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산 지 7년하고도 7개월이 지났다. 사시사철 꽃과 나무가 많고 산과 바다가 지척인 곳을 찾아서 왔는데, 베어져나가는 나무들과 파헤쳐지는 땅을 그동안 너무 많이 보았다. 이 좋은 곳에 감히 사람 말고 꽃과 나무 따위가 살 수는 없다는 듯한 기세다. 시내 주택가 사이사이 오래된 귤나무 과수원이 있던 곳은 여지없이 고급 빌라 단지로 변해버렸다. 5월이면 은은한 귤꽃 향기, 노지 딸기 익어가는 달콤한 냄새가 솔솔 풍겨와 밤 산책이라도 나가면 왠지 로맨틱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는데, 이제는 “옛날엔 말이야, 봄이면 사방에 귤꽃 향기가……” 하며 마치 옛이야기라도 하듯 추억을 끄집어내고 있다. 이곳에서 산 지 아직 10년도 안 된 사람이.
   이 작은 섬에서 어디를 그렇게 바삐 가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새로운 도로 공사를 조속히 마무리하겠다는 안내판이 도처에 가득하고, 섬의 수용 능력과 자정 능력 같은 건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닌지 제2공항까지 지어야겠다고 한다. 이 섬은 아름답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므로 더 많은 사람들이 아름답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곳을 찾아서 돈을 쓰고 갈 수 있도록 최대한 길을 촘촘히 내고 쓸데없이 넓기만 한 곶자왈에는 동물테마파크를 만들고…… 네? 뭐라고요?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낸 숲으로 들어가 조그만 나무집을 짓고 지내면서 제발 숲을 지키자고 목소리를 높여도, 바쁜 자동차 경적 소리에 금세 묻히고 만다. 하지만 베어낸 밑둥에서 금세 싹을 올리는 나무들을 보면 ‘나무들이라고 할말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그림책 작가들은 나무를 위해, 풀을 위해, 새를 위해, 곤충을 위해, 사람들이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 모든 존재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다. 혹시나 말로만 하면 못 알아듣거나 흘려들을까봐 직관적이고 유머러스하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보여주기까지 한다. 그림책은 지금 어린이는 물론 목소리가 없는 이 세상 모든 약자들을 위해 만들어지고 있다. 외면하면 안 되는 존재들을 제발 좀 돌아보라고, 그림책 작가들은 글로도 그림으로도 외친다.


사이다 그림책 『풀친구』(웅진주니어, 2019)

    제주의 봄은 고사리와 함께 온다. 나도 해마다 4월이면 새벽마다 고사리를 꺾으러 다니는 동네가 있었다. 해발 350미터 정도의 마을 공동 목장 지대인데, 올봄에는 그곳에서 고사리를 하지 못했다. 발목 위로 무성히 자라 있어야 할 풀밭이 면도한 듯 짧게, 말끔히 깎여 있었다. 고사리가 자라고, 꿩들이 알을 낳고 새끼를 길러내도록 해주던 그늘과 덤불도 같이 사라졌다. 골프장이 된다고 했던가, 공동묘역이 조성될 예정이라고 했던가. 마을에서는 더이상 소나 말을 키우지 않고, 마을회에서 이 땅을 보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도 않으니 땅이 팔린 게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나에겐 한 시대가 저물었음을 알려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사이다 작가의 『풀친구』는 바로 이렇게 깎이고 뽑혀나간 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당신은 풀의 얼굴과 표정을 본 적이 있는가? 달콤한 주스인 줄 알고 제초제를 받아 마신 풀들의 비명을 들은 적이 있는가? 인간은 풀 따위는 손쉽게 통제할 수 있다고 거들먹거린다. 하지만 풀은 절대 약하지 않다. (텃밭농사라도 조금 지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풀은 음…… 무섭다.) 어디선가 살아남아 까르르 웃으며 씨앗을 날리는 풀들의 목소리를 작가는 분명히 들었다. 하다 하다 풀에 빙의해서 만들어낸 그림책이라니. 작가님, 존경합니다.

권정민 그림책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문학동네, 2019)

   가까운 음식점 주차장에 제법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던 멋진 나무가 있었다. 건물주는 어느 날 업자를 부르더니 순식간에 슥슥 베어버렸다. 주차된 차 위로 떨어지는 낙엽과 새똥 때문에 두고만 볼 수가 없었다면서. 집 밖에서는 나무를 베어내는 데 주저함이 없는 사람들도 “하여튼 중국발 미세먼지가 문제”라며 집 안에 공기 정화기를 설치하고 먼지를 잘 없애준다는 식물들을 고르고 골라서 들여놓겠지. 첫번째 그림책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보림, 2016)에서 새끼들을 데리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으려는 어미 멧돼지의 절박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던 권정민 작가는 이번 신작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에서 ‘플랜테리어’와 ‘공기 정화’에 이용되는 원예용 식물들의 목소리를 대신 전해주고 있다. 생김새가 멋져서, 관리가 소홀해도 잘 죽지 않을 만큼 튼튼해서, 공기 정화 능력이 뛰어나서 등등의 이유로 저 멀리 열대의 나라에서부터 이곳까지 온 식물들에게 우리는 합당한 대접을 해주고 있을까. (나 또한 그동안 죽인 식물들이 수도 없이 떠오른다만……)
   키우고 있는 식물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 분들께 이 책을 강권한다. 한 번 봐서 모르겠다면, 두 번 세 번 네 번 더 읽으시라. 이 책에 등장하는 식물들이 온몸으로 외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때가 있을 것이다. 잎사귀 하나하나, 그림자 하나하나에 담긴 표정이 보이고, 서로 다른 어조의 목소리가 구분되기까지 할 것이다.


숀 탠 그림책 『매미』(김경연 옮김, 풀빛, 2019)

   17년 동안 형편없는 대접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인간을 위해 일해온 매미가 주인공이지만, 매미의 자리에 그 어떤 약자를 대입해도 말이 된다. 이 순간에도 말없이 우리를 위해 일하고 있는 그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모른다. 아니, 모르는 체하는 것인가?
   이 책 앞면지의 재미없게 생긴 회색 인간 세상과 뒷면지의 깊고 화려한 초록 숲은 충격적인 대조를 이룬다. 보란 듯이 인간 세상을 등지고 우화해 날아간 매미는 주인공 하나가 아니었다. 그래. “가끔 인간들을 생각”하면 “웃음을 멈출 수 없”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뒷면지에 이르면 매미 소리에 귀가 따가워진다.
   『매미』를 보고 나니, 인간과 관계 맺고 있는 동물들의 이야기들을 묶어낸 숀 탠의 단편집 Tales from the Inner City(Arthur A. Levine Books, 2018)의 번역 출간이 더욱 기다려진다. 25종에 이르는 동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아마 더 많이 부끄러워지겠지만, 괜찮다.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


신수진

어린이책 편집자. 제주 그림책갤러리 제라진 사업팀장. 책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가도 그림책을 볼 때면 정신이 번쩍 든다. 그림책은 말랑말랑한 ‘힐링’이 아니라 뼈를 때리는 ‘채찍질’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9/10/29
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