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보훔에서 유학하는 후배는 내게 “언니는 에어컨 있어요?”라고 물었다. 칠월 어느 한낮에 연결된 영상 통화에서였다.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다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나는 나름대로 애를 썼다. 연구실에 있다는 그녀는 연신 손부채를 부쳤다. “난 에어컨 없이는 못 살아.” 대답하고 아주 오래전 그녀와 유럽에 꼭 한 번만 가보고 싶다고 대화했던 일을 떠올렸다. 날마다 프랑스 영화를 감상하던 시절이었다. 작은 노트북 화면에 펼쳐지는 파리나 낭트, 프로방스의 정경은 선잠이 든 날이면 꿈속에 아른거렸다. 나중에 나는 그것이 프랑스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나의 환상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남녀 혼숙 도미토리에서 쪽잠을 자고 바게트 하나를 세 끼에 나눠 먹는 가난한 여행이어도 좋으니 서유럽에 한 번만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시절. 이젠 누구도 유럽을 신세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옛 친구들도 지금 친구들도.
   나의 옛 친구들과 지금 친구들은 다르다. 옛 친구들도 나이를 먹어 변했으리라 생각해본 적도 있었고 지금 친구들도 과거에는 옛 친구들 같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이 변한다 한들 그렇게 달라질 수는 없으리라 결론 내렸다. 두 집단의 친구들은 아예 성분이 다른지도 몰랐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옛 친구들이라는 대륙과 지금 친구들이라는 대륙 사이에 어정쩡하게 발을 걸치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그것도 내 착각인지 몰랐다.
   나는 나라는 사람의 성분이나 소속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누군가는 내게 아직도 유학하는 후배가 있다고 하면 놀랐다. 미국도 아니고 유럽에서? 전공이 뭐였죠? 아직 박사도 못 받았다고요? 그런 말을 들으면 가끔 반감이 들었다. 대학이나 공부와는 오래전에 결별한 사람들이 지금도 고통스럽게 공부하는 나의 옛 친구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 나조차도 옛 친구들을 멀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었다. 수없이 들어도 좀처럼 외워지지 않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보훔이라는 지명. 베를린도 프랑크푸르트도 아닌. 가끔 화면 너머로 보이는 열악한 환경의 연구실. 옛날 옛적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후배의 그 수수한 옷차림. 그런 것들을 떠올리면 순식간에 그녀와 함께 신림동 모텔촌에 있는 허름한 공부방에서 러시아 혁명사를 읽던 날이 생각나고, 한정식을 사준다는 꾐에 빠져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한적한 동네까지 따라갔던 날도 생각났다. 그런 날들을 아직도 살고 싶지는 않았다.
   삼 년 전 베트남 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처음 감염병 관련 뉴스를 봤다. 전국이 떠들썩했던 지난 몇 차례의 감염병 사태가 떠올랐다. 내가 수능 시험을 보던 해에도 그랬다. ‘어쩌면 수능이 미뤄질지도 모른대, 우린 왜 이렇게 불쌍해?’ 따위 말들을 나누며 야단법석을 떨었던 생각이 나서 잠시 낯부끄러웠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또 한동안 사람들이 이 이야기만 하겠네. 뉴스 보기 싫어. 그 난리가 더 지쳐.”
   몇 주 후 남편은 KF94 마스크를 한 박스 사 들고 귀가했다. ‘그 난리’가 몇 주나 더 이어질지 나는 좀처럼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 써본 KF94는 그야말로 방독면 같았다. 남편은 내가 진짜 방독면을 못 봐서 그런다며 코웃음을 쳤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처음 그것을 착용할 때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마치 물에 들어갈 때처럼.
   이렇게 오래도록 감염병 사태가 지속될지 몰랐던 시절은 우리가 결국 이 동네로 이사를 올지 몰랐을 때이기도 했다. 남편은 결혼을 준비하던 때부터 계속 ‘강남 살자’고 노래를 불렀다. 강남 방계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나는 남편의 소망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 인근에 살았을 때 그다지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고, 없는 집이 강남 살면 그게 가장 불행한 거라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는 내게 반문했다.
   “우리가 왜, 없는 집이야?”
   그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그냥 나는 오랫동안 없는 집 자식이고 우리집은 없는 집인 게 너무나 당연했는데. 남편에게는 자기 소유의 아파트가 두 채나 있었다. 아직 부동산 대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이었으나 그걸 정리하면 강남 아파트쯤은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놀랍게도 강남에 사는 삶이 머릿속에 다시금 그려지기 시작했다. 인근에라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르는 것들. 다른 동네에는 들어가지 않는 브랜드와 식재료가 넘쳐나는 백화점과 마트. 강남에 산다는 효용감을 느낄 수많은 순간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깐이었고 우리는 비교적 평범한 동네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방독면 같은 마스크를 도대체 언제까지 써야 하나, 이게 끝나긴 하나, 감염병 초기만 해도 사람들은 의문했으나 몇 달이 지나자 곧 뉴노멀이라는 말이 나왔고 언젠가는 끝나리라는 기대를 조금씩 버리기 시작했다. 보훔에서 유학하는 후배가 내게 메일을 보냈다. 방학 때 한국에 들어가서 할 일이 있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큰일이라고. 유학생들 커뮤니티에서 날마다 곡소리가 난다고 했다. 유럽뿐 아니라 미국에서 유학하는 친구들도 십 년간 준비한 일정이 전부 무너지고 있다고. 후배는 메일 말미에 이렇게 썼다.
   - 언니, 저 죽지 않을게요. 한국은 그래도 좋은 마스크가 있으니 다행입니다.
   그때 후배는 에어컨보다 마스크를 더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감염병 삼 년 차에 접어든 지금은 여전히 마스크는 쓰고 다니지만 방역 조치가 해제되거나 느슨해진 곳이 대부분이었다. 나로서는 우선 수영장에 다닐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감염병 시대로 접어들기 전 마지막으로 다녀온 베트남 다낭에서 신나게 수영을 했다. 그 여행에서 나는 처음으로 튜브나 킥 판 등 부력을 보조하는 물건 없이 물에 뜨는 법을 익혔다. 물속에서 한 번 눈을 뜨고 나니 다시는 겁에 질려 눈을 감지 않았고, 호흡하는 법을 익히니 머리를 집어넣는 일이 더는 무섭지 않았고, 물에 뜨고 나니 그전으로 돌아갈 일은 없었다. 그런 게 좋았다. 더디지만 나아간다는 것. 퇴보하지 않는다는 것. 수영을 배워나가는 것은 어쩌면 외국어를 익히는 일이나 운전과도 비슷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고르자면 운전 쪽에 가까웠다. 대학 시절 나도 서너 개의 외국어를 공부했으나 오래 손을 놓으면 퇴보했다. 영어도 프랑스어도 일본어도 마찬가지였다. 제법 눈에 익은 로마자에 비하면 일본어는 너무나 낯설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외우는 데 애를 먹었다. 중급 이상 한자를 외우는 일도 고역이었다. 한때는 하루에 여덟 시간을 꼬박 들여 공부한 적도 있었는데 시간이 흐른 후 일본제 패키지에 쓰인 가타카나를 단번에 읽지 못했을 때 한숨이 나왔다. 그런가 하면 운전은 공부와 다르게 그저 생활일 뿐이어서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기능과 교통 법규에 익숙해졌고 상황에 맞는 대처 능력이 생겼다. 다낭에서 나는 물속에서 더는 허우적대지 않고 가만히 유영하는 나를 발견했고 놀랐다. 영법을 배우기 전이라 제대로 수영할 줄은 몰랐지만 둥둥 떠서 생각했다. 물속이 이렇게 편안하다니, 물이 이렇게 부드럽다니. 한국에 돌아가면 센터에 등록해서 수영 강습을 받겠노라고 다짐했다.
   감염병이 국내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뒤집어놓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때, 나는 부랴부랴 센터에 등록을 했다. 그곳에서는 한 달 동안 수영 강습을 받았다. 기초반에는 수영장에 처음 와본 사람과 수영을 제법 해본 사람이 뒤섞여 있었다. 샤워를 하고 수영복을 입어야 하는 줄도 몰랐던 젊은 여자는 첫날 자유형을 익혔다. 나는 한 달이 지나도록 발차기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하루 만에 물에 머리를 넣고 몸을 띄우고 발차기를 하고 팔을 젓고 꺾으며 나아가는 사람들과 나는 달랐다. 물에 뜨는 데까지도 너무 오래 걸렸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오래 걸리더라도 절대 퇴보하지 않는 게 수영이라는 사실을 되뇌었다. 얼마나 걸리든 끝까지 갈 생각이었다. 나중에 접영까지 마스터하고 생활 체육 지도사 자격증을 따게 되는 거 아니냐며 남편에게 농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달 후 재등록을 하러 갔을 때 데스크에서는 센터에 확진자가 나왔고 방역 지침에 따라 수영장 개방을 무기한 연기하겠다고 했다.
   끝까지 갈 생각이야, 라고 나는 친구에게 말했었다. 끝은 어딘데? 접영? 모자를 다 같이 맞춰 쓴다는 상급반? 마스터반? 대회 출전? 끝이 어딘지는 나도 잘 몰랐다. 흔히 말하는 영법 첫 단계, 자유형 25미터를 익힐 수 있을지도 자신 없었다. 감염병 사태로 돌연 모든 수영장이 문을 닫았을 때 나는 잠시 절망했다. 천천히 오래 가보려고 했는데, 감염병 사태를 이유로 배움을 멈춰야 한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세상이 뒤집히고 있다는데 수영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가족들과의 만남도 금지하는 마당에 온 동네 사람들이 뒤섞여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하고 서로 침을 섞는 운동을 할 수는 없었다. 당시에 나는 하필이면 내가 선택한 운동이 수영이라는 사실을 조금 비관했고 곧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수영장에 못 가는 동안에도 머릿속에는 수영장의 이미지가 끝없이 펼쳐졌다. 마치 대학 시절 프랑스나 독일, 스위스의 정경을 머릿속에 그려봤던 것처럼. 단체 강습반에서 호각 소리에 맞춰 체조를 하던 풍경도 아련하게 떠올랐고, 타일 바닥에 일렁이는 빛과 철썩대는 소리를 상상했다. 막연히 머릿속을 맴도는 이미지를 쫓다가 유튜브와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지에서 사람들이 수영하는 사진을 조금씩 찾아봤다. 수영 일상을 그린 만화책도 몇 권 구입했다. 나는 파란 물속에서 유선형으로 몸을 뻗은 여자가 웨이브를 하며 나아가는 영상을 좋아했다. 그런 영법을 배우려면 얼마나 걸릴지 가늠도 할 수 없었지만. 내가 운전을 처음 배울 때 강사는 핸들을 잡은 손을 파르르 떠는 내게 말했다.
   “기억하세요. 세상에 운전을 못하는 사람은 없어요.”
   예전에 읽은 소설에서도 그런 대사가 있었다. 세상 바보 천치들이 다 운전하고 다니는데 당신이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고 후진하면 바퀴가 어느 방향으로 돌게 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는 그 말을 명심했다. 당시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오른쪽 깜빡이와 왼쪽 깜빡이가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들이 더할 나위 없는 세상 바보 천치를 본다는 듯 쳐다본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다. 수영도 가능하리라. 세상에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시간이 걸려도 가능해지리라고 나는 믿었다.
   센터가 문을 닫은 기간에 가끔 호텔 수영장에 갔다. 머릿속에서만 그려본 파란 물과 바닥에서 일렁이는 빛을 마음껏 바라보며 멋대로 헤엄을 쳤다. 배꼽을 등에 바짝 붙이고 상체에는 힘을 빼고 발끝에는 힘을 주라고 배웠던 것 같은데 몸은 갈지자로 비뚤거리며 나아갔다. 야외 수영장에서는 수모를 벗고 수영할 수 있었다. 동네 센터였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수모를 쓰지 않고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헤엄치는 데 왠지 해방감이 들었다. 나는 물미역처럼 푹 젖어 늘어진 머리를 대충 추스르고 수영복을 입은 채 전신 거울에 카메라를 대고 사진을 찍었다. 그날 찍은 사진을 나중에 어떤 방식으로 회상하게 될지 조금도 알지 못한 채. 그때 착용한 목걸이와 팔찌가 훗날 어떻게 보일지 모르는 채로. 그리고 감염병 2차 대유행에서 3차 대유행으로 이동하던 무렵 우리는 강남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한 동네 아파트 단지에는 어린아이들이 많았다. 주로 은퇴한 노인들이 모여 살던 이전 동네와 달랐다. 내가 어렸던 1990년대로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때처럼 혼자 다니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닫고는 했다. 내가 감히 아이를 키울 생각을 했다니, 저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일인데. 직장을 그만둘 때, 태업을 했다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결혼한지 반 년만에 유산을 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모두가 바쁜 시기에 병원에 며칠 입원했다는 사실을 누구도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산이라는 단어 앞에서 숙연하게 입을 다물어버리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겪은 불행에 대해서 그저 회의가 들었다. 저런 인간들에게 이해받고 싶은 건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강남에 이사하자마자 그 무렵의 일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때를 떠올리면 머릿속은 그저 먹색으로 검푸르게 칠해졌다. 누군가 내 머릿속을 헤집어 먹을 들이붓는 것 같았다. 직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몇 년이나 지난 지금은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괴롭히고 방관하고 모멸감을 준 인간들에 대해서, 그 인간들이 감추고 있던 더럽기 짝이 없는 본색을 내가 알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입을 열면 그들을 사회적으로 충분히 살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직장을 그만두며 다짐했던 건 다만 미친 인간이 되지 말자는 것뿐이었다. 복수와 뒷조사가 무기가 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유산을 했었다는 사실을 두고 그들은 또 뭐라고 비아냥댈까, 생각하며 나는 그 말을 한 걸 후회했다. 그리고 몇 년간 불쑥 직장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저 잊어버리자고 다짐했다. 먼 과거에도 모멸감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진작 끝나버렸으리라고 힘주어 생각했다. 김 차장은 돈을 왜 벌어? 이젠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살지. 세상이 불공평하더라, 김 차장처럼 치고 올라가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뺑이를 쳐도 안 되는 사람이 있고. 아직도 그런 말들이 불쑥 생각날 때가 있었다. 사람 면전에다가 할 수 있는 말들이었나. 그건 마치 내가 살아 있는 줄 모르는 사람들, 내 주검 앞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하는 말 같았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런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코마 상태로 몇 년을 누워 있던 자신의 곁에서 가족들이 떠들던 말을 흐릿한 의식 너머에서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는 오랜 악몽을 꾸었다고 말했다. 나는 마치 내가 죽었다고 착각하고 함부로 망자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과 같았다고 그들을 기억했다.
   퇴사하던 날 경력 증명서를 발급받는 내게 그들은 이직이라도 하려는 거냐고 물었다. 그래, 그 정도 직급이면 어디든 가겠지. 그러나 나는 이직할 생각이 없었다. 어떤 조직에도 몸담고 싶지 않았다. 그게 그들이 말하는 기혼 여성의 같잖은 여유라고 해도. 남편이 월에 억을 벌어온다고 해도 내 통장에 돈 백만 원 꼬박 찍히는 게 더 중요하다고 믿어왔건만. 평생 월급 받던 사람에게 고정 수입이 사라질 때 어떻게 망가지는지 어린 시절 수도 없이 봤지만 어쩔 수 없었다.
   머릿속에 부어진 먹을 조금 걷어내 주는 것도 수영이었다. 나는 파란 물속에 몸을 내던져 그 더럽고 시커먼 기억을 지워낸다고 생각했다. 물속에서 숨을 쉬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으나 숨을 참는 동안은 잡념이 들지 않았다. 영법을 익혀 제대로 수영하는 것도 아닌데 열심히 헤엄을 치다 보면 얼굴이 화끈거렸고 수모 안에 땀이 찼다.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3차 대유행이라는 말이 연일 언론에 도배되었으나 동네 수영장이 곳곳에서 조금씩 개방되기 시작했다. 강남으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나는 소위 ‘원정 수영’을 다녔다. 개방된 수영장을 검색해서 정처 없이 자유 수영을 다녔다. 수영인들 사이에서 유명하다는 인천의 수영장에도 다녀왔고, 파주나 하남의 수영장에도 갔다. 어느 날 멀리까지 가서 수영하고 돌아와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내 또래로 보이는 젊은 엄마가 인사를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를 받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두 돌이 막 지난 듯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 손을 잡고 있었다. 아이가 어찌나 깜찍한지 나는 마음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아이는 눈 밑에 반짝이는 스티커를 붙이고 있었다. 약국에서나 보던 유아용 마스크를 낀 채였다. 마스크에는 고양이와 토끼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아이 엄마가 서슴없이 내게 말했다.
   “저희 집에 잠깐 놀러오실래요?”
   아이 이름은 제니였고 아이 엄마는 자기를 제니 맘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육아하는 여자들이 자기 이름을 지우고 산다는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풍문으로 들었으나 직접 겪어보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는 아이가 없는데, 뭐라고 자기소개를 해야 하나 막막한 기분을 도리어 느꼈다. 제니 맘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제니 친구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눙쳤다.
   “어차피 친구는 많아요. 이 동에만 제니 친구들이 다섯 명이 넘으니까요.”
   이전에 살던 아파트에는 단지 내에 구립 어린이집이 있었다. 어쩌다 어린이집 근처를 지나며 ‘우리 가족 텃밭’이라는 푯말이 붙은 작은 텃밭을 봤는데, 집집마다 키우는 식물의 종류도 달랐고 성장도 제각각이라 가끔 고개를 숙여 구경하곤 했다. 대파나 깻잎이 오종종하게 심겨 있고 어린이집에 다니는 유아들의 이름이 어엿하게 붙은 모습을. 제니 친구들이 다섯 명이 넘는다는 말에 나는 문득 이 단지에도 어린이집이 있었나, 의아했다. 어린이집을 본 적은 없었다. 제니 맘이 커피를 내려주며 아이들이 전부 다 같은 유치원에 다닌다고 했다.
   “애들 픽업하려다보니 우리는 자주 만날 수밖에 없고. 또 왔다 갔다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라 결국 근처 커피숍에 모여 있을 수밖에 없죠.”
   사정을 들어보니 아이들은 모두 한남동에 있는 영어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한강만 건너면 금방이었으나 아이들이 유치원에 머무는 시간이 고작 서너 시간뿐이라 유치원 근방에서 시간을 보내다 픽업해 온다고 했다. 한강을 건너 등원을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오래전 한강을 건너 등교를 하다 사고를 당했다던 무학여고 언니들을 떠올리는 자신에게 조금 머쓱해졌다. 내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문화였다. 강남에도 영어유치원이 많을 텐데 아파트 한 동에서 다섯 명이나 한남동에 있는 유치원을 같이 다닌다는 건 무슨 문화일까. 제니 맘은 마치 그 엄마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듯 그들의 신상을 주워섬기며 소개를 했다. 그날 제니 집에 머무르던 잠깐 동안 나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들의 프로필을 들었다. 어떤 엄마는 ‘공구’하는 일을 하는데 자기들 중에 돈을 가장 잘 번다고 했다. 또다른 엄마는 영어유치원 교사 출신이어서 꽤 많은 정보를 준다고 했다. 제니 맘 자신은 원래 국어를 가르쳤는데 지금은 쉰다고 했다. 넌지시 내게도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오기에 나 역시 휴직 중이라고 대답했다. 휴직 중이라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건 엄연히 직장에 소속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었으니까. 같은 동에 사는 여자라는 이유로 이렇게 임의롭게 다가온다는 게 조금 놀라웠지만 곧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결국 나도 잠재적인 엄마라고 생각하는구나. 또한 이사를 나가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 아파트는 그런 곳이었다. 한 번 들어오면 결코 나가지 않는 곳. 월세를 살더라도 끝내 붙어 있어야 하는 집. 이런 집을 월세 줄 만한 주인들이라면 교외에 집 짓고 사는 재력 있는 노인들뿐이라는 것 정도는 나도 대강 알았다.
   “애 가지면 일 다시 하기도 힘들 텐데. 나도 학교 선생은 아니라서 다시 일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어휴, 국어, 지긋지긋해. 제니는 절대 문과 안 보내요.”
   제니는 정신없이 거실 바닥을 어지럽히며 블록을 쌓고 있었다. 아이가 블록을 높이 쌓아올리는 모습은 언제 봐도 놀라웠다. 새우깡만한 손가락으로 조심조심 공들여 탑을 쌓고 있었다. 아이 볼에 코끝을 가져다대고 싶었다. 문과라니. 문과니 이과니 이제 나누지도 않아요, 제니 엄마. 나는 마음속으로만 말했다. 예상대로 제니는 두 돌이 지난 지 얼마 안 됐다고 했다. 제니가 전공을 선택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까, 싶다가도 결국 눈 깜빡이는 찰나의 시간이 흐르면 그 나이가 되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제니 맘의 말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애 아빠랑 나는 얘를 무조건 전문직 시켜야 한다고 그러거든요. 다섯 개 중에 하나 하면 좋겠는데.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약사, 수의사. 솔직히 한의사는 별로죠. 의사는 어려울 것 같은데 다행히 제니가 동물을 좋아해요. 수의사가 괜찮은 것 같아.”
   제니는 엄마가 뭐라고 떠들든 말든 눈에 힘을 주며 블록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제니네 집 거실에 잔뜩 붙은 동물 포스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날 이후 나는 제니 맘과 친해질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두 돌 지난 아이를 두고 전문직 운운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슴없이 집에 초대해서 커피를 내려주던 모습이 어른어른 떠올랐다. 웃을 때 눈이 반달이 되는 매력적인 얼굴이 자꾸만 생각났다. 사실 제니 맘보다 제니가 더 많이 생각났다. 두 돌이 갓 지난 어린아이라 그런지 아직 낯을 가리지 않았다. 종종거리며 걷다가 서슴없이 내게 안겼고 수시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에게서는 따뜻하고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천으로 만든 공을 덩크슛하듯 머리 위로 던지며 발끝을 들던 모습이 생각났다. 제니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나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은 타인이 이토록 내게 강한 인상을 풍길 수가 있나. 제니가 내게 공을 던졌을 때 나는 그걸 받아서 제니에게 다시 던졌다. 제니는 눈도 끔쩍하지 않고 날아드는 공을 주시했다. 쉴 새 없이 블록을 쌓고 공을 던지고 퍼즐을 맞추던 아이. 아이의 부모는 왜 ‘의사는 어려울 것 같다’고 단정을 짓는 걸까. 머릿속이 언젠가부터 제니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날 제니 맘과 전화번호를 주고받긴 했으나 다시 연락할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할 만한 용건이 없었다. 제니 맘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에 담긴 제니를 들여다보면서 그날처럼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만나게 될 일은 없을까, 나도 모르게 고대했다.
   여름은 일찍 시작되었고 마치 영영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고도 길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두꺼운 KF94 마스크를 착용했으나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햇살은 뜨겁고 습도가 높았다. 출퇴근할 일이 없는 나는 집에서 에어컨만 쐬고 있으면 되었으나 퇴근하는 남편은 마스크를 벗자마자 숨을 몰아쉬곤 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제습기에 가득 찬 물을 재활용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올라왔고 습도가 높으니 관절 통증이 심해진다는 아우성이 넘쳤다.
   그 여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가장 많이 돌아다닌 키워드는 기후 위기, 제습기, 백신이었다. 3차 대유행 이후 전국에 다양한 종류의 감염병 백신이 보급되었고 마침내 백신 도입 초기처럼 애써 병원을 수배하지 않아도 순차적으로 전 국민이 백신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 백신 도입 초기에 남편은 지도 어플을 켜서 주변에 잔여 백신을 맞을 수 있는 병원이 있는지 수시로 업데이트를 하곤 했다. 몇 달 만에 상황이 바뀌어 각 지역 보건소에서 연령대별로 백신을 맞을 수 있는 요일과 시간을 문자로 알렸다. 팬데믹이 시작된 지 정확히 일 년 반 만이었다.
   1차 백신을 맞던 날의 풍경을 나는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보건소 강당에서 일사불란하게 주사를 맞고 대기하고 있다가 전광판에 뜬 귀가 가능자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확인하고 나가던 사람들. 방호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공무원들. 감염병 시대 이후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제법 익숙해졌지만, 그전까지의 삶에서 그런 착장이란 디스토피아를 다룬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미 끝나버렸는지도 모른다, 유튜브나 SNS에는 그런 말도 돌았다. 인류의 미래는 여기까지였는지도 모른다고. 아파트 현관에도 백신 접종을 권고하는 안내문이 붙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정부가 무능해서 백신을 수입하지 못한다는 뉴스가 종종 나왔는데, 비로소 모두가 백신을 맞게 되는 때가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보훔에서 유학하는 후배와는 가끔 영상 통화를 했는데, 한국도 이제 제법 많은 사람이 백신을 접종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후배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이제 곧 안티백서들이 튀어나오겠네요.”
   당시로서는 처음 듣는 조어였다. “안아키 같은 거야?” 내가 물었더니 후배는 비슷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기가 생각할 때는 차라리 ‘안아키’가 나은 것 같다고 했다. 세상 무엇이 안아키보다 나을 수가 있느냐, 고 묻자 후배는 말했다.
   “어쨌거나 그 엄마들은 최소한의 철학이라도 있는 것 아니에요. 제가 본 안티백서들은 지구 평평론자 수준이라니까요.”
   결정권이 없는 어린아이들을 키우며 백신 접종과 병원 치료를 일절 거부한다는 ‘안아키’에 대관절 무슨 최소한의 철학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후배는 자기가 본 몇몇 안티백서들에 호되게 질렸다는 모양이었다. 이어 후배는 안티백서란 사람들이 백신 접종 증명서를 구입한다는 뉴스를 봤다고 했다. 독일은 백신 패스가 없이 공공장소를 통행하는 일이 대체로 불가능한데, 이에 백신을 대신 맞고 접종 증명서를 유료로 판매하는 사람까지 등장했다고 했다. 나는 한국에서라면 불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후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음, 하며 망설였다.
   “언니, 당연히 여기에서도 그런 일은 불법이에요.”
   순간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 짐짓 애를 썼다. 후배가 독일에 산 지 십 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팬데믹 이전 그녀는 귀국할 때마다 유럽 생활이 불편하다고 푸념했다. 한국에서라면 어디서든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생활용품조차 없다고 말하곤 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드러그스토어로 유명한 독일인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의아했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한국이 훨씬 살기 편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나 역시 그런 뜻으로 말했을 뿐이었는데 후배는 달리 받아들인 것 같아서 난감했다.
   가끔 팬데믹 이전 마지막으로 다녀온 여행 사진을 들춰보곤 했다. 다낭에서 나는 신나게 놀고 있었다. 한여름 날씨는 아니었으나 여름옷을 입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선선한 날씨였다. 밀짚모자를 쓰고 민소매 원피스에 카디건을 걸친 내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며 나는 ‘이 여름이 다시 돌아올까’라고 캡션을 달았다. 별다른 뜻은 아니었고, 언젠가 다낭에 다시 놀러 가고 싶다는 말일 뿐이었다. 그 여행 직후에 팬데믹 시대로 접어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새삼스레 의미심장한 말로 느껴졌다.
   후배와 백신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문득 단지 내 아이들 생각이 났다. 미취학 아동들은 당연히 백신 접종 대상이 아닐 터였다. 귀여운 캐릭터가 잔뜩 그려져 있다고는 해도, 외출할 때마다 마스크를 써야 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답답할까 싶었다. 내가 어릴 적엔 감기에 걸리면 천 마스크를 쓰고 등교했었다. 그런 날이면 엄마가 입술이 튼다며 글리세린을 콧구멍 아래까지 잔뜩 펴 발라주었다. 마스크를 쓴 아이가 있으면 온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 어디가 아프냐고 묻곤 했다. 요즘 아이들은 집 안에서도 곧잘 마스크를 쓰고 있다고 했다. 그런 경험은 훗날 무엇으로 남게 되는 걸까, 나는 종종 생각했다. 분리수거를 하는 날 잠깐 쬔 햇볕에 땀방울이 가슴골 사이로 흐르는 걸 느끼는 와중에, 나는 혼자 돌아다니는 제니를 발견했다. 생수병에서 미처 떼어내지 못한 라벨을 정리하다 보니 원피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제니가 주차장 근처를 어슬렁대고 있었다. 어미 젖을 막 뗀 길고양이처럼 돌아다니는 제니를 보니 순간 아찔했다. 나는 쓰레기들을 내팽개치고 제니에게 달려갔다.
   “제니야, 엄마는?”
   제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저기.” 제니 맘이 걸어오고 있었다. 핸드폰을 보느라 잠깐 한눈을 팔았는지 제니 맘은 놀란 얼굴로 부리나케 달려왔다. 나는 제니를 붙들고 있던 손을 얼른 떼어 툭툭 털었다. 깨끗하지 못한 손으로 아이를 붙잡은 게 미안했다. 제니 맘도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한 손에는 커다란 쇼퍼백이 들려 있었다. “저희 여행 다녀오는 길인데, 애 아빠가 지금 차에서 뭘 좀 찾는다고 정신이 없어서요.” 그 말을 듣고 제니를 보니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쓴 모양이 휴양지라도 다녀온 듯했다. 문득 ‘여행’이란 말이 너무나도 이상하게 들렸다. 밀짚모자에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샌들을 신은 제니의 모습을 보자 팬데믹 이전에 다낭에서 놀고 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중에 제니 맘은 “우리가 얼마나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심지어 애가 육 개월일 때도 유럽까지 다녀왔는데. 그땐 여행 자제하느라 힘들었지. 놀러 간다고만 하면 또라이 취급하던 때잖아.”라고 말했다. 또한 제니가 감염병에 걸려서 며칠 동안 고생했을 때에도, 함께 자가 격리를 했던 제니 맘은 내게 문자를 보내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자제한다고는 했으나 수시로 여행을 다녀오던 제니 맘이 단 한 번도 백신을 접종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알게 되었다.
   보훔에 있는 후배와 조금 껄끄러운 대화를 나눈 후 백신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녀가 독일로 떠난 후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거나 둘 다 깨어 있는 시각일 때 대수롭지 않게 노트북을 열어 통화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독일의 안티백서에 관해 인터넷으로 검색하다가 ‘백신을 인류에게 접종시키는 것은 인구를 감축하려는 장기 학살 프로젝트’라고 주장하는 독일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후배에게 물어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무슨 이야기든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화하기가 무척 망설여졌다. 언니, 당연히 여기에서도 그런 일은 불법이에요. 후배의 말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나는 백신에 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썼다.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고 무엇이든 공유했던 사람인데 왜 말을 걸기가 이토록 어려운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독일에 유학 간 직후, 그곳에서 적응하기도 바빴을 텐데 내가 직장에서 겪는 일을 시시콜콜 들어주던 게 생각났다. 점심시간이 돌아올 때마다 식충이 취급을 받는 것 같다고 울었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카드를 쓰던 시절이건만 날마다 내게 만 원짜리 지폐를 주며 잔돈으로 바꿔 오라고 시키던 선배. ‘그 자리에서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어요? 사람이 일을 하면서 괴롭지 않다는 건 밥만 축낸다는 증거예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나는 그런 말들을 후배는 전부 들어주었다. 후배는 내게 진지하게 직장을 그만두라고 충고했는데,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을 어디에서 또 구하겠느냐고 나는 고사했다. 후회를 하게 될까 봐 걱정이라는 내게 그녀는 말했었다. “지금 못 그만두었다는 것을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십 년이 지나도 그곳의 사람들은 나를 함부로 대했고 연봉은 아주 조금 올랐을 뿐이었다. 내가 성과를 내면 잠깐이나마 태도가 달라지긴 했으나 실수를 하면 가차 없이 모멸감을 줬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이었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구성원들은 전부 철밥통이었다. 내가 제풀에 떨어져나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얼굴을 아침마다 마주한 채로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고 생각하니 억울했다. 그 이야기를 가장 귀 기울여 들어준 사람이 바로 보훔에 있는, 멀리 있는 후배였다.
   후배와 연락을 덜 하는 대신 나는 제니 맘을 만났다. 제니 맘과 그녀의 친구들인 이빈 맘, 재희 맘, 영수 맘 등등을 만났다. 단지 내 도서관은 언제나 열려 있었고 나는 그곳에 아껴 보던 책들을 잔뜩 기증했다. 몇 번은 한남동 유치원 근처 카페에 가기도 했다. 하원한 아이들과 가끔 단지 내 도서관에서 만나자는 내 제안을 엄마들은 좋아했다. 아이들이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수영을 할 때처럼 머릿속 먹이 지워지는 듯했다. 나는 그들을 새로 만난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사귀어온 친구들은 대학 시절 친구들이나 그 척박한 직장에서 만난 친구들이었다. 너덜너덜해져 버린 지난날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 친구들은 새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지, 강남 소사이어티로 어떻게 하면 무사히 안착시킬 수 있을지 의논했다. 그중 유일하게 강남 근처 출신인 나를 엄마들은 무척이나 대우해줬다. 강남에서 고등학교를 나왔으니 좋은 대학에 갔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그들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감염병이 좀 잦아들면 해외 어디로 여행을 갈지, 요즘 유행하는 쥬얼리는 무엇인지 그들은 떠들었다. 여행을 좀처럼 가기 어려우니 자꾸 명품에 돈을 쓴다고도 했다가, 나중에는 재산을 늘릴 궁리를 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등하교용 자가용과 패밀리 카를 바꿔야 한다고 그들은 말했다. 나는 때로 그들 사이에 껴서 화려한 일상 브이로그와 인스타그램을 보듯이 그들의 대화를 주로 가만히 들었다.
   수영 센터가 재개장하자마자 나는 강습을 등록했다. 아직 물속 호흡에 익숙하지 않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물에 부딪는 빛, 바닥에 일렁일렁하는 빛을 바라보는 일은 여전히 좋았다. 몇 개월을 기초반에서 재수강하며 나는 겨우 자유형을 터득했다.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싶었다. 물에 뜬 채로 고개를 돌리지 못할 때는 자꾸만 레인 중간에 멈춰서야 했다. 나는 그저 돌아보지 않고 내달리고 싶었다. 반복되는 괴로운 아침 출근길에 인생은 누구에게나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트레드밀을 달리는 일일 뿐인가, 생각했을 때와는 다르게. 나는 강제로 기계를 종료하고 그곳에서 내려왔다. 이제 그 일은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팔을 젓고 발목을 물에 내리꽂으면서.
   한동안 옆자리에서 샤워를 했던 백발의 노인이 내게 말했다. “수영복에 그 목걸이와 팔찌는 안 어울려요. 소재를 보아하니 염소 물에도 약할 것 같고.” 분명 오지랖을 부리며 핀잔을 주는 내용이었지만 그와 관계없이 무척 부드러운 말투여서 나는 깜짝 놀랐다. 노인은 상급반보다 높은 연수반이었고, 수모에는 ‘INSTRUCTOR’라고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거울을 보니 목걸이와 팔찌가 정말 이상해 보였다. 목걸이는 몇 년 전 ‘대란’이 났던 제품으로, 당시에 보훔에서 잠시 귀국하던 후배에게 프랑크푸르트 매장에서 구매를 부탁했던 물건이었다. 그녀가 가끔 구매 대행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걸 알기에 부탁했는데, 후배는 내게 물건을 건네며 다시는 이런 부탁은 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언니가 이런 목걸이를 좋아한다는 것도 적응이 안 되고요.” 그녀는 말했다. 나는 수수료를 주겠다고 했었다. 평소에 구매 대행을 할 때 얼마나 받느냐고 묻는다는 것을 “네가 평소에 받는 만큼 줄게.”라고 했는데, 후배는 조금 언짢아하며 “제가 평소에 받는 돈이 뭔데요.”라고 대답했었다. 왜 다른 사람들은 되고 나는 안 되니? 라고 묻고 싶기도 했지만 묻지 않았고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즐겁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예전에 호텔 수영장에서 찍은 사진을 나는 들춰봤다. 수영복 위에 걸친 목걸이와 팔찌는 확실히 이상했다. 이제 다시 여름이 오려면 한참이나 남았고, 나는 겨울 수영장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제니 맘, 이빈 맘, 재희 맘, 영수 맘 등등이 리모델링 인테리어에 관해 열을 올리며 대화를 나누던 날, 나는 그들이 언젠가 보훔의 후배가 말한 안티백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 누구도 안티백서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다. 제니 맘은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냥 그게 우리 동네 엄마들 스타일이에요.”

박민정

요즈음 나의 참주제는 ‘제대로 잊어버리는 일’이다. 한때 나는 『잊지 않음』이라는 산문집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인생의 중요한 전환 이후에 오히려 끝내 잊어야 할 일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영을 하는 주인공은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자신의 나아감이 수족관 속에서 직진하는 물고기와 같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

2023/02/28
6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