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사라지고 나무가 부족해졌습니다. 세계 각국의 대장들이 모여서 수군수군, 쑥덕쑥덕하더니 엄청난 선언을 했지요.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종이책 출간을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각 정부는 전자책을 종이책만큼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컴퓨터나 노트북,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 없는 집을 찾기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환경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자동차를 금지시키라는 항의도 있었지만, 아직 개발 중인 친환경 자동차보다는 전자책이 널리 보급하기 쉬웠습니다. 가장 먼저 만화와 소설 분야 종이책을 그만 만들기로 했습니다. 가장 마지막은 교과서였죠.
   잘 사는 도시 아이들은 문제가 없었습니다. 큰일 난 것은 외딴 산골에 사는 릴링과 친구들입니다. 아침 조회 시간, 허 선생님이 앞으로 종이책이 사라질 거란 뉴스를 전했을 때만 해도 설마설마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여행자 보보 므와리’ 시리즈의 마지막 권이 전자책으로만 출간돼 버린 것입니다. 지금껏 나온 ‘보보 므와리’는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수 있었습니다. 워낙 인기가 많은 작품이라 릴링 차례가 오기 전에 너덜너덜한 꼴이 되곤 했지만요.
   릴링네 마을에는 전자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종이책이랑 똑같이 읽으면 되는 걸 왜 못 읽느냐 하면 일단 컴퓨터가 없는 집이 있었고요, 책을 살 여유가 없는 집도 있었습니다. 샨유안네 집은 둘 다 있긴 한데 아빠가 하루 종일 게임을 해서 다른 사람은 컴퓨터에 손도 못 댔습니다. 물론 컴퓨터와 책값을 가진 누군가 전자책 사이트에서 어찌어찌 책을 산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릴링네 마을 컴퓨터는 전부 호랑이 한두 마리 남아있던 시절의 옛날 모델이라 ‘전자책 전용 뷰어’라는 것을 설치할 수 없었거든요!
   릴링과 친구들은 흙길 위에 모여 머리를 맞댔습니다.
   “어떻게 읽을 방법이 없을까?”
   “교장 선생님 핸드폰을 빌리는 건 어때?”
   “핸드폰이라고 다 되는 게 아니래.”
   “집 전화기로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건 화면이 없잖아.”
   “그냥 해 본 말이야……”
   “헉, 집 전화기 하니까 좋은 생각이 났다!”
   “뭔데?”
   모두 투오런을 돌아보았습니다. 히죽히죽 웃던 투오런이 짝 소리를 내며 두 손을 모았습니다.
   “우리에겐 유나니가 있어!”
   몇 달 전에 도시로 이사간 윤한을 친구들은 유나니, 유나나라고 불렀습니다. 윤한의 가족들이 그 애를 부르는 애칭을 따라 한 거예요. 유나니는 전학 간 학교에선 수업마다 태블릿PC를 써서 자기도 학교에서 한 대를 빌렸다고 했었습니다. 유나니도 ‘보보 므와리’의 팬이니 그 태블릿으로 마지막 권을 샀을 확률이 매우 높았지요. 친구들은 가장 가까운 리쟈네 집으로 달려가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보세요.” 유나니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릴링이 외쳤습니다.
   “유나나!”
   “릴링? 무슨 일이야?”
   흥분한 친구들이 수화기에 대고 한마디씩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너 그 책!”
   “너 저번에 학교에서 태블릿 쓴다며!”
   “‘보보 므와리’ 읽었어? 읽었냐고?”
   “죽는지 안 죽는지만 알려줘.”
   듣고 있던 유나니가 대답했습니다.
   “음……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한 명씩 말해 봐.”
   수화기를 손에 쥔 리쟈가 쉿, 하고 손가락을 입에 댔습니다. 리쟈는 손짓으로 아이들을 뒤로 물러나 앉게 한 뒤, 스피커 버튼을 누르고 수화기를 내려놓았습니다.
   “‘보보 므와리’ 읽었냐고 물어본 거야?” 유나니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습니다. 릴링이 리쟈를 향해 엄지를 세웠습니다.
   샨유안이 나서서 ‘보보 므와리’ 신간이 나왔지만 한 글자도 읽지 못하는 상황을 전했습니다. 유나니는 “아이고, 이 재밌는 걸 못 읽는다니” 하면서 안타까워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보보와 나비가 드디어 나비를 만든 주인들을 찾으러 간단 말이야.”
   유나니가 말했습니다.
   『여행자 보보 므와리』는 중학생 보보와 떠돌이 인공지능 나비가 만나 온갖 신비한 모험을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둘이서 함께 시공을 넘나들다가 요기서는 천 년 전 전설이 되고, 조기서는 삼백 년 전 설화가 되곤 했죠. 마지막 권에서는 나비를 처음 만들었던 주인들이 등장하면서 나비가 떠돌이가 된 사연이나 보보의 조상에 대한 비밀이 모두 밝혀질 예정이라고, 유나니는 말했습니다. 릴링과 친구들은 더더욱 그 책을 읽고 싶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유나나, 너가 전화로 읽어주면 안 될까?”
   투오런이 물었습니다.
   “한 권을 통째로? 엄청 오래 걸릴 텐데.”
   고민하는 유나니에게 리쟈가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청했습니다.
   “빠르게 읽으면 되지. 바람처럼 후루룩 샤샤샥 읽어 주십쇼, 유나니님.”
   유나니는 못 이기는 척 목을 가다듬었습니다.
   “흠, 흠. 너희가 정 원한다면……”
   그렇게 낭독이 시작되었습니다.
   “휘영청 밝은 달이 아름드리 참나무 가지에 걸리고 짙은 안개가 숲을 감쌌다 나무마다 빽빽이 들어앉은 새 떼가 깍깍 소리 내며 울었다 보보는 창 밖에 서서 방안을 들여다보는 뚱뚱하고 거대한 쥐를 말없이 바라봤다 창문을 열어주며 보보가 물었다 저어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동물이신지? 웜뱃입니다 웜뱃이 대답했다 그렇군요 웜뱃 씨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죠?”
   유나니가 친절하게 덧붙였습니다.
   “아, 여기 그림이 있는데 곰이랑 땅다람쥐를 합쳐놓은 것처럼 생겼어 나중에 웜뱃이 어떻게 생겼는지 찾아 봐봐…… 음…… 여행자님 저는 도서관에서 파견된 특별 고문서 야간 담담…… 야간 담당관입니다. 부탁하신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보보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이쿠 이렇게 직접 가져다주실 줄은! 보보는 몸을 웅크리고 앉은 웜뱃의 복슬복슬한 등을 살폈다 하지만 웜뱃은 아무 보따리도 메고 있지 않았고 앞발도 빈 발이었다 중간에 분실되면 안 되는 중요한 자료니까요 야행성인 제가 밤을 틈타 달려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웜뱃은 뒷주머니에서 동그란 씨앗을 꺼냈다 보보는 그 모습에 놀라서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뒤에 주머니가 있으시군요 웜뱃이 소리 없이 웃었다 예 예 아기 웜뱃을 위한 자리지요 하지만 비어 있을 때가 더 많아요 그래서어어아아아우, 숨 찬다 잠깐 물 좀 마실게.”
   유나니가 부엌에 간 동안 릴링과 친구들은 바닥에 드러누워 몸을 배배 꼬았습니다.
   “유나니 우물 파러 갔니? 언제 오는 거야.”
   “이래서는 오늘 안에 다 못 들어!”
   릴링은 문득 떠올렸습니다. 리쟈네 전화비는 괜찮을까요? 유나니와 통화한 지 3분째. 책은 겨우 1장 첫 페이지를 읽은 상태였습니다. 다 읽고 나면 몇 시가 되어있을까요? 밖은 얼마나 어둑어둑할까요? 다음 달 리쟈네 집에 도착할 요금 청구서를 상상하니 등골이 절로 오싹해졌습니다.
   릴링이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리쟈, 근데 장거리 통화를 이렇게 오래 해도 괜찮아?”
   장거리 통화는 요금이 더 비쌌거든요. 마침 거실을 지나가던 리쟈네 막내 이모가 그 말을 들어서 다행입니다.
   “어허, 당연히 안 괜찮지!”
   이모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무엇을 하는지 알아채고 호통을 쳤지만 다른 어른들에게 알리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 전에 끊는 게 좋을 거야.”
   이모는 그렇게 말하곤 방으로 사라졌습니다.
   물을 마시고 돌아온 유나니에게 리쟈가 시무룩하게 말했습니다.
   “유나나, 아무래도 전화로 듣는 방법은 어려울 것 같아.”
   유나니도 그 말에 동의했습니다. 이 책을 쉬지 않고 읽다가 유나니의 목이 쉬어 버릴 판이었습니다. 리쟈네는 요금 폭탄을 맞고 난리가 나겠지요. 릴링과 친구들은 어른들한테 무지하게 혼날 테고, 그러다가 학교를 쉬고 전화 요금을 벌어오란 얘기까지 나올지도 몰랐습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릴링네 아버지면 농담이고, 샨유안네 할머니면 반 농담, 투오런네 할아버지면 진담일 것입니다.
   친구들은 소름 끼치는 상상에 부르르 몸서리쳤습니다.
   “일단 끊자…… 나중에 또 전화해.”
   “그래, 안녕.”
   리쟈가 전화를 끊었습니다.
   유나니가 책을 읽기 시작할 때만 해도 모두 신나서 날뛰었는데, 순식간에 김이 식었습니다. 릴링은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담에 어떻게 되는 건데?”
   헤어지면서 샨유안이 툴툴거린 말이 밤까지 릴링의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 담에 어떻게 되는 건데? 그 담에 어떻게 되는 건데? 알고 싶어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릴링은 이리저리 뒤척이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점심시간, 릴링은 친구들 앞에서 선언했습니다.
   “얘들아, ‘보보 므와리’를…… 우리가 써보자!”
   쩍 벌어진 투오런의 입을 옆에 앉은 샨유안이 닫아주었습니다.
   “생각해 봐. 학교에 우리만큼 ‘보보 므와리’를 잘 아는 사람 없을걸? 1권부터 5권까지 내용 다 알지, 엑스트라 이름도 외우지.”
   릴링이 말했습니다.
   “아니, 그건 너랑 투오런이고. 나랑 샨유안은 그 정도까진 아냐.”
   당황한 리쟈가 말했습니다.
   “우리 넷이 힘을 합치면 할 수 있어! 리쟈, 너도 5권까지 읽긴 했잖아.”
   “읽었지.”
   “그럼 어제 들은 내용 뒤가 어떻게 이어질지 대충 감이 잡히지 않아?”
   샨유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끼어들었습니다.
   “감이 잡힌다고? 유나니, 어제 10초 읽고 물 마시러 갔어.”
   리쟈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릴링은 큰 한숨을 내쉬며 왼쪽에 앉은 투오런과 오른쪽에 앉은 리쟈의 어깨에 팔을 둘렀습니다.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맞은편의 샨유안도 얼굴을 맞대왔습니다.
   “자, 얘들아 들어 봐.”
   릴링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멈뱃인지 컴뱃인지가 찾아와서 씨앗을 건네줬어. 이 씨앗이 뭐야?”
   “지식의 나무. 도서관에서 쓰는 거.”
   샨유안이 속삭였습니다.
   “그리고 웜뱃이야.”
   투오런이 덧붙였습니다.
   “그래, 웜뱃. 그럼 이걸 주면서 웜뱃이 무슨 얘기를 할까?”
   “나무로 키우는 법? 물을 어떻게 줘야 한다든가……”
   이번에는 리쟈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왜냐? 이걸 나무로 키워서……”
   “열매를 먹어야 해.”
   투오런이 릴링의 말을 끝맺었습니다.
   “그래, 그래. 열매를 먹고 보보가 뭘 알게 될지, 우린 예상할 수 있어. 어제 유나니가 말해줬어.”
   “나비의 첫 주인! 그 사람들과 관련된 내용일 거야.”
   샨유안도 어느새 눈을 빛내고 있었습니다.
   “헉, 우리 엄청 잘 알아. 이러다 결말까지 맞히겠어.”
   투오런이 턱을 감싼 손가락을 호들갑스럽게 까닥이며 말했습니다. 이때, 친구들 중 가장 현실적인 리쟈가 지적했습니다.
   “근데 1페이지만 읽고 쓰면 엉터리 소설이 될걸. 우린 나비 주인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릴링이 씩 웃으며 답했습니다.
   “맞아! 그래서 유나니와 통화를 하긴 해야 해. 최대한 짧게 통화하면서 가장 필요한 정보를 얻을 거야.”
   “그게 뭔데?”
   리쟈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습니다.
   “바로 각 장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지! 그걸 듣고 우리는 중간만 채운다!”
   릴링이 자신만만하게 덧붙였습니다.
   “그럼 마지막 결말도 똑같을 거고, 원작과 얼추 비슷한 이야기가 만들어질 거란 말씀.”
   “원작과 얼추 비슷하다”는 말은 ‘보보 므와리’의 마지막 권에 목마른 친구들에게 더없이 매혹적으로 들렸습니다. 샨유안과 리쟈와 투오런은 일제히 “오오” 하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신통방통하다, 천릴링!”
   투오런이 감격에 젖은 척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샨유안과 리쟈도 재미있겠다며 재잘거렸습니다.
   친구들은 각자의 장점에 따라 역할을 나눴습니다.
   먼저 ‘보보 므와리’에 가장 빠삭한, 리쟈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보 므와리’에 미쳐있는’ 릴링과 투오런이 메인 작가를 맡았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샨유안이 보조 작가 및 삽화가가 되기로 했습니다. 리쟈는 보조 작가 및 서기였습니다.
   리쟈가 글씨를 쓰기로 결정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리쟈는 평소에도 필기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고 글씨를 아주 멋들어지게 썼습니다.       그리고 리쟈는 공책이 만약 컴퓨터 화면이었다면 손가락이나 마우스로 마구 확대해야 읽을 수 있을 만큼 글씨를 깨알같이 작게 쓰는 게 특기였습니다!    숲이 너무 많이 파괴되는 바람에 몇 년 안에 종이도 생산 금지령이 내릴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공책값이 파격적으로 올라서 갖고 있는 공책을 아껴 써야 했습니다. 이 와중에 글씨 작게 쓰기만큼 쓸모 있는 재주가 없었죠.

    처음 해보는 소설 (빈 부분 채워) 쓰기는 생각보다 매끄럽게 풀렸습니다. 소설을 쓸 두꺼운 공책은 샨유안이 기부했고, 유나니도 흔쾌히 친구들을 돕기로 했습니다.
   매주 월요일, 네 친구 중 한 명이 유나니에게 전화를 걸면 유나니는 미리 적어둔 요약문을 재빨리 읽어주었습니다. 용건만 말하고 끊기 때문에 통화 시간은 결코 1분을 넘기지 않았지요.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습니다.
   “여보세요.”
   “안녕, 잘 지내지?”
   “응, 너는?”
   “나도.”
   “4장. 첫 장면. 궁금과 지성이 재판을 받는다. 금기를 저지른 죄로 추방당한다. 나비는 봉인됨. 마지막 장면. 몇백 년 후에 누가 봉인을 풀어 버려서 나비가 도망친다.”
   “고마워, 유나나.”
   “응, 안녕.”
   그런 다음 친구들은 틈날 때마다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중간의 빈 부분을 메웠습니다. 공책은 하루씩 돌아가면서 맡았습니다. 그래야 집에 가서 이때까지 쓴 부분을 읽고 또 읽고 할 수 있으니까요.
   릴링과 친구들이 매일같이 교실 뒤편에 모여 뭔가를 열심히 끼적이고 있자 호기심에 찬 아이들이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뭐 하는 거냐고 묻기도 하고, 아예 옆에 앉아서 구경하는 아이도 있었지요. 그중에서도 특히 시우웨이는 쉬는 시간마다 찾아와서 릴링과 친구들 주변을 맴돌았는데, 이게 또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시우웨이는 ‘보보 므와리’ 시리즈를 읽어 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했었거든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던 시우웨이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릴링과 친구들 옆에 조용히 앉아서 쉬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물론 오래 가진 않았습니다. 시우웨이는 곧 끝나지 않는 ‘보보 므와리’ 이야기에 질려서 “너네 밖에 나가서 안 놀래?” “언제까지 쓸 거야?” 하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소설 쓰기에 푹 빠진 릴링과 친구들이 그런 치근거림에 꿈쩍할 리 없었습니다. 결국 시우웨이는 릴링 앞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보보 므와리’ 1권 읽어 봤는데, 재미없더라.”
   “뭐야?”
   릴링이 고개를 번쩍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왜 맨날 여기 와서 앉아있어?”
   시우웨이가 릴링의 매서운 눈초리를 피하며 답했습니다.
   “……샨유안 보러 오는 건데?”
   ‘……아뿔싸! 당연히 그렇겠지.’
   릴링은 일찍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샨유안과 시우웨이가 예전부터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눈길이 샨유안에게 쏠렸습니다.
   한창 그림을 그리고 있던 샨유안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래, 사귀자.”
   샨유안이 말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진정해.”
   투오런이 옆에서 말했습니다.
   “내가 얘네 이럴 줄 알았다니까.”
   리쟈가 중얼거렸습니다.
   릴링은 샨유안 앞에 놓인 ‘보보 므와리 공책’을 바라보았습니다.
   “‘보보 므와리’에 이런 뜬금없는 커플만 안 생겼으면 좋겠다.”
   릴링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날 오후, 유나니에게서 충격적인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여보세요?”
   “릴링! 이건 너한테 꼭 말해 줘야 할 것 같아서 전화했어. 나도 지금 읽다가 깜짝 놀랐지 뭐야! 퀜틴 알지?”
   “당연히 알지.”
   퀜틴은 ‘보보 므와리’ 시리즈 1권에 등장했던 연상의 신비로운 소년으로,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1권 이후로 나오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옛날 옛날 퀜틴이 살아 있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 이 사람을 U라고 하자. U는 악당과 싸우다가 죽었는데, U의 동생은 악당 편이었어. 이 동생이 악당의 손자와 사랑에 빠져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후손이 보보래.”
   “뭐? 뭐! 뭣……?”
    “그러니까, 퀜틴에게 보보는 원수의 자손이자 사랑했던 사람의 자손이기도 했던 거야.”
   릴링은 놀라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잘생긴 퀜틴이 보보의 남자친구가 되길 바란 적은 있어도, 보보의 조상님의 언니의 남자친구이길 바란 적은 없었습니다.
   흥분한 유나니가 말을 이었습니다.
   “1권에서 퀜틴이 보보를 좋아할지 싫어할지 고민하는 장면,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가슴 아프지 않니? 와, 어떡해!”
   하지만 릴링은 보보와 퀜틴이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샨유안과 시우웨이의 사랑 이야기도 이것보단 말이 되겠다……”
   릴링이 맥없이 중얼거렸습니다. 유나니는 그 둘이 드디어 사귀냐며 웃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일로 ‘보보 므와리’에 대한 릴링의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릴링과 친구들은 결국 시리즈의 마지막 권을 자기들 손으로 완성해 냈거든요. 그리고 이 (공)책은 교내의 ‘보보 므와리’ 팬들에게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기까지 했습니다. 다들 전자책을 구할 방법이 없으니 릴링과 친구들을 찾아왔죠. 원작과 똑같은 거냐고 묻고 아니라 하니 실망하는 아이도 있었고, 사이비라도 좋으니 자기도 읽게 해달라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사이비라니. 팬들이 썼으니까 팬픽이라고 하자!”
   투오런이 투덜거리며 공책을 건넸습니다.
   그렇게 돌려 읽다보니 어느새 학교에 ‘보보 므와리 공책’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인기가 많아졌습니다. 자기 차례를 못 기다리겠으니 그냥 말로 얘기해 달라고 찾아오는 아이들까지 생겼지요.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습니다. 릴링과 투오런은 하도 읽어서 내용을 줄줄 외웠거든요.
   글은 릴링이 더 잘 썼지만, 이야기는 투오런이 더 잘했습니다. 투오런의 꿈틀꿈틀 움직이는 눈썹과 다양한 표정, 그리고 섬세한 손짓은 듣는 사람을 푹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곧 한 무리의 아이들이 쉬는 시간마다 투오런의 ‘보보 므와리’를 들으려고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앞 권을 안 읽었지만 재밌어서 계속 들으러 온다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투오런이 들려주는 ‘보보 므와리’와 친구들이 쓴 ‘보보 므와리’의 내용이 조금 달랐습니다. 결말 직전에 릴링과 투오런의 해석이 갈렸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 부분을 투오런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바꾸어 버린 겁니다. 이 일을 알게 된 릴링은 자리를 박차고 투오런에게 달려갔습니다.
   “너 아직도 보보가 여행을 그만두고 도서관 관장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릴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습니다.
   “릴링, 웜뱃이 나무 키우는 법을 알려 준 건 아무리 봐도 그걸 위한 복선이야! 아니면 왜 외부인한테 도서관의 기밀을 알려 줘? 보보가 씨앗을 훔쳐다가 악용하면 어쩌려고?”
   “너어는 보보를 알면서 그런 말을 하니?”
   여행자 보보는 자신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대쪽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보보가 마지막 장에서 여행을 그만둔다면, 릴링이 보기에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여태까지 보보가 원칙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이런 캐릭터는 마지막에 한 번 원칙을 어기게 되어 있다니까? 보보는 분명히 자기 가문의 과거 때문에 고민할 거야. 그러다 결국 시간 여행을 해서 U를 살려. 그 대가로 모든 힘을 잃고 마는 거야. 그래서 더 이상 여행할 수 없게 된다…… 얼마나 완벽해?”
   “너야말로 보보를 너무 모르는 거 아니야? 죽은 사람을 함부로 살리면, 보보가 여태까지 지켜온 게 전부 헛수고가 되잖아!”
   투오런이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습니다.
   “그래서 벌을 받는…… 안 되겠다. 유나니한테 확인해 볼래?”
   릴링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습니다.
   “그래, 확인해! 누가 맞는지 함 보자.”
   둘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투오런네 집으로 달렸습니다. 유나니에게 전화를 걸면서도 네가 맞네 내가 맞네 옥신각신했지요. 그런데 세상에, 밝혀진 진실은 시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유나니가 말했습니다.
   “응? 둘 다 틀렸어. 보보는 할머니 될 때까지 계속 여행자로 살아.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도와달라고 찾아오니까 귀찮아서 은퇴해 버린 건데?”
   “뭐어? 마지막 장에서 여행자 일을 그만둔다는 얘기가 그럼……?”
   얼떨떨한 목소리로 투오런이 물었습니다.
   “몇십 년 후에 은퇴한다는 얘기지…… 아, 내가 요약을 이상하게 했나 보다. 미안.”
   “……”
   릴링과 투오런은 허탈한 심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바꿔야 하나?”
   릴링이 말했습니다.
   “그냥 냅둬.”
   투오런이 대꾸했습니다.
   “야, 우리 게 낫다……”
   릴링이 중얼거렸습니다.
   “내 말이……”
   투오런이 그날 두 번째로 이마를 짚었습니다.
   둘은 전화를 끊고 사이좋게 리쟈네 집으로 향했습니다. 기분이 꿀꿀할 땐 『릴링과 친구들의 보보 므와리』를 읽어 줘야 했거든요.

오하림

당연한 무언가가 당연해지지 않는 순간들을 생각합니다.
아, 『순재와 키완』과 함께 읽으시면 더 재밌습니다. 아마도.

2019/07/30
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