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뷰view 함께 읽는 법
 ○ 본 좌담 연재 이번 편에서는 아래의 시 8편을 다룹니다. 하단의 작품 제목을 클릭하면, 각 작품에 대한 대화(리뷰)를 곧바로 살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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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연(사회, 본지 편집위원)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시를 쓰는 하재연이라고 합니다. 오늘 좌담 ‘비유-뷰view’에서는 지난 1년간 《비유》에 실린 시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려고 하는데요.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신 김선오 시인과 송승언 시인이 함께해주셨습니다. 먼저 두 분 근황을 가볍게 듣고 나서 시작하고 싶습니다.

김선오 : 안녕하세요, 저는 시 쓰는 김선오라고 하고요. 사실 좌담 자리가 처음이라 약간 떨리는데요. 얼마 전에 두번째 시집 『세트장』(문학과지성사 2022)이 나와서 이런저런 일정들을 소화하고 있고, 대학원 종강 이후에는 시 창작 수업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는 거의 못 쓰고 있지만 그래도 발표되고 있는 작품들을 꾸준히 좇아 읽으려고 하면서 여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재연 : 김선오 시인의 첫번째 시집 『나이트 사커』(아침달 2020)도 재미있었지만, 최근에 나온 시집 『세트장』도 아주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이 시집 못지않게 송승언 시인의 산문집도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송승언 시인은 『직업 전선』(봄날의책 2022)이라는 매우 독특한 산문집을 출간하셨고, 편집자로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최근 시를 많이 접하고 요즘 시의 동향에도 밝으실 것 같아요.

송승언 : 안녕하세요. 송승언 시인입니다. 하재연 시인께서 소개해주신 대로 최근에 『직업 전선』이라는 이상한 산문집을 냈고요.(웃음) 저는 개인적으로 유머 모음집이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저마다들 다르게 읽어주시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집 아니냐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산문집이라고 하고요.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출판사에서 편집자 일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시에 대한 동향이 밝은지는 모르겠고요. 다만 요즘 어떤 사람들이 어떤 시를 쓰고 투고하는지 대강은 살피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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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연 : 지난 1년간 《비유》에 실린 시 작품들을 보면서 든 생각이나 느낌이 궁금합니다. 편집위원의 입장이긴 하지만 《비유》를 보시는 분들의 반향을 받을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런 자리가 있었으면 했고요. 또 《비유》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시는 분들도 다른 독자나 작가들의 반응을 궁금해하지 않았나 싶거든요. 읽으면서 어떠셨어요?

송승언 : 일단 《비유》는 홈페이지 디자인이 예쁜 것이 흥미롭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 웹 지면으로 많이 넘어가려는 추세이긴 하잖아요? 출판사에서 종이잡지 외에 따로 웹진을 꾸리기도 하고 있고, 시 전문지 중에서도 종이책 대신에 PDF를 이메일로 발송하는 곳도 있더라고요. 최근의 그런 추세에서 제가 많이 느끼는 것은, 웹 지면을 꾸리는 곳에서 가독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웹상으로 무언가를 읽는다는 건 종이처럼 판형이 고정된 지면을 읽는 경험이 아니거든요. 웹 지면으로 접속하는 사람들마다 모니터 사이즈도 핸드폰 화면 사이즈도 모두 다르고, 가끔은 운영체제나 브라우저의 차이로 인해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요. 폰트도 인쇄용 폰트와 웹용 폰트가 달라서 경험에 영향을 미치죠. 문학작품은, 특히 시는 어떻게 조판되어 있느냐에 따라 읽는 경험 자체가 크게 차이 날 수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중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비유》는 그런 점에서 비교적 괜찮은 읽기 경험을 제공하는 편인 것 같아요. 엉뚱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하여튼 《비유》에서 시들을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렇습니다. 일단 보기에 좋았다.

하재연 : 편집자 입장에서도 얘기를 해주신 것 같네요. 김선오 시인도 《비유》에서 시 청탁을 받은 적 있는데요. 원고를 낼 때 다른 지면과 차별성을 느꼈는지 혹은 원고가 실리고 나서 보셨을 때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김선오 : 《비유》는 타 문예지에 비해서 접근성이 높고 매달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이 소개되는 만큼, 사실 약간 조심스러운 얘기일 수도 있는데, 시인들이 자신의 커리어에 있어 중요한 작품들을 《비유》에 많이 발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무래도 노출이 많이 되다보니까 그만큼 신경을 많이 쓴 작품들을 내보내는 것 같다는 인상도 있고요. 종이잡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게감이 덜 하니까 이런저런 자유분방한 시도들이 있어왔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재연 : 그런데 《비유》를 편집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반향을 느끼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김선오 : 예를 들어 한 시인의 작품들을 따라 읽는다고 했을 때, 대표작처럼 읽히는 작품들을 종종 《비유》에서 먼저 만나보았던 적이 있었어요. 또, 다른 것보다 저는 작가들의 자기소개가 되게 재밌었는데요. 청탁서를 보니까 작품을 쓰는 동안 주요하게 고민하는 점을 중심으로 간략한 작가 소개를 해달라고 가이드를 주시더라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등단 지면이 어딘지를 밝히면서 작가를 소개하는 방식이 고리타분하고 권위적이라고 느껴왔는데, 《비유》의 작가 소개 방식이 침체된 분위기에 활력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미술 작가들 같은 경우에는 본인은 이러이러한 주제에 관심을 갖고 이러이러한 실험을 하고 있는 미술 작가 누구입니다, 이렇게 소개를 하는데 문단에서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는 것 같은 거예요. 《비유》의 제안, 즉 작가의 작업 방식이나 관심사에 맞춘 소개 방식은 등단 지면을 위주로 작가를 소개하는 방식이 갖고 있는 경직성을 와해하는 느낌을 주어 눈에 띄었습니다.

하재연 : 김선오 시인 또한 시를 게재했을 때, “시간이 언어로 관측되는 방식에 관심이 있습니다”라는 인상적인 소개를 해주셨습니다.

송승언 : “대표작처럼 읽히는 작품들을 종종 《비유》에서 먼저 만나봤다”는 김선오 시인의 말씀이 재밌습니다. 웹이란 특성에서 오는 접근성, 그리고 아카이빙 문제와 연결되는 것 같아서요. 최근에는 SNS나 블로그 등을 통해 자기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어느 지면에 발표했다고 공지를 하는 작가들이 꽤 있거든요. 그런 작가들이 지면에 발표했을 때는 지면이 어딘지 밝힌 후 지면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거나, 간혹 개인 블로그 등에 직접 텍스트를 올리는 경우도 있긴 한데요. 《비유》 같은 경우는 웹 지면이니까 바로 링크해서 작품을 알릴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독자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은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가 많을 듯합니다.
또한 접근이 편이한 환경에 작품이 아카이빙 된다는 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계간지에 발표하는 작품은 시간이 흐른 뒤 연구자가 계간지 수십, 수백 권을 헤집어보지 않는 이상 찾지 못하게 되는 일도 흔하지만, 웹에 있는 작품은 상대적으로 검색이 수월하죠. 검색하면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의 시가 발견될 수도 있고, 어쩌면 그것이 반영구적으로 보존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치면 좀더 긴장감을 가지고 작품을 발표하게 되는 것이겠죠. 저는 이러한 웹 지면의 특성들은 작가들에게도 좋은 긴장감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재연 : 두 분은 SNS를 하시나요? 송승언 시인은 트위터를 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송승언 : 사실 트위터는 작품 활동을 하기 전부터 쓰던 거라서 딱히 작가 자아를 가지고 하는 건 아니고, 주로 타임라인의 개소리꾼을 맡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웃음) 인스타도 하긴 하는데 여행 사진만 올리고요. 저 자신을 홍보하는 일에는 좀 보수적으로 구는 편이네요.

하재연 : 김선오 시인은 인스타를 하시나요? 저는 엿보기만 하는 사람이라서.

송승언 : 김선오 시인은 제가 트위터를 하는 것만큼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하시죠.

김선오 :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웃음)

송승언 : 저도 옛날만큼은 안 해요. 사는 게 바빠지니 그리 되더군요.(웃음)

하재연 : 《비유》가 웹진으로서 갖는 특성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두 분이 말씀해주셔서 재밌네요. 《비유》는 처음 웹진으로 시작했을 당시, 등단과 비등단을 굳이 구분하지 않고 신예 작가들에게 조금 더 넓은 지면을 제공한다는 취지가 있었습니다. 4년 넘게 《비유》가 계속되어오면서 이제는 조금 더 작가의 세대와 독자의 저변을 확장해가고자 하면서 필진을 짜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에서는 경향성이나 공통성을 찾기가 쉽지만은 않은데요. 평론처럼 어느 지면에 기획 주제 방식으로 청탁이 되는 경우도 잘 없고요. 그래서 이 질문이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1년간 《비유》에 실렸던 시들을 보시면서 공통적인 경향성을 느끼셨는지, 그런 게 없다면 또 왜 그럴지 묻고 싶습니다.

김선오 : 동시대 시인들이 어떤 면에서 서로를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의식을 하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개별적인 시도를 하고 있고,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한 시쓰기를 해나간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는데, 모두가 알다시피 더이상 현대시를 어떤 경향이나 사조로 묶기가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한 명 한 명의 시인들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아요. 동시대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너무 넓어졌고 그만큼 독자에게는 현대시라는 어떤 영토를 탐험하기에 곤란하고 어려운 지점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거든요. 선택지가 늘어난 만큼 재밌고 능동적인, 개별 시인의 역할만큼이나 개별 독자의 역할도 커진 상황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웹진이라는 특성상 《비유》는 특정 기간의 시들을 모아보기가 용이했는데, 지난 1년 치의 발표작들을 살펴보면서 현대시라는 것이 동시대에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그 역동적인 현장을 보는 느낌이 들어서 흥미로웠는데요. 어떤 눈에 띄는 형태적인 경향을 굳이 말해보자면 시가 좀 길어졌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산문시라는 게 한국의 현대시가 발생한 이후 계속 있어왔지만 최근 들어서 유독 산문적 경향, 서사적 경향이 강해졌다는 생각이 들었고, 젊은 시인들, 최근에 등장한 신예 시인들 위주로 발생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 점을 눈여겨보았어요. 이러한 경향성이 뭘 반영하고 있는지, 아니면 뭘 얘기하고 있는지는 좀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재연 : 이야기성이 증가한다는 것에 동감하는 게, 시의 길이 문제와는 또 다르게, 최근 많은 시에 일종의 캐릭터성을 지닌 인물이 등장하고 캐릭터 간의 관계 속에 시적 사건이 전개되는 지점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최근 발간된 시집들에서도 그런 경향들을 볼 수 있었고요. 김선오 시인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시인의 독자적이고 개별적인 세계들이 흩어져 있는 만큼, 독자들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골라서 읽을 수 있는 지점도 더 다양해진 것 같습니다.

송승언 : 경향성이라고 하면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해요. 저는 없다고 볼 수도 없지만 있다고 볼 수도 없다는 애매한 입장인데요, 경향성까지는 모르겠고 경향은 있는 것 같아요. 예컨대 주제적으로 페미니즘, 이런 것을 중심으로 한 시들은 여전히 계속 이어지고 있는 듯하고요. 그래도 그런 것들을 콕 짚어 경향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동시대 유행하는 담론이나 중요한 흐름과 작품이 궤를 같이하는 일은 언제나 있어왔기 때문에, 그것을 특별히 최근에 돌출된 경향이라고 말할 만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돌출된 점을 찾아보자면 최근 몇 년 사이에 개인의 성정체성, 지향성, 그리고 이를 통해 사회 속에서 의미화되는 나를 가시화시키는 흐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따라, 그전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비밀스러운 언어로 숨겨져 있어 독자들이 이를 찾아내거나 해석하는 식이었다면, 최근에는 시인이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인지를 먼저 알고 나서 작품 속에서 그 목소리와 흔적을 찾으려는 독자들도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서브컬처와 게임 등 타 문화 장르와의 결합 같은 것들도 조금 더 많이,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는 느낌도 듭니다. 예전에도 이런 것들을 소재로 삼는 시들이 없지 않았습니다만, 그때는 그런 작품들이 ‘기존에 쓰이지 않았던 것들’을 선점하고 실험하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면, 최근에는 실험의 느낌보다는 일상적 자연스러움이 더 묻어나는 듯합니다. 이들에게는 서브컬처와 게임 등이 현실과는 다른 세계라든지 하는 특이한 무엇이 아니라 그저 절반의 일상에 불과한 것이겠지요. 그래서 형식적으로 일기라든지 에세이라든지 소설이라든지 시집 제목에서부터 그런 것들이 등장한다든가 형식적으로 결합된다든가 아니면 사이버 공간 게임, 웹툰, 웹소설 같은 것들이 뒤섞인다든가…… 일단 한축에서는 길어지는 것 같고 둘째로는 아까 말했던 사조적인 문제, 페미니즘 여성주의나 그런 말하려는 경향이, 즉 메세지가 강해지다보니까 그런 것들을 포괄시키기 위해 길어지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요즘 시집들이 진짜 두꺼워지고 있는 거 맞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민음사에서 나온 ‘민음의 시’들을 몇 권 살펴봤어요. 298번 정재율 시집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2022)가 184쪽이고요, 297번은 192쪽, 296번은 196쪽, 295번은 172쪽, 294번은 232쪽, 293번은 324쪽이거든요. 이번에는 91번 최승호 시집 『그로테스크』(2019)부터 보면 92쪽, 92번이 100쪽, 93번이 116쪽, 94번이 132쪽, 95번이 104쪽, 96번이 97쪽, 97번이 110쪽입니다. 시집이 비교적 얇았던 시절과 대놓고 보니 오늘날 시집이 확실히 점점 두꺼워지고 있는 것은 맞는 것 같아요. 시도 길어지고 있다고 보이고요.
또 한 가지 더한다면, 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시인과 독자 모두 시에서 거칠고 파괴적인 에너지를 찾거나, 혹은 그와 반대편에서 우울하고 무기력한 이미지를 주로 찾아 헤매는 듯이 보였다면, 최근에는 시에서 믿음과 용기와 부드러움과 아름다움과 건강함을 피력하는 시들이 많아진 듯해요. 이 또한 크게 보면 여러 현실 사건을 매개로 한 페미니즘 물결의 일부로만 볼 수도 있겠지만, 혹시 모르죠.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의식적 추구가 많은 젊은 시인들이 시와 예술에 관해 가지고 있는 생각, 추구하고 있는 정신일지도요. 한편 어쩔 수 없게도, 저는 어느 정도 작가들이 공격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조심스러워하는 데서 최대한 위험하거나 불온한 것들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작품을 써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들어요. 아마도 SNS 등을 통해 과거보다 훨씬 더 신속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작가에 대한 불만이나 문제제기가 이루어지는 환경과 아주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다 보니 작품들이 유해 요소를 수술 칼로 도려낸 뒤에 쓰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긴 합니다. 어쩔 수 없다는 점도 이해해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다른 방식의 접근들이 가능하다고도 보고 있습니다.
경향성에 관해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한참이나 두서없이 늘어놓았는데요, 《비유》에 발표된 시들에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재연 :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의식이 쓰는 이들에게 강화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들을 쓰는 이의 내면에서 먼저 걸러내는 심리가 있고, 이런 윤리적인 태도가 표현의 미학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최근에 한 잡지의 신인문학상 심사에 가서 다른 시인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있는데요. 시가 전체적으로 길어졌다는 공통성 외에 요즘 시에 주요하게 나타나는 모티프는 식물과 고양이라는 이야기였어요.(웃음) 무해하잖아요. 최근 《비유》에 실린 작가들의 작품 모티프나 작가 소개에도 식물과 고양이 이야기가 많이 나오더라고요. 쓰기의 무해함을 향한 욕망이 지니는 양면성에 대해서는 송승언 시인이 말씀해주셨는데요. 거친 것들, 삐뚤빼뚤 날카롭게 솟아난 것들이 잘려나가는 측면이 있지 않나 하는 말씀을 하셨고, 한편으로는 그동안 제기되어왔던 문학에 있어서의 정치적인 것과 미학적인 첨단성이 어떤 식으로 만날 것인가라는 고민은 계속해서 쓰는 이 각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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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연 : 이제 작품으로 들어가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우리 세 명이 각자 인상적으로 읽은 시 다섯 편 정도를 골라왔는데, 단 한 편도 겹치지 않았다는 게 재미있습니다.(웃음)

송승언 : 시 고를 때 남들이 안 고를 것 같은 걸 골라왔어요.(웃음)

김선오 : 그러신 것 같았어요, 느낌이.


정다운, 「어부 군인 무역가의 아내」click

하재연 : 먼저 송승언 시인이 주목한 작품은 《비유》 43호(2021. 7)에 실린 정다운 시인의 「어부 군인 무역가의 아내」입니다. 제목을 보면서 과연 『직업 전선』을 쓰신 분이 고를 만한 작품이라고 여겼습니다.(웃음)

송승언 : 사실 시 제목 때문에 끌린 것은 아니고요.(웃음) 일전에 정다운 시인의 시집 『파헤치기 쉬운 삶』(파란 2019)을 재밌게 읽었었습니다.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폭력, 그리고 그 폭력과 여성 사이의 관계가 나타나는 현장들을 정다운 시인의 시에서 특히 눈여겨보았던 것 같아요. 어떤 폭력이 발생했고, 그러한 폭력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망각된 것 같은, 그러다가 불현듯 기억 속에서 잊었던 것들이 다시 발굴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시집을 읽으며 받았었는데, 이 시도 그런 점에서 주목이 되었습니다. 일단 제목을 보면, 남편이 세 명은 아닐 텐데, 어부와 군인과 무역가의 아내라고 되어 있잖아요?

하재연 : 어부의 아내도 맞고 군인의 아내도 맞고 무역가의 아내도 맞고 있는 건가요?

송승언 : 저는 그 ‘아내’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여인들의 유령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부와 군인과 무역가는 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셋 다 집을 오래 비우고 멀리 떠나지요. 어부는 바다로 나가고 군인도 전장에 총 쏘러 나가고 무역가도 사업하러 국외에 나가고요. 한편 아내는 바깥에 남자를 보내고 방에 갇혀 있는 존재이지요. 그래서 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머물러 있는 거고요. 시에 되게 무서운 표현들이 많은데, “발목이 손잡이처럼 쓰였다”거나 “동물처럼 귀를 낮추고 엎드렸지만” 이런 표현들을 보면 성적인 부분에서 폭력적인 정황이 읽히기도 해요. 도구로 취급당하고 있는 느낌도 들고요. 그런데 이런 폭력이 몇 생애에 걸쳐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고 있는 느낌이거든요. 직접적 표현이 아닌 우회적인 방법으로도 폭력을 더없이 으스스하게 그려낸다는 점이, 그리고 이를 통해 어떤 시공간에 계속 누적되어왔을 기억들을 들춰내는 부분들이 재미있었습니다. 재밌었다고 말하기가 좀 그렇긴 하지만요.(웃음)

하재연 : 폭력의 기억이 유령처럼 시간 속에서 반복되면서 그 집에 쌓여가는 느낌으로 나타나는 지점이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페미니즘 담론과 만나고 있는 이소호 시집의 고발적 말하기 방식이나 권박 시인의 역사적 텍스트를 활용하는 방식들과는 다른 지점에서, 송승언 시인이 말씀하신 것처럼 물리적인 폭력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것처럼 보이는 화자가 나타나는 방식이, 최근의 시로서는 상당히 독특하게 읽혔습니다.


권박, 「북극 호텔」click

하재연 : 다음으로 44호(2021. 8)에 실린 권박 시인의 「북극 호텔」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최근 시와 문학에 감염병의 유행 이후 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기후 위기와 관련된 모티프가 부쩍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요. 이 작품이 꼭 기후위기라는 주제에 국한된 것만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이 시에 펼쳐지는 북극과 남극에 대한 상상이 지금 현재 우리가 느끼는 미친 계절 감각하고 닿아 있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노동은 새하얗습니다. 새하얗습니다. 새하얗습니다. 아름답습니까.”라고 처음에 나왔던 호텔의 광고 문구를 비트는데, “굴절된 빛처럼 아름다운 노동”이라는 새로운 노동의 이미지가 흥미로웠습니다. ‘북극곰’이라는 소재에는 현재의 기후 위기 상황과 관련해서 일정하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고, 그런 전형성을 갖는 소재들을 시에서 다루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정해진 길을 피해 가면서 우리가 지닌 북극과 남극에 대한 전형적 이미지들을 비틀고 새롭게 상상하고자 했던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송승언 : 말씀하신 대로 몇 가지 층위에서 재미있는 질문들을 저 스스로에게 주는 것 같아서 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먼저 아름다운 이미지,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전형적인 아름다운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많은 것들이 쉽게 파괴되는 일이 정말 아름답냐고 묻는 질문도 좋았지만, 동시에 노동이라는 것이 엮이면서 개인적으로는 더 재미있게 느껴졌습니다. 사실 노동의 가치를 높게 여기는 사람들의 입에서 종종 노동은 숭고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혹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말이 종종 나올 때가 있는데, 저 또한 노동하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노동은 전혀 아름답지 않은 것 같습니다.(웃음) 노동은 굉장히 힘들고 추한 것 같고요, 쉬는 게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상해요. 노동이 아름다워야 할 것 같은데 아름답지가 않아서요. 왜 우리의 노동이 아름답지 않은가? 노동이 꼭 아름다울 필요는 있나? 그렇다면 모두가 공평하게 힘들고 추한 노동을 한 뒤에, 모두 공평하게 아름다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쪽으로 생각이 튀게 만들어주기도 하는 시였습니다.

김선오 : 이미지의 층위에서 북극, 남극과 호텔이 연결되는 지점이 새하얌이잖아요. 호텔의 이불 느낌, 침대의 새하얌과 멸균된 공간이라는 특성, 또 남북극의 탈일상적인 눈부심이 이미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 시가 호텔에 가서 새하얀 이불보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 평온한 이불과 침구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집약된 노동이 멸균의 공간 속에 존재하고 있고, 그 사실에 시가 감응하고 있어요. 북극 혹은 남극이라는 흔히 아름답고 이상적인 공간으로 상정되는 곳이 기후위기의 가장 극점에서 고통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북극호텔이 남극에 존재하고 있다는 아이러니 역시도 맞아떨어지는, 그 지점이 흥미롭게 읽혔던 것 같습니다.

하재연 : “주위 기온과 거의 같은 온도로 유지하기 위해 거칠고 두툼해진 몸 좀 보세요.”라는 북극곰의 형상이 노동하는 인간의 모습과 닿아 있어요. 어찌 보면 코카콜라 광고 이미지처럼, 북극곰을 보호해야 할 개체로 보는 것 또한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의 연장일 텐데, 이 시는 북극곰의 순수함이랄까 아름다움이랄까 그런 전형적 이미지를 한 번 더 뒤집습니다. “굴절된 빛처럼 아름다운 노동”이라는 구절은 역설이자 반어이지만, 그럼에도 시 속에서 여전히 ‘노동’의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임승유, 「소매가 긴 푸른 셔츠에 검정 바지」click

하재연 : 45호(2021. 9)가 시 특집호였습니다. 이 특집호는 다양한 세대와 개성을 아우르고자 했는데요. 김선오 시인이 임승유 시인의 「소매가 긴 푸른 셔츠에 검정 바지」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선오 : 임승유 시인의 시들이 보통 일상적인 장면들 속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균열을 뒤쫓고 그것이 시적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쓰인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은데, 이때 이 균열이 어떤 방식의 환상처럼, 그런데 우리가 기존에 흔히 상정하는 환상이 아니라 너무 사실에 가까워서 오히려 환상처럼 보이는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이 시에서는 푸른 셔츠를 입은 사람이 소철 앞에 서 있던 화자에게 여기서 뭐하냐고 물어보는 순간이 그랬어요. 너무나 사실에 가까운 문장의 나열 속에서 갑자기 등장하거든요. 이 갑작스러운 도래함이라든가,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으로부터 구제되는 장면, 사람이 입은 푸른 셔츠와 돌멩이를 뒤덮은 푸른 이끼가 중첩되면서 발생하는 아름다움 같은 게 너무나 고유한 것이라고 느껴졌어요. 또 인간은 생물인데 옷은 무생물이고, 돌은 무생물인데 이끼는 생물이잖아요. 인간이라는 생물은 옷이라는 무생물에 감싸여 있고, 돌이라는 무생물은 이끼라는 생물에 감싸여 있는 정황 속에서 두 존재 사이의 낙차라고 할까요? 낙차지만 사실은 동류의 존재처럼 느껴지는 유사성의 아이러니 같은 게 재밌게 느껴졌어요. 또 이 시를 공간적 측면에서 살펴봐도 흥미로울 것 같은데요. 도입부에서 뒷문을 열고 나간 곳에 몇 년 동안 키운 소철 나무가 있잖아요. 후반부에 보면 “주변의 다른 생물이 그러하듯 저기 해가 비치는 지평선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지.” 이런 문장이 있는데 도입부에서 공간은 집의 뒤쪽 골목 같은 소박한 장소였거든요. 시가 전개됨에 따라서 시적 공간이 거의 대지에 가깝게 확장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지평선이 있고, 그곳으로 해가 지고, 모든 생명체들이 해가 지는 곳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이런 공간적 확장이 저는 이 시가 가진 굉장히 특별한 지점 같았어요. 또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끼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내가 어떻게 됐을지 누가 알겠어.” 마지막에 이런 문장이 등장해요. 아마 “소매가 긴 푸른 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은 사람과 그의 손을 잡은 아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신은 영원히 그 이끼 앞에 앉아 있었을 거다” 이런 진술을 위한 문장으로 저는 읽었는데요. 만약 그렇게 영원히 이끼가 뒤덮인 돌 앞에 앉아 있었다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화자 자신 역시도 이끼로 뒤덮인 돌멩이가 되어버렸을 것 같은 거예요. 그럼 이끼로 뒤덮인 돌멩이 두 개가 그 자리에 놓여 있게 될 텐데 그 모습이 마치 푸른 셔츠를 입은 사람과 아이의 모습과 또 유사하게 느껴져요. 그런 장면들을 상상하다보면 생명이란 무엇이고, 생명이 아닌 것이란 무엇이며, 또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고요. 또 이런 생각을 촉발하게 하는 명료한 문장들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고, 생명력을 미묘한 방식으로 환기하는 시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져오게 됐습니다.

하재연 : 저는 김선오 시인의 말씀을 듣다보니, 김수영의 「절망」이라는 시가 생각났는데요.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이렇게 쭉 나오다가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는 그런 갑작스런 전환과 구원의 순간 같은 것을 우리가 염원하게 될 때가 있잖아요. 이 시의 순간적인 전환이나 도약이 이런 구원 같은 순간으로 느껴져 신선했던 것 같아요. 말씀하셨듯이 인과관계가 없는 구원 같은 건데, 현실적인 판타지이거나, 판타지적인 현실로 읽히는 거죠.

송승언 : 임승유 시인의 시를 보면서 매번 좋고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점 하나는 기억의 절단면이 그대로 노출된다는 것입니다. 시적 도약을 할 때 쓰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고, 저는 이런 계열의 시들을 기억 상실의 시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기억 상실의 시들을 살펴보면 자기가 기억을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임승유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은 자기가 기억을 잊었다는 것을 기억하거든요. 앞쪽에 기억이 있고 뒤쪽에 기억이 있는데 이 두 기억은 서로 붙어 있는 게 아니야, 이 사이에 뭔가가 빠져 있어, 라는 것을 되게 선명하게 말해주고, 시가 그런 진술을 믿고서 나아가기도 하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특히 아름다운 일상 풍경 속에서 그런 것들을 길어 올린다는 점이 가장 좋아요.


서호준, 「시인 머리로 할 수 있는 몇 가지 놀이」click

하재연 : 같은 호에 실린 다른 시들에 대해서도 주목을 하셨습니다. 서호준 시인의 「시인 머리로 할 수 있는 몇 가지 놀이」에서는 어떤 지점이 가장 재밌으셨을까요?

송승언 : 서호준 시인은 서브컬처와 메타적인 요소로 시를 많이 일구는 시인입니다. 일단 그런 시인이 그런 시를 웹진에 발표한 게 재밌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자 문예라고 할 수 있는 환경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시인 중 하나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시 안에서 문장이 이어지는 방식이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텍스트 조각들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SNS 타임라인, 피드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SNS의 피드를 보면 조각조각의, 서로 상관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전시되는 순서와 읽는 이에 따라 맥락을 구축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성질을 시에 도입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시에 잭슨 콕이라는 인물이 나오기도 하는데, 서호준 시인의 다른 시 중에 「잭슨 콕 튜토리얼」이라는 시가 있어요. 잭슨 콕이라는 인물이 게임 캐릭터처럼 그려지면서 인물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과 이야기를 하는 시입니다. 예전에도 이야기의 등장인물을 내세우는 시들은 많았지만 서호준 시인 같은 경우에는 상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뒤섞는 듯한 관점을 취하는 것이 재밌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서호준 시인에게 시는 게임일 수도 있고, 시쓰기라는 게임 플레이가 스트리밍 되는 플랫폼일 수도 있고, 결국 그것이 인생과 그다지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신이라는 아바타가 움직이는 필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양한 시인-캐릭터들이 실패할 것이 분명한 퀘스트를 받고서 우울한 모험을 감행하는 장르라는 생각이요.

하재연 : 게임 공간과 시의 공간을 마주치게 하는 것은 송승언 시인도 자주 하는 일 아닌가요?(웃음)

송승언 : 문단에 저에 대한 오해가 많습니다.(웃음) 저는 보기와는 달리(?) 시 쓸 때엔 게임을 비롯해 서브컬처 소재는 잘 안 들고 오거든요.

하재연 : 제가 읽기에는 시집 『사랑과 교육』(민음사 2019)에서도 게임 공간의 캐릭터가 어떤 장소에 던져진 것 같은 상상력이 보였거든요.

송승언 : 그렇게 읽으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저도 생각을 했죠. 내가 의도하고 쓰진 않았지만 이미 우리 시대의 독자들은 가상 공간과 현실 공간을 특별히 다른 것으로 구분하지 않고 연관 짓는 상태까지 왔다는 생각을요.(웃음)

하재연 : 게임의 공간이라는 것이 이미 너무나 우리한테 익숙한 공간이기 때문에 현실 공간과 굉장히 밀접하다는 건가요?

송승언 : 네, 요즘은 집에서는 물론, 대중교통 속에서도 게임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게임을 할 때 우리는 현실에 머무르며 가상 세계를 잠깐 경험하는 게 아니라, 양쪽 공간 모두에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게 더 맞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요. 게임이 낯선 것일 때는 ‘현실과 별로 상관없는 것 아니야?’라고 하신 분들도 많았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걸 모두 알고 있기도 하고요.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특히나 재화적인 문제가 많이 관계되어 있고요.

하재연 : 시인이 전지적인 느낌으로 하나의 세계를 예술 작품 안에 창출한다는 것이, 어느 순간 낭만주의적이거나 구시대적인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최근의 시인들에게서는 다른 의미로 새로운 장소와 세계의 시적 창출에 대한 욕망이 보이는 것 같아요. 송승언 시인의 시들이나 문보영 시인의 시들을 보면요. 현실계와 유리될 수는 없지만, 현실의 논리와는 약간 다른 내적 질서와 규칙과 논리를 지니는 새로운 장소와 공간성을 시 안에서 구축하고, 그 논리에 따라 작동되고 전개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건이 벌어진다는 느낌입니다. 그러한 상상력이 또 시를 재미있게 만들기도 하고요.

송승언 : 공간도 많아졌고 인물도 많아진 것 같아요. 요즘 사람들은 예전보다 웹상의 여러 페이지, 플랫폼 등을 훨씬 더 구체적인 공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고요. 그 공간에 머무르는 개인들도 자신이 가진 여러 면을 떼어내 각각 캐릭터화하고, 다른 캐릭터를 사용할 때마다 다른 자아를 가동시키기도 하고요.


박승열, 「감자 독백」click

하재연 : 공간의 확대와 함께, 최근 시들에서는 시쓰기에 대한 메타적인 쓰기가 많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같은 호에 실린, 박승열 시인의 「감자 독백」이나 「오렌지의 꿈」도 그렇습니다. 박승열 시인의 두 작품은 21세기 판 이상(李箱)인가, 이런 느낌을 준달까. 위트가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 「감자 독백」은.

김선오 : 이상보다는 박상순 시인이 많이 떠올랐던 것 같아요.

송승언 : 저도 어떤 점에서는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김구용 같은 시인들이 떠오르긴 했거든요. 언어를 통해 대상과의 거리를 다시 재고, 대상을 달리 규정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이상한 말하기를 계속하고, 대상에 계속 집중하면서 그 대상을 조금씩 변하게 만드는, 그런 것들이 재미있게 느껴졌습니다. 「감자 독백」은 언어나 문장의 활용은 대단히 고전적인 구석이 있는데, 그 사이에 엉뚱한 유머들이 들어 있어서 ‘아 이건 뭐지?’ 하며 생각을 환기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하재연 : 감자라는 게 한국어에서 재밌는 존재잖아요. 감자를 먹인다, 감자 같다 등 감자라는 단어 자체도 일상적으로 굉장히 재밌게 궁글려지는 말인데 그걸 시 속에서 잘 활용하고 있어요. 감자에 의해서 응시당하는 나의 괴로움도 재미있고, “감자가 없을 때조차/ 나를 지켜보는/ 한 무더기의 감자가 있었다”는 진술이 시쓰기를 은유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Where’s my potato?”까지 가면 많이 건너가버리는 거죠, 시인이(웃음). 화자가 자기의 쓰기에 의해서, 말하기에 의해서 발생해버린 저 사태를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고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에요. 약간 클래식하다고 말씀하셨던 대로 이런 모티프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닌데, 「오렌지의 꿈」도 재밌었고, 앞으로 박승열 시인이 이런 작품들과 같이 유머를 시에서 어떻게 다루려나 기대가 됩니다.

김선오 : 저는 약간 다른 차원에서 메타 시 같다고 느꼈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아버지 김, 이, 박, 최가 선배 시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송승언 : 김구용, 이상, 박상순?(웃음)

김선오 : 이들이 아버지라고 호명되어 있기도 하고요. 그런 의심을 지울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사물이라는 대상 자체를 감자로 형상화해서 사물을 대하는 시인들의 그간의 태도들, 그동안 한국 시단에 있어왔던 사물을 대하는 시적 태도들을 아버지 김, 이, 박, 최라는 인물들로 형상화한 것 같았거든요. 마지막에 보면 아버지 김, 이, 박, 최가 없고 갑자기 내 앞에 감자만 덩그러니 나타나잖아요. 저희보다 앞서 있었던 윗세대 시인들이 사물을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사물로서 등장해버린 저 감자를 우리 시대 시인들은 어떻게 대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고민들을 마주하고 있는 시라는 생각이 들었고, 사물의 등장을 혼자서 맞이해야 하는 시인의 고독감이 느껴지는 동시에 우월감도 느껴졌던 것 같아요.

하재연 : 그렇게 생각하니 더 재밌는데요, 시가?(웃음) “저 많은 감자를 어떡하면 좋을까?”라는 구절에, 벌어진 사태 앞에 서 있는 화자의 고독감이나 당혹감과 난데없음, 우물쭈물함이 잘 나타나고……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송승언 : 박승열 시인의 「푸른 돌멩이」란 시도 인상적이게 본 기억이 나네요. 손에 쥐이는 사물을 들고 집중해서 시를 끌어나가는 힘이 좋은 시인 같습니다.

김선오 : 사물에 관심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물을 주체의 자리로 어떤 방식으로 옮길지 고민을 계속하는데 고민의 과정 자체를 시로 노출하고 있어서 재밌게 느껴졌어요.

하재연 : 시인 프로필에 “죽을 때까지 사물만 사랑하다가 나도 사물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했는데, 앞으로 어떤 시를 보여줄지 궁금합니다.


백은선, 「命日」click

하재연 : 같은 호, 그러니까 45호(2021. 9)에는 신예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세대의 시인들이 배치되어 있어요. 그중에 백은선 시인의 「命日」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백은선 시인의 「命日」은 시인이 시집에서 보여주었던 많은 시들과 다르게 진술의 선명성이 또렷이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저는 여기서 할머니가 등장을 하는 게 참 좋더라고요. 할머니의 말과 화자의 진술이 교차되는데, “넌 커서 선생님이 되어야 해”라는 할머니의 말과 “나는 지옥에서 자라 마지막 장부터 다시 썼어요” 이 진술 사이에는 깊은 거리감이 있잖아요. 그런 교차와 거리감이 재밌었고 시가 전개되는 장소가 섬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색다른 느낌이어서 ‘어 이 작품 되게 재밌다’ 하면서 읽었네요.

송승언 : 저는 그 뒤의 시가 진짜.(웃음)

하재연 : 다음 작품 「Why can’t you love me?」 말이죠.

송승언 : 네. “아니 아니/ 새처럼/ 아니 아니”라니. 백은선 시인은 이미지를 무척이나 선명하게 그려내는 시인 같습니다. 여기도 보면 “눈 뜨면 펼쳐지는 창”을 통해 “쏟아지는 눈발” 같은 시각적인 이미지를 참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고요.

하재연 : 눈 이미지는 첫 시집부터 많이 나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命日」의 마지막 연에 “할머니 있잖아/ 나 선생님 소리 많이 듣고 살아” 이 말에 왜 이렇게 마음이 많이 쓰이는지. 같은 호에 실린 정한아 시인의 시에도 주목하셨습니다. 정한아 시인의 「은자(隱者)」부터 얘기해볼까요?


정한아, 「은자(隱者)」click

송승언 : 정한아 시인의 「은자(隱者)」를 읽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요즘에 워낙 SNS를 하는 분들이 많아서인지, SNS를 안 하고 있는 사람은 가시화되어 있지 않으니 뭐하고 사는지 모르겠고, 살아 있기는 한가 싶을 때도 있거든요. 당장 저만 해도 제가 트위터 계정을 잠깐 없애거나 하면 무슨 일 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실 SNS를 안 하고 사는 사람도 많고, 오히려 안 하고 사는 게 더 나을 때도 많은데, 어느 순간부터 자기가 살아 있음을 힘껏 어필해야지 살아 있다고 생각해주는 세상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 조금 씁쓸하죠. 요즘 세상에 SNS를 안 하는 것을 죽어 있는 상태, 또는 숨어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면, 사실 그 죽어 있음은 되게 편안하거든요. 물론 죽으면 편안하다는 걸 알면서도 죽음의 실천은 어렵지만요. SNS를 지우면 편안하다는 걸 누구나 아는데, 그편안함을 실천하기 어렵게 만드는 세상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여러 SNS들이 우리를 SNS에 묶어두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불안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해요. 이것을 안 하면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없을 것같이 만들고, 이것을 안 하면 네가 사회인으로서 창작자로서 활동가로서 살아남지 못할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이것을 안 하면 관심사를 공유하는 친구를 못 만날 것처럼 만들고…… 그런 불안들을 계속해서 조성하면서 자기들은 수많은 데이터와 이미지를 수집해 광고 자료로 활용하고, 우리를 지속적으로 광고에 노출시킬 뿐 아니라 우리를 광고판으로 만들고, 이런 불안한 살아 있음의 감각에 중독되게 만듦으로써 SNS 자아의 참된 죽음을 쉽게 맞이하지 못하게 만들고, 또 몇 번씩 부활하게도 만드는 게 아닐까 싶네요.

하재연 : 끊어드릴까요?(웃음) 죽음을 맞게 해드릴까요?

송승언 : 타살보다는 자살을 원합니다.(웃음) 하여튼 시를 읽다보니 자연스레 ‘그래, 이렇게 살기도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잠기게 되더군요.

김선오 : 반성을 하셨네요.(웃음)

송승언 : 맨날 반성하는 게 제 인생이죠.

하재연 : 정한아 시인의 시를 읽으면 「은자(隱者)」의 마지막 세 행 같은 경우는 “아, 형용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갖가지 너무 다양한 냄새들이여, 이 달콤함이여/ 태만과 쉬이 구별되지 않는 평화여” 이런 구절은 번역시 같은 느낌도 드는데요. ‘와, 이런 식의 화법을 어떻게 동세대의 한국 시인이 쓰지?’ 싶고 확실히 특별한 발화법이라고 생각됩니다.


정한아, 「은퇴한 신의 동체 시력」click

하재연 : 저는 정한아 시인의 다음 작품인 「은퇴한 신의 동체 시력」을 읽으면서 이건 정말 제목이 다했다. 제목만으로도 너무 좋은 거예요. 은퇴했거나 포기한 신에게서도 선택받지 못한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라는 느낌이 들고. 최근의 시들에 신이라는 단어가 꽤 등장하는 것 같은데, 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종교적인 느낌이라기보다는, 신이 있다고 한다면 그에게서 버려진 것 같은 장소와 캐릭터들이 꾸려가는 세계랄까. 이런 상상력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요.

송승언 : 다들 어느 정도 메타에 대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 그런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게도 다들 세계라는 말을 쓰면서 각자의 세계를 만들고, 그걸 또 세계관이라고 부르고, 창작자들이 이런 개념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나머지 자연스럽게 시쓰기라는 천지창조에 대해 생각하면서 신(神) 개념도 떠오르게 되고……

하재연 : 이른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해지는 ‘세카이계(セカイ系; 世界系)’적인 상상력이나 감각하고도 관련이 있을 수 있을까요?

송승언 : 그런 것들도 연관되어 있을 것 같긴 하고요, 한편 또 일본 애니메이션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것 같기도 해요.

하재연 : 최근의 시들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서브 컬쳐로서 그것들을 들여왔다는 느낌보다는, 예를 들면 이런 공통적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요즘같이 비가 기이할 정도로 무섭게 쏟아지는 기후를 보면서 저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날씨의 아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생각났거든요. 이 세계가 점점 막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니까 그러면 물리학적 의미로 가능할지 모르는 평행세계를 꿈꾼다든가, 주어진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거나 공간의 질서를 다르게 비튼다든가 하는 상상력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이미 파국을 맞은 현실이나, 선형적 질서 같은 것들을 뒤틀면서 새로운 장소나 공간에 대한 가능성이 나타나기도 하고요. 여기 계신 김선오 시인의 시들에서도 그런 지점을 느꼈습니다.

김선오 : 전능한 존재를 시에 등장시킨다는 말씀이기도 할 것 같은데. 우리가 화면을 되게 많이 보는 세대로 점점 진화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유튜브 혹은 넷플릭스 시대이기도 하고, 사실 현실에서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기보다는 화면 속 매체를 통해서 연출가가 연출한 세계를 접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 세대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이 세계는 조정이 가능해요. 시간도 되돌릴 수도 있고, 이 세계에 내가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이 세계를 조망하면서 이곳의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감각들을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내면화하고 있다고 느껴져요. 살아 있는 세상 자체가 우리가 살고 있는 기본적인 공간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화면 속의 세계와 접속을 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또 하나의 공간을 염두해두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 같아요. 저 자신을 생각해 봤을 때도 그런 이유에서 제가 형성하고 있는 공간, 제가 존재하고 있는 이곳과 다른 공간을 시 안에서 자꾸 만들어내게 된다는 생각도 드는 것 같아요.

하재연 : 김선오 시인 말씀을 들으니 새롭게 조망한다는 것, 작가가 만들어낸 뷰라는 것들이 시 속에 등장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정한아 시인의 작품 또한 다른 지점에서 바라보는 새로운 각도의 조망을 보여주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다음 편은 9월 13일에 게재됩니다.)

*본 좌담은 2022년 7월 7일 목요일 오후 4시 연희문학창작촌(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소재)에서 진행했습니다. 좌담 내용을 총 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김선오, 송승언, 하재연

김선오: 시를 중심으로 이런저런 텍스트 작업을 하고 있다.
송승언: 우울과 농담 사이에서 끝없이 게으름을 추구하는 편.
하재연: 좋은 시를 쓰는 이들이 많다. 혼자이면서도 함께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이 매번 생소하면서 기쁘다.

2022/08/30
5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