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멸망의 세계
멸망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어느 순간 갑자기 툭. 피하려 애를 써봐도 변하는 것은 없다. 어른들은 다 그렇게 사는 거라고 한다. 참고 또 견디면서.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끝이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영원히 버티는 것뿐이다.
내 세계는 정확히 일주일 전 그날 완전히 망했다. 초등학교 야구대표단 투수로 활동하던 내가 어깨를 다쳐버리고 만 것이다. 성장기에 생긴 부상은 어른이 되어 생긴 부상보다 훨씬 치명적이다. 유소년 국가대표는 꿈도 꾸지 못하고 그대로 야구를 포기해야 할 만큼 말이다.
“오히려 잘된 건지도 몰라. 일찍 그만두는 게 미련도 없잖니.”
욱신거리는 어깨를 부여잡고 있는 내게 의사 선생님이 한마디 건넸다. 초등학생의 실패쯤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의사 선생님이 조금 미웠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일이 있고 나서 주위 친구들과 어른들은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 눈빛이, 위로라고 건네는 그 말들이 진짜로 내 세계가 멸망했다는 것을 확인 시켜주는 것 같아서 더 괴로웠다.
우리 학교 최고의 인기 동아리 ‘야구부’에서 나오자, 전교에서 유일하게 동아리가 없는 애가 됐다. 하지만 교칙상 무조건 하나의 동아리에 들어가야 했는데, 도무지 들어갈 곳을 찾지 못했다. 야구 말고 다른 세계를 상상해본 적 없는 내게 음악, 미술, 공부 같은 것들은 전부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보다 못한 선생님이 내게 인원이 부족한 동아리 하나를 추천했다. 그 동아리의 이름은 바로 ‘멸망 클럽’이었다.
―멸망한 세계에 도착한 모든 이들을 환영합니다.
모집 포스터에 적힌 소개말조차 황당한 이 동아리. 정체가 뭐지?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 전부 실패한 애들만 모여 있는 건가 싶어 가입을 망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똑같은 실패자다. 그러니까, 이제 내게 어울리는 자리는 야구부가 아닌 바로 멸망 클럽이었다.
수요일 점심시간이 지나면 동아리 활동이 시작된다. 각자 자신의 동아리 멤버들과 함께 모여 활동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이제 야구복을 입고 운동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 복도의 제일 끝에 있는 허름한 공간. 바로 멸망 클럽의 동아리방으로 가야 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동그랗게 앉아 있는 멤버들의 얼굴이 보였다. 멸망 클럽의 멤버는 효리, 강민, 하늘 이렇게 나를 제외하곤 고작 세 명뿐이었다. 물론 친하진 않았다. 가끔 복도를 지나다가 얼굴을 본 게 전부였다.
“안녕, 1반 도영이 맞지? 우리 새 멤버가 된 걸 축하해!”
자리에 앉아 있던 효리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옆에 앉은 강민이와 하늘이도 내게 어서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나는 느린 속도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 명씩 자기소개 해볼까?”
순간 어색한 공기의 적막을 깨고 효리가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강민이가 선뜻 자신이 먼저 소개하겠다고 나섰다.
“내 이름은 이강민이고 6학년 2반이야.”
강민이라면 다른 반이지만 잘 알고 있는 아이였다. 무려 우리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는 수재였으니까. 학교 교문에는 전국 수학 경시대회 1등을 한 강민이를 축하하는 현수막도 걸려 있다. 근데 왜 강민이가 하필 멸망 클럽에 있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강민이라면 훨씬 인기 많은 수학동아리나 과학 동아리에 가입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나는 강민이에게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왜 멸망 클럽에 가입했어? 공부도 잘하면서.”
강민이는 한참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공부가 아니니까. 빈지노 같은 래퍼가 되고 싶은데 엄마 때문에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거든.”
나는 더이상 대답할 수 없었다. 당연히 공부하는 걸 좋아해서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래퍼가 꿈이었다니. 모범생 강민이가 폭풍 랩을 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도무지 매치가 안 됐다. 그러자 옆에 있던 효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음은 내가 할게. 나는 유효리. 6학년 3반이야! 멸망 클럽의 회장!”
쾌활한 목소리가 울렸다. 고민 없어 보이는 밝은 목소리의 효리가 무려 이 멸망 클럽의 회장이라니. 나는 효리에게도 멸망 클럽에 가입한 이유를 물었다.
“음, 나는 꿈이 제빵사야.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디저트를 만드는. 그런데 태어났을 때부터 알레르기가 심해서 만지지도 못하는 식재료들이 많아.”
효리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나 또한 예전에 복숭아 알레르기 때문에 크게 고생했었다. 그 고통을 알기에 해맑은 얼굴을 한 효리에게 마음이 쓰였다. 효리는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실패를 경험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효리가 대견해 보이기도 했다.
효리의 말이 끝나자, 옆에 있던 하늘이가 목소리를 큼큼 다듬으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김하늘이야. 도영이 너랑 같은 반인데 대화를 별로 안 해봤네.”
하늘이는 조금 머쓱한 듯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실제로 나는 하늘이와 같은 반이지만 한 번도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맨날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놀던 나와 달리 책상에서 혼자 무언가를 끄적이기만 하던 하늘이었으니까.
“내가 왜 멸망 클럽에 가입했는지 궁금하지? 나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 화가가 꿈이거든. 그런데 초록색이랑 빨간색처럼 구별하지 못하는 색들이 있어.”
덤덤한 하늘이의 목소리에 놀란 마음을 내색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문득 부끄러워졌다.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애들이 모여 만든 나머지 클럽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정반대였다. 꿈을 이루기 위한 간절한 마음이 모여 만들어진 동아리인 것이다. 한 번의 멸망을 겪고도 다시 살아남으려 애쓰는 열정을 가진 아이들이 말이다.
“자, 그럼 드디어! 새로운 멤버의 소개인가?”
아이들이 단체로 손바닥을 무릎에 치며 두구두구 하는 소리를 냈다. 오롯이 내게만 쏠린 세 명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다 겨우 말을 꺼냈다.
“나는 김도영. 6학년 1반이야. 야구부에 있다가 부상 때문에 얼마 전에 관뒀어.”
작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자 곧바로 박수와 함께 환영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다 부상을 당한 건지, 영영 하지 못하는 건지. 야구를 관두고 나서부터 만나는 모두가 다 똑같은 질문을 했다. 하지만 멸망 클럽 멤버들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박수 소리로 새로운 멤버가 된 나를 반겨줬다.
자기소개 이후로도 우리는 끊임없이 얘기를 이어갔다. 마치 원래부터 친했던 친구들처럼 편하게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아마도 각자의 실패를 겪어본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야구를 그만두고 세상에 혼자 버려진 기분이었는데 함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됐다. 한참을 얘기하다 갑자기 강민이가 중요한 할말이 있다는 듯 우리를 집중시켰다.
“우리 도영이한테 발표회 얘기해줘야 해!”
강민이의 말에 효리와 하늘이가 잊고 있었다며 맞장구쳤다. 나는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영이는 야구부였으니까 몰랐겠다. 우리 2주 뒤에 동아리 발표회 하거든. 모든 동아리가 나와서 각자 하고 싶은 무대를 보여줘야 해.”
“맞아. 작년에는 댄스 동아리가 1등 했어. 올해는 우리가 1등 할거지만.”
효리와 하늘이가 들뜬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여태껏 학교 다니면서 동아리 발표회라는 게 있는지 몰랐다. 야구부에 있을 때는 경기가 많아서 학교 활동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발표회라면 무언가를 보여줘야 할 텐데.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는 무대 같은 거 해본 적 없어. 잘하는 것도 없는데.”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얘기를 건넸다. 그러자 강민이와 효리, 그리고 하늘이 세 명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나는 연신 손을 꼼지락대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가 다 계획이 있어.”
강민이의 말이 끝나자, 효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벽에 걸린 칠판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펜으로 커다랗게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칠판 전체가 ‘멸망 축제’라는 단어로 가득 채워졌다.
“멸망 축제?”
나는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멸망과 축제.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나란히 적혀있는 칠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곧이어 하늘이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우리 멸망 클럽은 이번 발표회에서 축제를 열거야. 멸망 축제.”
“그게 뭐 하는 건데?”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지. 뭐든 상관없어. 그냥 즐겁기만 하면 돼. 축제니까.”
하늘이의 말을 듣고도 무슨 말인지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효리와 강민이가 준비하면서 알게 될 거라며 웃었다. 아직 새로운 걸 시작할 준비가 되지 않은 탓에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멸망 클럽에 가입한 이상 멤버들의 의견에 따라야 했다. 머리가 복잡해 터질 지경이었다.
동아리 활동을 하는 수요일을 제외하고는 따로 멤버들을 만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말에도 학교에 모이기로 했다. 우리끼리만 있는 건 위험하다고 반대하던 담임 선생님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리고 딱 발표회 전까지만 주말에도 동아리방을 쓸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대신 깜깜해지기 전에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했다.
약속한 토요일 점심에 우린 다 같이 동아리방에서 만났다. 문을 열자 미리 와 있던 효리와 하늘이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옆으로 다가갔다.
“어라? 강민이는 아직 안 왔나보네.”
도통 보이지 않는 강민이의 모습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효리가 곧바로 몰랐냐는 듯 툭하고 말을 내뱉었다.
“강민이는 주말에도 학원에 가잖아. 오늘은 부모님 설득해서 영어학원만 갔다가 바로 온대. 원래는 주말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원만 돌아다녀.”
나는 효리의 말을 듣고 입을 떡 벌렸다. 주말까지 학원에 가면 대체 언제 쉬는 거지? 강민이가 왜 전교 1등을 하면서도 자신의 세계는 멸망이라고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갔다. 좋아하지 않는 공부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건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일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효리와 하늘이가 각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효리는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였고, 하늘이는 가방에서 색연필 여러 자루를 꺼냈다.
“다들 뭐 하는 거야?”
나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효리가 먼저 대답했다.
“공책에 레시피 적는 중. 축제 때 쿠키를 나눠줄 거거든. 알레르기에 예민한 사람도 먹을 수 있는 쿠키를 말이야.”
효리가 말을 끝내자 곧바로 하늘이가 말을 이었다.
“난 무대 벽에 걸 그림을 그릴 거야. 색을 구별하지 못해도 얼마든지 잘 그릴 수 있거든.”
나는 효리와 하늘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감으로 가득찬 아이들의 모습이 멋져 보였다. 그런데 내 앞에는 공책도, 색연필도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럼 나는 뭘 하면 될까?”
내가 묻자, 효리와 하늘이가 동시에 말을 맞추기라도 한 듯 대답했다.
“그건 우리가 아니라 너 자신한테 물어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을 듣고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있긴 한가? 아니, 그보다 할 수 있는 게 있긴 한가? 머릿속에서 나를 향한 온갖 의심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데 하늘이가 내 앞으로 하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나는 가끔 텅 빈 이 종이가 내 세계라고 생각해. 하고 싶은 게 생길 때마다 이곳에 내 세계를 채워 넣지.”
하늘이는 무심한 듯 말을 건네고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얗고 깨끗한, 텅 비어 있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 얇은 종이 한 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종이 위에는 야구공들이 빽빽하게 줄지어 있었을 것이다. 다른 것들이 들어올 틈도 없이 오롯이 야구로만. 하지만 이젠 달랐다. 무언가가 이 세계 속에 들어오더라도 누구도 막을 사람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각자 자신의 세계 속에 집중했다. 하고 싶은 것이 분명한 멤버들이 마냥 부러웠다.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자 지쳐 보이는 모습의 강민이가 보였다. 나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강민아! 어서 와.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
“미안해. 더 빨리 오려고 했는데 학원에서 영어 단어 다 외워야 보내준다고 해서.”
대답하는 강민이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런 강민이가 이해됐다. 만약 내가 주말에 학원에서 하루 종일 영어 단어와 씨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니까 말이다.
“다들 시작했어?”
강민이가 물었다. 그러자 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나는 레시피 만들고, 하늘이는 그림. 도영이는 고민하는 것 같아.”
“그럼 나도 빨리 시작해야지.”
동아리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쭉 어두웠던 강민이의 얼굴이 순간 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강민이는 가방 안에서 기다란 이어폰 하나와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곧이어 이어폰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 소리에 맞춰 어깨를 들썩였다.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난 대체 무얼 할 수 있을까……”
도저히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뒤늦게 온 강민이도 노트에 자신의 랩 가사를 적으며 연신 흥얼거렸다. 하지만 내 앞에 놓인 종이는 여전히 하얀 백지였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있던 효리가 말을 걸어왔다.
“강민이 너는 어쩌다 야구를 시작하게 된 거야?”
효리는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사실 공 한 번 잡아본 적 없던 내가 갑자기 야구에 빠진 이유는 조금 특별했다.
“어렸을 때 우연히 아빠가 보는 야구 중계 영상을 봤어. 그때는 야구에 대해 하나도 몰랐는데 중계가 너무 재미있어서 계속 챙겨보다가 완전히 빠졌지.”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효리가 크게 손뼉을 쳤다. 나는 깜짝 놀라 효리를 쳐다봤다.
“캐스터! 야구 해설가 하면 되겠다!”
효리는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두 눈을 반짝이며 내 눈을 바라봤다. 물론 야구를 그만두고 스포츠 해설가라는 꿈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앞에 나서서 말하기 두려워하는 내가 많은 관중 앞에서 중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근데 나는 사람들 앞에서 말 잘 못하는데……”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효리가 내 팔을 툭 쳤다.
“바보. 안 해봤는데 어떻게 알아!”
효리는 해보지도 않고 왜 포기하냐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나는 곧바로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느껴보는 무한한 지지에 순간 가슴 속에서 화르륵 뜨거운 불씨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펜을 들고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곧바로 한 글자씩 써내려갔다.
―멸망 축제 MC 김도영
드디어 발표회가 하루 전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우리는 틈틈이 모여 성공적인 ‘멸망 축제’ 개최를 위해 힘썼다. 동아리방 벽에는 하늘이가 그린 그림이 다채롭게 걸려 있었고, 그 그림은 초등학생이 그렸다고 믿기 힘들 만큼 아름다웠다. 또한, 매번 동아리방을 가득 채우는 강민이의 랩은 빈지노처럼 멋있었다. 직접 쓴 가사에서 진심이 느껴져 눈물이 핑 돌았다.
무엇보다 효리는 발표회에서 나눠줄 쿠키 레시피를 개발하기 위해 몇 번이고 쿠키를 굽고 버리길 반복했다. 원하는 맛이 나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얘들아! 나 드디어 만들었어.”
결국 효리는 달걀, 우유, 밀가루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쿠키 개발에 성공했다. 오롯이 자신의 레시피라며 감격스러워했다.
“하나씩 먹어봐.”
효리는 집에서 미리 만들어온 쿠키를 우리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나는 곧바로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겉은 바삭하면서 속은 촉촉한, 끝에는 은은한 단맛이 풍기는 맛있는 쿠키였다. 어느 제과점에 견주어봐도 뒤처지지 않는 최고의 맛이었다.
“너 진짜 대박이다. 인정.”
나는 효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세웠다. 그러자 옆에서 입을 오물거리던 강민이가 맞장구치며 하나 더 달라고 졸라댔다. 하늘이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모두가 행복해지는 쿠키를 만드는 효리가 자랑스러웠다.
“다행이야. 내일 무대를 망쳐도 이 쿠키를 먹으면 다들 행복해질 게 분명해.”
강민이는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곧바로 하늘이가 대답했다.
“우리 멸망 클럽 1호 래퍼가 왜 자신 없는 소리를 하시나.”
멤버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깔깔 웃었다. 달콤한 쿠키의 맛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멸망 축제는 이미 성공한 셈이다. 나는 꿈을 찾았고, 효리와 하늘이는 꿈을 지켰으며, 강민이는 꿈에 한 발짝 다가갔다. 우리는 전부 멸망의 세계 끝에서 또다른 출발점을 맞았다.
“내일 축제가 끝나도 우린 여전히 멸망 클럽이야.”
멸망 클럽의 리더 효리가 말했다. 우리는 그 말에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면서 처음 겪은 실패와 좌절. 지구가 멸망할 것 같은 공포. 그 세계 속에서 버티고 있는 우린 어쩌면 영영 멸망의 굴레 속에서 살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느 순간 나를 또 한 번 괴롭힐 실패의 경험은 성공을 위한 과정이니까. 멸망은 또다른 희망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제 다음 차례야.”
발표회 당일, 우리의 차례를 기다리며 멤버들끼리 다 같이 손을 잡았다. 긴장한 탓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다. 무대 위에서는 마술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망토를 뒤집어쓴 아이가 기다란 막대기를 장미꽃으로 변신시켰다. 놀라운 마술에 아이들이 환호성이 들려왔다. 마술동아리의 무대가 환호와 함께 막을 내렸다.
이젠 우리 멸망 클럽이 보여줄 때였다. 실패한 아이들끼리 모여 완성한 성공적인 축제를 말이다. 떨리는 마음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이는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던 그림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벽에 붙이기 시작했고, 효리는 자신이 구운 쿠키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강민이와 나는 무대 단상으로 올라갔다. 나란히 서서 내가 먼저 목소리를 큼큼 다듬고 말을 시작했다. 수많은 눈동자가 오롯이 나를 향해 집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도영입니다. 오늘 멸망 축제 MC를 맡게 되었어요.”
야구부로 나를 기억하고 있던 애들이 조금씩 웅성거렸다. 그 바람에 더 긴장되어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다음 멘트를 이어가야 하는데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때 옆에 서 있던 강민이가 내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우린 이미 멸망해봤던 사람들인걸.”
조금은 장난스러운 그 말이 가슴에 콕하고 박혔다. 어차피 멸망해봤던 사람들…… 강민이의 말을 되새기며 몇 번이고 망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니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 뭐 어때.
무대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두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지금부터 멸망 클럽의 축제를 시작합니다!”
내 세계는 정확히 일주일 전 그날 완전히 망했다. 초등학교 야구대표단 투수로 활동하던 내가 어깨를 다쳐버리고 만 것이다. 성장기에 생긴 부상은 어른이 되어 생긴 부상보다 훨씬 치명적이다. 유소년 국가대표는 꿈도 꾸지 못하고 그대로 야구를 포기해야 할 만큼 말이다.
“오히려 잘된 건지도 몰라. 일찍 그만두는 게 미련도 없잖니.”
욱신거리는 어깨를 부여잡고 있는 내게 의사 선생님이 한마디 건넸다. 초등학생의 실패쯤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의사 선생님이 조금 미웠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일이 있고 나서 주위 친구들과 어른들은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 눈빛이, 위로라고 건네는 그 말들이 진짜로 내 세계가 멸망했다는 것을 확인 시켜주는 것 같아서 더 괴로웠다.
우리 학교 최고의 인기 동아리 ‘야구부’에서 나오자, 전교에서 유일하게 동아리가 없는 애가 됐다. 하지만 교칙상 무조건 하나의 동아리에 들어가야 했는데, 도무지 들어갈 곳을 찾지 못했다. 야구 말고 다른 세계를 상상해본 적 없는 내게 음악, 미술, 공부 같은 것들은 전부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보다 못한 선생님이 내게 인원이 부족한 동아리 하나를 추천했다. 그 동아리의 이름은 바로 ‘멸망 클럽’이었다.
―멸망한 세계에 도착한 모든 이들을 환영합니다.
모집 포스터에 적힌 소개말조차 황당한 이 동아리. 정체가 뭐지?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 전부 실패한 애들만 모여 있는 건가 싶어 가입을 망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똑같은 실패자다. 그러니까, 이제 내게 어울리는 자리는 야구부가 아닌 바로 멸망 클럽이었다.
수요일 점심시간이 지나면 동아리 활동이 시작된다. 각자 자신의 동아리 멤버들과 함께 모여 활동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이제 야구복을 입고 운동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 복도의 제일 끝에 있는 허름한 공간. 바로 멸망 클럽의 동아리방으로 가야 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동그랗게 앉아 있는 멤버들의 얼굴이 보였다. 멸망 클럽의 멤버는 효리, 강민, 하늘 이렇게 나를 제외하곤 고작 세 명뿐이었다. 물론 친하진 않았다. 가끔 복도를 지나다가 얼굴을 본 게 전부였다.
“안녕, 1반 도영이 맞지? 우리 새 멤버가 된 걸 축하해!”
자리에 앉아 있던 효리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옆에 앉은 강민이와 하늘이도 내게 어서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나는 느린 속도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 명씩 자기소개 해볼까?”
순간 어색한 공기의 적막을 깨고 효리가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강민이가 선뜻 자신이 먼저 소개하겠다고 나섰다.
“내 이름은 이강민이고 6학년 2반이야.”
강민이라면 다른 반이지만 잘 알고 있는 아이였다. 무려 우리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는 수재였으니까. 학교 교문에는 전국 수학 경시대회 1등을 한 강민이를 축하하는 현수막도 걸려 있다. 근데 왜 강민이가 하필 멸망 클럽에 있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강민이라면 훨씬 인기 많은 수학동아리나 과학 동아리에 가입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나는 강민이에게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왜 멸망 클럽에 가입했어? 공부도 잘하면서.”
강민이는 한참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공부가 아니니까. 빈지노 같은 래퍼가 되고 싶은데 엄마 때문에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거든.”
나는 더이상 대답할 수 없었다. 당연히 공부하는 걸 좋아해서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래퍼가 꿈이었다니. 모범생 강민이가 폭풍 랩을 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도무지 매치가 안 됐다. 그러자 옆에 있던 효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음은 내가 할게. 나는 유효리. 6학년 3반이야! 멸망 클럽의 회장!”
쾌활한 목소리가 울렸다. 고민 없어 보이는 밝은 목소리의 효리가 무려 이 멸망 클럽의 회장이라니. 나는 효리에게도 멸망 클럽에 가입한 이유를 물었다.
“음, 나는 꿈이 제빵사야.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디저트를 만드는. 그런데 태어났을 때부터 알레르기가 심해서 만지지도 못하는 식재료들이 많아.”
효리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나 또한 예전에 복숭아 알레르기 때문에 크게 고생했었다. 그 고통을 알기에 해맑은 얼굴을 한 효리에게 마음이 쓰였다. 효리는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실패를 경험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효리가 대견해 보이기도 했다.
효리의 말이 끝나자, 옆에 있던 하늘이가 목소리를 큼큼 다듬으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김하늘이야. 도영이 너랑 같은 반인데 대화를 별로 안 해봤네.”
하늘이는 조금 머쓱한 듯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실제로 나는 하늘이와 같은 반이지만 한 번도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맨날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놀던 나와 달리 책상에서 혼자 무언가를 끄적이기만 하던 하늘이었으니까.
“내가 왜 멸망 클럽에 가입했는지 궁금하지? 나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 화가가 꿈이거든. 그런데 초록색이랑 빨간색처럼 구별하지 못하는 색들이 있어.”
덤덤한 하늘이의 목소리에 놀란 마음을 내색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문득 부끄러워졌다.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애들이 모여 만든 나머지 클럽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정반대였다. 꿈을 이루기 위한 간절한 마음이 모여 만들어진 동아리인 것이다. 한 번의 멸망을 겪고도 다시 살아남으려 애쓰는 열정을 가진 아이들이 말이다.
“자, 그럼 드디어! 새로운 멤버의 소개인가?”
아이들이 단체로 손바닥을 무릎에 치며 두구두구 하는 소리를 냈다. 오롯이 내게만 쏠린 세 명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다 겨우 말을 꺼냈다.
“나는 김도영. 6학년 1반이야. 야구부에 있다가 부상 때문에 얼마 전에 관뒀어.”
작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자 곧바로 박수와 함께 환영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다 부상을 당한 건지, 영영 하지 못하는 건지. 야구를 관두고 나서부터 만나는 모두가 다 똑같은 질문을 했다. 하지만 멸망 클럽 멤버들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박수 소리로 새로운 멤버가 된 나를 반겨줬다.
자기소개 이후로도 우리는 끊임없이 얘기를 이어갔다. 마치 원래부터 친했던 친구들처럼 편하게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아마도 각자의 실패를 겪어본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야구를 그만두고 세상에 혼자 버려진 기분이었는데 함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됐다. 한참을 얘기하다 갑자기 강민이가 중요한 할말이 있다는 듯 우리를 집중시켰다.
“우리 도영이한테 발표회 얘기해줘야 해!”
강민이의 말에 효리와 하늘이가 잊고 있었다며 맞장구쳤다. 나는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영이는 야구부였으니까 몰랐겠다. 우리 2주 뒤에 동아리 발표회 하거든. 모든 동아리가 나와서 각자 하고 싶은 무대를 보여줘야 해.”
“맞아. 작년에는 댄스 동아리가 1등 했어. 올해는 우리가 1등 할거지만.”
효리와 하늘이가 들뜬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여태껏 학교 다니면서 동아리 발표회라는 게 있는지 몰랐다. 야구부에 있을 때는 경기가 많아서 학교 활동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발표회라면 무언가를 보여줘야 할 텐데.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는 무대 같은 거 해본 적 없어. 잘하는 것도 없는데.”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얘기를 건넸다. 그러자 강민이와 효리, 그리고 하늘이 세 명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나는 연신 손을 꼼지락대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가 다 계획이 있어.”
강민이의 말이 끝나자, 효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벽에 걸린 칠판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펜으로 커다랗게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칠판 전체가 ‘멸망 축제’라는 단어로 가득 채워졌다.
“멸망 축제?”
나는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멸망과 축제.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나란히 적혀있는 칠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곧이어 하늘이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우리 멸망 클럽은 이번 발표회에서 축제를 열거야. 멸망 축제.”
“그게 뭐 하는 건데?”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지. 뭐든 상관없어. 그냥 즐겁기만 하면 돼. 축제니까.”
하늘이의 말을 듣고도 무슨 말인지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효리와 강민이가 준비하면서 알게 될 거라며 웃었다. 아직 새로운 걸 시작할 준비가 되지 않은 탓에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멸망 클럽에 가입한 이상 멤버들의 의견에 따라야 했다. 머리가 복잡해 터질 지경이었다.
동아리 활동을 하는 수요일을 제외하고는 따로 멤버들을 만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말에도 학교에 모이기로 했다. 우리끼리만 있는 건 위험하다고 반대하던 담임 선생님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리고 딱 발표회 전까지만 주말에도 동아리방을 쓸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대신 깜깜해지기 전에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했다.
약속한 토요일 점심에 우린 다 같이 동아리방에서 만났다. 문을 열자 미리 와 있던 효리와 하늘이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옆으로 다가갔다.
“어라? 강민이는 아직 안 왔나보네.”
도통 보이지 않는 강민이의 모습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효리가 곧바로 몰랐냐는 듯 툭하고 말을 내뱉었다.
“강민이는 주말에도 학원에 가잖아. 오늘은 부모님 설득해서 영어학원만 갔다가 바로 온대. 원래는 주말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원만 돌아다녀.”
나는 효리의 말을 듣고 입을 떡 벌렸다. 주말까지 학원에 가면 대체 언제 쉬는 거지? 강민이가 왜 전교 1등을 하면서도 자신의 세계는 멸망이라고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갔다. 좋아하지 않는 공부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건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일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효리와 하늘이가 각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효리는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였고, 하늘이는 가방에서 색연필 여러 자루를 꺼냈다.
“다들 뭐 하는 거야?”
나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효리가 먼저 대답했다.
“공책에 레시피 적는 중. 축제 때 쿠키를 나눠줄 거거든. 알레르기에 예민한 사람도 먹을 수 있는 쿠키를 말이야.”
효리가 말을 끝내자 곧바로 하늘이가 말을 이었다.
“난 무대 벽에 걸 그림을 그릴 거야. 색을 구별하지 못해도 얼마든지 잘 그릴 수 있거든.”
나는 효리와 하늘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감으로 가득찬 아이들의 모습이 멋져 보였다. 그런데 내 앞에는 공책도, 색연필도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럼 나는 뭘 하면 될까?”
내가 묻자, 효리와 하늘이가 동시에 말을 맞추기라도 한 듯 대답했다.
“그건 우리가 아니라 너 자신한테 물어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을 듣고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있긴 한가? 아니, 그보다 할 수 있는 게 있긴 한가? 머릿속에서 나를 향한 온갖 의심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데 하늘이가 내 앞으로 하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나는 가끔 텅 빈 이 종이가 내 세계라고 생각해. 하고 싶은 게 생길 때마다 이곳에 내 세계를 채워 넣지.”
하늘이는 무심한 듯 말을 건네고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얗고 깨끗한, 텅 비어 있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 얇은 종이 한 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종이 위에는 야구공들이 빽빽하게 줄지어 있었을 것이다. 다른 것들이 들어올 틈도 없이 오롯이 야구로만. 하지만 이젠 달랐다. 무언가가 이 세계 속에 들어오더라도 누구도 막을 사람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각자 자신의 세계 속에 집중했다. 하고 싶은 것이 분명한 멤버들이 마냥 부러웠다.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자 지쳐 보이는 모습의 강민이가 보였다. 나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강민아! 어서 와.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
“미안해. 더 빨리 오려고 했는데 학원에서 영어 단어 다 외워야 보내준다고 해서.”
대답하는 강민이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런 강민이가 이해됐다. 만약 내가 주말에 학원에서 하루 종일 영어 단어와 씨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니까 말이다.
“다들 시작했어?”
강민이가 물었다. 그러자 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나는 레시피 만들고, 하늘이는 그림. 도영이는 고민하는 것 같아.”
“그럼 나도 빨리 시작해야지.”
동아리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쭉 어두웠던 강민이의 얼굴이 순간 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강민이는 가방 안에서 기다란 이어폰 하나와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곧이어 이어폰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 소리에 맞춰 어깨를 들썩였다.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난 대체 무얼 할 수 있을까……”
도저히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뒤늦게 온 강민이도 노트에 자신의 랩 가사를 적으며 연신 흥얼거렸다. 하지만 내 앞에 놓인 종이는 여전히 하얀 백지였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있던 효리가 말을 걸어왔다.
“강민이 너는 어쩌다 야구를 시작하게 된 거야?”
효리는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사실 공 한 번 잡아본 적 없던 내가 갑자기 야구에 빠진 이유는 조금 특별했다.
“어렸을 때 우연히 아빠가 보는 야구 중계 영상을 봤어. 그때는 야구에 대해 하나도 몰랐는데 중계가 너무 재미있어서 계속 챙겨보다가 완전히 빠졌지.”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효리가 크게 손뼉을 쳤다. 나는 깜짝 놀라 효리를 쳐다봤다.
“캐스터! 야구 해설가 하면 되겠다!”
효리는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두 눈을 반짝이며 내 눈을 바라봤다. 물론 야구를 그만두고 스포츠 해설가라는 꿈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앞에 나서서 말하기 두려워하는 내가 많은 관중 앞에서 중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근데 나는 사람들 앞에서 말 잘 못하는데……”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효리가 내 팔을 툭 쳤다.
“바보. 안 해봤는데 어떻게 알아!”
효리는 해보지도 않고 왜 포기하냐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나는 곧바로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느껴보는 무한한 지지에 순간 가슴 속에서 화르륵 뜨거운 불씨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펜을 들고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곧바로 한 글자씩 써내려갔다.
―멸망 축제 MC 김도영
드디어 발표회가 하루 전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우리는 틈틈이 모여 성공적인 ‘멸망 축제’ 개최를 위해 힘썼다. 동아리방 벽에는 하늘이가 그린 그림이 다채롭게 걸려 있었고, 그 그림은 초등학생이 그렸다고 믿기 힘들 만큼 아름다웠다. 또한, 매번 동아리방을 가득 채우는 강민이의 랩은 빈지노처럼 멋있었다. 직접 쓴 가사에서 진심이 느껴져 눈물이 핑 돌았다.
무엇보다 효리는 발표회에서 나눠줄 쿠키 레시피를 개발하기 위해 몇 번이고 쿠키를 굽고 버리길 반복했다. 원하는 맛이 나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얘들아! 나 드디어 만들었어.”
결국 효리는 달걀, 우유, 밀가루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쿠키 개발에 성공했다. 오롯이 자신의 레시피라며 감격스러워했다.
“하나씩 먹어봐.”
효리는 집에서 미리 만들어온 쿠키를 우리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나는 곧바로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겉은 바삭하면서 속은 촉촉한, 끝에는 은은한 단맛이 풍기는 맛있는 쿠키였다. 어느 제과점에 견주어봐도 뒤처지지 않는 최고의 맛이었다.
“너 진짜 대박이다. 인정.”
나는 효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세웠다. 그러자 옆에서 입을 오물거리던 강민이가 맞장구치며 하나 더 달라고 졸라댔다. 하늘이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모두가 행복해지는 쿠키를 만드는 효리가 자랑스러웠다.
“다행이야. 내일 무대를 망쳐도 이 쿠키를 먹으면 다들 행복해질 게 분명해.”
강민이는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곧바로 하늘이가 대답했다.
“우리 멸망 클럽 1호 래퍼가 왜 자신 없는 소리를 하시나.”
멤버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깔깔 웃었다. 달콤한 쿠키의 맛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멸망 축제는 이미 성공한 셈이다. 나는 꿈을 찾았고, 효리와 하늘이는 꿈을 지켰으며, 강민이는 꿈에 한 발짝 다가갔다. 우리는 전부 멸망의 세계 끝에서 또다른 출발점을 맞았다.
“내일 축제가 끝나도 우린 여전히 멸망 클럽이야.”
멸망 클럽의 리더 효리가 말했다. 우리는 그 말에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면서 처음 겪은 실패와 좌절. 지구가 멸망할 것 같은 공포. 그 세계 속에서 버티고 있는 우린 어쩌면 영영 멸망의 굴레 속에서 살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느 순간 나를 또 한 번 괴롭힐 실패의 경험은 성공을 위한 과정이니까. 멸망은 또다른 희망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제 다음 차례야.”
발표회 당일, 우리의 차례를 기다리며 멤버들끼리 다 같이 손을 잡았다. 긴장한 탓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다. 무대 위에서는 마술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망토를 뒤집어쓴 아이가 기다란 막대기를 장미꽃으로 변신시켰다. 놀라운 마술에 아이들이 환호성이 들려왔다. 마술동아리의 무대가 환호와 함께 막을 내렸다.
이젠 우리 멸망 클럽이 보여줄 때였다. 실패한 아이들끼리 모여 완성한 성공적인 축제를 말이다. 떨리는 마음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이는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던 그림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벽에 붙이기 시작했고, 효리는 자신이 구운 쿠키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강민이와 나는 무대 단상으로 올라갔다. 나란히 서서 내가 먼저 목소리를 큼큼 다듬고 말을 시작했다. 수많은 눈동자가 오롯이 나를 향해 집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도영입니다. 오늘 멸망 축제 MC를 맡게 되었어요.”
야구부로 나를 기억하고 있던 애들이 조금씩 웅성거렸다. 그 바람에 더 긴장되어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다음 멘트를 이어가야 하는데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때 옆에 서 있던 강민이가 내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우린 이미 멸망해봤던 사람들인걸.”
조금은 장난스러운 그 말이 가슴에 콕하고 박혔다. 어차피 멸망해봤던 사람들…… 강민이의 말을 되새기며 몇 번이고 망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니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 뭐 어때.
무대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두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지금부터 멸망 클럽의 축제를 시작합니다!”
이승민
2024년 12월 대산대학문학상 동화 당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저는 어른이 된 지금도 '실패'가 두렵습니다. 작은 실수에도 지구가 멸망한 것 같은 좌절을 느끼곤 하는데요. 문득 아이들에게 ‘실패’라는 경험은 어른보다 더 큰 절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싶습니다. '멸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과정이라고요. 온 세계가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 끝에도 결국 축제가 열릴 수 있습니다. 모든 이들의 멸망을 지지하고 사랑합니다.
2025/11/19
7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