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단단이
사촌 형은 차가 있고 운전을 한다. 후진 주차 감각이 훌륭하다. 명절 시즌 고속도로에서 아빠와 번갈아 운전대 잡는 기특한 아들내미다. 할아버지 등짝도 흔쾌히 밀어준단다. 어른이 건네는 술잔을 묵묵히 받들며, 기름기 좔좔 흐르는 고기를 배불리 먹고도 물똥 싸지 않는다. 1년에 한두 번 만날 때마다 쓸데없이 신상 캐물어 성가시게 군다. 사회자의 신랑 입장! 소리에 객석보다 1미터쯤 솟은 대리암 통로를 따라 단상까지 뚜벅뚜벅 걸어갔다. 4월의 결혼식 주인공이자 비싼 정장 맞춰 입은 그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다. 신부와 신랑이 맞절하고 혼인 서약과 성혼 선언문 낭독이 이어졌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 온 호마노(Onyx) 결정을 만지작댔다. 유백색과 흑색 줄무늬가 나이테처럼 어우러진 정동(Geode) 형태의 돌이다. 연인의 들끓는 애정을 식혀 이별을 부추긴다. 다이아 박힌 웨딩 링의 결속을 깰 수 있을까. 사회자는 신랑의 작은 키를 웃음거리 삼았다. 신부에게 신랑 꼬추 크기와 성능에는 만족하는지 넌지시 물었는데, 신부는 대답을 회피했다. 신부의 친구 두 명이 어린 자식들 손목 줄줄이 잡고 나와 플래카드를 흔들었다. 늦기 전에 하나라도 빨리 낳자! 축사도 덕담도 아닌 듯했다. 사촌 형은 20대에 가수를 꿈꿀 정도로 노래를 잘했지만 정작 축가는 벌벌 떨어 산뜻하게 조져버렸다. 멘델스존의 웨딩 마치를 들으니 예식의 조잡스러움이 상쇄되는 느낌이었다. 시부모가 던진 밤과 대추 받아내고 절값 빨아먹는 아름다운 폐백이 공장식 웨딩의 대미를 장식했다. 요즘엔 대안적인 예식 올리는 커플이 흘러넘친다지만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이모든 고모든 삼촌이든 결혼식 장면은 대개 어설픈 장르 영화 같았다.
어릴 때부터 아빠의 직장 동료 식장에 자주 따라다니며 할머니, 엄마, 동생과 뷔페 음식을 양껏 먹었다. 가끔은 코스 요리를 맛볼 수도 있었다. 식사 마치기 전까지 아빠를 모른 척해야 했다. 식권 몇 장이 아까워 남의 주말 행사에 가족들 불러다 밥 먹이는 가부장의 살뜰한 습성이 적잖이 부끄러웠지만, 20대 중반에 일면식도 없는 친구의 친구 웨딩홀 식당 구석에서 밥만 먹고 도망갔다. 어느덧 사촌 형이 배우자와 한복 차림으로 테이블을 돌았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틀에 박힌 인사말만 잔뜩 쏟아내더니, 내가 앉은 테이블로 성큼 다가와 뒤통수를 멋대로 쓰다듬었다. 은은한 굴욕과 흥분 탓에 목덜미가 뻣뻣해지고 귓바퀴에 열이 올랐다. 그의 통통한 찌찌를 주무르고 싶었다. 20년 전 아빠가 귀여운 조카를 희롱했듯이. 새신랑은 조만간 신혼여행을 떠날 것이다. 폭포와 동굴이 즐비한 화산섬이랬다. 다음은 네 차례야. 신랑이 헛소리를 지껄이자 맞은편에서 허겁지겁 초밥 집어먹던 아빠, 엄마가 방긋 미소 지었다. 심장 속에 묵직한 돌 한 덩이 살며시 가라앉았다. 그들은 내가 나고 자란 섬으로 때맞춰 돌아갔다. 난 육지에 꿋꿋이 남았다.
암석의 기원은 마그마다. 지금은 퇴적암이나 변성암이라 불리는 돌도 처음엔 화성암으로 태어났다. 마그마의 이산화규소 및 금속 산화물 함량과 냉각 속도에 따라 색상과 알갱이 크기가 다른 암석이 착착 굳어 생긴다. 그들은 풍화와 침식, 운반 작용, 지각 변동, 열과 압력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화성암, 퇴적암, 변성암이라는 세 가지 존재 형식 사이에서 물처럼 끊임없이 순환한다.
점토 벽돌로 지어진 3층짜리 다가구주택 1층에 산다. 철제 대문 밀고 쭉 들어오면 2층으로 올라가는 화강암 계단 아래 왼쪽 벽에 쪼그만 현관문이 있다. 하루 종일 햇빛이 거의 안 드는 집이라 대낮에도 컴컴하다. 형이 퇴근하기 전엔 암막 블라인드로 모든 창문을 가리고 전등도 켜지 않는다. 어차피 사방팔방 그늘진 김에 아늑한 동굴로 만들어버린다. 향수 뿌린 팬티만 입은 채 침대에 두꺼운 타월 깔았다. 탕탕탕. 손님이 제대로 찾아왔다. 마사지는 무료인데 역할놀이에 온전히 빠져들고 싶어 혼자 손님 운운한다. 아무런 대가 없이 뭇 한국 남성들의 지친 어깨를 풀어줄 봉사 정신 따윈 없다. 손님에게 문 살짝 열어주기 무섭게 휙 고개 돌려 빛을 등졌다. 곧장 오른쪽 방으로 들어가 그를 잠깐 기다렸다. 내겐 눈 감고도 뛰어다닐 익숙한 공간이지만, 손님은 낯선 어둠을 더듬어야 하는 불리한 입장이다. 벗으세요. 엎드리세요. 모르는 남자가 내 명령에 순순히 따랐다. 왼뺨을 베개에 묻어 잠자코 숨만 쉬었다. 그의 엉덩이에 올라타 어깨와 목을 주물렀다. 등허리를 거쳐 허벅지, 종아리, 발바닥까지 부드럽게 꾹꾹 눌렀다. 침묵과 긴장이 층층이 쌓여 바위처럼 방을 가득 메웠다. 그를 뒤집자 딴딴한 꼬추가 퐁 튀어나왔다. 이번엔 배를 깔고 앉아 팔뚝을 마사지했다. 그는 천장과 내 얼굴 번갈아 쳐다보며 이래도 되나 주저하다 허벅지 조심조심 어루만졌다. 건방진 성격은 아닌 모양이었다. 호흡이 제법 거칠어졌다. 털 묻은 타월로 정액을 닦았다. 채팅에서 건전 마사지임을 강조해도 결국엔 안 건전하게 끝난다. 제일 안쪽 창가에 놓인 책상에 기대 그가 주섬주섬 옷 입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나가기 직전 방문 옆 서랍장 위에 진열된 화강암, 현무암, 안산암, 응회암, 셰일, 암염, 석회암, 대리암, 규암, 섬전암(Fulgurite) 등 암석 표본에 뒤늦게 관심 갖는 남자들이 있다. 돌이네…… 돌이 많네…… 운이 좋으면 내가 특별히 아끼는 서랍 속 광물 결정체를 구경하는 영광을 누린다. 왜 돌을 수집해요? 흔한 질문이다. 예뻐서. 촉감 좋아서. 단단해서. 묵직해서. 추억이 깃들어서.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변함없이 그대로 있어서. 안정감이 몸뚱이를 획득한 형태여서. 수두룩한 대답이다. 실은 인간이 마음대로 부여한 의미일 뿐이다. 구름 보고 저건 하트야, 공룡이야 하듯이. 생긴 걸로 코끼리바위, 모녀바위, 좆바위 이름 붙이듯이. 얼굴 형상의 진멘세키(人面石)를 모으기도 한다. 손님이 떠난 후 창문 열어 자욱한 좆 냄새 뺐다. 청소기 한번 돌렸다. 빨래 바구니 깊숙이 타월을 집어넣었다.
초등학생 때 이미 같은 반 남자애, 동네 형, 목욕탕 아저씨, 젊은 아빠, 산타 할아버지 가릴 것 없이 와락 달려들어 만지고 냄새 맡고 침 묻히려 안달했다. 어린 뱀파이어 같았다. 열에 여덟은 온몸을 휘감는 성적 끌림이었다. 나머지 둘은 잔잔한 사랑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아파트 위층에 세 살 많은 형이 살았다. 얼굴도 이름도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게임 가르쳐주고 간식 사주며 내비친 따사로운 웃음기와 한결같이 진지하고 의젓한 태도만은 아직 또렷하다. 진절머리 나는 오빠 역할을 잠시 잊었다. 형네 가족과 바닷가에 놀러간 주말, 형이 내일 섬을 아예 떠나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형은 용천수 근처에서 주운 현무암 돌멩이를 내밀었다. 돌을 주머니에 넣고 무슨 말을 얹었나 모르겠다. 영어 학원 중등부에선 목소리 허스키한 여자애를 눈여겨봤다. 머리를 항상 칼단발로 잘랐고 피부색이 짙었으며 털털한 성격이었다. 이름은 민기였다. 그의 까만 눈동자에 관해 형편없는 시 한 편 끼적였다. 수컷 향기 진동하는 고등학교 동급생의 모가지와 사타구니 쪽쪽 빨고 싶은 욕망과 욕망을 악귀 대하듯 애써 물리치는 자기부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오래 허우적댔다. 생장하는 뿌리와 팽창하는 물에 못 이겨 쪼개진 바위 조각이 계곡에 떨어져 물살에 깎이고 깎이듯 매끈한 자갈 게이로 다듬어졌다. 적어도 당시엔 게이라는 용어 및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감지되는 게이 집단의 실존을 요철 없이 나와 동일시했다. 10여 년이 흐른 지금, 게이는 미치개이나 록산 게이 같고 호모는 호모사피엔스 같고 동성애자는 동성동본 같아 어디에도 발 못 붙이겠다. 새로운 명칭이 필요한 것 같다. 어쩌면 어떤 명칭도 소용없고 중요하지 않다. 마사지 받으러 불쑥불쑥 고개 내미는 남자들을 진정 형제 혹은 자매라 여기긴 어렵다. 깃발 아래 똘똘 뭉친 순간에야 눈물 찔끔 소속감 느껴보지만 해 떨어지고 파티 끝나면 다들 자기만의 베이스캠프로 흩어진다. 우린 정체성도 갈망하는 대상도 다른데, 시시한 공통점으로 간신히 묶여 있다.
불 좀 켜고 살자? 형이 지친 얼굴로 돌아왔다. 뜨뜻한 구두를 천천히 벗었다. 큰방에서 크로스백, 시계, 셔츠 단추, 벨트를 차례차례 풀었다. 양말과 팬티를 바구니에 던져두고 샤워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오줌 소리, 물소리 감상하며 팬티에 킁킁 코 박았다. 형은 매사에 군인 스타일로 행동한다. 샤워도 빨리하고 밥도 빨리 먹고 아침 일찍 벌떡 일어난다. 각진 정장 차림으로 직장 상사 깍듯이 대한다. 대학 후배인 나를 말 잘 듣는 군대 후임처럼 귀여워해준다. 어깨 주물러달라 요구한다. 생신이다 어버이날이다 해서 부모에게 한우 세트, 홍삼 갖다 바치고 부모는 온갖 반찬 다 싸 들고 방문하는 걸로 보답한다. 아들인지 딸인지 뭔지 모를 자식은 숨만 쉬어도 부모 가슴에 대못 때려 박는데, 시스 헤테로 남성은 효자 되기도 쉽다. 그는 너무나도 건실한 청년 대표 같은 이미지라 자위마저 평범하게 할 것 같다. 크리스털 핑크 딜도로 능욕해 그만의 퀴어니스를 발굴하면 세상이 폭삭 무너질까. 씻고 나와 젖은 털을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말려주는 헛된 망상에 침 한 방울 흘렸다. 형은 머리통부터 발가락까지 참하게 생겨 차돌 닮았다. 반질반질한 규암 바위에서 태어났나 싶다. 비누로 대충 세수하고 로션 안 발라도 유리 광택이 난다. 머리카락 짧게 깎아 단정한 목덜미를 볼 때마다 양쪽 가슴 미어진다.
저녁 먹었어? 야식 먹을까! 네가 지금 야식 먹을 생각 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야식 시킬 예정이고 야식 먹든 안 먹든 내 곁에 앉아 이성 연애 고민 상담 쓰레기통이 되어줘, 라는 뜻이다. 5, 6년 전 소개팅 단호히 거절하자 너 혹시 그거야? 되묻기에 화들짝 놀라 손사래 치며 이래저래 여자친구 사귄 적 있다 둘러댄 내 업보다. 얘가 왜 이럴까? 무슨 의미일까? 나야 모르지, 시발. 단조로운 패턴의 반복이었다. 매운 닭발에 소주 한 병 해치우더니 배시시 웃었다. 나 프러포즈하려고. 반지 케이스 열어 코에 들이밀었다. 앙증맞은 전구가 7월의 탄생석인 루비 반지를 비췄다. 어때? 괜찮지? 예쁘잖아. 강옥(Corundum)에 미량의 크롬이 섞여 붉은색 띠는 보석을 루비라 부른다. 루비는 사랑과 평화를 상징한다. 사랑과 평화…… 3년 만난 애인 생일에 오붓하게 커플 마사지 받고 비싼 레스토랑에서 반지 끼워줄 거랬다. 어디서 본 건 많아가지고…… 좋아하는 마음을 대체 어떻게 확신해요? 형에게 대뜸 물었었다. 그런 질문이 안 생길 만큼 깊이 사랑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다들 드라마, 영화 대사에 세뇌당해 민망한 짓을 성찰 없이 반복한다 여겼다. 흥에 겨운 나머지 덥석 허리 껴안았다. 양념 묻은 입술 볼에 맞추곤, 배달 용기 안 치우고 그대로 자러 갔다. 내가 방금 당한 건 술주정을 빙자한 추행일까 뽀뽀일까. 샤워기로 뜨거운 물 오랫동안 맞았다. 몸에 열 많은 사람과 포옹하는 기분이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얼마간 손발이 따뜻했다. 형이 군대 후임과 한 침대서 살 맞대고 잤던 일화를 떠올렸다. 비좁은데 굳이? 물음표 띄웠으나 아끼는 후임의 요청을 선뜻 들어줬댔다. 군인끼리 경험하는 은밀한 성적 접촉을 나도 맛볼 수 있길 간절히 기도했었다. 미미한 조짐조차 없었다.
스튜디오 촬영이 잡혀 카보숑(Cabochon) 커트로 원석 가공하듯 머리 빡빡 밀었다. 스타킹과 몽크 스트랩 신고 풍성한 튤 러플 드레스 입었다. 지름이 족히 6미터는 될 것 같았다. 925 실버, 진주 액세서리도 착용했다. 실장님 셔터 누르는 리듬에 맞춰 절도 있게 흐느적거렸다. 카메라 앞에선 대충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평소엔 걸핏하면 목소리 삼켜 응어리 맺힐 지경이지만, 자기 비하와 수치심 살포시 내려놓고 오로지 나와 카메라의 상호작용에 집중한다. 밥맛 떨어지는 얼굴인데 개성 넘친다 칭찬 들으며 되바라진 스타일링과 메이크업에 힘입어, 누가 보든 말든 나뭇가지에 매달리고 돌담 기어오르고 강물 속에서 춤춘다. 카메라의 존재가 생뚱맞은 짓거리를 얼마든지 정당화해준다. 상식을 초월하는 촬영장의 음탕한 기운에 심신이 홀딱 젖어든다. 여성 모델이 화장기 없이 정장 바지 입거나 남성 모델이 배꼽 드러내고 치마 입으면 이벤트성 젠더리스, 젠더 뉴트럴 컨셉 되는 게 패션계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촬영 끝나는 순간 젠더고 뭐고 일상생활에 걸맞은 꼬락서니와 포즈로 성급히 돌아가야 한다. 집 가는 길에 커피 한잔 홀짝이고자 모공에 박힌 파운데이션 찌꺼기까지 싹싹 지워냈다.
망설임 없이 남자 화장실 소변기에 오줌 갈겨도, 성별 캐묻는 건방진 설문엔 ‘제3의 성’ 혹은 ‘응답하기 싫음’ 선택할까 고민한다. 디스포리아를 겪진 않지만 내가 정말 남자 맞나 모르겠다. 남자가 아니라 남성성 억지로 수행해야 하는 상태 아닌가. 덩치 크고 털 많은 카페 직원은 목소리 우렁차고 발음 분명하고 씩씩하고 붙임성 좋아 보였다. 남성 젠더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차지한 인물 같았다. 난 차라리 암석 젠더, 광물 젠더에 가까울 것이다. 유리문 밀어 인파에 몸 던졌다. 퇴근한 직장인 무리 뚫는 괴로움 못 올라오도록 목적지만 떠올리며 표정을 없애고 빠르게 발걸음 옮겼다. 그들을 흐릿한 배경으로 쫓아버렸다. 돌이 되고 싶다. 기계가 되고 싶다. 앤디 워홀 밀랍 인형 같은 로봇이 되고 싶다. 어떤 상황에도 구애받지 않아 쓸데없이 감정 소모하지 않는 완벽한 존재가 되고 싶다. 꼬추나 실컷 빨면 배부를 것이다. 식욕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해발 189미터인 뒷산에 올랐다. 천매암, 편암, 편마암 등 변성암이 잘게 부서져 토양층을 이룬 흙산이다. 경사가 완만해 무릎 관절 망가질 걱정 없이 가뿐히 산책하기 좋다. 소나무, 편백나무 우거진 산 중턱에서 들숨에 뒤로 목 돌리고 날숨에 앞으로 목 돌렸다. 시간이 바로 흐르다 거꾸로 흐르다 했다. 바람 따라 흔들리는 이파리와 햇살이 바윗돌 널린 땅과 둥글게 뒤엉켰다. 떼굴떼굴 비탈 구르는 돌의 관점 같았다. 몸을 구성하는 물질 사이의 빈 공간을 없애 압축과 교결 작용을 거치면 사과 한 알만한 퇴적암이 될 것이다. 자연 현상이든 인위적 개입이든 개의치 않고 작아지면 작아지는 대로, 눌리면 눌리는 대로, 녹으면 녹는 대로, 굳으면 굳는 대로 흐름에 그저 몸 맡기는 삶 어떨까. 반년 주기로 강에 들어가 목욕하고 돌아오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추앙되는 거북바위 설화에 쉽게 마음 뺏긴다. 거북이 머리 어루만지고 등산객 소원 비는 돌탑에서 붉은 기 도는 장석(Feldspar)과 회색빛 도는 장석 조각을 빼냈다. 벌어진 칫솔로 문질러 실틈에 낀 흙을 제거하니 반짝반짝 뽀얘졌다. 그들은 너무 단단하고 끄떡없어 보이지만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모습을 취할 뿐이다. 그들의 변화를 감히 따라잡을 수 없다. 두 녀석을 암석 무리에 넣어야 할지 광물 무리에 넣어야 할지 머리 긁적이다 화강암 옆에 두었다. 여기서 비바람 피하는 게 이득일지 모르겠으나, 오랜만에 일원이 늘어 흐뭇했다. 서랍장 둘째 칸 무릎 꿇고 열어 화학 조성과 결정 구조, 성장 환경이 제각각인 자수정(Amethyst), 이끼 마노(Moss Agate), 눈송이 흑요석(Snowflake Obsidian), 홍옥수(Carnelian), 백운모(Muscovite), 황철석(Pyrite), 적철석(Hematite) 등의 신비로운 자태와 전설에 흠뻑 빠져들었다.
형은 애인이 1주년 기념으로 큰맘 먹고 선물한 명품 시계를 목숨처럼 애지중지한다. 석영(Quartz) 조각에 전기 흘러 32,768회 진동하는 족족 초침이 한 칸씩 움직인다. 건전지가 동력원이지만, 시간 측정에 광물의 성질을 활용하므로 돌시계인 셈이다. 그의 시간은 제도와 관습의 열띤 지지 받아 장밋빛 미래를 향해 순조롭게 직진한다. 난 자꾸 현재에 미래를 겹쳐 보고 미래에 현재를 투사하는 교착 상태에 빠진다. 그는 지인 소개로 똘똘하고 의욕 넘치는 웨딩 플래너 만나 홀 예약부터 장장 네 시간에 걸친 화보 촬영까지 일찌감치 끝냈다. 이젠 혼주 한복 대여할지 맞출지, 폐백 할지 말지 고민 중이라 했다. 내 알 바 아니었다. 축의금이 얼마나 모일까. 그건 조금 궁금했다.
싸구려 아로마 오일 통을 베개 옆에 세워놓았다. 타월을 넓게 깔았다. 이번 손님은 문 열자마자 집 안으로 들이닥쳐 깜짝 놀랐다. 어둠에 익숙해질 틈이 없을 텐데 바짝 뒤따라와 훌렁 옷 벗고 침대에 벌렁 누웠다. 운 좋게 형과 체형이 비슷한 날강도를 맞닥뜨려 젖꼭지가 단단해졌다. 손바닥에 오일 덜어 홀린 듯이 토실한 가슴 먼저 만졌다. 아랫배로 서서히 이동하려는데, 손목 붙잡혀 꼿꼿이 솟은 꼬추 마사지했다. 팬티 벗어던졌다. 신음 내지르다 금방 목쉬었다. 정액이 차올랐다. 콘돔은 없었다. 사랑에 빠져야지 결심해 상대방의 하찮은 언행을 일일이 로맨스의 징후로 읽어내는 자기기만보다 훨씬 속 편하다. 사랑 고백은 매번 내가 실제로 느끼는 감정을 초과한다. 아무 말도 안 할 순 없어 좋아한다 말했었다. 애매한 미소를 돌려받았다. 실은 혼자 얘 귀엽다, 맛있겠다 감탄하는 걸로 충분했다. 책상 의자에 다리 벌리고 앉아 벨트 굼뜨게 매는 그를 노려봤다. 더이상 형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귈래? 못 들은 척했다.
도어록 열리는 소리 들려 이불 속에 서둘러 파묻히라 외쳤다. 거실로 뛰쳐나가려 하면 돌로 쳐 죽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형이 일찍 돌아왔다. 반차 썼어. 청첩장 왔네. 장어 사 왔어. 웬일인지 제발 불 좀 켜자 툴툴대지 않았다. 싱크대 옆에 짐 떨구고 방에 들어갔다. 손님 쫓아내려 이불 들췄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축축한 구두 발 냄새 맡았다. 형이 몰래 찔찔 울면서 샤워한다 생각했다. 밥상 펴 불판에 장어 구워줬다. 결혼식 올 거지? 장어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청첩장 읽었다. ‘마음 보내실 곳’ 아래에 계좌번호 적혀 있었다. QR코드로 온라인 청첩장에 접속해 스튜디오 사진과 영상, 축하 메시지 구경했다. 정말 결혼하네 싶었다. 도망갈까? 변할 거야 잃을 거야 울상 지었다. 오빠! 자기야! 민기야! 야! 예비부부 싸움이 부쩍 잦아졌다. 매일 아침 만들어주고 꼬추 만져줄 사람 필요한 거면 그냥 시발 나랑 살아요. 독기도 없으면서 결혼은 무슨? 이성애가 만만한가? 내뱉지 못한 말들이 쌓여 사리 되는 게 분명했다. 그들은 신혼여행 갔다 와 히말라야 핑크 소금 답례품으로 돌릴 것이다. 원산지는 파키스탄이며 100퍼센트 암염일 것이다. 그라인더 달린 유리병에 담겨 있을 것이다. 비싸 보이는데 하나도 안 비쌀 것이다. 이 집에서 둘이 살림 합쳐 아내 쪽 고양이 데리고 살 것이다. 형은 고양이와 경쟁해야 할 것이다.
10월이었다. 결혼식 일주일 남자 문틀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 오지게 해대더니 예복 핏 장난 아니었다. 생식 세포 생산 활발한 남성 같았다. 뭐 입을지 하루 내내 고민하다 그냥 청바지에 재킷 걸쳤다. 사내들은 하나같이 셋업 슈트에 미쳐 있었다.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Man in Polyester Suit〉처럼 바지 지퍼 모두 내려 작은 꼬추 큰 꼬추 다 내놓고 단체 사진 찍길 바랐다. 잘못 던진 부케에 뺨 맞았다. 날 아는 하객은 한 명도 없었기에, 신부 신랑 빼곤 아무도 마음껏 비웃지 못해 분위기 괜히 싸늘해졌다. 오줌 안 마려운데 화장실 가 멀뚱히 거울 봤다. 거울엔 석영(규사), 적철석, 크롬철석(Chromite)이 쓰인다. 광물은 어디에나 있다. 홀마다 한창 결혼식 치러져 로비까지 시끌벅적했다. 끼니 거른 채 휑한 길거리 떠돌았다. 하객처럼 안 보일 것 같았다. 보증금 없이 이삿짐 서둘러 싸야 했다. 단단이 옮겨야 했다. 소속사 필요했다. 언젠가 화산 분화구에 알아서 뛰어든 사람들이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용암에 녹아들어 사연 많은 돌로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그들의 머리, 몸통, 팔다리가 계속 더 작은 단위로 조각나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하나의 돌이자 수백 수천 개의 돌이자 지각의 일부로, 지구로서 존재할 것이다. 난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안다.
어릴 때부터 아빠의 직장 동료 식장에 자주 따라다니며 할머니, 엄마, 동생과 뷔페 음식을 양껏 먹었다. 가끔은 코스 요리를 맛볼 수도 있었다. 식사 마치기 전까지 아빠를 모른 척해야 했다. 식권 몇 장이 아까워 남의 주말 행사에 가족들 불러다 밥 먹이는 가부장의 살뜰한 습성이 적잖이 부끄러웠지만, 20대 중반에 일면식도 없는 친구의 친구 웨딩홀 식당 구석에서 밥만 먹고 도망갔다. 어느덧 사촌 형이 배우자와 한복 차림으로 테이블을 돌았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틀에 박힌 인사말만 잔뜩 쏟아내더니, 내가 앉은 테이블로 성큼 다가와 뒤통수를 멋대로 쓰다듬었다. 은은한 굴욕과 흥분 탓에 목덜미가 뻣뻣해지고 귓바퀴에 열이 올랐다. 그의 통통한 찌찌를 주무르고 싶었다. 20년 전 아빠가 귀여운 조카를 희롱했듯이. 새신랑은 조만간 신혼여행을 떠날 것이다. 폭포와 동굴이 즐비한 화산섬이랬다. 다음은 네 차례야. 신랑이 헛소리를 지껄이자 맞은편에서 허겁지겁 초밥 집어먹던 아빠, 엄마가 방긋 미소 지었다. 심장 속에 묵직한 돌 한 덩이 살며시 가라앉았다. 그들은 내가 나고 자란 섬으로 때맞춰 돌아갔다. 난 육지에 꿋꿋이 남았다.
암석의 기원은 마그마다. 지금은 퇴적암이나 변성암이라 불리는 돌도 처음엔 화성암으로 태어났다. 마그마의 이산화규소 및 금속 산화물 함량과 냉각 속도에 따라 색상과 알갱이 크기가 다른 암석이 착착 굳어 생긴다. 그들은 풍화와 침식, 운반 작용, 지각 변동, 열과 압력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화성암, 퇴적암, 변성암이라는 세 가지 존재 형식 사이에서 물처럼 끊임없이 순환한다.
점토 벽돌로 지어진 3층짜리 다가구주택 1층에 산다. 철제 대문 밀고 쭉 들어오면 2층으로 올라가는 화강암 계단 아래 왼쪽 벽에 쪼그만 현관문이 있다. 하루 종일 햇빛이 거의 안 드는 집이라 대낮에도 컴컴하다. 형이 퇴근하기 전엔 암막 블라인드로 모든 창문을 가리고 전등도 켜지 않는다. 어차피 사방팔방 그늘진 김에 아늑한 동굴로 만들어버린다. 향수 뿌린 팬티만 입은 채 침대에 두꺼운 타월 깔았다. 탕탕탕. 손님이 제대로 찾아왔다. 마사지는 무료인데 역할놀이에 온전히 빠져들고 싶어 혼자 손님 운운한다. 아무런 대가 없이 뭇 한국 남성들의 지친 어깨를 풀어줄 봉사 정신 따윈 없다. 손님에게 문 살짝 열어주기 무섭게 휙 고개 돌려 빛을 등졌다. 곧장 오른쪽 방으로 들어가 그를 잠깐 기다렸다. 내겐 눈 감고도 뛰어다닐 익숙한 공간이지만, 손님은 낯선 어둠을 더듬어야 하는 불리한 입장이다. 벗으세요. 엎드리세요. 모르는 남자가 내 명령에 순순히 따랐다. 왼뺨을 베개에 묻어 잠자코 숨만 쉬었다. 그의 엉덩이에 올라타 어깨와 목을 주물렀다. 등허리를 거쳐 허벅지, 종아리, 발바닥까지 부드럽게 꾹꾹 눌렀다. 침묵과 긴장이 층층이 쌓여 바위처럼 방을 가득 메웠다. 그를 뒤집자 딴딴한 꼬추가 퐁 튀어나왔다. 이번엔 배를 깔고 앉아 팔뚝을 마사지했다. 그는 천장과 내 얼굴 번갈아 쳐다보며 이래도 되나 주저하다 허벅지 조심조심 어루만졌다. 건방진 성격은 아닌 모양이었다. 호흡이 제법 거칠어졌다. 털 묻은 타월로 정액을 닦았다. 채팅에서 건전 마사지임을 강조해도 결국엔 안 건전하게 끝난다. 제일 안쪽 창가에 놓인 책상에 기대 그가 주섬주섬 옷 입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나가기 직전 방문 옆 서랍장 위에 진열된 화강암, 현무암, 안산암, 응회암, 셰일, 암염, 석회암, 대리암, 규암, 섬전암(Fulgurite) 등 암석 표본에 뒤늦게 관심 갖는 남자들이 있다. 돌이네…… 돌이 많네…… 운이 좋으면 내가 특별히 아끼는 서랍 속 광물 결정체를 구경하는 영광을 누린다. 왜 돌을 수집해요? 흔한 질문이다. 예뻐서. 촉감 좋아서. 단단해서. 묵직해서. 추억이 깃들어서.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변함없이 그대로 있어서. 안정감이 몸뚱이를 획득한 형태여서. 수두룩한 대답이다. 실은 인간이 마음대로 부여한 의미일 뿐이다. 구름 보고 저건 하트야, 공룡이야 하듯이. 생긴 걸로 코끼리바위, 모녀바위, 좆바위 이름 붙이듯이. 얼굴 형상의 진멘세키(人面石)를 모으기도 한다. 손님이 떠난 후 창문 열어 자욱한 좆 냄새 뺐다. 청소기 한번 돌렸다. 빨래 바구니 깊숙이 타월을 집어넣었다.
초등학생 때 이미 같은 반 남자애, 동네 형, 목욕탕 아저씨, 젊은 아빠, 산타 할아버지 가릴 것 없이 와락 달려들어 만지고 냄새 맡고 침 묻히려 안달했다. 어린 뱀파이어 같았다. 열에 여덟은 온몸을 휘감는 성적 끌림이었다. 나머지 둘은 잔잔한 사랑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아파트 위층에 세 살 많은 형이 살았다. 얼굴도 이름도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게임 가르쳐주고 간식 사주며 내비친 따사로운 웃음기와 한결같이 진지하고 의젓한 태도만은 아직 또렷하다. 진절머리 나는 오빠 역할을 잠시 잊었다. 형네 가족과 바닷가에 놀러간 주말, 형이 내일 섬을 아예 떠나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형은 용천수 근처에서 주운 현무암 돌멩이를 내밀었다. 돌을 주머니에 넣고 무슨 말을 얹었나 모르겠다. 영어 학원 중등부에선 목소리 허스키한 여자애를 눈여겨봤다. 머리를 항상 칼단발로 잘랐고 피부색이 짙었으며 털털한 성격이었다. 이름은 민기였다. 그의 까만 눈동자에 관해 형편없는 시 한 편 끼적였다. 수컷 향기 진동하는 고등학교 동급생의 모가지와 사타구니 쪽쪽 빨고 싶은 욕망과 욕망을 악귀 대하듯 애써 물리치는 자기부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오래 허우적댔다. 생장하는 뿌리와 팽창하는 물에 못 이겨 쪼개진 바위 조각이 계곡에 떨어져 물살에 깎이고 깎이듯 매끈한 자갈 게이로 다듬어졌다. 적어도 당시엔 게이라는 용어 및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감지되는 게이 집단의 실존을 요철 없이 나와 동일시했다. 10여 년이 흐른 지금, 게이는 미치개이나 록산 게이 같고 호모는 호모사피엔스 같고 동성애자는 동성동본 같아 어디에도 발 못 붙이겠다. 새로운 명칭이 필요한 것 같다. 어쩌면 어떤 명칭도 소용없고 중요하지 않다. 마사지 받으러 불쑥불쑥 고개 내미는 남자들을 진정 형제 혹은 자매라 여기긴 어렵다. 깃발 아래 똘똘 뭉친 순간에야 눈물 찔끔 소속감 느껴보지만 해 떨어지고 파티 끝나면 다들 자기만의 베이스캠프로 흩어진다. 우린 정체성도 갈망하는 대상도 다른데, 시시한 공통점으로 간신히 묶여 있다.
불 좀 켜고 살자? 형이 지친 얼굴로 돌아왔다. 뜨뜻한 구두를 천천히 벗었다. 큰방에서 크로스백, 시계, 셔츠 단추, 벨트를 차례차례 풀었다. 양말과 팬티를 바구니에 던져두고 샤워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오줌 소리, 물소리 감상하며 팬티에 킁킁 코 박았다. 형은 매사에 군인 스타일로 행동한다. 샤워도 빨리하고 밥도 빨리 먹고 아침 일찍 벌떡 일어난다. 각진 정장 차림으로 직장 상사 깍듯이 대한다. 대학 후배인 나를 말 잘 듣는 군대 후임처럼 귀여워해준다. 어깨 주물러달라 요구한다. 생신이다 어버이날이다 해서 부모에게 한우 세트, 홍삼 갖다 바치고 부모는 온갖 반찬 다 싸 들고 방문하는 걸로 보답한다. 아들인지 딸인지 뭔지 모를 자식은 숨만 쉬어도 부모 가슴에 대못 때려 박는데, 시스 헤테로 남성은 효자 되기도 쉽다. 그는 너무나도 건실한 청년 대표 같은 이미지라 자위마저 평범하게 할 것 같다. 크리스털 핑크 딜도로 능욕해 그만의 퀴어니스를 발굴하면 세상이 폭삭 무너질까. 씻고 나와 젖은 털을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말려주는 헛된 망상에 침 한 방울 흘렸다. 형은 머리통부터 발가락까지 참하게 생겨 차돌 닮았다. 반질반질한 규암 바위에서 태어났나 싶다. 비누로 대충 세수하고 로션 안 발라도 유리 광택이 난다. 머리카락 짧게 깎아 단정한 목덜미를 볼 때마다 양쪽 가슴 미어진다.
저녁 먹었어? 야식 먹을까! 네가 지금 야식 먹을 생각 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야식 시킬 예정이고 야식 먹든 안 먹든 내 곁에 앉아 이성 연애 고민 상담 쓰레기통이 되어줘, 라는 뜻이다. 5, 6년 전 소개팅 단호히 거절하자 너 혹시 그거야? 되묻기에 화들짝 놀라 손사래 치며 이래저래 여자친구 사귄 적 있다 둘러댄 내 업보다. 얘가 왜 이럴까? 무슨 의미일까? 나야 모르지, 시발. 단조로운 패턴의 반복이었다. 매운 닭발에 소주 한 병 해치우더니 배시시 웃었다. 나 프러포즈하려고. 반지 케이스 열어 코에 들이밀었다. 앙증맞은 전구가 7월의 탄생석인 루비 반지를 비췄다. 어때? 괜찮지? 예쁘잖아. 강옥(Corundum)에 미량의 크롬이 섞여 붉은색 띠는 보석을 루비라 부른다. 루비는 사랑과 평화를 상징한다. 사랑과 평화…… 3년 만난 애인 생일에 오붓하게 커플 마사지 받고 비싼 레스토랑에서 반지 끼워줄 거랬다. 어디서 본 건 많아가지고…… 좋아하는 마음을 대체 어떻게 확신해요? 형에게 대뜸 물었었다. 그런 질문이 안 생길 만큼 깊이 사랑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다들 드라마, 영화 대사에 세뇌당해 민망한 짓을 성찰 없이 반복한다 여겼다. 흥에 겨운 나머지 덥석 허리 껴안았다. 양념 묻은 입술 볼에 맞추곤, 배달 용기 안 치우고 그대로 자러 갔다. 내가 방금 당한 건 술주정을 빙자한 추행일까 뽀뽀일까. 샤워기로 뜨거운 물 오랫동안 맞았다. 몸에 열 많은 사람과 포옹하는 기분이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얼마간 손발이 따뜻했다. 형이 군대 후임과 한 침대서 살 맞대고 잤던 일화를 떠올렸다. 비좁은데 굳이? 물음표 띄웠으나 아끼는 후임의 요청을 선뜻 들어줬댔다. 군인끼리 경험하는 은밀한 성적 접촉을 나도 맛볼 수 있길 간절히 기도했었다. 미미한 조짐조차 없었다.
스튜디오 촬영이 잡혀 카보숑(Cabochon) 커트로 원석 가공하듯 머리 빡빡 밀었다. 스타킹과 몽크 스트랩 신고 풍성한 튤 러플 드레스 입었다. 지름이 족히 6미터는 될 것 같았다. 925 실버, 진주 액세서리도 착용했다. 실장님 셔터 누르는 리듬에 맞춰 절도 있게 흐느적거렸다. 카메라 앞에선 대충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평소엔 걸핏하면 목소리 삼켜 응어리 맺힐 지경이지만, 자기 비하와 수치심 살포시 내려놓고 오로지 나와 카메라의 상호작용에 집중한다. 밥맛 떨어지는 얼굴인데 개성 넘친다 칭찬 들으며 되바라진 스타일링과 메이크업에 힘입어, 누가 보든 말든 나뭇가지에 매달리고 돌담 기어오르고 강물 속에서 춤춘다. 카메라의 존재가 생뚱맞은 짓거리를 얼마든지 정당화해준다. 상식을 초월하는 촬영장의 음탕한 기운에 심신이 홀딱 젖어든다. 여성 모델이 화장기 없이 정장 바지 입거나 남성 모델이 배꼽 드러내고 치마 입으면 이벤트성 젠더리스, 젠더 뉴트럴 컨셉 되는 게 패션계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촬영 끝나는 순간 젠더고 뭐고 일상생활에 걸맞은 꼬락서니와 포즈로 성급히 돌아가야 한다. 집 가는 길에 커피 한잔 홀짝이고자 모공에 박힌 파운데이션 찌꺼기까지 싹싹 지워냈다.
망설임 없이 남자 화장실 소변기에 오줌 갈겨도, 성별 캐묻는 건방진 설문엔 ‘제3의 성’ 혹은 ‘응답하기 싫음’ 선택할까 고민한다. 디스포리아를 겪진 않지만 내가 정말 남자 맞나 모르겠다. 남자가 아니라 남성성 억지로 수행해야 하는 상태 아닌가. 덩치 크고 털 많은 카페 직원은 목소리 우렁차고 발음 분명하고 씩씩하고 붙임성 좋아 보였다. 남성 젠더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차지한 인물 같았다. 난 차라리 암석 젠더, 광물 젠더에 가까울 것이다. 유리문 밀어 인파에 몸 던졌다. 퇴근한 직장인 무리 뚫는 괴로움 못 올라오도록 목적지만 떠올리며 표정을 없애고 빠르게 발걸음 옮겼다. 그들을 흐릿한 배경으로 쫓아버렸다. 돌이 되고 싶다. 기계가 되고 싶다. 앤디 워홀 밀랍 인형 같은 로봇이 되고 싶다. 어떤 상황에도 구애받지 않아 쓸데없이 감정 소모하지 않는 완벽한 존재가 되고 싶다. 꼬추나 실컷 빨면 배부를 것이다. 식욕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해발 189미터인 뒷산에 올랐다. 천매암, 편암, 편마암 등 변성암이 잘게 부서져 토양층을 이룬 흙산이다. 경사가 완만해 무릎 관절 망가질 걱정 없이 가뿐히 산책하기 좋다. 소나무, 편백나무 우거진 산 중턱에서 들숨에 뒤로 목 돌리고 날숨에 앞으로 목 돌렸다. 시간이 바로 흐르다 거꾸로 흐르다 했다. 바람 따라 흔들리는 이파리와 햇살이 바윗돌 널린 땅과 둥글게 뒤엉켰다. 떼굴떼굴 비탈 구르는 돌의 관점 같았다. 몸을 구성하는 물질 사이의 빈 공간을 없애 압축과 교결 작용을 거치면 사과 한 알만한 퇴적암이 될 것이다. 자연 현상이든 인위적 개입이든 개의치 않고 작아지면 작아지는 대로, 눌리면 눌리는 대로, 녹으면 녹는 대로, 굳으면 굳는 대로 흐름에 그저 몸 맡기는 삶 어떨까. 반년 주기로 강에 들어가 목욕하고 돌아오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추앙되는 거북바위 설화에 쉽게 마음 뺏긴다. 거북이 머리 어루만지고 등산객 소원 비는 돌탑에서 붉은 기 도는 장석(Feldspar)과 회색빛 도는 장석 조각을 빼냈다. 벌어진 칫솔로 문질러 실틈에 낀 흙을 제거하니 반짝반짝 뽀얘졌다. 그들은 너무 단단하고 끄떡없어 보이지만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모습을 취할 뿐이다. 그들의 변화를 감히 따라잡을 수 없다. 두 녀석을 암석 무리에 넣어야 할지 광물 무리에 넣어야 할지 머리 긁적이다 화강암 옆에 두었다. 여기서 비바람 피하는 게 이득일지 모르겠으나, 오랜만에 일원이 늘어 흐뭇했다. 서랍장 둘째 칸 무릎 꿇고 열어 화학 조성과 결정 구조, 성장 환경이 제각각인 자수정(Amethyst), 이끼 마노(Moss Agate), 눈송이 흑요석(Snowflake Obsidian), 홍옥수(Carnelian), 백운모(Muscovite), 황철석(Pyrite), 적철석(Hematite) 등의 신비로운 자태와 전설에 흠뻑 빠져들었다.
형은 애인이 1주년 기념으로 큰맘 먹고 선물한 명품 시계를 목숨처럼 애지중지한다. 석영(Quartz) 조각에 전기 흘러 32,768회 진동하는 족족 초침이 한 칸씩 움직인다. 건전지가 동력원이지만, 시간 측정에 광물의 성질을 활용하므로 돌시계인 셈이다. 그의 시간은 제도와 관습의 열띤 지지 받아 장밋빛 미래를 향해 순조롭게 직진한다. 난 자꾸 현재에 미래를 겹쳐 보고 미래에 현재를 투사하는 교착 상태에 빠진다. 그는 지인 소개로 똘똘하고 의욕 넘치는 웨딩 플래너 만나 홀 예약부터 장장 네 시간에 걸친 화보 촬영까지 일찌감치 끝냈다. 이젠 혼주 한복 대여할지 맞출지, 폐백 할지 말지 고민 중이라 했다. 내 알 바 아니었다. 축의금이 얼마나 모일까. 그건 조금 궁금했다.
싸구려 아로마 오일 통을 베개 옆에 세워놓았다. 타월을 넓게 깔았다. 이번 손님은 문 열자마자 집 안으로 들이닥쳐 깜짝 놀랐다. 어둠에 익숙해질 틈이 없을 텐데 바짝 뒤따라와 훌렁 옷 벗고 침대에 벌렁 누웠다. 운 좋게 형과 체형이 비슷한 날강도를 맞닥뜨려 젖꼭지가 단단해졌다. 손바닥에 오일 덜어 홀린 듯이 토실한 가슴 먼저 만졌다. 아랫배로 서서히 이동하려는데, 손목 붙잡혀 꼿꼿이 솟은 꼬추 마사지했다. 팬티 벗어던졌다. 신음 내지르다 금방 목쉬었다. 정액이 차올랐다. 콘돔은 없었다. 사랑에 빠져야지 결심해 상대방의 하찮은 언행을 일일이 로맨스의 징후로 읽어내는 자기기만보다 훨씬 속 편하다. 사랑 고백은 매번 내가 실제로 느끼는 감정을 초과한다. 아무 말도 안 할 순 없어 좋아한다 말했었다. 애매한 미소를 돌려받았다. 실은 혼자 얘 귀엽다, 맛있겠다 감탄하는 걸로 충분했다. 책상 의자에 다리 벌리고 앉아 벨트 굼뜨게 매는 그를 노려봤다. 더이상 형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귈래? 못 들은 척했다.
도어록 열리는 소리 들려 이불 속에 서둘러 파묻히라 외쳤다. 거실로 뛰쳐나가려 하면 돌로 쳐 죽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형이 일찍 돌아왔다. 반차 썼어. 청첩장 왔네. 장어 사 왔어. 웬일인지 제발 불 좀 켜자 툴툴대지 않았다. 싱크대 옆에 짐 떨구고 방에 들어갔다. 손님 쫓아내려 이불 들췄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축축한 구두 발 냄새 맡았다. 형이 몰래 찔찔 울면서 샤워한다 생각했다. 밥상 펴 불판에 장어 구워줬다. 결혼식 올 거지? 장어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청첩장 읽었다. ‘마음 보내실 곳’ 아래에 계좌번호 적혀 있었다. QR코드로 온라인 청첩장에 접속해 스튜디오 사진과 영상, 축하 메시지 구경했다. 정말 결혼하네 싶었다. 도망갈까? 변할 거야 잃을 거야 울상 지었다. 오빠! 자기야! 민기야! 야! 예비부부 싸움이 부쩍 잦아졌다. 매일 아침 만들어주고 꼬추 만져줄 사람 필요한 거면 그냥 시발 나랑 살아요. 독기도 없으면서 결혼은 무슨? 이성애가 만만한가? 내뱉지 못한 말들이 쌓여 사리 되는 게 분명했다. 그들은 신혼여행 갔다 와 히말라야 핑크 소금 답례품으로 돌릴 것이다. 원산지는 파키스탄이며 100퍼센트 암염일 것이다. 그라인더 달린 유리병에 담겨 있을 것이다. 비싸 보이는데 하나도 안 비쌀 것이다. 이 집에서 둘이 살림 합쳐 아내 쪽 고양이 데리고 살 것이다. 형은 고양이와 경쟁해야 할 것이다.
10월이었다. 결혼식 일주일 남자 문틀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 오지게 해대더니 예복 핏 장난 아니었다. 생식 세포 생산 활발한 남성 같았다. 뭐 입을지 하루 내내 고민하다 그냥 청바지에 재킷 걸쳤다. 사내들은 하나같이 셋업 슈트에 미쳐 있었다.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Man in Polyester Suit〉처럼 바지 지퍼 모두 내려 작은 꼬추 큰 꼬추 다 내놓고 단체 사진 찍길 바랐다. 잘못 던진 부케에 뺨 맞았다. 날 아는 하객은 한 명도 없었기에, 신부 신랑 빼곤 아무도 마음껏 비웃지 못해 분위기 괜히 싸늘해졌다. 오줌 안 마려운데 화장실 가 멀뚱히 거울 봤다. 거울엔 석영(규사), 적철석, 크롬철석(Chromite)이 쓰인다. 광물은 어디에나 있다. 홀마다 한창 결혼식 치러져 로비까지 시끌벅적했다. 끼니 거른 채 휑한 길거리 떠돌았다. 하객처럼 안 보일 것 같았다. 보증금 없이 이삿짐 서둘러 싸야 했다. 단단이 옮겨야 했다. 소속사 필요했다. 언젠가 화산 분화구에 알아서 뛰어든 사람들이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용암에 녹아들어 사연 많은 돌로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그들의 머리, 몸통, 팔다리가 계속 더 작은 단위로 조각나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하나의 돌이자 수백 수천 개의 돌이자 지각의 일부로, 지구로서 존재할 것이다. 난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안다.
돌기민
돌은 움직인다. 동물이 마찰력을 이용하듯 경사와 물과 바람을 빌려 온 세상을 여행한다. 집에 놓인 돌은 잠시 이동 수단을 잃었을 뿐이다. 『Why? 암석과 광물』을 열심히 읽었다. @dolkimin
2022/07/26
5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