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하는 사람들
점선과 부등호
지난해 여름을 꼬박 바친 일이 있다면, ‘기획’이라는 일을 맛본 것이다. “기획을 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고 ‘맛본’이라고 물러서는 표현을 쓴 까닭은, 내가 주로 해오지 않은 일을 아무 준비도 없이 얼떨결에 맡고 필연적인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이다. 기획의 맛은 쓰고 짜고 맵고 달았다. 단맛이 가장 적었지만 가장 강렬했다고 쓴다면 분명 사후에 미화되는 기억의 순진함 탓이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어쨌거나 기쁨과 아쉬움이 뒤섞인 채로, 과거는 무사히 지나갔다. 문제는 올해 그 일을 또 하고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방학이 속절없이 지나가고 있다. 한 번 해본 일이니 괜찮을 거야, 라고 생각하고 수락한 봄날의 나를 떠올려본다. 고민과 실행 사이, 무수히 많은 선택지가 있었다. 그 우연한 선택들이 만들어낸 결과를 그저 경험이라 부르고 돌아설 수도 있었다. 한데도 내 손으로 한 자밤 넣은 소금이 단맛을 냈다고 기억하는 미뢰가 미련을 떨게 했다. 아무래도 그러려는 마음의 흔적을 매만져볼 때가 왔나 보다.
2024년 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최하는 ‘문학주간’에 기획위원으로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2023년 문학주간에 올라갔던 프로그램을 보러 간 일이 떠올랐다. 익숙한 이름의 소설가가 등장했고 멸종된 동물의 소리를 들었으며 흥미로운 기획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극장 밖을 나온 뒤 익숙한 풍경이 낯설게 느껴진 기억도 난다. 연극을 보고 글을 쓰는 일을 주로 하다 보니 대학로 일대에서 일어나는 행사에 우연히 참여하게 되는 날이 있는데 아마도 그런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학주간에, 내가, 왜? 조금 의아했다. 한편으로 올 것이 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의아한 까닭은 내가 문학평론가가 아니라 연극평론가이기 때문이다. 연극은 문학이 아니지 않지만, 문학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않나? 자격지심에 가까운 얄팍한 생각이 몰려왔다.
문학 행사에는 주로 시인이나 소설가, 문학평론가가 등장해서 활자화된 문학 작품에 관해 이야기 나눈다. 문학평론가의 사려 깊고 날카로운 해석이 있고 작가가 작품을 쓰게 된 배경이나 쓰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들려주고 작가가 직접 시나 소설을 낭독하기도 하고 사인회를 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문학 행사에 극작가가 나온 사례를 그리 많이 듣지 못했다. 극작가에게 신작이 나온다는 의미는 새로 쓴 희곡으로 공연을 올린다는 뜻이었고 희곡집이 출간된다고 해도 문학으로서 희곡을 조명하는 일은 드물었다. 잘 알다시피 연극에서 극작가의 존재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관객과의 대화’에는 주로 연출가와 배우가 등장하고 연극을 보는 관객의 관심은 극작가보다 배우에게 더 많이 쏠려 있다.1)시인이나 소설가만큼 팬덤을 거느리는 극작가도 많지 않다. 공연을 보고 난 후에 대본이 궁금해져서 희곡집을 사는 경우가 있겠지만, 아직 공연되지 않은 극작가의 희곡을 먼저 사보는 독자는 드물 것이다. 아마도 극작가 개인이나 작품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일 것이 분명한 이러한 현상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나였다.
머릿속으로 앞일을 그려보았다. 만약 내가 문학주간의 기획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건 시, 소설, 희곡, 평론으로 안배되었을 장르 중에 희곡의 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일 테고,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의욕적으로 활동하는 ‘젊은’ 극작가2)들을 아주 많이 소개하리라. 내가 알기로 극작가들은 시와 소설을 아주 열심히 읽는데 시인이나 소설가는 이 작가들의 희곡을 알고 있기나 한가? 실제로 이런 볼멘소리를 하며 문학주간 담당자에게 ‘지금 한국에서 가장 아방가르드한 예술이 연극입니다’를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딱히 충돌하지는 않을 터, 문학을 공부하다가 연극판에 왔지만 한 번도 문학을 잊은 적이 없어서 이런 일도 만나는구나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금 쓴 이 문장이 모순이라는 것도 안다. 이토록 연극과 문학을 철저히 구분하는 내 무의식이라니!
2024 문학주간의 주제는 ‘스핀오프(SPIN-OFF)’로 결정되었다. 현실과 문학의 관계를 원작과 속편의 관계로 유비하면서도 “어떤 이야기와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책장을 덮을 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아직 풀어나가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 문학 바깥의 현실과 다시금 마주할 때, 원본과 파생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바꾸게 됩니다. 어쩌면 현실이야말로 문학의 스핀오프가 아닐까요? 현실보다 더 큰 상상력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세계를 품은 문학을 우리의 중심에 놓는다면, 그로부터 파생된 지금-여기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해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질문을 바꾸는 해제문이 마음에 쏙 들었다.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출판편집자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매주 회의를 하며 전체 프로그램을 하나씩 꾸려나갔다.
기획위원이 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각자 자기 분야에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그 구상을 실현해줄 작가 등을 섭외하고 출연자에게 줄 사례비와 필요한 예산을 짜고 세부 내용을 구성하고 홍보에 필요한 문구를 고안하고 프로그램이 이루어질 시간과 장소를 확정하고 행사 당일 필요한 장비를 확인하는 등 때를 가리지 않고 몰려오는 일을 그때그때 감당해야 했다. 당장 섭외를 하기 위해 메일을 쓰고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거는 일부터 온 신경이 곤두섰다. 그동안 내가 만났던 기획자들의 얼굴이 죽 떠올랐다. 그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전문성을 가지고 일을 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예술가의 의도와 관객의 향유 사이를 잇고 시대적 요구를 외면하지 않으며 이를 위해 보이지 않는 세심한 부분까지 다루는 기획자의 일은 정말 제대로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
내가 단독으로 기획한 프로그램은 ‘인간외전’ ‘극장외전’ ‘역사의 알고리즘’이었다. ‘인간외전’은 비인간을 화두 삼아 극을 쓰는 작가 김연재, 신효진 그리고 비인간 연기를 수행하기 위해 고민하는 배우 성수연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이었다. 이들 연극의 특징을 잘 아는 연극평론가 김민조의 사회로 이야기가 밀도 있게 흘러갔다. 비인간이라는 주제는 포스트휴머니즘 논의와 SF 장르의 붐으로 설명되곤 하지만, 연극에서 비인간을 형상화하는 일은 배우라는 인간의 몸을 통과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녹록지 않은 논점들을 포함하고 있다. 극작가는 물성을 체감하는 방식으로 연극을 쓴다. 인간이라는 객체로서 다른 존재들을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는 지금 작가들의 첨예한 입각점이다.
‘극장외전’은 극장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어 극장 바깥으로 연극의 무대를 옮겨오는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마련한 것이었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구자혜 연출과 ‘0set프로젝트’의 신재 연출과 함께 극장 안으로 초대받지 못한 존재들이 현실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들여다보았다. ‘역사의 알고리즘’은 액트리스 시리즈를 연작으로 그려낸 정진새 작, 연출의 연극 〈시스터 액트리스〉를 쇼케이스 형식으로 선보인 것이었다. 로봇이 인간의 연기를 대체하는 미래를 그려왔던 작가는 〈시스터 액트리스〉를 프리퀄 삼아 중세 시대 소녀들의 이야기를 펼쳐냈다. 이 세 개의 프로그램은 다행히 관객 점유율도 높았고 호응도 좋아서 기획위원으로서 보람을 느꼈다. 당초 계획했던 대로 문학계에서 주목할 만한 극작가들을 소개할 수 있어서 좋았고 지금 연극을 비롯한 공연예술이 무엇을 고민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어서 뿌듯했다. 그럼에도 의구심이 계속 남았다. 이 프로그램을 보러온 관객 중에 문학의 독자는 얼마나 될지, 그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문학과 연극의 관계를 어떻게 상상할지 궁금했다. 답답함도 있었다. 기획위원들이 각자 자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골몰하느라, 정작 다른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 비인간에 관한 이야기도, 퀴어와 장애와 관한 이야기도, 로봇과 역사적 상상력에 관한 이야기도 시인과 소설가와 작가와 배우와 연출가와 평론가가 함께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각자 포착한 스핀오프를 줌-아웃 했을 때 보이는 더 큰 그림이 잘 보이지 않았다. 문학과 연극 사이의 거리가 여전히 멀게 느껴졌다.
‘문학과 타 분야의 협업’에 관한 글을 제안받고 덜컥 수락했지만, 이 글을 쓰는 일의 곤혹을 이제야 고백한다. 청탁서를 받고 작년에 내가 한 일이 과연 ‘협업’이었을까에 관해 복잡한 생각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문학 뒤에 걸린 ‘과’에 체한 듯 덜컥 걸려, ‘문학‘과’ 연극’이 마치 ‘문학 > 연극’으로 보였다. 문학과 연극 사이의 부등호는 크기의 비교가 아니라 마음의 기울기가 어디로 정향되는지, 시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가리킨다. ‘문학 ⊃ 시, 소설, 희곡, 평론’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는 있지만 ‘문학 > 연극’은 어색한가?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아마도 연극계에서 문학을 주제로 삼았다면 ‘연극 > 문학’으로 표현되었을지도 모를 이 관계의 비대칭성은 어떻게 다르게 상상될 수 있을까? 문학주간에서 내가 한 일이 문학과 연극을 겹쳐내는 일이 아니라 ‘과’의 일이었다면, 과연 그 연결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극장에서 문학에 관해 이야기하고 무대에 알맞은 빛과 소리를 입혀 공연성을 만들어내는 일은 문학의 외연을 확장하는 일일까? 2024년 문학주간에서 시도된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문학은 문학성이라는 상상된 정체성을 더 진하게 붙들면서 더 넓은 길을 타진할 수 있었을까? 아직 이 질문을 해소하지 못한 채 너무 오래 이 글을 붙들고만 있다.
어쩌면 문학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연극평론을 하고 싶어서 연극판을 두리번거렸을 때, ‘국문과 출신’ 평론가는 연극 전공 평론가에 비해 비주류(?)로 인식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문학, 독문학, 불문학, 스페인문학, 러시아문학, 일문학, 중문학 등에서 ‘극문학’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에 비해 한국문학에서 ‘극문학’이 형성되어온 역사가 미흡해보인다는 인식은 다름 아닌 내 것이기도 했다. 현대문학 전공 중에서 희곡을 전공으로 택했을 때, 희곡을 ‘속화된 문학’이라고 칭하는 보수적인 시선이나 ‘딴따라’라는 자조 섞인 유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위상이란 상대적인 비교 대상에 따라 정해진다는 점에서 언제든 변할 수 있지만, 적어도 한국 희곡이나 연극이 문학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크게 바뀐 적은 없었다. 희곡을 전공으로 삼으면서도 시와 소설을 읽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마이너 전공’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 문학이면서도 문학이 아닌 자리, 문학의 언저리에 연극이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연극이 아니라 문학 언저리에 있다고 느끼는 내 얘기일 수도 있겠다. 침범도 침해도 없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 호감을 느끼는 사이. 그래서 기꺼이 물들고 스며들어 서로를 망치고 구원할 기회를 자꾸만 놓치는 사이.
평론집을 내면서 저자 소개에 이런 대목을 쓴 적이 있다.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연구자의 길에 들어섰고 연구와 창작 사이를 오가며 점선을 그어보고 있다.” 이렇게 쓰고 나면 개운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쓰고 나니 작가가 되는 일이 영영 불가능할 것만 같아 조금 서글퍼졌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때 내가 제일 힘주어 쓴 글자는 ‘점선’이었다. 나는 이어져 있고 싶었다. 점멸하는 실선, 끊기면서 이어지는 연결, 잠정적 경계, 숨김과 드러냄의 교차인 점선으로. 수학에서 점선은 함수의 정의되지 않은 부분이다. 아직 정의되지 않은 불연속적인 부분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 마음으로 2025 문학주간을 준비하고 있다. 내 손으로 한 자밤 넣은 소금이 낸 단맛의 기억 때문이라고 해두자. 문학과 연극의 관계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작가와 독자, 문학과 현실, 문학과 다른 예술 사이의 점선을 그으며, 다만 올해는 좀 더 스며들기 위한 용기를 내고 있다. 이 글이 공개될 즈음에는 한창 홍보중일 테니 마음 놓고 내가 기획에 참여한 프로그램 제목을 소개한다. ‘유령들의 대화’ ‘그만두는 경력’ ‘누가 짓지 않은 집’ ‘나를 구하는 나(들)’. 작년 문학주간에서의 시행착오를 잊지 않으며, 올해는 기획위원들이 장르 간 경계를 의식하지 않고 다양한 창작자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구성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특히 올해는 아동·청소년 문학이 더욱 풍성하게 다루어질 예정이라 기대가 된다. 이 점선들이 어떤 그림을 완성하게 될지 궁금하다. 부디 그 그림이 매끈하거나 아름답다기보다 울퉁불퉁 자유롭고 아직 정의 내리기 힘든 재미난 무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침 등굣길에 아이가 물었다. “엄마 ‘가치’가 뭐야?” 또 어디서 뭘 보고 왔는지 질문이 쏟아진다. 당황했지만 짐짓 여유롭게 “음…… 너는 기차가 왜 좋아?”하고 되물었다. 사실은 속이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뜨거워졌다. 거의 매일, 이 일이 무슨 가치가 있는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던 날들이었다. “빠르고 편리하고 멋있잖아. 그리고 재미있어.” “맞아. 그게 기차의 가치야. 기차가 있어서 세상이 좀 더 재미있고, 기차가 있어서 세상이 좀 더 좋다고 느껴지는 거.” 아이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러나 다 해결됐다는 듯 산뜻하게, “아. 그럼, 세상에 가치가 있는 게 많네? 다행이다.” 하더니 잡고 있던 손을 휙 놓고 교문을 향해 뛰어갔다. 가치를 따지지 않고 그냥 재미있게 하는 일들의 세계에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쪽으로 옮겨가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그것 역시 세상에 적응해가는 성장의 한 단계일까. 괜한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저만치 달아났다. 사전적 의미를 대면서 쓸모, 중요성, 값을 들어 답을 주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아이가 금전적 가치보다 시간적 가치나 노력을 쏟은 보람으로 그 말을 이해하길 바랐나 보다.
문학으로, 문학을 통해, 문학과 무엇을 하는 일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이 질문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알지만, 미리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무리해서 잘하려고 할수록 어그러지고, 그리 애를 쓰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이루어진 일들이 있다. 아직 가치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아이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딱 맞아떨어지는 일”이 ‘우연’이라는 내 대답을 듣고 “아, 그거 찌찌뽕이네!” 했다. 찌찌뽕!이라는 비의도적 일치와 공동 감각의 기쁨을 맞이하려면 가치를 미리 생각하기보다 일단 부딪쳐봐야 하지 않을까. 돌아보면 쓴맛 매운맛 짠맛이지만 목적을 초과하는 기쁨은 거부하기 힘든 단맛이므로.
2024년 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최하는 ‘문학주간’에 기획위원으로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2023년 문학주간에 올라갔던 프로그램을 보러 간 일이 떠올랐다. 익숙한 이름의 소설가가 등장했고 멸종된 동물의 소리를 들었으며 흥미로운 기획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극장 밖을 나온 뒤 익숙한 풍경이 낯설게 느껴진 기억도 난다. 연극을 보고 글을 쓰는 일을 주로 하다 보니 대학로 일대에서 일어나는 행사에 우연히 참여하게 되는 날이 있는데 아마도 그런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학주간에, 내가, 왜? 조금 의아했다. 한편으로 올 것이 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의아한 까닭은 내가 문학평론가가 아니라 연극평론가이기 때문이다. 연극은 문학이 아니지 않지만, 문학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않나? 자격지심에 가까운 얄팍한 생각이 몰려왔다.
문학 행사에는 주로 시인이나 소설가, 문학평론가가 등장해서 활자화된 문학 작품에 관해 이야기 나눈다. 문학평론가의 사려 깊고 날카로운 해석이 있고 작가가 작품을 쓰게 된 배경이나 쓰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들려주고 작가가 직접 시나 소설을 낭독하기도 하고 사인회를 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문학 행사에 극작가가 나온 사례를 그리 많이 듣지 못했다. 극작가에게 신작이 나온다는 의미는 새로 쓴 희곡으로 공연을 올린다는 뜻이었고 희곡집이 출간된다고 해도 문학으로서 희곡을 조명하는 일은 드물었다. 잘 알다시피 연극에서 극작가의 존재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관객과의 대화’에는 주로 연출가와 배우가 등장하고 연극을 보는 관객의 관심은 극작가보다 배우에게 더 많이 쏠려 있다.1)시인이나 소설가만큼 팬덤을 거느리는 극작가도 많지 않다. 공연을 보고 난 후에 대본이 궁금해져서 희곡집을 사는 경우가 있겠지만, 아직 공연되지 않은 극작가의 희곡을 먼저 사보는 독자는 드물 것이다. 아마도 극작가 개인이나 작품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일 것이 분명한 이러한 현상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나였다.
머릿속으로 앞일을 그려보았다. 만약 내가 문학주간의 기획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건 시, 소설, 희곡, 평론으로 안배되었을 장르 중에 희곡의 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일 테고,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의욕적으로 활동하는 ‘젊은’ 극작가2)들을 아주 많이 소개하리라. 내가 알기로 극작가들은 시와 소설을 아주 열심히 읽는데 시인이나 소설가는 이 작가들의 희곡을 알고 있기나 한가? 실제로 이런 볼멘소리를 하며 문학주간 담당자에게 ‘지금 한국에서 가장 아방가르드한 예술이 연극입니다’를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딱히 충돌하지는 않을 터, 문학을 공부하다가 연극판에 왔지만 한 번도 문학을 잊은 적이 없어서 이런 일도 만나는구나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금 쓴 이 문장이 모순이라는 것도 안다. 이토록 연극과 문학을 철저히 구분하는 내 무의식이라니!
2024 문학주간의 주제는 ‘스핀오프(SPIN-OFF)’로 결정되었다. 현실과 문학의 관계를 원작과 속편의 관계로 유비하면서도 “어떤 이야기와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책장을 덮을 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아직 풀어나가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 문학 바깥의 현실과 다시금 마주할 때, 원본과 파생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바꾸게 됩니다. 어쩌면 현실이야말로 문학의 스핀오프가 아닐까요? 현실보다 더 큰 상상력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세계를 품은 문학을 우리의 중심에 놓는다면, 그로부터 파생된 지금-여기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해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질문을 바꾸는 해제문이 마음에 쏙 들었다.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출판편집자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매주 회의를 하며 전체 프로그램을 하나씩 꾸려나갔다.
기획위원이 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각자 자기 분야에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그 구상을 실현해줄 작가 등을 섭외하고 출연자에게 줄 사례비와 필요한 예산을 짜고 세부 내용을 구성하고 홍보에 필요한 문구를 고안하고 프로그램이 이루어질 시간과 장소를 확정하고 행사 당일 필요한 장비를 확인하는 등 때를 가리지 않고 몰려오는 일을 그때그때 감당해야 했다. 당장 섭외를 하기 위해 메일을 쓰고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거는 일부터 온 신경이 곤두섰다. 그동안 내가 만났던 기획자들의 얼굴이 죽 떠올랐다. 그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전문성을 가지고 일을 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예술가의 의도와 관객의 향유 사이를 잇고 시대적 요구를 외면하지 않으며 이를 위해 보이지 않는 세심한 부분까지 다루는 기획자의 일은 정말 제대로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
내가 단독으로 기획한 프로그램은 ‘인간외전’ ‘극장외전’ ‘역사의 알고리즘’이었다. ‘인간외전’은 비인간을 화두 삼아 극을 쓰는 작가 김연재, 신효진 그리고 비인간 연기를 수행하기 위해 고민하는 배우 성수연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이었다. 이들 연극의 특징을 잘 아는 연극평론가 김민조의 사회로 이야기가 밀도 있게 흘러갔다. 비인간이라는 주제는 포스트휴머니즘 논의와 SF 장르의 붐으로 설명되곤 하지만, 연극에서 비인간을 형상화하는 일은 배우라는 인간의 몸을 통과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녹록지 않은 논점들을 포함하고 있다. 극작가는 물성을 체감하는 방식으로 연극을 쓴다. 인간이라는 객체로서 다른 존재들을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는 지금 작가들의 첨예한 입각점이다.
‘극장외전’은 극장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어 극장 바깥으로 연극의 무대를 옮겨오는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마련한 것이었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구자혜 연출과 ‘0set프로젝트’의 신재 연출과 함께 극장 안으로 초대받지 못한 존재들이 현실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들여다보았다. ‘역사의 알고리즘’은 액트리스 시리즈를 연작으로 그려낸 정진새 작, 연출의 연극 〈시스터 액트리스〉를 쇼케이스 형식으로 선보인 것이었다. 로봇이 인간의 연기를 대체하는 미래를 그려왔던 작가는 〈시스터 액트리스〉를 프리퀄 삼아 중세 시대 소녀들의 이야기를 펼쳐냈다. 이 세 개의 프로그램은 다행히 관객 점유율도 높았고 호응도 좋아서 기획위원으로서 보람을 느꼈다. 당초 계획했던 대로 문학계에서 주목할 만한 극작가들을 소개할 수 있어서 좋았고 지금 연극을 비롯한 공연예술이 무엇을 고민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어서 뿌듯했다. 그럼에도 의구심이 계속 남았다. 이 프로그램을 보러온 관객 중에 문학의 독자는 얼마나 될지, 그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문학과 연극의 관계를 어떻게 상상할지 궁금했다. 답답함도 있었다. 기획위원들이 각자 자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골몰하느라, 정작 다른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 비인간에 관한 이야기도, 퀴어와 장애와 관한 이야기도, 로봇과 역사적 상상력에 관한 이야기도 시인과 소설가와 작가와 배우와 연출가와 평론가가 함께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각자 포착한 스핀오프를 줌-아웃 했을 때 보이는 더 큰 그림이 잘 보이지 않았다. 문학과 연극 사이의 거리가 여전히 멀게 느껴졌다.
‘문학과 타 분야의 협업’에 관한 글을 제안받고 덜컥 수락했지만, 이 글을 쓰는 일의 곤혹을 이제야 고백한다. 청탁서를 받고 작년에 내가 한 일이 과연 ‘협업’이었을까에 관해 복잡한 생각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문학 뒤에 걸린 ‘과’에 체한 듯 덜컥 걸려, ‘문학‘과’ 연극’이 마치 ‘문학 > 연극’으로 보였다. 문학과 연극 사이의 부등호는 크기의 비교가 아니라 마음의 기울기가 어디로 정향되는지, 시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가리킨다. ‘문학 ⊃ 시, 소설, 희곡, 평론’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는 있지만 ‘문학 > 연극’은 어색한가?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아마도 연극계에서 문학을 주제로 삼았다면 ‘연극 > 문학’으로 표현되었을지도 모를 이 관계의 비대칭성은 어떻게 다르게 상상될 수 있을까? 문학주간에서 내가 한 일이 문학과 연극을 겹쳐내는 일이 아니라 ‘과’의 일이었다면, 과연 그 연결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극장에서 문학에 관해 이야기하고 무대에 알맞은 빛과 소리를 입혀 공연성을 만들어내는 일은 문학의 외연을 확장하는 일일까? 2024년 문학주간에서 시도된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문학은 문학성이라는 상상된 정체성을 더 진하게 붙들면서 더 넓은 길을 타진할 수 있었을까? 아직 이 질문을 해소하지 못한 채 너무 오래 이 글을 붙들고만 있다.
어쩌면 문학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연극평론을 하고 싶어서 연극판을 두리번거렸을 때, ‘국문과 출신’ 평론가는 연극 전공 평론가에 비해 비주류(?)로 인식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문학, 독문학, 불문학, 스페인문학, 러시아문학, 일문학, 중문학 등에서 ‘극문학’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에 비해 한국문학에서 ‘극문학’이 형성되어온 역사가 미흡해보인다는 인식은 다름 아닌 내 것이기도 했다. 현대문학 전공 중에서 희곡을 전공으로 택했을 때, 희곡을 ‘속화된 문학’이라고 칭하는 보수적인 시선이나 ‘딴따라’라는 자조 섞인 유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위상이란 상대적인 비교 대상에 따라 정해진다는 점에서 언제든 변할 수 있지만, 적어도 한국 희곡이나 연극이 문학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크게 바뀐 적은 없었다. 희곡을 전공으로 삼으면서도 시와 소설을 읽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마이너 전공’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 문학이면서도 문학이 아닌 자리, 문학의 언저리에 연극이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연극이 아니라 문학 언저리에 있다고 느끼는 내 얘기일 수도 있겠다. 침범도 침해도 없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 호감을 느끼는 사이. 그래서 기꺼이 물들고 스며들어 서로를 망치고 구원할 기회를 자꾸만 놓치는 사이.
평론집을 내면서 저자 소개에 이런 대목을 쓴 적이 있다.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연구자의 길에 들어섰고 연구와 창작 사이를 오가며 점선을 그어보고 있다.” 이렇게 쓰고 나면 개운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쓰고 나니 작가가 되는 일이 영영 불가능할 것만 같아 조금 서글퍼졌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때 내가 제일 힘주어 쓴 글자는 ‘점선’이었다. 나는 이어져 있고 싶었다. 점멸하는 실선, 끊기면서 이어지는 연결, 잠정적 경계, 숨김과 드러냄의 교차인 점선으로. 수학에서 점선은 함수의 정의되지 않은 부분이다. 아직 정의되지 않은 불연속적인 부분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 마음으로 2025 문학주간을 준비하고 있다. 내 손으로 한 자밤 넣은 소금이 낸 단맛의 기억 때문이라고 해두자. 문학과 연극의 관계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작가와 독자, 문학과 현실, 문학과 다른 예술 사이의 점선을 그으며, 다만 올해는 좀 더 스며들기 위한 용기를 내고 있다. 이 글이 공개될 즈음에는 한창 홍보중일 테니 마음 놓고 내가 기획에 참여한 프로그램 제목을 소개한다. ‘유령들의 대화’ ‘그만두는 경력’ ‘누가 짓지 않은 집’ ‘나를 구하는 나(들)’. 작년 문학주간에서의 시행착오를 잊지 않으며, 올해는 기획위원들이 장르 간 경계를 의식하지 않고 다양한 창작자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구성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특히 올해는 아동·청소년 문학이 더욱 풍성하게 다루어질 예정이라 기대가 된다. 이 점선들이 어떤 그림을 완성하게 될지 궁금하다. 부디 그 그림이 매끈하거나 아름답다기보다 울퉁불퉁 자유롭고 아직 정의 내리기 힘든 재미난 무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침 등굣길에 아이가 물었다. “엄마 ‘가치’가 뭐야?” 또 어디서 뭘 보고 왔는지 질문이 쏟아진다. 당황했지만 짐짓 여유롭게 “음…… 너는 기차가 왜 좋아?”하고 되물었다. 사실은 속이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뜨거워졌다. 거의 매일, 이 일이 무슨 가치가 있는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던 날들이었다. “빠르고 편리하고 멋있잖아. 그리고 재미있어.” “맞아. 그게 기차의 가치야. 기차가 있어서 세상이 좀 더 재미있고, 기차가 있어서 세상이 좀 더 좋다고 느껴지는 거.” 아이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러나 다 해결됐다는 듯 산뜻하게, “아. 그럼, 세상에 가치가 있는 게 많네? 다행이다.” 하더니 잡고 있던 손을 휙 놓고 교문을 향해 뛰어갔다. 가치를 따지지 않고 그냥 재미있게 하는 일들의 세계에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쪽으로 옮겨가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그것 역시 세상에 적응해가는 성장의 한 단계일까. 괜한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저만치 달아났다. 사전적 의미를 대면서 쓸모, 중요성, 값을 들어 답을 주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아이가 금전적 가치보다 시간적 가치나 노력을 쏟은 보람으로 그 말을 이해하길 바랐나 보다.
문학으로, 문학을 통해, 문학과 무엇을 하는 일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이 질문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알지만, 미리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무리해서 잘하려고 할수록 어그러지고, 그리 애를 쓰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이루어진 일들이 있다. 아직 가치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아이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딱 맞아떨어지는 일”이 ‘우연’이라는 내 대답을 듣고 “아, 그거 찌찌뽕이네!” 했다. 찌찌뽕!이라는 비의도적 일치와 공동 감각의 기쁨을 맞이하려면 가치를 미리 생각하기보다 일단 부딪쳐봐야 하지 않을까. 돌아보면 쓴맛 매운맛 짠맛이지만 목적을 초과하는 기쁨은 거부하기 힘든 단맛이므로.
양근애
연극을 보고 글을 쓴다. 이야기로 꽉 찬 연극부터 서로의 생각과 말을 받아 새 공간을 구성하는 연극까지 다양한 공연 작업에 드라마터그로 참여했다. 명지대 문예창작학과에서 희곡 창작, 극 장르 비평을 가르치며 문학과 예술의 점선을 이어보고 있다. 평론집 『‘이후’의 연극, 달라진 세계』가 있고 「일인칭 연극, 에고-도큐먼트의 수행성」 「장애연극의 접근성과 재현의 딜레마」 「메타연극 혹은 연극의 다른 문법」 등을 썼다.
‘브로콜리 너마저’를 ‘브로콜리 넘어져’로 알던 아이가 어느새 ‘너마저’의 뜻을 알아차리는 나이가 되는 걸 보면서 말의 힘에 대해 생각하는 날이 많아졌다. ‘나’를 드러내는 글의 외로움과 부끄러움 속에서, 과거의 나는 이렇게 했으나 미래의 나는 침범해 들어올 다른 나들과 너들에 의해 달라질 것이다, 주문 같은 다짐을 해본다. 문학도 연극도 결국 정의 내려지기를 거부하면서 생동해왔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2025/09/17
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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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해 신춘문예 당선작을 무대에 올리고 공연이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작가를 호명하는 행사가 열리긴 하지만, 신인 작가를 발굴하는 신춘문예의 성격이 반영된 행사에 가깝지 문학작품으로서 희곡을 조명하는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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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계에서 활동 경력이 길지 않은 작가들을 기성 작가들과 구분하여 ‘젊은’이라는 수식어로 통칭하는 경향에 동의하지 않지만(비슷한 예로 학계에서 쓰는 ‘학문후속세대’ ‘신진연구자’가 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페미니즘, 퀴어, 장애, 난민, 비인간, 기후위기, 돌봄 등 동시대 이슈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작가들을 지칭하기 위해 이 말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