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토리얼 연필, 혹은 바통
이하나
어떤 사람의 마음은 얼음 구멍과 같고, 그 속엔 송어가 살아요. 송어는 그 사람 뜻대로 구멍 밖으로 붙들려 나오지 않아요. 그건 송어 마음에 달렸으니까요(정은, 「달밤의 송어」).
어떤 사람은 아직 슬픈 줄도 모르고 있다가 우는 엄마를 보고 그제야 제 마음속 슬픔을 알아보기도 해요. 그러다 다른 이들 눈에 보이지 않는 외할머니의 마음을 제 안에 남몰래 받아쓰기하고요(조우리, 「아주 작아지거나 투명하거나」).
《비유》 79호에 모인 글들을 읽으며 입술을 ‘미음’으로 열어서 ‘미음’으로 닫는 단어를 소리 내어 말해보았습니다. 글 안에 담긴 ‘마음’들을 소리로 받아쓰는 동안 제 입술은 안무를 수행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이번 호 ‘비평 교환’의 「언어가 춤이 될 때: 안무적 글쓰기와 움직임의 사유」에서 김재리는 안무-텍스트(choreo-text)를 통해 글쓰기가 어떻게 안무적 실천으로 실현되는지 그 경로를 따라갑니다. 텍스트를 “‘읽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며 수행하는’” 김재리의 작업은 “몸이 텍스트를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텍스트가 그들의 몸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라는 윤상원의 목소리와 “비선형적으로. 파편적으로. 불규칙적으로. 파도처럼 출렁이며” 교차합니다. 「세상을 읽는다는 것의 자격에 대하여: 지적장애라 명명된 이들의 리터러시와 해방」에서 윤상원은 정상/비정상, 중심/가장자리로 규정할 수 없는 “각자의 불완전하고 취약한 방식대로 세상을 읽고 쓰는” 문해력에 대한 주의를 환기합니다.
이 글을 읽고 ‘해상도 높은 장면’을 펼친다면 김효나·한영현의 공동 작업 「받아쓰기」로부터 “틀린 마음 없듯이 틀린 쓰기”란 없다는 용기를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말” “입안에 넣어준 말” “있는 말”만 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받아쓰기는 ‘따라 쓰기’가 아니라 ‘이어 쓰기’여야 할 테니까요.
수직적인 받아쓰기가 아닌 수평적인 받아쓰기를 ‘통로’에 실린 「지역 여성의 삶에서 이동과 정동의 다른 차원을 열기」에서 또 한번 마주합니다. 지방 소멸이 위기라고 하지만 그곳에는 소멸되지 않은 “삶과 마음”들이 아직 있습니다. 권수빈은 지역 청년들이 감각하는 떠남과 남겨짐의 서사에 귀 기울이며 지방 소멸이라는 담론의 통치성을 청년들이 받아쓰도록 그대로 두기보다, 지역 청년의 삶을 지방 소멸 담론이 받아쓰도록 자리를 바꾸어봅니다.
“누군가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넘어 그가 살면서 경험했을 감각들을 이어 ‘사는’ 일은” 삶을 받아쓰는 한 방식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더하는 일이 아니라 덜어내는” “축조하는 대신 철거하는” 쓰기도 있고요. 최다영이 읽은 백은선 시집 『비신비』, 장은정이 읽은 송승언 시집 『시체공산주의』 리뷰는 시가 “끝내 버릴 수 없었던 속삭임 같은 작은 기도”를 각고하여 구제해냅니다.
시와 소설란에는 안태운과 진은영의 시, 김남숙과 박현옥의 소설이 도착했습니다. “심장 이슬”로 “흠뻑” 젖은 “사랑하는 이”의 “가죽구두”가 당신의 두 발 앞에 놓여 있습니다. 어린이·청소년문학란에는 “차에 혼자 남았을 때에야/ 한껏 숨을 내쉬”는 모과(김성민, 「사건의 전말」)와 “잠옷 주머니” 속의 할머니, “달밤의 송어”가 함께합니다. “코 밝은 사람”이 되어 여기 실린 기척들을 알아차려주세요.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는 마음”. 음소정의 큐레이션 「뒤돌아보는 마음」에서 “미련”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을 이제야 배웠습니다. 이번 호를 읽고 나서 “말할 수 없음, 말하고 싶지 않음, 말해도 될지 모르겠음, 말하지 않아도 충분함, 말하고 싶음, 더 말하고 싶음, 헛소리도 하고 싶”은 미련이 남는다면 좋겠습니다. “미처 꺼내지 못한 말”(김화진, 「북토크에 끼어드는 마음들」)을 기다리며 당신께 연필을 건넵니다. 여기서부터 이어 쓸 당신의 글씨체가 궁금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 슬픈 줄도 모르고 있다가 우는 엄마를 보고 그제야 제 마음속 슬픔을 알아보기도 해요. 그러다 다른 이들 눈에 보이지 않는 외할머니의 마음을 제 안에 남몰래 받아쓰기하고요(조우리, 「아주 작아지거나 투명하거나」).
《비유》 79호에 모인 글들을 읽으며 입술을 ‘미음’으로 열어서 ‘미음’으로 닫는 단어를 소리 내어 말해보았습니다. 글 안에 담긴 ‘마음’들을 소리로 받아쓰는 동안 제 입술은 안무를 수행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이번 호 ‘비평 교환’의 「언어가 춤이 될 때: 안무적 글쓰기와 움직임의 사유」에서 김재리는 안무-텍스트(choreo-text)를 통해 글쓰기가 어떻게 안무적 실천으로 실현되는지 그 경로를 따라갑니다. 텍스트를 “‘읽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며 수행하는’” 김재리의 작업은 “몸이 텍스트를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텍스트가 그들의 몸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라는 윤상원의 목소리와 “비선형적으로. 파편적으로. 불규칙적으로. 파도처럼 출렁이며” 교차합니다. 「세상을 읽는다는 것의 자격에 대하여: 지적장애라 명명된 이들의 리터러시와 해방」에서 윤상원은 정상/비정상, 중심/가장자리로 규정할 수 없는 “각자의 불완전하고 취약한 방식대로 세상을 읽고 쓰는” 문해력에 대한 주의를 환기합니다.
이 글을 읽고 ‘해상도 높은 장면’을 펼친다면 김효나·한영현의 공동 작업 「받아쓰기」로부터 “틀린 마음 없듯이 틀린 쓰기”란 없다는 용기를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말” “입안에 넣어준 말” “있는 말”만 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받아쓰기는 ‘따라 쓰기’가 아니라 ‘이어 쓰기’여야 할 테니까요.
수직적인 받아쓰기가 아닌 수평적인 받아쓰기를 ‘통로’에 실린 「지역 여성의 삶에서 이동과 정동의 다른 차원을 열기」에서 또 한번 마주합니다. 지방 소멸이 위기라고 하지만 그곳에는 소멸되지 않은 “삶과 마음”들이 아직 있습니다. 권수빈은 지역 청년들이 감각하는 떠남과 남겨짐의 서사에 귀 기울이며 지방 소멸이라는 담론의 통치성을 청년들이 받아쓰도록 그대로 두기보다, 지역 청년의 삶을 지방 소멸 담론이 받아쓰도록 자리를 바꾸어봅니다.
“누군가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넘어 그가 살면서 경험했을 감각들을 이어 ‘사는’ 일은” 삶을 받아쓰는 한 방식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더하는 일이 아니라 덜어내는” “축조하는 대신 철거하는” 쓰기도 있고요. 최다영이 읽은 백은선 시집 『비신비』, 장은정이 읽은 송승언 시집 『시체공산주의』 리뷰는 시가 “끝내 버릴 수 없었던 속삭임 같은 작은 기도”를 각고하여 구제해냅니다.
시와 소설란에는 안태운과 진은영의 시, 김남숙과 박현옥의 소설이 도착했습니다. “심장 이슬”로 “흠뻑” 젖은 “사랑하는 이”의 “가죽구두”가 당신의 두 발 앞에 놓여 있습니다. 어린이·청소년문학란에는 “차에 혼자 남았을 때에야/ 한껏 숨을 내쉬”는 모과(김성민, 「사건의 전말」)와 “잠옷 주머니” 속의 할머니, “달밤의 송어”가 함께합니다. “코 밝은 사람”이 되어 여기 실린 기척들을 알아차려주세요.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는 마음”. 음소정의 큐레이션 「뒤돌아보는 마음」에서 “미련”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을 이제야 배웠습니다. 이번 호를 읽고 나서 “말할 수 없음, 말하고 싶지 않음, 말해도 될지 모르겠음, 말하지 않아도 충분함, 말하고 싶음, 더 말하고 싶음, 헛소리도 하고 싶”은 미련이 남는다면 좋겠습니다. “미처 꺼내지 못한 말”(김화진, 「북토크에 끼어드는 마음들」)을 기다리며 당신께 연필을 건넵니다. 여기서부터 이어 쓸 당신의 글씨체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