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꽃나무 아래 서 있었다.
  스카프를 날리며
  스카프가 얼굴을 덮었다.
  스카프가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고개를 흔들었을 때
  하얀 꽃들이 빠르게 나타났다.
  허공에 점점이 떠 있다가 흩어졌다.
  꽃잎 한 장만이 겨우 내 손가락에 걸렸다.
  알 수 없는 버튼으로 보였다.
  버튼을 가볍게 눌렀다.
  내가 정체를 드러낼지도 모른다.

  어지러운 바닥을 떠돌다가
  꽃잎들은 날아가버렸다.
  하얀 나무 옆에 하얀 나무가 또 있어서 나뭇가지를 쭉 펴지도 않고 계속
  구부러진 나무를 이어가서
  하얀 꽃들이 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하얀 나무에 잠겨 있었다.
  하얀 나무가 하늘로 날아가버릴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스카프를 펄렁이며

이수명

1994년 《작가세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 『붉은 담장의 커브』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마치』 『물류창고』 『도시가스』 『정오의 총알』을 출간했다. 산문집 『나는 칠성슈퍼를 보았다』 『내가 없는 쓰기』 『정적과 소음』 『흰 컵의 휴식』, 연구서 『김구용과 한국 현대시』, 시론집 『횡단』 『표면의 시학』, 평론집 『공습의 시대』 등이 있다.

하얀 꽃나무만 보면 그 아래 들어가 머물곤 했다. 이 장면을 시로 쓰고 싶었는데 언제나 잘되지 않았다. 하얀 나무에 대한 시를 계속 쓸 것 같다. 검은 나무는 아니다.

2026/09/02
8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