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전제는 흔히 읽고 쓰는 행위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번 ‘비평 교환’에서 무용이론가이자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하는 김재리와 교육연구자이자 ‘특수’ 교사인 윤상원의 글은 각자의 언어를 통해,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체험된 몸’이 만들어내는 복수의 로컬 리터러시(local literacies)를 제안하며 만납니다. 이들에게 리터러시는 누구나 같은 방식으로 갖춰야 할 능력이 아니라, “각자가 다르게 읽고 다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열려 있고, 그래서 매번 다른 방식으로 살아나는” 다중적 실천으로 연결됩니다.




글을 쓴다. 읽고 쓴다는 것에 대해서.
  문학의 뜰을 거니는 이들에게 문자는 너무도 당연한 권리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일처럼 자연스럽다. 텍스트를 해체하고 조립하는 일. 의미의 심연을 탐구하는 일. 그것은 고상한 유희다. 아무도 그 자격을 묻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매일 아침 교실에 선다. 특수학교의 교실. 혹은 통합학교의 후미진 곳에 자리한 특수학급. 그곳에서 문자는 더 이상 유희가 아니다. 종종 칼이 된다. 예리한 흉기가 된다. 통행증을 쥐지 못한 자들을 가차 없이 베어내는 서늘한 권력이 된다. 한 명의 특수교사로서 나는 이 지면을 빌려 고발하고자 한다. 능력주의가 견고하게 그어놓은 선. 그 분리선의 폭력성에 대하여.
  우리는 흔히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인간 지성의 기본값이라 부른다. 문명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 조건. 하지만 이 통행증은 결코 평등하게 발급되지 않는다. 나의 책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은 존재하는가』를 관통하는 질문이 있다. 책을 쓰는 내내 멈추지 않고 던졌던 물음. ‘장애라 명명된 아이들을 사회의 변두리로 쫓아내고 배제하는 구조적 힘의 정체는 무엇인가.’
  답은 명확하다. 이 사회가 능력을 정의하는 방식이다. 자본주의와 능력주의가 결탁하여 만들어낸 가혹한 기준. 그리고 그 중심에, 몹시 낡고 앙상한 전통적인 ‘문해력(literacy)’의 잣대가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다.


1. 문해력이라는 이름의 기만

학교가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문해력은 차갑다. 지독하게 앙상하다. 오직 ‘정상성’을 기준으로 촘촘하게 설계되었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 먹으로 인쇄된 글씨를 눈으로 본다. 낱자를 결합하여 단어를 식별한다. 자음과 모음의 음운 규칙을 해독한다. 정해진 문법과 띄어쓰기에 맞추어 정답을 토해낸다. 이른바 ‘기본 기술(basic skills)’이다. 서구의 사회, 그리고 이곳 한국의 굳어진 교육 체계에서 문해력은 오직 이 형태로만 고정되어왔다.1)
  이 엄격하고 폭력적인 잣대에 미달하는 존재들이 있다. 아니, 교실에는 그런 존재들이 넘쳐난다. 학교는 그들에게 신속하고 무자비하게 낙인을 찍는다. 학습장애. 발달장애. 지적장애.나는 문지기였다. 이 견고한 정상성의 규범에 들어맞지 않는 아이들을 색출하고 걸러냈다. 특수학급이라는 외딴섬으로 그들을 유배 보냈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는 체제를 수호하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이었다. 교육이라는 선의로 교묘하게 포장된, 폭력의 합법적 집행자.
  매 학기가 시작되면 아이들은 진단 평가용 검사지 앞에 불려와 앉는다. 단어를 읽어내야 한다. 철자를 맞추고 무의미한 소리를 내야 한다. 실패는 이미 검사지를 인쇄할 때부터 예정되어 있다. 개별화된 교육계획(individualized education plan)을 수립한다는 관료적인 명목. 책상 위에는 아이들의 구체적인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무맥락적인 단어 카드와 낯선 문장들이 차갑게 놓인다.
  아이들은 더듬거린다. 허공을 맴돈다. 이내 침묵한다.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문다. 그들은 문자를 배우기도 전에 수치심을 먼저 배운다. 열등감을 뼛속 깊이 새긴다. 교육적 진단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 합법적인 린치의 결과는 늘 같다. ‘기본선(baseline) 이하.’ 처참하고 모욕적인 성적표뿐이다.
  전통적인 교육의 시각은 자율적 모델(autonomous model)에 철저히 기반한다. 이 오만한 모델은 문해력을 상황이나 사회적 맥락과 완전히 유리된 것으로 취급한다. 오직 개인의 머릿속에서, 뇌 신경망에서만 일어나는 기계적인 인지 해독 과정으로 간주한다. “문해력의 정의는 늘 논쟁의 대상이었으며, 그 의미는 단순한 정보의 ‘해독’에서 점차 더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기술과 이해의 영역으로 변화해왔다.”2) 세계의 학문적 조류는 분명하게 변하고 있다. 하지만 견고한 학교 사회와 특수교육의 현장은 여전히 과거의 유령에 사로잡혀 있다.
  아이가 글을 읽지 못한다. 원인은 무엇인가. 학교는 그 이유를 철저히 학생 개인의 결함에서 찾는다. 뇌의 생물학적 기능 저하. 지능 지수의 부족. 전형적인 의료적 관점이다. 이 차가운 시각 속에서 아이들은 영원히 ‘고장 난 기계’다. 사회나 환경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오직 수술하고 교정해야 할 대상은 아이의 머릿속뿐이다. 그들이 낯선 문장 앞에서 땀을 쥐고 더듬거릴 때마다, 사회는 그들의 ‘무능함’을 확인하며 안도한다. 능력주의 사회의 정당성을 지탱하기 위한 완벽한 희생양. 그것이 학교가 그들을 다루는 방식이다.


2. 랜더스 구단의 붉은색과 편의점의 참치마요

철수(가명)가 그랬다. 하얀 진단 검사지 위에서 그는 완벽하고 순수한 문맹이었다. 수용 언어 검사, 기초 읽기 검사, 지능 검사. 학교가 들이민 모든 지표가 바닥을 뚫고 내려갔다. 기본선 이하의 이하. 학교의 시선에서 그는 ‘교육이 불가능한 아이’였다. 평생 지루한 낱말 카드 훈련이나, 직업재활이라는 이름의 스티커 붙이기 같은 단순 작업만 무한히 반복해야 하는 수동적인 투명인간.
  하지만 교실 문을 열고 나간 세계는 달랐다. 철수는 프로야구 SSG 랜더스 구단을 열광적으로 좋아했다. 붉은색과 흰색이 뒤섞인 유니폼. 타격의 소리. 어느 날 그가 구단의 대형 포스터를 조심스레 돌돌 말아 학습도움실로 가져왔다. 책상 위에 포스터가 펼쳐진 순간, 상황이 완전히 역전됐다. 낱말 카드 앞에서는 단 한 글자도 읽지 못하던 철수가, 포스터 안의 날카로운 로고를 정확히 읽어냈다. 선수들의 이름이 적힌 글자들의 형태와 윤곽을 인식했다. 유니폼의 색깔을 명확히 구별했다. 포스터 속 엠블럼의 위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크다’ ‘작다’ ‘위에 있다’ ‘아래에 있다’는 복잡한 공간적 개념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짚어냈다. 나아가 그 이미지를 매개로 짧지만 분명한 문장들을 뱉어냈다. 그는 결코 글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텍스트를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일상적인 삶의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그는 너무도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자신만의 세상을 읽어내고 있었다.
  민수(가명)의 사정도 철수와 다르지 않았다. 진단평가를 위해 책상에 놓인 표준화된 단어 리스트 앞에서는 굳게 입을 닫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세 개의 단어만을 간신히 소리 내어 쥐어짜 냈을 뿐이다. 하지만 금요일 오후, 동네 치킨집 메뉴판 앞에서는 달랐다.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CD 커버 앞에서도, 흠모하는 배우의 이름이 적힌 잡지 앞에서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십여 개의 단어를 단숨에 짚어내며 술술 읽어내렸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민수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 인터넷 검색창의 아이콘. 맥락과 시각적 단서들. 민수는 그것들을 기막히게 조합하여 활용했다. 유튜브를 능숙하게 검색했다. 자신이 원하는 영상을 기어코 찾아냈다. 롯데리아에서는 키오스크의 복잡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뚫고 햄버거를 주문했다. 모바일 메신저의 수많은 대화창 목록 속에서 친구의 프로필 사진을 단숨에 찾아내어, 텍스트 대신 자신의 기분을 가장 잘 표현하는 정확한 이모티콘을 골라 전송했다.
  이것은 무엇인가? 교실 밖의 자생적이고, 지역적이며,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발명된 문해력. 이른바 ‘로컬 리터러시(local literacies)’다. 특정한 장소, 국지적인 맥락에서 강력한 생명력을 발휘하는 이 다차원적인 문해력은 결코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정당하다. 나아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이고 고도의 지성이다.3)
  편의점 매대 앞을 보라. 수십 가지의 삼각김밥이 진열되어 있다. 그 혼란스러운 시각적 자극 속에서 포장지의 미세한 패턴과 참치마요 특유의 노란색 띠를 구별하여 정확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골라내는 일. 지하철 환승역의 복잡한 지하 세계에서 1호선의 남색과 4호선의 하늘색을 구별하고, 노선도의 꺾인 형태를 암기하여 밖으로 통하는 출구를 찾아가는 일. 스마트폰 화면에서 톱니바퀴 모양의 픽토그램을 눌러 설정 화면에 진입하는 일. 이것은 모두 고도의 ‘읽기’다. 삶을 억척스럽게 살아내는 자들의 위대한 실천적 문해력이다. 문자와 기호와 색채가 결합된 다중양식 리터러시.
  그러나 능력주의와 학력주의의 차가운 성벽에 갇힌 학교 사회는 이를 리터러시로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교실 책상에 꼿꼿이 앉아 국어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것.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맞게 백지에 반듯한 글을 써내려가는 것. 오직 그것만이 유일하고 정상적인 읽기라 맹신한다. “리터러시는 추상적인 기술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제도 속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사회적 실천이다.”4)
  학교가 철수와 민수의 놀라운 읽기를 ‘읽기’로 인정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인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단지 학교라는 낡은 제도가, 정상으로 간주되는 이들 중심의 거만한 사회가, 그들의 다중양식적인 삶의 텍스트를 무가치한 것으로 폄하하고 짓밟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3. 빼앗긴 삶의 세계

영수(가명)는 화를 냈다. 특수교사인 내가 내민 책을 거칠게 거부했다. 유아용 파닉스 교재. 알록달록한 강아지와 사과 그림이 그려진 낱말 카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책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아기들이나 보는 거잖아요.” 열아홉 고등학생인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서글프고 정당한 분노였다. 그의 구체적인 삶의 경험, 청년기에 접어든 그의 끓어오르는 욕망과 아무런 접점이 없는 유치한 종이 쪼가리들.
  우리는 모두 문해적 정체성(literate identity)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서 파일처럼 뇌에 저장되는 것도 아니다. 개인의 과거 지식, 축적된 삶의 희로애락, 그리고 일상 속에서 타인과 관계 맺어온 문해적 실천들로 겹겹이 층을 이루며 구성된다.5)
  영수에게도 눈물겹고 생생한 삶의 세계(life worlds)가 있었다. 동네를 걷고, 음악을 듣고, 텔레비전을 보며 누적해온 청소년기의 세계. 하지만 학교가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학교 중심의 세계(school-based worlds)는 그의 펄떡이는 세계와 거칠게 충돌하며 그를 무참히 짓밟았다.6) 학교는 영수의 문해력을 철저한 실패로, 구제 불능으로 규정했다. 영수는 교실 안에서 늘 보호받아야 할 ‘어린아이’ 취급을 받았다. 그는 특수학급이라는 좁고 격리된 공간에 갇혔다. 정상으로 간주되는 청년의 지능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평생 무의미한 낱말 카드 맞추기나 색칠 공부 따위를 강요받았다. 영수의 문해적 정체성은 그렇게 서서히, 그러나 아주 확실하게 무너져 내렸다. 글을 모르는 자. 영원히 미성숙한 자. 돌봄의 대상. 영원한 이등 시민. 그것이 학교가 그에게 배정한 고정된, 빠져나올 수 없는 자리였다.
  영국의 학자 스트리트7)는 리터러시를 설명하며 이데올로기적 모델(ideological model)을 주창했다. 문해력은 결코 가치 중립적인 순수한 도구가 아니다. 철저한 권력이다. 지배 계급—학교, 국가, 자본, 비장애 중심주의 사회—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설정한 특정한 텍스트 해독 능력만이 ‘진짜 리터러시’로 공인받는다.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들은 모조리 미개한 야만이나 병리적 결핍으로 치부되어 배제된다.
  지적장애라 명명된 이들이 일상에서 겪는 숱한 문해의 어려움, 그 모멸감과 고통은 그들 개인이 짊어져야 할 업보가 아니다. 원인은 그들의 뇌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 복잡하고 관료적인 문자로만 정보를 독점하고, 그들이 세상을 짚어내고 읽어내는 다양한 방식을 끝끝내 인정하지 않는 차별적인 사회의 거대한 책임이다.8) 문해의 실패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순간, 비장애 중심의 사회는 완벽한 면죄부를 얻는다. 그들은 안온하게 그들의 세계를 유지한다. 나는 영수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의 분노가 잿빛 체념으로 식어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특수교육의 관행인 전통적인 읽기 교재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대신 대중가요의 가사를 큼지막한 글씨로 인쇄했다. 교실에 음악을 틀었다. 그가 매일 쉬는 시간마다 이어폰으로 몰래 듣던, 그가 열광하던 여자 아이돌 가수의 노랫말.
  형광펜을 쥐여주고 그 가사들을 함께 따라가며 읽었다. 그제야 영수의 굳게 닫혔던 표정이 서서히 풀렸다. 텍스트에 몸을 기울여 다가왔다. 입술을 달싹이며 활자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눈빛이 살아났다. 삶의 맥락, 욕망이 담긴 문자는 맹렬한 힘이 있었다. 그들의 생생한 욕망, 슬픔, 관심사를 철저히 배제한 탈맥락적인 리터러시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억압이자 조용한 학살일 뿐이다.


4. 무한히 뻗어나가는 뿌리줄기의 읽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들의 이질적인 읽고 쓰기를. 정상으로 간주되는 이들의 오만한 잣대를 미련 없이 버려야 한다. 위로 솟는 나무가 아니라, 땅 밑으로 무성하게 얽히는 뿌리줄기를 생각해야 한다.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창한 ‘리좀(Rhizome)’의 개념을 교실로 소환할 때다.
  전통적인 학교의 교육은 철저하게 수목형(arborescent)이다. 땅속에 하나의 굵은 뿌리를 깊게 박고, 위로 단단한 기둥을 세우고, 거기서 가지가 정해진 순서대로 반듯하게 뻗어 나간다. 위계적이다. 직선적이다. 예외나 일탈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기역 니은을 먼저 완벽히 떼야 한다. 그다음 쉬운 단어를 읽는다. 그다음 짧은 문장을 읽는다. 마지막으로 복잡한 단락을 이해하고 요약한다. 이 경직되고 숨막히는 선형적 모델 안에서, 지적장애라 명명된 아이들은 영원히 굵은 기둥으로 자라지 못하는 불량품에 불과하다. 잔뿌리 단계에 영구히 고착된 미성숙한 존재. 영원히 결핍을 안고 사는 불완전한 자들.
  그러나 리좀은 완전히 다르다. 중심이 없다. 시작도 끝도 없다. 위계도 없다. 잡초처럼, 고구마 줄기처럼 사방으로 자유롭게 뻗어나간다. 중간에 칼로 끊어지면, 그 끊어진 단면에서 다른 줄기와 예측 불가능하게 접속하여 다시 맹렬하게 자라난다. 무한한 가능성의 네트워크다. 지적장애라 명명된 이들의 문해력이 바로 이 자유로운 리좀과 꼭 닮아 있다.
  민수가 치킨집 간판의 이미지를 더듬거리며 읽다가, 문득 아이돌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고, 다시 주머니 속 스마트폰의 설정 아이콘으로 비약적으로 도약하듯. 이들의 문해력은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폭발하고 연결된다. 정해진 순서도 없고 문법적 규칙도 파괴된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한 의미를 창출해낸다.
  이는 한계와 기능 장애라는 기존 특수교육의 시각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고착된 무능력이 아니다. 끊임없이 세계와 접속하려는 무한한 생성(becoming)의 역동적인 과정이다.9) 위계적이고 폭력적인 학교의 잣대로 그들에게 “너는 아직 글을 모른다”고 단정 짓는 것. “너는 기본선에 미달했다”고 낙인찍는 것. 그것은 그들의 끝없는 생성의 선을 날카로운 가위로 무참히 싹둑 잘라버리는 짓이다.
  그들은 매 순간 새로운 텍스트와 접속하고 있다. 비선형적으로. 파편적으로. 불규칙적으로. 파도처럼 출렁이며. 그러나 세상 그 누구보다 온전하게 세상을 향해 뜨거운 촉수를 뻗고 있다. 우리는 이 리좀적인 로컬 리터러시를 동정이나 시혜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위대한 생존의 방식으로 경이롭게 발견해야 한다. 그 수많은 접속의 선들이 사회의 혐오와 무관심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끊어지지 않게 결사적으로 지지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특수교사는 누구인가? 학생의 인지적 결함을 진단하고 등급을 매겨 분류하는 판사가 아니다. 학생이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동원하는 다양한 양식들—어설픈 그림, 상징, 반복되는 몸짓, 단편적인 이미지—을 세심하게 번역하고, 그들을 더 넓은 세상의 텍스트와 안전하게 이어주는 연결자, 억압받는 리좀을 키워내는 정원사이자 코디네이터가 되어야 한다.


5. 현상학적 몸, 세계와 만나는 고유하고 정당한 통로

인간의 몸은 단순히 세포와 장기와 뼈로 이루어진 생물학적 고깃덩어리가 아니다. 세상을 가장 먼저 만나는 최전선의 팽팽한 통로다. 손상에 대한 현상학적 사회학(phenomenological sociology of impairment). 현상학은 몸을 해부학적 객체로만 취급하지 않는다. 몸은 세계를 지향하고, 감각하고, 의미를 구성해내는 펄떡이는 주체다.10) 생물학적 체화(embodiment)는 결코 진공 상태에 고립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한 사회의 문화적 신념, 편견, 차별적 가치관과 쉴 새 없이 상호작용하며 비로소 ‘장애’라는 현상을 만들어낸다.11)
  지적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의 경우를 직시해보자. 그들의 뇌와 신경계 구조는 정상이라 간주되는 이들과 다르게, 아주 이질적으로 세상을 인식할 뿐이다. 그들만의 고유한 리듬과 파장으로 밀려오는 세계의 빛과 소리를 읽어들인다. 이것은 메스로 도려내거나 약물로 고쳐야 할 질병이 아니다. 결함도 아니다. 엄연한 실존적 차이이며, 그들의 ‘체험된 몸(lived body)’이 세계와 관계 맺는 지극히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그들이 텍스트를 해독하는 방식은 자본주의 사회의 효율적인 속도에 비해 답답할 정도로 느릴 수 있다.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독특하고 기이해보일 수 있다. 활자에 집중하지 못하고 몸을 흔들거나, 종이의 냄새를 맡거나, 엉뚱한 맥락의 단어를 불쑥 내뱉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느리고 독특한 읽기는 그 자체로, 그들의 ‘체험된 몸’이 세계의 의미를 힘겹게 구성해내는 눈부시고 정당한 실천이다.
  그러나 학교는, 그리고 효율에 미친 사회는 이 고유한 감각의 통로를 억지로 틀어막는다. 오직 하나의 방식, ‘비정상’을 걸러내기 위해 교묘하게 고안된 정상으로 간주된 이들의 텍스트만을 폭력적으로 강요한다. 그 단일하고 오만한 표준화의 폭격 속에서 그들의 몸은 속수무책으로 무능력한 것으로 전락한다. 비정상의 몸으로 낙인찍혀 격리된다.
  하지만 틀렸다. 철저하게 틀렸다. 그들의 몸은 단 한 번도 고장 난 적이 없다. 단지 세상의 차가운 텍스트가,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심각하게 오염된 활자들이 그들의 다채로운 몸을 거부하고 차갑게 튕겨내고 있을 뿐이다. 몸이 텍스트를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텍스트가 그들의 몸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6. 앓음을 공유하는 연대와 구체적 해방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절망적인 텍스트의 전쟁터에서 대답은 단순하고 단호해야 한다. 아이들을 뜯어고치려는 오만과 교만의 시도를 즉각 멈춰야 한다. 반대로, 아이들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이 세상을, 물리적 환경을, 텍스트의 굳건한 장벽을 망치로 부수고 바꿔야 한다.새로운 문해력 연구(New Literacy Studies, NLS)의 철학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해온 폭력적인 문해 실천과 학교라는 제도의 억압적인 틀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교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거리로, 편의점으로, 지하철로. 다양한 일상의 맥락에서 그들이 발휘하는 국지적이고 지역적인 문해력을 겸허하게 탐구하고 인정해야 한다.12) 이를 위해 연구자와 교사, 사회는 지식인의 허울을 벗고 ‘참여적 연구(participatory research)’의 태도를 철저히 체화해야 한다.
  장애라 명명된 이들을 실험실의 흰 쥐처럼, 현미경 아래의 세포처럼 다루며 점수를 매기지 말라. 그들은 관찰과 치료의 객체가 아니다. 우리의 시대를 함께 구성하는 동등한 파트너다.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야 한다. 그들의 관점을 긍정해야 한다.13) 그들이 일상에서,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왁자지껄한 식당에서 어떻게 타인의 문자를 훔쳐보고 읽어내는지, 어떤 색깔과 상징을 통해 자신만의 의미 그물을 짜내는지 곁에서 가만히, 오래도록 지켜봐야 한다.
  “힘든 장애 학생 돌보느라 고생이 많지?” 일반 학교 동료들이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나에게 던지던 이 시혜적이고 얄팍한 동정 어린 질문은 완벽한 기만이다. 동정은 필요 없다. 질문은 완전히 뒤집혀야 한다. “이 아이가 교실의 텍스트를 해독하고 세계와 소통할 수 있도록, 도대체 내가(일반교사, 학교장, 그리고 이 사회의 시스템이) 가진 기득권의 무엇을 허물고 바꿔야 할까.”
  구체적인 해방의 도구가 필요하다. 그림이 필요하다. 직관적인 픽토그램이 필요하다. 문학 웹진 《비유》의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단어일지 모른다. ‘읽기 쉬운 글(Easy-to-Read)’. 이것은 비유하자면 텍스트의 문턱을 완전히 평평하게 낮춘 언어다. 한번 주변을 둘러보라. 복잡하게 얽힌 거미줄 같은 버스 노선도.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한 관공서의 안내문. 함정이 도사린 은행의 대출 약관들. 비유와 은유, 어려운 한자어로 점철된 정치인들의 선거 공보물. 이 활자들은 지독하게 거만하다. 지식인과 정상이라 간주된 이들의 권력을 과시하는 언어다. 이 거만한 활자의 옹벽이 지적장애라 명명된 아이들을 철저한 문맹의 감옥으로 밀어 넣는다. 정보를 차단하여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한다.
  해체해야 한다. ‘읽기 쉬운 글’이 공공의 영역에 도입되어야 한다. 누구나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상어. 군더더기 없이 짧고 명징한 단문. 활자의 압박감을 덜어주는 시원한 여백. 그리고 의미의 이해를 즉각적으로 돕는 명확한 사진과 그림들. 지식인들의 허영과 수사학이 걷힌, 밑바닥까지 투명하게 비치는 쉬운 언어가 공공기관과 일상에 법적으로 강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복잡한 서류를 읽지 못해 기초생활수급에서 누락되는 굶주린 이들. 근로 계약서를 이해하지 못해 짐승처럼 노동을 착취당하는 이들을 구출하는 구명조끼다.
  침묵을 강요당하는 이들에게는 다른 방식의 목소리가 쥐어져야 한다. ‘보완대체의사소통(AAC, Augmentative and Alternative Communication)’. 이 역시 낯설 것이다. 세상에는 뇌성마비나 중증 발달장애라 명명된 이들 중 구강 구조적 차이로 인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머릿속의 생각과 단어가 혀끝에서 맴돌다 속절없이 흩어지는 이들. 그들의 침묵은 결코 내면에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텅 빈 것이 아니다. 세상이, 정상이라 간주된 이들의 귓바퀴가 그들의 낯선 주파수를 수신할 능력이 없을 뿐이다.
  그래서 도구가 필요하다. 휠체어를 의지해 이동하듯 언어를 의지할 기기. 손가락으로 화면의 그림을 누르면 기계가 대신 명료한 음성을 내어주는 태블릿 PC. 신체를 움직일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시선의 미세한 머무름을 추적해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주는 안구 마우스. 눈빛과 미세한 턱의 움직임만으로도 감정을 통역해 주는 투명한 의사소통 판.
  이 대체된 언어들, 목소리를 보완하는 기기들은 불쌍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수혜나 자선이 아니다. 휠체어를 탄 이들의 이동권을 위해 건물 입구에 물리적인 경사로를 설치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듯, 인지적 다양성과 의사소통의 자유를 누려야 할 시민을 위해 마땅히 깔아야 할 ‘인지적 경사로’다. 숨을 쉬듯 자유롭게 텍스트를 생산하도록 돕는 국가의 의무다.
  더불어 ‘특수교육’이라는 거대한 분리주의적 성벽을 해체해야 한다. 특수학급이라는 고립된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기계적인 낱말 맞추기와 선 긋기 훈련은 삶이 아니다. 진짜 리터러시는 사람과 살을 부대끼고 갈등하며 발생한다. 지적장애라 명명된 아이들은 정상으로 간주된 아이들과 섞여 앉아야 한다. 소외되지 않고 교실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통합학급의 소란스러운 교실에서 그날의 급식 식단표를 침을 튀기며 함께 읽어야 한다. 체육대회의 현수막 문구를 함께 고민하고 색칠해야 한다. 쉬는 시간에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 스마트폰 유튜브를 함께 검색하며 웃어야 한다. 일상적인 삶의 텍스트를 나눌 때, 타인과 온기를 나누며 눈을 맞출 때 비로소 펄떡이는 살아있는 문해력이 획득된다.
  성인기 평생교육의 지형도 완전히 뒤집혀야 한다. 학교를 졸업한 발달장애라 명명된 청년들의 삶은 참담하다. 직업재활시설이나 주간보호센터라는 이름의, 사회와 격리된 현대판 수용소에 갇힌다. 볼펜을 조립하거나 상자에 스티커를 붙이는 극도의 단순 노동에 내몰린다. 문해력 교육은 스무 살이 넘어서도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의 동화책 읽기에 영원히 정지되어 있다. 그들에게도 성인으로서의 피 끓는 욕망이 있다. 노동하여 돈을 벌고 싶고, 이성(혹은 동성)과 연애를 하고 싶고, 주말엔 영화를 보고 싶어 한다. 술을 마시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대중음악의 가사. 인터넷 뱅킹 앱의 비밀번호 입력창. 영화 예매 사이트의 좌석표. 취업을 위한 이력서의 빈칸. 성 지식을 담은 안내문.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욕망과 정면으로 맞닿은 텍스트를 들이밀고 읽게 해야 한다. 이 무거운 책임은 특수학교의 문턱을 넘어, 지역사회의 평생교육기관과 시민 사회 전체가 전적으로 감당해야 한다.


7. 에필로그: 텍스트의 옹벽을 허물며, 연대의 읽기를 향해

대학 시절, 시각장애라 명명된 동기들과 좁은 기숙사 골방에 모여 밤을 새우던 기억을 서랍 속에서 꺼낸다. 우리는 읽지 못했다. 두꺼운 전공 서적 앞에서 무력했다. 과제를 제때 수행하지 못했다. 좌절했다. 점자 교재가 턱없이 부족해서, 강의실에 수어 통역사가 배치되지 않아서. 매일 밤 우리는 우리의 무능력을 탓하며 괴로워했다. 내가 비정상이라서, 내 몸이 망가져서, 내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아서 이 오만한 세상을 읽지 못하는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다. 우리 자신을 혐오했다.
  하지만 수많은 대화와 토론, 뜨거운 눈물 끝에 우리는 마침내 깨달았다. 우리의 결함이 아니었다. 세상의 결함이었다. 신체적, 인지적 차이를 지닌 이들을 철저히 배제한 채 오직 엘리트 정상이라 간주된 이들만을 위해 견고하게 설계된 대학의 시스템. 그 오만하고 폭력적인 비장애 중심주의가 진짜 문제였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숨 막히던 골방의 공기를 뚫고 우리를 덮치던 그 거대한 해방감. 전율. 그것이 내가 내 인생에서 경험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진짜인 ‘읽기’였다. 세상이 우리 이마에 낙인처럼 찍어놓은 ‘비정상’이라는 폭력적인 텍스트를 벅벅 찢어버린 날이었다. 억압의 사회 구조를 새롭게 해독해낸, 실존의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문학이 무엇인가? 활자의 이면에 교묘하게 숨겨진 인간의 깊은 고통과, 철저히 외면받는 시대의 진실을 끈질기게 들여다보는 치열한 행위가 아닌가. 그렇다면 지적장애라 명명된 이들의 기각된 리터러시를 고민하는 것 역시, 이 혐오의 시대에 가장 깊고 도덕적인 의미를 지닌 문학적 실천일 것이다.
  함석헌 선생이 생전에 말씀하셨다. ‘앎’은 ‘앓음’에서 온다고.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곧 앓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의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을 수반한다. 나와 전혀 다른 방식의 인지 구조를 지닌 이들. 느리게 걷고, 부단히 손끝으로 허공을 더듬으며, 엉뚱하게 세상을 짚어내는 이들. 그들이 세계를 읽어내는 그 낯설고 이질적인 방식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기존에 종교처럼 굳게 믿어왔던 정상성의 규범을 산산조각내는 고통을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
  “야, ADHD 지나간다.” 복도에서 아이들은 특수학급 친구의 이름 대신 폭력적인 정신의학적 병명으로 그를 낄낄대며 부른다. 교사들은 향정신성 약물을 처방받아 오라며 부모를 압박하여 그들의 튀는 행동을 잠재우려 한다. 왜인가. 피하려는 것이다. 나와 다른 존재가 뿜어내는 그 불편함을. 나를 성찰해야 하는 그 앓음을 회피하려는 비겁한 기만이다.
  우리는 도망치지 말고 견뎌야 한다. 직면해야 한다. 그들의 통제되지 않는 거친 몸짓. 정제되지 않아 날 선 파편 같은 언어들. 비문(非文)처럼 허공에 흩어지는 그 기이한 행동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든 세계의 텍스트와 접속하고자 안간힘을 쓰며 내미는 그 간절하고 축축한 손길을 읽어내야 한다. 비정상의 낙인을 온몸으로 견디며, 고립된 몸으로 매 순간 세계와 부딪히며 억척스럽게 써 내려가는 실존의 텍스트. 땀 냄새 나는 그들의 생생한 삶의 텍스트.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 기각할 것인가, 포용할 것인가? 그것이 진정한 연대의 시작이자 끝이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각자의 불완전하고 취약한 방식대로 세상을 읽고 쓰는 위태로운 존재들이다. 지적장애라 명명된 나의 상처 입은 학생들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철수가 땀을 쥐며 더듬거리며 읽어내는 붉은색 랜더스 포스터와, 민수가 편의점 매대에서 조심스레 집어 든 삼각김밥의 노란색 띠, 그리고 영수의 스마트폰 화면 위에서 경쾌하게 춤추는 아이콘들은 위대한 문학이다. 셰익스피어의 웅장한 희곡만큼이나 그들의 눈물겨운 실존을 증명하는 무겁고 숭고한 텍스트다.
  이 다양하고 종잡을 수 없이 뻗어나가는 리좀적인 리터러시의 울창한 숲을, 정상성이라는 이름의 폭력적인 불도저로 밀어버리지 않고 함께 가꾸어가는 것. 각자의 속도와 고유한 빛깔로 세상을 당당하게 읽어낼 자격을 복원해주는 것. 누구도 타인의 읽기를 검열하지 않는 세상. 그것이 오늘날 능력주의와 차별, 혐오의 시대를 위태롭게 살아가는 우리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치열하게 써내려가야 할, 인류에게 남은 마지막 해방의 서사다.

윤상원

나는 교실에 선다. 시각장애라 명명된 한 특수교사다. 정상성이라는 거대한 잣대가 지배하는 학교, 그 가장자리에서 배제된 아이들을 매일 만난다. 능력주의가 그어놓은 잔인한 선을 목격한다. 지적장애라 명명된 이들이 고립된 몸으로 겪어내는 실존의 고통, 그리고 그들이 억척스럽게 써 내려가는 다채로운 삶의 텍스트를 읽어내려 분투하고 있다. 결함을 진단하고 아이들을 분리하는 체제의 문지기가 되기를 거부한다. 대신, 세상의 모든 이들이 각자의 고유한 속도와 빛깔로 세상을 당당하게 읽어낼 자격을 복원하는 일에 마음을 쏟고 있다. 저서로 평등한 분리 교육의 허상을 고발한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은 존재하는가』(교육공동체 벗, 2023), 『특수에서 보편으로: 통합교육에 대한 급진적 제안서』(교육공동체 벗, 2025)가 있다.

2026/05/06
79호

1
David S. Katims, “Literacy Instruction for People with Mental Retardation: Historical Highlights and Contemporary Analysis,” Education and Training in Mental Retardation and Developmental Disabilities 35, 2000, pp. 3–15; Uta Papen, Adult Literacy as Social Practice, London: Routledge, 2005.
2
Michele Lonsdale and Doug McCurry, Literacy in the New Millennium, Adelaide: NCVER, 2004, p. 5.
3
Ibid.
4
Mary Hamilton, “Expanding the New Literacy Studies: Using Photographs to Explore Literacy as Social Practice,” Situated Literacies: Reading and Writing in Context, edited by David Barton, Mary Hamilton and Roz Ivanic, London: Routledge, 2000, p. 16.
5
Lesley Bartlett and Dorothy Holland, “Theorizing the Space of Literacy Practices,” Ways of Knowing 2, 2002, pp. 10–22.
6
Bill Cope and Mary Kalantzis, Multiliteracies: Literacy Learning and the Design of Social Futures, Melbourne: Macmillan, 2000.
7
Brian Street, Literacy in Theory and Practic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4.
8
Michele Lonsdale and Doug McCurry, Ibid.
9
Margrit Shildrick and Janet Price, “Deleuzian Connections and Queer Corporealities: Shrinking Global Disability,” Rhizomes 11/12, 2005/2006. 바로가기
10
Kevin Paterson and Bill Hughes, “Disability Studies and Phenomenology: The Carnal Politics of Everyday Life,” Disability & Society 14, 1999, pp. 597–610. 바로가기
11
Bill Hughes and Kevin Paterson, “The Social Model of Disability and the Disappearing Body: Towards a Sociology of Impairment,” Disability & Society 12, 1997, pp. 325–340. 바로가기
12
James Gee, “Socio-cultural Approaches to Literacy (Literacies),” Annual Review of Applied Linguistics 12, 1991, pp. 31–48; Brian Street, “Social Literacies,” Encyclopedia of Language and Education Volume 2: Literacy, edited by Viv Edwards and David Corson, Netherlands: Kluwer Academic Publishers, 1997, pp. 131–141.
13
Jan Walmsley, “Inclusive Learning Disability Research: The (Nondisabled) Researcher's Role,” British Journal of Learning Disabilities 32, 2004, pp. 65–71.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