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교환
언어가 춤이 될 때
안무적 글쓰기와 움직임의 사유
문학의 전제는 흔히 읽고 쓰는 행위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번 ‘비평 교환’에서 무용이론가이자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하는 김재리와 교육연구자이자 ‘특수’ 교사인 윤상원의 글은 각자의 언어를 통해,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체험된 몸’이 만들어내는 복수의 로컬 리터러시(local literacies)를 제안하며 만납니다. 이들에게 리터러시는 누구나 같은 방식으로 갖춰야 할 능력이 아니라, “각자가 다르게 읽고 다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열려 있고, 그래서 매번 다른 방식으로 살아나는” 다중적 실천으로 연결됩니다.
이 글은 안무-텍스트(choreo-text)로 제안되는 춤의 형식을 통해 글쓰기가 어떻게 하나의 안무적 실천이 될 수 있는지를 다룬다. 1990년대 컨템퍼러리 댄스에서 텍스트는 춤을 기록하거나 설명하는 보조적인 수단을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자 실천으로 진화했다.1) 안무가들은 이전까지 춤을 환상이나 이미지 속에 머무르게 하며 비가시적인 아우라에 힘을 부여해온 관습에서 벗어나 텍스트라는 실증적인 재료를 통해 춤을 읽기 가능한 대상으로 다루며, 누구라도 접근할 수 있는 ‘쓰기’의 문화를 제안했다.2) 작가와 공연자는 물론 관객까지 스코어를 작성하고 해석하는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안무의 저자성과 소유권이라는 고착된 개념에도 의문이 던져졌다. 이러한 안무와 텍스트의 연결은 움직임이 거세된 지적 유희나 ‘춤이 없는 춤’이 아닌, 안무의 대상이 되었던 신체의 물리적 궤적 너머로 춤을 확장하기 위한 예술의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언어와 텍스트가 주요 매체가 되는 안무 작업 사례를 중심으로 글과 언어, 읽기와 쓰기의 문학적 실천이 ‘안무’라는 기술을 경유할 때, 어떻게 관념의 영역을 넘어 신체적 경험과 감각의 층위를 획득해가는지를 살핀다.
언어의 신체성
안무가 엘리나 피리넨의 〈나에게 속삭여줘, 쥬세피나〉는 팬데믹으로 무대가 사라진 시기에도 안무적 실천을 멈추지 않기 위해 ‘텍스트’라는 매체를 선택하며 고안되었다. 이 작업은 서사나 정보를 전달하는 글쓰기의 체계를 따르지 않는다. 대신 언어를 통해 예술적 사건을 발생시키며, 글을 읽는 행위 안에서 춤을 상상하고 감각하게 하는 ‘환영적 안무 텍스트(choreo-phantasmatic text)’의 성격을 띤다.4) 여기서 텍스트는 의미를 선형적으로 전달하기보다, 반복과 간격, 지시와 전환의 패턴으로 나열된다. 이러한 배열은 독자의 읽기 행위를 하나의 리듬으로 만들고 읽는 몸이 호흡을 멈추고 되짚는 과정 자체를 수행으로 전환시킨다. 다시 말해, 이 텍스트는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신체(soma)와 정신(psyche)의 관계를 오가며 독특한 언어의 경로를 형성한다. 언어는 더 이상 추상적 의미의 전달 체계에 머무르지 않고, 읽는 몸 안에서 시간과 강도, 긴장과 이완의 감각으로 번역된다.나는 쥬세피나가 우리를 떠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나는 쥬세피나가 우리를 떠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
당신이 이 예감을 정말로 믿게 하기 위해, 나는 이 문장을 마흔 두번 반복합니다.―엘리나 피리넨, 〈나에게 속삭여줘, 쥬세피나〉3)
피리넨은 이 작업을 통해 텍스트가 기록을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안무적 장치’가 될 수 있는지를 실험한다. 이는 로고스의 질서 아래 놓인 정돈된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는 언어가 지닌 불안정한 물질성과 정동적 밀도를 드러내며, 그것을 안무의 재료로 다룬다. 여기서의 언어는 합리적인 주체가 통제하는 수단이 아니라, 읽는 이의 물리적 반응에 의해 분절되고 파편화됨으로써 기존의 주체를 해체한다. 즉, 언어가 발생할 수 있는 짜임을 만들고 그 짜임 자체를 안무의 과정으로 제안하는 것이다. 안무가는 명시적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질서에서 벗어난 언어의 구조와 배치를 통해 잠재적인 감각과 상상력이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직한다. 이때 언어는 관념을 전달하는 매개가 아니라, 읽는 몸을 통해 감각을 발생시키는 안무의 장치로 작동한다.
안무는 춤을 구성하거나 신체 움직임을 설계하는 기술이 아닌, 감각의 위계와 시간성을 구조적으로 제안하는 일이다. 기호의 흔적을 통해 관계를 조직하고 공간을 발명하며, 이를 읽는 행위로 구현해내는 독립적인 실천이 곧 안무가 된다. 즉 여기서 텍스트는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기호이자 조건으로 기능한다. 피리넨의 글에서 ‘감정을 남겨두세요’ 라고 지시하는 것은, 텍스트가 그 감정의 상태를 완성해주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그 상태에서 스스로 조직해가야 하는 물리적, 정서적 조건을 설정할 뿐이다. 안무적 텍스트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두는 느슨한 구조를 가지며, 결국 독자의 읽는 행위를 통해 의미를 발생시킨다. 안무에서의 언어는 몸을 지배하는 상위의 층위나 명령어가 아니라 신체의 역동과 동일한 선상에서 에너지를 조직하고 배분하는 재료가 되며, 안무를 통해 발생하는 언어는 그 자체로 신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안무적 글쓰기: 두 가지 사례
1. 안무적 전치(displacement)“나는 움직임이 움직이는 힘과 함께 이 글을 썼다.”―에린 매닝5)
음악에서의 스코어가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을 만큼 정교함을 인정받는 ‘안정성’을 보장한다면, 무용의 스코어는 불안정한 기호들 덕분에 언제나 다른 방식으로 되살아난다. 무용에서 스코어는 주로 행동이나 움직임의 지침, 혹은 발생할 수 있는 매개변수를 정하는 것으로, 움직임이 무용수의 내적 충동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조건들에 의해 구체화되는 공유된 합의와 도구들의 집합으로 작동한다.6)
나는 공연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임지애, 장혜진과 함께 탠저린 콜렉티브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텍스트, 목소리, 노래, 스코어를 중심에 두고 움직임의 조건들을 실험해왔다. 2024년 아르코미술관 × 온큐레이팅 협력 주제기획전 ‘인투 더 리듬: 스코어로부터 접촉지대로’에서는 스코어 기반의 설치 사운드 작품 〈밤이어서 참 다행이지, 어두운 데서 춤추기 마련이잖아〉를 소개했다. 이 작업에서 스코어는 관객의 행동을 강요하는 지시어가 아니라, 미술관이라는 견고한 공간의 경계를 흐리고 ‘현재’라는 고착된 시간에서 벗어나게 돕는 경험의 가이드로 제시된다.
탠저린 콜렉티브, 〈밤이어서 참 다행이지, 어두운 데서 춤추기 마련이잖아〉, 2024, 아르코미술관 제공
아래의 스코어 〈새달〉은 청취의 방식으로 관객에게 전달되는 텍스트이다. 이 목소리를 듣는 장소는 미술관의 바깥 풍경이 보이는 창 앞이다. 관객은 자신의 개별적 시간 속에서 시시각각 바뀌는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듣는다. 창문 너머의 변화와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은 여기와 저기, 안과 밖이 단단히 나뉘지 않는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미술관을 나와 다시 일상으로 들어서는 순간, 익숙한 풍경이 낯선 감각으로 열릴 가능성을 얻게 된다. 나는 스코어를 만들기 위해 미술관 내부에서 하루 종일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며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시간이 바뀌고 날씨가 바뀌고 요일이 바뀌는 과정에서 미술관의 밖은 한 번도 같은 장소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걷고, 멈추고, 돌아보고, 기다리는 행위는 풍경과 함께 상상 속 서사로 전개됐고, 다시 다른 자극이 개입하며 전혀 다른 상상과 마주하게 됐다. 이 작업에서는 미술관(이 아닌 곳)과 관객(이 되지 못한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나와 타자, 여기와 저기, 지금과 다른 시간을 나누는 경계를 흐리는 글쓰기를 시도하고자 했다.
〈몽상적〉 스코어는 전시장 내에 비치된 여러 스코어 중에서 관객에 의해 임의로 선택된다. 이 스코어를 집어 드는 행위는, 우연한 만남을 통해 언제든지 관객의 신체 감각 좌표와 전시장 내의 공간성을 바꿀 수 있는 ‘잠재된 안무’의 상태로 존재한다. 텍스트는 유리창 너머의 세계로 내딛는 불가능한 움직임과 장소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한 경로를 제안한다. 이때 텍스트는 관객 자신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사유와 정동이 함께 작동하는 실천의 장이 되게끔 유도한다.나와 그 나무 사이의 빛이 들어옵니다.
그것은 3일 만에 다시 생성된 새달(new moon)의 빛입니다.
(...)
다시 나무를 바라봅니다. 나무와 나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고,
다시 두 걸음 뒤로 물러나 거리를 측정하고,
다시 옆으로 걸어가며 나무와 나 사이의 거리를 재봅니다.
걷고, 멈추고.
걷고, 멈추고.
(...)
나와 나무 사이는 지구가 살아온 이야기입니다. 짧은 섬광과 한 호흡과, 그리고 외마디 비명이 통과할 정도의 간격 사이에서 이야기는 영원히 반복됩니다.― 〈새달〉 스코어 부분 발췌
이 텍스트들은 ‘읽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며 수행하는 것’이다. 문장의 배열은 감각의 속도와 방향을 조율하고, 상황과 지시, 그리고 독자의 선택과 결정은 각기 다른 움직임의 경로를 만든다. 이때 텍스트는 움직임을 설명하는 언어가 아니라, 움직임이 발생할 조건을 조직하는 안무적 매체가 된다. 두 스코어는 이러한 안무적 글쓰기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는 창밖의 풍경과 감각의 틈을 통해 위치와 시간을 전치시키고, 다른 하나는 상상된 세계의 경로를 따라 독자의 지각과 정동을 이동시킨다. 안무적 글쓰기는 이러한 방식으로 몸이 움직이기 이전의 조건, 혹은 이미 움직이고 있는 감각의 장을 구성한다.유리창 한 겹 밖으로 한 발 내딛습니다.
이제야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 가깝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이곳은 몽유병 환자들로 가득 차 있는 꿈의 현실 세계입니다.
(...)
이곳에 오랫동안 머무르기 위한 가이드가 제공됩니다.
하나. 다른 사람의 기억에 의존하세요.
둘. 장소가 아닌 틈새를 발견하세요.
셋. 타버린 장소를 찾으세요. 깨끗한 곳만큼 희망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
현재는 언제나 과거로 사라집니다.
지도에서 표시되지 않은 꿈의 현실 세계는 구름과 나무와 깃털만이 기억할 것입니다.― 〈몽상적〉 스코어 부분 발췌
2. 안무의 시간성
2024년 제7회 창원조각비엔날레 ‘큰 사과가 소리 없이’ 전시에 참여한 탠저린 콜렉티브의 〈돌림노래: 목소리가 집 밖으로 새어 나와〉는 지나간 사건을 과거의 시간에 고정하기보다, 현재의 반응으로서의 글쓰기와 듣기를 수행하기를 제안한다. 이 작품은 창원 동남운동장의 향나무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목소리를 흘려보내고, 관객은 그 주변을 이동하며 자신의 동선과 속도, 머무는 시간에 따라 각기 다른 듣기의 경험을 하게 된다.
탠저린 콜렉티브, 〈돌림노래: 목소리가 집 밖으로 새어 나와〉, 2024, ⓒ탠저린 콜렉티브
이 작업은 1970년대 창원산단의 여성노동자들이 조직했던 문학서클의 읽기와 쓰기 리듬을 호출하면서, 그들이 서로의 시간을 겹치고 자신들에게 허락된 자리와는 다른 자리를 상상하기 위해 만들어낸 언어의 실천에 응답한다. ‘공존공영’과 같은 국가의 구호와 산업의 서사 속에서 지워졌던 여성노동자들의 사적인 글쓰기와 목소리는 이 작업 안에서 다시 익명의 공적 울림으로 번져 나온다. 수다와 개인의 목소리, 미세한 욕망, 서로를 향한 연대의 감각은 단일한 서사로 환원되지 않은 채 겹치고 뒤섞이며, 지금 여기의 시간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이때 중요한 것은 과거를 재현하는 일이 아니라, 과거의 말들이 현재의 공간 안에서 다시 발화될 수 있는 조건을 조직하는 일이다.
관객은 스피커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를 따라가며 멈추고, 우회하고, 다시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면서 각자의 경로를 만든다. 같은 문장을 마주하더라도 듣는 위치와 주변의 소음과 시간대에 따라 목소리의 밀도는 달라지고, 그 달라짐이 곧 장소의 경험을 바꾼다. 관객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는 동시에, 그 목소리가 불러들이는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감각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안무의 시간성은 이처럼 서로 다른 시간층이 한 장소에 포개지고, 그 중첩은 신체의 주의와 경로, 감각의 리듬을 새롭게 조직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 구절들은 하나의 시간이나 단일한 주체의 서사로 수렴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목소리들은 겹쳐 울리고, 서로에게 반응하며, 각기 다른 경험과 시간을 현재의 감각 안으로 불러들인다. 안무적 글쓰기는 어떤 사건을 대신 재현하거나 설명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주변적이고 사소한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은 채 함께 울리며 어긋나고, 반복되고, 다시 배치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즉, 의미를 고정하는 언어가 아니라, 매 순간 새롭게 생성되는 관계를 통해 말들이 다른 몸과 다른 순간 속에서 다시 발화되도록 하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시간이 많이 흘렀다. 작년 이맘때쯤 나는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
과거의 생긴 균열로 굴절된 미래로 가는 경로에서 지금은 어디쯤인가? 나는 자주 이탈했다. 이동하고―돌아오고, 이동하고―돌아가며 나의 제자리는 늘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 내가 남기는 시간의 경로는 울퉁불퉁한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
우리는 우리를 길들이는 모든 방식에 저항을 만들어낸다. 개인의 수다가 겹쳐 시간의 파열을 만든다.
(...)
장미꽃의 노래
시간이 흐르면 지는 장미를 좋아합니다.
향나무가 알려주지 않은 시간을 장미는 마지막 숨을 다해 말해줍니다.― 〈돌림노래: 목소리가 집 밖으로 새어 나와〉 스코어 부분 발췌
안무적 읽기: 한 가지 사례
그래픽과 춤
안무, 코레오그래피(choreography)란 춤을 의미하는 코레오(choreo)와 쓰기, 기록하기를 뜻하는 그래피(graphy)가 결합된 단어이다. 오래전부터 안무, 즉 춤을 기록하는 행위는 추상적이고 사라지는 속성의 춤을 붙잡고자 하는 불가능에 가까운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무용의 역사에서 춤 기록에 대한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악보처럼 현재까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무보가 부재한다는 사실은 춤 기록의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불가능성은 새로운 발견의 잠재성을 품고 있다. 춤을 얼마나 정확하게 기록하고 재현하는가가 아니라 남겨진 흔적을 몸이 어떻게 읽는가에 관한 것이다.
2025년 박고은 그래픽 디자이너와 함께 진행한 ‘안무-그래픽 스코어 워크숍’은 안무와 그래픽 디자인의 영역이 공유하는 근본 원리인 ‘그래피(graphy)’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됐다. 이 워크숍은 기호를 신체의 감각과 움직임의 수행 속에서 읽고, 기호와 신체, 기록 가능한 것과 기록되지 않는 것 사이를 매개하는 물질적 조건을 탐색하는 실험들로 구성된다. 여기서 주목한 것은 사이니지(signage)였다. 사이니지는 본래 특정 정보를 전달하고 사람들의 이동과 움직임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표식이다. 하지만 이 워크숍에서는 이 익숙한 기호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뤘다. 사이니지를 같은 행동을 반복시키는 지시 체계가 아니라, 몸이 지나가며 매번 다른 선택을 하게 만드는 읽기의 조건으로 재설정했다. 사이니지의 고정된 의미를 전달하는 데 실패하더라도, 그 기호가 놓인 맥락과 읽는 이의 수행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끊임없이 생성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기호는 특정한 동작을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경로를 열고, 닫고, 주의를 끌어당기거나 흩뜨리며, 멈춤과 우회, 되돌아감과 기다림 같은 시간의 단위를 발생시킨다.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은 기호가 요청하는 거리와 방향, 속도와 간격을 몸으로 시험했다. 같은 기호를 보더라도 누군가는 따라가고 누군가는 비켜서며, 그 차이 속에서 움직임의 시퀀스는 처음부터 확정되지 않은 채로 생성되고 계속 수정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 불확실함이 실패가 아니라 방법이라는 점이다.
이 워크숍에서 ‘안무적 읽기’는 기호를 해독하는 과정이 아니라, 신체의 운동성으로 ‘번역’하는 과정이었다. 사이니지의 시각적 질서가 신체의 감각 체계와 충돌할 때 발생하는 찰나의 망설임과 오해, 그리고 경로의 이탈은 하나의 안무적 사건이 된다. 여기서 ‘읽기’는 눈으로 텍스트를 훑는 정적인 행위가 아니라, 기호가 지시하는 미지의 시공간 속으로 신체를 밀어 넣는 물리적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안무적 텍스트의 미시정치학
우리가 무엇을 춤추고 있는지, 그것은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 그 형태와 의미는 움직임과 함께 변화한다. 움직임은 언제나 진행 중이고, 읽고 쓰는 행위 또한 그 진행 속에서 갱신된다. 에린 매닝이 말하듯 “언어는 아직 자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직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규정하지 않았다. 언어는 자신이 어떻게 들릴 수 있는지, 어떻게 살아질 수 있는지,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 어떻게 상상될 수 있는지 라는 정동적 음조들(affective tonalities) 속에 창조적으로 얽혀 있다.”7) 이는 언어가 완성된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라기보다, 읽고 쓰이고 상상되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변형되는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안무적 텍스트에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가 무엇을 설명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감각의 조건과 수행의 장을 만들어내는가이다. 이때 텍스트는 몸을 지배하거나 설명하는 상위의 층위가 아니라, 오히려 신체의 역동과 동일한 선상에서 에너지를 조직하고 배분하는 또 하나의 안무적 재료가 된다.
문학에서 행간을 읽는 일이 쓰인 글자 바깥의 정서와 긴장을 더듬어가듯이, 안무적 읽기 역시 텍스트의 틈과 배열을 몸으로 통과하는 실천이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정보를 정확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생략된 요소들을 연결하고, 순간의 선택과 결정을 통해 다음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안무적 읽기는 텍스트를 마주한 몸이 어디에서 멈추고 어디로 우회하며, 어떤 속도로 따라가고 언제 되돌아오는지와 같은 작은 선택들의 연쇄에서 발생한다. 이 선택들은 누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의 범위를 재배치하고, 무엇이 가능해지고 무엇이 배제되는지를 다시 쓰며, 그 과정에서 주체성 또한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잠정적으로 구성된다. 안무적 텍스트는 이 잠재성을 신체와 움직임으로 구현하는 조건이 된다. 텍스트는 그 자체로 의미를 완성하지 않기 때문에 각자의 수행을 요구하고, 하나로 합쳐지지 않기 때문에 서로 다른 리듬들이 잠시 접속했다가 다시 흩어질 수 있다.
결국 안무적 텍스트는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위를 가능하게 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 행위가 끝난 뒤에야 도착하는 언어는, 결론이 아니라 다음 수행을 다시 열어젖히는 늦은 신호로 남는다. 안무의 텍스트성은 하나로 고정되는 설명이 아니라, 언제든 달라질 수 있는 경험의 상태다. 각자가 다르게 읽고 다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열려 있고, 그래서 매번 다른 방식으로 살아나는―춤과 닮은 방식으로 남는다.
김재리
김재리는 드라마투르그, 연출가,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신체와 언어, 움직임과 사유가 만나는 지점에 관심을 두고 무용과 그 주변의 예술 현장에서 창작과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국립현대무용단의 드라마투르그, 무용역사기록학회의 공동편집위원장, 슬로베니아 공연예술잡지 MASKA의 객원편집장을 역임했다.
2026/05/06
79호
- 1
- 90년대 컨템퍼러리 댄스에서는 춤이 소진되고 그 자리를 텍스트와 목소리가 채우는 춤의 형식적 전환이 있었다. 안무가들은 말없이 조용히 춤추는 ‘침묵의 몸’이라는 관습을 버리고, 언어와 목소리를 안무의 핵심적인 매체로 사용했다. Bojana Kunst, “The Voice of Dancing Body,” 2009. 바로가기
- 2
- Alice Chauchat, Zoë Poluch, Kim Hiorthøy, Mette Ingvartsen, Nadja Hjorton and Stina Nyberg, Everybodys Performance Scores, 2008. 바로가기
- 3
- Elina Pirine, “Whisper to me Giuseppina,” Maska 36 Issue 203/204, 2021. p. 39.
- 4
- Ibid., p. 38.
- 5
- Erin Manning, Relationscapes: Movement, Art, Philosophy, The MIT Press, 2009, p. 3.
- 6
- Myriam Van Imschoot, Rest in Peaces: On Scores, Notation and the Trace in Dance, 2010. 바로가기
- 7
- Erin Manning, Relationscapes: Movement, Art, Philosophy, The MIT Press, 2009, p.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