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 ‘비평 교환’은 지난 호의 주제 ‘다른 수역에서’와 이어지는 연속 기획입니다. 타자에 대한 우리의 공감과 투사가 때로 아주 선택적으로 작동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거리로 나서기도 합니다. 박소현과 장한길, 두 필자는 거리를 가로질러 먼 곳의 일에 응답했던 서로 다른 순간들에 주목하며, 연대가 작동하는 세계의 윤곽을 그려냅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꿈꾸는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 우리가 만들고 싶어 하는 유토피아의 모든 단계는 다른 세상이 가능할 수 있도록 싸워나간 이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져 있다. 종종 진보운동계 사람들은—끊임없이—타인을 향한 친절함과 “공동체” 그리고 선행을 이야기하지만, 월드빌딩(world-building)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우리가 절대 알지 못할 사람들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야스민 네어, 「사람들은 모르는 이들을 위해 투쟁한다」1)
2021년 8월 말, 탈레반이 점령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약 390명의 난민이 한국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예를 들어 2018년 제주도 예멘 난민이 유입되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뉴스 보도와 정부의 발표는 이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오랜 기간동안 한국 정부기관, 파병된 한국군, 한국국제협력단(KOICA) 등에 조력해왔다는 점, 그리고 이에 따른 한국의 도의적 책임을 강조했다. 그들을 향한 대규모 혐오 시위도 눈에 띄지 않았다. 물론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멘 난민과 아프가니스탄 난민 사이에 작동하는 ‘차등 논리’를 생각하면 마음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유럽에서 중동과 아프리카의 분쟁 지역 출신 난민 수용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이른바 ‘서구 책임론’이다. 2세기 넘게 이어져 온 서구의 식민지 정책은 물론,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경제적 착취와 정치・군사적 개입에 대해 최소한의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난민 발생의 원인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이 있어야만 난민 수용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2018년 ‘제주 난민인권을 위한 범도민위원회’의 활동가를 인터뷰하면서 씨름해 온 질문이다. 시리아 내전 이후 가장 많은 난민을 수용한 독일에서도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2) 이 글은 넓은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도의적 책임’을 넘어선 다른 동기를 탐색하기 위한 시도이다.


부산 베트남 난민보호소(1975-1993)

모자를 쓴 아이를 안고 있는 베트남 여성을 담은 대한뉴스 흑백 영상 스틸.
대한뉴스 제1033호: 월남 난민 구호. 1975년 5월 31일 (출처: KTV 아카이브)

한국 정부가 1992년 유엔 난민협약에 가입하고, 1994년 난민심사제도를 설립하기 약 20년 전인 1975년, 한국은 처음으로 해외 난민을 받아들였다. 그해 4월 30일,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시)을 점령했을 때, 철수 중이던 한국 해군 상륙함에 승선했거나, 이후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삼양선박 소속 화물선 ‘쌍용호’에 의해 구조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각각 5월 13일과 5월 23일에 부산항으로 들어왔다. 당시 입국한 총 1,580명 가운데에는 남베트남에 체류 중이던 한국인과 그 가족(베트남인 포함)도 있었는데, 이들을 제외한 베트남인 난민은 약 579명이었다.3) 이들을 위해 부산 서대신동 부산여자고등학교에 임시난민구호본부가 설치되었고, 같은 해 9월에 괴정동의 외국인수용소로 이전됐다. 그러나 난민 유입이 늘어남에 따라 대한적십자사와 UN의 지원을 받아 1977년 재송동에 약 2,000㎡ 규모의 난민보호소가 신축됐다. 이렇게 세워진 베트남 난민보호소는 1975년 5월부터 1993년 1월 문을 닫을 때까지 약 18년 동안 운영되었다. 그 사이 총 2,800명이 넘는 이들이 이곳을 거쳐 갔지만, 한국인 가족이 있던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에 정착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미국, 프랑스, 캐나다 등 제3국으로 이주했으며, 새로운 유입이 사실상 끊긴 1989년부터 1993년 사이에 남아있던 이들은 최종적으로 뉴질랜드로 재정착했다.4)

KBS 뉴스 9: 문닫는 월남 난민수용소. 1993년 1월 31일 (출처: KBS)

그러나 정부에서 한국 정착을 적극적으로 도운 경우도 존재했다. 1975년 한국 해군 상륙함을 타고 부산항으로 들어온 최초 유입 난민들은 많은 경우 한국인 가족이 있었으며, 가족이 없더라도 대부분 남베트남 주재 한국 대사관이나 한인교민회와 관계를 맺고 있었거나 그러한 이들의 가족이었다. 즉, 이들은 앞서 언급한 2021년의 아프가니스탄 난민들과 유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특히 베트남전에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전투병력을 파병했고 (당시엔 사회적으로 널리 인식되지는 않았으나) 여러 차례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한국으로서는 ‘도의적 책임’의 무게를 가볍게 느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난민 문제를 다룬 당시의 뉴스와 신문 보도는 대부분 베트남 난민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도움을 제공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며, 시혜적인 시선을 강조했다.

모자를 쓴 아이를 안고 있는 베트남 여성을 담은 대한뉴스 흑백 영상 스틸.
국립영화제작소, 〈나라 잃은 사람들 (인도 지나의 비극)〉(1979)

이처럼 정부와 언론이 난민 수용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을 완화하기 위해 시도한 방식 가운데 하나로, ‘서로의 처지 사이에서 공통점을 보게 하는 전략’을 들 수 있다. 노영순의 지적대로 “베트남 난민은 언제나 망국이나 공산화의 비극과 짝하여 다루어지면서, 대외적인 안보와 대내적인 질서, 그리고 반공의식을 고무시키는 소재”로 활용되었다.5) 국립영화제작소가 제작한 국정홍보영화 〈나라 잃은 사람들 (인도 지나의 비극)〉(1979)은 베트남 난민수용소에서의 생활상과 부산항 입항 당시의 장면을 사용해, “한국인들 또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같은 운명을 맞을 수도 있다”는 식의 메시지를 전한다. 사실 이러한 접근은 이미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나타난다. 1975년 5월 31일자 대한뉴스는 쌍용호가 구조한 베트남 난민을 보도하며, “우리는 이들의 방황을 남의 일로만 보지 말고 방비를 튼튼히 해서 이런 비극을 겪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라는 멘트로 마무리했다. 물론 이러한 수사는 반공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분단의 경험’ ‘공산주의와의 전쟁’ ‘나라 잃은 한(恨)’ 등을 강조함으로써, 베트남 난민과 한국인 사이의 유사한 처지를 환기하고, 난민에 대한 정서적 이입을 유도하는 기능을 하기도 했다. 즉, 여기에는 ‘동병상련’과 ‘역지사지’의 수사법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병상련’과 ‘역지사지’의 괴리: 팔레스타인 속 베트남 난민들

‘그들’이 처한 상황과 ‘우리’가 처한 상황 사이의 유사성을 통해 연대를 설득하는 방식은, 사실 연대 운동에서 자주 활용되는 수사법이다. 2018년 예멘 난민이 한국에 유입되었을 당시, 난민 혐오에 대한 반론으로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한국인 난민이 발생했는데, 처지를 바꿔 생각해보라”는 주장이 대표적인 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 중 하나는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인정에 관한 것이다. “한국이 베트남에서의 전쟁범죄를 철저히 조사하지 않으면 일본의 전시범죄—특히 위안부 문제—에 대해 문제제기할 자격이 없다”라는 논리다. 일본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한국에 대한 베트남의 입장에 대입시킴으로써 철저한 진상조사의 필요성을 피력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꼭 식민 제국이었던 나라 사람들만 난민 유입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식민피해나 전쟁범죄를 당한 나라 사람들만 자국의 가해 사실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동병상련’과 ‘역지사지’의 수사법은 가끔 정말로 기괴한 방향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1975년 사이공 함락 이후 발생한 수십만 명의 베트남 난민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졌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예상 밖의 지역은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이었다. 1977년 6월 10일, 남중국해를 항해하던 이스라엘 선박 ‘유발리(Yuvali)’가 낚시배를 타고 표류중이던 베트남 난민 66명을 발견해 구조했다. 선장 메이르 타드모르(Meir Tadmor)는 처음에 이들을 대만, 일본, 홍콩에 인도하려 했지만 모두 망명을 거절당했다. 결국 이스라엘 당국과의 논의 끝에, 새로 당선된 총리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은 그해 6월 21일, 베트남 난민들에게 이스라엘 망명과 정착, 나아가 시민권 부여를 허가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이스라엘이 수용한 한 베트남 난민의 수는 점차 늘어나, 1979년에는 총 366명이 이스라엘에 정착하게 되었다.6)
  베트남 난민 수용에 관여한 여러 이스라엘 관료들은, 난민들이 세운 나라 이스라엘이야말로 베트남 난민들의 처지에 가장 깊이 공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긴 총리와 유대인 에이전시(The Jewish Agency) 대표 예후다 바이스베르거(Yehuda Weissberger)는 모두 1947년 독일의 난민캠프를 떠나 ‘엑소더스(Exodus)’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팔레스타인으로 향했으나, 영국에 의해 다시 독일로 송환된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경험을 베트남 난민들의 상황과 연결시켰다. 그들은 이러한 유사성을 통해, 이스라엘이 베트남 난민을 받아들여야 하는 도덕적 당위를 강조했다. 이에 대해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베긴 총리의 방미 연설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겪은 역사적 고난을 잘 반영한 결정”이라며 찬사를 보냈다.7)
  그러나 이러한 ‘동병상련’의 수사법이 기괴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이 1948년 나크바(Nakba)와 1967년 나크사(Naksa)를 통해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시민권 취득의 사법적 경로를 차단함으로써, 귀향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베긴과 카터는 유대인들이 난민과 홀로코스트의 역사 속에서 겪은 고통을 근거로, 베트남 난민에게 공감하고 도움을 주려는 ‘선한 민족’으로 이스라엘을 포장했다. 그러나 그 공감과 도움의 손길은 자신들에 의해 난민이 된 팔레스타인인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이 모순은, ‘선택적 동병상련’과 ‘역지사지’라는 수사법이 어떻게 권력의 논리에 따라 작동하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중심으로 한 바다 건너의 연대: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과 일본적군파(JRA)

팔레스타인과 직접적으로 연관도, 유사한 역사적 처지의 경험도 없었지만, 그들의 해방을 위해 무장 투쟁에 함께 참여한 단체가 있다. 바로 1971년에 결성된 일본적군파(JRA)다. 이는 세계적으로 봤을 때도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든데, 독일 적군파(Rote Armee Fraktion)처럼 중동으로 넘어가 팔레스타인 해방조직과 함께 게릴라 훈련을 받은 뒤 자국으로 돌아간 단체나 개인은 종종 있었지만, JRA처럼 함께 훈련받으며 10년 넘게 팔레스타인에서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활동했던 단체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8) 왜 JRA는 일본의 ‘식민지 책임’과도 무관한 먼 곳의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며 그들의 해방투쟁에 가담하게 되었을까?
  JRA와 팔레스타인, 정확히는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 사이의 연결은, 여전히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믿음이 유효하던 시대적 맥락 속에서 출발한다. JRA의 전신은 1968년, 서구 전역에서 사회 운동과 반전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나던 시기에 결성된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Communist League Red Army Faction)였다. 적군파는 1970년 안보투쟁을 앞두고 있던 제2차 공산주의자동맹(분트) 내에서, 무장투쟁과 국제적 혁명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결성된 분파였다. 그들이 상정한 세계혁명의 이론적 틀은 이른바 ‘3블록론(三ブロック論)’과 ‘세계근거지론’에 기반해 있었다. 세계를 제국주의 국가, 노동자 국가, 반식민주의 국가의 세 가지 세력으로 분류하고 해외의 노동자 국가와 반식민주의 국가에 혁명세력의 근거지를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적군파는 ‘노동자 국가’ 중 쿠바에서 무장투쟁의 근거지를 확보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감행된 작전이 바로 영화 〈굿뉴스〉(2025)의 소재가 된 1970년 3월의 속칭 요도호 사건, 즉 JAL 351편 납치다. 하지만 요도호 사건 이후, 적군파는 쿠바 그리고 북한에 근거지를 마련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이들은 당시 제국주의의 최전선으로 여겨지는 ‘반식민주의 국가’, 즉 팔레스타인으로 눈을 돌렸다. 나중에 둘로 갈라진 적군파 중에서9) JRA를 이끌게 될 시게노부 후사코(重信房子)와 오쿠다이라 츠요시(奥平剛士)가 1971년 3월 레바논 베이루트에 도착하여 PFLP 의용대에 입단했다. PFLP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하여, 아랍민족주의의 틀을 넘어 팔레스타인 해방이 동시다발적인 세계혁명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념적으로도 JRA와 통하는 면이 있었다. 이렇게 팔레스타인과 일본의 두 단체 사이의 본격적인 관계가 시작된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가산카나피니.
왼쪽 상단을 응시한 채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레일라 칼레드.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시게노부 후사코.
〈적군/팔레스타인해방전선: 세계전쟁선언 Red Army/PFLP: Declaration of World War〉(1971). 차례로 가산 카나피니, 레일라 칼레드, 시게노부 후사코.

같은 해 만들어진 와카마츠 코지(若松孝二)와 아다치 마사오(足立正生)의 영화 〈적군/팔레스타인해방전선: 세계전쟁선언 Red Army/PFLP: Declaration of World War〉(1971)은 JRA와 PFLP의 관계를 흥미롭게 그려낸다. 영화는 시작부터 JRA의 전신인 적군파의 요도호 납치 사건을 다룬 뉴스영상과, 도슨스 비행장에서 PLFP가 빈 비행기를 폭파하는 장면을 교차 편집한다.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지역에서 전개된 두 단체의 활동을 병치하며, 세계혁명의 동시성을 시각적으로 제시한다. 이어 내레이터는 JRA와 PFLP 사이의 연대가 소련이나 미국 등의 거대 세력의 대리 전쟁이 아니라, 공통된 혁명 이념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영화는 가산 카나피니(Ghassan Kanafini), 레일라 칼레드(Leila Khaled), 시게노부 후사코 등 PFLP와 JRA 멤버들의 인터뷰를 엮어, 이스라엘을 제국주의-자본주의 세력이 중동 지역을 약탈하고 지정학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심어둔 첨병으로 규정한다. 그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팔레스타인이 지닌 상징적 의미를 부각시시킨다.
  〈적군/팔레스타인해방전선〉이 일본 내 좌파 커뮤니티에 한정해 두 단체의 관계와 그 이념적 기반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면, JRA와 PFLP의 연대를 전 세계 대중에게 각인시킨 사건은 1972년의 로드 공항 총기 난사사건이었다. PFLP의 지휘 아래, 세 명의 JRA 대원은 로마에서 프랑스항공 여객기를 타고 이스라엘의 로드 공항에 도착하여 공격을 감행했다. 이스라엘 당국은 팔레스타인인이 아닌 일본인이 공격 주체가 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고, 이 점을 JRA는 전략적으로 이용했다. 이 사건으로 JRA 대원을 포함해 26명의 사망하고 80명이 부상당했다. 이스라엘과 서방, 그리고 일본의 주류 언론은 그 폭력성에 경악했지만, JRA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대응했다. “피식민자의 저항행위를 폭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나크바 이후 이스라엘과 시온주의 민병대가 자행한 학살과 서구 제국주의가 야기한 팔레스타인 인민의 참상을 선택적으로 무시함으로써 가능해진다.”10)
  이후 1975년 발간된 선전물 『대오를 갖춰라! 일본적군선언(隊伍を整えよ!日本赤軍宣言)』은 JRA가 팔레스타인 혁명전선에 참여하는 당위를 이스라엘의 정착식민주의와 일본의 제국주의 사이의 유사성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해당 지면에서 JRA는, 일본이 과거 중국을 침략하고 조선과 오키나와를 식민 지배했으며, 그 여파로 오늘날에도 일본 내 재일중국인·재일조선인·오키나와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지속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일본이 제국주의 질서에 가담하고 있는 한, ‘제국의 심장부’의 일원인 일본인에게는 혁명적 무장투쟁을 통해 그러한 질서를 무너뜨려야 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중동에서의 무장투쟁 또한 그 책임을 실천하는 과정이며, 이는 동아시아의 역사적 맥락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강조했다.11)

표지 상단에는 일본어로, 하단에는 아랍어로 제목이 적혀있다. 가운데에는 두건을 쓴 사람이 총구를 정면으로 향하는 삽화가 그려져 있다.
『대오를 갖춰라! 일본적군선언』(1975) 표지

세계혁명론에 입각한 일본-팔레스타인 연대는 인상적이면서도 동시에 의문을 남긴다. 그것은 같은 시기 일본 내부에서는, 일본 신좌파 단체와 재일조선인이나 아이누 등 일본 내 소수민족 사이에서 JRA-PFLP만큼 상징적인 연대체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 때문이다.12) 이는 재일조선인 커뮤니티가 ‘민족’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신좌파 운동권이 일본 내 소수민족 문제에 상대적으로 둔감했기 때문일까?
  적군파와 JRA는 팔레스타인이나 북한 뿐 아니라, 그들이 ‘노동자 국가’ 혹은 ‘제3세계’로 인식했던 여러 나라와도 접촉을 시도했다. 그중 하나가 나임 모하이에멘(Naeem Mohaiemen)의 에세이 필름 〈연합적군 United Red Army: The Young Man Was, Part I〉(2011)에 등장하는 방글라데시다. 1977년 9월, JRA 멤버 마루오카 오사무(丸岡修)가 이끄는 여섯 명의 일행은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에서 출발한 JAL 472 편 여객기를 납치해 방글라데시 다카로 착륙시켰다. 이들은 현지에서 방글라데시 공군참모 A. G. 마무드(Mahmud)와 협상을 벌이며 일본 정부에 인질들의 몸값과, 수감중인 적군파 계열 인사들의 석방 및 인도를 요구했다. 모하이에멘의 작품은 대부분 마무드와 ‘당케스(Dankesu)’라는 코드명으로 불린 인물의13) 통화 녹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흥미로운 지점은, ‘당케스’가 1971년 해방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벵골 민중의 이슬람 정권이 JRA의 이념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기보다는 일본 측 요구의 전달자 역할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에 일종의 불만과 배신감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는 어눌한 영어로 아래와 같이 토로한다.

우리가 왜 여기에 착륙했는지 기억하라. 우리는 방글라데시 정부가 독립적이고 이슬람이며 민중에 의해 세워진 정권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당신들이 우리를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본 정권과 우리 사이의 대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14)

작품 요약에 쓰여 있듯, “현실 속의 제3세계는 JRA의 ‘제3세계 혁명’이라는 이념을 위한 발판이 되어주는 대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를 받아치며 비행기 납치범들을 무력한 목격자로 만들어버렸다”. 이는 프랑스 감독 에릭 보들레르의 영화 〈시게노부 메이와 시게노부 후사코, 아다치 마사오의 원정 그리고 27년간 부재한 이미지 The Anabasis of May and Fusako Shigenobu, Masao Adachi and 27 Years without Images〉(2011)에서 아다치 마사오가 언급한 것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낭만을 그리며 이방의 땅으로 간다”는 행위에서 “결국 낭만이란 [자신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15)

표지 상단에는 일본어로, 하단에는 아랍어로 제목이 적혀있다. 가운데에는 두건을 쓴 사람이 총구를 정면으로 향하는 삽화가 그려져 있다.
나임 모하이에멘의 〈연합적군 United Red Army: The Young Man Was, Part I〉(2011)의 한 장면


연대의 패러다임

마지막으로 보도된 JRA의 활동은 1988년 폭탄을 실은 차량으로 나폴리 미군 시설을 공격했던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12년 뒤인 2000년, 위조 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해 있던 시게노부 후사코가 체포된다. 이듬해, 시게노부가 옥중에서 JRA의 해체를 선언하면서 PFLP의 무장투쟁 연대 또한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세계혁명이라는 이념의 언어가 힘을 잃은 오늘날, 그리고 더욱 악랄하게 지속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정착 식민주의의 폭력 앞에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바다 건너의 타자와 연대를 모색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는 무엇인가.
  영국의 언어학자 릴리 출리아라키(Lilie Chouliaraki)는 1970년대-2010년대 사이 서구사회에서 연대를 요청하고 그 의미를 소통하는 방식이 크게 변화했음을 지적하며, 그 세 가지 주요 요인으로 인도주의의 도구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대중매체 지형의 형성, 그리고 연대의 언어가 의존하던 ‘지배서사’의 약화를 꼽았다.16) 이 중 마지막 요인, 즉 연대를 요청하는 언어나 이미지의 기성 패러다임 앞에서 우리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은 앞서 다뤘던 사례에서도 잘 느낄 수 있다. 남베트남 난민과의 ‘동병상련’을 강조한 한국 정부나 이스라엘 정치인들의 언설에서 정략성과 위선의 측면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고, 세계혁명과 무장투쟁에의 호소로 대표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수사법은 지나간 시대의 유물과도 같은 취급을 부른다. 그리고 무작정 북한, 쿠바, 방글라데시 등의 ‘탈식민 국가‘로 향했던 JRA의 순진함은 오늘날 쉽사리 냉소의 대상이 된다.
  동시에, 누군가가 영원히 만날 일 없었을지도 모르는 타자의 고통에—그 어떤 문제적인 방식이든 간에—감응하고 연결되었던 경험은 지금 이곳에서 연대를 소통하는 체계를 새롭게 구축해나가려는 이들에게 자산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 점령지의 베트남 디아스포라와 부산의 베트남 난민보호소는 오늘날 국가권력에 의해 ‘특별기여자’라는 ‘시혜 대상’의 선별을 위한 선례로 기능하기도 하는 반면, 보상논리나 역지사지, 동병상련의 수사에 의존하지 않는 연대의 모색을 위한 역사적 성찰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
  〈적군/팔레스타인해방전선〉을 찍은 아다치 마사오는 3년 뒤인 1974년 JRA에 합류했고, 곧이어 국제지명수배 대상이 되어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레바논에 체류했다. 결국 1997년에 체포된 그는 루미에(Roumieh) 감옥에서 3년을 복역, 그리고 일본으로 강제송환되고 나서 1년 6개월을 더 복역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무 영화도 발표하지 않았던 그가 출소했을 때, 더 이상 ‘혁명으로서의 연대’라는 패러다임은 통용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다치는 그러한 패러다임을 넘어서 새로운 연대의 언어와 이미지를 영화제작을 통해 구축하려는 시도를 여든이 넘은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17)
  인도주의와 혁명의 언어에 힘이 있었다고 상상되는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분열과 냉소의 현시대를 탓하기 쉽겠지만, 과거처럼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는 알지 못하는 타인을 위해 몸을 던져 투쟁하고 연대의 새로운 언어를 모색하는 사람들이 있다. 본고에서 살펴본 사례들이 그러한 실천을 위한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길 바란다.

장한길

장한길은 서울과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이자 번역가이다. 공적 기억의 형성에서 기술매체가 수행하는 역할을 실험적으로 다룬 예술 작품에 대해 글을 써 왔다. 평론집 『남겨진 것: 공적기억과 예술언어』를 썼고, 옮긴 책으로는 『무의미의 제국』 『짐을 끄는 짐승들 – 동물해방과 장애해방』(공역), Journalism as Resistance가 있다.

2026/01/21
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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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smin Nair, “People Are Fighting for Strangers,” 2025-06-07.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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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전 총리 앙겔라 메르켈의 ‘인도주의적 결단’으로 명명되는 독일의 난민수용 양상은 프리드리히 메르츠 내각이 들어선 2025년 큰 반환점을 맞은 이래, 국경 통제 강화 및 불법 이민자 추방 확대로 나아가고 있다. 가장 가시적인 변화로 꼽히는 것이 난민 신청을 사유로 들어 입국하려는 사람도 이제 입국심사관 판단하에 입국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김계연, “독일 새정부 출범하자마자 “국경서 난민 차단”(종합)”, YTN, 2025년 5월 8일.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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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순, 「부산입항 1975년 베트남난민과 한국사회」, 『사총』 81, 2014, 332-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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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순, 「바다의 디아스포라, 보트피플: 한국에 들어온 2차베트남난민(1977~1993) 연구」, 『디아스포라연구』 7/2, 2013, 85, 99,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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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순, 「부산입항 1975년 베트남난민과 한국사회」, 『사총』 81, 2014,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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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yn Lê Espiritu Gandhi, Archipelago of Resettlement: Vietnamese Refugee Settlers and Decolonization across Guam and Israel-Palestine, Oakland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22, p.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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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y Carter, “Visit of Prime Minister Menahem Begin of Israel Remarks of the President and the Prime Minister at the Welcoming Ceremony,” White House, American Presidency Project, 1977-07-19.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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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emy Randall, “Global Revolution Starts with Palestine: The Japanese Red Army’s Alliance with 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 Comparative Studies of South Asia, Africa and the Middle East 43/3, 2023, p.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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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지도자급이 1969년 11월 대보살고개에서 군사훈련을 하던 중 발각되어 체포되거나 이듬해의 요도호 사건으로 북한에 정착하게 되면서, 적군파는 1971년 해외에 나가 있는 인원들을 중심으로 한 일본적군파(JRA)와 일본에 잔류한 인원들을 중심으로 한 연합적군파(URA)로 나뉘게 된다. URA는 불과 1년 만에 산악베이스 사건과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인해 와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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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emy Randall, Ibid., p. 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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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革命戦線情報センター・査証編集委員会 編, 『隊伍を整えよ!日本赤軍宣言』, 東京: 査証出版, 1975, pp. 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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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이 중심이 되어 재일조선인 문제와 팔레스타인 문제를 연계하여 논의해보려는 시도로 알려진 것은 계간 『전야(前夜)』의 2005년 10월 별책 『루트 181: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여정의 단상(ルート181: パレスチナ~イスラエル旅の断章)』을 꼽아볼 수 있지만, JRA의 활동 시기로부터 무려 30년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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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의 리더인 마루오카 오사무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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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ember why we landed here. We thought the Bangladesh government is independent, Islamic, and popular government and we believed that you could help us and you could be a representative between the Japanese regime and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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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에릭 보들레르가 시게노부 후사코가 레바논에서 낳은 딸 시게노부 메이 그리고 영화 촬영 당시 복역중이었던 아다치 마사오와 진행한 음성 인터뷰로 구성된 영화다. 아다치의 해당 발언은 일본에 돌아온 상태에서 ‘지금 여기’에서의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꺼낸 발언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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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ie Chouliaraki, The Ironic Spectator: Solidarity in the Age of Post-Humanitarianism, Maiden MA: Polity, 2013, pp.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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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 뒤에도 2007년작 〈유폐자 테러리스트〉를 시작으로 꾸준히 영화를 발표했으며, 가장 최근작으로는 신조 아베 총격범 야마가미 테츠오(山上徹也)를 주인공으로 한 〈Revolution+1〉(2022),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대원 기리시마 사토시(桐島聡)의 삶을 다룬 〈도주〉(2025)가 있다. 두 작품 모두 한국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