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뷰view 함께 읽는 법
 ○ 본 좌담 연재 이번 편에서는 아래의 시 6편을 다룹니다. 하단의 작품 제목을 클릭하면, 각 작품에 대한 대화(리뷰)를 곧바로 살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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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 이어서)


김복희, 「아이 생각」click

하재연(사회, 본지 편집위원) : 《비유》 49호(2022. 1)에 실린 김복희 시인의 「아이 생각」에 대해서는 어떤 부분을 말씀하고 싶으신가요?

김선오 : ‘아이’라는 게 이 시에서 미신처럼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어쩌면 아이라는 말 자체가 어른한테 종속되어 있는 단어 같았어요. 아이라는 말을 종속하고 있는 개별자인 어른이 아이라는 대상을 대할 때 그 감정이 너무 복잡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아이가 없는 성인 여성에게 “아이 생각 없어?” 이런 질문이 너무나도 많은 생각을 하는 질문인 건데…… 어쩌면 폭력에 가깝다고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아요. 이 시의 초반부에, 화자가 폭력적인 질문을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건네는 대화 상대한테 장난을 치고 싶어하는 욕망에 시달리잖아요. 폭력을 전복하거나 상대에게 뒤집어씌우거나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기보다는 장난의 방향을 독자에게로, 그러니까 독자에게 장난을 치는 방식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느껴졌거든요. 화자에게 사실은 아이가 있다는 게 저는 당연히 거짓말 같았어요.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고, 네가 없으면 죽고…… 이런 특성을 지닌 걸로 보아서요. 근데 이 거짓말을 화자가 해명하고 심화해나가는 과정이 재미있는 동시에 슬프게 느껴졌던 것 같고요. 그렇기에 아이의 모습이 나름 구체적으로 묘사가 되는데도 유령처럼 느껴졌어요. 아이가 유령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사실 그 아이가 시 속의 나와 너 사이에 ‘가능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일 것 같은데, 그래서 더욱 이 아이가 저에게는 미신 같은 존재로 다가왔어요. 아이는 화자에게 일종의 공포이기도 해서, 아이에게 위스키를 먹여서 재우듯이 아이에 대한 자신의 공포나 심각함 같은 것들을 잠재우는 방식으로 발화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었고요. 최근에 미국에서 낙태권이 폐지됐잖아요. 그러한 작금의 상황에 대해서도 연상하게 하는 지점이 있었던 것 같고요. 결국 화자가 아이 생각 없다고, 정말 없다고 상대에게 말을 하는데, 이 시의 구성 자체가 ‘아이 생각 없냐’는 질문과 ‘아이 생각 없다’는 대답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말들의 나열인 걸로 느껴졌어요. 주제 자체도 재밌었지만 주제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이런 방식으로 시를 구성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워서 이 시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재연 : 이 시 속에 나오는 아이가 진짜 ‘아이’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기도 했어요. 뒷부분에서는 “아이가 자라면서 자신을 미워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 그것만은 막아야겠지”라는 진술이 나오는데 이때의 아이란 ‘내 안에서 나온 어떤 것’으로도 읽히기도 합니다. 마지막에 “네가 없으면 죽는다는 걸 감추지 못하는 이 아이가 네게로 간다”라는 구절은 어떻게 읽으셨어요? 이 마지막 부분이 좀 재밌던데요.

김선오 : 제가 읽기로는 이 아이가 너와 나 사이에 어떤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아이라서…… 그 맥락에서 읽었던 것 같아요. 여기서 말하는 ‘아이’가 너와 나 사이에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아이라면, 그러니까 ‘너’와 ‘나’ 사이에서 언젠가 태어날 수도 있는 존재로서의 아이라면, 이 아이는 네가 없으면 가능성으로조차 존재할 수 없기에 “네가 없으면 죽는다는 걸 감추지 못하는 이 아이”라는 진술이 가능해질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아이’란 얼마간은 귀신이고, 얼마간은 상상으로서의 존재 같고요. 재미있는 것은 아이가 “네게로 간다”는 부분인데, 이 역시도 화자가 ‘너’에게 장난을 치는 거 같았거든요. 아이에 대한 여성 화자의 모든 상념과 상상과 장난이 너에게 귀신처럼 다가간다는 내용이 재미있기도 하고, 또 슬프게도 느껴졌던 것 같아요.

하재연 : 현실에서의 아이를 둘러싼 여성과 출산이나 양육 등의 문제는 여전히 많이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느낌 속에서, 씁쓸하게 읽게 되기도 하네요.


김연필, 「빛과 신의 놀이」click

하재연 : 50호(2022. 2)에 실린 김연필 시인의 「빛과 신의 놀이」에 대해서는 송승언 시인 말씀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송승언 : 이 시 역시 수록된 지면이 웹진이라서 좀더 잘 작동하는 작품이라 봅니다. 링크된 영상click을 봤는데 재미있었어요. 어떤 점이 재미있었느냐면, 재미있어 보이는 걸 하고 있다는 바로 그 지점이 재미있었어요. 사실 저는 시를 읽어주는 독자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시를 발생시키는 시인의 입장이 독자보다 중요하다고도 생각합니다. 시가 일종의 놀이이고, 이 놀이는 읽기보다는 쓰기를 통해 더 강하게 성립된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쓰는 자가 재미있어 하는 국면이 제게는 중요한데요.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재밌어 보이는 걸 한다는 느낌이었고, 어쨌든 시라는 이름으로 공개되어 있지만 우리가 많이 읽는 일반적인 시이기보다는 공간적으로 발생되고 전시된 작품으로서의 시에 대한 도록처럼 느껴졌거든요. 하여튼 저는 어떤 시인 스스로가 재미있어 보이는 걸 하는 건 되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도발적인 말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러시는 분들 있잖아요. 이것저것 ‘실험적인’ 형태를 취하거나 여러 타 장르의 소스를 첨가하면, 반사적으로 ‘안 좋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분들이요. 이런 복합적인 시도를 하면 아직도 일단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어쨌든 그런 것들 다 무시하고 시인이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하재연 : 최근에 시들이 좀 길어지는 게 ‘공연성’ 하고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시를 무대 위에서 실연하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실제로 쓰고 있다는 감각 자체를 통해 시 쓰는 이가 살아 있다는 표현을 한다고 할까. 시인이 작품을 다 완결을 시켜서 독자에게 전송한다는 느낌 보다는, 쓰기를 실천하는 느낌으로 쓰는 자로서의 존재 증명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품의 가치라든가 예술성 같은 문제들이 더이상 독자들에게나 사회적으로 큰 유효성을 지니고 담론화되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에, 쓰고 있다는 감각만이 쓰는 이들에게 가장 유효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송승언 : 김연필 시인은 문장을 계속 발생시키고 연결 짓고 움직이게 만드는 데에 관심이 많은 시인 같습니다. 이 공연-시에서도 즉흥적으로 문장을 생성해내고 있고요.

김선오 : 즉흥적으로 쓰고 그걸 옮기는 건가요?

송승언 : 영상 보면 나오는데, 프레젠테이션이 켜져 있고 거기서 문장을 계속 새로 써요.

김선오 : 저는 이미 쓰인 것을 타이핑하는 줄 알았어요.

송승언 : 그 공간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써나가는, 즉흥시로 봐야 할 것 같아요. 그 점이 재미있고, 결국 이 시는 텍스트만으로 읽을 수 없는 시라고 봅니다.

김선오 : ‘무보(舞譜)’라고 하잖아요, 텍스트가 악보처럼 춤의 스코어 역할을 하고, 그걸 가지고 즉흥적으로 무용을 한 줄 알았어요.

송승언 : 시인은 공간에 빔 프로젝터로 큰 종이를 띄워 즉흥시를 쓰고, 무용가도 즉흥시를 보면서 즉흥무를 추고…… 그래서 활자로 된 시 작품이라기보다는 공연된 시에 관한 도록 같다고 말씀드린 거고요.

하재연 : 교차 창작을 했다고 해도, 시 텍스트가 먼저고 그 다음에 춤이 뒤따르고 다시 그에 영향을 받아서 텍스트를 조금 고치고…… 이런 느낌으로 교차함을 상상했거든요.

송승언 : 실제로 해보면 이런 창작이 재미있기만 하진 않고 되게 고통스러워요. 저도 예전에 통인동 ‘이상의 집’에서 하루 얼마간 갇혀서 이상과 관련된 즉흥시를 쓴 적이 있었는데, 재미있을 것 같아서 받은 청탁이었지만 대단히 괴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안 풀리는 문장들을 붙잡고 있으려니 죽을 맛이었죠.

하재연 : 시 노동 기계로서 실천하라, 뭐 이런 느낌이겠어요. 실천은 즐거움이기도 하겠지만 괴로움 자체를 현시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겠네요.


윤혜지, 「손님은 왕이다」click

하재연 : 51호(2022. 3)에 실린 윤혜지 시인의 「손님은 왕이다」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아무래도 김선오 시인은 윤혜지 시인과 세대적으로 가깝다고 느낄 것 같아요.

김선오 : 네, 신예 시인의 시와 조금 연차가 있는 시인의 시의 비율을 비슷하게 맞춰 좌담에 가지고 오려고 했습니다. 윤혜지 시인의 「손님은 왕이다」는 주제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거시적인 이데올로기와 그런 이데올로기의 대립항에서 발생하는 어떤 개별적 관계와 소통에 관한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이런 주제는 새로운 건 아니지만, 저는 이 시에서 구현해내는 디테일들이 되게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가해국의 국민인 외국인은 세입자로 설정하고 피해국의 국민을 집주인으로 설정한다든가, 외국인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한국어로 된 시 내에서 특수한 어감을 형성한다든가, 삶은 양배추 같은 음식을 공유하는 설정을 만든다든가, 언어를 물에 비유한다든가 하는 지점이 재미가 있었어요. 집주인과 세입자라는 관계, 자국인과 외국인이라는 처지의 차이에서 분명 권력의 차이가 발생할 텐데, 그렇게 보면 당연히 집주인이 세입자보다 권력적 우위에 있는 게 맞잖아요. 그런데 이 시 안에서는 희한하게도 이 권력이 일방향적이지 않고 균열이 가 있어요. 저는 이 균열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언어라고 봤어요. 이 시에서 우리나라 언어를 대할 때 외국인이 그것을 대상화하고 있잖아요. 이 나라에 살면서 이 나라 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보여지는데요. “너희들의 언어는 듣기 좋다고/ 악센트가 옅어서/ 물처럼 부드럽다며” 이런 말들이 아마도 이 외국인에게 친절하게 말을 해줬기 때문에 가능한 발화라고 생각이 돼요. 이 외국인이 우리나라 말을 굳이 열심히 배울 필요가 없는 게, 시에 등장하는 우리도 외국의 언어를 써주고 있잖아요. 물론 이 외국인이 우리끼리 우리말을 할 때 소외되고는 하지만 배려라는 것이 언어적 소수자인 우리들의 몫으로 남아 있고요. 그런 우리들이 과거 전쟁의 피해자들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어요.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우리가 우리나라 말을 많이 쓰면서 비로소 물처럼 부드러운 포장지뿐 아니라 말의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고 보였는데요. 무표정하게 툭툭 빠르게 말하고 잔인한 말도 서슴지 않고, 이런 말의 모습을 시인은 “물비린내 나는 뉘앙스”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물처럼 부드럽기만 한 말이 아니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외국인이 울음을 터뜨리고 미안하다고 계속 말을 하잖아요. 외국인의 이런 태도가 자의식 과잉처럼 보였던 게 저뿐만은 아닌 것 같은데, 제목도 ‘손님은 왕’인 것처럼, 풍자의 과정들이 신선하고 재밌게 느껴져서 이 시를 가져온 것 같습니다.

하재연 : 권력의 우위에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소외시키는 자와 소외당하는 자, 다수자의 언어와 소수자의 언어 등의 프레임이 일방향적이지 않고 계속 이동하고 변화하는 지점이 흥미로운 시였습니다. “외국인의 언어를 써주”는 “우리”라는 복수 화자의 말들이 “전쟁, 죽어, 아파, 심장”이나 “우리는, 용서” 등으로 분절됩니다. 이 분절되는 말들 앞에서 외국인은 “이해할 수 있어 집주인은 많이 아팠을 거야 고통스러웠을 거야”라는 공감의 태도와 정서를 지닙니다. 그런데 “악센트가 옅”어서 “물처럼 부드러”웠던 “우리”의 언어는 “무표정하게” “툭툭 말을 빠르게 뱉”어내게 되면서, “물비린내 나는 뉘앙스”로 변모하게 되죠. “알아들을 수 없는데도” 이 “무례”한 뉘앙스를 알아차리는 외국인은 울음을 터뜨리게 되고요. 자동화되고 무표정하고 습관화된 언어의 폭력성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한 것 같아요. 한편 지나간 역사에 대한 타인의 진정한 이해와 공감이라는 것의 어려움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면들이 단지 한 방향으로만 해석되지 않고, 질문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지점이 시의 매력일 텐데, 윤혜지 시인이 이 작품을 통해 그러한 매력을 생동감 있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민식, 「10,000데이 클라스」click

하재연 : 같은 호에 작품을 발표한 김민식 시인은 윤혜지 시인과 같은 해에 등단했죠. 김민식 시인의 「10,000데이 클래스」 같은 경우, 원데이 클래스로 만든 항아리에 관한 얘기로 시작이 되고 있거든요. 김선오 시인은 어떻게 읽으셨을까요?

김선오 : 10,000데이 클래스라면 삼십 년 정도 되는 시간인데, 이 시에서는 삼십 년의 시간을 크게 염두에 둔 것 같진 않고, 상징적인 표현으로 사용한 것처럼 보였어요. 시의 설정들이 실험 영화의 줄거리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사물에 누적되는 시간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처럼 읽혔는데,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인간 역시도 일정한 시간을 품고 사는 대상으로 바라보게 한다고 느껴졌던 것 같아요. 백 년이라고 하면 요즘 시대 인간의 수명 정도의 시간인데, 인간 역시도 이 정도의 시간이 누적되는 “닭 항아리” 같은 존재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고요. 이 저주받은 닭 항아리는 자꾸자꾸 주인인 인간한테 돌아올 텐데 만약 인간 역시도 버려진다면 채워지지 못한 시간은 과연 무엇으로 남을까 하는 질문도 같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시가 샤머니즘적인 데가 있다고 느껴졌는데요. 저주받은 닭 항아리라는 대상도 그렇지만, 반지를 고르는 행위도 타로 카드 고르는 행위처럼 미신적으로 느껴지는 데가 있었고, 중간에 닭이 울거나 알을 낳으면 어떡하지 하면서 닭 항아리를 진짜 닭과 혼동해서 상상하는 부분 역시도 이성적인 판단 너머에서 가능한, 유물론적이지 않은 추측으로 보였고요. 이렇게 자유롭게 질문이나 상상이 실체를 넘나드는 방식이 재미있었어요. 반지를 너무 많이 선물 받아서 그걸 골라야 한다는 정황이 좀전에 타로 카드 같다고 말씀 드렸는데, 동시에 기념일이 너무 많았던 걸 의미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아요. 무세가 “백 년 쯤 기다려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잖아요. 이게 이미 백 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버렸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고요. 시의 시간적인 구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선형적으로 되어 있지 않고 미세하게 뒤틀려 있는데, 제목과 더불어 시의 재미를 배가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재연 : 이 시에 나오는 항아리는 사실 유물이 아닌데, 유물 같은 느낌으로 그 사물에 시간이 겹치는 게 재밌는 것 같아요.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으로 과거의 시간을 대하고 있기도 하고, 시인의 프로필에서도 그런 얘기를 하고 있어요. “백 년이라는 시간이 좋다” “나와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이 사라질 백 년”에 대해서 상상해보는 것. 그 상상이 이 시인에게 있기 때문에 시간을 어긋나게 배치해보는 그런 재미가 있는 시 같고요.


김선오, 「R을 제외한 해변의 전체」click

하재연 : 시간에 대한 또다른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 52호(2022. 4)에 실린 김선오 시인의 「R을 제외한 해변의 전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최근 시집인 『세트장』에서는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참고하기도 하셨더라고요. 시공간의 물리학이나 시간의 흐름에 대한 추적 같은 모티프에 관심이 있으신 듯합니다. 작품을 굉장히 재밌게 읽었어요. ‘R을 제외한 해변의 전체’라는 제목도 아주 인상적이었고요, 이 작품에는 시간의 선형성에 대한 의문이 있잖아요. 물리학적으로는 시간의 선형성에 대한 재해석이 가능하지만, 우리의 사고는 선형성에 붙들려 있는 경우가 많지요.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는 텍스트나, 서사 구조는 아닐지라도 시조차도 선형적인 장르이기도 하고요. 반면 시 속에서 일반적인 선형적 감각들을 비틀 수도 있고요. 이러한 맞부딪침에서 발생하는 균열 같은 것들을 이 작품에서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의 창작자가 앞에 계시니까 말하기 두렵긴 한데,(웃음) 시 안에서 소설이라 칭하는 순간 소설의 시간이 발생하고 시간을 통해서 공간이 발생을 하고, 또 빛을 통해서 생명이라든가 인간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발생을 하고 있어요. 김선오 시인의 시에서는 쓰기를 통해서 발생하는 시공간성의 새로운 구축이 매우 재밌더라고요.

김선오 : 감사합니다.

송승언 : 김선오 시인의 시에서 제가 재밌게 느끼는 부분은 그런 것 같아요. 김선오 시인은 물론 시인이지만 시를 읽다보면 이와 동시에 감독이라고 부르고픈 면모가 보인다고 해야 할까요. 좀 극적인 상황이나 장면들을 마련하고 그려내는데 그것이 상당히 디테일하기 때문에 그 통제된 세계 속의 디테일을 통해 읽는 이들에게 그 장면들을 생생하게 재현시키고 감각하게 하지 않나 생각해요. 그 장면들은 종종 감동적이고요. 그런데 역시 당사자 앞에서 말하기는 좀 그러네요.(웃음)

하재연 : “과거가 해변의 왼쪽이고, 미래가 해변의 오른쪽”이라고, 시의 세팅을 통해 시간을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이 독특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관측”의 “방식”이라고 말하잖아요? 표현의 방식, 소설의 방식이 일종의 관측하는 방식이라는 거죠. 물리학의 상대성의 원리도 그런 거잖아요. 관측자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측정되는 것. 저는 잘 몰라 찾아 읽기도 하는 것이지만, 물리학의 진술들을 읽을 때 세계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느끼는데, 이런 측면을 시적으로 참 잘 구현하신 것 같습니다.

김선오 : 제가 그래서 선생님 시를 되게 좋아하는데.(웃음)

하재연 : 김선오 시인의 작품이 구조적으로 잘 짜여 있고, 또 《비유》에 게재된 후에 두번째 시집에 바로 실리니, 시인에게 마감을 주어서 이런 작품이 탄생을 했구나 하고 기쁘기도 했습니다.(웃음)


신해욱, 「슈샤인」click

하재연 : 이제 마지막으로 이야기 나눌 작품이 되겠네요. 53호(2022. 5)에 실린 신해욱 시인의 「슈샤인」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김선오 : 우선 도입부에 ‘문 앞에 놓인 구두’라는 소재가 환기하는 뒤늦음의 감각 같은 게 있잖아요. 약속 장소의 문 앞에 놓인 구두를 보면 ‘아 내가 늦었구나, 먼저 도착한 일행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될 것 같죠. 운동화가 아니라 구두라는 점도 의미심장해요.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 늦은 것 같은데 구두는 한 켤레잖아요. 그러니까 두 개인데, 한 발이 늦었다면 영원히 앞에 놓인 두 개의 신발처럼 존재할 수는 없다는, 언제나 한 발로 존재할 뿐이라는 절망과 좌절감 같은 게 이 시에서 전해지는 감각이라고 느껴졌던 것 같아요. 뒤이어 공간들이 등장하는데 “빈소” “야산” “위령의 밤” “무허가의 체험관” 이런 것을 통해서 죽음과 연관된 장소라고 유추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구두가 먼저 도착한 곳이 죽음의 장소인 거죠. 맥락은 조금 다르긴 한데 신해욱 시인의 바로 전 시집인 『무족영원』(문학과지성사 2019)에 수록된 시 「어디까지 어디부터」에 “옥광산을 지나/ 생태계를 넘어”라는 표현이 있었던 걸 기억하는데요. 장소의 정체를 호명하면서 공간적 이동을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시적인 공간이 확장되는데 이런 방식이 독자한테 해방감을 주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 시 같은 경우에는 이런 이동이 모두 죽음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기이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요. 이를 통해서 처음 제시된 장면을 하나의 공간에 가두지 않고 여러 공간 속에 산재하도록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죽음 자체가 넓어지고 있다는 신기한 인상을 받았어요. 이후에 “둘이서 하나를 쓰는 곳”, 한 켤레의 신발이 있는 곳에 “몫이 있다”라고 말하면서 몫은 나눌 수 없다고도 하잖아요. 몫이라는 기표에서 목숨이 연상되기도 했어요. 이어서 “하나의 구두에 가로막혀”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때 시적 화자의 크기라고 할까요, 화자의 스케일 같은 게 구두보다 확 작아져버린다고 느껴졌어요. 왜냐면 그게 뒤늦음의 감각에 의한 것 같은데요. 죽음에, 죽음을 애도하는 장소에, 어쩌면 나에게보다 타인에게 먼저 도래한 죽음의 자리에 늦었다는 느낌이라는 걸 앞선 전개를 통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도착해서 구두를 신어보니까 구두가 크잖아요. 일찍 도착하는 방식 역시도 화자에게 맞지 않는다는 의미처럼 느껴졌고요. 영원히 늦을 수밖에 없다는 거죠. “미달의 체험” “알을 슬고” 이런 표현이 재미가 있었는데, 우리가 지금 우리로서 부족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복제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읽혔어요. 모자람의 감각 때문에 실랑이를 하고 얘기를 하고 재촉을 당하고 묘하게 이런 충돌과 생기가 발생하는 것도 이런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느껴졌고요. 그래서 결말부에 “구두를 닦았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게 또 흥미로웠어요. 구두를 신지 않고 닦음으로써 죽음의 공간에 대한 접근 불가능성에 대한 액션을 취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제목도 ‘슈샤인’이고 구두가 시 안에서 다층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이때 구두 자체의 물성이 살아나면서 어쩌면 그동안 관념적일 수도 있었던 구두의 존재가 이 장면에서 눈앞에 확 도래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구두에 삶이 비치는, 어쩌면 이 환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이 장면이 실감나게 느껴졌고요. “삶은 탐스럽”고 “만져보고 싶”은 대상인데 동시에 “피할 수 없”고 “우리”를 “유리”시키는 존재라는 거죠. 이러한 아이러니함이 조곤조곤한 말투로 서술되는 것도 저는 좋았고요. “하나를 깨우고 싶었다”는 결말도 마음 아프게 읽혔던 것 같아요. 늘 미달된 존재로서 불행이라고 해야 될까, 그런 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고요. 한 켤레의 구두란 삶과 죽음처럼 같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건데 우리는 늘 둘 중 하나만 감각하거나 하나의 상태로서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살아 있거나 혹은 죽어 있거나. 근데 이제 “살을 꼬집어” 삶인 걸 알아챈다고 한들 죽음은 늘 내가 지르는 소리, 나의 안간힘 바깥에 존재한다는 거죠. 삶을 실감한다고 해서 죽음을 실감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부족하고 미완인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 시의 메시지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좋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시였습니다.

하재연 : 신해욱 시인은 한국어가 갖고 있는 느낌에 정밀하게 파고들어가면서 그 의미와 감각을 확장시켜나가는 방식이 늘 자기만의 독특함을 보여주는데요. 한 발 늦었다, 한국어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서부터 시가 발생을 합니다. 한 발 늦은 거니까, 두 발 중에 한 발이 늦어서 한 발만 도착한 것 같은. 한 발만 늦으면 앞서간 발이 있고, 뒤에 남겨진 발이 있을 텐데, 이 간극에서 발생하는 당혹감과 미달감이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어요. 뒷부분에 보면 구두를 닦으면서 삶이 거기에 비치는데 “탐이 난다/ 삶은 탐스럽다”라는 진술이 나옵니다. 보통 ‘탐스럽다’는 표현의 앞에 삶이 오진 않잖아요. 이런 문장을 씀으로써,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고 싶어하고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인간의 필연적인 미달함, 채워지지 않음, 결핍감 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해욱 시인 특유의 산뜻한 깊이를 보여줍니다.


3

하재연 : 더 이야기 나누고 싶은 작품들도 있습니다만, 작품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치기 전에 송승언, 김선오 시인이 최근에 창작자로서는 어떤 시간을 보내고 계신지 듣고 싶습니다. 최근 1년간 《비유》에 실린 시들을 읽으면서 느꼈던 동질감이나 이질감 같은 지점도 궁금하고요.

송승언 : 저는 일단 《비유》에 있는 많은 시들이 누가 쓴 것인지 어떤 내용인지를 다 떠나서 즐거워 보입니다.(웃음) 할 이야기들이 아직도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 특별히요. 오늘 시간상 다루지는 못했지만, 오은 시인을 보면 제가 특히나 찬탄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오은 시인에게는 ‘여전히’ 어떤 단어들을 가지고 놀고, 또 탐구하는 자세가 있잖아요? 이제 꽤 오랜 시간 시를 써오고 계심에도 여전히 말에 관해 열정적이라는 점에서 어떤 경외감까지 느끼는 면이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저는 창작의 즐거움을 많이 잃은 시기가 아닌가 싶네요.

하재연 : 최근에 책이 나왔는데 왜?

송승언 : 많은 분들 또한 그러하실 텐데, 저 또한 창작에는 어느 정도 여백이 필요하다고 보는데요. 최근 저에게는 그러한 여백이 많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이는 단지 저의 노동 때문만은 아니고, 전반적으로 피로와 자극이 많아진 시대를 살다보니 겪게 되는 문제 같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지내는 이가 저만은 아니라고 보고요. 한편 제가 느끼는 창작의 어려움이나 곤란함을 다른 분들이 잘 이겨내는 모습을 보니까 대리만족이 됩니다.(웃음)

하재연 : 다들 호수에 유유히 떠가는 백조처럼 수면 아래서는 열심히 발을 구르고 있는 것 아닐까요? 감선오 시인은 누구보다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계시니까 동질감을 느끼실 것 같은데요.

김선오 : 저는 아직 시쓰기가 제일 즐거운데요. 즐거움이 당연하게도 곤란함과 함께 오는 것 같고, 곤란함을 매번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내는 일이 시 쓰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저는 사실 시인 친구가 별로 없어요. 미술하거나 음악하거나 이런 친구들은 있는데 시 쓰는 친구들이 많이 없어서 외로울 때, 《비유》에 들어가서 나이나 연차를 떠나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동시대 작가들이 각자 치열한 고민을 하고 각자의 즐거움으로 작업을 하는 걸 보면 위안이 되기도 하고 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 같고요. 저는 사실 《비유》가 발행될 때마다 매호 거의 바로 보거든요. 매달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창작자로서도 많은 힘이 되는 것 같아요. 문예지는 아무래도 바로 보기가 어려운데, 《비유》는 접근성이 좋으니까요.

하재연 : 《비유》는 매달 조용하게 펼쳐지는 공간인데, 그 안에서도 다들 치열하게, 열도가 높게, 그러면서도 각자의 즐거움을 찾으며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유》가 지속되어온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신예작가 중심의 기획에서 세대나 범위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다음 시 특집 기획으로 ‘비인간’이라는 주제를 잡아보기도 했고요. 사실 그런 기획을 잘 안 하잖아요, 시에서는. 이런 프로젝트성 기획이 의미가 있을까 그런 고민이 들기도 하거든요. 마지막으로 《비유》라는 매체에 시인으로서, 독자로서 바라시는 게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송승언 : 주제를 던져주는 거, 저는 매우 좋은 것 같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숙제가 있어야 하고, 숙제 없으면 안 하거든요. 주제를 내어주면 주제에 맞추는 시인도 있겠지만, 주제와 달리 삐딱하게 쓰는 시인도 있을 거고…… 어쨌든 창작에 필요한 입력을 주는 거니까 시인 입장에서는 자극이 되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이런 방식의 청탁도 재미있다고 생각하고요. 또 그런 방식을 취하면 앤솔러지 느낌도 나니까 그런 점 또한 매력적이라고도 생각합니다.

하재연 : 그러면 김선오 시인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청해볼까요?

김선오 : 저도 송승언 시인님과 비슷한데요. 지면에서 주제를 던져주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이 없기에, 《비유》 같은 매체에서 그런 방식으로 간헐적으로 진행하는 것에 긍정적이에요. 주제에 따라서 시인마다 평소에 쓰던 스타일이랑 전혀 다르게 시가 나올 테니 시들이 더 다채로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비유》에서 주제 선정에 고민이 많으시겠지만 좋은 방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유》에 바라는 점은 오래오래 살아남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 정권하에서 더…… 꼭 오래 살아남아서 시를 읽고 쓰는 사람들과 작품들에 사소한 균열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면서 이런 탈권위적인 시도들을 계속해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송승언 : 진짜요. 나중에 여기에 시를 발표했던 여러 시인들 중 몇몇이 대가가 되어 있을 때 그들이 옛날에 쓴 시들을 여기에서 다시 읽을 수 있다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하재연 : 이곳이 우리 문학사 연구의 보고가 되면 좋겠죠?(웃음) 꽤 긴 시간이었는데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재밌게 흘러갔네요. ‘비유-뷰view’라는 이번 좌담은 처음 시도해본 기획이었는데요. 함께해주시고 다양한 이야기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송승언, 김선오 : 감사합니다.

*본 좌담은 2022년 7월 7일 목요일 오후 4시 연희문학창작촌(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소재)에서 진행했습니다. 좌담 내용을 총 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김선오, 송승언, 하재연

김선오: 시를 중심으로 이런저런 텍스트 작업을 하고 있다.
송승언: 우울과 농담 사이에서 끝없이 게으름을 추구하는 편.
하재연: 좋은 시를 쓰는 이들이 많다. 혼자이면서도 함께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이 매번 생소하면서 기쁘다.

2022/09/13
5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