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하는 사람들
유령처럼 맴돌며 정의할 수 없는 것에 가닿기
요즘 청소년극에는 고유한 색깔과 특성을 가진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런 주인공의 모습은 ‘모범생 청소년’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 일반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입니다. 극작가의 시선에서 어떤 청소년을 그리고 싶었는지, 그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는지 들어봅니다.
희곡을 쓰다보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에게 와주는 인물이 있고 조각을 하듯이 힘겹게 빚어내야만 하는 인물이 있다. 전자의 인물은 당차게 자기 갈 길을 가고 가끔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후자의 인물은 마치 방구석에 누워서 ‘어쩌라고’ 하는 눈빛을 보내며 모든 일을 나에게 맡긴 듯 애를 타게 만든다. 청소년극 〈영지〉의 영지는 그 모든 것을 다 가진 인물이었다. 영지는 어느 날 그야말로 벼락처럼 나타났고 나는 이렇게 찾아온 인물과 어떻게 만나야 할지를 몰라 이렇게 저렇게 조우를 시도하다 실패를 거듭했다. 풀 죽은 시금치가 된 나는 ‘어쩌라고’ 하는 영지 옆에 그냥 누워버리기 일쑤였다. 함께 작품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도 영지는 너무나 어려운 인물이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영지가 현실적인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손에 도저히 잡히질 않아서. 행동의 의도를 모르겠어서. 그러나 가장 나중에는 결국 그 ‘알 수 없는 존재’라는 특징이 영지라는 인물의 가장 큰 매력으로 남게 된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영지는 반드시 기묘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영지〉를 준비하면서 청소년을 정의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것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같은 청소년이라도 이 사람이 다르고 또 저 사람이 다르니까.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가 ‘청소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어떤 것이 신경 쓰여 글까지 쓰게 되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희곡 쓰기를 시작한 2013년도부터 지금까지 쭉 청소년 희곡을 주로 써온 것이 나에게도 미스터리다. 나에게 청소년은 뭐길래. 왜 그렇게.
청소년기에 나는 활발하면서 살갑지 않고, 외로워하면서 친구 사귀는 것에는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청소년이었다. 넘치는 에너지로 복도를 뛰어다니고 소리를 질러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만 특별한 관계를 맺는 일은 낯부끄러워했다. 공부는 열심히 안 했다. 공부를 열심히 잘해서 어떤 전공을 갖게 된다고 했을 때 그 전공을 좋아할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미래에 대한 확신 없음이 공부에 동기 없음을 유발했던 것이다. 나중에 후회를 하기도 했지만, 나이를 먹고 활동지원사 교육을 받겠다고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수업을 들을 때 중고등학교 때 버릇들이 그대로 나오는 것을 보면서 사람은 그리 안 변한다고 느꼈다. 중고등학교 때 나는 수업 시간 내내 무척 졸렸다. 점심 먹고 한두 시간 뒤에 하교하는 초등학생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중학교 가서 점심 먹고 세 시간이나 후에 집에 가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중학교 1학년이 되자마자 점심 먹은 직후인 5교시에 졸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기 정말 어려웠고 그러다 결국 수능 볼 때도 점심 먹은 직후 영어 시험 시간에 졸고 말았다. 감정은 무척 들쑥날쑥하여 어떤 날은 해변의 반짝이는 모래알을 본 듯 기분이 좋고 어떤 날은 기운 달처럼 슬펐다. 낮에는 기분이 좋아 쉬는 시간 내내 뛰어다니고 밤에는 지독히 슬퍼져서 아무 데서나 펑펑 울었다. 나는 사회성을 갖춘 청소년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이 세계와 나는 좀 떨어져 있다는 감각을 느끼곤 했다. 어쩜 쟤네는 저렇게 서로 잘 어울리며 살아갈까. 어쩜 쟤네는 저렇게 잘 적응하며 살아갈까, 하며 친구들에게 부러움을 자주 느꼈다. 청소년기 내내 중심이 될 생각을 안 하고 매일매일 마구 변하는 메타몽 같은 성정을 품고 주변을 맴돌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로. 정확하고 명확한 태도로 성실하게 학습하는 친구들이 참 신기했다. 어쩌면 나는 모범적인 모양새가 뚜렷하게 정해져 있는 십이 년을 보낸다는 것의 가혹함을 느끼고 스스로 유령이 되길 선택한 것이 아니었을까. 대학교를 잘 가야 한다는 목표는 불변의 진리 같은 것이어서, 반박의 여지도 없는 그런 것이라 깊은 슬픔에 잠식되어 그만, 유령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음, 핑계일지도. 그런 시기를 보내고 대학생이 되어 나도 모르게 청소년극을 썼다.
첫 청소년극의 제목은 〈햄스터 살인사건〉이고 주인공은 여학생과 남학생이었다. 여학생과 남학생은 인터넷에서 만나 함께 죽기 위해 낡고 허름한 모텔을 찾는다. 그러나 허락도 없이 계속 방으로 쳐들어오는 어른들에 의해 죽기 불가능해지고 여학생이 창문 아래로 몸을 던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시공간이 변하기 시작하는 이야기다. 남학생은 모텔에 데리고 온 햄스터 바닐라가 어른의 발에 밟혀 죽은 이후로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죽은 줄 알았던 여학생은 멀쩡히 돌아온다. 이후에도 여학생은 계속 창밖으로 몸을 던지고 되살아 오기를 반복한다. 여학생과 남학생은 어른들에 의해 내내 ‘없는 존재’처럼 여겨지다 비로소 ‘유령’이 되어 시공간을 주름잡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사회에서 소외된,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무력한 존재들이 ‘유령’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 ‘유령 같음’이 오히려 자유로워질 때 자연스레 청소년기의 내가 떠오른다.
그다음으로 쓴 청소년 희곡 〈먼지회오리〉에서는 감정에 대한 고민을 풀어놓았다. 극의 주인공 정연은 예고도 없이, 자기도 모르게 야자를 째고 운동장 등나무 벤치에 앉는다. 가슴속에 막 회오리 같은 게 일어서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정연이 걱정되어 찾아오는 친구들, 담임 선생님, 썸남이 정연과 대화하며 먼지회오리 같은 작은 해프닝을 일으키고 그날은 그렇게 별난 하루로 지나가버린다. 다음날은 아무렇지 않게 또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내게 청소년기는 요동치던 감정들, 왠지 알 수 없고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기분에 끙끙 앓던 시기였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스스로를 다독이거나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허가 하에 갈 수 있는 곳은 겨우 양호실이었다. 약이나 병실 침대가 필요한 것이 아닐 텐데 이 시설 안에서는 그런 해결 방법밖에 찾지 못했다.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어쩌면 그것은 반드시 병이어야만 했던 것일 수도. ‘병’이 아니라 다른 ‘상태’도 있다는 것, 그래서 스스로 돌볼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찾아오는 감정, 심리 상태를 혼자 온전히 끌어안아야만 했던 때가 있었기 때문에.
그다음에 만난 것이 〈영지〉의 영지다. 영지는 이전에 만났던 인물들과 차이가 있었는데 그가 십대 초반 청소년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만 열두 살까지를 어린이라고 보지만 나에게 초등학교 고학년은 이미 많은 것을 알아차렸으나 사회적 시선 때문에 어린이답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이로 느껴졌다. 성당 캠프에서 빨리 씻게 하기 위해 선생님들이 샤워실에서 대기하며 들어오는 아이들을 모두 씻겨냈던 날이 기억난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내 몸을 누가 씻긴다는 사실이 참 수치스러웠다. 영지의 나이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는데, 초등학교 고학년이라고 여겨지는 열한 살로 시작을 하고 싶었다. 알만한 건 다 알지만 다 안다고 말하면 어른들에게 혼나는 시기가 아닐까 하고.
〈영지〉의 영지는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특이한 아이다. 소희처럼 모범생도 아니고 효정이처럼 재주꾼도 아니다. 이상한 짓을 자꾸만 하고 다니는 영지에게는 소문이 생기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영지와 놀지 말라고 한다. 영지는 스스로 마녀라 칭하며 그 동네를 떠난다. 〈영지〉에는 아주 중요한 대사가 있다. “나는 영지야. 새의 머리에 인간의 몸통에 개구리의 다리를 가졌어. 날개도 있고 꼬리도 있지. 내일은 또 다르고 모레는 또 달라!” 초연부터 삼연까지 대본이 몇 번씩 고쳐져도 이 대사는 단 한 번도 삭제되거나 고쳐진 적이 없다.1) 작업 과정 중에 모든 장면이 싹 뒤집어 엎어지는 중에도 이 대사는 대본에 말뚝처럼 꼿꼿이 박혀 있었다. 나를 함부로 정의하지 말라는 외침. 어쩌면 이게 〈영지〉의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영지〉를 쓰면서 청소년의 권리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누군가에 의해 다뤄져야만 하고 통제되어야만 하는 위치에 있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목소리를 낼 수 없고, 그저 천사처럼 예쁘게 웃고 있는 게 좋다고 하는 사회구조에 문제 제기를 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이 대사는 외침일 수밖에 없었다.

청소년극 〈영지〉의 한 장면. 2020년 국립극단.
영지의 성질은 여러 번 변화했다. 맨 처음 영지는 야생적이고 엉뚱하고 불쌍했다. 그다음 영지는 개구쟁이였고 귀엽고 당당했다. 그다음 영지는 활동적인, 쿨한, 인기쟁이였다. 그다음 영지는 멀리서 이곳에 잠시 들른 기묘한 마녀가 되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마녀’로 여겨지는 영지에게 진짜 ‘마녀’로 보이지 않도록 다양한 장치와 사연을 부여했던 시기들을 거쳐 영지가 진짜 ‘마녀’가 되도록 했을 때, 쾌감과 해방감 같은 것이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영지는 ‘청소년’이라는 성질을 벗어던지고 나서야 진정 자기가 원하는 모습이 된 것이 아닐까.

청소년극 〈영지〉의 한 장면. 2023년 국립극단.
그 이후 나는 ‘타자’인 ‘청소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 나에 대한 이야기라고 여겼던 시기도 지나 있었다. 지금의 나는 ‘타자’인 ‘청소년’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트랙터’의 〈빵과 텐트〉에서 극 중 아이는 자신의 잃어버린 ‘몸’을 찾아달라며 좋아하던 배우를 데리고 ‘없는 공간’들을 간다. 그 공간은 예를 들면 ‘시칠리아 해변의 부서진 조개 안’ ‘무너진 성당의 돌무덤’ 같은 곳들이다. 배우는 항상 인물에 가닿기를 실패하는 자신을 비관하는데 그런 모습 때문에 당신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하는 아이 덕분에 힘을 얻는다. 나중에 아이는 배우에 의해 ‘빵’ 터져 사라져버리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나도 모르게 가닿기 위한 노력을 하는 존재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던 걸까. 이 작품에서는 이전 작품들에서는 악역처럼 등장했던 어른들이 처음으로 청소년과 어떤 교감을 이뤄내는 변화가 있었다. 나 스스로 더 이상 청소년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한 이후, 청소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하는 고민이 이런 이야기로 나오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청소년과 사회적 이슈를 교차해보고자 했던 작품들도 있다. 〈지장이 있다〉에서는 우울증에 대해 이야기했고 〈괴담〉에서는 원전과 가까운 마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는 세월호 참사 이후 했던 고민들이 반영된 작업들이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있다는 것,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으니까 불편하고 우울한 것에는 침묵하자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그렇기에 더 드러나야만 하는 이야기들을 자꾸 꺼내고 말하고 외치고 싶은 욕망이 느껴졌다.
‘이야기’라는 것이 가진 ‘힘’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많다. 고민 없이 쓰다간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혐오하는 데 일조하게 될 수 있다. 한 사람만이 영웅이 되는 이야기, 장애를 극복하는 이야기, 내 이야기 짓기를 위해 잘려 나가는 존재들, 도구처럼 사용되는 상황들의 위험함에 대해 생각한다.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약적이고 부조리한 상황과 사건들의 중요함에 대해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분리시키고 구멍을 내고 꿈과 환상과 현실을 교차시키고 섞는 작업들에 관심을 둬본다.
탄핵 집회에 나갔을 때 나를 청소년으로 오인하고 기특해하던 어른이 떠오른다. 그분은 내가 그를 바라보자 청소년답지 않은 얼굴을 보고 당황하셨다. 왜 청소년이라고 다르다 여겨지고 기특하다 여겨져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청소년이 아니었음에도 순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날은 집회에 나온 청소년들이 참 많았다. 그들은 칭찬을 받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를 위해서,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말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었을 테다.
영지를 현실에 발붙이게 하려고 갖은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현실에 발을 붙이게 하면 할수록 영지는 점점 더 영지의 색깔을 잃어갔다. 내가 뭐라고 나만의 힘으로 조각을 해내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작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하고 원하는 바에 집착하게 되면 인물 또한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영지가 마지막에 ‘환생!’이라고 외치며 떠날 때 그는 진짜 떠나야만 했다. 영지를 진짜 떠나게 두었을 때 나 또한 후련해졌다. 인물이 가려는 길을 가게 둘 때, 그 사이에 작가가 그저 어떤 징검다리로, 조력자로 일을 할 때 각자의 해방을 맞게 되는 것 같다. 청소년과 어른의 관계도, 타자와 나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어쩌면 내가 계속 글을 쓰는 이유는 세상이 좇는 세계와 거리를 두고 유령처럼 맴돌며 모호하고 구질구질하고 정의할 수 없는 것에 가닿는 시도를 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내가 놓는 징검다리가 누군가의 해방에 조금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게 엄청난 욕심이 아니라면 말이다.
허선혜
타고난 분수보다 더 좋은 문장이 나왔을 때 무척 좋아합니다. 그런 쾌감을 놓칠 수 없어 계속 씁니다.
2025/05/21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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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극 〈영지〉는 2018년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의 창작벨트 프로그램을 통해 개발되어 2019년 초연되었다. 이후 2020년에 재연, 2023년에 삼연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