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하는 사람들
너무 고요한 무해는 무해가 아니었음을
그것은 오히려 정치에 대한 개입의 힘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 프티티에, 『문학과 정치 사상』 부분1)
2010년대 중반 퀴어적 전환이자 페미니즘적 전회라 말해지는 기점을 지난 후에 나는 비평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누군가 치열하게 싸워서 힘겹게 내어놓은 길 위에서 평론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얼마간 쓰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새로운 길을 열어준 이들 덕분에 나는 특정 집단에게만 향유되는 예술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더는 자책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시는 아둔해지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진정한 예술이라 칭해져 왔던 지식인 시스젠더 이성애자 비장애인 남성 예술가들의 지극한 자기연민을 아름답게 느끼기 위한 어리석은 해석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안도했다. 그러기 위해서 해나가야 할 문학적, 비평적 작업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때로는 고통스럽게, 한편으로 즐겁게 고민했었다.
그러나 현실과 문학장은 꽃밭이 아니었다. 꽃밭인 것은 내 머릿속뿐. 실망할 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많았다. 무언가 완전히 바뀐 듯이 굴지만,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주의가 상식화된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문화적으로 퇴보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정치적 올바름을 표면적으로 수용하고는 있으나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다. 행사 뒤풀이 자리에 가면 참 많은 분이 묻지도 않았는데 대뜸 “나도 페미니스트야”라고 한다. 발화하는데 스스로도 거리낌이 있는, 더는 용인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자기보다 어리고 경력이 짧아서 만만한 여자 작가에게 한 번쯤 토로하고 싶은 내용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 말을 일종의 면죄부처럼 서두에 덧붙이는 것이다.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이야기까지 곁들인다면 글이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 문학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자. 정치적으로 올바른 내용과 형식을 요구하는 일을 문학의 자율성을 옥죄고 작품의 미학성을 훼손하는 일로 여기는 흐름은 여전한 듯하다. 미학성과 정치성을 분리해서 사유해왔던 관습적인 관점에 영향받은 것이겠지만, 이에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무의식적 반감도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창작자가 응당 수행해야 하는 윤리적 재현에 대한 고민까지 PC주의로 인해 새로이 생겨난 것처럼 이야기하는 흐름도 종종 눈에 띈다. 여성주의적이고 퀴어적인 문학의 경우 여전히 기성의 미학성을 잣대로 손쉽게 평가절하되면서 정치적으로도 더더욱 올발라야만 한다는 이중의 억압을 받고 있다. 내가 느끼기에 이와 같은 비판들은 PC주의를 요청하는 독자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러한 합리적인 요청을 왜곡하려는 문학장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페미니즘 및 퀴어 문학은 충분히 자리 잡기도 전에 반성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현상을 즉각적으로 점검하는 태도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그 의의를 세밀히 검토하기도 전에 여성 문학과 퀴어 문학은 ‘성찰’이라는 명목 아래 빠르게 비판받았다. 특정 문학이 훨씬 더 쉽게 표적이 된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다. 혹자는 지금의 문학장에는 PC주의를 운운하는 문학밖에 남지 않았다며 다시금 다양성이 추구되기를 바란다지만, 그 이전에 과연 다양성이 충분히 보장되어 있었던가? 지금은 보정된 과거로 회귀하려 하기보다는 이제야 활성화된 새로운 문학이 더욱 다양해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긍정적인 문학의 미래를 건설하는 일이 더욱 시급해보인다. 예를 들어 퀴어적 전환 이후, 게이 서사가 퀴어 문학을, 이성애자 여성 서사가 여성 문학을 과잉 대표하고 있다는 생산적인 비판이 있었고, 이에 따라 레즈비언 서사가 좀 더 풍부하게 창작되고 조명받기도 했다. 그러자 ‘성애’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는 않은지 자성하는 흐름이 생겨났고 무성애 또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작품들이 이전보다 많이 쓰이기 시작했다.
가령 서장원의 소설 「리틀 프라이드」(《자음과모음》 2024년 봄호)는 탑 수술을 받았지만 평균 신장에 못 미치는 남성이 되어 어려움을 겪는 FTM 트랜스젠더인 ‘나’(토미)와 작은 키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사지 연장술을 받은 시스젠더 남성 ‘오스틴’이 서로에게 미약한 동지 의식을 느끼면서도 불화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퀴어적 전환이 이루어진 문학장에서도 트랜스젠더 인물이 등장하는 서사는 여전히 그 수가 극히 적고, 그중 수술을 받은 FTM 인물의 신체에 대해 다루는 서사는 거의 부재하다시피 했다. 더군다나 드물게 발표되는 트랜스젠더 소설은 젠더 불일치를 비극적으로 경험하는 일을 재현하는 데 더욱 집중하곤 했다. 이에 따라 트랜스젠더 주체의 신체는 주로 은폐되어야 하는 부자연스러운 몸, 혹은 자연스러운 몸을 인위적으로 변형시킨 인공적인 몸으로 그려지곤 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트랜스젠더 인물이 느끼는 신체적, 감정적 고통을 전달하기 위해 의도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자연/인공, 정상/비정상이라는 이분법을 재강화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올해 2월 《문학웹진 림LIM》에 연재되었던 서장원의 단편소설 「피루엣」에 언급된 영화 〈Girl〉(2021) 역시, 호르몬 치료를 받는 열여섯 살 트랜스여성 ‘라라’가 성기를 감추기 위해 테이핑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중심인물의 아픔에 섬세하게 접근하는 이 영화가 트랜스젠더 인물을 비윤리적으로 전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영화의 결말부에 이르러 라라가 자신의 성기를 가위로 잘라내기까지 할 때 (물론 그녀가 경험한 절망의 연쇄가 짜임새 있게 제시되어 절단만이 유일한 선택지라고 믿게 되는 과정이 납득되지만) 이 서사 역시 신체의 ‘전환’에 집중된다는 인상을 남긴다.
이러한 맥락을 살필 때, 이상적인 남성의 신체 조건에 미달하여 매력적인 남자로 인정받는 일에 어려움을 겪으며 정체성에 자긍심을 느끼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FTM 트랜스젠더 인물과 그의 몸에 주목하는 서장원의 소설은, 한발 더 나아간 문제의식을 제시한다. 더불어 「리틀 프라이드」는 퀴어에는 친화적인 인물 ‘오스틴’이 여성 혐오적인 면모를 보이는 이채로운 입체성을 기입함으로써 퀴어문학을 확장해낸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소설 「피루엣」에서도 이어진다. FTM 트랜스젠더인 ‘규오’를 연인으로 둔 시스젠더 여성인 ‘나’는 규오가 시스젠더 남성들보다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여성의 몸이 겪는 생태를 잘 이해하”는 “무해한 남성”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그를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닐지 돌아본다. ‘나’는 자신보다 큰 체격을 지닌 옛 남자친구들이 ‘나’를 제압할 힘을 드러냈을 때 위협을 느낀 경험이 있고, 이후 그러한 신체 조건을 폭력과 쉽게 연결하게 된 인물이다. 소설 속 ‘나’의 친구들은 그 반응이 과하다고 말하지만, ‘2009년부터 2024년까지 최소 이틀에 한 명꼴로 여성이 친밀한 남성에 의해 살해되거나 그럴 위험에 처했다’2)는 실제 통계를 고려하면, 유난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유해함’뿐 아니라 ‘유해할 수도 있음’까지 미리 감지해야 하는 여성이, 여성의 몸을 지녔었다는 규오의 내력을 ‘무해함’으로 인식하는 시선은 규오의 입장에서는 차별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더욱이 규오의 무해함은 해를 끼치지 않음이라기보다 해를 끼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강도 높지 않으리라는 판단에서 유추된 특성이다. 무해함보다는 최저 수준의 유해함에 가깝다. 서장원의 「피루엣」은 트랜스젠더를 차별적으로 대하지 않고 연인으로 사랑하는 인물이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여성의 신체를 잘 이해하는 FTM 남성을 젠더 폭력을 가할 위험이 적은 비교적 안전한 존재로 느끼기도 한다는 인간의 다면성을 사유하게 한다. 치명적으로 해롭지 않은 상태를 안전한 상태로 여겨야 하는 여성과, 남성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면서 가혹한 외모 평가에 시달려야 하는 FTM 트랜스젠더의 복잡한 위치성이 겹쳐 있는 무해하고 또 유해한 서사가 지금-여기에는 더 많이 필요해보인다.
유사한 맥락에서 김영은의 소설 「말을 하자면」(202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에 관해서도 말을 보태고 싶다. 주목하고 싶은 대목에 집중하여 소설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청년 노동자인 ‘형우’는 노후한 기계에 팔이 잘려 사망하지만, 책임을 져야 하는 기업은 산업 재해를 인정하지 않는다. 형우와 알고 지냈던 ‘나’와 ‘너’는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하며 “우리 모두 형우다”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선다. 그러나 ‘나’는 시위 현장에서 결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도리어 강한 이질감을 느낀다. 이 연대 행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이 H신문사에 입사하려는 ‘너’에게 이득이 된다는 점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더군다나 ‘나’에게 형우는 “여자들은 툭하면 힘들다고 그만두기” 때문에 남성들을 위한 일터인 공장에 맞지 않는다는 등의 여성 혐오적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던 남자 동료이면서 성추행 가해자다. 더욱이 그런 형우를 향해, ‘너’는 “고졸 새끼 주제에”라고 욕설을 뱉으며 “멍청하면 배우기라도 하”라고, 학벌을 내세워 모욕을 주는 방식으로 응수했었다. 젠더와 학력 차이에서 비롯된 경험과 감각의 차이는 ‘노동자’라는 공통적인 계급성만으로는 덮이지 않는다. 산업재해로 희생된 형우를 선의의 피해자로 바라보고 추모하는 일이 비극적인 노동자의 죽음 앞에서 보여야 할 정치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올바른 행동일 때, ‘나’는 혼란스러워진다. 이러한 복잡성을 섬세히 다루는 이 작품은 “상식화된 PC(정치적 올바름)의 뒷면을 겨냥”3)한다는 평을 받았다. 물론 정치적 올바름의 ‘뒷면’ 역시 그 개념에 ‘속한’, 가려진 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겨냥이라는 표현은 PC의 뒷면이 정치적 올바름과 ‘구분되는’ 이면을 지칭하는 것으로 읽히게 한다. 기우일지 모르나, 나는 이 소설이 정치적 올바름이 간과하는 다른 면 혹은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문제점을 비판하는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시대가 요청하는 PC주의란 ‘상호교차성’까지 다각적으로 사유하여 특정 집단을 대변하는 데 자주 활용되었던 문학을 더 다양한 이들이 장벽 없이 향유할 수 있도록 확장하라는 요구에 가깝다. ‘상호교차성’이란 사회 불평등의 원인으로 젠더나 계급, 인종 등의 요소 중 하나만을 선택하여 강조하는 경향을 보완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사회 정치적 삶의 조건들이 “하나의 요인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여러 축들에 의해” 형성됨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개념이다.4) 노동자 계급으로 결속될 것을 요구받을 때, 지워지는 ‘나’와 형우 사이의 젠더 위계, 대학에 다니는 ‘너’와 실업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취직한 형우의 학력 차이,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일터인 공장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 그 모든 균열을 톺아보면서 김영은은 사람들이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기 위해 공동체로 결속해야 할 때조차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닌 채 다른 위치에 놓여 있음을 포착한다. PC주의는 이러한 측면을 놓친 채 과열된 것으로 자주 묘사되지만, 그렇지 않다. 여러 정체성이 교차하면서 상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톺아보는 문학을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김영은의 소설은 PC주의의 이면을 폭로하는 문학 작품이라기보다 PC주의가 요구하는 다양성과 그 입체성을 감당하는 소설이라고 말해봄 직하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요청은 착하기만 한 인물이 누구도 해치지 않는 단선적인 서사를 내어놓으라는 요구가 아니다. 오해받을 만한 요소를 소거하라는 과도한 검열 또한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왜곡하여 이해하려는 태도야말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정당한 요청을 ‘검열’이라 일축하며, 다양성을 수용하고 재현의 윤리를 추구하는 변화된 문학을 거부하려는 교묘한 공격처럼 느껴진다. 정치적 올바름을 단순화해 비판하려는 움직임 역시, 여성의 신체를 성적으로 대상화하거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연결해 함부로 낭만화하는 유해한 묘사를 멈추라고 했을 때 시어조차 마음껏 쓰지 못하게 되었다며 도리어 억압당하는 피해자의 위치를 점유하려는 움직임과 크게 다르지 않다.5) PC주의를 단순하게 적용하는 것만이 PC주의의 전부인 것처럼 지적함으로써, PC주의가 야기한 폐해가 더욱 많다고 사유하기를 원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생산적인 논의로 나아가는 길에 소모적인 장벽을 만든다.
현재 열렬히 추구되면서 비판받기도 하는 가치인 ‘무해함’ 역시 이와 관련이 있다. 나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무해함에 열광하는 문화를 비판한 적이 있다. 누구도 해치지 않지만 반대로 해를 입을 일 또한 없는, 타인의 고통을 몰라도 되는 위치에 있는 ‘선인’(善人)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무해한 서사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한탄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무해함에 대한 요구’가 작가를 과도하게 억압한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비윤리적인 재현과 형상화를 멈춰 달라는 요구는 정당하며, 현실에서 실제로 고통받는 이들을 생각하면 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 역시 문학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무해함에 골몰하는 일을 비판하는 것과 무해함을 요청하는 일을 긍정하는 것은 상반되어 보이겠지만, 실상 일맥상통한다. 의견이 상충하는 듯 보이는 이유는 ‘무해함’이라는 말이 지닌 여러 함의 때문일 것이다. 각기 다른 의미의 ‘무해함’이 하나의 단어로 묶여 있기에, 이를 풀어 설명할 필요가 있다.
무해는 없을 ‘무’(無)에 해할 ‘해’(害)를 쓰는 단어로 ‘해로움이 없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유해, 즉 해로움이 있음의 반대말이다. 여기서 혼란을 가중하는 부분은 바로 ‘유무’의 문제다. 이전에 발표했던 글 “무해함에 햇살 비추기”6)에서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누군가를 해하는 적극적인 행위가 제거되어 표면적으로는 고요한 상태를 무해하다고 여기는 태도였다. 이미 차별적인 사회에서 물리적인 폭력이 없는 상태는 외관상 무해해보일 것이나 이는 비폭력의 상태를 가장한 것일 뿐, 결코 무해한 세계가 아니다. 유해한 사회의 유독함이 은폐된 채로 남아 있어, 해로움이 가시화되지 않은 상태일 뿐이다. 그렇다면 ‘소극적인 무해함’과 ‘적극적인 무해함’은 구분되어야 한다.
내가 거부하고 싶었던 소극적인 무해함이란 ‘유해한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 더 이상의 ‘해’를 창출하지는 않는 상태로서의 무해함이다. 이는 부정의 형식이자 정적인 상태로만 존재한다. 한마디로, ‘새로이 해로움을 발생시키지 않기 위해 능동적으로 행위하지 않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위계와 그로 인한 차별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타자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위치를 점한다는 것은 타자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만히 있는 것 자체가 약자에게 해를 가하는 세계의 작동 원리에 동조하는 일임에도, 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무지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셈이다.
이 글을 청탁받았을 때, 기획 의도에는 “유해함으로 가득 찬 시대, 팍팍하고 힘든 현실은 우리에게 푸바오가 보여줬던 무해함을 끊임없이 갈구하게 하는 상황”이라는 문장이 있었다. 판다 ‘푸바오’는 아무리 안락한 환경에 있다고 해도 인간에게 전시되기 용이한 공간에 갇혀 있다. 사랑과 돌봄을 제공하는 다정한 사육사와의 유대 관계는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며, 야생에서 살아가기 어려워진 판다에게도 동물원은 유해하지 않은 장소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푸바오는 거주지를 선택하지 못한 채 인간들이 정한 규율에 따라 중국으로 송환되어야만 했으며, 여전히 인간의 통제를 받고 있다. 그가 지닌 무해함은 철창 밖의 인간에게 위협을 가할 가능성이 완전히 소거된 상태에서 온순하게 주어진 삶을 수용할 때, 더불어 그 광경이 사진이나 동영상 같은 이미지로 치환될 때만 유지되는 제한적 특성이다. 그것은 과연 해를 끼치지 않는 무해함인가, 아니면 애초에 해를 끼칠 수 없도록 무력화된 존재에게 부여된 무해함인가.
이러한 문제를 적절히 가시화하는 신이인의 시를 보자. 도시 속 “스크린”은 “세계의 진실”이자 타자의 아픔을 재생하여 보여준다. 인간이 망가뜨린 지구에서 “오랑우탄”은 먹이와 서식지를 잃고, “바다거북”은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를 삼키며 죽어간다. 동물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영상으로 시청하는 사람들은 “멈춰서서” 그들의 아픔을 인식한다. 단, 이 감응은 오래가지 않는다. 이들은 아주 잠깐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렇구나” 하고서 그대로 영상을 지나친다. 동물의 아픔을 이해하는 이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신사적으로 행동한다. 스크린을 때려 부수거나, 동물을 조롱하거나,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동물들을 연민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게 필요한 도움이 어떤 것일지 고민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해한 사람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무해한 인간이 절대다수인 세계에서 왜 동물들은 해를 입고 있나. 바로 그 소극적인 무해함으로 인해 동물의 생존을 위협하는 해로운 세계는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더 나아가, 인간이 자신들의 만행으로 인해 고통받는 동물들을 귀엽고 무해한 대상으로 만들어 소비하는, “끔찍함의 모서리를 궁글려 깜찍하게 만드는” 잔혹한 행위까지 사유하게 한다. 동물의 형상을 인간에게 친숙한 모습으로 가공하고 그것에 무해하다는 허구적인 특성을 덧씌우는 일이 바로 ‘궁글림’인 것이다.내가 살던 도시 속 스크린에는 세계의 진실을 보여주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습니다. 팜나무가 필요한 오랑우탄과 플라스틱을 삼킨 바다거북 이야기에 사람들은 멈춰서서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걸어갔습니다. 끔찍함의 모서리를 궁글려 깜찍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사람들은 선물 가게로 들어가고, 거기에는 동글동글 폭신폭신한 동물 인형들이 쌓여 있었지요.
―신이인, 「검은 머리 짐승 사전」 부분7)
인류가 파괴한 자연환경에서 생존해야 하는 동물들의 고통을 인지하고 이들을 연민하면서 한편으로 그 동물을 본뜬 인형을 귀여워하기도 하는 인간은 무해하다 여겨진다.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서 무해해보이는 존재로 남는 것은 울퉁불퉁한 세계에서 어김없이 찔리고 있는 약자의 통증을 납작하게 다지고 지나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매끄러운 스크린에 전시되는 슬픔에 적절히 공감하고 듣기에 거북하지 않게 조정된 비명을 적당히 안타까워하며, 이들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 않는 상태를 추구하면서 안온하다 믿어지는 침묵 속에 머무는 것, 그것은 한마디로 방관이다. 그러므로 하지 않음으로 성취되는 무해함이란 유해함을 묵인하는 일과 같다. 지반에 흐르고 있는 차별과 혐오, 구조적 폭력 등을 문제 삼지 않음으로써 잡음을 내지 않고 고요해지려는 태도는 저항을 위한 소란까지 싸움을 부추기는 고성으로 간주하고 폭력에 휘말릴 일 없는 안전한 위치에 남아 고고히 평온을 누리겠다는 자세일 뿐이다.
그러니까 무해함이란, 은폐된 유해함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제대로 마주하고 그와 다방면으로 충돌하면서 정당히 싸워낼 때야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적극적인 무해함을 추구하는 일일 테다. 정리하자면, PC주의에 대한 독자의 요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혐오와 갈등이 만연한 시대에 덜 피로한 작품을 보고 싶다는 요구이고, 다른 하나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유해함을 세밀히 직시하며 이에 당당하게 맞서는 윤리적이고 다채로운 문학을 보고 싶다는 요구이다. 전자의 경우 소극적 무해함을 양산하라는 요구일 텐데, 이에 순응하여 상업성을 추구하는 방식에는 회의하게 된다. 그것은 결국 유해함에 눈감는 방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또한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약자를 폭력적으로 전시해 두고, 그것을 현실 반영이나 고발이라는 무책임한 변명으로 정당화하는 예술을 고통스럽게 향유하느니, 차라리 그편이 낫겠다는 피로감의 표출이자 그 같은 문학을 계승하는 데 대한 거부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전자와는 다른 좀 더 적극적인 윤리적 요청임에도 종종 작가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력적 요구로 오해받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폭압이 아니라 예술성과 미학성을 방패 삼지 말고 성실히 작품을 점검하라는 요청이다. PC주의의 입체성을 충분히 사유하고 적극적인 무해함을 추구하는 문학을 요구하는 것은 편향되어 있던 문학장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온, 긍정적이고 전위적이면서 합리적인 요청이다. 그것을 왜곡하여 PC주의가 문학장을 장악했다는 식의 성급한 일반화를 일삼는 일이, 딱히 더 생산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마주한 시대적 요청은 무해함에 대한 강박이 아니라 교묘히 숨어 있는 유해함을 집요하게 드러내고 개선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유해함을 말끔히 덮어 고요해진 무해가 아니라 시끄럽고 요란하게 충돌하면서 점점 모나고 들쑥날쑥해져서 잠잠해질 기미가 없는 무해. 그런 무해를 요구하는 일은 아무리 거듭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현아
문학평론가. 2021년 『경향신문』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2년 대산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저서로 『아직 오지 않은 시: 포스트휴먼 시대 시의 미래』(공저), 『한강을 읽는다: 한 권으로 깊이 읽는 한강 대표 작품)』(공저)가 있다. 중앙대학교와 서울예술대학교에서 강의하며 학생들에게 문학과 사랑을 배우고 있다. 문학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정제된 글쓰기를 지향해왔지만, 이번만큼은 잘되지 않았다. 정돈된 어투로는 말할 수 없는 가려진 진실이, 엉망진창의 몸짓으로만 나눌 수 있는 뭉그러진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자유롭다고 느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줄 사람들의 얼굴이 생생했다. 누군가 말랑하고 따뜻한 귀를 내게 내어준다면 털어놓고 싶은 말들을 세심하게 골랐다. 그 귀가 실은 심장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더욱 진심이 되었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로 다가가 조용히 두근대기를 바란다. 그러면 좋겠다.
2025/07/16
74호
- 1
- 폴 프티티에, 『문학과 정치 사상』, 이종민 옮김, 동문선, 2002, 73쪽.
- 2
- “2024년 분노의 게이지 : 언론 보도를 통해 본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 및 일면식 없는 남성에 의한 여성살해 분석”, 한국여성의전화. 바로가기
- 3
- “기본기 탄탄한 작품 많았지만…도발적 작품 크게 줄어[소설 심사평]”, 한국일보, 2024년 1월 1일. 바로가기
- 4
- 패트리샤 힐 콜린스·시르마 빌게, 『상호교차성』, 이선진 옮김,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22쪽.
- 5
- 손택수 시인은 시 「요즘의 실어증」(《문파》 2021년 봄호)에서 “젖가슴이란 말을 쓰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 내 시에서 습관이 된 말들, / 젖가슴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라고 쓰며 혐오 표현을 점검하는 시대 분위기로 인해 부당하게 금기어로 전락해버려 해당 시어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뉘앙스를 내비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비독자의 SNS 활용법」(《현대비평》 2022년 봄호)이라는 글에서 다루었다.
- 6
- 성현아, “무해함에 햇살 비추기”, 경향신문, 2023년 11월 22일. 바로가기
- 7
- 신이인, 「검은 머리 짐승 사전」, 『검은 머리 짐승 사전』, 민음사, 2023, 2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