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토리얼 겨울의 에피파니
전승민
여러분, 눈이 옵니다. 조금 전에 막 올겨울의 첫눈이 대설주의보와 함께 내리기 시작했어요. 저마다의 세계에 얼굴을 묻고 있던 사람들이 별안간 모두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는 광경을 코트 안쪽에 남몰래 담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왜 이다지도 눈을 사랑하는 걸까요? 부러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해보자면,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건 세상 곳곳에 내리고 있는 진행형의 눈이겠지요. 모두의 의식을 단숨에 매혹하는,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시간과 나란히 놓여 있는 눈, 사람들의 투명한 호흡과 한데 섞여서 만들어지고 있는 살아 있는 눈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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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비유》 77호에 실린 글들은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이내 다가올 새로운 날을 설레게 예고하는 목소리들로 읽힙니다. 미래를 가늠하고 계획하는 일은 실상 현재와 과거를 두루 살피고 성찰하는 일과 다름없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내리는 눈을 보고 있자면 문득 과거와 미래가 사라지는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건 어제와 내일이 낯설게 한데 엉킨 무엇인 것처럼요. 눈이 내리면 세상의 모든 소음이 일순간 사라지는 듯하지만 고요의 배면에서는 쉼 없는 일상의 바쁜 속도가 밀쳐둔 아프고 소중한 기억들이 무음의 형태로 발산됩니다. 이번 호에서는 일상과 현실이 강요해온 현재성을 떠받치느라 살필 수 없던 것들이 재림하는 고요한 폭발의 순간을 목격하게 됩니다. 가령, 황사랑 평론가가 백가경의 ‘큐비클’(『하이퍼큐비클』)을 하나의 전시장으로 읽으면서 “우리가 있는 현실이야말로 출구 없는 공간이며 우리는 영원히 탈출하지 못한 채 이곳에서 죽게 되리라는” 감각을 동시대 인간이 처한 실존적 상황의 층위로 받아들이는 작업이 우선 그러하지요.
사실, 우리보다 한 세기나 더 먼저 살았던 누군가도 눈이 시간의 작용에 관해 이처럼 신비로운 작용을 한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경이로운 진실을 1906년과 1907년 사이의 어느 시절에 한 편의 이야기로 녹여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제임스 조이스의 「죽은 자들 The Dead」입니다. 화기애애한 연말의 크리스마스 파티 분위기, 그리고 그 사이로 간혹 날카롭게 날아드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의 정치적인 발화들이 소설의 활력을 배가시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 이 소설의 ‘하얀 눈썹’(白眉)은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아내 그레타가 자기 때문에 죽은 어느 젊은이의 이야기를 남편 앞에서 말할 때,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걸 모르지 않는 가브리엘은 거대한 질투심과 수치에 휩싸이죠. 파티 내내 내심 자랑스러웠던 자신의 지성과 합리성이 일격에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아내의 과거가 자신의 현재를 붕괴시키는 것을 목격하면서 흘리는 눈물의 이름이 다른 그 무엇 아닌 관대함으로 적힐 때(“Generous tears filled Gabriel’s eyes”) 수치스러웠던 그의 패배감은 세계와 그의 간극을 최대한으로 벌려 새로운 공간을 창안하게 됩니다. 눈이 내리는 곳은 바로 그 사이의 공간이고, 그리하여 아일랜드 전역에 눈이 내리는 중이라는 신문 기사는 비로소 사실이 됩니다. 눈이 세계 전체에 내리고 있다는 문장에 주목해야 합니다(“Snow was general all over Ireland”). 가브리엘의 눈물은 그가 아집으로 만든 자아의 얼었던 벽을 녹이는 근원적인 열기로 작용하고, 이내 마주하는 겨울밤의 세계는 가브리엘 또한 그저 한 명의 타자로서 존재할 뿐이라는 진실을 그에게 알려줍니다. 존재론으로서의 평등을 암시하는 것은 바로 하얀 눈이지요. 죽은 자와 산 자, 과거의 사람과 지금의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의 머리 위로 내리는 살아 있는 눈 말입니다. 그 눈의 하강에 사로잡힌 자는 누구든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엉켜 고도로 압축된 ‘순간’ 속에 포박되고 만다는 것을 조이스는 알고 있었어요.
바로 이런 방식으로, 밀도 높은 찰나의 시간 경험과 그것이 일으키는 내면의 각성과 변화의 총체를 에피파니(epiphany)라고 합니다. 과거는 마치 광섬유 안을 통과하는 빛처럼 빠르게 현재를 점유하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의식이 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무한에 가깝게 지연되는 현재의 스펙트럼 안에서 또 다른 오늘로 가까워집니다. 그렇다면 시간의 물리적인 선형성이 붕괴되는 한가운데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몰두는 분명 자기 내부로의 집중이지만 이때 의식의 내부를 구성하는 것은 타인들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나’의 단독성으로부터 빼내어 그와 타자가 맺는 관계성 속에 재배치하는 찰나의 과정이 됩니다. 예컨대, “쉽게 오염되거나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은 아예 들이지조차 말라”는 예소연의 문장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우리가 자신만의 것이라 확신해 마지않는 대부분은 실상 다른 것으로부터의 영향력 안에서 구성되었기 때문이지요.
정의정 평론가가 읽은 김보영의 ‘고래눈’(『고래눈이 내리다』)이 “죽음과 삶의 아이러니한 순환 혹은 연속성에 대한 모티프”로서 세계 자체를 애도하는 상상력의 기후라면, 조이스의 눈이 수행하는 애도는 바로 그 세계의 대척점이자 내핵으로서 자리하는 ‘나’의 부분적인 상실에 관한 것이지요. ‘나’를 잃어버린 빈 공간으로 타자의 무한성이 들어오고 가브리엘은 역설적으로 그러한 자기 상실에 의해 더 큰 진실로 접속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소유욕은 이제, 소유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임으로써 과거라는 시간의 타자성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전환됩니다. 타자로서의 ‘나’와 ‘너’ 사이에 놓인 필연의 한계를 인정할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공동이라는 얽힘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러니, “만날 수 없는데 보고 싶을 땐 어떡해야 할까요?”로 시작하는 최현진의 동화(「무엇이 된다 해도」)는 함께 실린 다른 글과의 만남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하얀 눈뭉치 같던 알에서 태어난 것의 이름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이유도 함께요.
‘연계/확장’과 ‘사회/커뮤니케이션’ 코너에 실린 글들은 바로 이러한 태도로 역사적인 과거의 시간을 오늘로 끌어당겨옵니다. 가령, 파리와 앙카라가 팔레스타인에서 베트남으로, 그리고 일본에서 한국, 더 가깝게는 광주와 미얀마로 이어지는 궤적은 박소현에 의해 시간의 물리적인 배열이 아니라 현재를 과거와 미래 속에 재위치시키는 수행의 일부로 거듭납니다(「연대의 조건과 논리」). 성찰과 비판은 종지부를 찍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리라는 예감의 운동 속에서 가능하고, 그 움직임 속에서 저간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새로운 인식론의 단초를 발견하게 되는 지점은 저마다 다르겠지요. 여러분이 경험할 ‘에피파니’가 이번 호의 어느 글에서 나타날지 못내 궁금합니다. 지난 11월의 끝자락에 대학로에서 우리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경험은 참으로 특별했습니다. (함께하지 못한 분들의 아쉬움은 《비유》 큐레이션 카테고리의 글들로 달래주세요.) 언젠가 다시 만날 그날에는 우리의 에피파니가 어떻게 교차할 수 있는지 이리저리 가늠해보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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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을 흘끗 내다보니 길 위의 자동차들이 죄다 눈초밥이 됐네요. 내리는 눈은 이다지도 공평합니다. 사람과 사물을 가리지 않고 우리 정수리의 생김새를 오롯이 존중하지요. 눈은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됨을 알리는 증거이고, 이는 더는 부인할 길 없이 한 해의 끝과 다음 해의 시작을 준비하라는 권고입니다. 끝과 시작, 기쁨과 슬픔, 행복과 우울…… 서로 상충하는 두 개의 항은 사실,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눈이 알려준 진실이지요. 하얀 눈과 검은 밤하늘도 마찬가지이고요. 흰 눈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검은색 어둠을 향해 나아갈 겁니다. 그러는 동안 잿빛의 다소 음울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하겠지요. 도시의 존재자들이 내뿜는 숨과 자취가 백색을 회색으로 세속화할 거예요. 추위로 코트 깃을 잔뜩 여미고 패딩 주머니에 두 손을 움푹 찔러넣고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걷는 이들이 남긴 흔적일 겁니다. 그러나 이 음울함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내면이 품은 작은 등불 하나를 만나게 될 테고, 초록의 봄과 작열하는 여름, 노랗고 붉은 가을 속에서는 보지 못했던 작은 빛의 세부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을 거예요. 성냥불처럼 이 작은 빛으로 우리는 무얼 할 수 있을까요? 공교롭게도 마침, 이번 호의 글들은 한 편의 예외도 없이 모두 이를 묻고 있습니다.
혹, 평소보다 유독 글이 길게 느껴지신다면 그건 착각이 아니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덧붙이고자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지금 웹진 《비유》를 통해 처음 만나고 있습니다. 쑥스러움과 들뜬 마음을 짐짓 화면 너머로 숨겨두려 했으나 그것은 여러 겹의 문장으로 기어이 튀어나오고 말았습니다. 마음을 숨기는 일은 역시 거의 불가능합니다. 번번이 실패하는데도 왜 늘 새롭게 시도하게 되는 걸까요?
한 해의 마무리와 시작을 조이스의 하얀 눈과, 여러 대의 눈초밥과, 이채로운 시와 소설, 동화, 그리고 사회와 문화를 진단하는 섬세하고도 예리한 논의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살아감이 곧 생존과 동의어인 이 시대에, 겨우겨우 살아남고 있는 우리가 이렇게 연결될 수 있다면 절망은 삶보다 우세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지나간 시간과 존재들에 대한 애도는 우리의 현재적인 살아냄 속에서 수행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대한으로 이 순간을 살아내야만 합니다. 그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절망을 애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살아 있는 이들의 삶뿐이라고 문학은 제게 일러주었습니다. 문학이 자유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보다 한 세기나 더 먼저 살았던 누군가도 눈이 시간의 작용에 관해 이처럼 신비로운 작용을 한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경이로운 진실을 1906년과 1907년 사이의 어느 시절에 한 편의 이야기로 녹여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제임스 조이스의 「죽은 자들 The Dead」입니다. 화기애애한 연말의 크리스마스 파티 분위기, 그리고 그 사이로 간혹 날카롭게 날아드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의 정치적인 발화들이 소설의 활력을 배가시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 이 소설의 ‘하얀 눈썹’(白眉)은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아내 그레타가 자기 때문에 죽은 어느 젊은이의 이야기를 남편 앞에서 말할 때,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걸 모르지 않는 가브리엘은 거대한 질투심과 수치에 휩싸이죠. 파티 내내 내심 자랑스러웠던 자신의 지성과 합리성이 일격에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아내의 과거가 자신의 현재를 붕괴시키는 것을 목격하면서 흘리는 눈물의 이름이 다른 그 무엇 아닌 관대함으로 적힐 때(“Generous tears filled Gabriel’s eyes”) 수치스러웠던 그의 패배감은 세계와 그의 간극을 최대한으로 벌려 새로운 공간을 창안하게 됩니다. 눈이 내리는 곳은 바로 그 사이의 공간이고, 그리하여 아일랜드 전역에 눈이 내리는 중이라는 신문 기사는 비로소 사실이 됩니다. 눈이 세계 전체에 내리고 있다는 문장에 주목해야 합니다(“Snow was general all over Ireland”). 가브리엘의 눈물은 그가 아집으로 만든 자아의 얼었던 벽을 녹이는 근원적인 열기로 작용하고, 이내 마주하는 겨울밤의 세계는 가브리엘 또한 그저 한 명의 타자로서 존재할 뿐이라는 진실을 그에게 알려줍니다. 존재론으로서의 평등을 암시하는 것은 바로 하얀 눈이지요. 죽은 자와 산 자, 과거의 사람과 지금의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의 머리 위로 내리는 살아 있는 눈 말입니다. 그 눈의 하강에 사로잡힌 자는 누구든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엉켜 고도로 압축된 ‘순간’ 속에 포박되고 만다는 것을 조이스는 알고 있었어요.
바로 이런 방식으로, 밀도 높은 찰나의 시간 경험과 그것이 일으키는 내면의 각성과 변화의 총체를 에피파니(epiphany)라고 합니다. 과거는 마치 광섬유 안을 통과하는 빛처럼 빠르게 현재를 점유하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의식이 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무한에 가깝게 지연되는 현재의 스펙트럼 안에서 또 다른 오늘로 가까워집니다. 그렇다면 시간의 물리적인 선형성이 붕괴되는 한가운데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몰두는 분명 자기 내부로의 집중이지만 이때 의식의 내부를 구성하는 것은 타인들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나’의 단독성으로부터 빼내어 그와 타자가 맺는 관계성 속에 재배치하는 찰나의 과정이 됩니다. 예컨대, “쉽게 오염되거나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은 아예 들이지조차 말라”는 예소연의 문장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우리가 자신만의 것이라 확신해 마지않는 대부분은 실상 다른 것으로부터의 영향력 안에서 구성되었기 때문이지요.
정의정 평론가가 읽은 김보영의 ‘고래눈’(『고래눈이 내리다』)이 “죽음과 삶의 아이러니한 순환 혹은 연속성에 대한 모티프”로서 세계 자체를 애도하는 상상력의 기후라면, 조이스의 눈이 수행하는 애도는 바로 그 세계의 대척점이자 내핵으로서 자리하는 ‘나’의 부분적인 상실에 관한 것이지요. ‘나’를 잃어버린 빈 공간으로 타자의 무한성이 들어오고 가브리엘은 역설적으로 그러한 자기 상실에 의해 더 큰 진실로 접속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소유욕은 이제, 소유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임으로써 과거라는 시간의 타자성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전환됩니다. 타자로서의 ‘나’와 ‘너’ 사이에 놓인 필연의 한계를 인정할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공동이라는 얽힘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러니, “만날 수 없는데 보고 싶을 땐 어떡해야 할까요?”로 시작하는 최현진의 동화(「무엇이 된다 해도」)는 함께 실린 다른 글과의 만남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하얀 눈뭉치 같던 알에서 태어난 것의 이름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이유도 함께요.
‘연계/확장’과 ‘사회/커뮤니케이션’ 코너에 실린 글들은 바로 이러한 태도로 역사적인 과거의 시간을 오늘로 끌어당겨옵니다. 가령, 파리와 앙카라가 팔레스타인에서 베트남으로, 그리고 일본에서 한국, 더 가깝게는 광주와 미얀마로 이어지는 궤적은 박소현에 의해 시간의 물리적인 배열이 아니라 현재를 과거와 미래 속에 재위치시키는 수행의 일부로 거듭납니다(「연대의 조건과 논리」). 성찰과 비판은 종지부를 찍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리라는 예감의 운동 속에서 가능하고, 그 움직임 속에서 저간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새로운 인식론의 단초를 발견하게 되는 지점은 저마다 다르겠지요. 여러분이 경험할 ‘에피파니’가 이번 호의 어느 글에서 나타날지 못내 궁금합니다. 지난 11월의 끝자락에 대학로에서 우리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경험은 참으로 특별했습니다. (함께하지 못한 분들의 아쉬움은 《비유》 큐레이션 카테고리의 글들로 달래주세요.) 언젠가 다시 만날 그날에는 우리의 에피파니가 어떻게 교차할 수 있는지 이리저리 가늠해보기로 합시다.
끝과 시작이 한 곳에서 교차하는 이 겨울에, 저는 유계영 시인이 말한 것처럼 모쪼록 여러분이 “가벼워”지기를, 바람과 깃털처럼 가벼워지기를 바랍니다. 내리는 눈송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의 몸은 매우 가볍습니다. ‘무엇’이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의 중력으로부터 놓여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눈이 선사하는 겨울의 에피파니는 우리에게 무중력의 시공간을 열어젖힙니다.여기서 저기로 움직이는 깃털과 나뭇잎, 촛불과 뺨, 아이 러브 유 하는 입술
바람의 둥근 배 타고 가기 좋도록
둥근 배 둥근 배 가벼워야 살아 있는 것 아니겠어요?
─유계영, 「코리올리의 힘」 부분
혹, 평소보다 유독 글이 길게 느껴지신다면 그건 착각이 아니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덧붙이고자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지금 웹진 《비유》를 통해 처음 만나고 있습니다. 쑥스러움과 들뜬 마음을 짐짓 화면 너머로 숨겨두려 했으나 그것은 여러 겹의 문장으로 기어이 튀어나오고 말았습니다. 마음을 숨기는 일은 역시 거의 불가능합니다. 번번이 실패하는데도 왜 늘 새롭게 시도하게 되는 걸까요?
한 해의 마무리와 시작을 조이스의 하얀 눈과, 여러 대의 눈초밥과, 이채로운 시와 소설, 동화, 그리고 사회와 문화를 진단하는 섬세하고도 예리한 논의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살아감이 곧 생존과 동의어인 이 시대에, 겨우겨우 살아남고 있는 우리가 이렇게 연결될 수 있다면 절망은 삶보다 우세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지나간 시간과 존재들에 대한 애도는 우리의 현재적인 살아냄 속에서 수행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대한으로 이 순간을 살아내야만 합니다. 그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절망을 애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살아 있는 이들의 삶뿐이라고 문학은 제게 일러주었습니다. 문학이 자유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