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 하천



   강가에 서 있는 너를 데리러 갔었어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숲, 강을 떠올리는 사람

   얼굴에 모자이크를 뒤집어쓴 채 너는 말했지

   있잖아,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버섯 기르기가 유행이래

   외로운 사람의 노루궁뎅이버섯은 유독
   뽀얗고 풍성하게 돋아난다더라

   네 곁에서 강은 끝없이 흘러가고
   나는 네 이마로 연신 쏟아지는 머리칼을 쓸어넘겨
   가르마를 새로 타주었지

   우리는 해 질 녘의 징검다리를 가로지르며
   자동차에 타지 않은 사람들을 살펴보았어

   소중한 것을 끌어안듯 어깨를 웅크린 채
   빛을 머금은 강을 어렵사리 뛰어넘는 사람들

   밤은 이내 깊어지고
   한 사내가 돌아다니며 이렇게 외치고 있어

   망개떡 사려

   몸을 움츠리고 헤매던 한 사람이
   가슴팍에서 망그러진 하얀 떡을 꺼내
   창백한 사람에게 건네주는

   겨울밤

   입을 벌리면
   보얗고 차갑고 설겅거리는 것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긴긴 겨울밤

   너도 네 목소리를 들려줄래

   그때 강물 앞에 서서 생각한 이름 그리고
   마지막까지 손아귀에 끈기 있게 엉겨붙던 마음에 대해

   있잖아 나는 가끔
   너희 집 앞에만 눈이
   쌓일 만큼 내리게 하고 싶어

   그리고 외국의 긴 평야를 달리는 기차에 타고 싶어

   인사를 나눌 때면
   죽은 사람의 이름을 대신 대고 싶어

   이토록 먼 곳까지 어떻게 왔느냐고
   누군가 물으면
   얼어붙은 강을 되짚어 왔다고 답해야지

   입춘대길 건양다경
   이렇게 써붙여야 할 아침에





   음양 자르기



   시골에서 자란 리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종이 공예를 배웠다. 붉거나 하얀, 두꺼운 종이는 고급품이었기에 얇고 쉽게 구겨지며 거친 종이만이 그녀의 몫이었다. 지금은 머리가 하얗게 센 리의 주위에 가득 쌓인, 거리에서 가져온 광고지처럼.

*

   중국에서는 춘절이 다가올 무렵 대문에 붉은 종이를 오려 만든 복(福)자를 붙인다. 집안에 길한 기운이 깃들기를 바라며 붙인 종이 글자는 색이 바래도록 문간에서 펄럭인다. 정월 초하루가 밝으면 사람들은 리의 집을 찾아 복과 잉어, 거북이 등 길한 문양을 청했다. 그러면 리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고로 가 빳빳한 붉은 종이를 들고 왔다. 문양이 들어설 자리를 가늠하며 종이를 응시하던 리의 아버지가 음, 소리를 내고 은빛 가위를 들면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이 침을 삼켰다.
   용, 모란, 관우…… 단 한 번의 가위질로 복된 문양을 오려내는 전지 공예는 약 천오백 년 전부터 이어져왔다. 하수는 용 한 마리를 자르기 위해 종이를 반으로 접곤 한다. 배나 사과 껍질을 깎을 때처럼 알맹이만 남기고, 자투리 종이는 버리기 십상이다. 하나 장인은 무늬를 파내고 남은 부분이 음각 작품으로 보일 만큼 종이를 깨끗이 도려낸다. 종이 한 장에서 두 작품이 태어난다고 해서 ‘음양 자르기’라고 부른다.

*

   리는 88 올림픽이 열릴 무렵 한국에 왔다. 부산항으로 가는 배에 숨어 밀항했다. 한국은 좋은 곳이라고 했다. 요리든 청소든 같은 일을 해도 한국에선 세 배로 쳐준다고 들었다. 그러나 가족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힌 나머지 몰래 짐을 쌀 수밖에 없었다. 떠나기 전날 밤, 리는 아버지의 은빛 가위 옆에 보관된 자신의 작은 가위를 흰 천에 감싸 옷 사이에 넣었다.
   그렇게 리는 식당에서 밥을 짓고 손님들이 떠난 식탁을 닦고 때론 세차장에서 남의 차를 정성껏 닦았으나…… 이상하게도 돈이 세 배로 불어나진 않았다. 리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때는 정월 무렵이었다. 새해가 밝고 양력설과 음력설이 차례로 지나도 아무도 “이봐, 이번 해도 복을 부탁해.” 하며 리를 찾아오지 않았으므로.
   리는 문득 마른기침을 했다. 자리보전한 지 오래되었다. 상자와 폐지를 주워 판 돈으로 연명했으나 이젠 리어카조차 끌기 어려워졌다. 아직 죽음이 드리우지 않았다는 걸 리는 알았다. 그런데 왜 자꾸 옛 생각이 나나. 리는 고물상에 가져다 팔지 못한 광고장을 만지작거리다가 자기도 모르게 용이며 모란이며 부채를 쥔 여인을 오리고 말았다.

   그날 밤, 등에 ‘50%’라고 적힌 노란 용이 빛나는 몸을 흔들며 리에게 말했다.
   “내가 왜 왔는지 알잖아.”
   “내가 외롭다고 해서 하느님이 널 보내셨니?”
   용이 메마른 목소리로 응했다. “아니, 나는 네게 물을 주러 왔어.”
   “내 숨통을 도려가.”
   “내가 만들 수 있는 건 길한 것밖에 없는데.”

김보나

정월 초하루가 밝으면 밖으로 나서야지. 거리에서 제일 처음으로 만난 사람을 붙들고 그와 사랑에 빠져야지. 그것이 저의 새해 결심이었습니다.

2023/01/31
6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