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대화는 하나의 텍스트를 두고 다르게 해석하는 두 명의 평론가가 독해의 차이를 독자들에게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형식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고안되었습니다. 대상 텍스트는 《문학동네》 2019년 여름호에 실린 손보미 소설가의 「밤이 지나면」입니다. 문학잡지에 발표된 소설인데다 종이 잡지이다 보니, 독자분들의 접근성을 고려하여 작가에게 양해를 구하고 비유에 재수록 요청을 드렸고 작가의 허락하에 위 소설을 ‘여기’에 싣습니다. 아래의 대화에는 소설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대량 포함되어 있으므로 작품을 먼저 읽은 후에 저희의 대화를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편은 ‘여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호에서 이어집니다)


   한 : 앞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말씀드리자면, 저는 낮과 밤에 대한 소설의 대조가 세계의 비밀로 이어지고, 그것이 약간의 비약을 통해 ‘장애’라는 열쇠 말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장 : 음, 지난번 편에서 선생님께서 ‘과몰입형 이차창작자’라고 스스로 소개하셨는데, 사실상 저는 작품의 ‘본질’이라거나 ‘내부’ 혹은 ‘핵심’ 이런 식의 독해 구조에 동의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장애’라는 열쇠 말로 읽어내시는 것이 비약도 아니고 2차 창작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저 작품이란 거울과 같아서 독자가 작품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거기서 보이는 것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한 :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지난번 각주에서 밝혔다시피 저는 2019년에 이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 장애라는 맥락을 아예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푸코와 장애에 관해 공부하다보니 장애라는 맥락에서 계속해서 읽게 되더라고요.
   장 : 아, 그렇군요. 어떤 작품이 언제 읽히느냐, 어떤 독자가 작품을 언제 읽느냐에 따라 작품의 다른 면이 보이기 때문에 그런 유동성을 비평의 본질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2021년 2월의 한설 선생님이 손보미 작가의 「밤의 지나면」을 ‘장애’라는 열쇠 말로 읽어내는 행위 자체의 가치를 사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그 열쇠 말로 소설을 좀 더 분석해주시겠어요?
   한 : 소설에서 ‘낮’은 외숙모의 시간이며 과학으로 대표되는 정상적 시간입니다. 반면 ‘밤’은 가게 여자의 시간이며 미신으로 대표되는 비정상적 시간입니다. STS로 축약되는 과학기술학에 따르면 근대 이래로 과학은 ‘합리성’을 근거 삼아 평균적 템플릿을 사람들에게 강제하며 헤게모니를 장악해왔는데, 1)외숙모가 가게 여자를 대하는 태도도 이와 비슷합니다. (“비과학적이야. 난 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잖아. (…) 예지몽이라는 거 자체가 있을 수 없어. 그 여자는 거짓말쟁이야.”)
   장 : 음, 그런데 저는 외숙모의 시간을 ‘과학’으로 분류하는 것에 동의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소설에서 나오는 표현과 같이 ‘유사과학’에 가깝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과학’으로 해석하면 의사가 아닌 간호사 출신의 외숙모의 ‘집도’가 가진 특징을 가시화할 수 없지 않나요?
   한 : 바로 그 부분이 제가 말한 ‘세계의 비밀’입니다.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을 구분하여 과학과 기술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2)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영역(‘낮’)엔 의외로 미신적 속성(‘밤’)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습니다.3) 화자는 가게 여자를 통하여 그것을 비로소 마주하게 되었고요.
   장 : 정확히 어떤 장면을 말씀하시는 거죠?
   한 : 가게 여자가 화자에게 “니네 외숙모는 불법 시술자”이며 “나에게 예지몽을 부탁하러 (…) 왔었다고” 밝히는 장면입니다. 아마 여기서 화자는 낮과 밤의 세계는 엄격하게 분리되지 않은 채 혼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장 : ‘낮의 세계’에서 ‘불법 집도’라거나 모여 있는 여자들이 가게 여자의 예지몽에 대해 이야기 나누거나 외숙모가 사실은 가게 여자를 따로 찾아왔다는 걸 알게 됐다는 점에서 낮에 혼재되어 있는 밤은 이해를 하겠어요. 하지만 밤에 혼재된 낮은 뭐죠?
   한 : 이것을 자세하게 말하기 위해선 우선 어째서 화자가 가게 여자를 “부추”기게 되었는지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화자는 외숙모가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가지고 어떻게 가게 여자를 추방시켰는지 생생하게 확인했습니다. (“외숙모가 대화에 적극적이 되는 순간-그래서 미친년이라는 말을 내뱉게 되는-은 따로 있었다. 그건 그 정신 나간 여자가 예지몽을 꾼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였다.”) 때문에 ‘비정상’이라는 낙인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 같자 극도로 불안해하기 시작하지요. (“외숙모가 내 몫의 밥그릇을 챙기는 걸 잊어버리고, 부엌에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나를 쳐다볼 때마다 마음속 깊이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피구 사건이 일어난 후, 매일 아침 외숙모가 코코아를 타줄 때면, 식사 시간마다 죽 같은 걸 만들어서 방으로 가져올 때면, 혹은 매일 밤 내 이마에 약을 발라줄 때면, 그리고 그 말-“여자애 얼굴에 흉이 지면 안 되는데, 쯧쯧”-을 할 때면 나는 속이 울렁거렸고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장 : 음, 이미 화자는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무기로 선택한 것 아닌가요?
   한 : 맞습니다. 화자의 도주는 선제적으로 ‘밤’의 세계를 향해 달아나는 것에 가깝습니다. ‘쫓겨날 바엔 내가 먼저 나간다’는 마음인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자동차가 중앙분리대에 부딪”쳐 화자와 가게 여자가 하는 수 없이 정해진 도로를 벗어나 산길을 택한 장면처럼 실패가 예정된 도주일 뿐입니다.
   장 : ‘실패’의 의미에 대해 좀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어요?
   한 : 소설에서 명시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지만 ‘밤’의 세계로 몸을 내던진 화자의 시도가 처참하게 실패한 까닭은 거기서도 ‘낮’의 원리가 여실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세계의 비밀’이란 ‘낮’과 ‘밤’이 경계 없이 섞여 있다는 사실이겠죠. 농담으로 던지는 말인데, 화자가 그것을 처음부터 알았다면 이렇게 험난한 방황(?)을 겪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는 거의 소리를 지르듯이 말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완전한 진실이었다. 우연히 발설되고야 만 진실. ‘길을 잃었어요!’”)
   장 : 그럼 그 ‘실패’의 사건과 선생님의 열쇠 말인 ‘장애’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한 : 이후에 가게 여자는 홀연히 사라집니다. 화자가 가게 여자의 일면을 체득했다는 의미겠죠. 말미에 이르러 화자가 “그애들의 세계로” 자신이 “흘러가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한 것으로 보아, 비정상적 속성을 내포한 상태로 정상적 세계로 편입되는 것은 그다지 특이한 사건이 아니며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택하는 당연한 행로라는 사실을 화자는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장 : 가게 여자가 홀연히 떠나는 것도 생존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보시는지 궁금하네요.
   한 : 저는 이것이 소수자가 취하는 일반적인 삶의 태도라고 느꼈습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회의 전에 휠체어를 책상 뒤에 숨겨놓았듯 자신의 비정상적 속성을 세계의 정상적 규범에 맞춰 숨기는 것(커버링)은 꽤나 흔한 생존 전략이죠.4) 지난호의 두 번째 각주에서 자세히 밝혔듯 이번 대담에선 특별히 ‘장애’의 시좌에서 소설을 읽어보고 싶었고요.5)
   장 : 그런데 선생님, ‘장애’라는 열쇠 말로 소설을 낮과 밤의 세계로 나누고 작품의 구조를 일정한 해석 체계로 만드시는 과정에 대해 설득력은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 제가 궁금한 건, 이 소설이 ‘잘 쓰여졌다’ 혹은 ‘좋은 소설이다’라는 평가 이전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독서 체험을 하셨는지가 더 알고 싶어요.
   한 : 꽤나 긴 분량인데도 짧다고 느껴질 만큼 몰입해서 읽은 기억이 나네요.
   장 : 에? 그게 끝이에요?
   한 : 네, ‘독서 체험’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 정도일 것 같습니다.
   장 :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경험을 혼자서 두 시간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한 : 해석을 곁들인다면 저도 20분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두 시간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어떻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장 : 음, 저는 우선 양쪽 부모의 양육을 거절당하고 외숙모의 집에 맡겨진 여성 아이 화자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라는 건 거의 없는 상황일 텐데, 일부러 ‘말하지 않기’를 선택한 화자를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선택을 학교에서도 이어나가고요. 그런데 피구를 하다 결국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을 때, 저 역시 그것이 엄청나게 강렬한 충격적 사건으로 다가왔고 저도 모르게 피구 장면에서 화자를 응원하고 있더라고요?
   한 : 장면마다 소감이 하나씩은 있는 셈이네요.
   장 : 그렇죠. 각 인물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왜 어떤 행동을 하는지 등등을 최대한 감정 이입해서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노력해요. 그래서 외숙모, 외삼촌, 학교 선생님, 영예은 각각의 캐릭터들이 어떤 원리로 행동하는지 몰입하죠.
   한 : 가게 여자가 빠진 것 같은데요?
   장 : 네, 저는 아직도 가게 여자가 왜 화자를 데리고 도주를 결정했는지 모르겠어요. 전혀 화자에게 별다른 애정을 느끼는 것 같지 않았고 단지 외숙모 집의 정보를 빼내는데 화자를 이용한다는 느낌이었는데요. 화자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었으니 가게 여자에게 도주를 요청하는 건 납득이 됐지만, 그에 응하는 장면에서 좀 놀랐거든요.
   한 : 그렇게 듣고 보니 개연성이 조금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몰입 상태에서 튕겨 나갈 만큼 심각한 결점이라 느껴지진 않았어요.
   장 : 음, 저는 작품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가게 여자의 감정과 생각이 읽히지 않았다고 대답해야 할 것 같아요. 다른 인물들에 비해 저는 이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정말 모르겠거든요? 실제로 말하고 행동하는데도 왜 그러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 심지어는 ‘음, 작가가 이 인물에 대해서 정교하게 상상하지 않은 게 아닌가?’하는 의심까지 들었어요.
   한 : 구태여 (제가 앞서 수행한 해석에 기대어) 변명을 하자면, 저는 오히려 가게 여자가 ‘유령’처럼 신비한 존재로서 움직이다 사라지기에 ‘소수자의 생존 서사’라 말할 만한 소설의 분위기와 맞물려 매력적인 인물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장 : 어쩌면 여기서 소설의 인물들과 관계 맺고자 하는 저의 욕망이 개입되는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런데 그 가게 여자의 경우는 제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고 그래서 아주 추상적인 설정으로만 느껴졌어요. 차라리 사고가 나서 흘리는 피가 더 축축하게 제 손에 묻어나는 느낌이었거든요.
   한 : 저랑 완전히 다른 방식의 몰입이라 흥미롭네요. 저는 공감할 만(하게 작가가 의도)한 인물에겐 과할 만큼 공감하지만, 그 외엔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거든요.
   장 : 저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현실 속의 실제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아요. 허구의 존재이지만 그들이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공감하면서 타인의 삶을 대리 체험하죠. 그런데 이 소설에서 가게 여자는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인데도 가장 불투명하게 그려졌기 때문에 공감이 가지 않았고 그래서 저의 총평이 “별 감흥이 없었어요.”로 귀결된 것 같아요.
   한 : 저는 순수하게 화자에게만 몰입했기 때문인지 그런 부분에 대해선 무심하게 넘겼던 것 같습니다. ‘누구나 어렸을 때는 이런 인물을 만나지 않나?’ 하면서요. 어쩌면 이게 활동 분야의 차이가 아닐까요?
   장 : 근데 제가 소설 비평이 아니라 시 비평을 주된 장르로 삼은 이유는 서사를 읽을 때 지나치게 감정 이입을 하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피로감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시에는 인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사유나 장면이 많고, 서사를 가져올 때에도 그 표현 방식이 더 중요하죠. 그런데 “누구나 어렸을 때 만나지 않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제게는 그 사람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한 : 저로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가게 여자가 어느 정도 몰입의 대상에서 비켜나 있기에 「밤이 지나면」이란 세계가 성립한다고 생각하고요, 무엇보다 이렇게 건전한 상황에서 설정 자체를 문제로 삼아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장 : 저는 만약 가게 여자를 설정으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왜냐하면 그동안 많은 서사에서 ‘정신 나간 여자’들이 그런 식으로 재현되고 독해되어 왔고 그것이 단지 작품 읽기에 국한되지 않고 현실에서 타인을 대하는 태도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한 :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게 여자는 ‘기호’로서 존재하는 셈인데, 저는 그렇게 읽어도 충분히 좋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 : 음, 소설에서 기호로 존재하는 인물이 풍자로 그려지지 않는 이상 저는 그 소설에서 새로이 알게 되거나 확장되는 체험이 없다면 좀 문제적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소설 후반부에선 가게 여자가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않을 중요한 사건과 결과가 펼쳐지는데, 그 인물에 공감할 수 없다면 소설의 서사 자체가 무너진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화자가 가게 여자에게 달려와서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할 때, 그 부탁에 응하는 것에서부터 이해가 잘 가지 않았고 거기서 이 소설에 대한 감정 이입이 다 깨져버렸어요.
   한 : 선생님께 이것이 합당한 대답으로 들리진 않겠지만, 저는 바로 그러한 ‘불가해성’이 가게 여자의 매우 중요한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령’으로 부유하는 가게 여자가 ‘비체적 재현’을 경유하여 화자에게 영향을 준다는 소설의 흐름은 그 자체로 현실에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선생님이 겪었던 소격 경험이 바로 그것의 근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장 : 음, 저는 솔직히 모르겠네요. 설정으로 충분하다면 소설의 구체성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인지, 더 나아가 소설 쓰기 행위가 갖는 가치에 대한 질문까지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이미 알려진 것이 ‘설정’이라면 ‘구체성’이 통찰력 아닌가요?
   한 : 제가 소설 비평을 주업으로 삼기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선생님이 말씀하신 구체성을 확보하는 작업은 ‘작가’의 일보다 ‘독자’의 일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가게 여자에 대한 부족한 서술을 두고 작가에게 질의를 던지는 대신 독자적 상상력에 기대어 공백을 메꿔나가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독해의 형상입니다.6)
   장 : 뭐, 그런 견해가 잘못되었다거나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도 선생님처럼 비어 있는 부분을 제가 채워 넣으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겠죠. 그런데 아마 저는 그런 식의 ‘채워 넣기’라면 시가 훨씬 더 잘할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하고, 소설에서는 뭔가 다른 걸 기대하나 봐요.
   한 :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1990년대를 지나오면서 소설은 하위문화(서브컬처)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이차 창작에 보다 의존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비평도 그런 변화에 발맞춰 이차 창작에 일조해야 한다고 느끼고요.7)
   장 : 아마 저는 바로 이런 대화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서로의 다른 독해를 두고 어느 것이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인가를 견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 읽어낸 것, 작품에서 무엇을 기대하는지 등의 차이를 놓고 거기서 질문을 건져 올리는 것이요. 이렇게 세 문장 이하로 핑퐁하듯 주고받는 비평적 대화가 선생님께 어떤 경험이었는지 궁금해요.
   한 : 아무래도 이런 형식이 처음인지라 여러모로 낯설었습니다. 대담이 이렇게 무수한 갈래로 흩어졌다 모였다 반복될 줄 알았다면 이런 형식에 걸맞은 독해를 따로 준비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들기도 합니다. 뭐, 그래도 전반적으로 재밌는 시간이었고, 이런 방식의 대담이 다른 비평가에 의해 다른 작품에 대해서도 이뤄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장 : 저는 기획자분들과 의견을 나눌 때 이런 형식을 몇 번 사용했었는데 확실히 평론가와 하는 대화는 다르게 느껴지네요.
   한 : 아, 그리고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살면서 이렇게 정성 들여 각주를 많이 달아본 적이 없는데, 이번 대담에 흥미를 느끼신 독자분이 계신다면 한 번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읽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장 : 그럼 이렇게 끝낼까요?
   한 : 네, 좋습니다.

장은정, 한설

장은정: 비평적 대화란 무엇일까? 대화하는 법을 처음부터 배우고 있다.
한설: 과몰입형 이차창작자

2021/03/30
40호

1
1700년대의 유럽을 풍미했던 계몽주의는 세계를 이해하는 제일의 원리로 과학적 방법론을 강조하며 인류의 미래를 ‘이성’적으로 구축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 체계는 과학적 방법론이 완벽하게 가치중립적이라 전제하고 있다.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통찰을 얻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 필연적으로 우생학이 되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과학은 사회와 교류하는 과정에서 당대의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하는 정치 수단으로 변하기도 한다. 오늘날 유전학이 어떻게 소수자를 지워내며 현재의 위상을 확보했는지는 다음 책을 참고. 앤 커, 톰 셰익스피어, 『장애와 유전자 정치』, 그린비, 2021.
2
STS 연구자인 홍성욱에 따르면, 과학자는 불확실한 이론과 자료를 발판으로 미지의 영역에 한 발을 내딛기 위해 자신에게 이용 가능한 다양한 ‘밑천(resource)’을 이용하며 그중에는 철학적 믿음이나 미적인 취향 같은 사회적 요소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통상적으로 인정받는 과학자의 ‘실행(practice)’ 속에서 다른 인식적 요소와 혼재되며 과학의 구성 요소로 변하게 된다. 실제로 과학사는 (거칠기 그지없는 이분법을 적용하여) ‘미신’적인 ‘발견의 맥락’과 ‘과학’적인 ‘정당화의 맥락’이 두서없이 교차되어 왔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조화롭고 아름답다고 생각했기에 적극적인 지지자가 될 수 있었으며, 뉴턴은 신플라톤주의에 깊이 매료됐기에 힘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역학에 매끄럽게 도입할 수 있었다. 홍성욱, 「과학은 얼마나 사회적으로 구성되는가?」, 『과학은 얼마나』,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04년, 23-24쪽.
3
‘과학적 회의주의’를 표방하며 종교를 악독하게 물어뜯는 것으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가 최근에 어떤 행보를 보이는지 생각하면 좋겠다. 2014년 8월 20일, 그는 트위터를 통해 ‘배 속의 아이가 다운 증후군이라면 낙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기적 유전자』와 『눈먼 시계공』에서 강하게 주장한 ‘진화=진보’(적응주의) 도식을 충실하게 적용한 결과였는데, 이것의 연장선에 위치한 우생학이 얼마나 허황된 이론인가를 생각해보면, 도킨스의 ‘과학’적 기반은 ‘비과학’적 기반처럼 느껴진다. 강양구, 『강양구의 강한 과학』, 문학과 지성사, 2021년, 88-97쪽.
4
켄지 요시노, 『커버링』, 김현경·한빛나 옮김, 류민희 감수, 민음사, 2017년, 10쪽.
5
공교롭게도 화자가 머무는 공간은 외숙모가 미용 시술을 자행하는 ‘병원’이거나 영예은이 자신의 실어를 의심하는 ‘학교’다. 미셸 푸코의 유명한 논의대로 ‘병원’과 ‘학교’는 비정상을 판정하며 감시와 처벌을 이용하여 격리와 보호를 수행하는 ‘감옥’이다. 화자가 경험하는 장애는 규율과 통제의 대상으로 취급되는데, 이것이 국내의 현실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는 다음 책을 참고. 박정수, 『‘장판’에서 푸코 읽기』, 오월의 봄, 119-223쪽.
6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이차 창작’이란 “만화나 애니메이션 중에서 일부 캐릭터나 설정만 가져와, 오로지 자신이 즐기기 위해 ‘원작’과 상관없이 다른 이야기를 만드는” 무책임한 창작 활동이다. 원작의 시장 자체가 이차 창작에 의해 좌우될 만큼 포스트모던한 현대 사회에서 어떤 작품이 “오로지 그 자체의 가치만으로 평가받고 유통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모든 작품은 ‘다른 소비자가 어떻게 평가하느냐’ 그리고 ‘다른 소비자는 내 평가를 어떻게 여기느냐’ 등과 같은 ‘타자의 시선’을 내포한 형태로 소비된다.” 그렇기에 작품을 평가한 다음 소비 환경을 점검하는 기존의 비평 방식은 재고될 수밖에 없다. 애당초 “작품 자체가 소비 환경을 감안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역동성을 오롯이 보존하기 위해선 거리낌 없이 이차 창작을 포함하여 비평적 행위를 수행해야 한다. 아즈마 히로키, 『관광객의 철학』, 안천 옮김, 리시올, 2020년, 44-53쪽.
7
키두니스트(blog.naver.com/kidoonist)가 연재했던 독서 리뷰 만화가 어떠한 열광적 반응 속에서 출간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떠올려봐도 좋겠다. 키두니스트는 고전(古典)을 자신의 화풍과 서사로 요약하며 일차적인 이차 창작을 수행했고, 작품의 내부(줄거리)와 외부(커뮤니티의 감상)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며 이차적인 이차 창작을 수행했다. 이것은 수많은 도서 구매 후기가 보여주듯 이차 창작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커뮤니티의 분위기와 시너지를 일으키며 어지간한 비평은 상상조차 못할 만큼 사람들의 독서 의욕을 고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