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새들의 왕
시에서 너를 불러보는 것처럼
굴뚝새1)는 굴뚝새로 노래하지 않고 산을 울려 한다
지혜야 부르면 지혜 돌아보고
초코야 부르면 초코 쫑긋거리는 것이랑 다르게
초가집 한 채가
아파트 단지 사이 언덕2)에 늠름히 서 있는
동네 생태축을 따라 걷는데
정발산동 모든 행정 게시판이 이엉을 이고 있다
행정에 관한 포스터들
경제 위기 함께 이겨냅시다! 경기 극저 신용 대출— 사람 네 명이 돼지저금통을 들고 있는 그림
고양 청년 둥지론— 고양이 그림
발달장애인 주간 활동 서비스— 여자 세 명, 남자 두 명 그림
hpv 예방접종— 여자 세 명, 남자 두 명 그림
고양시 다자녀 수도 요금 감면 신청 안내— 물방울 안에 갇혀 있는 가족 그림
있는데
예비군편성및훈련기피자일제자진신고기간3)이 통보된 벽과
이엉 이은 게시판 사이
새들의 왕
있다면?
나는
비어 있는 곳을 그냥 둬도
굴뚝새 무사한지 궁금해
비어 있는 곳을 비어 있게만 두는 게
정말 비어 있는 거 아니니까
여백을 말해보려면 다르게 말해보려고
우두커니 생각에 잠긴다
너를 불러 세워 잠깐 여백 앞에
쉬게 하려고
픽 재밌는 거
아무 소득 없는 거
그냥 와도 되는데 작은 꽃잎 하나 물고 와서
구애하는 굴뚝새처럼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좋은 거
게시판 앞에 서서 골똘할 때
게시판 덮어놓은 유리 덮개에 보이는 것은 얼빠진 나의 얼굴인데
그걸 자꾸 너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거
유계영
201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온갖 것들의 낮』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 산문집 『꼭대기의 수줍음』 『무궁무궁』이 있다.
2026/01/07
77호
- 1
- "옛날에 굴뚝새와 두루미가 해가 어디서 뜨는지에 대해 내기를 하여 이기는 쪽이 새들의 왕이 되기로 하였다. 두루미가 먼저 자신 있게 서쪽으로 이동하였고 굴뚝새는 주춤하며 그냥 서 있었다. 이때 동쪽에서 해가 떠올랐고 굴뚝새는 두루미보다 더 동쪽에 있었으므로 내기에서 이겨 결국 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굴뚝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2
- 밤가시 초가는 새마을 운동 당시 주택 계량 사업으로 헐릴 뻔하였으나,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경상 선생이 낫과 호미로 공무원들과 대치(당시 18세)하여 한차례 지켜낸 바 있고, 90년대 1기 신도시 개발 당시에도 나무 위 공중 농성을 벌여 초가를 지켰다고 한다. 현재는 언덕처럼 보이는 위치에 우뚝 솟은 모양이지만, 일산 신도시 개발 때 주변 주택단지를 낮게 만들어서 결과적으로 초가의 위치가 주변보다 높아진 것이다. 앞 내용은 2018년 3월 30일 자 고양신문 ‘또아리 지붕 위로 둥그런 하늘이 열리네’ 기사와 현장 안내판을 참고하였다.
- 3
- 황지우, 「벽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