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천사들이 꿈속으로 들어오다
왔네. 어려웠어? 올 만했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데? 걸으면서 이야기할까. 그래. 저기 언덕에 불 켜진 레스토랑 보이지? 대만 식당이야? 정확히는 타이중식 식당인데 저기가 발현지야. 저기 근처에서 문이 완전히 열려버린다는 거지. 맞아. 우선은 좀 걷자. 이쪽? 좋아. 걷다보면 버스정류장이 나올 거야. 잘 지냈어? 얼마 만에 보는 거지? 오십칠 년. 고작? 더 오래된 줄 알았어. 교구가 바뀌고 바빠졌어. 그래 거긴 어때. 이상해. 기도 소리가 멈추질 않아. 가끔은 멀미가 날 정도로. 동시에 자살률이 가장 높아. 이런. 애고 어른이고 할 거 없이 매일 한 시간마다 네 명씩 자살해대는데 도저히 막을 수가 없어. 이제는 공장처럼 제시간에 몇 명 이상 자살하지 않으면 그게 더 불안할 정도야. 결계가 깨진 거야? 차라리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나도 인간들이 이렇게까지 자살할 리 없을 테니 여러모로 조사해봤지만 지옥의 흔적은 없었어. 인류 역사상 그렇게까지 자살을 많이 하는 교구는 처음 아니야? 결국 떠난 이들이 많아. 너도 겪어봤듯이 점점 닮아가게 되니까. 너는 괜찮아? 모르겠어. 내가 스스로 괜찮은지 아닌지 알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 언제였는지도. 요청해서 교구를 바꿀 수는 없어? 불가능해. 휴가를 내는 건? 그러려고 했지. 떠나려고 연락도 돌리고 계획도 대충 짜두고 있었는데 너에게 연락이 온 거야. 미안, 믿을만한 해설자가 필요했어. 생각나는 게 너뿐이었고. 괜찮아. 이것도 휴가라면 휴가겠지. 저게 그들이 내린다는 정류장이야? 맞아. 여기 부스러기가 있어. 확인해볼게. 그들은 이전에 이미 우리들을 만난 적이 있군. 한 명은 기사단 소속이니까. 다크 엘프의 냄새는 왜 여기 있지? 기사단이 다크 엘프를 추적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어. 또다른 건? 희미하게 에시이르로 추측되는 흔적이 있긴 한데. 그것도 역시 기사단 소속이니 그럴까. 이 정도 부스러기로는 더 알아낼 수도 확신할 수도 없어. 건너편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가보자. 어딘가 이음새가 있을 거야. 저기 오네. 사람들이 꽤 있어. 진짜 이걸 타? 어, 그래야 저녁이 낮을 향해 흐르지. 번역에 성공했구나. 우선 이 구간에 관해서만. 저기 뒤에 자리 있다. 와 이 사람들 얼굴 좀 봐. 이들은 자기들이 남의 꿈속에서 존재하는 줄 몰라. 이건 납치하고 다를 바 없는거 아니야? 네가 안쪽에 앉아. 버스는 오랜만이네. 그래? 보통은 지하철을 타지. 시간이 어디로 흐르든 멀미가 안 나니까. 답답하지 않아? 우리에겐 지하가 없잖아. 그 정도는 익숙해져. 인간을 지켜보는 일처럼. 그리고 난 고소공포증도 있고. 그랬지. 맞아. 완전 잊고 있었네. 하늘이 불탔을 때 혼자 지상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어. 보라색 불에 타들어가며 떨어지는 날개와 피부들. 몇 달간 하늘에서 쏟아지던 시체 냄새.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저기 봐, 초록 나뭇잎 사이로 밤이 분해되고 있다. 내리면 어디로 갈 거야? 그들이 머무르던 카페부터 가야겠지. 그 주변도 다 둘러보고. 네가 좋아하는 지하철도 타야 할지 몰라. 이거 라디오 소리야? 꿈에서 자기가 타지도 않은 버스의 라디오 방송까지 구현할 수 있는 인간이라니. 그 정도가 아니라 세계 전체를 옮길 수 있는 인간이지. 기사단 소속이라는 인간은 그걸 알면서 이 꿈의 주인을 만난 거야? 아닌 것 같아. 모를 수가 있나? 바닥을 자세히 봐. 그림자조차 그대로야. 인간이 이걸 분간하는 건 불가능해. 그냥 물어보는 건데 만약 우리가 레스토랑에서 일어날 일을 막지 못하면. 세계가 합쳐질 거야. 지옥이 열리고. 반대편도 넘어오겠지. 에시이르가 막을 수는 없어? 그는 당뇨로 죽어가고 있어. 생물들에겐 그 위대한 잔상이 남아 있잖아. 그걸로는 부족해. 이미 이 꿈이 에시이르의 마지막 잔상을 넘어서고 있어. 이런. 우리가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우리 따위가? 이미 여기에 들어온 이상 여기서 나갈 수 없어. 이곳의 바깥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으니까. 이거 자살특공대였군. 미안. 미친. 미안. 벌써 자살하는 인간들을 걱정하던 때가 그리워. 기사단이 다크 엘프를 쫓고 있다는 이야기는 뭐야? 벨부터 누르자 다음에 내려야 해. 이 꿈의 주인이 인간인 건 맞아? 맞아. 우리가 파악하기로는 그래. 여기의 인간이 0세계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거야? 전혀. 그런데 어떻게 두 세계를 합친다는 거지? 기사단원 때문이야. 자세히 인지는 못하고 있지만 기사단원의 상념을 통해서 꿈속으로 조금씩 흘러들어왔을 거야. 아까 버스 기사 뒤에 앉아 있던 하플링처럼. 그 기사단원 새끼부터 어떻게 해야겠는데. 잠깐. 비켜드려. 먼저 내리라 해. 내가 저 노인보다 훨씬 나이 많은 거 알지? 조심히 가시길. 너도 늙어 죽을 수 있으면 먼저 내리든가. 하늘이 또 찢어지고 있어. 아니야, 노을이 되돌아오고 있는 거야. 또다시 불타는 구름들 좀 봐. 날개와 얼굴이 들러붙은 채로 녹아내리는 시체들. 그런 건 없어. 천천히 하늘을 봐. 그저 노을이 다시 시작되고 있을 뿐이야. 새들이 거꾸로 날아왔어. 날아간 거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구름이 흐르는 방향을 지켜봐. 보고 있어. 이제 저기 서서히 자몽빛으로 번져오르는 나무들을 봐. 보고 있어. 발소리처럼 켜지는 불빛들을 봐. 그래. 이제 좀 괜찮아? 괜찮아. 멀미 때문이야. 차라리 인간처럼 토하는 게 낫지, 저거 공원이야? 맞아. 숲이 아니고? 공원이야. 비싼 도시네. 여기 떨어진 나뭇잎들의 디테일을 좀 봐. 미세하게조차 깨져 있거나 어긋나 있지 않아. 난 이제 우리가 정말 꿈속에 있는 건지 의심스러워. 익숙해질 거야. 익숙해지는 게 겁나는 건 처음인데. 설마 우리 교구도 재현되어 있을까? 이 자가 그곳의 기억을 지닌 자와 마주친 적이 있다면 그럴 거야. 궁금하긴 하네. 그러고보니 그쪽은 나도 가본 적이 없어 어떤데. 실험적인 국가지. 실험용 국가이거나. 그 대가로 발전하고 고장나버린 도시이기도 하고. 고장나? 모든 인간이 보상을 받고 싶어 돌아버린 도시야. 무슨 보상? 그들 스스로도 몰라. 그냥 모두가 다 보상을 받고 싶어 해. 뭘 원하는지 뭘 하는지도 모르는데 언제나 보상을 받고 싶어 한다는 거야. 그건 어디든 비슷해 알잖아. 심지어 우리조차도. 모르겠어. 우리도? 우리 잘못인 건가? 그럴 수도 있지. 에시이르의 결계 이후, 많은 것들이 우리 책임이 됐으니까. 걱정이 되긴 하네 그들이 보상을 바랄수록 그 자리에 기도 대신 미래만 들어설 텐데. 너무 많은 미래가 들어서지. 네 말대로 그들 대다수가 마음속으로 미리 비어 있는 미래를 겪고 있어. 그러다 몇몇 이들은 결국 몸 밖으로 그걸 꺼내버리는 거지. 막을 틈도 없이. 공원에도 들를 거야? 우선 그들이 머물렀던 카페부터. 동선대로라면 카페에 오기 전에 공원을 가로질렀을 거야. 이 길도 걸었겠군. 맞아. 뭔가 느껴져? 불온한 기운이 있어. 확실하진 않지만. 무슨? 이 커플 중 한 명은 이별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흥미롭네. 그래서? 헤어졌어? 너 이런 이야기 좋아했었나? 그냥 우리에겐 불가능한 이야기니까. 넌 그간 이들을 지켜봤을 거잖아? 우리 교구에서 정식으로 특정 인간들을 감찰하려면 서류만 한 천 장쯤 써내야 해. 게다가 대상이 그 에시이르의 기사단원이기도 하고. 그래, 그게 계속 걸린단 말이야. 뭐가? 에시이르는 다 알고 있었을 거야. 이런 일이 일어날 것도 정확히 언제 어디서 시작될 것까지 모조리 다 알고 있었을 텐데. 그렇겠지, 그 에시이르니까. 왜 안 막았지? 우리에게조차 경고하지 않았어. 오히려 그간 우리에게서 이 꿈을 숨겨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에시이르는 처음부터 이걸 원했던 걸까. 에시이르가 세계가 합쳐지는 걸 원했다고? 우리가 지금 이 꿈에 도착한 것도 그의 계획일 수 있어. 우리가 이곳에 도착해서 버스를 잡아 시간을 되돌려 이 길을 걷고 있는 일까지도 다. 에시이르의 계획 안에서 우리는 이 일을 성공하는데 실패하는데? 그건 모르지. 우리가 어떤 결과를 내든 그것까지도 에시이르의 계획일 수 있다는 거야. 다시 말하는데 에시이르는 죽어가고 있고 이제 그의 옷깃 한 올만이 잔상으로 남아 있는 거야. 그 사실은 잘 인지하고 있는 거지? 이미 이 꿈에 들어온 이상 우리는 이걸 그냥 해내야 돼. 알았어. 카페는 언제쯤 나와?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걸으면 돼. 지금 노래 들려? 들려. 미쳤군. 미쳤어. 미쳤네. 이 자의 기억에서 들려오는 거야 아니면 이자가 꿈으로 복제해 온 거리에서 들려오는 거야? 아까부터 계속 집중해보는데도 도저히 모르겠어. 이 꿈은 우리를 초월해 있어. 왜 그래. 갑자기 말이 없이. 인정하기 싫지만 그럴지도 몰라. 뭐? 이 자의 꿈이 우리조차 초월해냈다는 말. 지금 우리가 같이 듣고 있는 이 노래가 어쩌면 내 기억에서 들려오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무슨 소리야. 언젠가 스낵바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만난 남자가 가라오케 기계로 이 노래를 불러줬었어. 지금 들리는 노래의 목소리가 그 남자의 목소리 같아. 노래의 배경에 집중하면 미세한 소음이 들릴 거야. 어. 들린다. 웃음소리랑 대화하는 목소리들도 조금. 교포의 억양들이야. 정확히 내가 들렸던 날 스낵바에서의. 창밖에 빗소리까지. 이런. 스쳐본 적도 없는 천사의 기억까지 구현한다고? 그때의 차 소리도 들려. 구급차가 지나가고 친구가 노래를 부르다 창문을 지켜봤지. 친구? 애초에 거긴 왜 갔는데? 그 친구가 세 시간 뒤에 교통사고로 죽을 거였어. 너는 인간의 모습이었어? 그랬지. 너희 교구에서도 그건 금기 아니야? 금기지. 알아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이젠 더 묻기가 무서워지네. 예의상 이 친구의 삶에 대해 자세히는 이야기하진 않을 거야. 다만 알잖아. 아주 특별한 잘못도 아주 특별한 실패도 없이, 상식적인 사고를 지켜가며 살아가면서 매일매일, 매 순간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있어. 이 친구는 거의 사십오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자신을 수치스러워 했지. 친구가 겪는 수치심의 깊이는 그 순간마다 하나의 계절과 같았고. 나는 친구에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줘야 했어. 어차피 너에 대한 기억은 너와 헤어지는 순간 지워질 텐데. 그래서 나도 사십오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그 친구에게 똑같은 말을 해줬지. 결국은. 스낵바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다 졸음 운전하던 트럭에 치여 죽었어. 목이 부러져 머리통이 반쯤 터진 채로 공중전화 박스까지 날아갔지. 슬펐나? 아니. 그래도 위대하다고 생각했지. 뭐가? 끝까지 그 친구가 수치심과 함께 살아냈다는 게. 저기 중정이 열려 있는 카페가 그들이 들렸다던 카페인가? 맞아. 그들은 중정의 테라스에 앉았겠지? 아마도. 커피? 우리 꿈속이야. 맞네. 그래도 커피잔 안의 물결에 사람들의 얼굴이 비치고 있어. 오, 여기 타일 벽만큼은 구현에 실패했나봐. 징그럽게 깨끗해. 때가 하나도 안 타 있어.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이 공간을 기억 속에서 보호하려 했을지 몰라. 여기서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인데. 글쎄. 자세히 보면 물 자국이 조금 묻어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단순히 카페 주인이 변태일 지도 모르지. 중정으로 나가보자. 바람. 뭐? 아니 그냥 여전히 놀라워서, 옷깃이 사실처럼 흔들리잖아, 차례대로 주름이 지고 속눈썹이 하나하나 떨려. 이곳에 영영 머물고 싶어지기 전에 그만 감탄하는 게 좋을 거야. 여기 앉아 있었나보네. 테이블 공중에 부스러기가 떠 있어. 알아. 뭐가 보여? 어디서 엉성하게 배워와 어설프게 만든 체리 엉트르메 하나를 두고 두 인간이 의자에 거의 누워 있어. 드디어 낯짝을 보겠군. 얘네가 맞아? 왜? 그저 흔한 프리랜서 거지들 같은데. 전혀 이 사달을 낸 인간들처럼 보이지 않아. 어떤 모습을 상상했기에 그래. 정확한 어떤 차림을 떠올렸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조금. 그냥 전형적인 프리랜서 거지들인데. 이들의 가난한 우울증에 사물들도 질려하고 있어. 이쪽이 기사 단원인가보네. 지쳐서 눈이 감기고 있는데도 귀는 이쪽을 향해 기울이고 있는 게 느껴져. 무의식중에도 경계의 소리를 의식하고 있나봐. 아마 우리의 속삭임까지도 들을 수 있을 거야. 이토록 잘 훈련받고 초월적으로 예민한데 왜 자신이 연인의 꿈속에 갇혀 있다는 걸 못 알아차린 거지? 네 질문 안에 이미 답이 있는 것 같은데. 뭐? 연인이니까. 연인이니까? 그래.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어? 아무 말 없이 쉬고 있어. 여기 오기 전에 뭘 했길래 이렇게들 진이 빠져 있는 거야? 미술관에 다녀왔을걸. 그리고? 그게 다야. 심지어 미술관에 오래 있지도 않았어. 근데 왜 이래? 그럴 때지. 스스로 늙었다고 여기며 조금의 성가심도 회피하기 시작하는 시기. 그러면서 어린애들이 하는 건 또 다 하고 싶어 하고 애들 사이로 유리창의 거울을 마주칠 때마다 우울해하면서. 우습네. 에시이르도 하지 못한 일을 저지른 인간이 그렇게 행동한다는 게. 우린 그 미술관도 가야겠지. 네 가설대로라면 여기 어디에선가 어긋난 이음새가 보일 테니까. 맞아, 어딘가 반드시 변환된 순간이 있을 거야. 그래. 그런데 여기 머물수록 오히려 온 이미지들이 점점 더 매끄러워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그럴 리가. 그들은 뭐하고 있어? 여전히 말없이 쉬고 있어. 사이는 어때 보여. 글쎄. 평범해 보이는데 뭐 아는 거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네 상상대로 한 명은 헤어지는 상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것까진 잘 알 수 없어. 어쩌면. 상대의 입 밖으로 그 말이 흘러나오기 바로 직전에 세계를 합쳐버린 걸까. 단지 그 말을 막기 위해서? 어쩌면. 과한 가정인데. 근거도 없고. 아니면 혹시 너 이전에 기사단원의 꿈속에 들어가봤던 건 아니지? 음. 이런. 들어갔었나보네. 왜 그랬지? 무슨 명분으로? 명분은 없었어. 그냥 이 인간 꿈에 들어가면 파리에서 하이든이 지휘하는 92번 교향곡 초연을 들을 수 있다는 소문이 있었거든. 아까 이 기사단원이 우리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는 말이 인간 기준에서 과거와 미래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는 거였어? 반은 맞고 반은 틀려. 모든 기사 단원들이 그렇듯이 얘도 좀 맛이 간 애라 자기 수명을 담보로 지옥에서 몰래 소리를 사와. 하늘이 불탄 후 흩어져버린 소리를 모으지. 남은 수명이 이제 아마 앞으로 이십 년도 안 될걸. 그런데 귀가 너무 좋으니까 이 인간의 꿈속에서는 소리 하나하나가 꿈결에 전부 정밀하고 깊이 있는 음상으로 튜닝돼. 프록코트를 다듬는 하이든의 손가락 길이와 연미복을 입고 앉아 있는 귀족들 뒤로 곧 혁명이 일어나 온통 피바다가 될 거리의 예감까지 부드러운 공기감에 휩싸여 느껴지지 또 그 윤기가 가미된 음선들의 하모닉스가. 그냥 고성능 인간 DAC이라는 거네. 대충 알아들었으니까 본론이나 말해. 본론? 이 인간 꿈속에서 네가 진짜 보게 된 거. 정확히는 봤다기보다 들었어. 그러니까 뭘. 음. 뭔데. 음. 음? 자살하는 미래에서 들려오는 신호음. 맙소사, 여기에서도 죄다 그 타령이군. 그래서 얘가 결국 그런다는 뜻이야? 아니. 매일 이 기사단원 친구의 꿈속 어딘가에서 자살하는 건 지금 이 꿈의 주인이야. 이런. 이 친구는 그 꿈을 기억 못 하고? 뇌가 전부 지워내는데 귀가 좋으니 신호음은 남아 있어. 조금 헷갈리는데. 이 친구의 꿈에서 나타난다는 그 연인의 신호랄지 미래의 모습은 이 친구의 불안함이야 바람이야? 글쎄. 슬픔이야 해방이야? 음. 절망이야 새로움이야? 전부지. 남은 삶이 길게 느껴지겠군. 당장 오 분, 일 분 앞의 삶부터 두렵게 다가오겠지. 카페 좁은 문밖으로 발목 얇은 발걸음들 빛 속을 지나가는데 졸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 않는 동시에 각자의 동공 흐릿한 끄트머리에 상대를 얼음처럼 맺혀놓으면서 눈길이 정확히 가닿을수록 녹아내려 온몸이 사라질 듯이. 여기 있는 자들은 지금도 꿈을 꿀 수 있을까. 남의 꿈속에 납치된 사람이 꿈을 꾸면 그건 누구의 꿈이라 불러야 하지. 아직 시도해보지 않았어. 만약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면 나도 없어져버릴 테니까. 그렇다면 반대로 여기선 죽는 사람이 없을지도. 부재라는 개념이 없을 테니. 다시 좀 걷자. 아까 본 공원에 가는 거야? 그래야겠지. 그 전에 또 시간을 돌려야 하는 건 아니야? 괜찮아. 이렇게 카페 문을 천천히 열고 나와서. 이런, 들려? 자, 이제 그저 걸어가면 돼, 그들이 가로질러 걸어온 길을 따라. 또 음악이 흘러. 그렇네. 저기 위에서. 구름. 구름 속. 구름 위에서. 어진 시선처럼. 성가 같아. 합창인가. 맙소사 바람이 우리에게도 불어오고 있어. 이 색채 좀 봐 몸 위로 소리가 묻어나. 그래서 뭐가 먼저 오고 있는 거지? 바람과 음악 중 무엇이? 맨발로 애인의 집에서 몰래 나온 그녀는 클럽으로 향하는 심야버스에 앉아 잠들었다. 빗물에 번져 오르는 패밀리마트 불빛 안에서 못 본 지 오래된 친구들이 오래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교복을 입고 나란히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상점가에서 킥보드와 자전거를 훔쳐, 다 함께 새벽 내내 소리 지르며 도로를 가로지르던. 뭐? 뭐가. 방금 무슨 말을 하지 않았어? 아니? 분명히 뭐라 말했어. 말투도 좀 이상했고. 내가? 어 네가. 전혀. 아무 말도 안 했어. 이 음악은 또 누구의 건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혹시 네 기억이야? 아니지. 저기 교회에서 들려오는 건가. 그렇다기엔 음상의 크기에 비해 거리가 멀어. 여기서 교회는 거의 보이지도 않잖아. 아. 왜? 저 파란 쉐보레에서 들리는 거 아니야? 그런가. 운전석에서 남자가 바지를 벗은 채 기도하고 있어. 바지와 팬티는 왜 벗고 있는 건데? 모르지. 음악은 분명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 같았는데. 굳이 깊게 생각하지 말자. 여기는 꿈속이니까. 왜 남의 꿈속에서 발기한 채 기도를 하지? 하지만 그가 부르는 성가는 막 태어난 아가와 같았어. 그만. 이 길로 건너면 돼? 신호 바뀌면 건너. 차가 너무 많아. 본래는 휴일이었으니까. 이 차들 전부에 인간들도 다 타 있는 거지? 봐, 차창 안으로. 다 다른 눈코입과 몸들이 보이네. 더이상 놀랍지도 않아. 이 차들의 종착지까지도 전부 구현되어 있겠지. 깊게 이어지는 고가도로와 터널을 타고 나가, 저녁이 내려앉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사람이 내리고, 집 문 앞까지 걸어가, 잠시 서 있고, 서 있고, 서 있고,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가고, 불을 켜고, 의자에 앉고, 어딘가를 지켜보다 살아 있다는 걸 잊기 위해 불을 끄고 잠들 때까지. 아주 인간 납셨네. 내일은. 여기에 내일은 있어? 모르지. 투어버스에 타 있는 남자 꼬마애 보여? 2층에서 이어폰 꽂고 있는 애? 맞아. 나는 저 아이를 아는 것 같아. 말이 이상한데. 그러게. 뭐?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말이었어. 그런데 그렇게밖에 말을 못하겠네. 언제나 똑같은 인간들이 있어. 꿈 이야기야? 아니 꿈 밖에서. 잘 알잖아, 이들 한 명 한 명이 모든 시대에 걸쳐 반복된다는 거. 패턴처럼 동일한 인간성과 거의 동일한 취향의 수준을 지닌 채 말투와 목소리의 무게, 머리통을 염색하고 싶어 하는 색깔까지 심지어 동시대에서도 여럿이 한 번에 나타나. 알지. 그들의 자의식에 설탕을 타주고 서로 만날 수 없도록 만드는 게 우리 일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 나는 저 아이를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아. 그래. 읽어? 학교 매점에서 산 이어폰을 꽂고 투어버스 펜스에 기대어 도시 속으로 얼굴을 내밀면 어제 밤새 누나들이 길게 땋아준 앞머리가 휘날리고 누나들 옷에서 하루 종일 풍기던 대마초 냄새가 정부청사 창문들의 차가운 모양새와 공원 나뭇잎의 흔들림에 섞여 두 뺨 위에서 맴돌아 누나들의 크립 워킹처럼 시간이 레이백 되듯이 현재가 기억에 밀리듯이 그러다 다시 더 앞서 조각들이 합쳐지듯이 조립되어 나타나는 지금의 풍경들 미래보다 미래같이 외롭고 적막한 기분으로. 뭐라는 거야. 뭘 읽고 있는 거야? 누군가의 손이 아이의 어깨를 붙잡는다. 뒤돌아 릴스를 찍고 있는 친구와 마주치고 짜증 내고 웃으면서 담임 선생님은 숨을 헐떡이며 도너츠를 먹고 있고 강이 흐르는 다리를 건널 때 강이 흐르는 다리 맞은편에서 또다른 투어버스가 다가오고 소리 질러 인사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잘 들어봐. 테크노야, 지금 저 아이의 이어폰에서. 울창한 공원 한가운데에 그 소리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석상처럼 서 있다. 우아함을 이루 표현할 수 없이 단단한 자태로 미천한 생명들의 경외에 찬 관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정신 차려. 이런. 내 말 들려?
뭐야. 괜찮아? 너 잠깐 돌았었어. 내가? 눈이 뒤집히고 몸을 벌벌 떨다 기절했어. 뭔가 거대한 걸 본 기억이 나. 무엇인가 말이 안 되지만 공원 한가운데에 공원보다 커다란 무언가가 설명할 수 없이 밀도 높은 단단한 무엇인가가. 진정해. 여기는 어디지. 극장이야. 아니. 조금 더 누워 있어. 원인을 찾은 것 같으니까 안심하고. 원인? 아까 이 꿈에서 다크 엘프 냄새가 난다고 했지. 맞아. 확실치는 않아. 확실해. 그가 이 사람 꿈에 소설을 써놓은 것 같거든. 그것도 오랫동안 길게. 그리고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피가로? 피가로가 살아 있다고? 그런 것 같네. 기사단원이 추적하고 있다는 다크 엘프가 그였어. 당장 잡아야 하지 않아? 그 새끼 꿈속에서 실종된 천사들이 만 명은 넘을 거야. 아직 일어나지 마. 더 쉬어. 실종된 악마들은 그보다도 더 많겠지. 그곳에 성물이 있다는 소문이 계속 돌았으니까. 이제 좀 이해가 되네. 한 인간의 꿈이 어떻게 이리 광대할 수 있는지 피가로가 개입했다면 그럴 수 있겠어. 피가로도 이 정도는 불가능해. 이 인간의 꿈에 비하면 피가로의 꿈은 여러모로 비어 있지. 기하학적으로 미로화되어 있을 뿐이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설마 피가로 꿈속에 가봤어? 그랬지. 뭐? 어떻게 돌아왔지?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운이 좋았어. 운이 좋아? 이 일을 끝내고 나서 말해줄게. 슬슬 좀 걸어봐야겠어. 연극극장이라고? 조심해. 맞아, 꿈의 주인이 운영하는 극단의 극장이야. 초라하네. 저기가 객석인가. 그렇지. 사람들 허리가 남아나질 않겠어. 무릎도 못 펴겠지. 얘넨 코스프레도 하는 거야? 무대의상일 걸 모르겠네, 겸사겸사인 것 같아.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이런 극단이 우리 교구에도 있었다면. 그랬다면? 자살하는 아이들이 조금은 줄었을지도 모르겠어. 관객은 좀 들어? 생각보다 많이. 점점 더 늘고 있기도 하고. 의외로 음악 잡지에 기사가 나서 인기가 많아졌어. 기사단원 친구보다 이쪽이 수입이 더 좋을걸. 네가 손 쓴 건 아니고? 몇 번이나 말하지만 우리 교구에서 그런 짓은 금기야. 우리가 여기 왔다는 건 이들도 여기 왔었다는 거겠지? 오래 머물진 않았어. 미술관에 가기 전에 잠시 들렸지. 뭐 좀 보여? 아직. 기절해서 그런지 좀 어지러워. 애초에 피가로는 이 꿈에 어떻게 들어온 거야. 누군가 길을 연결해줬을 거야. 누가 왜? 모르지. 그가 개입했다는 것도 방금 알았는데. 기절하기 전에 내가 문장들을 중얼거렸다고 했지. 중얼거렸다기보다는 거의 독백했지. 그전에도 이 꿈 안에서 몇 번인가 그랬어. 아마 그가 써놓은 문장들일 거야. 지난 오백 년간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작가 아니야? 그렇지. 그래도 몇 번은 재평가될 기회가 있었는데 다 흐지부지됐어. 불쌍한 양반. 마지막 왕족이 실패한 글쟁이가 되다니. 하도 실패해서 나중엔 아마 다 자비출판으로 냈을 거야. 기도라도 해줘야 해? 여기 부스러기가 있어. 저기는 대기실인가? 꿈의 주인은 대기실에 들어가고 기사단원은 객석에 앉아 있는 게 보여. 객석에서 니키가 뭘 하는데? 그냥 앉아 있어. 멍해 보이는데 뭔가를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기? 어디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아? 거기까진 알 수 없어. 뭐야. 왜. 지금 얘 나랑 눈이 마주쳤어. 그럴 리가, 착각이겠지. 나에게 뭐라 말하고 있어. 뭐? 아닌가? 방금 입술이 움직인 것 같았는데. 아닌가 봐. 다시 눈길을 돌렸어. 혼잣말이었을 거야. 음악에 집착하는 놈들은 죄다 어딘가 맛이 가 있거든. 일종의 뭐랄까. 아주 심오한 차원에서의. 애정결핍 장애인들이랄까. 주인은. 대기실에서 아직 안 나온 거야? 그러게. 아하. 이제 알겠어. 뭘 알아? 기사단원이 객석에서 뭘 듣고 있던 건지. 뭔데. 불안. 불안? 여기 앉아서 대기실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른 소리를 찾던 거야. 왜? 상상력을 죽이기 위해. 그건 한순간 이성을 뛰어넘어 본인의 영혼에 피를 낼 테니까. 무슨 상상이기에. 네가 아까 말했던 얘의 꿈과 관련 있겠지. 갑자기 궁금한 게 하나 생겼는데. 뭔데. 피가로 말이야. 최소 오백 살은 됐잖아. 근데. 만약 피가로가 서른 살 남짓의 인간이랑 자면, 그건 그들 기준에서 아동성범죄일까? 알고 싶지도 않아. 기사단원의 냄새가 두 명이라 그래. 두 명? 하나는 얘고 다른 하나는 누군지 모르겠어. 얼굴은 찾을 수 없지만 우리 근처에서 냄새가 나. 근처라니. 모르겠어. 처음에는 얘 냄새인가 했는데 아니야. 에시이르와 가까운 인간의 냄새가 마치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처럼 희미하게 계속. 말하다 어딜 가는 거야. 이상해. 아까부터 대기실 안이 보이질 않아. 부스러기 속에서도 지금 여기에서도. 그렇네. 왜지. 묘하게 보이지 않아. 꿈이 구현하지 못했나? 여기 극장 바닥에 실금까지 구현했는데 대기실을 못했다고? 그래. 안 했다고 보는 게 더 맞겠지. 우리가 직접 들어가보면 알게 될 거야. 좋아. 이 안에 답이 있을지 몰라. 연다. 열어. 왜 긴장되지. 그냥 열어버려. 알았어. 괜찮겠지? 안 괜찮을 것도 없지 않아? 그래. 그래. 연다. 동지? 동지? 여기야. 뒤에 있어. 어디지.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우리가 들어온 문이 사라졌어. 어둠인가. 어둠. 너는 어둠을 느낀 적이 있어? 없지. 그렇지. 그건 우리에게 미치지 못해. 이건. 어둠이 아니야. 그저. 그저? 없어. 여기는. 없다? 무엇으로부터? 이 꿈? 아니면 세계? 왜 여기는 없지. 모르겠어. 없어. 없어. 없어. 없어. 없어. 야간도로의 표지판. 어? 알파로메오 조수석의 에어컨 소리. 뭐? 새벽 공원의 냄새. 양성구유 악마와의 끝없는 오럴섹스. 피와 땀. 정액과 질액. 돌았군. 우리는 문 안으로 들어온 걸까 밖으로 나간 걸까. 엄청난 소리를 해놓고 갑자기 정상적인 소리를 하는 척하네. 그들은 여기에 있었어. 악마들이 여기로 들어왔다는 뜻이야? 아마도. 하지만 그들조차 여기선 없어. 미안, 미안한데 잘 못 따라가겠어. 내가 있었어, 보라색 불빛이 둘러싸인 유리창 안에서 섹스하면서. 혹시 피가로의 문장을 읽고 있는 건가? 아니, 여기에는 그의 영향력도 없어. 여기가 어딘데. 이해가 안 돼. 여기서 다 있었어. 너도 알 수 있어. 이들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독서 클럽이 열린 탁구장에서 처음 만나 자기소개를 하기 전에, 탁구장 겸 서점이 있는 동네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각자의 책을 들고 스쳤던 순간부터. 순서가 없어. 헷갈려. 여기는 게임센터인가? 갈스패닉 오락기 앞에 같이 앉아 있네. 수영장 탈의실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 다리 위에서 다리 아래로 지나가는 화물기차의 휘슬을 듣고 있어. 책을 펼쳐놓고 졸고. 달리는 버스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피가 넘치는 욕조에서 들것에 실려 나가. 베란다의 커튼이 새벽에 물들어. 이게 다 뭐지? 여기에 있어. 여기. 서점. 법원. 유치장. 재활원. 미술관. 여기. 망드외가 그림 앞에 혼자 서 있어. 아니. 그림 안에 서 있는 건가? 그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됐어, 어떻게? 이때부터였나. 여기는 없어. 알겠어. 여기는 만들어진 부재라는 거지. 일부러 도려낸 거야. 잊어버리기 위해. 니키와 함께한 모든 순간들을. 그럼 우리는. 우리는 여기에 어떻게 있지? 여기에 우리는 없어. 지금 이렇게 대화하고 있잖아. 이건 그저 소리일 뿐이야. 소리? 기사단원 니키가 우리를 재생하고 있어. 그가 이 꿈에 갇힌 걸 깨달은 후의 미래에서. 그건 개소리야. 인간은 우리말을 시늉조차 할 수 없어. 피가로. 이런. 피가로가 존재하는 모든 언어를 이 꿈속에 발라놨어. 말은 자연스레. 흐르고 있군. 그렇다면 지금 이 대화들은 전부. 기억이야. 망드외의 꿈속에 갇힌 니키의 기억. 우리는 실패한 건가? 아직. 우리가 대기실로 들어간 순간 니키가 우리를 본인의 기억으로 옮겨 부재로부터 격리시켜줬어. 너는 그걸 어떻게 알지? 난 이 친구 꿈에 들어가 본 적이 있으니까. 아. 그랬다고 했지. 이 대화는 몇 번째지? 알 수 없어. 처음일 수도 수억 번째일 수도. 니키라고 했나 그 기사단원. 맞아. 우리에게 뭘 바라는 거야? 문이 열리는 걸 막아달라는 거겠지. 이 꼴로 어떻게? 봐. 뭐지? 빛? 쏟아지는 기차와 같은.
어디야. 여기야. 뭐지? 방이네. 우리가 여기에 어떻게 왔지? 부재가 기억을 뱉어내게 만들었나봐. 이건 빛인가. 몇백 년만 같아. 아직 꿈일 테니 진짜 빛은 아니겠지. 천장에 실링팬이 돌아가고 있어. 여긴 그들의 집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이 고양이 털들과 원목 식탁의 감촉은 진짜로 진짜 같은데. 왜 그래 이미 숱하게 경험했잖아. 이 침구의 문양과 기호들을 봐. 하이 엘프 양식이야. 니키가 밀반입했겠지. 이 담배는 노움들 조합에서 파는 거고. 내가 니키의 기억에서 본 그들의 방과 달라. 그래? 그런가? 다른 이들의 집일까? 우리를 이곳으로 내뱉은 건 니키의 의도일까 이 꿈의 주인의 의도일까? 망드외. 뭐? 이 꿈의 주인의 이름. 하지만 이건 그 누구의 의도도 아니야. 그냥 뱉어진 거지. 그냥이라. 우리가 꿈 밖으로 내뱉어졌을 가능성은? 그럴 리는 없어. 왜 그렇지? 그랬다면 우리가 당연히 느꼈을 테니까. 생각할 새도 없이 피부처럼 분명하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난 더이상 구별할 자신이 없어. 네 주위로 상승하는 그늘 좀 봐. 빛을 물리치고 있어. 구름인가. 어디서 지나가고 있는 거지? 꿈에서? 꿈 밖에서? 창밖에서. 창밖에는 뭐가 있지? 하늘이 있겠지. 근데 너 담배는 언제부터 다시 핀 거야? 아까부터. 이 바닷빛 연무 보여? 입술 끝에서 생각대로 색과 모양이 변화하지. 아마 인간이 들이키면 곧장 폐가 녹아내릴 거야. 장식용으로 챙겨왔겠지. 뜯어져 있었어? 아니. 너는 그러면 남의 꿈에서 남의 담배를 훔쳐 피고 있는 거야? 이곳이 아직 꿈이라면 맞아. 저기. 담배 연기가 창밖이 아니라 문틈으로 빠져나가고 있어. 아까 네가 말한 인간 말이야. 인간? 그 스낵바에서 노래를 부르던. 어. 왜 그 친구였지? 네 말대로 그런 인간들은 수많은데 왜 그에게는 인간의 모습으로까지 다가가서 친구가 되었지? 꼭 대답해야 하는 거야? 그렇지는 않아. 돌이켜보면 나는 그가 내가 뭔지 알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 그래서? 그가 네가 뭔지 알아본다면 그후에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뭔가가 내 안에서 몇백 년간 벌어지고, 가라앉고, 찢어지고 있는 무엇인가가 마침내 끝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 그건 사실상. 맞아, 말했잖아, 닮아가게 된다고. 아니. 넌 애초부터 너와 가장 닮은 인간을 고른 거야. 솔직히 말할게. 나도 약간은 만만하게 봤나 봐. 어쨌든 결국 인간. 그것도 한 명의 꿈인 거니까. 이들을 쫓아 거슬러 오르다보면 우리가 이들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음새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래봤자 고작 인간의 꿈인 거라고 너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도 우리 둘이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내심 얕봤지. 이제는 잘 모르겠어. 모르겠다는 말도 거짓이고 불가능할 거라 생각해. 이건 우리 따위가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아? 이 방 밖에서 뭔가 찾을 수도 있지. 우리가 니키의 의도대로 이 방에 뱉어진 걸지도 모르고 여하간 우리가 아직 여기에 있어. 그래. 그래. 너는 피가로의 꿈에서도 살아 돌아왔잖아. 그래. 그랬지. 네 말이 맞아. 나가보자. 이 방에 부스러기는 없는 거지? 없어. 나가기 전에 하나만. 이곳이 아직 꿈이라면 여기는 언제지? 언제? 방이 밝았으니까. 아침이거나 낮이겠지. 같은 날은 맞아? 적어도 같은 꿈이긴 하겠지. 나가보면 알게 될 테니 문을 열어. 자. 빛? 또? 다가오고 있어. 소리처럼. 연결되어 지나가고 있어. 복도 같아. 복도라기에는 너무 길고. 덜컹거리는데. 집이 아니라. 여기는. 기차네. 이들이 그날 증기기관차에 있었어? 아니. 그들은 그들의 집에서 출발했어. 공원을 가고 미술관을 가고 카페를 가고 식당을 갔지. 함께 봤잖아? 아까 그 방은 이 기차의 객실이었던 걸까? 실링팬이 있는 객실이라. 잠깐 낯익은 숲 냄새가 나. 저기 산맥들이 엎질러지며 이어지고 있어. 기차를 따라오듯이. 빛이 계속 창으로 부딪쳐와. 뼈가 터지도록 머리를 찧어 소리치는 천사들처럼. 창에 새겨진 작은 기스들을 따라 온기가 흘러. 이 기차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이리 와봐. 최근에 이런 레이스 커튼을 본 적 있어? 이 정도로 완벽하게 바래 해진 질감의 커튼은 드워프들의 꿈에서나 가끔 볼 수 있지. 그러게, 오랜만이네. 마지막으로 본 게 한 세기는 전이었던 것 같은데. 가정폭력으로 짓밟히던 우드 엘프들 집 안에서. 뭐라고? 기적소리 때문에 못 들었어. 별 이야기 아니었어. 이런 박력의 기적소리도 들어본 지 한참인 거 같은데 바람이 떨고 있어. 소리의 잔향이 산 끝까지 사라지질 않아. 열려 있는 창에 손자국이 남아 있고 의자들에도 먼지가 거의 안 쌓여 있는데. 왜 아무도 보이질 않지? 앞 칸들에 있겠지. 조금 더 가보자. 이 꿈에서 계속 걸리는 게 하나 있었는데. 뭔데. 망드외라고 했나. 이 인간의 꿈에는 환상이 없어. 이 기차조차 너무나 진짜야. 아까는 여기가 꿈 밖일지도 모른다며. 모르겠어. 환상이 없는 꿈은 없잖아? 그렇기는 한데. 만일 이 꿈에서는 시간이 환상이라면? 그렇다면? 모르겠어. 우리가 여전히 존재하긴 하는 걸까.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저기 다음 칸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그래 인간의 숨 냄새가 희미하게 있네. 다시 또 객실은 아니겠지? 열어봐. 아니네. 이 칸도 커튼이 휘날리고 있어. 저기 누군가 앉아 있는 것 같은데? 뒷모습이지만 잠들어 있는 거 같아. 다가가서 살펴보자. 이 냄새. 그새 계절이 변했어. 계절이 몇 번을 변한 거지? 헤아릴 수가 없어. 여기 커튼은 조금 달라. 아까의 양식이 아니라 뭔가 더. 그런가. 잠깐. 커튼 너머에서 산이 사라졌어. 그 거대한 산맥이 갑자기 어떻게. 저건 건축물들인가? 구름? 여기가 어딘지부터 저자에게 물어봐야겠어. 저자가 인간이긴 해? 숨소리나 뒷모습으로 봐선 인간이 맞는 거 같긴 한데. 좌석들도 알게 모르게 아까 칸이랑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여기 좌석들에 새겨진 낙서들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 본 적 있어, 분명 이 기호와 그림들 어디서였지. 눈을 감고 따라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기억이 도저히. 기차가 멈췄나. 아니 계속 나아가고 있어. 바람이 멈췄길래. 멈춘 게 아니야. 만져봐. 미세하지만 커튼이 흐르고 있잖아. 멈춘 게 아니라 조심하고 있는 거야. 뭐를? 모르겠어. 여기 뭔가 좀 선명해진 것 같지 않아? 그러게.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는 동시에 사라지고 있어. 저자에게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사라지다니 뭐가? 창문이. 기차가. 여기가 사라지고 아니 사라진다기보다는. 그보다는. 그보다는. 들려? 관현악단이야. 나팔 소리가 저 멀리서 하늘을 창안으로 밀어와. 느껴져? 하늘이 들어오고 있어, 이 구름의 굴곡들. 보드라운 차가움. 이 자를 봐, 얼굴에 빛이 머무르고 있어. 헤엄치듯이. 출렁이듯이. 흘러가듯이. 솟아오르듯이. 퍼져가듯이. 떠오르듯이. 투명해지듯이. 틀어지듯이. 짓밟히듯이. 가라앉듯이. 긍휼하듯이. 읊조리듯이. 스러지듯이. 진동하듯이. 모여들듯이. 뛰어오르듯이. 춤추듯이. 회전하듯이. 꿇어앉듯이. 조아리듯이. 고백하듯이. 휘날리듯이. 자라나듯이. 휘어지듯이. 되돌아오듯이. 바라보듯이. 속삭이듯이. 기도하고 있군. 맞아. 기도하고 있어. 이 모든 빛이 오로지 이 잠들어 있는 자의 얼굴을 위해 기도하고 있어. 이 자는. 에시이르야. 어린 시절의 에시이르. 여기는 어디지? 같은 꿈의 반대편. 니키와 피가로가 우리를 여기로 데려왔어. 네 말처럼 환상이 된 이 꿈의 시간에 우리를 반사시키며. 이 꿈속의 에시이르를 깨우기 위해. 그 말은. 에시이르가 잠에서 깨어난 순간 우리는 사라질 거야. 우리는 지금 그저 반사되고 있을 뿐이니까. 사라진다는 건 어디로 사라진다는 거지? 지금 우리가 실제로 머무르고 있는 곳. 믿음? 혹은 부재. 만약 잘 풀린다면. 교구로 돌아갈 수도 있는 건가? 교구의 사람들이 걱정되나보지? 그럼. 그들은 신을 저주해도 우리를 저주하진 않으니까. 돌아갈 수 있다면 뭘 할 거야? 글쎄. 그냥 지하철에 앉아 있고 싶네. 모르겠어. 그냥 그건 좀 감동적이거든. 거기 앉아서 맞은편에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거. 그게 다야? 우선은. 이제 얼마나 남았지? 우리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은데. 에시이르는 이미 우리를 눈치채고 있어. 우리에게 시간을 주고 있는 거야. 그럼 결국 우리는 성공한 건가? 실패한 건가? 둘 다 아닐걸. 어쩌면 안 일어날지도 몰라. 네 등을 봐, 날개가 돋아나고 있어. 이 시기에는 아직 천국이 존재했나봐. 하. 혹시. 에시이르가 여기까지 다 알고 있었다면. 그랬다면? 왜 이렇게까지 돌아오게 만든 거지? 본인이 진즉에 처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마. 아마?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기고 있으니까. 과연. 그 말대로라면. 우리보다 낫네. 우리보다 언제나 그랬지. 그럼 이제 깨울까? 그래. 부디. 그래. 그래.
뭐야. 괜찮아? 너 잠깐 돌았었어. 내가? 눈이 뒤집히고 몸을 벌벌 떨다 기절했어. 뭔가 거대한 걸 본 기억이 나. 무엇인가 말이 안 되지만 공원 한가운데에 공원보다 커다란 무언가가 설명할 수 없이 밀도 높은 단단한 무엇인가가. 진정해. 여기는 어디지. 극장이야. 아니. 조금 더 누워 있어. 원인을 찾은 것 같으니까 안심하고. 원인? 아까 이 꿈에서 다크 엘프 냄새가 난다고 했지. 맞아. 확실치는 않아. 확실해. 그가 이 사람 꿈에 소설을 써놓은 것 같거든. 그것도 오랫동안 길게. 그리고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피가로? 피가로가 살아 있다고? 그런 것 같네. 기사단원이 추적하고 있다는 다크 엘프가 그였어. 당장 잡아야 하지 않아? 그 새끼 꿈속에서 실종된 천사들이 만 명은 넘을 거야. 아직 일어나지 마. 더 쉬어. 실종된 악마들은 그보다도 더 많겠지. 그곳에 성물이 있다는 소문이 계속 돌았으니까. 이제 좀 이해가 되네. 한 인간의 꿈이 어떻게 이리 광대할 수 있는지 피가로가 개입했다면 그럴 수 있겠어. 피가로도 이 정도는 불가능해. 이 인간의 꿈에 비하면 피가로의 꿈은 여러모로 비어 있지. 기하학적으로 미로화되어 있을 뿐이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설마 피가로 꿈속에 가봤어? 그랬지. 뭐? 어떻게 돌아왔지?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운이 좋았어. 운이 좋아? 이 일을 끝내고 나서 말해줄게. 슬슬 좀 걸어봐야겠어. 연극극장이라고? 조심해. 맞아, 꿈의 주인이 운영하는 극단의 극장이야. 초라하네. 저기가 객석인가. 그렇지. 사람들 허리가 남아나질 않겠어. 무릎도 못 펴겠지. 얘넨 코스프레도 하는 거야? 무대의상일 걸 모르겠네, 겸사겸사인 것 같아.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이런 극단이 우리 교구에도 있었다면. 그랬다면? 자살하는 아이들이 조금은 줄었을지도 모르겠어. 관객은 좀 들어? 생각보다 많이. 점점 더 늘고 있기도 하고. 의외로 음악 잡지에 기사가 나서 인기가 많아졌어. 기사단원 친구보다 이쪽이 수입이 더 좋을걸. 네가 손 쓴 건 아니고? 몇 번이나 말하지만 우리 교구에서 그런 짓은 금기야. 우리가 여기 왔다는 건 이들도 여기 왔었다는 거겠지? 오래 머물진 않았어. 미술관에 가기 전에 잠시 들렸지. 뭐 좀 보여? 아직. 기절해서 그런지 좀 어지러워. 애초에 피가로는 이 꿈에 어떻게 들어온 거야. 누군가 길을 연결해줬을 거야. 누가 왜? 모르지. 그가 개입했다는 것도 방금 알았는데. 기절하기 전에 내가 문장들을 중얼거렸다고 했지. 중얼거렸다기보다는 거의 독백했지. 그전에도 이 꿈 안에서 몇 번인가 그랬어. 아마 그가 써놓은 문장들일 거야. 지난 오백 년간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작가 아니야? 그렇지. 그래도 몇 번은 재평가될 기회가 있었는데 다 흐지부지됐어. 불쌍한 양반. 마지막 왕족이 실패한 글쟁이가 되다니. 하도 실패해서 나중엔 아마 다 자비출판으로 냈을 거야. 기도라도 해줘야 해? 여기 부스러기가 있어. 저기는 대기실인가? 꿈의 주인은 대기실에 들어가고 기사단원은 객석에 앉아 있는 게 보여. 객석에서 니키가 뭘 하는데? 그냥 앉아 있어. 멍해 보이는데 뭔가를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기? 어디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아? 거기까진 알 수 없어. 뭐야. 왜. 지금 얘 나랑 눈이 마주쳤어. 그럴 리가, 착각이겠지. 나에게 뭐라 말하고 있어. 뭐? 아닌가? 방금 입술이 움직인 것 같았는데. 아닌가 봐. 다시 눈길을 돌렸어. 혼잣말이었을 거야. 음악에 집착하는 놈들은 죄다 어딘가 맛이 가 있거든. 일종의 뭐랄까. 아주 심오한 차원에서의. 애정결핍 장애인들이랄까. 주인은. 대기실에서 아직 안 나온 거야? 그러게. 아하. 이제 알겠어. 뭘 알아? 기사단원이 객석에서 뭘 듣고 있던 건지. 뭔데. 불안. 불안? 여기 앉아서 대기실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른 소리를 찾던 거야. 왜? 상상력을 죽이기 위해. 그건 한순간 이성을 뛰어넘어 본인의 영혼에 피를 낼 테니까. 무슨 상상이기에. 네가 아까 말했던 얘의 꿈과 관련 있겠지. 갑자기 궁금한 게 하나 생겼는데. 뭔데. 피가로 말이야. 최소 오백 살은 됐잖아. 근데. 만약 피가로가 서른 살 남짓의 인간이랑 자면, 그건 그들 기준에서 아동성범죄일까? 알고 싶지도 않아. 기사단원의 냄새가 두 명이라 그래. 두 명? 하나는 얘고 다른 하나는 누군지 모르겠어. 얼굴은 찾을 수 없지만 우리 근처에서 냄새가 나. 근처라니. 모르겠어. 처음에는 얘 냄새인가 했는데 아니야. 에시이르와 가까운 인간의 냄새가 마치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처럼 희미하게 계속. 말하다 어딜 가는 거야. 이상해. 아까부터 대기실 안이 보이질 않아. 부스러기 속에서도 지금 여기에서도. 그렇네. 왜지. 묘하게 보이지 않아. 꿈이 구현하지 못했나? 여기 극장 바닥에 실금까지 구현했는데 대기실을 못했다고? 그래. 안 했다고 보는 게 더 맞겠지. 우리가 직접 들어가보면 알게 될 거야. 좋아. 이 안에 답이 있을지 몰라. 연다. 열어. 왜 긴장되지. 그냥 열어버려. 알았어. 괜찮겠지? 안 괜찮을 것도 없지 않아? 그래. 그래. 연다. 동지? 동지? 여기야. 뒤에 있어. 어디지.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우리가 들어온 문이 사라졌어. 어둠인가. 어둠. 너는 어둠을 느낀 적이 있어? 없지. 그렇지. 그건 우리에게 미치지 못해. 이건. 어둠이 아니야. 그저. 그저? 없어. 여기는. 없다? 무엇으로부터? 이 꿈? 아니면 세계? 왜 여기는 없지. 모르겠어. 없어. 없어. 없어. 없어. 없어. 야간도로의 표지판. 어? 알파로메오 조수석의 에어컨 소리. 뭐? 새벽 공원의 냄새. 양성구유 악마와의 끝없는 오럴섹스. 피와 땀. 정액과 질액. 돌았군. 우리는 문 안으로 들어온 걸까 밖으로 나간 걸까. 엄청난 소리를 해놓고 갑자기 정상적인 소리를 하는 척하네. 그들은 여기에 있었어. 악마들이 여기로 들어왔다는 뜻이야? 아마도. 하지만 그들조차 여기선 없어. 미안, 미안한데 잘 못 따라가겠어. 내가 있었어, 보라색 불빛이 둘러싸인 유리창 안에서 섹스하면서. 혹시 피가로의 문장을 읽고 있는 건가? 아니, 여기에는 그의 영향력도 없어. 여기가 어딘데. 이해가 안 돼. 여기서 다 있었어. 너도 알 수 있어. 이들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독서 클럽이 열린 탁구장에서 처음 만나 자기소개를 하기 전에, 탁구장 겸 서점이 있는 동네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각자의 책을 들고 스쳤던 순간부터. 순서가 없어. 헷갈려. 여기는 게임센터인가? 갈스패닉 오락기 앞에 같이 앉아 있네. 수영장 탈의실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 다리 위에서 다리 아래로 지나가는 화물기차의 휘슬을 듣고 있어. 책을 펼쳐놓고 졸고. 달리는 버스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피가 넘치는 욕조에서 들것에 실려 나가. 베란다의 커튼이 새벽에 물들어. 이게 다 뭐지? 여기에 있어. 여기. 서점. 법원. 유치장. 재활원. 미술관. 여기. 망드외가 그림 앞에 혼자 서 있어. 아니. 그림 안에 서 있는 건가? 그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됐어, 어떻게? 이때부터였나. 여기는 없어. 알겠어. 여기는 만들어진 부재라는 거지. 일부러 도려낸 거야. 잊어버리기 위해. 니키와 함께한 모든 순간들을. 그럼 우리는. 우리는 여기에 어떻게 있지? 여기에 우리는 없어. 지금 이렇게 대화하고 있잖아. 이건 그저 소리일 뿐이야. 소리? 기사단원 니키가 우리를 재생하고 있어. 그가 이 꿈에 갇힌 걸 깨달은 후의 미래에서. 그건 개소리야. 인간은 우리말을 시늉조차 할 수 없어. 피가로. 이런. 피가로가 존재하는 모든 언어를 이 꿈속에 발라놨어. 말은 자연스레. 흐르고 있군. 그렇다면 지금 이 대화들은 전부. 기억이야. 망드외의 꿈속에 갇힌 니키의 기억. 우리는 실패한 건가? 아직. 우리가 대기실로 들어간 순간 니키가 우리를 본인의 기억으로 옮겨 부재로부터 격리시켜줬어. 너는 그걸 어떻게 알지? 난 이 친구 꿈에 들어가 본 적이 있으니까. 아. 그랬다고 했지. 이 대화는 몇 번째지? 알 수 없어. 처음일 수도 수억 번째일 수도. 니키라고 했나 그 기사단원. 맞아. 우리에게 뭘 바라는 거야? 문이 열리는 걸 막아달라는 거겠지. 이 꼴로 어떻게? 봐. 뭐지? 빛? 쏟아지는 기차와 같은.
어디야. 여기야. 뭐지? 방이네. 우리가 여기에 어떻게 왔지? 부재가 기억을 뱉어내게 만들었나봐. 이건 빛인가. 몇백 년만 같아. 아직 꿈일 테니 진짜 빛은 아니겠지. 천장에 실링팬이 돌아가고 있어. 여긴 그들의 집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이 고양이 털들과 원목 식탁의 감촉은 진짜로 진짜 같은데. 왜 그래 이미 숱하게 경험했잖아. 이 침구의 문양과 기호들을 봐. 하이 엘프 양식이야. 니키가 밀반입했겠지. 이 담배는 노움들 조합에서 파는 거고. 내가 니키의 기억에서 본 그들의 방과 달라. 그래? 그런가? 다른 이들의 집일까? 우리를 이곳으로 내뱉은 건 니키의 의도일까 이 꿈의 주인의 의도일까? 망드외. 뭐? 이 꿈의 주인의 이름. 하지만 이건 그 누구의 의도도 아니야. 그냥 뱉어진 거지. 그냥이라. 우리가 꿈 밖으로 내뱉어졌을 가능성은? 그럴 리는 없어. 왜 그렇지? 그랬다면 우리가 당연히 느꼈을 테니까. 생각할 새도 없이 피부처럼 분명하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난 더이상 구별할 자신이 없어. 네 주위로 상승하는 그늘 좀 봐. 빛을 물리치고 있어. 구름인가. 어디서 지나가고 있는 거지? 꿈에서? 꿈 밖에서? 창밖에서. 창밖에는 뭐가 있지? 하늘이 있겠지. 근데 너 담배는 언제부터 다시 핀 거야? 아까부터. 이 바닷빛 연무 보여? 입술 끝에서 생각대로 색과 모양이 변화하지. 아마 인간이 들이키면 곧장 폐가 녹아내릴 거야. 장식용으로 챙겨왔겠지. 뜯어져 있었어? 아니. 너는 그러면 남의 꿈에서 남의 담배를 훔쳐 피고 있는 거야? 이곳이 아직 꿈이라면 맞아. 저기. 담배 연기가 창밖이 아니라 문틈으로 빠져나가고 있어. 아까 네가 말한 인간 말이야. 인간? 그 스낵바에서 노래를 부르던. 어. 왜 그 친구였지? 네 말대로 그런 인간들은 수많은데 왜 그에게는 인간의 모습으로까지 다가가서 친구가 되었지? 꼭 대답해야 하는 거야? 그렇지는 않아. 돌이켜보면 나는 그가 내가 뭔지 알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 그래서? 그가 네가 뭔지 알아본다면 그후에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뭔가가 내 안에서 몇백 년간 벌어지고, 가라앉고, 찢어지고 있는 무엇인가가 마침내 끝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 그건 사실상. 맞아, 말했잖아, 닮아가게 된다고. 아니. 넌 애초부터 너와 가장 닮은 인간을 고른 거야. 솔직히 말할게. 나도 약간은 만만하게 봤나 봐. 어쨌든 결국 인간. 그것도 한 명의 꿈인 거니까. 이들을 쫓아 거슬러 오르다보면 우리가 이들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음새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래봤자 고작 인간의 꿈인 거라고 너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도 우리 둘이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내심 얕봤지. 이제는 잘 모르겠어. 모르겠다는 말도 거짓이고 불가능할 거라 생각해. 이건 우리 따위가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아? 이 방 밖에서 뭔가 찾을 수도 있지. 우리가 니키의 의도대로 이 방에 뱉어진 걸지도 모르고 여하간 우리가 아직 여기에 있어. 그래. 그래. 너는 피가로의 꿈에서도 살아 돌아왔잖아. 그래. 그랬지. 네 말이 맞아. 나가보자. 이 방에 부스러기는 없는 거지? 없어. 나가기 전에 하나만. 이곳이 아직 꿈이라면 여기는 언제지? 언제? 방이 밝았으니까. 아침이거나 낮이겠지. 같은 날은 맞아? 적어도 같은 꿈이긴 하겠지. 나가보면 알게 될 테니 문을 열어. 자. 빛? 또? 다가오고 있어. 소리처럼. 연결되어 지나가고 있어. 복도 같아. 복도라기에는 너무 길고. 덜컹거리는데. 집이 아니라. 여기는. 기차네. 이들이 그날 증기기관차에 있었어? 아니. 그들은 그들의 집에서 출발했어. 공원을 가고 미술관을 가고 카페를 가고 식당을 갔지. 함께 봤잖아? 아까 그 방은 이 기차의 객실이었던 걸까? 실링팬이 있는 객실이라. 잠깐 낯익은 숲 냄새가 나. 저기 산맥들이 엎질러지며 이어지고 있어. 기차를 따라오듯이. 빛이 계속 창으로 부딪쳐와. 뼈가 터지도록 머리를 찧어 소리치는 천사들처럼. 창에 새겨진 작은 기스들을 따라 온기가 흘러. 이 기차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이리 와봐. 최근에 이런 레이스 커튼을 본 적 있어? 이 정도로 완벽하게 바래 해진 질감의 커튼은 드워프들의 꿈에서나 가끔 볼 수 있지. 그러게, 오랜만이네. 마지막으로 본 게 한 세기는 전이었던 것 같은데. 가정폭력으로 짓밟히던 우드 엘프들 집 안에서. 뭐라고? 기적소리 때문에 못 들었어. 별 이야기 아니었어. 이런 박력의 기적소리도 들어본 지 한참인 거 같은데 바람이 떨고 있어. 소리의 잔향이 산 끝까지 사라지질 않아. 열려 있는 창에 손자국이 남아 있고 의자들에도 먼지가 거의 안 쌓여 있는데. 왜 아무도 보이질 않지? 앞 칸들에 있겠지. 조금 더 가보자. 이 꿈에서 계속 걸리는 게 하나 있었는데. 뭔데. 망드외라고 했나. 이 인간의 꿈에는 환상이 없어. 이 기차조차 너무나 진짜야. 아까는 여기가 꿈 밖일지도 모른다며. 모르겠어. 환상이 없는 꿈은 없잖아? 그렇기는 한데. 만일 이 꿈에서는 시간이 환상이라면? 그렇다면? 모르겠어. 우리가 여전히 존재하긴 하는 걸까.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저기 다음 칸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그래 인간의 숨 냄새가 희미하게 있네. 다시 또 객실은 아니겠지? 열어봐. 아니네. 이 칸도 커튼이 휘날리고 있어. 저기 누군가 앉아 있는 것 같은데? 뒷모습이지만 잠들어 있는 거 같아. 다가가서 살펴보자. 이 냄새. 그새 계절이 변했어. 계절이 몇 번을 변한 거지? 헤아릴 수가 없어. 여기 커튼은 조금 달라. 아까의 양식이 아니라 뭔가 더. 그런가. 잠깐. 커튼 너머에서 산이 사라졌어. 그 거대한 산맥이 갑자기 어떻게. 저건 건축물들인가? 구름? 여기가 어딘지부터 저자에게 물어봐야겠어. 저자가 인간이긴 해? 숨소리나 뒷모습으로 봐선 인간이 맞는 거 같긴 한데. 좌석들도 알게 모르게 아까 칸이랑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여기 좌석들에 새겨진 낙서들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 본 적 있어, 분명 이 기호와 그림들 어디서였지. 눈을 감고 따라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기억이 도저히. 기차가 멈췄나. 아니 계속 나아가고 있어. 바람이 멈췄길래. 멈춘 게 아니야. 만져봐. 미세하지만 커튼이 흐르고 있잖아. 멈춘 게 아니라 조심하고 있는 거야. 뭐를? 모르겠어. 여기 뭔가 좀 선명해진 것 같지 않아? 그러게.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는 동시에 사라지고 있어. 저자에게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사라지다니 뭐가? 창문이. 기차가. 여기가 사라지고 아니 사라진다기보다는. 그보다는. 그보다는. 들려? 관현악단이야. 나팔 소리가 저 멀리서 하늘을 창안으로 밀어와. 느껴져? 하늘이 들어오고 있어, 이 구름의 굴곡들. 보드라운 차가움. 이 자를 봐, 얼굴에 빛이 머무르고 있어. 헤엄치듯이. 출렁이듯이. 흘러가듯이. 솟아오르듯이. 퍼져가듯이. 떠오르듯이. 투명해지듯이. 틀어지듯이. 짓밟히듯이. 가라앉듯이. 긍휼하듯이. 읊조리듯이. 스러지듯이. 진동하듯이. 모여들듯이. 뛰어오르듯이. 춤추듯이. 회전하듯이. 꿇어앉듯이. 조아리듯이. 고백하듯이. 휘날리듯이. 자라나듯이. 휘어지듯이. 되돌아오듯이. 바라보듯이. 속삭이듯이. 기도하고 있군. 맞아. 기도하고 있어. 이 모든 빛이 오로지 이 잠들어 있는 자의 얼굴을 위해 기도하고 있어. 이 자는. 에시이르야. 어린 시절의 에시이르. 여기는 어디지? 같은 꿈의 반대편. 니키와 피가로가 우리를 여기로 데려왔어. 네 말처럼 환상이 된 이 꿈의 시간에 우리를 반사시키며. 이 꿈속의 에시이르를 깨우기 위해. 그 말은. 에시이르가 잠에서 깨어난 순간 우리는 사라질 거야. 우리는 지금 그저 반사되고 있을 뿐이니까. 사라진다는 건 어디로 사라진다는 거지? 지금 우리가 실제로 머무르고 있는 곳. 믿음? 혹은 부재. 만약 잘 풀린다면. 교구로 돌아갈 수도 있는 건가? 교구의 사람들이 걱정되나보지? 그럼. 그들은 신을 저주해도 우리를 저주하진 않으니까. 돌아갈 수 있다면 뭘 할 거야? 글쎄. 그냥 지하철에 앉아 있고 싶네. 모르겠어. 그냥 그건 좀 감동적이거든. 거기 앉아서 맞은편에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거. 그게 다야? 우선은. 이제 얼마나 남았지? 우리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은데. 에시이르는 이미 우리를 눈치채고 있어. 우리에게 시간을 주고 있는 거야. 그럼 결국 우리는 성공한 건가? 실패한 건가? 둘 다 아닐걸. 어쩌면 안 일어날지도 몰라. 네 등을 봐, 날개가 돋아나고 있어. 이 시기에는 아직 천국이 존재했나봐. 하. 혹시. 에시이르가 여기까지 다 알고 있었다면. 그랬다면? 왜 이렇게까지 돌아오게 만든 거지? 본인이 진즉에 처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마. 아마?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기고 있으니까. 과연. 그 말대로라면. 우리보다 낫네. 우리보다 언제나 그랬지. 그럼 이제 깨울까? 그래. 부디. 그래. 그래.
이상우
소설『프리즘』 『warp』 『두 사람이 걸어가』 『모닝빵』 『핌·오렌지빛이랄지』 등을 썼다.
이 소설은 《주간 문학동네》 2025년 10월호에 수록된 소설 「대마법사 에시이르의 은퇴식」과 이어진다.
2026/01/07
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