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여행에 동반하는 책은 어쩐지 반드시 재미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욕에 사로잡힌다. 독서의 경험은 기대와 실망이 빠르게 교차되는 과정에 불과하지만, 격무에 시달리다 얻은 작고 귀여운 휴가 기간까지도 그런 과정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허구의 이야기가 선사하는 재미의 달콤한 과실만을 방만하게 취하고 싶다. 흐름의 끊김 없이 볼륨감 있는 소설을 탐독하기에 맞춤인 철, 멀리 떠나지 못하기에 먼 곳으로 갈 수 있는 매혹적인 소설 세 권을 골랐다.

   패니 플래그의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김후자 옮김, 민음사, 2011; 원저는 1987)



   소설은 두 개의 시공간을 오른다. 첫번째는 굶주림과 차별이 극심했던 미국의 1930년대, 인구가 200여 명이 전부인 앨라배마주의 한 작은 마을 휘슬스톱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다. 작가는 이 험난했던 시절을 주변 사람들 모두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버리는 마성의 톰보이 여성 ‘이지’를 중심으로 더없이 유쾌하고 밝은 필치로 그려낸다. 다른 하나는 1980년대 앨리배주의 최대 도시 버밍햄에 살고 있는 가정주부 ‘에벌린’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모친의 죽음과 남편의 오랜 무관심, 장성한 자녀들의 외면과 더불어 진행된 중년기 호르몬 변화로 인해 그는 심각한 자존감 하락을 느끼는 중이고 모범적인 가정주부를 위한 보수적인 여성 커뮤니티 모임에서도 마음을 붙이지 못한다. 그런 그가 고약한 시어머니의 병문안을 위해 방문한 요양원에서 이지의 가족을 만나 50년 전 휘슬스톱의 마을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삶의 활력을 찾아간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사는 법을 다시 개발하는 문학의 효과가 두 시차 속을 유유히 가로지른다.
   이지는 자신의 첫사랑인 ‘루스’가 폭력적인 남자와 결혼하여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를 구출해 흑인 가정부 가족과 함께 카페를 운영하며 루스가 낳은 아이를 함께 기른다. 언제나 쾌활한 그들은 가족을 잃은 이웃을 기꺼이 거두고, 굶주리는 거리의 노동자와 가게에 들어올 수 없는 유색인종들을 외면하지 않기에 카페는 언제나 객식구들로 붐빈다.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그들이 이웃들에게 언제나 후한 인심을 쓸 수 있었던 까닭은 이지네 가족들이 정부의 물자 조달 기차를 약탈하는 방식으로 나름의 분배 정의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지와 그의 흑인 하인은 루스의 폭력적인 전남편을 살해했다고 법정에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데, 마을 사람들이 재기를 발휘하여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장면은 이 작은 마을 공동체의 도덕 관념을 잘 보여준다. 백인 중심의 사법 체계 내에서 영웅적인 형·검사나 탁월한 개인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 전체가 그들만의 질서 체계를 작동시켜 억울하게 기소된 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소설이 선량한 백인의 입장에서 쓴 아름다운 남부 판타지라는 지적 또한 유효하지만, 작가가 더욱 조명하고 싶었던 것은 그 한계 안에 깃들어 있는 일상적 수행성이다. 작가는 소수자들을 억압받고 불행한 존재로만 그리는 방식에 거리를 두고, 작은 마을 안에서 일어나는 유의미한 전복적 실천들에 더욱 집중하는 방식으로 당대인들의 삶을 풍성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이 소설은 남부 출신의 백인 레즈비언 작가가 자신의 한계 속에서 그려낸 여성주의적 세계에 대한 이상향으로 볼 수 있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1992년 존 애브넷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적이 있는데, 원작과 다르게 이지와 루스의 레즈비언적 관계가 모호하게 표현되었다. 이들의 성적인 관계가 강조되면 백인과 흑인이 힘을 합쳐 KKK단원인 가부장을 구워삶아버리는 이 통쾌한 인종 간 연대와 승리의 서사가 불경스런 동성애 서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토마토튀김뿐만 아니라 휘슬스톱 카페의 특제 바비큐소스의 맛 또한 정말이지 너무나 궁금해진다.


   카슨 매컬러스의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서숙 옮김, 시공사, 2014; 원저는 1940)



   대공황기의 미국 남부. 노예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실질적인 차별은 여전하고, 농본주의와 교회 공동체가 보장해주던 남부적 정체성은 북부에서 침투해온 산업 자본주의에 의해 전면 재편되는 중이다. 이 혼돈 속에서 자신만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두 남자가 있다. 한 명은 흑인 의사로 그는 어렵사리 북부에서 의사 교육을 마친 후 소명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하루 종일 고되게 진찰 업무를 본다. 그는 흑인의 출산 제한을 주장하며 이웃들에게 피임 기구를 나누어주고 종교적 구원이 아닌 시민적 교육을 통한 흑인 해방을 주장하며 자녀들에게 청결하고 지적인 흑인이 될 것을 지시하지만, 자신의 계도 사항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녀들을 교회에 데려가는 아내를 패고 이후 자식들에게 평생 외면 받으며 산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있다고 믿는 다른 이는 떠돌이 백인 노동자다. 그는 남부의 노동력이 저임금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해 노조를 조직해 대규모 쟁의를 일으키려 하지만, 공장 노동자들과 늘 대립하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매일 술을 고래처럼 마시며 이곳저곳에서 무단취식하며 살아간다. “너희 개새끼들은 아무것도 모른다.”(351쪽) 이 두 명의 사회주의 계몽주의자들은 마을에 살고 있는 수어를 쓰는 독신 남성 ‘싱어’가 자신의 말을 유일하게 알아듣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여기서 내 말을 알아듣는 유일한 사람이야.”(35쪽) 그들은 싱어가 피부가 하얗고 행동이 단정하다는 점을 들어 그가 무지하고 몽매한 다른 이웃들과는 다른 존재일 것이라고 판단하지만, 사실 싱어가 그들의 진정성을 투영하는 거울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빈 중심인 싱어의 욕망은 무엇인가. 언제나 묵묵하게 타인의 말을 경청하기만 하는 싱어가 유일하게 활기를 보일 때는 그의 옛 동거인이자 정신병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친구를 방문할 때다. 싱어의 친구는 사랑스러운 구석이라고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무뚝뚝하고 괴팍한 사람인데, 그는 자신을 향한 싱어의 애정 공세에 별다른 감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그렇게 취급되듯이 싱어는 친구의 무반응에 자기의 진심을 양껏 투사하고, 그런 친구가 병원에서 기별도 없이 사망하자 싱어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작가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덩치 큰 소녀 믹도 싱어만이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클래식 음악가를 꿈꾸지만 가난 때문에 결국 그만두고 대형 마트에 취업한 믹은 이후 싱어가 남긴 라디오를 들으며 좌절된 꿈을 곱씹는다. 총기 사고와 인종 간 대립으로 어린이와 흑인들은 계속해서 다치거나 죽어나간다. 질식할 것 같은 현실과 그럼에도 계속되는 삶. 의존이라는 인간 공동체의 생존법이 얼마나 취약한 실존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지, 의롭고자 노력하는 일이 어떻게 한순간에 타인도 자신도 집어삼키는 무참한 블랙홀이 될 수 있는지, 보답 받지 못하는 무익한 열정들이 과연 영혼을 보증하는 고결한 행위이기만 한 것인지, 이 소설은 묻는다. “암흑과 광명 사이(439쪽)”, 사람의 외로운 마음은 사냥꾼.


   옥타비아 버틀러의 『쇼리』(박설영 옮김, 프시케의숲, 2020; 원저는 2005)



   옥타비아 버틀러의 생애 마지막 저작 『쇼리』에 등장하는 뱀파이어족 ‘이나’와 인간의 관계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착취’하거나 ‘혐오’하는 관계가 아니라 일종의 제휴를 체결하고 있는 ‘공생 관계’다. 이나에겐 식사인 흡혈 행위는 인간에겐 극강의 오르가즘이기 때문에 이에 중독된 인간은 자신을 깨문 이나에게 무조건적 복종 상태에 빠지고, 그 대가로 오래 지속되는 젊음과 건강을 선사받는다. “어떻게 역겹고 고통스러워야 할 일이 이토록 기분 좋을 수 있죠?”(39쪽) 하지만 한 사람이 건강하게 제공할 수 있는 피의 양은 제한되어 있고, 이나는 굶주리면 제어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살육을 저지르기 때문에 이나와 공생인들은 사랑하는 서로를 지키기 위해 다자간의 파트너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래서 이들이 상대와 자신을 길들이며 만들어가는 가족 체계는 이성애 일부일처제를 훌쩍 초과한다.
   기억을 잃은 채 어느 동굴에서 깨어난 주인공 ‘쇼리’는 열한 살 어린이와 같은 체격에 피부가 검은 이나족 여성으로, 모계 가족과 부계 가족이 모두 살해당한 가문의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다. 그는 곧 길가에서 만난 한 백인 남성과 첫번째 공생관계를 맺고 자신의 기억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한다. 기억을 몽땅 잃은 쇼리가 뱀파이어 소설을 읽으며 흡혈귀들이 혐오 받는 다양한 역사적 존재들의 누빔점이 되고 있음을 학습하고 자신이 그 소설들 속의 묘사와 일치하는지를 대입해보며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과정은 퀴어하다. 이후 쇼리는 자신이 유전자 변형 실험을 통해 태어난 인간과 이나의 혼혈임을 알게 된다. 쇼리의 피부가 검은 까닭은 뱀파이어로서 낮 생활에 더욱 잘 적응하기 위한 기능적 선택에 불과하지만, 쇼리의 첫번째 공생인은 쇼리가 젊은 흑인 남성을 공생인으로 들일 때에는 중년의 백인 여성을 들일 때와는 다른 종류의 질투를 느낀다.
   ‘이나 순혈주의’를 위협하는 과학 실험을 한 쇼리 가족을 향한 학살 사건에 대한 법정 장면은 끝없이 저의를 의심받는 피해자들에 대한 기시감 넘치는 말들을 재현한다. ‘트라우마 때문에 정신이 성치 않은 이의 주장은 믿을 수 없다’ ‘피해자의 출생 성분이 불순하다’ ‘피해 사실은 안타깝지만 운이 없는 사고일 뿐이다’ ‘가해 집단의 사회적 공헌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등등. 어디서 자주 듣던 소리들이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가 않다. 공동체가 “우정과 동맹을 소홀히 관리”(425쪽)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인종, 성, 중독, 친족, 법률 체계에 대한 난폭하고도 섹시한 SF 상상력.


오은교

읽고 씁니다.

2020/07/28
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