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측면에서 디지털 공간이 점점 중시되는 요즘, 오히려 물리적인 장소가 갖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비단 내가 도시 공간을 연구하는 인류학자라서가 아니라 실제 인간이 땅을 밟고 다니는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물질적인 세계에 대한 강조가 더해질수록 물질적인 공간 혹은 장소가 지닌 중요성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물리적 장소에서 실제로 겪는 경험을 다룬 글에 더 관심이 간다. 특히 요즘 내 눈에 들어오는 건 서로 다른 장소를 오가는 이동의 경험이다. 우리는 보통 이동을 하나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생각한다. 출발지와 목적지는 분명한 곳으로 여겨지는 반면, 그 사이는 되도록 빨리 통과해야 하는 공백처럼 취급되기 쉽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장소에 대한 감각은 그곳에 도착한 뒤에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곳을 향해 가고, 그곳을 떠나 다시 돌아오는 반복 속에 우리는 장소와 관계를 맺는다. 장소는 머무는 곳일 뿐 아니라 다른 곳을 오가는 동안 만들어지는 관계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임성연과 박현진의 「이동하는 기획, 연결되는 도시」는 서로 다른 도시에서 문화예술 기획을 매개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해온 기획자들은 제주와 순천, 부여와 속초 등 여러 지역으로 이동한다. 이들의 이동에서 흥미로운 점은 활동의 무대가 달라진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장소가 바뀔 때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 기획의 방식 또한 조금씩 흔들리고 수정된다.

지역 행사를 할 때마다 이야기하는 부분은 무소속연구소 메인 멤버들의 공통점이 서울 혹은 수도권에서 나고 자란 서울 촌년, 촌놈들, (…) 어쩌면 지역에 대한 판타지가 많은 사람들이 중심이었던 것 같아요.

―임성연·박현진, 「이동하는 기획, 연결되는 도시」 부분

낯선 장소로 향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장소에 앞선 어떤 이미지를 품고 이동하기 마련이다. ‘지역’이라는 말 역시 그곳에 실제로 사는 사람들의 일상과는 다른 형태의 상상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에 등장하는 여러 도시로의 이동은 이미 알고 있던 장소를 확인하는 과정이라기보다 자신이 품고 있던 장소의 이미지를 수정해가는 과정에 가깝다.
  특히 이들이 부여에서 깨달았다는 “굴러온 돌은 굴러온 돌일 뿐 주인공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은 이 과정을 인상적으로 압축한다. 새로운 기획을 가지고 어떤 장소로 이동했다고 해서 그곳이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는 이미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이 있고, 고유한 생활의 리듬과 시간이 있다. 외부에서 온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빈 공간을 자신의 방식으로 새롭게 채우는 일이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관계망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일에 가깝다.
  그 점에서 글의 제목에 들어 있는 ‘연결되는 도시’라는 표현이 흥미롭다. 이동하는 건 기획자이지만 그 이동을 통해 연결되는 것은 서로 떨어져 있던 도시만이 아니다. 기획자와 지역의 사람들, 자신들이 상상했던 지역과 실제로 마주한 장소, 이전의 경험과 새롭게 배운 감각이 함께 연결된다.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새로운 장소를 만든다고 말하기보다, 이동을 통해 이미 존재하던 장소와 새로운 관계 하나를 만들어간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터이다.
  나 역시 여러 지역에서 열리는 행사나 축제 등을 찾아다니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어떤 도시를 방문한다는 건 유명한 장소 몇 군데를 확인하는 것과는 다르다. 행사가 열리는 공간을 찾아가는 길, 숙소에서 행사장까지 반복해서 오가는 동선, 그 사이에서 우연히 발견한 식당이나 카페 같은 것들이 그 도시를 기억하게 만든다. 방문 전에는 지도 위 하나의 지명이었던 곳이 며칠 동안의 이동을 거치면서 조금씩 구체적인 장소가 된다.
  그런데 낯선 도시로 이동할 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자주 반복하는 이동에서도 장소는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그 점에서 안은별의 「통근과 사회」는 나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맞물려 더욱 깊이 공감하게 만든 글이었다.

나 역시 출강하는 대학 중 하나가 신칸센을 이용하면 꽤 빨리 갈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늘 백 분이나 걸리는 재래선 급행열차를 선택했다. (…) 나는 언제나 이 넉넉한 ‘가는 중’이 나를 영점으로 맞추는 시간, 혹은 내가 잠깐 사라지고, 그 때문에 나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열차에서 내려 버스 정류장으로 가면 그때부터 나는 ‘저 선생’으로 발견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캠퍼스에 들어서면 그 윤곽은 더욱 명백해진다.

―안은별, 「통근과 사회」 부분

평소에 나 스스로 ‘캠퍼스 안에서나 선생이지, 학교 밖으로 나가면 그냥 아저씨’일 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입장에서 안은별의 이런 이야기는 무척 익숙하게 다가왔다. 대학이라는 장소를 벗어나는 순간 그 안에서 작동하던 역할은 함께 느슨해진다. 반대로 캠퍼스로 향하는 길에서는 아직 아무도 나를 ‘선생’이라고 부르지 않는데도 조금씩 그 역할을 준비하게 된다. 결국 한 사람의 사회적 역할은 특정한 장소에 도착하는 순간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향해 이동하는 동안 천천히 입혀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통근과 사회」에서 가장 흥미로운 공간은 출발지인 집도, 목적지인 학교도 아니다. 두 장소 사이를 잇는 열차와 버스, 그리고 그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다. 우리는 통근을 대개 줄여야 할 시간으로 생각한다. 빨리 갈 수 있을수록 좋고, 환승은 적을수록 좋다. 그런데 안은별은 오히려 조금 더 오래 걸리는 이동을 선택한다. 그 시간에는 아직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에 있다는 것은 잠시나마 주어진 역할로부터 풀려나는 것이기도 하다. 집에 있을 때의 역할에서도, 일터에서 요구되는 역할에서도 조금 떨어져 있는 시간.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다시 주어진 역할의 윤곽이 또렷해지지만 그 전까지는 자신을 잠시 흐릿하게 둘 수 있다. 이동은 단지 시공간의 변화가 아니라 한 사람의 상태가 바뀌는 과정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통근의 공간이 흥미로운 건 혼자만의 전이 상태 때문만은 아니다. 열차와 버스 안에서 우리는 낯선 사람들과 함께 움직인다. 특별한 관계를 맺지는 않지만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고, 자리를 내어주거나 비켜서고, 때로는 불쾌해하거나 배려하면서 같은 공간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다. “서로 무시하지만 가까이에 있음과 얽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이동중인 대중교통 공간이야말로 사회적인 것과 윤리를 사고하기에 적절한 현장”이라는 안은별의 표현이 특히 마음에 남은 것도 그래서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있을 때 사람들은 대개 서로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휴대전화를 바라보고, 이어폰을 끼고, 각자의 영역을 차지한 채 목적지를 향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무관심 속에 우리는 수많은 타인과 함께 도시를 살아간다. 누군가의 출근길 혹은 등굣길, 서로 다른 목적지로 가는 길이 잠깐씩 겹친다. 이동의 공간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타인과 직접적인 관계 없이도 서로의 삶과 잠시나마 조우하며 살아가는지를 매우 일상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도시를 경험하는 방식 역시 조금 다르게 보인다. 집과 일터, 학교와 카페, 행사장과 숙소처럼 분명한 목적지를 점으로 찍어놓는 것만으로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경험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그 점과 점 사이를 어떻게 이동하고, 누구와 스쳐지나가며, 어떤 역할을 벗고 다시 입는지가 함께 고려될 때 비로소 한 사람에게 그 도시가 장소로 각인된다.
  우리는 장소에서 장소로 이동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동하는 기획, 연결되는 도시」와 「통근과 사회」를 함께 읽고 나면 그 순서를 뒤집어보고 싶어진다. 우리는 이동하면서 장소를 만들어간다. 낯선 도시로 향하면서 자신이 품었던 장소의 이미지를 고쳐가고, 매일 반복되는 통근길에서는 익숙한 장소와 나 자신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조정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장소뿐만이 아니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채 ‘이동하는 중’인 시간 동안, 그곳에 도착할 나 역시 조금씩 만들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는 우리가 목적지로 삼아 도착하는 곳들의 집합이라기보다, 그 사이를 오가는 동안 생겨나는 관계들의 집합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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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연, 박현진, 「이동하는 기획, 연결되는 도시」 click
안은별, 「통근과 사회」 click

정헌목

도시 공간과 주거, 공동체를 연구하는 인류학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류학전공에서 학생들과 함께 한국의 다양한 사회문화적 변화 양상을 연구해왔다. 『낯선 이야기는 우리 곁에 있다: SF와 인류학이 함께 그리는 전복적 세계』(공저)를 썼고, 『도시는 어떻게 서사가 되는가: 서울의 안과 밖을 읽는 여섯 가지 제안들』에 엮은이로 참여했다.

2026/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