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불투명한 몸의 디스토피아
최근 한국소설에서의 신체 변형과 그 함의
1.
몇 년 전에 중독된 듯이 헬스 관련 유튜브 영상들을 본 적이 있다. 한 일 년 가까이 그랬다.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영상을 보며 지식을 수집하는 것으로 운동 부족을 벌충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운동하지 않는 데서 오는 어떤 죄의식을 달래기 위함이었는지도. 사실은 근육질 몸들을 보는 게 그저 좋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최근에는 다시 헬스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부쩍 체력이 떨어지고 근육이 빠져 왜소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저녁 시간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너무 많아서 근육과 땀과 기구에 갇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앙상한 팔다리에 젖산을 쌓으며 나는 육체 공장에서의 명상에 잠겼다.
철학자들은 아마 누구보다 정신을 애호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심지어 유물론자라 할지라도 몸에는 다소 무관심했을 것이다. 담론의 장에서 몇십 년 동안 몸에 대한 철학의 무관심은 비판받아왔다. 전통적인 철학이 억압하거나 격하한 것들―정념적인 것, 수동적인 것, 관능적인 것, (여)성적인 것은 모두 정신이 아니라 몸의 편에 있다. 전통적인 정신/육체 이분법에 따르자면 말이다. 이러한 비판은 학술적인 인문학 담론의 장에서는 여전히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상에서 하게 되는 경험은 퍽 다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야말로 도처에 몸뿐이다. 유튜브 쇼츠에서 전시장과 데이팅 앱을 거쳐 헬스장에서 이르기까지, 정말이지 몸뿐이다! 물론 모든 몸이 동등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잘생긴 몸, 예쁜 몸, 귀여운 몸, 근육질 몸, 운동 잘하는 몸, 춤 잘 추는 몸이 잘 보인다.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한 남성 정치인의 보정속옷이 논란 아닌 논란거리가 되었다. 사춘기 시절에 끝났으면 좋았을 ‘육체미 소동’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일까? 이 유예된 사춘기적 정치에는 우리를 초등학교 교실로 돌려보내는 희극성이 있다. “보정속옷 가슴 뽕 유치 뽕이네요.”1)
몸은 왜 이렇게 중요한가? 잘 알려져 있듯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이념과 가치가 ‘이기적인 계산의 차디찬 얼음물’에 처박힌다고 썼다. 자본주의는 모든 목가적·낭만적·종교적·예술적·공동체적 가치들을 파괴한다. 이는 ‘다른 가치들은 모르겠고 돈만 많이 벌면 장땡’이라는 식의 태도가 지배적으로 된다는 뜻이다.
이것도 지금 한국 사회에 잘 해당하는 말인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말하지 않은 게 있다. 여하한 이념이나 상징이 파괴되면, 돈만 남는 게 아니라 몸도 남는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실존은 돈 아니면 몸으로 환원된다. 내가 보기에 한국 사회는 돈 아니면 몸이라는 ‘이중 환원’의 강도에 있어 지구상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가혹하다.
몸의 문제에 무관심하지 않았던―무관심할 수 없었던―철학자 미셸 푸코는 만약 유토피아가 있다면 몸의 형체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고 심지어 몸의 투명도를 조절할 수 있는 곳이리라 썼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운 나라가 있다면 “나는 매력적인 왕자가 되고, 눈꼴신 멋쟁이 젊은이들은 모두 새끼 곰같이 흉하고 잔뜩 털이 난 모습이 될 것이다.”2) 우리는 항상 보이고 싶거나 보이지 않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보이고 싶을 때 보이고 싶은 방식으로 보이기를 원한다. 반대로 우리가 타인의 시선에 몸을 전혀 드러낼 수 없거나 항상 드러내야만 한다면 그곳은 디스토피아일 것이다. 한국 사회가 ‘이중 환원’에 있어 엄청나게 가혹하다는 것은 몸을 숨기거나 가리거나 감쌀 수 있는 상징들이 빈곤하다는 뜻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물리적으로 벗고 있지만 상징적으로는 입고 있다. 아이들의 말이 그 상징적 옷을 벗기기 전까지는. 반대로 한국 사회는 물리적으로 입고 있지만 상징적으로는 헐벗은 상태에 사람들을 밀어 넣는다. 이 사회는 돈과 몸이라는 물질적 하부구조에 사람을 압착시키는 거대한 프레스기 같다. 이 프레스기 아래서는 ‘매력의 문제’3)의 복합성과 창발성도 질식하고 만다. 동시대 문화에서 몸이 너무나 중요해 보인다 해도, 사실 신체의 역량 자체가 긍정적으로 조명되는 것은 아니다. 몸은 ‘정상성’이라는 관념 아래서, 그 관념과의 관계 속에서만 모종의 가치나 위상을 부여받고 있다.
이 프레스기는 압력에 따라 엄청난 열을 발생시킨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차가운 계산의 얼음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이곳은 또한 뜨겁게 달궈진 정념의 세계이기도 하다. 몸들은 차가운 계산의 얼음물 속에서는 값이 매겨지는 한낱 노동력일 뿐이다. 그러나 뜨거운 압력솥 속에서 몸은 전시되고, 성형되고, 선망되고, 질투의 대상이 되고, 가꿔지고, 보살펴지고, 혐오되고, 멸시된다. 몸은 한편에서는 노동력으로 셈해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정체성을 식별하고 미적인 판정을 하는 시선에 노출된다. 한편에서는 동질화되고, 한편에서는 차별화된다. 이 디스토피아에서 사람들은 나눠지기도 합쳐지기도 하는 두 종류의 질문에 짓눌린다. 하나는 돈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몸의 문제이다.
돈의 문제는 사람들이 매 순간 이런 질문에 직면하게 강요한다: ‘너 부자야 아니야? 이거 소비할 능력이 있어 없어?’ 반면 몸의 문제가 사람들에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너 남자야 여자야? 젊어 아니면 젊지 않아? 건강하고 잘 가꿔진 몸을 가졌어, 그렇지 못한 몸을 가졌어?’ 물론 돈의 문제와 몸의 문제가 깔끔하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돈이 많으면 건강하고 잘 가꿔진 몸을 갖기가 상대적으로 쉽고, 점점 더 그렇게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돈으로도 젊음은 살 수 없다. 하지만 머잖은 미래에 젊음까지 살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젊은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십대 아들의 피를 수혈받은 억만장자의 이야기가 재작년쯤 화제가 되었다.4) 어쩌면 우스운 괴담 같지만, 억만장자가 이런 기행을 벌일 수 있는 배경에는 발전한 의학 기술이 있고, 기술과 지식을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본이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인간의 몸은 지극히 정치적인 장소다. 하지만 생명정치의 양상은 달라지고 있을 것이다. 생명정치는 더이상 발전한 의학과 보건 지식, 촘촘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인구를 관리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생명정치는 치열하게 몸을 꾸미고, 관리하고, 성형하고, 향상하고, 단련하라고 부추긴다. 간단히 말해, 오늘날의 생명정치는 설득하는 권력을 넘어 유혹하는 권력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2.
이 글에서는 작년에 발표된 두 편의 소설을 읽어볼 것이다. 서장원의 「리틀 프라이드」와 이희주의 「최애의 아이」이다.5) 두 소설은 몸의 문제에 대해, 아름다움과 권력에 대해, 볼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의 관계에 대해 중요하고 시의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리틀 프라이드」는 ‘볼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의 틈새를 겨냥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어떤 몸이 잘 보이는가)? 둘째,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어떤 몸이 어떻게 말해지는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든 몸이 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중증 장애가 있는 몸은 거리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또 학살당한 몸, 감금된 몸은 보일 수 없다. 죽은 몸이 절대적인 경계라면, 잘 보이는 몸과 안 보이는 몸 사이에 상대적이고 점진적인 차이도 있다. 한편 볼 수 있는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볼 수 없다고 해서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사회적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친하지 않은 직장 상사에게 대놓고 “차장님 그 헤어스타일 진짜 별로예요”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보이고, 거의 모두에게 명백하게 그렇게 보인다 할지라도 말이다.
대화의 자리마다 말할 수 있는 것/없는 것의 경계를 규정하는 코드가 있다. 친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직장의 회의실에서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직장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말이 소설의 지면에 쓰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철학책을 읽으며 하는 공상들을 술자리에서 눈치 없이 늘어놓는다면 친구들은 텅 빈 눈빛으로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낼 것이다. 코드들의 집합을 장르라고 한다면. 모든 담화에는 장르의 문법이 있다. 사회적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굳이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서도 이 장르에서 저 장르로 옮겨다닐 수 있다. 무섭게 혼내다가 전화를 받는 엄마처럼 순식간에 내용뿐만 아니라 말투와 어조도 바꿀 수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장르의 문법을 얼마나 적절하게 파악하는가, 거기에 얼마나 잘 적응하고 장르에서 장르로 유연하게 이동하는가―이 능력이 곧 사회적 감각이라고, 혹은 ‘눈치’라고 할 수 있다.
볼 수 있는 것/없는 것 그리고 말할 수 있는 것/없는 것, 이 네 항의 복잡미묘한 조합 속에, 우리가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생각할 때 이야기해야 할 거의 모든 문제가 있다. 이 조합에 개입하고 조작을 가하지 않으면서 정치적인 소재를 재현한다면 그것은 정치에 대한 소설이지 정치적인 소설이 아니다. 정치적인 예술은 이 보이지 않는 경계에 개입하고 조작을 가한다. 그럼으로써 당연한 ‘감각’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리틀 프라이드」는 동시대 소설 장르(더 특정해서 말하자면 한국의 ‘문단 소설’)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의 경계를 규정하는 구속력 있는 규범들―정치적 올바름, 개연성, 일관성, 정돈된 문체 등―을 미묘하게 건드린다. 급진적으로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미묘하게 건드리기. 잘 기획된 이 소설에는 꾀바른 구석이 있지만, 이는 작품의 단점이라기보다는 장점일 것이다.
소설의 화자는 트랜스 남성(FTM)이다. 소수자인 화자는 타인의 시선이나 몸들의 위상에 매우 민감한데, 이 민감함은 피해의식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언제나 시선·말의 숨은 의미를 유추하고 몸의 위상을 가늠하려 하는 화자를 전 여자친구인 혜령은 피곤해했다. “헤어지면서 혜령은 내게 지쳤다고 말했다”(177쪽). 하지만 화자의 ‘서글픈’ 예민함에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동지 의식과 호감 때문에 화자는 오스틴의 의심스러운 언행에도 ‘흐린 눈’을 하고 관대하게 지켜봤을 것이다. 오스틴은 자신이 인터뷰한 커플의 여자에게 인스타그램 DM으로 집적댔다가 그것이 공론화되면서 징계(정직 처분)를 받는다. 물론 오스틴은 그것이 여자의 음해라고 주장한다. 정직 후 돌아온 오스틴은 화자에게 이렇게 푸념한다.
사지연장술은 외모를 바꾸는 수술 중 가장 비용이 많이 들고 힘든 축에 속한다. 그것이 현실적인 선택지로 여겨진다면, 그보다 비용과 위험이 덜한 것들―가령 운동, 피부과 시술, 작은 보형물 삽입 등은 당연히 가능한 선택의 익숙한 범위에 포함된다. 그렇게 될수록, 즉 몸을 가꾸는 운동과 식단, 수술 등이 충분히 가능한 선택지처럼 여겨질수록, 잘 가꿔진 몸을 갖지 못한 것은 개인의 잘못처럼 된다. 우리가 잘 가꿔진 몸을 갖지 못했다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충분한 비용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스틴이 욕망하는 것은 여성의 이성적인 관심과 호의다. 그는 그러한 관심을 받을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좌절이나 비참을 ‘페미’에 대한 원한, 혐오로 투사하고 있다. 어쨌든 오스틴은 여성의 호의를 얻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을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바꾸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 그런데 만약 사지연장술이 너무나 위험해서 목숨을 위협할 정도라면, 따라서 현실적인 선택지로 고려되지 않는다면 어땠을까. 그는 여성의 호의를 얻기 위한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가령 우월한 재산과 능력을 증명하거나, 존경받을 만한 지성이나 인격, 재능을 계발하는 것 등. 그럴 수조차 없다면, 그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다른 선택지가 있다. 키 커지는 수술은 여전히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한 수술”(176쪽)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키 작고 멋지지 못한 남자가 여성의 호의를 얻기 위해 해야 하는 모든 인간적 노력에 비하면, 그 불투명한 가능성에 바쳐야 하는 모든 비용에 비하면 값싸다. 오스틴의 선택에는 이러한 계산이―명시적이고 철저한 것이든, 암묵적이고 모호한 것이든 간에―깔려 있을 것이다.
3.
화자는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하는 오스틴이 호모포비아일 거라 생각하지만―따라서 자신이 트랜스젠더임을 알면 적대적일 거라 예상하지만―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오스틴은 화자가 트랜스젠더임을 일찍이 눈치채고 있었다. 오스틴은 자신과 감정적으로 얽히지 않은 문제에는 상당히 ‘공정’하고 ‘열린’ 사람일 수도 있다. 그가 여성혐오적인 태도를 발작적으로 드러내는 이유는, 여성과의 성적 관계가 그에게 너무 고통스럽고 따라서 이성을 잃게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성과의 성적 관계는 그가 욕망하지만 번번이 그를 좌절시켜온 문제인 것이다. 화자의 예상과는 달리, 병원의 침상에서 오스틴은 화자와 자신이 “전우”(180쪽)라고 말한다. 트랜스젠더인 화자가 자신처럼 몸을 바꾸는 큰 수술을 겪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가 막히는 주장이다. 당연히 화자는 동의하지 않고, 오스틴과 자신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고 잘라 말한다. 둘은 다른 사람이고 두 사람이 겪은 수술의 성격도 다른 것이다. 둘을 혼동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하지만 오스틴의 말에는 무시하기 힘든, 어떤 불길한 진정성이 있다. 그는 “전우”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주장하는 듯하다: ‘네가 남자가 되기 위해 (성별을 바꾸는) 수술을 했듯이 나도 남자가 되기 위해 (키 커지는) 수술을 하는 거야. 네 욕망만큼이나 내 욕망도 간절하고 불가피한 거라고.’
동의할 수 없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이 주장. 이것이 소설 전반에서 유지되는 화자와 오스틴의 불안한 중첩이 남기는 질문일 것이다. 과연 이 사회에서 키 작은 남자가 어떤 소수자성 혹은 약자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까?
오스틴은 키가 작은 것이 자신의 ‘진짜’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물론 아니다. 단지 키가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정말 아닐까? 사지연장술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오스틴은 자신이 기대한 만큼은 아니더라도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특히 여성들의―태도와 시선이 조금은 바뀐다고 느낄 것이다. 조금은.
아마 사람들이 가진 편견 중에 가장 유치하고 그만큼 서글픈 편견은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인격적으로도 더 나으리라 여기는 것일 테다. 이것은 정말로 끈질긴 편견인데, 우리는 두 문제(외모와 인격)를 나누려 할 때조차도 부지불식간에 둘의 결합을 강화할 수 있다. 특히 우리가 너무 젊을 때, 이를테면 스물두 살쯤일 때, 그러니까 여전히 외모에 아주 민감하면서도 막연하게 올바름이나 정의를 추구할 만큼 젊을 때, 우리는 누군가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걔 외모가 못생겨서 싫어하는 게 아니야. 심성이 못나서 싫은 거라고.” 또 연애할 대상을 찾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남자가 키가 작은 것은 괜찮아. 하지만 키가 작다고 열등감을 드러내는 건 진짜 싫어.” 바로 이런 말들이 키 작은 남자가 열등감을 가진 남자가 되는 데 일조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작은 키는 오스틴의 진짜 문제인가 아닌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작은 키는 그의 진짜 문제가 아니지만, ‘단지 작은 키가 문제가 아니야’라는 말은 작은 키를 그의 진짜 문제로 만들 것이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그는 괜찮은 남자로 보였다. 그가 가진 화술과 사교성, 기획력과 실행력은 꽤 매력적인 것이었다. 적어도 직장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연애라는 장르에서는 문제가 달라진다. 연애에 관한 한(특히 젊은이들의 연애에 관한 한) 외모는 훨씬 결정적인 요소다. 사람들은 외형에 성적으로 매혹되고, 이 성적 매혹은 연애 감정을 촉발하는 데 너무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소설의 끝에 가서 화자 역시 이 사실을 절감한다. 이것은 물론 새로운 사실이 아니고, 화자는 단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그 사실”(181쪽)을 재차 선명하게 느낄 뿐이다.
어떻게 이러한 사실을 바꿀 것인가? ‘예쁜 애들이 성격도 좋다’는 식의 여성혐오적인 편견에 대해 생각해보자. 아마 이 글을 읽는 모두가 그것이 유치하고 멍청한 편견이라는 데 쉽게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편견을 물리치기가 쉽지 않은 건 편견과 사실의 관계 자체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댓글에서 이런 류의 반박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편견이 아니라 팩트인데.’ 종종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발화되는 이 말에는 ‘편견’과 ‘사실’이 대립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전제가 깔려있다. 하지만 이 단순한 대립(‘사실은 편견이 아니고, 편견은 사실이 아니다’)이야말로 가장 문제적인 편견, 뿌리부터 해체되어야 하는 편견이다. 편견은 사실을 견고한 사실로 보이게 하는 사실의 마감재이다. 편견은 사실을 사실로 만든다. 많은 경우 편견은 사실과 결합하고, 사실을 참조하며, 사실을 사실로 구성해내기 때문에 강력한 것이다. 편견은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사실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사실로 고정한다. 편견은 단지 사실과 달라서 나쁜 것이 아니다. 편견은 사실과 같을 때 훨씬 더 나쁘다. 왜냐면 그때 편견은 ‘사실’이 사실이 아니게 변할 여지를 봉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 사회의 ‘상식’을 해부하고자 한다면, 사실에 근거해서 편견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편견과 사실이 서로를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비판해야 한다.
성적 끌림이나 욕망, 그리고 그것의 불평등함은 진정 정치적이면서 난해한 문제다. 누구도 누군가를 성적으로 욕망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젊은 페미니스트 철학자 아미아 스리니바산은 (인셀 커뮤니티에서 주장되곤 하는) ‘섹스할 권리’라는 거짓 문제를 단호하게 기각하고, 대신 “우리는 우리 욕망의 형태를 최선의 노력을 다해 바꿀 의무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재고하자고 제안한다.6) 스라니바산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특정한 대상을 욕망할 의무는 없지만) 욕망의 형태를 바꾸려고 노력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정말로 우리는 욕망의 형태를 바꿀 수 있는가? 권위적인 도덕적 훈계, 욕망의 금지가 아닌 방식으로 욕망을 바꾸는 것이 가능할까? 매력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무엇으로부터 매력을 느끼게 되는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4.
욕망의 주체이자 대상인 몸에 집중하면서 아름다움과 권력의 불길한 관계를 드러내는 이희주의 「최애의 아이」는 그야말로 ‘요즘 소설’, 최고의 요즘 소설이다.7)
이 소설의 위상학적 형태는 매우 특이한데, 소설이 극히 표피적이면서도 동시에 깊이 있기 때문이다. 의미 부여를 시니컬하게 튕겨내는 피상적인 문장들은 흥미진진한 속도감을 자랑한다. 그리고 이 소설 자체가 온갖 동시대적 문화 성분을 표면에 늘어놓은 아카이브이기도 하다. 제목인 “최애의 아이”는 동명의 유명한 일본 만화에서 가져온 것이다. 또 이 소설은 현실의 Kpop 팬덤 문화에서 볼 수 있는 여러 문제와 장면 들을 환기하고 있다.
그러는 한편 이 소설은 ‘깊이’ 파고드는 징후적, 해석학적 읽기를 유도하는데, 이 소설 자체가 배후에 음험하게 숨어 있는 세력이 밝혀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소설은 열정과 소비, 외모지상주의와 성상품화, 여성의 자기비하 같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명암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더 깊고 비밀스러운 차원에서, 이 소설은 권력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최애의 아이」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반영하지만 SF 디스토피아적인 상상력이 아래에 깔려 ‘현실’의 한쪽 모서리를 위태롭게 들어 올리고 있다. 이 소설 속 세계는 남성 아이돌의 정자를 합법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세계이고, 그에 따른 여성의 임신과 아이의 생애가 모종의 제도와 계약으로 규제되는 곳이다. 여성의 출산을 유혹하면서 규제하는 이 ‘제도’는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출생률을 관리하는 국가 행정의 복합물이다. 소설의 주인공 우미는 아이돌 유리의 정자를 구매하여 그의 아이를 낳으려 한다.
우미는 어떤 인물인가? 우선 우미는 때 묻지 않은 미소년 유리를 열렬히 사랑하는 여자다. 소설 속 세계에서 우미가 받는 시술은 “미저리 시술”이라 불리고, 그것을 받는 여성들은 “미친년들”로 치부되기도 한다(245~46쪽). 그래서 우미는 일견 비합리적인 열정에 휩싸인 사람으로 보이지만, 사실 유리에 대한 사랑과 아름다움에의 집착을 빼면 우미는 매우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주체다. 다르게 말해서, 우미의 행보는 그 동기에 있어 비합리적이지만 진행 방식에 있어서는 합리적이다. 그녀는 “삼십대 여자의 냉정한 판단력”(240쪽)으로 손익을 계산하고 실행한다. 이 인공수정 시술은 상당히 비싸지만, 가성비를 따져보면 그렇게 손해도 아니다.
한편 소설의 서술에 따르면 우미는 둔한 사람이다. 가장 친한 친구인 은정도 우미를 둔한 사람으로 여긴다. “우미처럼 둔한 사람”(240쪽). 하지만 이 평가에는 의아한 구석이 있다. 우미는 말에 둔감할지언정 보는 것/보이는 것에는 대단히 민감하기 때문이다. 즉 우미는 시선과 눈빛에 예민하다. “여자로 평가하는 눈빛과 마주치면 등골이 오싹해져 움츠리고 다녔던 자신의 이십대가 생각나 슬퍼졌다.”(252쪽) 우미는 정치인의 얼굴에서 “감정을 숨기려는 흐리멍덩한 눈빛이 팽팽한 기대와 긴장과 혐오가 어린 눈빛으로 바뀌”(260쪽)는 것을 순식간에 캐치한다.
우미는 왜 이렇게 시선에 민감할까? 그녀는 시선의 주체가 될 때 짜릿한 쾌를 느끼고(“눈에도 혀가 달리고 이가 달렸다”(247쪽)) 시선의 대상이 될 때 수치심을 느낀다. 특히 자신을 “여자로 평가하는” 시선 앞에서 위축된다. 하지만 바로 자신이 남을 그렇게 평가하기도 한다. 가령 팬 미팅 행사에서 우미는 자기 옆자리의 여자아이를 평가한다.
마찬가지로 독자는 우미가 시선에 민감한 이유를 삐딱하게 유추할 수도 있다. 우미는 자신이 남들에게 그러기 때문에 남들도 자신에게 그럴 거라 생각한다고. 하지만 반대로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남들이 그렇기 때문에 우미도 그런 거라고. 여기에는 닭과 달걀처럼 뭐가 먼저인지 확정할 수 없는 순환 논리가 있다. 외모지상주의적인 세상이기 때문에 내가 외모지상주의자인 것이다. 내가 외모지상주의자이기 때문에 세상도 외모지상주의적일 것이다. 세상이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런 것이다. 내가 이렇기 때문에 세상도 그럴 것이다…… 이 이상한 변증법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수치심과 혐오를 가중하는 악순환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이 악순환은 여성에게 더 벗어나기 힘든 구속일 것이다.
5.
하지만 이 유능하고 순응적이며 또한 미쳐 있는 인물은 결국 투사 혹은 테러리스트가 된다. 어떤 추악한 것 때문에 우미는 이성을 잃고 만다. 우미가 순응적이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여러 규범과 부조리를 흠뻑 체화한 인물이라면, 그의 파국적 시위는 한국 사회의 여러 경향과 병폐가 충돌해 원자폭탄처럼 폭발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소설은 잔혹하게도 우미가 출산한 직후에 반전처럼 끔찍한 소식을 알린다. 우미가 공여받은 정자는 사실 유리의 것이 아니라 정체 모를 다른 남자의 것이었다. 이 ‘정자 바꿔치기’의 음모에는 한국의 엘리트 세력이 관여되어 있는 듯하고, 그 부패한 세력을 대표하는 얼굴은 어느 의사 출신 정치인이다. 그는 “롤 모델이니 젠틀한 중년이니 힙한 정치인 열풍의 대표자”(258쪽)로 홍보되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이 부조리한 사태의 전모가 소설에서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는다. 다만 사회 각계의 엘리트들이 연루되어 있음이 암시될 뿐이다. 이 음모론적 ‘반전’은 개연적이라기보다는 극적이다. 다시 말해 아주 현실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애초에 SF나 디스토피아적인 성격이 가미된 이 소설의 의도는 ‘있을 법한’ 상황을 묘사하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극적인 서사는 충돌하는 권력의 유형들에 대한 효과적인 알레고리로 읽힌다. 정자를 구매할 때 우미는 높은 지능이나 능력, 사회적 지위 따위를 원한 것이 아니다(자수성가한 우미는 그런 것에 대한 갈증이 없다). 단지 유리의 아름다움을 욕망했을 뿐이다. 우미는 어떤 권력에는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그러나 어떤 권력에는 강한 반발심과 투쟁심을 느낀다. 어떤 권력은 거부할 수 없게 유혹하는 반면, 어떤 권력은 혐오스럽고 징그러운 무언가이다.
다음은 엄밀하게 학술적인 분류는 아니다. 소설에 나타난 권력의 종류를 일별하기 위해 나름대로 정리해본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온건하며 상식적으로 느껴지는 권력의 유형―즉 한국에서 1987년 이후로 자리 잡은 문민(文民)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통치는 ②를 전제로 한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③의 성격을 띤다. 「최애의 아이」에서 엘리트 관료들은 ①의 성격을 띤다. 우미의 주체성은 ❷와 ❸이 중첩되어 있다. 우미는 아름다운 얼굴을 볼 때 쾌를 느끼는 미학적 주체다. 또 우미는 어느 정도의 자원과 능력을 지니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 권력들, 제도들과 협상할 수 있는 경제학적 주체다. 따라서 우미에게 적절하게 말을 걸 수 있는 권력은 ②와 ③이다. 그런데 갑자기 ①이 우미의 미적 열정에, 우미와 제도의 자본주의적 ‘계약’에 난입한 것이다.
사실 난폭하게 끼어들어 군림하려는 이 권력의 모습이 아주 비현실적이지도 않다. 지난겨울 우리는 주정뱅이의 난동 같은 이상한 추태가 ‘현실정치’의 불안한 막을 찢고 나타나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군림하는 권력은 우악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설득하는 권력보다 강하지 않다. 통치받는 자들이 마지못해 복종할 때보다 주체적으로 동의할 때 권력은 더 강한 까닭이다.12) 하지만 ‘유혹하는-군림하는 권력’이라는 혼종은 설득하는 권력보다 훨씬 강할 수 있다. 그때 통치받는 자들은 적극적으로 추종자가 되고 자발적으로 노예가 된다(사람들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활용되는 것이 혐오다). 그것은 ‘권위주의 포퓰리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권력이다. 「최애의 아이」는 ①과 ❸의 파국적인 충돌로 끝나는데, ❸의 까다롭고 확고한 미적 기준에 비추어 ①은 너무 추악한 탓이다. 하지만 우리는 (디스토피아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듯) 사람들을 미적으로 현혹하는 동시에 군림하는 권력도 상상해볼 수 있다. ①과 ③의 야합은 이희주의 전작 『나의 천사』(민음사, 2024)에서도 암시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지금 현존하는 권력의 유형들을 소설의 무대에 올려 그것들을 충돌시킨다는 점에서, 이희주는 탁월하게 징후적인 작품들을 쓰고 있다. 즉 이희주의 소설들은 ②의 지배적 안정성이 무너지고 있는 현재 한국 사회의 징후로 읽힐 수 있다. 이희주의 소설들에서 종종 권력들은 몸에 강한 조작을 가하고, 몸을 침탈하고, 아름다움으로 유혹한다.
출산으로부터 반년 후 우미는 아기―유리의 아이가 아닌 그 아기―를 시장에 방문한 정치인의 면전에서 바닥에 힘껏 던진다. 아이의 몸은 토마토처럼 으깨졌을 것이다. 충격적인 결말이다. 우미는 이 행위를 “무대예술”(260쪽)로 자평한다. 자신을 희생자로 치부하는 강간 포르노나 삼류 멜로 장르를 충격적 퍼포먼스로 중단시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미를 순전한 희생자가 아니게 하는 이 무대예술은 아이를 그 의식의 희생제물로 삼는다.
모든 충격적인 사건이 그렇듯 우미의 행동은 소설 속 세계에서도 여러 해석과 짐작을 부른다. 소설의 끝에서 우미의 행동에 대한 세간의 의견이 나열된다.
6.
돈 아니면 몸이라는 자본주의의 지상명령은 사람들의 삶을 황폐화하고 파국으로 몰고 간다. 이 야만적인 환원은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경향이 아니지만, 사람들이 끊임없이 서로 비교하고 평가하는 한국 사회에서 특히 가혹한 수준으로 밀어 붙여지는 것 같다. 오늘날 사회의 여러 병폐는 이 환원에 따른 부작용들로 읽힐 수 있다. 가령 한국을 비롯해 많은 선진국에서 심각하게 부각되는 ‘인셀’ 문제 역시 삶이 ‘돈 아니면 몸’으로 환원되는 경향의 부수적 증상일 것이다. 안티 페미니즘이나 남성들의 권리 신장 따위의 지향으로 느슨하게 묶이는 인터넷 공간들, 이른바 ‘매노스피어’에서 질투와 선망의 대상이 되는 ‘알파메일’은 단순히 돈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남자가 아니다. 동시에 크고 잘 발달한 육체, ‘남자다운’ 몸을 가진 남자다. 매노스피어에서 말해지는 ‘룩스맥싱(Looksmaxxing)’은 운동이나 성형 등을 통해 외모를 최대한 개선하는 행위를 뜻한다. 인셀은 돈의 문제 앞에서도, 몸의 문제 앞에서도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는 남자, 그러나 ‘돈 아니면 몸’이라는 환원에 저항할 만한 어떤 가치나 생활양식, 사회적 관계나 이념이 없는 남자다. 인셀은 상징적으로 헐벗은 인간이다. 그 헐벗은 인간은 상징의 빈곤을 무덤에서 끄집어낸 옛 상징들(가부장적, 군국주의적 가치 따위)로 메우려 한다.
이 글에서 살펴본 두 소설은 돈 아니면 몸이라는 ‘이중 환원’을 반영하는 동시에 비판적으로 겨냥하지만 그러한 환원을 극복할 전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었다(문학작품에 그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리틀 프라이드」는 오래된 사실에 대한 씁쓸한 재인식으로 끝나고, 「최애의 아이」는 파국적 영아 살해로 끝난다.
이 사실은 작품들의 한계보다는 리얼리즘을 우세종으로 하는 한국소설 장르(‘문단 소설’) 자체의 어떤 한계를 표시하는 것일 수 있다. 거꾸로 말해 몸의 문제 그리고 신체 조작을 다루는 이 첨예한 소설들은 장르의 어떤 임계점에 와 있다. 이 임계점에서 기술적 관심과 미학적 관심은 합쳐지고 SF와 리얼리즘 장르의 경계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과학사회학자 임소연은 강남 성형외과에서 몇 년간 일하며 성형수술에 대한 인상적인 인류학적 연구를 수행했다. 임소연은 성형수술을 혹은 수술을 받는 여성들의 욕망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고 말한다.13) 성형수술의 미적 기준이나 그를 향한 욕망이 인종주의적,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체화, 내면화한 것이라는 식의 비판은 성형수술을 하지 않도록 설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임소연은 욕망을 금지하는 도덕적 훈계보다는 성형수술을 고려하는 여성들에게 성형수술이 광고되곤 하는 것만큼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또 복잡하고 비용이 드는 여러 고려가 뒤따르는 일임을 더 자세히 알리는 것이 낫다고 주장한다. 즉 여성들이 충분히 신중하고 합리적으로 성형을 선택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나는 이 방법이 현실적이고 유용하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맹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맹점은 첫째, 성형수술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그 효과와 비용을 따져 선택하는 ‘계산적 합리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전제한다는 데 있다. 성형수술을 받으려는 의지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둘째, 의학 지식과 성형 기술이 더 발전한다면 효과는 증대하면서 부작용이나 비용은 대폭 감소할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임소연이 제안한 방법도 효과가 없어질 것이다. 그 경우에는 많은 사람이 성형을 통해 다양한 미적 기준을 추구할 수 있게 하는 기술 다양성, 미적 다양성과 평등한 접근성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더 긴요해질 이 문제들―기술 다양성, 미적 다양성, 다양한 기술적, 미학적 객체에 대한 평등한 접근성―은 멀리 가는 예술적 상상력을 요청하고 있다.
새삼스럽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오늘날 우리의 몸을 둘러싼 ‘현실’이 인간의 주관성이나 정신성에 기반을 두고 예측 가능한―개연적인―몸과 자연환경을 가정하는 근대문학의 규범, 특히 리얼리즘 소설의 규범14)을 초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이 현실을 한 발자국만 앞서 있으려 해도 ‘리얼리즘 소설’과 ‘SF 소설’의 해묵은 장르적 경계를 훌쩍 넘어서게 되리라는 것이다. 리얼리즘이 단순히 현실의 답습이나 재인식이 아닌 것처럼 SF도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통상 소설이라 부르는) 근대소설의 초창기에 SF의 시초라고도 일컬어지는 『프랑켄슈타인』이 쓰였다. 소설의 저자인 열여덟 살의 메리 셸리는 당시 스위스 제네바 근처에서 휴양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거대한 화산 폭발이 유럽의 대기를 오염시키고 온도를 떨어뜨려 맑은 곳으로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심심하던 차에 서로에게 들려줄 만한 무서운 이야기를 지어내기로 했다.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아 고민하던 와중에 셸리는 남편과 시인 바이런의 이야기를 엿듣게 된다. 그것은 ‘갈바니즘’에 대한 이야기였다. 갈바니즘이란 이탈리아 생물학자 루이지 갈바니의 과학관 혹은 그의 실험이 불러온 센세이션을 말한다. 갈바니는 전기 자극으로 죽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움직이게 해서 당대 유럽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급변한 기후와 더불어 신체에 조작을 가하는 기술의 발전이 자아내는 불길함, 무엇보다 이제 신체를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게 되리라는 두려우면서도 흥미진진한 예감―이것이 셸리로 하여금 『프랑켄슈타인』을 쓰게 만들었으리라. 어쩌면 지금 젊은 소설가들이 처한 시대적 환경은 메리 셸리의 작업 환경과 유사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디스토피아적 소설들이 남긴 질문들은 다시, 장르들의 경계가 와해되는 헤테로피아적 공간에서만 답해질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전에 중독된 듯이 헬스 관련 유튜브 영상들을 본 적이 있다. 한 일 년 가까이 그랬다.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영상을 보며 지식을 수집하는 것으로 운동 부족을 벌충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운동하지 않는 데서 오는 어떤 죄의식을 달래기 위함이었는지도. 사실은 근육질 몸들을 보는 게 그저 좋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최근에는 다시 헬스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부쩍 체력이 떨어지고 근육이 빠져 왜소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저녁 시간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너무 많아서 근육과 땀과 기구에 갇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앙상한 팔다리에 젖산을 쌓으며 나는 육체 공장에서의 명상에 잠겼다.
철학자들은 아마 누구보다 정신을 애호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심지어 유물론자라 할지라도 몸에는 다소 무관심했을 것이다. 담론의 장에서 몇십 년 동안 몸에 대한 철학의 무관심은 비판받아왔다. 전통적인 철학이 억압하거나 격하한 것들―정념적인 것, 수동적인 것, 관능적인 것, (여)성적인 것은 모두 정신이 아니라 몸의 편에 있다. 전통적인 정신/육체 이분법에 따르자면 말이다. 이러한 비판은 학술적인 인문학 담론의 장에서는 여전히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상에서 하게 되는 경험은 퍽 다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야말로 도처에 몸뿐이다. 유튜브 쇼츠에서 전시장과 데이팅 앱을 거쳐 헬스장에서 이르기까지, 정말이지 몸뿐이다! 물론 모든 몸이 동등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잘생긴 몸, 예쁜 몸, 귀여운 몸, 근육질 몸, 운동 잘하는 몸, 춤 잘 추는 몸이 잘 보인다.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한 남성 정치인의 보정속옷이 논란 아닌 논란거리가 되었다. 사춘기 시절에 끝났으면 좋았을 ‘육체미 소동’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일까? 이 유예된 사춘기적 정치에는 우리를 초등학교 교실로 돌려보내는 희극성이 있다. “보정속옷 가슴 뽕 유치 뽕이네요.”1)
몸은 왜 이렇게 중요한가? 잘 알려져 있듯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이념과 가치가 ‘이기적인 계산의 차디찬 얼음물’에 처박힌다고 썼다. 자본주의는 모든 목가적·낭만적·종교적·예술적·공동체적 가치들을 파괴한다. 이는 ‘다른 가치들은 모르겠고 돈만 많이 벌면 장땡’이라는 식의 태도가 지배적으로 된다는 뜻이다.
이것도 지금 한국 사회에 잘 해당하는 말인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말하지 않은 게 있다. 여하한 이념이나 상징이 파괴되면, 돈만 남는 게 아니라 몸도 남는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실존은 돈 아니면 몸으로 환원된다. 내가 보기에 한국 사회는 돈 아니면 몸이라는 ‘이중 환원’의 강도에 있어 지구상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가혹하다.
몸의 문제에 무관심하지 않았던―무관심할 수 없었던―철학자 미셸 푸코는 만약 유토피아가 있다면 몸의 형체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고 심지어 몸의 투명도를 조절할 수 있는 곳이리라 썼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운 나라가 있다면 “나는 매력적인 왕자가 되고, 눈꼴신 멋쟁이 젊은이들은 모두 새끼 곰같이 흉하고 잔뜩 털이 난 모습이 될 것이다.”2) 우리는 항상 보이고 싶거나 보이지 않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보이고 싶을 때 보이고 싶은 방식으로 보이기를 원한다. 반대로 우리가 타인의 시선에 몸을 전혀 드러낼 수 없거나 항상 드러내야만 한다면 그곳은 디스토피아일 것이다. 한국 사회가 ‘이중 환원’에 있어 엄청나게 가혹하다는 것은 몸을 숨기거나 가리거나 감쌀 수 있는 상징들이 빈곤하다는 뜻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물리적으로 벗고 있지만 상징적으로는 입고 있다. 아이들의 말이 그 상징적 옷을 벗기기 전까지는. 반대로 한국 사회는 물리적으로 입고 있지만 상징적으로는 헐벗은 상태에 사람들을 밀어 넣는다. 이 사회는 돈과 몸이라는 물질적 하부구조에 사람을 압착시키는 거대한 프레스기 같다. 이 프레스기 아래서는 ‘매력의 문제’3)의 복합성과 창발성도 질식하고 만다. 동시대 문화에서 몸이 너무나 중요해 보인다 해도, 사실 신체의 역량 자체가 긍정적으로 조명되는 것은 아니다. 몸은 ‘정상성’이라는 관념 아래서, 그 관념과의 관계 속에서만 모종의 가치나 위상을 부여받고 있다.
이 프레스기는 압력에 따라 엄청난 열을 발생시킨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차가운 계산의 얼음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이곳은 또한 뜨겁게 달궈진 정념의 세계이기도 하다. 몸들은 차가운 계산의 얼음물 속에서는 값이 매겨지는 한낱 노동력일 뿐이다. 그러나 뜨거운 압력솥 속에서 몸은 전시되고, 성형되고, 선망되고, 질투의 대상이 되고, 가꿔지고, 보살펴지고, 혐오되고, 멸시된다. 몸은 한편에서는 노동력으로 셈해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정체성을 식별하고 미적인 판정을 하는 시선에 노출된다. 한편에서는 동질화되고, 한편에서는 차별화된다. 이 디스토피아에서 사람들은 나눠지기도 합쳐지기도 하는 두 종류의 질문에 짓눌린다. 하나는 돈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몸의 문제이다.
돈의 문제는 사람들이 매 순간 이런 질문에 직면하게 강요한다: ‘너 부자야 아니야? 이거 소비할 능력이 있어 없어?’ 반면 몸의 문제가 사람들에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너 남자야 여자야? 젊어 아니면 젊지 않아? 건강하고 잘 가꿔진 몸을 가졌어, 그렇지 못한 몸을 가졌어?’ 물론 돈의 문제와 몸의 문제가 깔끔하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돈이 많으면 건강하고 잘 가꿔진 몸을 갖기가 상대적으로 쉽고, 점점 더 그렇게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돈으로도 젊음은 살 수 없다. 하지만 머잖은 미래에 젊음까지 살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젊은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십대 아들의 피를 수혈받은 억만장자의 이야기가 재작년쯤 화제가 되었다.4) 어쩌면 우스운 괴담 같지만, 억만장자가 이런 기행을 벌일 수 있는 배경에는 발전한 의학 기술이 있고, 기술과 지식을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본이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인간의 몸은 지극히 정치적인 장소다. 하지만 생명정치의 양상은 달라지고 있을 것이다. 생명정치는 더이상 발전한 의학과 보건 지식, 촘촘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인구를 관리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생명정치는 치열하게 몸을 꾸미고, 관리하고, 성형하고, 향상하고, 단련하라고 부추긴다. 간단히 말해, 오늘날의 생명정치는 설득하는 권력을 넘어 유혹하는 권력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2.
이 글에서는 작년에 발표된 두 편의 소설을 읽어볼 것이다. 서장원의 「리틀 프라이드」와 이희주의 「최애의 아이」이다.5) 두 소설은 몸의 문제에 대해, 아름다움과 권력에 대해, 볼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의 관계에 대해 중요하고 시의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리틀 프라이드」는 ‘볼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의 틈새를 겨냥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어떤 몸이 잘 보이는가)? 둘째,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어떤 몸이 어떻게 말해지는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든 몸이 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중증 장애가 있는 몸은 거리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또 학살당한 몸, 감금된 몸은 보일 수 없다. 죽은 몸이 절대적인 경계라면, 잘 보이는 몸과 안 보이는 몸 사이에 상대적이고 점진적인 차이도 있다. 한편 볼 수 있는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볼 수 없다고 해서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사회적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친하지 않은 직장 상사에게 대놓고 “차장님 그 헤어스타일 진짜 별로예요”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보이고, 거의 모두에게 명백하게 그렇게 보인다 할지라도 말이다.
대화의 자리마다 말할 수 있는 것/없는 것의 경계를 규정하는 코드가 있다. 친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직장의 회의실에서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직장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말이 소설의 지면에 쓰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철학책을 읽으며 하는 공상들을 술자리에서 눈치 없이 늘어놓는다면 친구들은 텅 빈 눈빛으로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낼 것이다. 코드들의 집합을 장르라고 한다면. 모든 담화에는 장르의 문법이 있다. 사회적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굳이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서도 이 장르에서 저 장르로 옮겨다닐 수 있다. 무섭게 혼내다가 전화를 받는 엄마처럼 순식간에 내용뿐만 아니라 말투와 어조도 바꿀 수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장르의 문법을 얼마나 적절하게 파악하는가, 거기에 얼마나 잘 적응하고 장르에서 장르로 유연하게 이동하는가―이 능력이 곧 사회적 감각이라고, 혹은 ‘눈치’라고 할 수 있다.
볼 수 있는 것/없는 것 그리고 말할 수 있는 것/없는 것, 이 네 항의 복잡미묘한 조합 속에, 우리가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생각할 때 이야기해야 할 거의 모든 문제가 있다. 이 조합에 개입하고 조작을 가하지 않으면서 정치적인 소재를 재현한다면 그것은 정치에 대한 소설이지 정치적인 소설이 아니다. 정치적인 예술은 이 보이지 않는 경계에 개입하고 조작을 가한다. 그럼으로써 당연한 ‘감각’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리틀 프라이드」는 동시대 소설 장르(더 특정해서 말하자면 한국의 ‘문단 소설’)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의 경계를 규정하는 구속력 있는 규범들―정치적 올바름, 개연성, 일관성, 정돈된 문체 등―을 미묘하게 건드린다. 급진적으로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미묘하게 건드리기. 잘 기획된 이 소설에는 꾀바른 구석이 있지만, 이는 작품의 단점이라기보다는 장점일 것이다.
소설의 화자는 트랜스 남성(FTM)이다. 소수자인 화자는 타인의 시선이나 몸들의 위상에 매우 민감한데, 이 민감함은 피해의식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언제나 시선·말의 숨은 의미를 유추하고 몸의 위상을 가늠하려 하는 화자를 전 여자친구인 혜령은 피곤해했다. “헤어지면서 혜령은 내게 지쳤다고 말했다”(177쪽). 하지만 화자의 ‘서글픈’ 예민함에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분명히 볼 수 있지만 말하기 어려운 문제가 나타난다. 퀴어도 다 같은 퀴어가 아니다…… 모두가 같은 종류의 ‘프라이드’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광장에 예외적으로 모여 자신을 드러낸 몸들 사이에도 분명한 분할이 있다. 시선이 집중되는 곳에 훤히 드러나 있는 몸은 “잘 다듬어진 예쁜 몸”이다. 그렇지 못한 몸들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주관적인 그림자 속에 물러나 있는 듯하다. 소설은 심층적인 첫번째 분할―다수자(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소수자의 분할, 혹은 페미니즘적/안티페미니즘적 입장의 분할―에 더 표면적인 두번째 분할을 교차시킨다. 두번째 분할은 외적으로 매력적인 몸과 매력 없는 몸의 분할이다. 직장 동료 오스틴에 대한 화자의 마음이 복잡하고 불편한 이유는 바로 두 종류의 분할이 교차하고 뒤엉키기 때문이다. 화자는 첫번째 분할에 따라 오스틴에게 적대적인 거리를 느낀다(오스틴은 안티페미니스트이다). 그러나 동시에, 두번째 분할에 따라 오스틴에게 동지 의식을 느낀다. “오스틴은 신장이 164센티미터인 나보다 키가 작은 극소수의 남자 중 하나였고, 그런 점에서 나는 그에게 미약한 동지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169쪽). 트렌스 남성으로서 화자는 키 작고 “외모가 멋지지 못한 남자”(169쪽)가 느낄법한 어려움과 비참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화자는 오스틴에게 동지 의식을 넘어 동경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화자는 (옷 잘 입는 사람들을 길거리에서 인터뷰하며) 자신의 직무와 사회생활을 잘 해내는 오스틴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나는 언젠가 혜령과 퀴어 퍼레이드를 따라 걷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은 무척 더웠고, 우리 앞의 트럭에선 상의를 벗고 몸 여기저기에 무지개나 ‘QUEER’ 혹은 ‘PRIDE’라고 보디페인팅을 한 남자들이 여럿 타고 있었다. (…) 그들의 땀으로 번들거리는, 잘 다듬어진 예쁜 몸을 나는 조금 서글픈 심정으로 지켜봤다. 그때 나는 이미 탑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였지만, 그들처럼 웃통을 벗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173쪽)
이런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오스틴은 분명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보일지, 자신의 말이 어떻게 들릴지 잘 아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말을 해야 하고 어떤 말은 하면 안 되는지를 잘 가늠하는 영리한 사람이다. 심지어 그는 어떤 국면에서는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기까지 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매력적인 사람들은 장르의 규범을 한층 유연하게 만든다―외모를 통해서든, 유머나 화술을 통해서든, 분위기를 통해서든 그는 더 많은 마주침과 말이 가능해지는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외모가 멋지지 못한 남자가 여러 사람에게 호감을 사고 주목받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캐릭터를 그가 아주 잘 연기하고 있다고 (…) 그건 내가 트랜스 남성으로서 될 수 있는 한 익혀야 했던, 그러나 전혀 익히지 못했던 것 중 하나였다. (169쪽)
이런 동지 의식과 호감 때문에 화자는 오스틴의 의심스러운 언행에도 ‘흐린 눈’을 하고 관대하게 지켜봤을 것이다. 오스틴은 자신이 인터뷰한 커플의 여자에게 인스타그램 DM으로 집적댔다가 그것이 공론화되면서 징계(정직 처분)를 받는다. 물론 오스틴은 그것이 여자의 음해라고 주장한다. 정직 후 돌아온 오스틴은 화자에게 이렇게 푸념한다.
오스틴은 갑자기 합리적인 사고력이 정지한 듯이, 눈치가 고장난 듯이 ‘페미’인 여자를 욕한다. 화자가 애써 모르는 척했던 오스틴의 입장―이것을 입장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이 부인할 수 없게 드러나는 것이다. 화자는 오스틴에게 동지 의식을 느꼈던, 나아가 그에게 남자로 인정받기를 원했던 자신에게 깊은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거나 말거나 화자를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오스틴은 자신의 비밀 계획을 털어놓는다.“그 여자 일부러 그런 거예요. 자기가 차인 걸 가지고 나한테 화풀이를 하려고.”
(…)
“그 여자가 차였는지 찼는지 어떻게 알아요?”
“딱 보면 알죠. 딱 봐도…… 페미 같잖아요. 페미니까 차인 거죠.” (165쪽)
오스틴은 키가 커지는 수술, 사지연장술을 받기로 한다. 그는 왜 사지연장술을 선택했는가? 가장 단순명쾌한 첫번째 대답은 이렇다. 그것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신식 수술법의 경우 재활 기간도 비교적 짧고 고통도 덜하다”(167쪽). 따라서 사지연장술을 받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지로 고려될 수 있다. 이는 정확히 (SF나 판타지가 아닌) 리얼리즘 소설이 이 수술을 다룰 수 있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사지연장술이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한―개연성 있는―선택지가 되었기 때문에 리얼리즘 소설에 사지연장술을 받는 몸이 등장하는 것이다. 개연성은 리얼리즘 장르의 주요 규범이고, 이 규범이 소설이 말할 수 있는 것/없는 것의 경계를 여전히 어느 정도 결정하기 때문이다.“사실 뭐가 문제인지 알아요.”
“뭐가 문젠데요?”
“저도 좀 달라져 보려고 해요. 그러니까 외모를 좀 바꿔보려고요.”
오스틴은 그렇게 말하고 병을 집어 맥주를 들이켰다.
“뭐, 쌍수라도 한다는 얘기에요? 그게 해결책이라고요?”
“아니요.” 오스틴은 맥주를 홀짝이고 말을 이어갔다. “훨씬 더 큰 수술이에요, 대수술이죠. 회사도 그만둬야 할 거예요.” (176쪽)
사지연장술은 외모를 바꾸는 수술 중 가장 비용이 많이 들고 힘든 축에 속한다. 그것이 현실적인 선택지로 여겨진다면, 그보다 비용과 위험이 덜한 것들―가령 운동, 피부과 시술, 작은 보형물 삽입 등은 당연히 가능한 선택의 익숙한 범위에 포함된다. 그렇게 될수록, 즉 몸을 가꾸는 운동과 식단, 수술 등이 충분히 가능한 선택지처럼 여겨질수록, 잘 가꿔진 몸을 갖지 못한 것은 개인의 잘못처럼 된다. 우리가 잘 가꿔진 몸을 갖지 못했다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충분한 비용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스틴이 욕망하는 것은 여성의 이성적인 관심과 호의다. 그는 그러한 관심을 받을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좌절이나 비참을 ‘페미’에 대한 원한, 혐오로 투사하고 있다. 어쨌든 오스틴은 여성의 호의를 얻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을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바꾸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 그런데 만약 사지연장술이 너무나 위험해서 목숨을 위협할 정도라면, 따라서 현실적인 선택지로 고려되지 않는다면 어땠을까. 그는 여성의 호의를 얻기 위한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가령 우월한 재산과 능력을 증명하거나, 존경받을 만한 지성이나 인격, 재능을 계발하는 것 등. 그럴 수조차 없다면, 그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다른 선택지가 있다. 키 커지는 수술은 여전히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한 수술”(176쪽)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키 작고 멋지지 못한 남자가 여성의 호의를 얻기 위해 해야 하는 모든 인간적 노력에 비하면, 그 불투명한 가능성에 바쳐야 하는 모든 비용에 비하면 값싸다. 오스틴의 선택에는 이러한 계산이―명시적이고 철저한 것이든, 암묵적이고 모호한 것이든 간에―깔려 있을 것이다.
3.
화자는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하는 오스틴이 호모포비아일 거라 생각하지만―따라서 자신이 트랜스젠더임을 알면 적대적일 거라 예상하지만―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오스틴은 화자가 트랜스젠더임을 일찍이 눈치채고 있었다. 오스틴은 자신과 감정적으로 얽히지 않은 문제에는 상당히 ‘공정’하고 ‘열린’ 사람일 수도 있다. 그가 여성혐오적인 태도를 발작적으로 드러내는 이유는, 여성과의 성적 관계가 그에게 너무 고통스럽고 따라서 이성을 잃게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성과의 성적 관계는 그가 욕망하지만 번번이 그를 좌절시켜온 문제인 것이다. 화자의 예상과는 달리, 병원의 침상에서 오스틴은 화자와 자신이 “전우”(180쪽)라고 말한다. 트랜스젠더인 화자가 자신처럼 몸을 바꾸는 큰 수술을 겪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가 막히는 주장이다. 당연히 화자는 동의하지 않고, 오스틴과 자신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고 잘라 말한다. 둘은 다른 사람이고 두 사람이 겪은 수술의 성격도 다른 것이다. 둘을 혼동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하지만 오스틴의 말에는 무시하기 힘든, 어떤 불길한 진정성이 있다. 그는 “전우”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주장하는 듯하다: ‘네가 남자가 되기 위해 (성별을 바꾸는) 수술을 했듯이 나도 남자가 되기 위해 (키 커지는) 수술을 하는 거야. 네 욕망만큼이나 내 욕망도 간절하고 불가피한 거라고.’
동의할 수 없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이 주장. 이것이 소설 전반에서 유지되는 화자와 오스틴의 불안한 중첩이 남기는 질문일 것이다. 과연 이 사회에서 키 작은 남자가 어떤 소수자성 혹은 약자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까?
오스틴은 키가 작은 것이 자신의 ‘진짜’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물론 아니다. 단지 키가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정말 아닐까? 사지연장술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오스틴은 자신이 기대한 만큼은 아니더라도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특히 여성들의―태도와 시선이 조금은 바뀐다고 느낄 것이다. 조금은.
아마 사람들이 가진 편견 중에 가장 유치하고 그만큼 서글픈 편견은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인격적으로도 더 나으리라 여기는 것일 테다. 이것은 정말로 끈질긴 편견인데, 우리는 두 문제(외모와 인격)를 나누려 할 때조차도 부지불식간에 둘의 결합을 강화할 수 있다. 특히 우리가 너무 젊을 때, 이를테면 스물두 살쯤일 때, 그러니까 여전히 외모에 아주 민감하면서도 막연하게 올바름이나 정의를 추구할 만큼 젊을 때, 우리는 누군가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걔 외모가 못생겨서 싫어하는 게 아니야. 심성이 못나서 싫은 거라고.” 또 연애할 대상을 찾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남자가 키가 작은 것은 괜찮아. 하지만 키가 작다고 열등감을 드러내는 건 진짜 싫어.” 바로 이런 말들이 키 작은 남자가 열등감을 가진 남자가 되는 데 일조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작은 키는 오스틴의 진짜 문제인가 아닌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작은 키는 그의 진짜 문제가 아니지만, ‘단지 작은 키가 문제가 아니야’라는 말은 작은 키를 그의 진짜 문제로 만들 것이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그는 괜찮은 남자로 보였다. 그가 가진 화술과 사교성, 기획력과 실행력은 꽤 매력적인 것이었다. 적어도 직장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연애라는 장르에서는 문제가 달라진다. 연애에 관한 한(특히 젊은이들의 연애에 관한 한) 외모는 훨씬 결정적인 요소다. 사람들은 외형에 성적으로 매혹되고, 이 성적 매혹은 연애 감정을 촉발하는 데 너무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소설의 끝에 가서 화자 역시 이 사실을 절감한다. 이것은 물론 새로운 사실이 아니고, 화자는 단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그 사실”(181쪽)을 재차 선명하게 느낄 뿐이다.
어떻게 이러한 사실을 바꿀 것인가? ‘예쁜 애들이 성격도 좋다’는 식의 여성혐오적인 편견에 대해 생각해보자. 아마 이 글을 읽는 모두가 그것이 유치하고 멍청한 편견이라는 데 쉽게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편견을 물리치기가 쉽지 않은 건 편견과 사실의 관계 자체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댓글에서 이런 류의 반박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편견이 아니라 팩트인데.’ 종종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발화되는 이 말에는 ‘편견’과 ‘사실’이 대립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전제가 깔려있다. 하지만 이 단순한 대립(‘사실은 편견이 아니고, 편견은 사실이 아니다’)이야말로 가장 문제적인 편견, 뿌리부터 해체되어야 하는 편견이다. 편견은 사실을 견고한 사실로 보이게 하는 사실의 마감재이다. 편견은 사실을 사실로 만든다. 많은 경우 편견은 사실과 결합하고, 사실을 참조하며, 사실을 사실로 구성해내기 때문에 강력한 것이다. 편견은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사실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사실로 고정한다. 편견은 단지 사실과 달라서 나쁜 것이 아니다. 편견은 사실과 같을 때 훨씬 더 나쁘다. 왜냐면 그때 편견은 ‘사실’이 사실이 아니게 변할 여지를 봉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 사회의 ‘상식’을 해부하고자 한다면, 사실에 근거해서 편견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편견과 사실이 서로를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비판해야 한다.
성적 끌림이나 욕망, 그리고 그것의 불평등함은 진정 정치적이면서 난해한 문제다. 누구도 누군가를 성적으로 욕망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젊은 페미니스트 철학자 아미아 스리니바산은 (인셀 커뮤니티에서 주장되곤 하는) ‘섹스할 권리’라는 거짓 문제를 단호하게 기각하고, 대신 “우리는 우리 욕망의 형태를 최선의 노력을 다해 바꿀 의무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재고하자고 제안한다.6) 스라니바산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특정한 대상을 욕망할 의무는 없지만) 욕망의 형태를 바꾸려고 노력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정말로 우리는 욕망의 형태를 바꿀 수 있는가? 권위적인 도덕적 훈계, 욕망의 금지가 아닌 방식으로 욕망을 바꾸는 것이 가능할까? 매력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무엇으로부터 매력을 느끼게 되는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4.
욕망의 주체이자 대상인 몸에 집중하면서 아름다움과 권력의 불길한 관계를 드러내는 이희주의 「최애의 아이」는 그야말로 ‘요즘 소설’, 최고의 요즘 소설이다.7)
이 소설의 위상학적 형태는 매우 특이한데, 소설이 극히 표피적이면서도 동시에 깊이 있기 때문이다. 의미 부여를 시니컬하게 튕겨내는 피상적인 문장들은 흥미진진한 속도감을 자랑한다. 그리고 이 소설 자체가 온갖 동시대적 문화 성분을 표면에 늘어놓은 아카이브이기도 하다. 제목인 “최애의 아이”는 동명의 유명한 일본 만화에서 가져온 것이다. 또 이 소설은 현실의 Kpop 팬덤 문화에서 볼 수 있는 여러 문제와 장면 들을 환기하고 있다.
그러는 한편 이 소설은 ‘깊이’ 파고드는 징후적, 해석학적 읽기를 유도하는데, 이 소설 자체가 배후에 음험하게 숨어 있는 세력이 밝혀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소설은 열정과 소비, 외모지상주의와 성상품화, 여성의 자기비하 같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명암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더 깊고 비밀스러운 차원에서, 이 소설은 권력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최애의 아이」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반영하지만 SF 디스토피아적인 상상력이 아래에 깔려 ‘현실’의 한쪽 모서리를 위태롭게 들어 올리고 있다. 이 소설 속 세계는 남성 아이돌의 정자를 합법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세계이고, 그에 따른 여성의 임신과 아이의 생애가 모종의 제도와 계약으로 규제되는 곳이다. 여성의 출산을 유혹하면서 규제하는 이 ‘제도’는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출생률을 관리하는 국가 행정의 복합물이다. 소설의 주인공 우미는 아이돌 유리의 정자를 구매하여 그의 아이를 낳으려 한다.
우미는 어떤 인물인가? 우선 우미는 때 묻지 않은 미소년 유리를 열렬히 사랑하는 여자다. 소설 속 세계에서 우미가 받는 시술은 “미저리 시술”이라 불리고, 그것을 받는 여성들은 “미친년들”로 치부되기도 한다(245~46쪽). 그래서 우미는 일견 비합리적인 열정에 휩싸인 사람으로 보이지만, 사실 유리에 대한 사랑과 아름다움에의 집착을 빼면 우미는 매우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주체다. 다르게 말해서, 우미의 행보는 그 동기에 있어 비합리적이지만 진행 방식에 있어서는 합리적이다. 그녀는 “삼십대 여자의 냉정한 판단력”(240쪽)으로 손익을 계산하고 실행한다. 이 인공수정 시술은 상당히 비싸지만, 가성비를 따져보면 그렇게 손해도 아니다.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우미는 꽤 유능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비싼 시술을 선택할 수 있는 것 또한 고연봉의 직장에 다니며 모아 둔 돈이 꽤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타공인 ‘개천에서 난 용’이고, 그에 어울리는 자신감을 지녔으며 신세 한탄하는 옛 친구들을 한심하게 생각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작가는 우미가 한국 사회의 보수적인 규범을 체화한 순응적 인물이라 말하기도 했다.8) 아무튼, 우미는 신자유주의적인 계산적 합리성을 잘 탑재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어차피 유리를 쫓아다니며 썼을 비용을 따지자면 비싼 것도 아니었다. 자잘하게 앨범과 굿즈를 사 모으는 것도 다 지출이고 해외 콘서트 투어는 휴가를 긁어모아 꼭 따라가는 편이었으니 앞으로 오 년만 더 유리를 사랑한다고 가정해도 오히려 이쪽이 가성비 좋았다. (240쪽)
한편 소설의 서술에 따르면 우미는 둔한 사람이다. 가장 친한 친구인 은정도 우미를 둔한 사람으로 여긴다. “우미처럼 둔한 사람”(240쪽). 하지만 이 평가에는 의아한 구석이 있다. 우미는 말에 둔감할지언정 보는 것/보이는 것에는 대단히 민감하기 때문이다. 즉 우미는 시선과 눈빛에 예민하다. “여자로 평가하는 눈빛과 마주치면 등골이 오싹해져 움츠리고 다녔던 자신의 이십대가 생각나 슬퍼졌다.”(252쪽) 우미는 정치인의 얼굴에서 “감정을 숨기려는 흐리멍덩한 눈빛이 팽팽한 기대와 긴장과 혐오가 어린 눈빛으로 바뀌”(260쪽)는 것을 순식간에 캐치한다.
우미는 왜 이렇게 시선에 민감할까? 그녀는 시선의 주체가 될 때 짜릿한 쾌를 느끼고(“눈에도 혀가 달리고 이가 달렸다”(247쪽)) 시선의 대상이 될 때 수치심을 느낀다. 특히 자신을 “여자로 평가하는” 시선 앞에서 위축된다. 하지만 바로 자신이 남을 그렇게 평가하기도 한다. 가령 팬 미팅 행사에서 우미는 자기 옆자리의 여자아이를 평가한다.
마찬가지로 팬 미팅 행사 참석을 위해 남편 역할을 시킨 대행 아르바이트생의 외모도 평가한다. “분명 멀쩡한 남자로 넣어달라고 했는데. 멀쩡함의 기준이 다른가?”(254쪽) 우미는 간드러지고 세심한 말투를 가진, 점잖거나 점잖은 척하는 인물이 아니다. 점잖은 문체에의 요구를 내팽개치는 듯한 껄렁하고 삐딱한 말투는 이 소설의 특장점이다. 덕분에 소설은 계속해서 어떤 불편한 웃음을 자아낸다.내가 쟤였다면 밖에서 거울 오래 못 봤을 거 같은데. 시니컬하게 바라보던 우미의 시선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부드러워졌다. 보다 보니 기세가 있어서 예뻐 보였고, 그애의 나르시시즘이 납득됐다. 쟨 자기가 뚱뚱하다고 굶을 생각 하진 않을걸. (252쪽)
마찬가지로 독자는 우미가 시선에 민감한 이유를 삐딱하게 유추할 수도 있다. 우미는 자신이 남들에게 그러기 때문에 남들도 자신에게 그럴 거라 생각한다고. 하지만 반대로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남들이 그렇기 때문에 우미도 그런 거라고. 여기에는 닭과 달걀처럼 뭐가 먼저인지 확정할 수 없는 순환 논리가 있다. 외모지상주의적인 세상이기 때문에 내가 외모지상주의자인 것이다. 내가 외모지상주의자이기 때문에 세상도 외모지상주의적일 것이다. 세상이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런 것이다. 내가 이렇기 때문에 세상도 그럴 것이다…… 이 이상한 변증법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수치심과 혐오를 가중하는 악순환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이 악순환은 여성에게 더 벗어나기 힘든 구속일 것이다.
오랫동안 평가당하고 시선의 대상이 되어온 사람. 부모로부터, 또래 집단으로부터, 이성으로부터, 끊임없이. 그녀는 그 시선의 잣대를 내면화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가혹한 잣대를 적용하는 사람은 남에게도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기 마련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죄의식은 내면으로 구부러진 원한이고, 원한은 바깥으로 투사된 죄의식이다.9) 수치심은 내면에 투영된 혐오다.10) 만약 우미가 자신에 적용하는 가혹한 잣대(“높은 미적 기준”)를 욕망의 대상(우미는 이성애자이므로, 남성들)에 대입하려 한다면. 그 잣대를 만족시킬 만큼 잘생긴 남자는 현실에 거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미소년을 맹렬히 사랑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악순환에 대한 “반발”이다. 문제는 이 반발이 비참함을 해소하기보다는 더 악화시킨다는 데 있다. 한층 높아지는 미적 기준, 그에 따라 한층 비참해지는 자기 인식. 우미는 왜 그렇게 뛰어난 능력들―집중력, 유능함, 계산 능력, 실행력, 광기―을 가졌음에도 ‘순응적’인 인물인가? 니체의 말마따나 죄의식과 원한, 그리고 혐오와 수치심, 이것들은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감정들이기 때문이다.11) 이 감정들이 우리의 능력을 자유보다는 예속을 위해 사용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그렇게 남자 앞에 서는 걸 두려워했던 순간이, 여자로 평가하는 눈빛과 마주치면 등골이 오싹해져 움츠리고 다녔던 자신의 이십대가 생각나 슬퍼졌다. 거기에 대한 반발로 미소년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인이 박여버린 높은 미적 기준이 거꾸로 자기 자신을 슬프게 했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고, 그 기회는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 진짜 비참하지? 그런데 이렇게 비참한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이를 가졌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유리의 아이를. (252)
5.
하지만 이 유능하고 순응적이며 또한 미쳐 있는 인물은 결국 투사 혹은 테러리스트가 된다. 어떤 추악한 것 때문에 우미는 이성을 잃고 만다. 우미가 순응적이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여러 규범과 부조리를 흠뻑 체화한 인물이라면, 그의 파국적 시위는 한국 사회의 여러 경향과 병폐가 충돌해 원자폭탄처럼 폭발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소설은 잔혹하게도 우미가 출산한 직후에 반전처럼 끔찍한 소식을 알린다. 우미가 공여받은 정자는 사실 유리의 것이 아니라 정체 모를 다른 남자의 것이었다. 이 ‘정자 바꿔치기’의 음모에는 한국의 엘리트 세력이 관여되어 있는 듯하고, 그 부패한 세력을 대표하는 얼굴은 어느 의사 출신 정치인이다. 그는 “롤 모델이니 젠틀한 중년이니 힙한 정치인 열풍의 대표자”(258쪽)로 홍보되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이 부조리한 사태의 전모가 소설에서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는다. 다만 사회 각계의 엘리트들이 연루되어 있음이 암시될 뿐이다. 이 음모론적 ‘반전’은 개연적이라기보다는 극적이다. 다시 말해 아주 현실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애초에 SF나 디스토피아적인 성격이 가미된 이 소설의 의도는 ‘있을 법한’ 상황을 묘사하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극적인 서사는 충돌하는 권력의 유형들에 대한 효과적인 알레고리로 읽힌다. 정자를 구매할 때 우미는 높은 지능이나 능력, 사회적 지위 따위를 원한 것이 아니다(자수성가한 우미는 그런 것에 대한 갈증이 없다). 단지 유리의 아름다움을 욕망했을 뿐이다. 우미는 어떤 권력에는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그러나 어떤 권력에는 강한 반발심과 투쟁심을 느낀다. 어떤 권력은 거부할 수 없게 유혹하는 반면, 어떤 권력은 혐오스럽고 징그러운 무언가이다.
다음은 엄밀하게 학술적인 분류는 아니다. 소설에 나타난 권력의 종류를 일별하기 위해 나름대로 정리해본 것이다.
권력의 유형 | 말 거는 대상 | 권력의 성격 |
---|---|---|
①군림하는 권력 | ❶복종하는 봉건적 주체 | 권위주의적 |
②설득하는 권력 | ❷계산하는 경제학적 주체 | 자유주의적 |
③유혹하는 권력 | ❸쾌·불쾌를 느끼는 미학적 주체 | 포퓰리즘적 |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온건하며 상식적으로 느껴지는 권력의 유형―즉 한국에서 1987년 이후로 자리 잡은 문민(文民)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통치는 ②를 전제로 한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③의 성격을 띤다. 「최애의 아이」에서 엘리트 관료들은 ①의 성격을 띤다. 우미의 주체성은 ❷와 ❸이 중첩되어 있다. 우미는 아름다운 얼굴을 볼 때 쾌를 느끼는 미학적 주체다. 또 우미는 어느 정도의 자원과 능력을 지니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 권력들, 제도들과 협상할 수 있는 경제학적 주체다. 따라서 우미에게 적절하게 말을 걸 수 있는 권력은 ②와 ③이다. 그런데 갑자기 ①이 우미의 미적 열정에, 우미와 제도의 자본주의적 ‘계약’에 난입한 것이다.
사실 난폭하게 끼어들어 군림하려는 이 권력의 모습이 아주 비현실적이지도 않다. 지난겨울 우리는 주정뱅이의 난동 같은 이상한 추태가 ‘현실정치’의 불안한 막을 찢고 나타나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군림하는 권력은 우악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설득하는 권력보다 강하지 않다. 통치받는 자들이 마지못해 복종할 때보다 주체적으로 동의할 때 권력은 더 강한 까닭이다.12) 하지만 ‘유혹하는-군림하는 권력’이라는 혼종은 설득하는 권력보다 훨씬 강할 수 있다. 그때 통치받는 자들은 적극적으로 추종자가 되고 자발적으로 노예가 된다(사람들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활용되는 것이 혐오다). 그것은 ‘권위주의 포퓰리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권력이다. 「최애의 아이」는 ①과 ❸의 파국적인 충돌로 끝나는데, ❸의 까다롭고 확고한 미적 기준에 비추어 ①은 너무 추악한 탓이다. 하지만 우리는 (디스토피아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듯) 사람들을 미적으로 현혹하는 동시에 군림하는 권력도 상상해볼 수 있다. ①과 ③의 야합은 이희주의 전작 『나의 천사』(민음사, 2024)에서도 암시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지금 현존하는 권력의 유형들을 소설의 무대에 올려 그것들을 충돌시킨다는 점에서, 이희주는 탁월하게 징후적인 작품들을 쓰고 있다. 즉 이희주의 소설들은 ②의 지배적 안정성이 무너지고 있는 현재 한국 사회의 징후로 읽힐 수 있다. 이희주의 소설들에서 종종 권력들은 몸에 강한 조작을 가하고, 몸을 침탈하고, 아름다움으로 유혹한다.
출산으로부터 반년 후 우미는 아기―유리의 아이가 아닌 그 아기―를 시장에 방문한 정치인의 면전에서 바닥에 힘껏 던진다. 아이의 몸은 토마토처럼 으깨졌을 것이다. 충격적인 결말이다. 우미는 이 행위를 “무대예술”(260쪽)로 자평한다. 자신을 희생자로 치부하는 강간 포르노나 삼류 멜로 장르를 충격적 퍼포먼스로 중단시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미를 순전한 희생자가 아니게 하는 이 무대예술은 아이를 그 의식의 희생제물로 삼는다.
모든 충격적인 사건이 그렇듯 우미의 행동은 소설 속 세계에서도 여러 해석과 짐작을 부른다. 소설의 끝에서 우미의 행동에 대한 세간의 의견이 나열된다.
이 중 어떤 의견도 작품이나 작가의 입장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의견들의 무차별한 나열은 나열된 모든 의견의 설득력을 약화한다. 독자는 저 말들에 똑같이 거리를 두게 된다. 그렇지만 나열된 의견들이 모두 틀린 것도 아니다. 우미를 외모지상주의자라고 하면 틀린 이야기인가? 아니다. 우미의 충격적 퍼포먼스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잘못된 것인가? 아니다. 모두 일리가 있다. 하지만 하나의 관점만 고수한다면 이 인물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미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지금으로써는 여러 이유를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사뭇 당연한 말밖에는 하지 못하겠다. 즉 이 영아 살해는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여러 문제―계산적 합리성, 외모지상주의, 불안정하고 반동적인 정치, 성차별, 출세한 계급의 소시오패스적(?) 기질…… 등의 합작품일 거라고.우미와 같은 화이트칼라 계층에 소시오패스 비중이 높은 건 드문 일이 아니다. 나라 곳간 빼먹는 건 눈감아도 공병을 훔친 기초수급자 노인은 실형을 주는 판사를 생각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아니, 이럴 땐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생각해야 한다. 육아 스트레스는 정말 문제적이다. 실제로 많은 여자들이 상상 속에서 자기를 죽이거나 자기 아이를 죽인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보면 된다. 제 아이가 유리처럼 예쁘지 않으니까 죽인 거다. 우미는 정신 나간 외모지상주의자니까.
아니, 다 틀린 얘기고 우미는 그냥 기분이 나빴던 거다. 반골 기질이 있어서 니들이 시키는 대로 내가 할 것 같아? 비명 지르고 싶었던 거다. 자기들만 인간인 줄 아는 역겨운 인간들에게, 니들의 정자가 들어간 아기도 바닥에 내려치면 공평하게 토마토가 된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다.
일부 우아한 사람들은 이렇게 정리하기도 했다. 원래 그런 사람들 중에 좀, 이상한 사람이 많지 않아? 그러니까 멀쩡하지 않은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 말야…… (260~61쪽)
6.
돈 아니면 몸이라는 자본주의의 지상명령은 사람들의 삶을 황폐화하고 파국으로 몰고 간다. 이 야만적인 환원은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경향이 아니지만, 사람들이 끊임없이 서로 비교하고 평가하는 한국 사회에서 특히 가혹한 수준으로 밀어 붙여지는 것 같다. 오늘날 사회의 여러 병폐는 이 환원에 따른 부작용들로 읽힐 수 있다. 가령 한국을 비롯해 많은 선진국에서 심각하게 부각되는 ‘인셀’ 문제 역시 삶이 ‘돈 아니면 몸’으로 환원되는 경향의 부수적 증상일 것이다. 안티 페미니즘이나 남성들의 권리 신장 따위의 지향으로 느슨하게 묶이는 인터넷 공간들, 이른바 ‘매노스피어’에서 질투와 선망의 대상이 되는 ‘알파메일’은 단순히 돈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남자가 아니다. 동시에 크고 잘 발달한 육체, ‘남자다운’ 몸을 가진 남자다. 매노스피어에서 말해지는 ‘룩스맥싱(Looksmaxxing)’은 운동이나 성형 등을 통해 외모를 최대한 개선하는 행위를 뜻한다. 인셀은 돈의 문제 앞에서도, 몸의 문제 앞에서도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는 남자, 그러나 ‘돈 아니면 몸’이라는 환원에 저항할 만한 어떤 가치나 생활양식, 사회적 관계나 이념이 없는 남자다. 인셀은 상징적으로 헐벗은 인간이다. 그 헐벗은 인간은 상징의 빈곤을 무덤에서 끄집어낸 옛 상징들(가부장적, 군국주의적 가치 따위)로 메우려 한다.
이 글에서 살펴본 두 소설은 돈 아니면 몸이라는 ‘이중 환원’을 반영하는 동시에 비판적으로 겨냥하지만 그러한 환원을 극복할 전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었다(문학작품에 그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리틀 프라이드」는 오래된 사실에 대한 씁쓸한 재인식으로 끝나고, 「최애의 아이」는 파국적 영아 살해로 끝난다.
이 사실은 작품들의 한계보다는 리얼리즘을 우세종으로 하는 한국소설 장르(‘문단 소설’) 자체의 어떤 한계를 표시하는 것일 수 있다. 거꾸로 말해 몸의 문제 그리고 신체 조작을 다루는 이 첨예한 소설들은 장르의 어떤 임계점에 와 있다. 이 임계점에서 기술적 관심과 미학적 관심은 합쳐지고 SF와 리얼리즘 장르의 경계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과학사회학자 임소연은 강남 성형외과에서 몇 년간 일하며 성형수술에 대한 인상적인 인류학적 연구를 수행했다. 임소연은 성형수술을 혹은 수술을 받는 여성들의 욕망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고 말한다.13) 성형수술의 미적 기준이나 그를 향한 욕망이 인종주의적,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체화, 내면화한 것이라는 식의 비판은 성형수술을 하지 않도록 설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임소연은 욕망을 금지하는 도덕적 훈계보다는 성형수술을 고려하는 여성들에게 성형수술이 광고되곤 하는 것만큼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또 복잡하고 비용이 드는 여러 고려가 뒤따르는 일임을 더 자세히 알리는 것이 낫다고 주장한다. 즉 여성들이 충분히 신중하고 합리적으로 성형을 선택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나는 이 방법이 현실적이고 유용하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맹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맹점은 첫째, 성형수술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그 효과와 비용을 따져 선택하는 ‘계산적 합리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전제한다는 데 있다. 성형수술을 받으려는 의지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둘째, 의학 지식과 성형 기술이 더 발전한다면 효과는 증대하면서 부작용이나 비용은 대폭 감소할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임소연이 제안한 방법도 효과가 없어질 것이다. 그 경우에는 많은 사람이 성형을 통해 다양한 미적 기준을 추구할 수 있게 하는 기술 다양성, 미적 다양성과 평등한 접근성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더 긴요해질 이 문제들―기술 다양성, 미적 다양성, 다양한 기술적, 미학적 객체에 대한 평등한 접근성―은 멀리 가는 예술적 상상력을 요청하고 있다.
새삼스럽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오늘날 우리의 몸을 둘러싼 ‘현실’이 인간의 주관성이나 정신성에 기반을 두고 예측 가능한―개연적인―몸과 자연환경을 가정하는 근대문학의 규범, 특히 리얼리즘 소설의 규범14)을 초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이 현실을 한 발자국만 앞서 있으려 해도 ‘리얼리즘 소설’과 ‘SF 소설’의 해묵은 장르적 경계를 훌쩍 넘어서게 되리라는 것이다. 리얼리즘이 단순히 현실의 답습이나 재인식이 아닌 것처럼 SF도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통상 소설이라 부르는) 근대소설의 초창기에 SF의 시초라고도 일컬어지는 『프랑켄슈타인』이 쓰였다. 소설의 저자인 열여덟 살의 메리 셸리는 당시 스위스 제네바 근처에서 휴양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거대한 화산 폭발이 유럽의 대기를 오염시키고 온도를 떨어뜨려 맑은 곳으로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심심하던 차에 서로에게 들려줄 만한 무서운 이야기를 지어내기로 했다.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아 고민하던 와중에 셸리는 남편과 시인 바이런의 이야기를 엿듣게 된다. 그것은 ‘갈바니즘’에 대한 이야기였다. 갈바니즘이란 이탈리아 생물학자 루이지 갈바니의 과학관 혹은 그의 실험이 불러온 센세이션을 말한다. 갈바니는 전기 자극으로 죽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움직이게 해서 당대 유럽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급변한 기후와 더불어 신체에 조작을 가하는 기술의 발전이 자아내는 불길함, 무엇보다 이제 신체를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게 되리라는 두려우면서도 흥미진진한 예감―이것이 셸리로 하여금 『프랑켄슈타인』을 쓰게 만들었으리라. 어쩌면 지금 젊은 소설가들이 처한 시대적 환경은 메리 셸리의 작업 환경과 유사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디스토피아적 소설들이 남긴 질문들은 다시, 장르들의 경계가 와해되는 헤테로피아적 공간에서만 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희우
문학평론가. 2021년 《문학과사회》에 비평을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뜬금없지만 이 글을 쓰다가 챗GPT 생각을 했다. 챗GPT는 창작도 하고 비평도 쓴다. 하지만 감상은 하지 못한다. 이미 창작자도 비평가도 되었지만 아직 감상자는 되지 못했다. 몸이 없기 때문이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은 기쁨을 주지만 배탈이 나게 할 수도 있다. 타자와의 성적 스킨십은 희열을 줄 수 있지만 병들게 할 수도 있다. 몸을 선점하고 있는 이러한 모호성과 취약함이 없다면 감상과 판단의 기초인 쾌·불쾌의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몸을 가지게 된다면, 그러니까 병들 수 있고 파괴될 수 있으며 스스로 치유하기도 하는 몸을 갖게 된다면, 챗GPT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아름다움은 인간이 느끼는 아름다움과는 다를 것이다. 그의 몸이 인간의 몸과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2025/07/16
74호
- 1
- SNL 시즌 7의 한 코너에 출연한 한동훈의 말.
- 2
- 미셸 푸코, 「유토피아적인 몸」,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31쪽.
- 3
- 이희우, 「매력의 두 문제」,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봄호.
- 4
- “젊어지려 아들 피 수혈… 47세 억만장자 “내 혈장은 금” 깜짝 근황”, 중앙일보, 2024년 10월 21일. 바로가기
- 5
- 「리틀 프라이드」는 《자음과모음》 2024년 봄호에, 「최애의 아이」는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에 실렸다. 이하 인용 시 본문에 쪽수만 병기한다.
- 6
- 아미아 스리니바산, 『섹스할 권리』, 김수민 옮김, 창비, 161쪽.
- 7
- 이 소설이 왜 동시대의 많은 소설 중에서도 특히 동시대적인지를 규명하려면 잠깐 지루한 비평 이론적 이야기를 우회할 필요가 있다. 작년 작고한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을 약간 변형해 말하자면, 심각하고 거대한 ‘본격’ 모더니즘 문학은 비평가에게 깊이 있는 해석을 요구한다. 즉 그것은 ‘징후’를 읽어낼 수 있는 해석학적 능력을 요구한다. 반면 피상적이고 빠르고 산만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을 읽을 때 숨겨진 의미를 추론하는 해석학적 능력은 쓸모가 없다. 포스트모던 문학은 비평가에게 차라리 다양한 맥락을 모으고 유랑할 수 있는 아카이빙 능력을 요구한다. 모더니즘 비평가는 해석학자이고, 포스트모더니즘 비평가는 큐레이터이다. 이제는 조금 낡게 느껴지는 이런 구분에 따를 때 이희주의 소설은 모더니즘 소설도 아니고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도 아니다. 어쩌면 부분적으로는 둘 다일 수도 있다. 「최애의 아이」는 비평에 해석학적 능력과 아카이빙 능력을 동시에 요구한다. 그리고 그에 더해 아직 적당한 이름이 없는 제3의 능력, 유형학적 능력도 요구한다―내가 느끼기엔 이것이 이 소설의 새로움이자 난해함이다.
- 8
- 「인터뷰 이희주X이희우」, 『소설보다 겨울』, 2024, 문학과지성사, 156쪽 참조.
- 9
-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참조.
- 10
-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조계원 옮김, 민음사, 2015 참조.
- 11
- 이 악순환을 떨쳐내려면 니체식의 초인적인, 반시대적인 ‘배움(paideia)’이 필요할 것이다. 이 파이데이아는 너무 고전적인 동시에 급진적이어서 거의 망상처럼 느껴지는 무언가이다. “내가 교육자로서의 진정한 철학자, 즉 시대에 내재한 불만을 넘어설 수 있고 생각과 삶 속에서 단순하고 정직하라고, 다시 말해 그 말의 심오한 의미에서 반시대적이 되라고 다시 가르칠 수 있는 철학자를 그렸다면, 정말이지 지나친 망상을 한 셈이 될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5, 401쪽. 강조는 원저자.
- 12
- 한병철, 『권력이란 무엇인가?』, 김남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 특히 1장 「권력의 논리」 참조.
- 13
- 임소연, 『나는 어떻게 성형미인이 되었나』, 돌베게, 2022, 36~39쪽 참조. 내가 거칠게 언급한 ‘맹점’은 이 책 자체의 맹점은 아니다. 책의 마지막 장(3장) 역시 기술적, 미적 다양성과 평등한 접근성에 대한 포스트휴머니즘적 상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 14
-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 김홍욱 옮김, 에코리브르, 202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