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는 쉽게 오염되거나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은 아예 들이지조차 말라고 했다. 빳빳한 셔츠와 하얀 이불, 이음새가 헐거운 귀걸이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은 딱히 중요하지도 않은 주제에 사람 마음을 초조하고 불편하게 만든다며 씩씩거리고 운전대에 머리를 처박았다. 화장은 전부 지워져 엉망인 데다가 머리는 몹시 산발이었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그 말이 아주 귀감이 되는 말이었음을 인정했지만, 동시에 나와 여사 누구도 그 말을 이제껏 가슴에 새기지 않았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그날 월미도에 가자던 중락이 아저씨는 별안간 각자의 차로 따로따로 움직일 것을 제안하며 대신 중간에 휴게소에서 잠깐 쉬어가자고 했다. 하지만 막상 휴게소에 도착해 우리가 차에서 내렸을 때, 중락이 아저씨는 운전석에서 내리지 않았고 대신 어떤 여자만이 조수석에서 내려 여사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여자는 내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야야, 니네 할멈 아랫도리가 그렇게 저렴하단다. 그때 여사는 58세, 나는 12세의 나이로 지금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둘 다 새파랗게 젊었다.
  아직까지도 내가 그 순간을 떠올리는 이유는 당시 상황이 너무 충격적이어서도 아니고 여사의 아랫도리가 저렴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또한 당연히 아니다. 그때 나는 중락이 아저씨와 여사가 정말이지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고 그가 아니라면 누구도 여사를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중락이 아저씨는 다정했고 사려 깊었고 어느 때는 몹시 단호했으며 결정적으로 여사를 어느 정도 휘어잡을 수 있을 만한 대강의 카리스마까지 갖춘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빠른 템포의 트로트 메들리를 배경 음악 삼아 대거리를 하는 두 여자를 뒤로 하고 차 안에서 애써 앞을 바라보고 있는 중락이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문을 열려고 했지만 잠겨 있어 까만 차창을 두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는 조금 망설이다 창문을 내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나한테 할말 없어요?”
  “미안하다.”
  “그거 말고요. 존나 비겁하시네.”
  그러자 중락이 아저씨는 정말 솔직하게 평소 자신이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해주었는데 나는 그 말이 정말 진심처럼 느껴져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아저씨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여사한테서 도망쳐. 사람 인생이 아주 망가진다고. 어떤 부연도 없었지만, 그간 본 것이 있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쩌다 여사와의 관계가 들통난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들키길 바랐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다만 조금 수치스러웠다. 잠시 잠깐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연습을 했던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여사는 물에 만 맨밥과 함께 빨간 뚜껑 소주를 두 병 마셨다. 그리고 중락이 아저씨에게 전화를 시도하려다가 나에게 저지당했다. 그러자 여사는 법이 미쳐가지고 사랑도 못 하게 막는다며 간통법을 들먹이던 그의 아내 이름을 부르짖었다.
  “여사가 아까워.”
  “진짜?”
  “아내는 불쌍한 거야.”
  “그래 보여?”
  “내 눈에 훤해.”
  의자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나에게 다가온 여사는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지독한 소주 냄새를 풍기며 환하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다. 그렇구나. 너는 훤하구나. 사실 밸런타인데이 때 차인 반 친구에게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여사는 당장 뭔가 나로 인해 감화된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면서 이대로 에너지를 다 쓰고 잠에 든 뒤에 내일부터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거라며 옷을 챙겨 입었다. 그렇게 우리는 새벽 1시에 노래방에 갔다. 여사는 방방 뛰면서 신나는 노래를 부르다 이내는 발라드를 부르고 오열하며 더러운 노래방 의자에 얼굴을 비볐다. 시간이 다 되어 갈 때가 되자 여사는 마이크에 대고 내게 말했다.
  “너는 이제 애가 아닌가봐.”
  그때부터 여사는 내가 은밀하고 사사로운 자신의 일에 대해 함부로 털어놓았다. 특히 연애 상담 같은 것들. 나는 감히 그간 여사가 해준 이야기들이 거의 ‘함부로’ 나에게 전해졌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물론 내가 고통받은 것을 강조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더럽고 내밀한 이야기들에는 이상한 중독성이 있어 종국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이는 살 수가 없고 결국 그 이야기의 생산자가 되기도 하며 사람을 그런 이야기의 세계로 끊임없이 포섭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중락이 아저씨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과감하게 탈출을 감행하며 최소한의 조언을 던져줬던 그 비겁한 중년 남자의 까만 옆모습이 그래도 자꾸만 아깝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사의 남친으로는 참 제격이었는데 말이다.

*

분명히 해두고 싶은 건 나와 여사와의 관계가 시종일관 괜찮은 편에 속했다는 것이다. 여사는 나를 아꼈다. 닭발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시장에서 하얗고 통통한 닭발 1킬로그램을 사와 직접 무쳐준 적도 많았다. 시중에서 파는 닭발과는 차원이 달라 어떻게 맛을 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여사는 아주 자랑스러워하며 고추장을 최소로 넣고 다진 마늘 듬뿍과 함께 살살 비비면 느끼하지 않고 맛있는 거라고. 그런 걸 바로 맵싹하다고 표현하는 거라고 일러주었다. 여자는 자고로 맵싹해야 돼. 알겠지, 유선아? 그런 말도 빼먹지 않았다. 어쨌든 여사는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해주었고 그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든 자기 쪽이 팔리는 일이든 상관없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사귄 남자친구에게 차였다. 사귄 지 사 개월만이었고 왜 헤어질 결심을 했느냐는 문자에 김승수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일주일 만에 다른 반 여자애랑 사귄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머지않아 우리 반 여자애들이 나를 위해준답시고 김승수를 둘러싸고 추궁했는데 김승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귀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사이냐는 질문에는 또 끝내 묵묵부답이었다. 그럼 유선이는 뭔데? 갖고 논 거야? 그런 물음에도 별다른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척 이어폰을 끼고 꼿꼿이 칠판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노래를 듣고 있지는 않았고 김승수의 대답에 온갖 신경을 기울였는데 오히려 그런 내 자신에게 자존심이 가장 많이 상했다.
  도저히 몰래 울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미련이 남아 김승수에게 문자를 했는데 대뜸 욕이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내 평판 어쩔 건데? 라는 황당한 질문에 그럼 내 평판은? 하고 되물으려다가 알이 부족해 전송에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이 남아도는 김승수는 계속해서 폭탄 문자를 보내왔다.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을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결국 벽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여사가 방문을 벌컥 열었고 우는 나를 이불로 감싸 품에 안아주었다. 그 품이 너무 포근하고 익숙한 나머지 나는 잠시 여사가 그런 데(어떤 어려운 순간을 함께 헤쳐나가주는 것)에 재주가 있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해버렸다. 그래서 김승수에 관한 모든 일을 실토했다.
  내 말을 듣자마자 여사는 김승수가 나에게 보낸 문자 내역을 남김없이 확인했으며 그 안에는 낯간지럽고 수치스러운 내용마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사는 그런 것 따위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고 이 문제는 자신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방 불을 끈 다음 내 옆에 누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내가 잠들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는’ 버림받기 전에 먼저 버릴 줄 알아야 된다고. 나는 당연히 여사가 나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확신했다. 내가 부모에게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듯 여사 또한 자신이 나의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으니까.
  캐나다 영주권을 얻은 다음 나와 여사를 데리러 오겠다던 부모는 돌아오지 않았고 연락도 거의 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무렵까지는 종종 국제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는데 시차와 요금 핑계를 대며 연락이 점점 뜸해지더니 종국에는 연락을 끊어버렸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내가 여사에게 의아했던 점은 여사가 어른치고 아이에게 늘 지나치게 솔직했다는 점이었다. 도리어 나의 치부가 될 만한 일들을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으며 그게 나의 핵심이고 역사이고 주제에 다름 아님을 의도적으로 일렀다. 그래서인지 그런 일들이 나의 마음에 그렇게까지 큰 슬픔이나 역린 따위로 자리잡지는 않았다. 다만 세상에는 그런 같잖은 어른들이 대부분이라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여사의 위로를 받으며 겨우 잠이 든 다음 날, 등교를 했는데 김승수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괜히 마음이 불안해져 휴대폰을 걷기 전에 빠르게 주고받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김승수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는 ‘알았어’ 한 문장이었다. 나는 알이 없어서 어떤 문자도 보내지 못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다행히 김승수는 1교시 시작 직전에 뒷문으로 들어왔고 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교과서를 펼쳤다.
  김승수는 점심시간에 나를 찾아왔다. 미안하지만, 오늘 점심을 먹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말한 뒤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았는데 김승수는 그런 나를 조금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구령대로 가자고 했다. 우리는 구령대에 앉아 한참 침묵을 지켰고 이내 김승수가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쌍욕을 해서 미안하고 거짓말을 해서 미안하고 여자를 함부로 대해서 미안하고 사람 구실을 못해서 미안하고 개새끼라 미안하고 쓸모도 없는 새끼라 미안하다고 큼큼 울었다. 그러면서 무릎을 꿇으려 하길래 만류하며 혹시 내 번호로 무슨 문자를 받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승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문자도 못 받았어.”
  “진짜야?”
  “어.”
  “그럼 용서 안 해도 돼?”
  “유선아, 제발.”
  “보여줘, 문자.”
  마지못해 김승수가 문자를 보여주었다. 평판은 언제든지 좋아질 수 있어. 같이 의논해보자. 11시까지 소망슈퍼 앞으로. 나는 그 문자를 보고 조금 웃겼는데 진짜 김승수가 평판이 중요했다는 사실이 웃겼고 여사가 아마도 김승수를 존나게 팼을 거라는 사실이 웃겼다. 나는 내가 이 내막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까지도 여사에게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사는 그런 일에 대해 지나치게 으스대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

언젠가부터 나와 여사는 서로의 애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더욱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김승수와 헤어지고 나서 몇 명의 남자친구를 더 사귀었다. 그러면서 나는 여사가 자신의 은밀하고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때면 나 또한 나의 내밀한 무엇에 대해 고백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혔다. 아무래도 김승수와의 일을 털어놓고 나서 느낀 후련한 마음이 여사에게 이런 것쯤은 이야기해도 된다고 부추긴 것 같다. 하지만 그다지 심각하다고 생각할 만한 관계는 없었다. 여사와는 다르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여사가 사귀었던 사람은 내가 알기로 두세 명은 되었다. 하지만 정말로 연애다운 연애를 했던 사람, 깨지고 붙고를 반복하면서도 종국에는 서로가 없으면 못살 것처럼 보였던 이는 단 한 명이었다.
  현구 아저씨는 오십대 초반에 일찍이 희망퇴직을 하고 퇴직금으로 주식을 하며 근근이 생활을 유지했다. 하지만 어쩌다 크게 한번 미끄러진 이후로는 손실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 투자 금액의 상당 부분을 매도한 뒤 중장비면허를 따기 위해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여사를 만나게 되었다. 여사와 현구 아저씨가 만난 곳은 다름 아닌 경마장. 당시 경마장 안에 있는 푸드코트에서 일하던 여사는 손이 빠르고 입담이 좋아 직원과 손님 모두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래서 즉석에서 계란물을 입혀 토스트를 구워내 착착 담아 건네는 일을 도맡았다. 여사는 수완이 좋았다. 성미가 급해 짜증을 내는 사람에게는 아양을 떨었고 진상을 부리는 사람에게는 윽박을 질러가며 좌중을 압도했다. 주 여사 때문에 토스트 먹으러 온다는 손님들이 쏟아질 무렵, 현구 아저씨는 학원에서 알게 된 사람과 함께 난생처음 놀러온 경마장에서 여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미리 밝혀두고 싶은 점은 이 이야기가 지극히 여사의 주관적인 입장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여사가 떠벌리는 이 모든 말들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도리도 없을뿐더러 굳이 확인을 하고 싶지도 않다. 중요한 건 그때부터 현구 아저씨가 틈만 나면 경마장에 와서 토스트를 사먹었다는 것이고 그러면서 은근슬쩍 명함을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현구 아저씨가 이미 오 년 전 그만둔 그 번듯한 회사의 명함을 건네던 날, 여사가 나에게 어찌나 자랑을 해대던지. 환갑이 넘어 대기업 다니는 번듯한 남자를 만나게 생겼다고.
  명함의 진실을 알게 된 뒤 여사가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사는 그러지 않았다. 생각보다 괜찮았고 괜찮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여사가 이미 자기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버린 이들 앞에서는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 일단 안타깝고 가여운 쪽으로만 생각하려고 했고 그래서인지 현구 아저씨가 회사를 그만둔 지 오래라고 실토했을 때 여사는 도리어 이른 나이에 퇴직을 결정하고 2막 인생을 시작하려는 모습이 대견하다고 했다. 다행인 점은 현구 아저씨가 나름대로 성실하고 계획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목표한 대로 굴착기운전기능사 시험에 합격한 뒤 청주에서 친구가 운영하는 장비 대여 업체에 취직했다. 친구는 삼 년만 일하면 금방 장비에 대한 지식을 쌓을 거라면서 원한다면 굴착기 다루는 법 또한 상세히 알려주겠다고 했다.
  서울과 청주를 오가던 현구 아저씨는 점점 우리 집에서 생활하는 날이 많아졌다. 밤늦게 오느라 피곤할 법한데도 그런 기색 하나 없이 늘 값비싼 과일 같은 것들을 잘도 사다주었다. 한창 공부할 때인 나를 위해 그런 것쯤은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그때는 뭔가 보통의 돌봄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아저씨가 오기 두 시간 전부터 정말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노래를 들으며 책상에 앉아 문제를 풀고 있으면 퇴근한 아저씨가 슬며시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는데 나는 늘 안 그런 척하면서도 그 상황을 아주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현구 아저씨가 언제든 우리를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여사는 연인 관계에 있어 상대가 자기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극도로 신경질적이 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사와 누군가의 관계에 있어 여사가 우위를 점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사는 지나치게 자신을 과소평가했고 어딘지 모르게 침체되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늘 상대를 의심했고 자신을 폄하했다. 언젠가 나와 여사, 현구 아저씨가 함께 둘러앉아 고스톱을 치고 있을 때였다. 현구 아저씨가 흑싸리 한 장만 나오면 고도리인 판이었고 여사가 착실히 피를 모아 막 1점을 놓은 차례였다. 여사가 현구 아저씨에게 물었다.
  “고하면 개평 줄 거야?”
  “줄 거면 유선이한테 줘야지. 당신한테 왜 주겠어.”
  “왜 나한테는 안 주는데?”
  “아쉬울 게 없잖아. 거기 흑싸리가 있을 수도 있고.”
  “되게 재네. 재수 없게. 밥맛 없다. 그치, 유선아?”
  “나는 피박이니까 개평 받으면 좋은데.”
  내가 볼멘소리로 말하자, 현구 아저씨가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여사는 새우깡 몇 개를 집어 먹더니 연거푸 소주를 들이켰다. 그때부터 나는 마음을 졸이기 시작했고 영문을 모르는 아저씨는 자꾸 여사를 약올리다가 결국 자기 차례에 가지고 있던 흑싸리를 내밀었다. 얼굴이 벌게진 여사가 현구 아저씨의 뺨을 내리치고 담요를 뒤엎었다. 빨간 화투짝들이 사방으로 날아가고 아저씨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여사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현구 아저씨를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아저씨를 포함한 남들이 보기에는 아주 의아한 상황이었지만 나에게는 훤했다.
  마지막은 여사가 무릎을 꿇은 채 사죄하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나는 그것이 시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락이 아저씨 때도 늘 같은 패턴이었으니까. 그날 내가 화장실에서 이를 닦고 있을 때 현구 아저씨도 들어와 칫솔에 치약을 짜면서 슬며시 문을 닫았다. 여사는 안방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알고 있어?”
  “네?”
  “아까 할머니가 왜 그랬는지.”
  “아저씨는 왜 그런 것 같은데요?”
  내가 묻자 현구 아저씨는 곰곰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흑싸리 있으면서 없는 척해서? 나는 그 순간 눈을 감고 앞으로 펼쳐질 안타까운 일들에 대해 잠시 상상했다. 여사가 관계에 있어서 행하는 나름의 셈법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고픈 마음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얘기를 하는 것이 현구 아저씨에게는 황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할머니가 자기 말고 손주에게 개평을 준다고 질투하며 아쉬울 게 없다는 말을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알아듣는단 말인가. 고스톱 한 판에……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결국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서둘러 이를 닦고 화장실을 나왔다. 어찌어찌 정을 주게 되다가 결국 어떻게 손도 쓸 수 없을 때 사정을 헤아릴 수 있게 되는 것이 차라리 나와 여사에게는 바람직했다.

*

내가 이해신을 좋아한다는 걸 제일 처음 안 사람은 바로 현구 아저씨였다. 시답잖은 연애를 반복하는 게 슬슬 지겨워질 무렵, 특별 활동 시간을 채우기 위해 시사탐구반에 들어갔는데 거기 회장이 바로 이해신이었다. 입시 논술에 관심이 생겨서 급작스럽게 들어간 동아리는 생각보다 신경 쓸 일이 많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주제와 관련된 글을 써내야 했고 토론 시간에 무슨 말이라도 하려면 주제와 관련된 기사 따위를 대충이라도 스크랩해 가야 했다. 하지만 시종일관 열띤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신문을 사 읽기 시작하자 여사는 아주 놀라면서도 기쁜 티를 냈다.
  그즈음부터 내가 집에서 틈만 나면 이해신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던 것 같다. 잘난 척이 심하다는 둥, 너무 사람을 몰아세운다는 둥…… 내가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현구 아저씨와 여사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은근히 물어보았다.
  “왜, 이해신이 너한테 뭐라고 하는데?”
  “나한테는 별말 안 해. 근데 너무 어려운 단어만 일부러 골라서 해댄다는 거지.”
  실제로 이해신과 나는 그때까지 말도 몇 마디 섞어본 적 없는 사이였다. 여사는 나중에 재미있는 친구일 것 같다며 이해신을 꼭 우리 집으로 초대하라고 했다.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며 펄쩍 뛰었지만, 내심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날 이후로 뭔가 이상하게 이해신이 더 신경 쓰였고 식탁 앞에 나와 여사, 아저씨와 이해신, 넷이 둘러앉아 있는 상상을 종종 하게 되었다.
  그래서 걔가 토론 대회를 함께 나갈 사람을 구한다고 했을 때 주저 없이 손을 들었던 것 같다. 나는 동아리에서 전혀 두각을 나타내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해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그는 흔쾌히 함께하자며 대회 포스터를 내밀었다. 그때부터 나와 이해신은 틈틈이 일과가 끝나면 동아리실에서 만나 대회 준비를 했다.
  찬성과 반대 중 어떤 역할을 맡을지 모르기 때문에 예상 질문을 취합하여 모든 경우에 대비해 주장과 근거, 예시와 반박 자료를 만들어야 했다. 이해신은 각종 대회 수상 경력을 통해 수시 전형으로 서울 중상위권 대학에 입학하고 싶어 했다. 애초에 그렇게 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내신을 따기 쉬운 우리 고등학교에 들어왔다는 말도 했다. 문자를 자주 하게 되면서 언젠가부터 밤마다 자기 전에는 꼭 통화를 하는 사이가 되었고 이해신은 이런 경험이 난생처음이라고 했다.
  여사의 말에 따르면 이해신은 나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목표지향적인 아이이기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 연애라는 것을 제 인생의 방해물 정도로 여길 것이고 자연히 나 또한 그런 취급을 하게 될 거라고 했다. 현구 아저씨는 아직 사귀지도 않는데 왜 벌써부터 애 기를 죽이냐고 뭐라고 했다. 하지만 사는 동안 쉬지 않고 남자들과 연애를 이어온 여사의 말을 아예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해신은 정말 그런 식의 말을 자주 하기는 했다. 앞으로 자신이 이루어낼 일의 전망과 그로 인해 드높아질 스스로의 가치 같은 것들에 대해서. 정말이지 나는 단연코 그때까지 나의 전망과 가치를 스스로 진단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동아리실에서 불퉁한 얼굴로 이해신에게 물었다.
  “정말 원하는 대로 그렇게 될까?”
  “나는 원하는 대로 되려는 게 아니야.”
  “그러면?”
  “최소한으로라도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노력해야 하는 거야.”
  “그냥 살아도 살아지던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알지. 그때 은행만 믿고 집 산 미국 사람들, 다 망했어. 주제를 모르면 그렇게 되는 거야. 아무도 구제해주지 않는다고.”
  사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당시 내게 중요한 건 이해신과 당장 사귀고 손이라도 잡아보는 거였고 미국 경제, 국내 정치 이런 건 이미 관심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럼 우리가 우리를 구제해야겠네.”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이해신은 자신의 가슴 깊이 숨겨놓았던 가정사에 대해 털어놓았다. 엄마가 어쩌구 아빠가 어쩌구, 결론은 이혼했단 거였고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멋진 아들이 되겠다는 게 요지였던 것 같다. 너에게는 치부를 드러내도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이해신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오늘이 우리 사이에 있어 아주 중요한 날이 될 것임을 알았고 그는 정말 이제는 모든 걸 허락하겠다는 듯, 다소곳이 두 손을 포개고 눈을 감았다. 마치 자신의 입술을 하사겠다는 사람처럼.

*

걔가 뭐가 그렇게 좋아? 여사가 물었을 때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대답했다. 똑똑해. 그러자 현구 아저씨가 다른 점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대충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다른 점도 분명 있었다.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줄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애였다. 이해신은. 그곳이 어떤 곳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대충 느낌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조금 더 어른스럽고 규칙 같은 것이 그나마 존재하며 내가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게끔 하는, 어느 정도 보통의 인간으로 존재하라는 압박이 주어지는 그런 세계. 사실 그즈음 여사와 현구 아저씨의 관계는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언젠가부터 현구 아저씨가 오지 않을 때 여사는 밖에서 술을 먹고 들어오는 날이 잦아졌고 그럴 때마다 매번 같은 남자에게 부축을 받아 들어왔다. 그것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여사의 또 한 가지 패턴이었다. 어떤 관계가 기울어져 간다고 느낄 때 여사는 자꾸 다른 사람을 찾았다.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술을 마시고 들어왔고 그 와중에 다른 남자와 있는 걸 내게 들켜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여사를 들쳐업고 들어와 간신히 이불 위에 눕힌 남자는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을 있다 나왔다. 문을 여는데 담배 냄새가 심하게 났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어쩐지 눈알이 노란 남자는 식탁에서 라면을 먹던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픽 웃었다. 그러더니 내 앞에 앉아 외투 안주머니에서 만원을 꺼내 내밀었다.
  “됐어요.”
  “딸이야?”
  “아뇨.”
  “그렇지? 자기 혼자랬는데.”
  “가세요.”
  “너 좀 웃긴다, 야.”
  좀처럼 가지 않고 이름이며 나이 따위를 캐묻던 남자는 내가 젓가락을 내려놓자 다 먹은 거냐고 묻더니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냄비를 가져가 통째로 들이켜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국물을 다 비운 남자는 다시 외투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오천원을 더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놨다.
  “아저씨는 말이야.”
  “네.”
  “여자는 다 애인 아니면 딸 같아.”
  “네?”
  “소중하다는 거지.”
  “아저씨 엄마는요?”
  “뭐?”
  “선생은요? 은행 직원은요? 살인자는요?”
  “막 나가네.”
  “와이프는 있어요?”
  그러자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여사가 방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자다 깬 것처럼 몽롱한 얼굴이었다. 어떤 위험도 감지하지 못한 늙은 얼굴을 보자 무력감이 솟구쳤다. 남자는 여사에게 좀더 자두라는 다정한 말을 건넨 뒤 서둘러 집을 나갔다. 여사는 그러고도 한참을 그렇게 문 앞에 앉아 있다가 비척거리며 일어나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저 남자는 누구야?”
  “친구.”
  “친구 누군데.”
  “말하면. 알아?”
  “현구 아저씨는 왜 요즘 안 보이는데.”
  “너랑 상관없잖아.”
  “왜 상관이 없어?”
  지금껏 여사의 애인이라는 이유로 나와 모종의 관계를 맺었던 여러 아저씨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떤 아저씨는 내게 잘 대해주었고 다정했으며 어떤 아저씨는 쌀쌀맞고 퉁명스럽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건 나와 전혀 상관없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여사보다도 나에게 있어 더 중대한 문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여사의 애정 전선. 그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는 상황에 따라 한 치 앞의 미래가 잠시 보일 듯하다가도 한 줌에 사라지고야 말았으니까.
  “할머니.”
  “할머니라고 하지 말랬지.”
  “내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여사가 나한테 했던 말 기억나?”
  “뭐?”
  “함부로 다리 벌리지 말라고.”
  “기억나지.”
  “근데 왜 여사는 그렇게 살아?”
  왜 맨날 다리를 벌리느냐고. 나는 이 말을 하면서도 내 스스로 뭔가 잘못된 줄을 알아서 몸이 발발 떨렸다. 그런데 여사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대신 냉장고에 등을 기대고 미끄러지듯이 내려앉았다. 나는 우리 사이가 허물없는 사이이기를 바랐지만, 결코 아주 속에 있는 것까지 내보이는 사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우리는 너무 잘 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여사는 끝까지 나에게 솔직한 사람이었으므로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러지 않고 살기가 힘들어. 너는 그러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고.”
  그러면서 여사는 사실 현구 아저씨가 며칠 전부터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아저씨가 일하던 곳의 사장이 운영하던 매장을 정리하면서 장비들을 싸게 처분하겠다며 아저씨에게 대형 굴착기 한 대를 싼값에 사지 않겠냐는 제의를 했다는 것이었다. 둘은 워낙 오래 알고 지낸 친구 사이였고 좋은 값에 판매하겠다는 사장의 말에 아저씨는 무리해서 돈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저씨가 여사에게 손을 벌리게 된 것이다.
  장비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과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것은 천지 차이이고 자기 소유의 굴착기가 있어야 일도 잘 시켜준다며 여사를 설득한 아저씨는 10부 이자까지 약속했다. 결국 여사는 예금 통장을 해지한 뒤 돈을 쐈고 그 길로 차를 몰고 청주로 간 현구 아저씨가 여태껏 돌아오지 않았고 연락 또한 끊겼다는 것이다. 나 또한 아저씨에게 전화를 해보았지만, 아예 전화기 자체가 꺼져 있었다. 차용증 같은 건 썼어? 내가 묻자 여사가 황당해하며 말했다. 사랑하는 사이에 그런 걸 누가 쓰냐고.

*

내가 여사와 우리가 되기 위해 애썼던 시절들을 떠올리고 있자면 마음이 아프다. 우리가 되기 위해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려 노력했고 그게 잘되지 않으면 그건 나의 문제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렇다면 여사는 어땠을까? 열두 살의 나를 더이상 애가 아니라고 여기고 싶었던 여사는 내가 성장함으로 점점 더 우리가 되었다고 여기게 되었을까? 그건 아닐 거다. 여사는 나 또한 그저 그런 남자들처럼 언젠가 떠나게 될 거라고 단정짓고 있었다. 내가 여사를 떠나게 된 건 오히려 여사의 그런 확신 때문이었다. 언제나 내가 있으면 여사가 그런 불안에 시달릴 거라는 확신. 여사 안에는 아주 오래된 사시나무가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그 나무가 너무도 쉽게 흔들리고 마는 꼴이 보기가 싫었다.
  토론 대회 전날이었고, 이해신이 우리 집에서 밤늦게까지 대회 준비를 하다 가기로 했다. 아침부터 여사에게 약속을 상기시킨 뒤 등교를 했지만, 학교가 끝난 후 이해신과 집에 돌아왔을 때 여사는 수면제를 복용한 뒤 아직까지도 자고 있는 상태였다. 일단 어른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는 이해신을 억지로 끌고 방에 들어왔다. 대충 아프다고 둘러대고 준비한 자료들을 방바닥에 늘어놓았다. 그러자 이해신도 가방에서 두꺼운 서류철을 꺼냈다. 이미 한미 FTA나 인터넷 실명제, CCTV, 원자력 에너지 등 주제에 맞는 대본을 정리해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의 주장처럼 토론 연습을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나와 이해신은 여느 때처럼 입맞춤을 했다. 5초, 10초 간격으로 이어지던 입맞춤은 점점 길어졌고 쉬는 시간을 정해두자던 우리의 약속은 이미 무산된 지 오래였다.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보고 싶었고 그래서 이해신의 귀를 살짝 깨물었다. 그러자 이해신은 무척 놀라면서 움츠러들었다.
  “왜 그래?”
  “안 될 것 같은데.”
  “뭐가?”
  “이러면 안 된다고.”
  “왜?”
  “학생이잖아.”
  화가 났다. 다리를 벌리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는 여사의 말이 생각 나서. 왜 나는 그러지 않고도 살아가길 바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삶을 물려주기 싫다면 그렇게 살아선 안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여사처럼 살 거다. 그렇게 아주 많은 사람에게 마음 주고 몸 주고 절절매며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평생을 살아갈 테다. 그러다 진심으로 그런 생각도 했다. 나쁘지 않은데……?
  진동이 짧게 울리다 끊겼다. 막 이해신이 웃통을 벗고 있던 상황이라 확인하기가 좀 그랬다. 그런데 또 진동이 울리기에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 휴대폰을 확인했더니 현구 아저씨로부터 부재중 전화 한 통이 찍혀 있었고 문자가 와 있었다. 주소 하나만 찍힌 단순한 문자는 어딘지 모르게 다급해 보였다. 내가 한참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자 이해신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나는 이 상황을 감당하기가 어려워 결국 대략적인 내용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여사와 여사의 애인, 그 사이의 채무와 갑작스럽게 날아온 문자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나는 이해신이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와의 관계에서 발을 빼고 싶어 할까 두려웠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해신은 담담하게 말했다.
  “거기에 가면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네.”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은 이해신은 내 손을 잡고 나를 일으켜주었다. 거실로 나가 여사가 잠들어 있는 방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더니 문을 두드렸다. 어떤 기척도 들리지 않자 결국에는 문을 벌컥 열었고 아니나 다를까 여사는 침대 위에서 이불을 둘둘 말고 코까지 골며 잠을 자고 있었다. 몇 번을 불러도 여사가 일어나지 않자 이해신은 여사의 뺨을 때렸다. 그제야 여사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이해신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저씨가 있는 곳을 알았어요.”
  벌떡 일어난 여사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나와 이해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현구 아저씨가 보낸 문자 내용을 여사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것 같았다. 옷을 주섬주섬 차려입기 시작하더니 방 안에 있는 서랍이란 서랍을 죄다 열어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방이 아주 난장판이 되고 나서야 찾아낸 것은 다름 아닌 차 키였다. 사실 여사에게는 십삼 년이 넘은 모닝이 있었고 그마저도 운전을 하지 않은 지 삼 년이 더 되어갔다. 이따금 시동은 켜줘야 한다며 현구 아저씨가 그 낡은 모닝으로 드라이브 정도만 했던 것 같다. 정말 타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 시간에 청주까지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없었고 택시를 타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도 간단한 채비를 했고 이해신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쌌다.
  “대회 준비 못 해서 어떡해?”
  “다음에 하면 되지. 더 급하잖아.”
  “미안해.”
  “괜찮아.”
  생각보다 야박하지 않은 이해신의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 그런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여사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차에서 연습하면 되잖아.”
  “네?”
  “넌 안 갈 거야?”
  “저요?”
  “너 얘 남친 아냐?”
  “아……”
  이해신이 나를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말려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런데 나도 나름대로 내 입장이 있으니까. 내 입장을 말하자면, 여사가 그렇게 물어보았을 때 이해신이 당연히 맞다고 대답해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우물쭈물하면서 제대로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자 부아가 치밀었고 그애가 나를 위해 어느 정도까지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여사의 등뒤에 숨어 이해신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해신은 결국 잔뜩 주눅이 든 채로 내 남친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여사는 말했다. 그럼 따라와.
  “근데 아빠한테 혼날 것 같은데요.”
  “아빠가 중요해?”
  “중요하긴 하죠.”
  “너 그건 알아야 돼.”
  “뭐를요?”
  “지금 하는 사랑이 바로 네가 미래에 할 사랑이야.”
  마치 이해신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여사는 그렇게 말했다. 이해신은 순식간에 쪼그라들었고 나는 처음으로 이해신이 지금 스스로를 그렇게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사는 한 번 더 이해신을 안심시켰다. 대회는 갈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그러자 이해신이 반쯤 포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다 같이 주차장으로 향했다.

*

여사는 운전을 하는 내내 상향등과 하향등을 조종할 줄 몰라서 하이빔을 켜고 갔다. 그러면서도 뒷자리에 앉은 이해신에게 자꾸 말을 걸었다. 나는 그게 부끄러워서 상황을 중재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이상하게 이해신은 여사와의 대화를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그는 여사와 내가 어딘지 좀 닮은 구석이 있다고도 했다. 내가 발끈하자 여사는 발끈하는 나를 보고 발끈했다. 여사는 안 그래도 요즘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내일 있을 대회에 함께 가지 못할 것 같아 아쉬웠는데, 이참에 자기 앞에서 연습을 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이해신이 정말 의아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내일 갈 수 있기는 한 거예요?”
  “그럼. 뭐, 내가 너네를 지금 납치라도 하는 줄 아니?”
  그러자 잠시 무언가에 대해 곰곰 생각하던 이해신이 중얼거렸다.
  “솔직히 망한 거 같아요.”
  그애로부터 그런 식의 말은 처음 들었기 때문에 몹시 놀랐다. 이해신은 언젠가부터 무엇을 주장하고 반박하고 이의제기를 하는 과정이 와닿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슬쩍 이해신의 말에 수긍했다.
  “맞아. 조금 유치하게 느껴져.”
  “왜?”
  “입장을 연기하는 느낌이랄까. 솔직히 나는 되게 혼란스러운데.”
  그러자 여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원래 사는 게 일종의 연기에 가까운 거라고 일러주었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사랑도 듬뿍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거라고. 그러면서 여사는 자신이 연기를 아주 지독하게 못 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매번 사는 것이 어렵기만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말이야. 지금 혼란스럽다는 것을 들켜서는 안 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런 걸 숨긴 채 살아야 하는 거야?”
  “그렇지.”
  “왜?”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서.”
  정면을 응시하며 양손으로 핸들을 붙잡고 있는 여사는 고요해 보였다. 뒷좌석에 앉은 이해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해대는 여사가 너무나도 미웠다. 나와 여사는 아무래도 혼란스럽기 그지없고 약해 빠진 사람들인데. 아무리 그렇지 않은 척을 해도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일 뿐인데.
  “나는 그냥 나약한 사람 할래. 존나 나약하지만 그래도 나약한 줄은 아는 사람.”
  “그래서 맨날 빌빌거리고 남한테 애정이나 구걸하는 사람이 될 거야?”
  “응. 그래서 남자 많이 만날 거야.”
  “술도 많이 먹고.”
  “그럼. 꼭 자기 같은 손주랑 살면서 말이야.”
  내 말을 끝으로 우리는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여사의 차는 멀미가 날 정도로 빠르게 달렸고 이해신은 슬며시 보조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한 시간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청주에 도착했다. 현구 아저씨가 찍어준 곳은 청주 시내의 어느 주택가였고 골목을 한참이나 헤맨 끝에 주소지에 다다랐다. 오래된 단층짜리 단독 주택 앞에 차를 세운 여사는 아무래도 지번을 확인해보니 이 집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빌라나 아파트보다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거 지역이었다.
  나와 여사, 이해신은 대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현구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는데 역시나 받지 않았다. 더욱 이 집이 수상하게 느껴졌다. 시간은 새벽 1시경, 가로등 하나 없었고 어깨가 떨릴 만큼 춥고 무서웠지만…… 나는 결국 초인종을 누르고야 말았다. 고심 끝에 누른 초인종이었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해신은 그제야 용기를 얻었는지 여러 번 벨도 누르고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사?”
  “현구?”
  아저씨는 우리에게 다른 일행이 없다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한 끝에 문을 열어주었다. 여사는 현구 아저씨를 마주하자마자 가슴을 강하게 내리쳤고 아저씨는 뒤로 밀려날 정도로 큰 타격을 받은 것 같았지만 신음만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네가 해신이냐?”
  이해신과 악수를 나눈 현구 아저씨는 금세 심각한 얼굴이 되어 우리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아저씨에게 굴착기를 판매하겠다던 업체 사장은 아예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잠적해버렸다. 현구 아저씨는 직접 가게로 가서 구매하기로 한 굴착기를 가져가려고 했지만, 새로운 사장에게 저지당했다. 오랜 친구이기도 했던 사장의 배신이 믿기지 않았던 아저씨는 결국 오랜 기억을 더듬어 고등학교 시절 사장이 살던 집에 찾아와 본 것이었다.
  “그래서, 찾았어?”
  “찾았지.”
  그렇게 말하고 잘 관리된 작은 정원을 지나 조용히 현관문을 연 아저씨는 후레시로 어느 한 곳을 비추었다. 나와 이해신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로 아저씨가 비추고 있는 그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청테이프로 칭칭 감긴 채 식탁 다리에 묶여 있었다. 여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쩌려고 그랬어, 그럼 어떡하라고 나보고. 그런 대화들이 어른들 사이에 오갔다. 여사가 휴대폰을 열어 112를 눌렀다. 순식간에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하게는, 그건…… 우리의 방식이 아닐 거라는 생각. 누구도 우리의 계획과 침입을 지지해주지 않을 거고 최악의 경우에는 그저 돈만 뜯긴 침입자들 무리에 불과해질 거라는 초라한 상상에 미치고 나자 다른 방법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는 여사의 휴대폰을 뺏어 허름한 검정 소파 위에 던져버렸다.
  “유선아. 어떡하려고.”
  거실에 있는 모든 서랍을 뒤졌다. 신발장에서 사용한 흔적이 있는 조경용 목장갑 몇 벌을 찾아냈다. 그리고 한 벌씩 여사와 이해신, 아저씨에게 주었다. 목장갑을 받아 든 이들의 얼굴이 어리둥절했다. 나는 신발을 신은 채 거실 한가운데에서 목장갑을 끼며 그들에게 말했다. 아주 엄숙하게.
  “이제부터 우리는 한 패야.”
  그리고 죽은 듯 고요한 남자의 얼굴을 내리쳤다. 손수건으로 막힌 입으로도 남자는 신음을 내질렀다.
  “씨발, 사기꾼 새끼. 돈을 내놓든, 굴착기를 내놓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이해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해신은 손을 벌벌 떨면서 다가와 이걸 꼭 해야 되는 거냐고 물었다. 우리는 우리가 구제해야 하는 거야.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이해신이 주먹을 쥐고 남자의 턱을 있는 힘껏 올려 칠 때까지 눈을 부릅뜬 채로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이해신이 주먹 대신 발로 남자의 배를 깠다. 그리고 침도 뱉었다. 다음 차례는 여사의 차례가 될 것이다. 그다음은 현구 아저씨. 이제부터 우리 모두는 공범이고 받은 돈은 나눠가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완전히 여사와의 인연을 끊어버리는 상상을 했고 그건 어떤 최초의 결심과 영영 실패할 다짐과도 같았다.

*

이 모든 이야기는 내가 여사로부터 도망치기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나는 성인이 되자마자 여사의 집을 떠났고 단 한 번도 여사를 찾아간 적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완전히 연락을 끊고 산 것은 아니었다. 여사의 지독한 성격상 그럴 수도 없었다.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기도 했고 그간의 양육비에 대한 내용증명을 전달하겠다며 폭탄 문자를 보내오기도 했다. 대부분 여사로부터 오는 전화는 받지 않았지만, 갑자기 마음이 약해진 날에는 전화를 받고 박터지게 싸우다가 펑펑 울며 서로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사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래야만 내가 살 것 같았다. 그렇게 산 지 오 년이 되었다.
  청주 터미널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아주 기름진 호떡을 하나 사먹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도착하지 않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자니 퍽이나 지루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기필코 이곳에 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합실에 설치된 텔레비전으로 부동산 대출 규제와 관련된 뉴스를 봤다. 그렇게 한참을 대합실 의자에 늘어져 있다보니 저 멀리 한눈에 봐도 여사처럼 보이는 사람이 걸어왔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여사는 놀라울 정도로 정정했다. 흑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는 턱끝까지 생기 있는 컬이 돋보였다. 감색 모직 재킷을 입은 여사의 허리는 여전히 꼿꼿했고 나는 그런 여사를 마주하자마자 알 수 없는 기쁜 마음이 흘러나와 활짝 웃어 보였는데, 여사는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뺨부터 후려쳤다.
  “못된 년.”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집을 떠나고 나서 여사는 또다시 다짐했을 테니까. 쉽게 오염되는 것들은 들여서조차 안되는 거라고. 그러면서 나를 굴러들어온 빳빳한 이불 정도쯤으로 여겼을 테지. 나는 오히려 여사가 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주기를 바랐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여사는 내가 그간 뭐하고 살았는지 좀 말해보라고 했다. 나는 그냥 살았다고 했다. 그러자 여사가 물었다.
  “나처럼?”
  “응. 여사처럼.”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그래도 그랬어.”
  그러는 사이 이해신도 커다란 가방을 메고 나타났다. 어린 티는 벗었지만, 아직도 그때 얼굴이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가볍게 악수라도 나누고픈 마음에 손을 건넸는데 이해신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어색하게 이해신에게 말했다.
  “잘 지냈어?”
  “응.”
  “성공은? 했니?”
  “그딴 거 묻지 마. 너 때문에 여기까지 왔어.”
  “너도 돈 필요해서 온 거 아냐?”
  “긴말하고 싶지 않아.”
  더이상의 인사는 미뤄두고 서둘러 승강장에 가서 택시를 잡아 탔다. 미리 받아둔 주소를 말한 뒤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 집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다행히 터미널에서 십오 분 남짓 걸리는 곳이었다. 저 멀리 현구 아저씨가 미리 마중 나와 있었다. 여사는 이렇게나 젊은데 현구 아저씨는 여사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데도 완전히 할아버지 같았다. 얇은 바람막이를 걸친 백발의 현구 아저씨는 허리도 약간 굽어 있었다. 아저씨는 내 등을 두드리며 참 생경하게도 물었다.
  “네가 유선이냐?”
  “아저씨. 저 유선이에요.”
  “많이 컸다.”
  “잘 지내셨어요?”
  “덕분에.”
  여사와 현구 아저씨는 서로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모종의 사건이 있고 난 후에 그들의 연인 관계가 완전히 파국으로 치달았기 때문이었다. 현구 아저씨는 더이상 여사와 만남을 이어가고 싶지 않아 했고 여사는 그런 현구 아저씨의 결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현구 아저씨가 원래 고향이던 청주에 다시 터를 잡게 되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나는 여사의 등을 떠밀며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했지만 여사는 성질이나 내면서 빨리 돈 문제나 정리하자고 했다. 그러자 침묵으로 일관하던 이해신도 거들었다.
  “맞는 말씀이세요. 할아버지, 굴착기가 어디 있다고요?”
  “저기 공터에 있지. 그런데 말이야. 저게 영 지금 상태가 안 좋아. 팔아도 얼마 안 나오게 생겼는데.”
  “일단 봐요.”
  “밥은 먹었나?”
  “안 먹어도 돼요.”
  “그래도 꽤 오래 내 물건처럼 썼는데 말이야.”
  “아저씨. 그만큼 썼으면 됐잖아요. 여사 몫도 있고 우리 몫도 있다는 거, 기억 안 나세요?”
  그러자 현구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저씨는 그때 우리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친구에게 돈 대신 굴착기를 무사히 받아내는 데 성공했고 그것으로 잘도 먹고 살았다. 그런데 여사에게는 10부 이자는커녕 빌려준 돈도 제대로 갚지 않았고 나와 이해신의 몫도 정산해주지 않았다. 나는 이해신에게 가방에 있는 것을 좀 꺼내달라고 했다. 그러자 이해신이 뚱뚱한 가방 안에서 목장갑 세 벌과 몽키스패너 따위를 꺼냈다. 그러자 현구 아저씨가 한숨을 푹 쉬고 우리를 공터로 안내했다.
  양쪽으로 무한궤도가 달려 있는 그 거대한 굴착기는 위용이 대단했다. 무엇이든 무너트리고 훼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저씨는 이것을 어쩌겠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팔아치울 거라고 대답했다. 아주 헐값에 팔아치우더라도 그렇게 할 거라고. 그렇게 해야만이 우리가 다신 만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만 같다고.
  “당장 오늘 이걸 팔 순 없어, 유선아.”
  어떻게든 달래보려는 아저씨의 다정한 목소리가 여전했다. 나는 여사의 손을 잡고 그 커다란 굴착기 앞에 다가갔다. 그리고 그것에 손을 대보았다.
  “여사. 이게 그동안 나름 우리 재산이었어.”
  “징그럽다.”
  “그치. 징그러워. 암만 봐도.”
  영영 인연을 끊겠다던 최초의 결심은 실패했지만, 나는 여사와 떨어져 있던 몇 년의 세월 동안 늘 새로운 다짐과 그에 대한 좌절을 반복했다. 오히려 그 굴레에 대해서는 아주 잘 배웠다. 여사에게서 그리고 나에게서. 이곳에 온 이유는 비단 돈 때문이 아니라 그 다짐과 가장 큰 관련이 있다. 오늘은 나와 여사, 이해신 모두 현구 아저씨 집에서 묵을 것이다. 이 굴착기를 팔아치울 때까지 우리는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이다. 며칠이 걸릴지라도. 아저씨가 식탁 다리에 묶일지 그러지 않을지는 아저씨가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구 아저씨가 간절하게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집에 손주가 있는데…… 어떻게 안 될까? 나는 그런 건 문제도 아니라고 했다. 나도 늘 여사의 손주였고 그것이 언제나 문제였던 적은 없었으니까.

예소연

2021년부터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전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나를 다시 다짐하게 합니다.

2026/01/21
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