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본 연극 생각이 난다. 작은 무대에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이었다. 극장 안의 불빛이 완전히 꺼졌다 다시 켜졌을 때, 조금 전까지 나왔던 배우들이 같은 얼굴로 저마다 다른 배역을 연기하는 모습에 눈길이 갔다. 조금 전까지 그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소설가라는 직업적 특성으로 인해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소설에서는 어떻게 가능할까 생각하다 연극의 본질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잊고 말았다.
  그간 경험해온 협업들을 떠올리다 이때가 기억이 났다. 동일한 주체가 분절된 장면과 역할을 오가며 다른 것을 수행하는 상황이 느슨하게 협업과 유비관계를 이룰 것이기도 하고, 협업 과정에서 소설이라는 장르의 경계와 한계를 막연하게 고민했던 시간과도 관련이 있으리라 여겨진다. 첫 협업을 제안받았을 때, 소설가로서의 경험도 일천할뿐더러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창작자가 아닌 느긋하고 무지한 감상자로서만 관계를 맺어온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 기획자에게 물었다. 그는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방식 그 자체가 궁금한데, 말하자면 창작의 시작점과 그 이후를 미디어아트라는 형식을 통해 풀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대답했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당시 나는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여 기획자의 말대로 색다르게 느껴지는 협업을 해보면 나 스스로 미약하게나마 실마리나 방법론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즉흥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편이다. 그렇게 미디어아트 작가와 만나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하게 될 것이 두렵다. 그때도 지금처럼 나는 미디어아트에 대해 알지 못했다. 작가는 내게 그간의 작업들을 보여주었는데 제법 흥미로운 면들이 있었다. 작품 대부분이 감상자들과 실시간으로 소위 인터랙티브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도 보통은 독자의 즉각적인 반응을 알 수 없는 소설가에게는 다소 신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문학 역시 독자가 작품을 완성하고 완결하지만, 보통은 그 현장을 창작자가 실시간으로 지켜보기란 쉽지 않다. 반면 미디어아트는 기술적 수단을 통해 반응을 사전에 설계하고, 관객은 그 틀 안에서 상호작용하며 작품을 완성하며, 이때 관객과 작가는 한 공간에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텍스트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나는 미디어아트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 필수적인 요소들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예컨대 전자 디스플레이가 필수적인가? 코드를 꼭 짜야 하는가? 나는 계속해서 무지에서 비롯된 질문들을 던졌다. 작가는 꾸준한 성실함을 바탕으로 나의 멍청한 질문들에 답을 해주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내 작품은 내가 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내 역할을 도저히 정의할 수 없다는 기분이었다.
  작품 공개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활동기간이 길고 경력도 많은 미디어아트 작가가 대부분의 얼개를 구상했을 것이다. 나는 쓰는 것은 읽어온 것을 넘어설 수 없으며 그간 읽어온 것들의 해체와 재조립이 어쩌면 새로운 텍스트 생산일지도 모르겠다는 의견을 피력했고, 그래서 기존 텍스트들에서 얻은 것들을 조합해 창작한다는 개념을 미디어아트로 풀어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제목은 ‘도축된 텍스트’였다. 도축이라는 단어를 바탕으로 두고 아이디어 회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길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식의 유희적인 논리가 적용되어 결과물은 만두로 결정되었다. 공연 형식으로 작품을 공개하기로 했다.
  이제는 한참 과거의 일이라 세부사항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최대한 복기해보자면 무대에 일종의 인덕션 형태로 배치된 스크린들에 조각난 텍스트들이 떠다니고(빨간색, 녹색, 흰색으로 기억하는데 각각 고기, 부추, 두부였을 것이다), 그것들을 모아 반죽한 뒤(디지털 반죽을 행하는 동시에 실제 재료로) 진짜 만두를 빚어 찜통에서 쪄냈던 건 확실하다. 그러니까 미디어 만두와 실제 만두가 모두 있었는데, 나 혹은 미디어아트 작가가 어설프게 빚은 진짜 만두를 관객들에게 제공했고, 옆구리가 제대로 붙지도 않고 맛도 형편없었을 만두를 받은 관객들은 어정쩡한 표정으로 그것을 맛보았다. 그래서 공연은 성공적이었을까? 재미는 있었다. 관객들도 애매하지만 흥미롭긴 하다는 얼굴이기는 했다. ‘도축’이라는 키워드로 인해 현장에는 실물크기에 가까운 돼지 형상까지 걸려 있었다. 다만 나로서는 내가 내놓은 것이 문학이나 그와 관련된 무엇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그날까지 나는 내내 “이런 것도 가능한가요?”라는 질문만 해댔다. 작가가 사용하는 툴들이 낯설었고, 빠르게 습득할 수도 없어서 속을 많이 앓았다. 최종 형식이 공연이라는 것, 내가 무대에서 일종의 배우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작가와 기획자가 나보다는 훨씬 전문적이고 진중하며 숙고하는 이들이니 내심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첫번째 협업을 마쳤지만 막연히 기대했던 것처럼 문학의 외연을 확장해본다거나 반대로 문학의 내부를 면밀히 들여다본다는 것 둘 중 무엇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나는 미디어아트를 기반으로 한 공연에 텍스트를 제공했을 뿐이었다. 그게 나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가 그간 해오던 작업과 다를 게 없었달까. 미디어아트에 대해 좀 더 공부가 필요했을까? 그러나 그건 내 일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그 후로도 다원예술이나 다른 장르 예술가들과의 협업이라는 것의 본질을 이해해보려고, 때로는 소액의 원고료를 받으려고, 때로는 소설 창작의 원리(라는 것이 있을까?)에 대한 실마리를 얻으려고 제안이 들어올 때마다 수락했다. (한 번 거절한 적이 있다. 무용가와의 협업이었는데, 첫 만남에서 “우리 이제 뭘 할까요?”라는 질문을 받고 도저히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그만두겠다고 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같이 고민했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 아니다, 거짓말이다……) 한 번은 건축가들과의 협업이 진행되었다. 건축가이자 시인인 기획자의 주도로 기무사 건물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아닐 수도 있다)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다. 문학하는 사람 다섯 명과 건축하는 사람 다섯 명이 모였다. 역시나 나는 건축에 무지했고…… 다른 협업들과 크게 다를 게 없겠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만 의외의 수확이 있었다. 행동반경이 좁고 인간관계가 넓지 않은 탓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일이 거의 없었는데 처음 접하는 인간 유형들을 관찰할 수 있는 계기였다. 좋음과 나쁨의 스펙트럼 사이에서 한 사람에게서는 군대 다녀왔냐는 질문을 받았다.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문학과 건축이 만났고, 그 결과물의 최종 종착지는 미술관이었다.
  그때는 어떤 예술 장르들이 얽히더라도 결과물은 결국 미술관으로 가게 된다는 걸 짐작하지 못했다. 나는 텍스트를 생산했고, 나와 협업한 건축가는 그것을 바탕으로 건축 모형 비슷한 것(정확한 용어를 모르겠다)을 만들고 사진가에게 도움을 요청해 조감도를 찍었다. 아쉽게도 다른 조합들의 작품들이 어떠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 기억력이 형편없어서인지, 아니면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들이 아니어서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후에 나와 협업한 건축가는 작품을 유럽 어느 지역에서 열리는 전시에 출품했고, 나는 뒤늦게 그 사실을 인지했다. 그제야 크레딧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당시에는 내 서명이 들어간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어선지 크게 항의하지는 않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탈바꿈한 옛 기무사 자리를 가끔 지나갈 때마다 그 일이 떠오르고는 한다. 나는 크레딧 요청을 어떻게 해야 했을까? 실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데. 그것이 내 작품목록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어느 미디어아트 작가와 다시 한 번 협업하게 되었을 때, 그는 정부기관 지원금이 모자란다며 내게 도록 제작비를 일부 부담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거절했다. 여러 이유들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협업의 결과물이 내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애초에 도록을 제작한다는 것도 상의되지 않았던 얘기였다. 상대방은 내게 텍스트 제공자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지만 점차 그렇게 되었달까. 내가 그들의 장르를 상당히 알지 못하면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다원예술, 문학과 다른 장르와의 협업 경험에 대한 글을 제안받았을 때, 처음에는 쓰지 못하겠다고 답변했다. 모든 경험이 소소하게 재미있었고 제법 귀하게 여겨지는 것들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회의감이 짙게 남았던 것이다. (이는 여러 면에서 내 역량이 부족한 탓으로 여겨진다. 유의미한 결과물을 창작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문학이 어느 장르와 결합하건 그 최종 형태는 대부분 미술관에 놓인다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였다. 한 번은 어느 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 오프닝에 관객으로 참석했는데, 역시 여러 장르를 결합한 여러 작품을 일정 기간 전시하는 자리였다. 이런저런 작품들을 둘러보는데 안내방송이 미술관 안에 마련된 조그만 공연장으로 오라고 했다. 입장 전 가드들이 공연 촬영 금지를 요청했다. 애초에 촬영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알겠다고 했다. 어느 밴드의 공연이 시작되고 서너 곡쯤 연주된 뒤 밴드 멤버들이 한 사람씩 옷을 벗기 시작했다. 청중들은 다소 당황했다. 미술관 밖에서 이런 공연이 열린다면 어떤 사후결과가 도출되었을까? 그 순간 나는 미술관이 보장하는 안전함을 새삼 실감했다.
  다소 회의적으로 지난 경험들을 돌아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즐거움과 수확도 있었다. 평소 쓰던 소설과 비슷하지만 사뭇 결이 다른 글을 쓸 때는 해방감이 들었고, 관객들에게 배포될 텍스트가 영수증 용지에 인쇄되어 시간이 지나면 글자들이 모두 지워질 거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묘한 기분이었다. (영원히 남지 않는 텍스트!) 아이디어를 교환하고(다행히 나보다는 상대방의 아이디어가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곁가지들을 쳐내는 과정이 만족스럽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협업이란 내가 무엇을 잘하지 못하는지를 확인시키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위축되기도 했겠지만, 동시에 두 장르 사이에 위태롭게 끼인 상태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모르고 있음을 새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내가 어떤 협업에 참여해왔는지를 명확히 정의하지 못한다. 포스터나 도록에 내 이름이 들어갔겠지만 그와 무관하게 내 작품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여전하다. 소설처럼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라 여러 명이 같이 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협업의 결과물이 태동하는 과정에 내가 주체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는 자각 탓일까. 다원예술에 대한 호기심과 수요가 꾸준하다면 향후에 또 다시 협업을 경험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로 인해 없을 것도 같지만.) 만약 그렇다면 지금보다는 확장된 시각과 지식(상식?)을 갖추고 텍스트 제공자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동시에 문학의 외연을 넓혀본다는 본래의 목적에도 나름대로 충실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유주

소설가

오래된 기억들을 불러내며 새삼 고민이 깊어지는 원고였습니다.

2025/09/17
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