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 ‘비평 교환’은 특별히 대화 형식으로 지면을 꾸렸습니다. 각각 문학과 미술 영역에서 활동하는 두 필자가 ‘서울’을 주제로 동시대 한국 문학과 미술의 경향을 살펴봅니다. 서울이라는 지역이 각 장르에 미치는 영향, 서울이 타 지역과 맺는 관계 등 다양한 화두로 이야기가 뻗어 나갑니다.



서울-미술, 서울-문학

김신재 : 아까 “서울 기반이라는 조건은 국내적으로 보면 중심이지만, 또 국제적으로 보면 로컬한 것”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서울이라는 지역의 특수성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미술에서는 확실히 지역성에 대한 관심이 외부에 대한 의식 속에서 고유한 정체성을 정립하고 차이를 드러내야 할 필요에서 왔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근과거를 떠올려보자면, 2000년대 들어 재개발과 뉴타운(임민욱의 2005년작 〈뉴타운 고스트〉), 젠트리피케이션의 문제가 생활 반경을 흔들어 놓으면서 2010년대부터 보다 실천적으로 개입하는 아티스트 콜렉티브―리슨투더시티, 옥인콜렉티브, 파트타임 스위트―들이 나타났어요. 당시 사회적으로 종말론이 암암리에 퍼져 있었고, ‘망했어요’라는 밈이 유행하기도 했는데요. 한편에서는 재개발로 인해 철거를 앞둔 임시적인 전시공간에서 전시들이 계속 열리고 자연스럽게 연대가 이뤄지기도 했거든요. 또,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일군의 미술 작가들이 서울이라는 장소와 사막화하는 시스템을 “폐허”1)에 빗대는 경향이 있기도 했고요. 이 폐허 맵에 “던전”2)과도 같은 신생 공간이 등장했고, ‘뉴 스킨: 본뜨고 연결하기’(2015)가 표방하듯 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표면에 새로운 게임적 “스킨”을 적용할 필요에 대한 공감대가 이들에게 형성됐어요. 세계가 스크린처럼 납작해지거나 완전히 판판하게 포개져 버렸다는 감각(김희천의 〈바벨〉 3부작)이 공유되는 한편, 최윤 작가가 한 것처럼 서울이라는 도시의 ‘조악함’과 “못생김”3)이 본격적으로 탐구되기도 했고요.
  수많은 전시와 행사가 동시다발적으로, 그러나 열화되면서 반복되는 ‘서울 미술’의 속도에서 오는 기억 상실, ‘공회전’과 ‘오작동’에서 오는 염증에 대한 호소도 많았던 기억이 나요. 아까 속도 자체가 서울의 특색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를 잠깐 했는데, 박세영 감독의 〈캐쉬백〉(2019) 같은 영화에서 이동 속도가 공간을 엎질러버리면서 속도 자체가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죠. 너무 축약해서 얘기하고 있긴 하지만, 전에 비하면 서울이라는 공간을 작업에서 전면화하거나 ‘버내큘러’한 미감을 내장한 작업이 요즘은 좀 뜸해졌다는 인상이거든요. 작업의 배경으로서 서울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건지, 물리적 지반의 중요성이 전보다 약해지고 있는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요. 그게 ‘#미술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과 ‘미술계 Y 성희롱 사건’ 이후 공동의 지반이나 시간성의 감각이 분열되고 쪼개진 것과도 모종의 관련이 있을 것 같고요. 문학의 서사에서는 여전히 서울이라는 지역성이나 공간적 배경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을까요?

이희우 : 서울이라는 조건이나 배경이 한국에서 종종 중립적인/대표적인 것으로 다루어지지만 수출되거나 번역되었을 때는 특수한 것으로 상대화되곤 하잖아요. 서울에 특별히 지역적 개성이 있어서 그렇다기보다는 한국 문화 자체가 세계적으로는 특수한 것, 이국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쉽기에 그런 것 같아요. 2014년에 〈어벤져스 2〉를 서울에서 찍는다고 해서 그 ‘홍보 효과’를 두고 논란이 있었는데 기억하시나요?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제작비 일부를 (서울 관광에 대한 홍보 효과가 기대된다는 이유로) 환급해줬는데, 지나친 ‘저자세’라는 비판을 받았어요. 개봉 후 영화에 담긴 서울 풍경이 특별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아서 불만을 샀죠.4) 그런 경우에 일부 시민들 혹은 기관들이 서울을 바라보는 문화적 ‘중심’(헐리우드?)의 시선을 기대하고 욕망했다고 할 수 있겠죠.

푸른 색으로 서울의 풍경을 그린 일러스트. 서로 다른 모양의 건물들과 자동차, 산, 구름, 나무, 시계, 고양이, 비둘기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사실…… 서울에 감각적으로 무슨 개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있다면 ‘얼룩덜룩’하다는 것일까요? 대로변에는 마천루 같은 빌딩과 거대한 교회들과 백화점이 있고, 그 뒤에는 오피스텔과 아파트가 있고, 골목으로 꺾어들어가면 낡은 식당이나 점집이 있고 구석에는 오래된 절도 있는 그런 얼룩덜룩함. 압축적 근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그 ‘버내큘러’한 미감은 인천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지만 확실히 얼룩덜룩함의 밀도로 따지면 서울이 제일 높은 거 같아요. 2010년대에 언급하신 작가들/작품들을 봤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데요. 최윤 작가가 그 얼룩덜룩함을 잘 보여줬던 것 같아요. 2020년에 ‘마음이 가는 길’이라는 전시를 봤었는데 ‘K-얼룩덜룩’이라고 할만한 것의 집약 같았거든요.
  최근 문학에서 서울이 특별한 배경으로 다루어진 경우가 바로 생각이 나진 않아요. 서울이 그냥 당연한 배경처럼 그려지는 작품이야 많겠지만요. 사실 저도 지금 나오고 있는 작품을 아주 제한된 범위에서 읽고 있어서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어요. 음…… 재작년 말~작년 초에 트위터에서 잠시 ‘판교 문학’ 논쟁이 있었는데, 그 용어는 판교 테크노밸리에 있을 법한, 상대적으로 고연봉의 전문직 중산층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들을 일컫는 조어였어요. 여러 소설을 단순화해서 폄훼하는 단어지만, 지금 한국의 문단 문학이 지나치게 수도권·중산층 중심이라는 문제 제기에는 공감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어요. 몇 년간 문예지에서 읽은 소설들을 ‘양적’으로만, 혹은 소재적으로만 보면 사실인 듯합니다(제 독서 풀 자체도 편향되어 있지만……).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소설들은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어요. ‘지역’과 관련해 인상적인 작품들은 크게 보면 둘 중 하나였는데, 하나는 화자가 코스모폴리타니즘적·노마디즘적 태도, 혹은 최소한 여행객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경우에요. 서로 어조나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만 배수아의 소설들(『뱀과 물』 『작별들 순간들』)이나 이상우의 소설들(『두 사람이 걸어가』 『핌 오렌지빛이랄지』)이 여기 해당하는 것 같아요. 다른 하나는 더 리얼리즘적으로―하지만 좀 참신한 감각으로―지역에서의 생활이나 경험, 기억을 담고 있는 소설들인데 앞서 언급했던 하가람의 소설(「재와 그들의 밤」)이나 김기태의 소설 두 편(「무겁고 높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최근에 다시 읽고 있는 박솔뫼의 소설은 두 가지 특징을 다 가진 것 같은데요.
  이 중에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특히 흥미로웠어요. 특정 지역을 주요하게 조명하지는 않지만, 이주, 학교, 취업, 노동, 생활이라는 여러 역사적, 시대적 상황과 과업 속에서 다양한 지역을 거쳐 이어지는 삶들이 그려지거든요. 세계적인 동시에 지역적인 동시대 삶의 조건을 뜻하는 ‘글로컬’(glocal)은 이제 상투적인 홍보 문구처럼 됐지만, 그 소설이 ‘글로컬’할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삶을 색다른 방식과 어조로 조명하는 것 같아요. 주요 인물들은 젊고 가난한 남녀인데, ‘계급’ 문제도 참신한 감성으로 (제목에서 나타나듯 매우 절충적이고 미시적인 것이라 해도) 되살려내는 소설이었어요.

김신재 : ‘얼룩덜룩’하다는 표현 절묘한 것 같아요! 누군가는 ‘잡다함’이라고도 하더라고요. 말씀하신 대로 외부에 어떻게 보일지 바짝 신경을 쓰는 데 비해서는 악수를 많이 두기도 하죠. 이전에도 문단 문학, 특히 소설은 수도권·중산층 중심이었던 같은데, ‘판교 문학’이 특별히 문제가 된 것은 어째서일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미술은 아무래도 물리적인 장소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 예술 실천을 해나가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문학작품은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도시에서 생산될 수 있지만 언어라는 권역을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서울에서 활동하는 해외 미술 작가나 음악가는 간혹 있지만, 한국어로 문학을 하는 해외 작가는 드물기도 하고요(저는 국내의 네팔 이주노동자들이 쓴 시를 엮은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와 사이토 마리코 정도를 기억하고 있어요). 그리고 한국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해외 작가가 있다고는 하지만 지원 제도가 국가주의에 기반해 설계·운영되다 보니 한국 국적자만 지원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사실상 외국인 작가로서 서울에서 활동을 이어가기가 굉장히 어렵다고 해요.
  다른 이야기를 잠깐 하면, 미술에서는 원래 계급이나 빈곤의 문제가 선명하게 다뤄지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노란 장판 감성’과 상응하는 폐허를 배경으로 한 ‘키치 감성’ 같은 게 있었거든요. 그게 지금은 ‘오늘의집’에서 흔히 찾을 법한 하얀 필름지를 씌운 가구처럼 진공 속의 표백된 미감으로 대체된 것 같아요. 인스타그램의 글래머러스하고 매끈한 이미지들과 경쟁해서인지 그 얼룩덜룩함이랄지 아마추어의 서투름, 부족한 예산으로 인한 미감 같은 것을 소거하는 게 점점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껴요.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도 풍경이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되는데, 쓰레기 매립지, 공장 단지, 물류창고, 발전소 같은 인프라가 모두 서울의 생활권 바깥의 외곽이나 바깥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저는 부산의 항만에만 가도 그러한 요소들이 어휘나 감수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현장과 번역

이희우 : 네. 교과서적으로 현대예술은 ‘추한 것’을 수용하고 전시해왔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그건 옛말이고 지금 문화에는 오히려 촌스럽고 지저분하고 추한 것들을 밀어내는 강한 척력이 작용하는 것 같아요. 그런 경향이 미술이나 문학에서도 발견되는 것이고, 또 그 척력은 기피 시설을 도시 밖으로 밀어내려는 경향과 유사하다는 생각도 드네요.
  발전소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났는데, 선생님은 원전 문제에 관심을 갖고 리서치해오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아마 원전도 지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제일 것 같아요. 저는 잘 모르는 이야기지만 들어보고 싶어요.

김신재 : 저도 여전히 헤매고 있는 복잡한 문제인데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에 이후 계속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방사능 관련 문제를 ‘느린 재난’의 관점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작년 초부터 조금씩 리서치를 시작했어요. 꼭 프로젝트화하려는 생각보다는 복잡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해서 알기를 포기하지 않고 싶었어요. 원전 오염수 방류 문제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의 처분 문제까지 아우를 수 있기를 바라요.
  작년 4월, 동료들과 기차를 타고 일본 도호쿠 지방을 여행하게 되었는데요. 2022년 부산비엔날레에 전시되었던 김익현 작가의 〈빛 속으로〉 작업에 참여하면서 콘노 유키, 하나 야마모토 님과 재난과 기반시설 등에 대해 나눈 대화5)가 계기가 되었어요. 저희가 방문한 후쿠시마현 후타바군 도미오카마치는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가 위치한 오쿠마마치에 인접해 있어,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방사능 누출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 중 하나예요. 역뿐만 아니라 곳곳에 방사선량 측정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전광판에 방사능 수치가 나타나고 있었고, 여전히 제염 작업이 진행중인 듯 드문드문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도 보였어요. 도미오카마치에서 나고 자란 아키모토 나나미 씨께서 가이드를 해주셔서 함께 인근의 후쿠시마 제2원자력발전소 주변, J빌리지, 화력발전소, 변전소, 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도쿄전력 원자로 폐로 박물관 등을 둘러보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태평양을 면한 해변은 이제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는데요. 쓰나미가 덮친 광경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요하고 평화롭더라고요. 화면을 통해 보았던 재난의 스펙터클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덮어쓸 수는 없겠지만, 풍경과 개인의 구체적 기억, 추상화된 데이터와 바람에 곱게 흩날리는 해변 화강암 모래 사이의 묘한 긴장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여정의 마지막 날에는 콘노 유키 씨 아버지의 본가가 있는 고리야마시 근처의 츠시마(津島)라는 마을에 다녀왔는데요. 400가구 정도가 사는 산골의 작은 마을이고 쓰나미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바람의 방향을 따라 실려 온 방사능 낙진 때문에 갑작스레 대피령이 떨어졌다고 해요. 츠시마 마을의 귀환 곤란 구역의 일부가 2023년 3월 31일부로 거주 제한이 해제되어 귀환이 가능해진 건 12년 만의 일이에요. 낙농업을 하시던 콘노 유키 씨의 삼촌은 오래 방치되었던 집을 고치고 ‘귀환’하기로 결정하셨는데, 더 이상 작물을 재배할 수도 소를 키울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내린 결정을 결코 다 헤아릴 수 없었어요. 이 여행의 기록이 《로그》라는 진에 담겨 있어요.

이희우 : 원전 혹은 에너지 생산/소비는 앞서 잠깐 말씀하셨던 ‘인프라’의 비대칭성과도 관련이 있는 문제겠네요.

김신재 :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이라는 대담집을 보면 대담자분들이 ‘현장에 가보는 일’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시더라고요. 무언가를 직접 보고 나니 오히려 보지 못하는 것을 잔뜩 깨닫게 되고, 안다고 믿었던 것들이 뒤로 물러나는 기분이 들었어요. 다만, 도호쿠 지방으로 여행을 다녀오면서 지역으로 외주화된 위험 인프라에 대해 조금 다른 시야를 갖게 됐어요. ‘도쿄전력’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듯 지방의 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은 지역 안에서 사용되는 게 아니라 도쿄처럼 소비가 집중된 지역으로 판매된다고 해요.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소비하는 전기를 지역에서 생산하고 위험 부담을 지는 에너지 식민지 문제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일이지요.6) 2013년 밀양 송전탑 에너지 갈등 사건도 그와 관련이 있는데, 밀양시에 건설된 765kV의 고압 송전선 및 송전탑은 완공 이후 울산 신고리원자력발전소 3호기에서 생산한 전력을 창녕군의 북경남 변전소로 수송하게 되었어요. 자신의 생활 반경에서 멀고 본인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없으면 먼일처럼 느껴지는 게 당연하지만, 이런 지역과 에너지의 문제는 특히나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올해 분산 에너지 활성화 특별법과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 도입을 두고 더욱 논란이 될 테지만) 실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지역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함께 고민이 필요한 문제인데도요.

이희우 : 앞서 ‘번역’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말씀하신 문제와 관련해서 좀 더 넓은 의미의 ‘번역’의 역할을 생각하게 돼요. 잘 안 보이는 문제나 존재를 드러내고, 지역이나 종을 넘어서 논의하기 위해서요. 물론 앞서 말했던 ‘비대칭성’이 번역에서 완전히 사라지거나 차단될 수는 없겠지요. 번역에서 거의 불가피한 문제니까요. 그래도 번역의 불완전하고, 느리고 고된 과정 속에 무언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것도 말씀을 듣다 생각난 것인데, 최근에 한국에서 원전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헌법소원이 있었던 것 알고 계시지요? 그 헌법소원 청구 주체로 동해안에 사는 고래들이 포함되었는데, 그 사례가 번역의 문제를 광범위한 수준에서 제시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고래들을 어떻게 식별하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대변하고, 어떻게 법의 언어로 통역할 것인가? 그리고 그 대변과 통역은 정당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들이요.

김신재 : 그러네요. 인간만을 법적 주체로 규정한 현재의 법체계를 넘어 동식물의 권리를 규정하는 ‘지구법’에 대해 들은 적이 있어요. 말씀하신 ‘번역’의 문제가 정말 중요하겠어요.
  오염수 방류 관련해서 어느 기사에서 읽은 후쿠시마 어민 분의 말씀이 떠올라요. “원전 오염수 방류 문제는 바다를 공유하는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직면한 중요한 문제”라며, “물고기를 비롯해 바다에 사는 동식물들은 국적이 없다. 인간이 아니라 바다에 사는 생명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7)는.
  학자가 아니라 지역 어민이 ‘생존’ 대신 ‘공생’의 관점을 언급했던 게 이 사안을 바라보는 제 입장에 영향을 줬어요. 이건 인간의 안전을 넘어 바다를 공유하는 행성 전체의 살아있는 존재들에 관한 문제라는 것. 그게 그렇게 막연하고 크기만 한 얘기가 아니라 우리 앞의 일이라는 것. 이런 리서치를 하면서 바깥으로 연결될 필요를 많이 느껴요. 장소를 만나고 알아가면서, 그리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많은 것을 보게 되니까요. 한국에서는 정주하 작가가 원전과 후쿠시마를 사진으로 다루셨고, 최근에 상업화랑이라는 전시공간의 기획으로 ‘비핵화선언’이라는 전시가 열리기도 했는데요. 핵의 문제가 한국의 미술장 안에서 다뤄진 것이 무척 반가웠어요. 엘 카펜터(Ele Carpenter)라는 큐레이터이자 연구자가 『핵 문화 자료집Nuclear Culture Source Book』이라는 책을 엮어서 출간하기도 했고, 에바/프랑코 마테스, 제이슨 웨이트가 함께 기획한 ‘돈 팔로우 더 윈드’(Don't Follow the Wind) 프로젝트와 동명으로 출간된 책도 인상적이에요. 저는 아직 어떻게 접근하고 풀어낼 것인지 고민 중이지만, 다른 궤적을 연결하면서 나름대로 입구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공간과 감수성

김신재 : 이 대화를 준비하면서 서울시립미술관이 1988년, 광주시립미술관이 1992년, 부산시립미술관과 대전시립미술관이 1998년, 경남도립미술관과 전북도립미술관이 2004년, 경기도미술관이 2006년, 제주도립미술관이 2009년, 대구미술관이 2011년, 전남도립미술관이 2021년 개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경북과 충남은 현재 도립미술관 설립을 추진 중이고요. 또, 지역 문화예술재단의 지원사업을 동력 삼아 이전과 다른 양상의 공간들도 차츰 생겨나는 추세도 보여요. 저에게는 비엔날레가 열리는 광주나 부산, 대구 외에 인천의 shhh와 LBDF, 수원의 소현문, 제주의 언러닝 스페이스 같은 공간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요. 주로 작가가 운영하는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를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많고, 이전 세대의 지역 대안공간과는 다른 시도를 하면서 색깔을 내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환경 운동과 결합하거나 지역이라는 구획을 넘어 다양한 접점으로 관객을 확보하는 등 활동을 모색해나가는 것도 인상적이에요. 지속은 또 다른 숙제겠지만요. 희우 님께서는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지역의 문예지나 독립서점 등이 있으신가요? 서울과 다른 특색을 가진 경우가 있나요?

이희우 : 작년에 부산의 가장 큰 서점 중 한 곳에 갔는데 시집 코너가 아예 없어서 놀랐습니다. 매대에 가장 잘 팔리는 시집 몇 권만 놓여 있었어요. 얼마 전에는 부산 영도에 있는 독립서점 ‘손목서가’에 갔는데, 거기도 판매되는 책의 종류를 많이 줄였더라고요. 원래 카페이자 서점이었는데, 이제는 서점 운영을 거의 최소한으로 줄인 것처럼 보였죠. 다양한 독립서점이 생겨나는 것은 저로서는 기쁜 일이지만, 운영하시는 분들이 힘들다고 하시는 걸 종종 들었어요. 책을 읽는 사람의 절대적인 수 자체가 줄어들고 있고, 또 요즘은 책을 거의 온라인에서 구매하니까요.
  사실 제가 지역에서의 실천들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앞서 언급한,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들도 어쨌든 문예지에 실리거나 책으로 출판되어서 제 시야에 들어온 것일 텐데요. 제가 종종 읽는 문예지 중에서는 『문학들』이 광주/전남 기반 문예지라는 정체성을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어요. 광주/전남의 작가와 작품들을 꾸준히 소개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사실 이제 문예지를 읽는 독자 자체가 너무 줄어들었고, 소위 ‘주요 문예지’라 일컬어지는 것들도 실제 판매 부수는 아주 적어요. 그래서 문예지들이, 말씀하신 지역 거점 미술관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주 회의적인 생각이 듭니다. 그런 미술관들은 지역 주민들이 전시를 비롯한 미술 행사에 접근하기 좋게 만들잖아요. 서울에 오지 않고서도 큰 전시를 볼 수 있게요. 그런데 책의 경우 이미 광주나 대구 같은 도시, 혹은 더 작은 도시나 마을에서도 문 앞까지 배달받아 볼 수 있습니다. 제 아버지는 현재 경북의 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지내시는데 거기에도 책이 금방 배송돼요. 웹진의 경우에는 더욱 쉽게―지역과 상관없이―접근할 수 있어요(디지털 접근성은 또 다른 문제지만요). E-book으로 읽을 수 있는 것들도 많아지고 있고요.
  물론 작가와의 행사나 도서전 등 큰 행사/전시가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저는 중요한 문학적 경험은 혼자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건 앞서 말한 매체의 차이와도 관련 있는 문제인데요. 문학의 장벽은 물리적, 공간적인 것이기보다는 언어적, 감수성적인 게 더 크다는 것이죠. 그래서 문학의 경우에는 지역 거점 기관들/공간들을 설립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감수성과 방언들이 공존하고 번역되는 장을 만드는 게 실질적이고 중요한 문제인 것 같아요.
  주제에서 약간 벗어나 좀 개인적인 경험을 덧붙여보고 싶어요. 사실 부산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감수성, 말투, 경험, 생애 계획이 서울에서 만난 지인들과는 많이 다르다고 느껴요. 제 부산 지인들이 부산의 감수성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고, 서울 지인들이 서울의 감수성을 대표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어쨌든 집단들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느껴요. KTX를 타고 두 시간 반이면 가는 거리인데도요. 제가 어떤 기준을 미리 세워두고 그런 차이들을 대하면 차이들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규정하고 분류하게 되겠지만, 기준들을 내려놓고 만남에 집중하면 어디에나 강렬하고 흥미로운 경험들, 진지한 고민들, 비슷한 진부함들, ‘너무 다양한 평범함들’이 있다고 느끼게 돼요. 제 생각엔 그게 ‘문학적인 것’ 같아요. 좀 추상적이고 뻔한 이야기지만…… 시집이 없는 서점처럼, 어디에나 같은 문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문학적인 것은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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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재, 이희우

큐레이터이자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시각예술이 영화 및 공연과 교차하는 영역에서 대화와 맥락을 만드는 일에 동행한다. 최근에는 감각과 기술, 인프라에 대한 질문을 듣는 일과 엮고 있다. ‘재난과 치유’ 위성 프로젝트 ‘반향하는 동사들’(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1), 차재민 개인전 ‘사랑폭탄’(삼육빌딩, 서울, 2018), 김익현 개인전 ‘Looming Shade’(산수문화, 서울, 2017), ‘BLU-RAY.MKV.JPEG’(ONEROOM, 서울, 2017) 등의 전시와 네마프 시네-미디어 큐레이팅 포럼 ‘장소의 감각, 물질의 그물’(KT&G상상마당, 서울, 2023), 상영 시리즈 ‘터치스크린’(ONEROOM, 서울, 2018) 등의 프로그램을 기획 또는 공동 기획했다. (김신재)

문학평론가. 동시대에 가능한 ‘감성적·미학적 배움’에 관심이 있다. 현재 ‘매력과 배움’을 주제로 연구중이다. 옮긴 글로는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가 있다. (이희우)

재작년에 처음 배로 해협을 건너 다른 나라로 가는 경험을 했다. 새삼 몸을 매개로 한 공간 경험이 세계에 대한 인식과 상상을 조형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륙에서 자라고 생활해서 바다에 관련된 어휘가 생생하게 와닿지 않는 편인데, ‘해도’나 ‘항해’처럼 종종 추상적인 비유로 사용하던 단어가 누군가에겐 구체적인 감각을 환기하는 단어라는 것을 상기해본다. 이를테면 ‘이팝나무’나 ‘산딸나무’가 그저 나무 이름이 아니라 어릴 때 살던 도시의 야트막한 산과 순환도로의 바람을 떠올리게 하는 것처럼. 대화를 하는 동안, 캐슬린 제이미의 『시선들』, 리베카 솔닛의 『야만의 꿈들』, 사사키 다카시의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다』, 『메타유니버스: 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이야기는 자꾸만 딴 데로…… (김신재)

예전에 읽다 말았던 존 버거의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은 존 버거가 죽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내용의 소설이었다. ‘우리가 만나는 곳’은 존 버거가 죽은 이들을 만난 장소들이기도 하지만 독자와 화자와 저자가 만나는 책이기도 하다. 혹은, ‘죽음’이기도 할 것이다. 나도 죽은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꿈에 할아버지가 나왔던 것이다. 우리는 손을 잡고 산책하면서 번갈아 아귀에 힘을 주는 놀이를 했다. 내가 힘을 너무 세게 줘서 할아버지가 많이 아파했다. 아파하면서 우리는 부산시 북구 만덕1동을 한 바퀴 돌았다. 낯선 곳이었다. (이희우)

2024/03/20
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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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근준·권시우, 「현대 시각예술과 비평의 세대교체와 동역학」, 건축신문 17호, 2016.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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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석, 「서울의 인스턴스 던전들」, 오픈베타공간 반지하 B½F 블로그, 2015.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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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모범-미감(김효재,지호인), 『S,KR 美感(서울미감)』, 2019.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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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2’ 환급금 26억 원…적절성 논란」, 이영섭 기자, KBS뉴스, 2015.8.26.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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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현, 김신재, 콘노 유키, 하나 야마모토, 「지금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어」, 『2022부산비엔날레 저널』 3호, 2022.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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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각장·송전탑에 주민 신음…수도권 위해 희생되는 지방」, 문광호 기자, 경향신문, 2021.10.19.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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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어부도 “오염수 막아야”…국힘 “제2광우병 괴담” 운운」, 이우연 기자, 한겨레신문, 2023.5.9.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