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에서 보자
  아빠는, 성마른 얼굴을 걸친 구시대의 아빠라는 화석처럼. 계절을 지나온 오래된 양복의 짠 내 나는 모양새로. 아빠는, 아빠에 대한 오래된 미움처럼
  아직도 주머니가 양쪽으로 여러 개 달린 붉은색 조끼를 입고 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게 비틀비틀 만취한 걸음으로 뼈가 불거진 깡마른 손에 소주나 막걸리병을 들고 점점이 좁아지는 비포장도로의 골목을 협곡이라도 통과하듯 힘겹게 지나고 있을 것 같은 아빠는, 내 기억 속 심상한 모습 그대로
  먼 친척의 결혼식이 있을 때만 우리가 살아 있는 도시에 도착해 전화를 걸었다

  결혼하지 않은 나의 자매들은 왜 여태껏 아름다운지
  가족이라는 고통이 여전히 우리를 양손 안에 그러쥐고 곤죽이 되게 비틀었지만
  우리는 모두 우리의 자식이었어요. 서로를 낳지 않았어도 먼저 죽고 나중에 태어나도
  사랑하는, 사랑을 흘리는, 사랑이 흩어진, 사랑이 요원한
  나는 멀찍이 달아나 아빠의 얼굴을 보았고
  내게는 아빠를 만나기 전에 떠났거나, 아빠를 만난 뒤에도 남을, 셀 수 없이 많은 자매가 있었어요

  아빠와 통화를 하고 나면 나는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잊었고, 다시 만날 때면 서로의 얼굴을 잊었다
  생각보다 초췌한 얼굴을 한 나와 생각과 똑같은 얼굴로 시간을 세는 아빠

  아빠는 쓸쓸하지 않아요? 눈을 뜨면 창밖으로 갑자기 쏟아지는 도시의 윤곽. 아빠의 퀭한 눈동자 같고 마른 뼈 같은. 시골집에서 애호박을 키운 이야기며 친구가 파는 감자에 대해 말하려 전화를 거는 아빠. 시골집에 가면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우리가 어릴 때와 같이 평범하게, 딸을 경멸했다. 능숙하게 스스로를 서러워했다. 별처럼 총총한 욕설을 퍼붓느라 발이 부었다. 속았다. 고장난 태엽 인형은 나였다. 혼자 계시니 쓸쓸하겠구나. 평생 자식을 학대하고도 자신이 동정받는 법을 아는 남자에게. 밤을 본 사람은 모두 밤을 셀까요

  내가 아는 사람은 서울로, 더 서울로, 최첨단의 도시를 꿈꾸지만. 나는 식물원에 누운 리톱스의 얼굴로 여기서 괴물을 봐요. 모든 것이 되려고 모든 것을 모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높고 가장 대단하길 바라는, 치달리는 얼굴

  단단히 말라 있죠. 함부로 수분을 섭취하면 죽을지 몰라
  너는 사랑받지 않아서 사랑하는 법을 몰라. 방부제를 뿌린 것 같이 늙지 않는 학살의 말들. 사랑했던 사람이 내 사랑의 코를 비틀어 쥐고 확신의 얼굴을 들 때, 나는 복부를 가격당한 것처럼 접혀 펴지지 않았어요. 내가 가진 모든 것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더는 보지 않으려
  나는 여전히 아는 길로만 달려요
  사람들을 모두 보내고 뻐근한 뒷모습 뒤에서. 나는 사람의 앞모습에 더럭 겁이 나 굳은 돌과 같은 얼굴로

  ○○인력용역업체. 빌린 이름이 적힌 와이셔츠 위로, 지난겨울 조카의 결혼식 때 입었던 한 벌뿐인 여름 양복을 걸치고 내 앞에 선 아빠. 나는 흔들리지 않아요. 흔들리는 건 나의 믿음. 와이셔츠를 하나 사줄걸 그랬어. 뒤늦게 찾아온 자매의 말에 돌처럼 굳은 얼굴이 갈라지는 소리

  오동나무를 심어 내 아이의 가구를 해주겠다는 말이나 실용적이고 값싼 당신의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귀에 담지 않아요. 수분을 담지 않은 돌 같은 얼굴로. 내가 당신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믿지 않아

  가난하고 마른, 얼굴만 남은 얼굴. 현기증을 일으키고 세상을 빙글빙글 돌리고 저격하고
  신은 왜 인간을 똑같이 만들지 않고 신은 왜 인간과 똑같이 일하지 않고
  신은 나의 연약하고 작은 아이의 얼굴로 침대에 누워, 취약한 몸으로 꼭 감은 눈으로 내 손을 더듬는데
  신은 귀여운 얼굴로 순진한 말투로 버려지지 않으려. 나의 연약한, 나의 신을 믿어요. 고약한 나의 얄궂은 마음을. 돌처럼 단단한 얼굴을. 다른 말을 같은 표정으로 발음하는

  그곳엔 사람이 없으니 슬픔도 없겠네요

  나는 빛으로 채색된 유리 안에 스며들어 있었어요
  내 일상은 거짓이에요
  여기서는 싸우고도 손가락이 멀쩡하거든. 맹세를 해도 잘리지 않아
  화약 냄새도 없이 위험하고, 아무것도 잃지 않은 채 타들어가고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찾아. 가지고 있는 것도 잃고
  자꾸만 내가 아는 닮은 사람들을 만나

  아빠라는 사람을 만나고 오면, 아빠
  맞아요, 도시의 사람들은 은하수 같이 빛나는 아빠의 욕설과 분노를 받아줄 수 없거든요. 멀지만 가까운 창으로 자식들은 뭐하냐고 물을 거예요. 저런 걸, 너 같은 걸, 네까짓 게 같은 말을 쏟아부으며 키운 딸이, 나의 자매가 아빠의 생활을 돕고 아빠를 찾아가고 아빠를 외면해도. 아빠에게 우리 삶은
  사람이 사람에게 최선을 다한다고 믿어도 언제나 충분하지 않았다

조혜은

2008년 《현대시》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지키고 싶은 것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다보니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시집 『구두코』 『신부 수첩』 『눈 내리는 체육관』 『털실로도 어둠을 짤 수 있지』가 있습니다.

지난봄, 익숙한 동네를 떠나 낯선 동네로 이사를 왔습니다. 늘 보던 사람들을 아주 가끔 볼 수 있었고, 새로운 장소에 가족이 함께 적응하는 동안 써야 할 순간을 자주 놓쳤습니다. 요즘은 이런저런 싸움을 멈추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편의 시는 ‘최선’에 대해 생각하며 쓴 시입니다.

2026/01/21
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