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힘 / 슬픔은
힘
일어나고 싶지 않아 다시 눈감고 싶어 울고 싶어 마음껏 소리칠래 아침부터 취해버릴래 다 그만두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일어나서 세수를 해 아침 먹고 가방 들고 출근을 해 사무실에 앉아서 일해 점심도 먹고 담배도 피우지
나를 일으켜 세우는 건
희망이 아니야 위로, 즐거움, 책임이 아니야 세상에 대한 믿음이나 사람들에 대한 기대가 아니야
그저 습관
배고픔
우편함에 꽂힌 고지서
월급날
슬픔은 얼마나 무력한지
나를 살아가게 하는 그저 그런 것들
슬픔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인데
내 집이 있었으면 좋겠어 기왕이면 넓고 깨끗하면 좋겠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월급이 좀 더 올랐으면 좋겠어
유명한 시인이 되고 싶어 시집이 많이 팔리면 좋겠어 몇 년 후에는 그럴듯한 새 시집을 내고 싶어
보잘것없는 욕망의 힘으로
나는 살아가지
얼마나
다행하고
다행한
일인지
슬픔은
양말에 난 구멍 같다
오래전에 지은 죄인 것만 같다
들키고 싶지 않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고요해진 척
회사에서는 사무원답게 일하지
술자리에서는 유쾌하게 웃고 떠들지
거리에서는 평범한 시민처럼 걷지
슬픔을 들킨다면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 거야
곤란해할 거야
나는 부끄러워질 거야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고개를 흔들지 몸속 깊숙한 곳으로 밀어두지
깊고 어두운 구덩이 속에서
너는 울고 있겠지만
내가 나에게 슬픔을 숨길 수 있을 때까지
모르는 척
내가 나를 속일 수 있을 때까지
괜찮아진 척
유병록
슬픔의 구덩이는 깊고 어둡다.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나를 지배한다. 나는 벗어나려고 노력하면서 그 속에서 살아간다. 그것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2018/05/29
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