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토리얼 눈송이 환송대
이하나
도쿄 신주쿠 골든가이에는 ‘라 주테’1)라는 이름을 단 작은 바가 있습니다. 크리스 마커의 〈환송대〉(La Jetée)의 제목을 빌린 이곳에서라면 영화에서처럼 시간과 기억이 비선형으로 흐를 것 같습니다.
웹진 《비유》 82호 ‘비평 교환’을 잇는 환승 통로는 “영화는 21세기에 비로소 미술이 되었다”라고 한 토마스 엘새서의 문장입니다. 두 편의 글은 디지털 플랫폼 시대에 영화와 미술이 잃어버린 미래, 혹은 아직 오지 않은 과거의 가능성을 나란히 이야기합니다. 윤원화의 「새로운 그림자의 세계」, 윤지원의 「영화는 이미 우리의 문화가 아니었다」를 읽으며 저는 <카사블랑카>를 보면 “과거를 다시 사는 게 아니라 미래를 다시 사는 것 같다”고 한 마르크 오제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해상도 높은 장면’에서 오헬렌과 유재인은 실현되지 않을 시나리오를 펼쳐 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안무를 배우는” 그레타는 지금, 내세(來世)의 리허설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나리오 속 그레타가 “사랑은 유한할 때 더 잘 작동”한다고 믿는다면(「그레타 오토」), 김본 소설 속 영화감독 옥희는 “사랑한다는 말을 누군지도 모르는, 미래에 만나게 될지 아닐지도 모르는 대상에게 쓰는 게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합니다(「사랑은 옥에 티」).
유현아의 「적」과 황준서의 「죽음 장사꾼과 에코사이드」는 우리가 마주한 ‘적’(敵)을 각각 ‘청소년시’와 ‘사회학’의 언어로 환기합니다. 전쟁과 학살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 세계에서 인간/비인간이 겪고 있는 폭력(들)에 때로 무력감이 압도하지만, 그럼에도 저항을 포기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여기 있습니다. 그 목소리들은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합니다.”라는 사도 바울의 목소리와 멀리 있지 않습니다(윤지원, 「영화는 이미 우리의 문화가 아니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보이지 않아도요? (…) 보이지 않아도 완성할 수 있어요?”라고 묻는 “용희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낄 수 있고(김세정, 「품새단장」), 그러한 물음에 “말 안 해도 다 보였어. 고양이 꼬리처럼.”(김태호, 「고양이 꼬리를 달면」)이라고 답해 줄 수 있습니다.
《비유》 ‘큐레이션’에서 정헌목은 “장소는 머무는 곳일 뿐 아니라 다른 곳을 오가는 동안 만들어지는 관계의 결과일 수도 있다.”라고 씁니다. 정헌목이 도시 연구자의 관점에서 물리적인 공간상의 이동 경험을 반추한다면, 전승민은 ‘문학하는 사람들’에서 비평가로서 경험한 독자의 “흔적”을 따라 걷습니다. 글이 향하는 행선지는 ‘독자’와 ‘비평’이 서로 입장(立場)을 주고받으며 연결되고, 문학장에 입장(入場)하여 ‘읽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현장입니다. 비평란의 심완선은 「SF와 시의 동행과 불화」에서 “목적지로 직행하는 경로 대신 다른 수단을 경유하는 길을 선택”하는 ‘은유’라는 탑승권을 손에 쥐고 SF와 시가 예비한 “이주선”에 오릅니다.
이번 호에 모인 글들은 ‘잠재’와 ‘잔여’ 사이, ‘소실’과 ‘분실’ 사이를 오가며 무수한 장소/비장소를 만듭니다. 밤의 놀이터에서 뺑뺑이 위에 몸을 싣고 “궤도 속에서 와르르 웃”으며 “너와 내가 빠르게 뒤섞”이는 한순간처럼요(전앤, 「빙빙 돌아 너에게」).
“은은한 염화미소보다” 광배(光背)가 떨어져나간 뒤통수에 머무는 눈길이 있기에, “천사백 년이 넘도록” 빛은 여기에서 흐릅니다(나희덕, 「후광을 잃고서」). ‘사유의 방’ 뒤를 돌면 “어디로든 펼칠 수 있겠다는 바깥이” “인덱스처럼” 나타날지도 모를 일입니다(조온윤, 「세상의 인덱스」).
눈송이는 없다가 있는 것, 출현했다가 사라지는 것, 쌓였다가 녹는 것, 떠났다가 다시 도착하는 것. 82호를 읽는 동안 분명 올겨울의 첫눈이 내릴 테지요? 《비유》가 하나의 장소라면, 우리가 《비유》 안을 오가며 이동하는 경로는 이 눈밭 위에 어떤 인덱스를 남길까요? 이 계절, 당신과 《비유》 사이를 잇는 선이 그릴 비정형의 무늬가 궁금합니다. 첫눈이 녹기 전에 당신이 이 지면(誌面/地面)으로 걸어오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웹진 《비유》 82호 ‘비평 교환’을 잇는 환승 통로는 “영화는 21세기에 비로소 미술이 되었다”라고 한 토마스 엘새서의 문장입니다. 두 편의 글은 디지털 플랫폼 시대에 영화와 미술이 잃어버린 미래, 혹은 아직 오지 않은 과거의 가능성을 나란히 이야기합니다. 윤원화의 「새로운 그림자의 세계」, 윤지원의 「영화는 이미 우리의 문화가 아니었다」를 읽으며 저는 <카사블랑카>를 보면 “과거를 다시 사는 게 아니라 미래를 다시 사는 것 같다”고 한 마르크 오제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해상도 높은 장면’에서 오헬렌과 유재인은 실현되지 않을 시나리오를 펼쳐 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안무를 배우는” 그레타는 지금, 내세(來世)의 리허설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나리오 속 그레타가 “사랑은 유한할 때 더 잘 작동”한다고 믿는다면(「그레타 오토」), 김본 소설 속 영화감독 옥희는 “사랑한다는 말을 누군지도 모르는, 미래에 만나게 될지 아닐지도 모르는 대상에게 쓰는 게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합니다(「사랑은 옥에 티」).
유현아의 「적」과 황준서의 「죽음 장사꾼과 에코사이드」는 우리가 마주한 ‘적’(敵)을 각각 ‘청소년시’와 ‘사회학’의 언어로 환기합니다. 전쟁과 학살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 세계에서 인간/비인간이 겪고 있는 폭력(들)에 때로 무력감이 압도하지만, 그럼에도 저항을 포기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여기 있습니다. 그 목소리들은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합니다.”라는 사도 바울의 목소리와 멀리 있지 않습니다(윤지원, 「영화는 이미 우리의 문화가 아니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보이지 않아도요? (…) 보이지 않아도 완성할 수 있어요?”라고 묻는 “용희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낄 수 있고(김세정, 「품새단장」), 그러한 물음에 “말 안 해도 다 보였어. 고양이 꼬리처럼.”(김태호, 「고양이 꼬리를 달면」)이라고 답해 줄 수 있습니다.
《비유》 ‘큐레이션’에서 정헌목은 “장소는 머무는 곳일 뿐 아니라 다른 곳을 오가는 동안 만들어지는 관계의 결과일 수도 있다.”라고 씁니다. 정헌목이 도시 연구자의 관점에서 물리적인 공간상의 이동 경험을 반추한다면, 전승민은 ‘문학하는 사람들’에서 비평가로서 경험한 독자의 “흔적”을 따라 걷습니다. 글이 향하는 행선지는 ‘독자’와 ‘비평’이 서로 입장(立場)을 주고받으며 연결되고, 문학장에 입장(入場)하여 ‘읽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현장입니다. 비평란의 심완선은 「SF와 시의 동행과 불화」에서 “목적지로 직행하는 경로 대신 다른 수단을 경유하는 길을 선택”하는 ‘은유’라는 탑승권을 손에 쥐고 SF와 시가 예비한 “이주선”에 오릅니다.
이번 호에 모인 글들은 ‘잠재’와 ‘잔여’ 사이, ‘소실’과 ‘분실’ 사이를 오가며 무수한 장소/비장소를 만듭니다. 밤의 놀이터에서 뺑뺑이 위에 몸을 싣고 “궤도 속에서 와르르 웃”으며 “너와 내가 빠르게 뒤섞”이는 한순간처럼요(전앤, 「빙빙 돌아 너에게」).
“은은한 염화미소보다” 광배(光背)가 떨어져나간 뒤통수에 머무는 눈길이 있기에, “천사백 년이 넘도록” 빛은 여기에서 흐릅니다(나희덕, 「후광을 잃고서」). ‘사유의 방’ 뒤를 돌면 “어디로든 펼칠 수 있겠다는 바깥이” “인덱스처럼” 나타날지도 모를 일입니다(조온윤, 「세상의 인덱스」).
눈송이는 없다가 있는 것, 출현했다가 사라지는 것, 쌓였다가 녹는 것, 떠났다가 다시 도착하는 것. 82호를 읽는 동안 분명 올겨울의 첫눈이 내릴 테지요? 《비유》가 하나의 장소라면, 우리가 《비유》 안을 오가며 이동하는 경로는 이 눈밭 위에 어떤 인덱스를 남길까요? 이 계절, 당신과 《비유》 사이를 잇는 선이 그릴 비정형의 무늬가 궁금합니다. 첫눈이 녹기 전에 당신이 이 지면(誌面/地面)으로 걸어오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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