관과 설정을 만들면서 교류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캐릭터들의 본모습이며, 게임 세계 바깥에서 연속적으로 흐르고 있는 현실 세계의 ‘진짜’ 청소년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장면들은 정작 청소년의 속성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청소년을 특정 행동의 유형을 보이는 군상으로 범주화하거나, 외형적 유사성으로 묶어내지도 않는다. 다만 영화는 이들이 구축한 세계를 시청각적으로 재현한 화면과 실시간으로 접속하고 빠져나오는 일상의 리듬이 체화된 청소년들의 몸짓을 보여줄 뿐이다.
‘자캐커뮤니티에 참여한 청소년들과 진행한 워크숍을 토대로 제작된 영화’라는 설명이 즉각적으로 상상하게 하는 바와 달리, 이 영화는 그러한 문화적 양상의 심층으로 파고들지 않는다. 그 대신 영화는 청소년의 특정한 군상이나 집단을 그려내지 않으면서 이들이 스스로 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주력한다. 이 영화에서 청소년성은 게임을 실행하고 빠져나오는 로그인과 로그아웃의 감각과 유사한 파편들의 (비)봉합, 불현듯 나타났다 꺼져버리는 이미지 기반의 상상력, 그리고 〈배틀로얄〉(2000)을 연상시키는 서바이벌의 정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암시되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요소들을 해석의 결과물이 아니라 끝내 표층만을 볼 수 있다는 사실로서 대면하게 한다. 이는 청소년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청소년의 재현 불가능성과 마주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들의 뒷모습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투명함을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려는 순간, 그러한 시선이 무언가를 투시할 수 있다는 믿음이 불가능하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임철민이 〈빙빙〉(2016)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소년들과 디스코팡팡을 타는 청소년들의 이미지를 통해 이들에게서 삐져나오는 열기를 일종의 형상과 노이즈, 비트의 차원으로 표면화했다면 〈에스퍼의 빛〉은 픽션의 표층을 통해 청소년성을 다룬다. 청소년들이 워크숍을 통해 창작한 이야기는 SF의 외피를 띄지만 심도가 없고, 여기에서 저기로 이어지는 다리가 없다. 심지어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워크숍이 시작된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흥미가 떨어진 모습이 역력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앞서 ‘롤라’가 게임 접속을 거부하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삽입한 것처럼, 영화는 이러한 실패마저 청소년성의 일부로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이 실패는 거의 필연적으로 보인다. TRPG는 플레이어들이 세계의 규칙을 생성하는 동시에 그것의 소멸을 체험하는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2) 게임의 형식 속에서, 한번 구축된 곳은 반드시 폐허가 되어야 한다. 유저가 점점 줄어들어 폐허가 된 게임 세계가 자아내는 유사 종말의 감각은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에서 묘사되었듯 특정한 시기에 유년기를 보낸 세대의 공통 감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청소년성은 워크숍에 참여한 청소년들뿐 아니라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8, 90년대생 제작자들이 가진 청소년기의 감각으로 확장되며, 그것과의 협업을 통해 구축된 것이다.
김병규 평론가는 〈에스퍼의 빛〉이 청소년을 재현한다기보다 픽션으로 진입하는 매개로서 청소년을 다룬다고 말한 바 있다.3) 〈에스퍼의 빛〉은 청소년의 재현 불가능성을 통해 실패가 무한히 재생산되는, 실패가 세계의 규칙이 된 세계를 그리기 위해 청소년이라는 조건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워크숍은 완결되지 않음, 시행착오, 사건 없음, 결과가 아니라 과정 중심의 액션,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중첩을 통해 극영화 중심적인 영화 보기의 활동에 임의의 반전을 일으킨다. 이처럼 임시적인 공동체를 통해 세계의 표본을 대체해버리고자 하는 워크숍의 소박한 급진성은 유약하고 변화무쌍한 청소년의 내면을 운명적 규모의 문제로 다루는 ‘세카이계’의 비약과도 맞닿아 있다.〈에스퍼의 빛〉은 워크숍이라는 과업과 청소년 사이의 친연성에 주목하며 임의로 굴절된 현실로부터 세계를 재편하는 모험에서 영화의 형식을 창출해낸 사례다.
2.
워크숍과 청소년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잘 어우러져서 이 조합에 쉬이 의문이나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단순한 이유는 우선 청소년과 관련된 교육 프로그램이 워크숍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명명되기 때문이다. 시행착오와 실패, 무언가를 완결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성장기의 자비로움이라는 청소년기의 특징은 연습이라는 어감과 잘 들어맞는다. 워크숍은 참여자가 제한이나 자격 없이 무언가를 함께 도모한다는 의미의 활동이기도 하지만 실수하거나 넘어져도 괜찮은 것, 그럴수록 우리가 원하는 바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연습’의 과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나 바즈의 〈검은 새를 보는 13가지 방법〉(2020) 또한 청소년들과의 워크숍을 통해 공동창작된 영화다. 학생들과 아나 바즈는 말 그대로 ‘영화 (함께) 만들기’를 ‘연습’한다. 브라질 출신의 감독 아나 바즈는 영화를 통해 식민지배와 침략의 문제를 성찰하며, 식민주의적 관점을 재고하고 해체하는 사유 연습의 수단으로서 영화라는 매체를 활용한다. 그렇기에 아나 바즈가 대안 교육의 장에서 청소년들과 워크숍을 할 때 그 수단으로 카메라를 이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아나 바즈는 리스본 시의 ‘언스쿨’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마리우와 베라라는 두 고등학생과 워크숍을 진행했으며 ‘카메라는 몸이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함께 실험영화를 보고 대화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세 사람이 워크숍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보낸 시간의 징표이자 공동창작의 결과물인 셈이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통상적인 영화 제작 워크숍이 감독-선생의 지도 하에 아마추어 영화를 제작하는 방식이라면, 이 영화는 지도를 담당하는 연출자가 동시에 창작의 구성원이 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선생과 학생이라는 위계는 문답과 대화라는 수평적인 말의 교환으로 우회하고, 학생들은 스스로 영화에 자신의 목소리를 기입한다. 이때 워크숍은 영화의 제작을 가능케 한 프리프로덕션의 과정인 동시에 영화의 내용이 된다. 영화에서 학생들과 아나 바즈는 영화에 어떤 장면을 삽입할 것인지,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에 관한 대화를 주고받는다.〈에스퍼의 빛〉이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일어난 영화적 가공을 의식하게끔 한다면, 〈검은 새를 보는 13가지 방법〉에서 워크숍은 프리 프로덕션과 프로덕션의 과정이 선후관계에 있지 않고 중첩되는 방식의 영화 만들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검은 새를 보는 13가지 방법〉은 제작 배경에 대한 정보 없이는 쉽사리 파악되지 않는다. 영화 제목인 ‘검은 새를 보는 13가지 방법’은 윌리엄 스티븐스의 동명의 시로, 영화상에서 일종의 챕터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낭독되거나 텍스트로 출현한다. 이 영화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처럼 시라는 추상적 텍스트를 지침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는 시를 해석하거나 직접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에서 시는 ‘보기’의 문제를 사유하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를 탐색하는 학생들의 대화와 느슨하게 연결된다.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세계란 무엇인지, 이미지란 무엇인지, 어떻게 자르고 붙일 것인지와 같은 질문들을 통해 이들은 궁극적으로 ‘영화 만들기’라는 연습의 절차로 향한다. 이때 연습이란 단지 미숙하거나 더 정확한 수행을 위한 시행착오들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탐구를 의미한다. 출근길 버스에서 마주친 일상적인 장면을 아흔 아홉 가지의 문체로 변주하는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에서 암시하는 바에 따르면, 연습은 무한한 변주와 실험을 가능케 하는 ‘exercise’이며 어떤 이야기를 완결 짓거나 단정 짓지 않는 기술이다.4)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누구의 것으로도 귀속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시험처럼 제도화된 방식의 결과물이 아니라 세 사람이 위계 없이 뒤섞이는 과정으로부터 탄생한 무언가로서, 형언하기 힘든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최 무슨 영화를 만든 건지 설명할 수 없다는 곤란함은 세 사람이 나눈 대화에서도 역력히 드러난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베라의 대답이다. “우리가 함께한 경험들과 나눈 것들의 집합”이라는, 지극히 모호한 동시에 정확한 표현에서는 경험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는 책무감이 느껴진다. 이는 사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그녀를 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청소년과 함께하는 프로젝트가 어떤 교훈이나 성장을 담보해야 한다는 관습적인 믿음과 관련이 있다.6) 청소년 영화는 미숙하고 미결적이고 불완전한 것에 대한 전형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성장의 보편적 모델로서 모종의 긍정이나 교훈을 전해야 한다는 강박을 지닌다. 이러한 모델에서 모든 실패는 경험으로 수렴한다.〈검은 새를 보는 13가지 방법〉은 그러한 강박을 전면으로 돌파하지는 않지만, ‘영화에 대한 영화’가 되기를 택함으로써 성장담의 자리에 영화 만들기의 수행을 겹쳐 놓으려 한다. 이미지를 자르고 붙이는 일, 이미지와 사운드를 덧대어보는 일,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보기라는 활동을 재조정하는 일이라는 영화 만들기의 수행은 무의식적으로 성장의 형식을 대체한다. 차이가 있다면 성장담은 언젠가 결실을 맺는 이야기인 반면, 영화 만들기는 언제쯤 끝날지 좀처럼 알 수 없다는 것이다.마리우: 우리가 만든 영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정확히 말하긴 어렵겠지만, 지금까지 촬영하고 제작한 걸 바탕으로 본다면요.
아나: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더듬기'입니다. 일종의 어둠 속에서 더듬는 것 같다고 할까요. (…) 확실한 건, 유머를 담아 표현하자면 이 작품이 '긍정적인 오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과정의 결과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공유된 다양한 세계—마리우, 베라, 그리고 파울라의 직관, 감수성, 그리고 성찰이 뒤섞여 만들어진 것이죠.
베라: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아나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작업한 모든 것과 그 재료 속에는 우리 모두의 일부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함께한 경험들과 올 한 해 동안 나눈 것들의 집합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5)
3.
성장은 언어로 온전히 설명될 수 없다. 누군가의 성장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 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성장은 어떤 거창한 변화나 ‘레벨 업’일뿐 아니라, ‘다시 여기로 돌아왔을 때, 무언가 달라져 있는 감각’이기도 하다. 무엇이 달라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경계 너머로 갔다가 되돌아온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것. 신카이 마코토의 세카이계가 청소년을 주인공을 삼아 경계 너머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로드무비의 형식을 통해 재난의 애도를 수행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재난 지역으로 향하고 돌아오지 않는 고모리 하루카의 〈더블 레이어드 타운〉(2019)은 (반)성장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7) 이 영화에서 워크숍 참가자들은 재난 지역으로 향한 뒤 다시 귀환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원히 거기를 떠나지 못하며 의도적으로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포스트 동일본대지진 세대로서 센다이 지역을 중심으로 피해 마을 주민들과 함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온 고모리 하루카의 〈더블 레이어드 타운〉은 재난의 기억을 공동체의 기억으로 재구술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워크숍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만큼 그 변화가 타인과 무관하지 않다는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장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약간의 통증과 무력감을 동반한다. 이 영화에서 워크숍은 일단 함께 하는 데에 의미가 있다는 식의 무조건적인 낙관이나 희망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반복되는 시행착오, 끝나지 않는 실패라는 워크숍의 전형적인 서술 방식은 이 영화에서 재난의 기억을 다루는 일이 지닌 근본적인 곤란함을 드러내는 메타적 장치로 활용된다.
영화는 지진 피해를 직접 받지 않았던 청년들이 이와테현의 리쿠젠타카타시로 가 그곳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기억하여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워크숍으로 이루어진다. 이들은 2031년을 배경으로 세오 나츠미가 쓴 짧은 SF 소설 「더블 레이어드 타운」을 낭독하기도 한다. 참가자들이 워크숍 활동의 일환으로 주민들과 만나는 장면, 그리고 만나서 나눴던 이야기를 복기하는 인터뷰 장면, 토지고도화 사업으로 복구되고 있는 피해 지역을 산책하듯 거닐어보는 장면이 영화에서 반복해서 등장한다. 고모리 하루카는 워크숍 참가자의 모집 글에서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을 당시 ‘청소년’이었을 것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고 한다. 덕분에 참가자들은 비슷한 연배뿐 아니라 피해 지역 주민들의 증언과 기억으로부터 다소간 시공간적 거리를 두고 있다는 공통점을 공유하게 된다.
‘청소년’이라는 조건이 필요했던 것은 재난에 대한 기억이 어떤 판단으로 매개되기보다 압도적인 감각이나 무력감이라는 체험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을 불러들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여기서 ‘청소년’은 특정한 연령대의 참가자들을 분류하는 기준이기도 하지만 ‘기억’의 불완전함이라는 속성과 동일시되며, 동일본대지진이라는 재난의 경험과 관계 맺고 있는 특정한 기억의 상태를 불러들이기 위해서 소환된다. 영화는 동일본대지진의 구체적인 피해나 복구 과정 등 피해 지역의 서사를 직접 드러내지 않는 대신 워크숍 참여자들이 자신이 들은 것을 복구해내려고 애쓰는 얼굴이나 동작, 더듬거리는 목소리를 보여준다. 우리는 재난의 기억을 공유하는 일의 어려움을 통해(서만) 공동체의 기억에 다가갈 수 있다.
워크숍이 끝난 뒤 참가자들은 후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각자의 무력감을 토로한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재구술 과정이 무언가를 자꾸만 누락시키는 일처럼 느껴진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이 만난 지역 주민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기억을 전달하는 일에는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다. 기억에 대해 말하려 할수록 중요한 것은 변형되거나 결국 놓치게 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워크숍을 통해 재난의 기억을 공유한다는 난감함을, 불가능함을 몸의 차원으로 소환하는 이들을 보여준다. 재난이 지나간 뒤 도시는 재건과 복구를 추진하지만, 미처 소화되지 못한 기억과 경험이 남아 있다. 여기서 기억은 복원되는 데에 실패하고, 거의 무너져내린다. 하지만 그 무너짐으로부터 버티어내려는 어떤 인간적임이,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일에 대한 최소한의 긍정이 깃들어 있다. 이 영화에서 워크숍은 망설이거나 머뭇거리거나 부정확해질수록 공동체의 기억에 정밀해지는 역행의 장소다.
〈더블 레이어드 타운〉은 대부분의 워크숍 영화가 그렇듯 필연적인 실패를 짊어진 영화이며, 더 나아가 재난의 재현 불가능성이라는 이중의 실패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실패는 미학적인 효과를 자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창작자가 중심이 되어 형식적 실험을 감행하기 위한 장이 아니라 참여자와 창작자가 공동으로 연습할 수 있는 것. 〈더블 레이어드 타운〉에서는 워크숍 참가자들과 지역 주민들이 관계 맺는 장면을 깊게 묘사하지는 않는다. 공동체는 상호 교환의 몸짓이 아니라, 실패한 교환 위에 실패를 계속 쌓아올리면서 실패를 멈추지 않는 일에서 형성된다. 오카 마리가 말했듯,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바로 이 모순이야말로 사건의 기억을 말하는 것이며, 바로 거기에 우리가 진정 분유해야 할 것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8). 이 영화에 청소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청소년의 기억이 존재하고, 그 기억이 여전히 잔존해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일으켜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때 ‘기억’은 워크숍을 어떤 미학적 재료가 아니라 다시 연습으로 수렴시킴으로써 워크숍을 스펙터클화 하는 장르적 수용으로부터 거리를 두게끔 한다.
참가자들은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귀환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워크숍을 끝내는 것만큼 폭력적인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들은 거기 남아서 영원히 실패를 되새기고 반복해야 할지도 모른다. ‘실패를 멈추기 않기’는 재난에 대한 기억을 재난과 마주하는 수많은 시점들의 협업으로 복수화하는 일이다. 이것이 워크숍이 세계를 속단하지 않으면서 복수의 가능성으로 중첩시키는 방식이다. 워크숍은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로드무비가 아니라 루프의 감각을 토대로 거침없이 실패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장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대안 세계들의 접점으로 단일한 자신이라는 신화를 무너뜨리는 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다만 나는 버티는 시간 속에서, 모험이 아닌 것에서 모험을 발견하는 이 미완의 시도들을 긍정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끝내지 않는 구실을 필요로 한다. 어쩌면 이 지면에서조차도……
김예솔비
영화를 중심으로 시각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2022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을 받아 본격적으로 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이따금 영화 비슷한 것을 만들며 무빙이미지 커뮤니티 소리그림(sorigrim)을 공동 운영하고 있다.
2025/05/07
73호
- 1
- 김예솔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청소년 제작 영화의 한때를 떠올리며 — 〈D-?〉, 〈애드벌룬〉, 〈잠자리 구하기〉」, KMDb, 2024년 9월 27일. 바로가기
- 2
- TRPG 가운데 ‘다이얼렉트’는 고립된 공동체와 공동체의 언어를 상상하고 그 언어의 소멸을 다루는 이야기 게임이다. 참가자들이 만든 언어는 공동체의 면모와 고립의 양상에 따라 변모하고 결국에는 소멸하게 된다.
- 3
- 대전 소소아트시네마 기획전 ‘우리의 21세기’ 중 〈에스퍼의 빛〉 상영 후 정재훈 감독과 김병규 평론가가 나눈 GV에서 발췌한 내용.
- 4
- 레몽 크노, 『문체 연습』, 조재룡 옮김, 문학동네, 2020.
- 5
- Vera Amaral, Mário Neto and Ana Vaz, “Descola / Unschool,” Non-Fiction 03: The Living Journal, Open City Documentary Festival. 바로가기
- 6
- 이와 유사하게 워크숍 또한 어떤 위험을 품고 있다. 윤아랑 평론가가 닉 드나르소의 『연기 수업』을 통해 지적한 것처럼 워크숍은 모두의 자유로운 참여를 독려하지만 이것이 일종의 과업으로 강조될 때 부작용이 발생한다. ‘자유로운 참여자’가 워크숍의 이상적 모델로 상정될 때 자유가 의무적인 것으로 치환되어버림으로써 착취와 억압의 다른 모습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윤아랑, 「자유로운 파국 - 『연기 수업』을 중심으로」, 《릿터》 45호, 2023년 12월/2024년 1월호, 28-33쪽).
- 7
- 글의 제목에도 쓰인 ‘(반)성장’이라는 단어는 〈잠자리 구하기〉(2024)를 만든 홍다예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20대 청년의 인류학적 반성장 보고서”라고 칭하는 데에서 참고하였다(이우빈, 「JeonjuIFF #2호 [인터뷰] 20대 청년의 반성장 보고서, ‘잠자리 구하기’ 홍다예 감독」, 《씨네21》, 2022. 바로가기
- 8
- 오카 마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옮김, 현암사, 2016, 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