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도 높은 장면
초과하는 감각
몸을 둘러싼 연결들이 사라진다.
촘촘하던 연결이 느슨해지고 덩어리들이 선명해진다.
충동과 인식의 거리가 선명해진다.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닌 순간들
초과하는 몸
출몰하는 이미지를 수용하기
“거주하는 국가를 옮기고 새로운 언어와 환경에 놓이게 된 지 몇 개월이 채 되지 않았을 때 강렬한 꿈을 꾸었어요. 꿈과 아주 오래된 잊고 있던 이미지들이 불쑥, 또 은근하게 주변을 자주 맴돌아요. 한국에 있을 때는 자극적인 꿈을 꾸어도 일상을 보내는 동안 꿈의 이미지가 금세 날아가기도 하고, 나의 의식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스스로 꿈이 가진 정서와 이미지를 그렇게 손에 붙잡으려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곳에서는 내가 매일같이 작게 혹은 크게 충돌하며 알아가야 하는 것들에 대해 느끼기 때문인지 몸 안에 남아 나를 만지는 것이나, 생각의 바닥 즈음에서 만져지기를 요청하는 것들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돼요.”
〈구렁이 장면 1〉
큰 검은색 구렁이가 무대의 전면을 차지하고 있고 바닥엔 잔디처럼 무수히 많은, 아래서부터 솟아난 날카로운 칼날을 가진 검들이 있다. 거대한 검은 구렁이의 피부는 비단처럼 빛이 나고 큰 타이어처럼 굴곡진 덩어리는 인상적으로 보인다. 큰 검은 몸 마디마디에 천장으로부터 연결된 가느다란 투명한 실이 묶여 있다. 이 구렁이의 검은색은 낯선 검은색이다. 마치 자연물 속 갈색 벌레들 사이, 혼자 새까맣게 반짝이는 인공적인 검은 벌레의 색깔 같은 느낌이다. 조작되는 인형극 속 인형처럼 큰 검은 구렁이의 입이 열린다. 입안에선 반짝이는 분홍색 구슬들이 혀 대신 주렁주렁 쏟아진다.
〈구렁이 장면 2〉
무엇 하나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행위자로서 어떤 것을 보여야 했다. 그는 그것이 무슨 공연인지,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일단 던져진 후 겪어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살갗이 많이 노출된 상태의 그는 내맡겨지듯 무대에 올랐고 누군지 모를 다른 출연자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하얀 천으로 된 안대를 눈에 둘러주었다. 그는 차단된 시야와 함께 몸이 느끼는 충동, 그저 어떤 것을 ‘진행해야만 함’이라는 에너지에 의지했다. 눈이 가려진 그는 자신의 몸으로 어떤 것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몰랐지만 자동적으로 무언가의 위로 올라갔다. 탑 위에 올라가듯 그는 무언가를 딛고 올라갔고, 그곳에서 어떤 것이 시작되는지도 모르게, 무언가 시작되었다. 그는 결정할 틈 없이 누운 것과 같은 상태가 되어, 순간 해야만 하는 것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고 그가 딛고 올라간 것과 뒤엉키기 시작했다. 안대로 가려진 시야와 함께 큰 덩어리가 그의 피부에 닿았다. 정신없이 피부에 닿는 순간순간의 형태들로 그는 그것이 원통형일 것이라고 스쳐 가며 생각했다. 그는 덩어리의 피부 위와 옆, 사이로 미끄러졌고, 방향성이 없는 미끄러짐은 헤쳐나감에 가까웠다. 그가 느끼기로, 그 덩어리와 함께 움직이는 흐름의 속도는 의지와 상관없이 달려가는 청룡 열차 같았다. 계속해서 무엇인지 모를 큰 구불거리는 것과 정신없이 몸을 부대끼니 그는 강한 역함을 느꼈고, 미끄러지며 토를 하기 시작했다. 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새도 없이 토사물과 그의 피부, 구불거리는 덩어리의 피부는 계속해서 뭉개졌다. 토사물은 서로의 몸 사이에서 약간 말라가기도, 서로를 미끄러트리기도 하였으나 그의 몸과 토사물, 구불거리는 덩어리의 분리는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한참 토를 하며 구불거리는 큰 덩이를 헤집고 내려오니 결국 열차의 끝이 보였다. 뒤엉킴 끝에 안대를 벗고 그는 그가 미끄러져 내려온 것을 바라보았다. 바닥에는 절단된 큰 하얀 덩어리들이 역한 모습으로 놓여있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 덩어리들이 하얀 대형 구렁이의 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덩어리들은 물기가 남아 있는 백색 수영장 타일 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차가운 타일 바닥 위에 절단된 덩어리들과 주황색 피, 그가 토한 토사물과 섞인 액체들이 물에 희석되어 남아 있었다.
접촉으로부터 연상된 두 개의 행위


접촉 사이에서 연상된 이미지

접촉 안에서 실천된 행위

한국어 화자인 작가의 글을 원어가 아닌 독일어로 먼저 읽게 되었다. 나에게 외국어로 된 글을 읽는다는 것은 한국어에서의 의미로 순식간에 번역되는 일이 아니며, 외국어 안에서 추상성을 얼마만큼 예리하게 다듬어, 지시하는 대상과 겹친 어떤 추상적 방향 사이에 걸칠 수 있느냐에 가까운 문제처럼 느껴진다. 글을 읽다가 ‘( ) – Lache’라는 단어를 마주했다. 이 단어를 제외하고는 이해가 가능했음에도 해결되지 않는 의미가 있는 이 문장은 빠진 이빨 구멍이 있는 치열처럼 붕 뜬 채 다가왔다. 나도 모르는 새 의미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Lache’라는 단어는 처음 나에게 형상으로 다가왔다. 정확히는 저 형상에 겹쳐 있는, 이미 연상 가능한 다른 추상적인 이미지들을 끌어들이며 함께 다가왔다. 먼저 떠오른 것은 ‘Lachs’라는 단어의 이미지, 연어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연어라는 분명한 대상으로 오기 전, 주홍색 덩어리 혹은 잘린 생선의 단면 이미지가 단어의 주변을 맴돈다. 두 번째는 ‘Lachen’, 웃음을 의미한다. 웃음이라는 것이 오기 전 웃음이라는 흐르는 행위, 고정된 대상이 아닌 흐르는 행위와 소리가 연상된다. 경쾌한 느낌도 함께 온다. 의미가 분명히 잡히지 않는 ‘Lache’에 대해 골머리를 앓고 있자니, 앞에 붙어 있던 ‘( ) – Lache’의 괄호 속 단어 중 의심해 본 적 없던 어떤 부분의 의미가 이상하게 흐려진다. 괄호 속 단어는 ‘피’를 뜻하는 단어였다. ‘Lache’가 만든 혼란이 급작스럽게 피를 뜻하는 단어마저도 의심하게 만든다. 피라는 단어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 전, 나는 피라는 단어와 ‘바보 같은’이라는 단어를 종종 연관 지어 생각했었다. 피를 지칭하는 단어와 비슷한 형태의 ‘바보 같은’을 비롯한 독일어 단어들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바보 같은, 파란색, 꽃 등. ‘( ) – Lache’를 둘러싸고, 바보 같은, 파란색, 꽃, 연어, 웃음 등이 순간 겹치다 사라진다. 결국 사전을 들추게 되었다. ‘Lache’는 웅덩이라는 뜻으로, 앞의 ‘피’와 합쳐져 ‘피 웅덩이’를 뜻했다. 모국어로 ‘피 웅덩이’라는 단어를 마주하게 되자 금기된 것을 검색하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등이 싸늘해졌다. ‘바보 같은 연어’와 ‘피 웅덩이’는 꽤 거리가 먼 것이었고, 한국어로 본 그 단어는 언어가 아닌 직접적인 이미지처럼 순식간에 날아왔기 때문이다. 잠시 혼란스러워진 기분을 추스르고 조금 전 싸늘한 기분이 어디서 온 것인지 생각해 본다. ‘피 웅덩이’가 모국어로 지시한 이미지 주변에 무엇이 있었는지 떠올린다. 모국어와 이미지가 얼마나 쫀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가늠도 해보고 동시에 의심도 해본다. 그러다 내가 피 웅덩이라고 말할 때,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나는 내가 뱉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아마도 본 적 없는 것일 거라는 확신이 들며, 보면 알 수 있다는 것도 의심스럽다. 이것이 실제 지시하는 대상을 알게 되는 일이 두렵다는 생각도 언뜻 든다. 피 웅덩이로 골머리를 앓고 있자니, 내가 뱉는 단어 중, 얼마나 많은 단어를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갑자기 확신이 흐려진다. 이 불완전한 상태로 이끌었던 단어 ‘Lache’를 만질 수 있는 글자로 써본다. 이상하게도 앞의 ‘피’를 지칭하는 단어는 쓰고 싶지 않았다. 피가 실제 피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마치 어렸을 때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에 동요되던 마음과 비슷한 것 같다. ‘피는 피가 아닌데, 그럼에도 피가 피인 것 같은 느낌.’
언어가 덩어리진다.
몸을 둘러싼 연결들이 사라진다.
촘촘하던 연결이 느슨해지고 덩어리들이 선명해진다.
충동과 인식의 거리가 선명해진다.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닌 순간들
초과하는 몸
출몰하는 이미지를 수용하기

윤자영, 류한솔
시간에 기반을 둔 장면과 상황을 만든다. 주로 극장에서 작업을 해왔으나 최근엔 장면이 생겨날 수 있는 다른 시간과 공간의 형태를 고민하고 있다. (윤자영)
신체 변형에서 파생되는 촉각적 상상에 관심이 있다. 삶에서 느껴진 연상과 심상을 바탕으로, 파편화된 신체와 촉각적 사건을 영상과 드로잉으로 풀어낸다. 만화적 어법과 B급 공포영화 특유의 과장된 감각을 섞어 표현한다. (류한솔)
류한솔 작가와의 접촉에 의해 때로는 거시적인 생각으로, 때로는 촉각적인 자극으로 이동했다. 접촉 주변부 서로의 이야기에서 영향을 받기도, 흐름 자체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접촉한 부분에 대해 ‘사실 그 부분이 아니었던가?’ 하는 순간도 있었고, 멀리 뻗어간 생각 주변에서 문득 상대 접촉의 온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스치며 만나지는 사이에서 행위를 이어갔고 마지막 접촉을 끝낸 후엔 상대를 실제로 만나는 장면을 상상했다. (윤자영)
윤자영과 함께, 서로 다른 감각의 방향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자영님의 감각은 낯선 언어에서 파생된 이미지나 꿈의 잔상처럼, 조금 비껴 있고 미끄러지듯 흘렀다. 나는 신체의 변형, 과장된 촉각, 만화적 상상력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들은 자영님의 절단된 구렁이, 피웅덩이, 구슬 같은 이미지들과 느슨하게 겹쳐졌다. 드로잉은 하나의 서사를 따르기보다는, 감각이 흘러가고 달라붙고 뒤섞이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루프되는 눈알의 동세, 찢어지는 소리, 순간적으로 떠오른 장면들은 기존의 이야기 구조를 침범하고, 중첩되며, 변형시켰다. 전체 그림은 한 방향으로 읽히기보다는, 보는 이가 고개를 기울이거나 화면을 돌려가며 몸으로 접속하게 되는 감각의 흐름 안에서 펼쳐져 읽혔으면 했다. 이야기 바깥의 감각을 따라가보고 싶었고, 자영님과 감각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지나쳤던 부분들을 시간차를 두고 다시 더듬게 되었다. 이 신선한 어긋남은 내가 익숙했던 감각의 균형을 살짝 흔들었다. 접촉은 꼭 물리적으로 닿는 것만이 아니라, 어긋난 감각들 사이에서 비물질적으로 이어지는 흐름이기도 했다. 이번 작업은 그런 접촉의 감각을 더듬는 과정이었다. (류한솔)
2025/07/16
7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