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과대 포장 / 죽은 편지
과대 포장
포도는 서로 붙잡고 있는 과일입니다
떼어놓기 미안하다면 비닐봉지로 싸놓으세요
포장 안에서 포도알은
충분한 이별 숙려 기간을 가집니다
정육면체와 손잡이는 케이크의 형식
겹겹의 비닐은 꽃다발의 형식
상자 안의 상자 안의 상자는 서프라이즈의 형식
가끔은 비닐 안의 애호박처럼
포장이 내용의 생김새를 결정하고
호박이 비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자랍니다
나는 나를 넘어서며 자랐는데요
뜯자마자 흩어진 포장 안의 질소나
묶을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리본처럼
어떤 건 열어보지 않아도
이미 알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급기야 사람은 자기 자신을 포장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물건이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지구 젤리의 지구가
젤리가 아니라
껍질에 그려진 포장인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문득 지구의 본질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지만요
죽은 편지
친구야 잘 지내니?
아무래도 네가 쓴 편지는 읽고 싶지 않아
그래서 네가 보내기 전에 미리 쓴다
제발 편지하지 마
내가 받고 싶은 편지는
왼손이 오른손을 사랑하는 편지다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편지다
세상의 모든 끝을 모은 그런 편지다
지은아, 할미가 죽거든 편지를 써다오
죽은 사람은 읽을 수 없다지만
죽을 수만 있다면 한없이 좋을 것 같구나
죽은 사람은 읽을 수 없다지만
찢은 편지는 죽을 수 있어서
꿈에서 썼던 편지들이 살아 돌아온다
틈으로 기어들어오는 글자를
꾹꾹 눌러 죽인다
글자들이 개미 부스러기처럼 종이 위에 쌓인다
멍이 들었나 뼈가 부러진 의미들
마침내 좀더 나아간
제자리
네가 보낸 편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거든
더는 할말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까?
죽은 사람은 읽을 수 없다지만
읽은 편지는 읽을 수 있다
죽을 수 있다
임지은
대전에서 태어나 《문학과 사회》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무구함과 소보로』와 『때때로 캥거루』가 있다.
2022/04/26
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