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월드 / 해피니스
월드
등이 붙은 남녀 샴
여자애는 늘 주저앉고 싶어했고 남자애는
달려나가고 싶어했다
여자애의 육체는 남자애보다 빨리 성숙했고 남자앤 하이톤으로
투덜거리는 적이 많았다
절정의 사춘기
여자애의 골반이나 가슴이 잉여롭게 부풀어갈수록
남자애는 거죽으로 쭈그러들었고
변성기는 여자애의 것이었다
남자애는 여자애의 몸으로 분해·흡수되었고
여자애는 목소리만 양성화된 채
록 밴드 보컬을 꿈꾸기 시작했다
음정이 불안한 미성은 이제 곧 골초가 될 수순을 밟고 있는데
그애의 이름은 이제재다
이제재는 자기 목소리를 녹음해 몇 번이고 듣는다
1-2
서양의 신은
자기 외부에 세상을 창조하고
동양의 신은
자기를 분열시키며 세상을 창조한다
자기 외부에 세상을 창조하고
동양의 신은
자기를 분열시키며 세상을 창조한다
어릴 적 꿈에서처럼
빨간 티코, 뒷좌석에서부터 팔 뻗어 핸들을 잡고
월드의 한구석으로.
그곳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글 쓰는 자는 자기 외부에서 분열하고 자기 외부에 세상을 창조한다
정신병원에 가고 싶으면 글을 쓰지 말고
정신병원에 가야 한다
3
고향은 늘 정돈되어 있었지 군부대 안 관사아파트 락스를 들이부은 것처럼 표백되어 있었다 색조 없이 희기만 한 빛이 내려오고. 빠짐없이 포장된 길 시속 40킬로미터를 준수하는 자동차 5층으로 정돈된 아파트 정확하게 간격 조정된 나무들 군인들이 제초기를 들고 가꾸던 풀밭
가위손 영화 세트장처럼 아름다운 곳
우유 속에 넣어 얼마간은 휘젓고 싶을 만큼
영원하기만 한 곳
(유년은 완벽했습니다 말하지만 않으면.
매일 누가 한마디도 시키지 않기를 바라며 잠들었습니다
그때의 병명은 함묵증
두꺼운 온실 유리 안에서 볕을 쬐던 감각
유리를 뚫고 들어오던 느린 빛줄기를 생각하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지고
함묵증이 아니라면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4
이제재의 자아를 형상화하면 뿔 여덟 개 달린 머리, 목과 등이 직각을 이루는 괴물이 출현해서 너는 내가 여덟 번 잡아먹어주겠다 너를 내가 여덟 번 사랑해주겠다 하니까
그 자아는 없는 편이 낫겠다
5
새로운 언어가
자아 없는 곳에서 방출되고 있다
방사능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퍼져나가고 있다
빨리 말을 해보라고 등을 두드리던 부모의 손이 먼저 파괴된다
그사이 언어를 익혀 모범수인 척 구는 나의 얄미운 입술이 붕괴된다
세상은 파멸하고
새로운 파멸의 언어로
희망 없이 파멸하고
의미 없어지고 인간들은
의미 없는 데에서 의미를 찾고 발명하고 감탄하고 아름답다고 난리 치고 그러는 데에 개인당 백 년쯤 허비하고
뼈만 남은 이제재가 자기 해골에 물을 받아먹으려고 애를 쓰며 허무주의는 유구하다, 허무는 허무로서만 있어야 한다, 허무는 진실일 때에만 가능하다, 중얼거린다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나는 꿀꺽이는 모션을 대신 취하며 그 말엔 동의할 수 없다,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은 대화가 불가능한 불구다, 불구는 허무를 모르고 없는 귀만 끊임없이 갖고 싶어한다, 세계는 진실보다 거짓에 가깝다, 라고 중얼거린다
한평생 투덜거리던 자는 익사하면서도 투덜거리고 있을 거다
8
현재는 자기분석자로서의 나 어제 이제재는 풍선을 불며 자기 내부가 고무로 이루어져 있다고 착각했다
풍선과 고무
몸은 불어낸 숨만큼 동그랗게 비워지고
이제재는 비워진 만큼 이제재
이제재라는 풍선만큼 이제재
방은 곧 이제재를 배반한 이제재로 가득 찼다
착각은 고무가 겪는 것인지도 모른다
풍선일 때 고무일 수 없는 척
고무일 때 풍선일 수 없는 척
이제재와 자기분석자의 관계처럼
이제재는 스무 팩의 고무를 다 불고 풍선들 사이로 몸을 던졌다
다수의 풍선과 몇 개의 터진 고무들 사이에서
아픈 뒤통수를 감싸쥐었다
바깥에서 바라보면 자기분석자와 이제재는 구분되지 않고
이제재는 자꾸만 나를 이해하려 든다
해피니스
나는 입술을 모아 오, 하고 발음한다
그리고 깨끗한 항문을 생각하지
핑크에 대한 나의 취향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입술 주름 개수를 세는 것에는 늘 실패한다고
그리고 청록의 방
불을 늘 꺼두는 데도 청록의 방,
이라고 부를 줄 아는 나의 의지가 이 방에 의자 하나를 두게 했다고
늘 넥타이를 매며 생각하지
사람들은 자기 목에 줄 하나 매는 걸 좋아한다고
오,
플라스틱 플라밍고
너는 불타고
너는 녹고
네 핑크 형광 블링블링은 사라진다
청록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면 자기 목을 조르고 싶어지니까
핑크는 뭐든 배설해내니까
놀랍다
어제저녁 뉴스에선 지하철 문에 끼여 사람 하나가 터졌고
내가 기르는 핑크 플라밍고는
얼마나 짓눌러야 황소개구리가 터지는지 알고 싶지
오,
붉으락푸르락한 선악과
너는 싱싱하고
금방 무른다
썩어도 향기로운 게 과일이지
나는 이제껏 과일 아닌 것만 먹어온 게 틀림없고
이 과일은 내 귀여운 플라밍고의 것 플라밍고는
배설된 것의 냄새를 알지
핑크는 금방 더러워지고
청록은 마지막까지 나를 붙잡고
밤중엔 의자 위에 내가 올라가게 되니까
유독하다 몽유병,
쏟아진다 쓰러진 병 속에 액체가
그리고 꿈속의 웜홀
몸속 따뜻한 구멍과 그 속에서 왔다 갔다 한 벌레들과 우주의 어느 왜곡된 구멍이 겹쳐진,
동그란 곳으로의 초대
내 구멍으론
핑크도 청록도 아닌 무수한 모서리들이 미끄러지지
네모반듯한 침실에 누워 볕에 바싹 마른 흰 시트를 덮고
한 움큼의 알약을 뱉어낸 뒤 민첩하게 고백하지
잠꼬대를 사랑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방에 앉아 별을 그리는 나의 취향이란,
하나는 핑크
하나는 청록
두 개로도 별은 완벽해지고
나는 방 안에 갇히지
이제재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살고 있다. 영향을 주고받는 일에 대해, ‘나’라고 쓸 때 이 안에 들어찬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미안해진다.
2018/02/27
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