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부터 서로의 일상과 작업에서 출발한 문장과 소리를 주고받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텍스트 스코어를 구성하고 해석하는 협업을 이어갔다. 한 사람의 언어는 다른 사람의 경험과 감각을 통과해 소리와 텍스트, 연주가 되고, 다시 이미지와 영상으로 옮겨지며 새로운 형태로 변화했다. 이 과정에서 스코어는 완성된 결과를 상정한 지시문이 되기보다는 서로의 언어를 건네고 변형시키는 매개가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주고받음을 통해 번역을 원본의 재현이 아닌, 서로 다른 언어와 매체 사이를 오가며 예기치 않은 상태와 또 다른 언어를 만들어가는 창작의 과정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흑백 라인 드로잉. 와인잔 모양의 투명한 유리잔에 물이 절반쯤 차 있다.



〈최은빈을 위한 구성〉
주정현

- 수행 지침 -

아래의 지시를 행동으로 옮기세요.

각 지시를 휴대폰 또는 다른 녹음기로 녹음하세요. 영상은 촬영하지 마세요. 두 개 이상의 녹음기를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두 개의 녹음기를 사용하는 경우, 하나는 물체 가까이에 두고, 다른 하나는 물체에서 멀리 둘 수 있습니다.

녹음한 파일의 시작과 끝을 자르는 것 이외에는 편집하지 마세요.

이 지시는 쓰인 순서에 따라 수행할 수도 있고, 순서를 뒤섞어서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단, 동일한 알파벳 내의 지시들은 순서대로 수행해야 합니다(예: A-1 다음에 A-2를 수행).

각 지시를 녹음한 오디오 파일은 (하나의 이어진 파일이 아닌) 별개의 파일로 저장해도 됩니다. 모든 파일을 주정현의 이메일로 전송하세요.


- 구성 1번 -

소요시간: 동작당 2분가량

A-1. 목재 조각을 사포로 문지르세요.
A-2. 바닥을 빗자루로 쓸거나 진공청소기로 미세요.
B-1. 물, 커피, 또는 차를 주전자에 담아 팔팔 끓이세요.
B-2. 가열된 액체를 얼음이 담긴 큰 통에 부으세요.
C-1. 러닝머신 위를 달리세요. 먼저 최대한 천천히 달린 후, 최대한 빨리 달리세요.
C-2. 비 오는 날 밖에 나가 가만히 서 있으세요. 녹음기를 우산 아래에 두세요.


2026년 5월


Composition for Eunbin Choi
Jeonghyeon Joo

- General Instructions -

Put the below instructions into action.

Record each instruction with a phone or any audio recording device. Do not record the video. You may utilize more than one recording equipment (e.g., in case of two, one close to the object, the other one far from the object).

Do not edit the sound file other than trimming the beginning and ending of the file.

You may or may not execute these instructions in sequence. However, instructions within the same letter must be executed in sequence (e.g., A-1 and then A-2).

You may save each action as a separate audio file. Send all files (A-C) to Jeonghyeon Joo’s email.


- Composition No. 1 -

Duration: A couple of minutes per action

A-1. Sand a piece of wood.
A-2. Sweep or vacuum the floor.
B-1. Boil a kettle of water (or coffee or tea).
B-2. Pour it over a large bucket filled with ice.
C-1. Run on a treadmill as slow as you can, and then as fast as you can.
C-2. Stand outside on a rainy day. place the recorder under your umbrella.


May 2026



흑백 라인 드로잉. 와인잔 모양의 투명한 유리잔이 텅 비어 있다.



〈1인의 연주자와 빈 유리컵을 위한 텍스트 스코어 ‘빈 유리컵’〉
최은빈

- 연주 지시문 -

콘셉트: 본 악보는 청각적 기억을 재구성하기 위한 스코어입니다.
오브제: 연주자는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투명하고 빈 유리컵을 활용하여 연주하고, 말하고, 귀 기울이는 행위에 참여합니다.
환경과의 상호작용: 연주자는 주변의 사물, 자연적 요소(예: 햇빛, 바람, 먼지, 물), 혹은 연주자 자신의 신체가 만드는 미시적 움직임과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함으로써 악보의 촉각적 요소들을 확장하거나 대체할 수 있습니다. 이때 유리컵은 연주자의 신체 내부와 외부 공간을 연결하는 일차적인 공명기로 기능합니다.


2026년 6월


Text score ‘an empty glass’ for one performer & an empty glass

- Performance Instructions -

Concept: This is an audio-memory reconstruction score.
The Object: The performer is invited to utilize a transparent, empty glass cup in accordance with the environment to engage in playing, speaking, and listening.
Environmental Integration: The performer may expand or replace the tactile elements of the score by dynamically interacting with surrounding objects, natural elements (e.g., sunlight, wind, dust, water), or the micro-movements of their own body. The glass cup functions as a primary resonator connecting the internal anatomy to the external site.


June 2026



텍스트가 상단에서 하단으로 완만한 S자 곡선을 그리며 파편적으로 배치된 구체시 형태의 이미지. 시는 “너에게 안겨오는 한 낮 빛의 감각”으로 시작해 “온전한 고요의 투명한 < 그대로의 > 침묵”으로 끝난다. 텍스트들의 사이사이에는 위아래를 잇는 긴 화살표와 곡선, 그리고 부등호를 넓게 늘린 듯한 모양의 기호가 그려져 있다. 이 기호는 악상 기호인 데크레셴도(점점 작게)와 크레셴도(점점 크게)의 모양과도 닮았다.



앞선 구체시의 영문 버전 이미지. 동일하게 S자 곡선과 긴 화살표, 악상 기호 모양의 선들 사이로 텍스트가 배치되어 있다. 시는 “you need a caress of daylight feeling”으로 시작해 마지막 텍스트 “irreducible < transparent > silence”로 이어진다.




흑백 라인 드로잉. 물이 담긴 유리잔의 테두리에 악기 활이 맞닿아 있고, 잔에 담긴 물이 출렁이고 있다.



활은 현악기에 사용되는 어떤 종류의 활이든 될 수 있다.1)

2026년 7월


The bow can be of any type used on a bowed string instrument.

July 2026



흑백 라인 드로잉. 유리잔에 담긴 물이 거칠게 출렁이며 유리잔 밖으로 튀어오르고 있다.



구체시 타이포그래피 이미지. 상단에는 "The bow can be of any type used on a bowed string instrument"라는 문장이 빽빽하게 겹쳐져 짙은 검은 면을 이룬다. 하단으로 갈수록 문장이 점차 변형, 생략되며 분절되다가 "In-stru-ment."로 마무리된다.







〈최은빈의 텍스트 스코어 재구성〉
주정현

이 악보는 최은빈의 텍스트 스코어 ‘an empty glass’를 연주를 위해 재구성한 것이다. 이 스코어는 한 명이 단독으로 연주하거나 여러 명이 함께, 동시에 연주할 수 있다.

이 악보는 총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부분은 A, B, C, D, E, F로 구분된다. 각 부분은 순서대로 연주할 수도 있고, 임의의 순서로 배열하여 연주할 수도 있다. 각 부분은 반복할 수 있으나 생략할 수 없다.

연주자는 각 부분을 원하는 길이만큼 연주할 수 있다. 여러 명이 연주하는 경우, 총 연주 길이를 사전에 협의해야 한다.

악보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변수(들)의 결정과 조절은 연주자의 자율에 맡긴다.

이 악보는 다른 형태로 재구성될 수 있다.

연주를 위해 필요한 도구는 다음과 같다.

1) 다리가 있는 와인 잔
2) 약 500ml의 물
3) 현악기 활
4) 위의 도구들을 올려놓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
5) 빨대


2026년 8월



A부터 F까지, 총 여섯 부분으로 나뉜 연주를 위한 스코어. 연주자의 행위에 대한 안내문과 소리의 세기(작게, 조금 작게, 조금 크게 등)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다.



이 스코어를 공적인 공간에서 연주하는 경우, 연주자의 배치는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다.
한 명이 연주하는 경우, 연주자는 연주 공간의 중앙에 위치한다.
두 명이 연주하는 경우, 연주자는 연주 공간의 양 끝에 위치한다.
세 명이 연주하는 경우, 연주자는 연주 공간의 양 끝과 중앙에 위치한다.
네 명이 연주하는 경우, 연주자는 연주 공간의 네 꼭짓점에 위치한다. 네 꼭짓점이 없는 경우에는 서로 가장 멀리 떨어질 수 있는 지점을 찾아 연주지점으로 삼는다.
다섯 명이 연주하는 경우, 연주자는 연주 공간의 네 꼭짓점과 중앙에 위치한다. 네 꼭짓점이 없는 경우에는 네 연주자가 서로 가장 멀리 떨어질 수 있는 지점을 찾아 연주지점으로 삼고, 다른 연주자는 그 중앙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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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상의 인원이 연주하는 경우, 연주자 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형태로 배치한다.



흑백 라인 드로잉. 와인잔 안에 크고 작은 거품 방울들이 입구 위로 넘쳐흐를 듯 가득 채워져 있다.




녹음 최은빈, 곡 구성 주정현, 영상 최은빈. 감상할 때 헤드폰 또는 이어폰을 착용해주세요.


최은빈 작가는 스코어를 놀라우리만큼 충실히 이행해 여러 쓸 만한 소리들을 보내주었다. 그 소리들 중에는 마치 얼음을 씹어 먹는 것을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바삭바삭한 것도, 피부에 바짝 대고 통화하는 목소리처럼 먹먹하고 어눌한 것도, 녹음 당시의 상황만큼이나 긴박한 것도 있었다. 이것들을 자르고 붙여 하나의 흐름으로 엮을 때에는 소리들 사이에 인과관계나 위계를 만드는 대신, 서로 다른 질감과 상황이 가지런히 놓이도록 하고 싶었다. 곡이 진행되면서 여러 소리 조각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중에는 하나의 문지르는 동작에서 나온 조각들도 있고, 다른 상황에서 수집된 소리가 우연히 비슷한 질감을 가져서 이를 중첩하여 만들어진 조각들도 있다.
  소리 수집은 최은빈 작가가 나의 스코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지만, 곡을 구성할 때는 최은빈 작가의 〈빈 유리컵〉 스코어의 파편들을 좇아가며 만들어보려고 노력했다. 이 음악이 〈최은빈을 위한 구성〉과 〈빈 유리컵〉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상태이기를, 그리고 또 다른 상태로 변화하려고 몸부림치는 순간이기를 바란다. (주정현)


주정현의 지시문을 따라 녹음했던 일상의 소리들이 하나의 사운드로 완성되어 돌아왔을 때, 직접 녹음한 소리임에도 원래의 상황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익숙했던 소리들은 완전히 새로운 질감과 흐름을 갖게 되었고, 빠른 심장박동처럼 이어지는 소리와 리드미컬하게 등장하는 전자음, 사물의 마찰음은 긴박하게 움직이는 신체와 빠르게 전환되는 장면을 연상시켰다.
  사운드트랙의 제목인 〈The Glassed Body〉는 내가 건넨 스코어 〈빈 유리컵〉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스코어를 작성할 당시에는 ‘얼어붙은 몸’이나 ‘딱딱하게 굳은 몸’을 떠올렸지만, 주정현의 사운드를 통해 다시 바라본 ‘Glassed Body’는 인간의 몸이라기보다는 낯선 환경을 떠도는 외계의 몸처럼 느껴졌다.
  영상에 사용한 푸티지는 오래전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축적해온 짧은 영상 기록들이다. 기억에서 바랜 장면들을 새롭게 마주한 소리와 함께 재구성하며, 아직 자신의 몸을 갖지 못한 어떤 존재가 몸을 찾아 떠도는 여정을 상상했다. 서로 다른 순간에 속했던 이미지와 소리가 만나 이전에는 없던 하나의 몸을 이루는 과정 역시, 예기치 않은 상태의 변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최은빈)

주정현, 최은빈

해금을 연주하고 악기와 사물을 매개로 하는 음악을 만든다. 주로 특정한 사람이나 상황을 위한 음악을 만든다. 웹사이트 바로가기 (주정현)

설치미술 작가이다. 다양한 형태의 언어 조각들을 작업 속 목소리와 장면으로 나타낸다. 현재 금천예술공장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최은빈)

이번 작업에서 스코어를 통해 의사소통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배웠다. 나의 스코어는 주로 어떠한 물체와 도구를 특정한 방법으로 사용해 내가 상상하는 구체적인 소리를 얻기 위한 것이었고, 이번 작업도 처음에는 상대방의 환경을 파악하고 이를 재료 삼아 무언가를 구성해보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작업이 진행될수록 특정한 소리를 획득하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환경과 선택에 따라 스코어가 규정할 수 있는 범위가 어떻게 확장되고 또 얼마나 다양한 의미를 품게 되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이 스코어들도 서로 다른 수행자, 독자, 연주 환경을 거치며 다른 세상을 만나고 계속해서 변화하는 상태로 남아 있기를. (주정현)

최근에는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기보다 외부의 우연한 만남과 자극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이번 협업은 그 틈에서 시작되었다. 평소 혼자 작업하며 대부분의 선택과 방향을 스스로 정해왔기에, 서로의 스코어를 교환하고 수행하는 과정 자체가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마치 편지를 주고받듯, 내가 건넨 문장과 소리가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돌아오고, 다시 그것에 응답하는 과정이 무척 즐거웠다. (최은빈)

2026/09/02
81호

1
주정현, 〈SSEOL-EO!〉(2022) 퍼포먼스 노트 중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