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교환
연대의 조건과 논리
이번 호 ‘비평 교환’은 지난 호의 주제 ‘다른 수역에서’와 이어지는 연속 기획입니다. 타자에 대한 우리의 공감과 투사가 때로 아주 선택적으로 작동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거리로 나서기도 합니다. 박소현과 장한길, 두 필자는 거리를 가로질러 먼 곳의 일에 응답했던 서로 다른 순간들에 주목하며, 연대가 작동하는 세계의 윤곽을 그려냅니다.
어떤 사소한 문제는 나를 완전히 망가뜨릴 수도 있으며
어떤 대단한 문제는 나의 마음에 티끌 하나 묻히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죽음은 거룩하게 포장되고 어떤 죽음은 조용히 잊힌다.
그것이 과연 단순한 우연에 불과한 걸까?
―예소연, 『영원에 빚을 져서』
파리와 앙카라 사이
2015년 1월, 프랑스의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엡도》 사무실에 괴한들이 침입해 편집장을 비롯한 기자와 경찰 열두 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잡지는 그간 여러 차례 예언자 무함마드를 풍자하는 만평을 내놓아 분노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표적이 되어왔던 터였다. 사건 직후, 프랑스 전역은 물론 전 세계에서 테러를 규탄하고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특히 온라인상에서는 “나는 샤를리다”(#jesuischarlie) 해시태그가 사건 발생 스물네 시간 만에 340만 회 이상 사용되어 트위터(현 엑스)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해시태그가 될 정도로 빠르게 연대의 물결이 퍼졌다. 이전에 참사가 벌어지면 등장하던 “○○를 위해 기도해줘”(#prayfor○○) 해시태그에 비하면, “나는 샤를리다”는 자신을 피해자의 자리에 놓고 동일한 입장이 되기를 자처하는 훨씬 강력한 연대의 선언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열 달 후인 11월, 다시 파리에서 대규모 동시다발 테러가 벌어져 백삼십 명 이상이 사망하자, 전 세계는 이번에는 “내가 파리다”(#jesuisparis)라고 선언하며 애도와 연대를 표했다.
그런데 넉 달 후인 2016년 3월,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에 대한 반응은 조금 달랐다. 이 도시에서 벌써 세번째 벌어진 폭탄 테러인 데다, 서른세 명이 죽고 백이십오 명이 다친 참사였다. 그러나 이 앙카라의 비극은 널리 알려지지도, 광범위한 국제연대의 대상이 되지도 못했다. 이 무시할 수 없는 온도 차이를 지켜보던 한 앙카라 거주자가 SNS에 짧은 글을 올렸다. 그는 먼저 앙카라에서 테러가 벌어진 곳도 시민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분주한 시내 한복판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어째서 파리, 뉴욕, 런던 같은 곳에서 벌어진 테러는 쉽게 공감의 대상이 되지만, 앙카라 같은 곳에서 일어난 비극은 그렇지 못하는지 물었다. 몇 달 전 “당신은 샤를리이자 파리였지 않았느냐고, 그렇다면 앙카라도 되겠느냐”1)고. 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째서 우리는 어떤 이들이 겪은 불의나 피해에는 거의 즉각적이고 본능적으로 동일시하면서, 어떤 이들이 겪는 폭력에는 거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가? 이런 선택적인 공감과 연대 혹은 공감 불능과 단절은 어디에서 근원하는가?
팔레스타인, 베트남 그리고 한국
2023년 10월 7일 이후,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학살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앞의 질문은 “당신은 가자 혹은 팔레스타인이 되겠느냐”가 될 것이다. 그런데 육만 구천 명 이상이 사망하고 희생자의 절대다수가 여성과 어린이인 참혹한 집단학살 앞에서도, 팔레스타인 되기란 앙카라 되기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팔레스타인에 연민을 표하는 것이 반유대주의라는 억측, 국제정치의 역학, 무슬림 일반을 향한 혐오 등 팔레스타인 되기 앞에는 장애물이 촘촘하게 놓였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2023년 이후 전 세계 대학가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확산시키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지난 2년 사이에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 15개국이 새롭게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해, 유엔 회원국 193개국 중 157개국이 팔레스타인과 정식으로 수교하게 된 것이 그 성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여전히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못하고 있다. 정부의 입장과는 별개인 한국 사회 전반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가자 학살에 대해 기계적인 중립이나 양비론, 복잡하고 기나긴 분쟁에 피로감이나 무기력, 일관된 무관심으로 반응해왔다. 세계적인 흐름과도 동떨어진 이런 반응은, 우리가 언제라도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첨예한 분쟁 지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 이상하다. (정작 한 일이 거의 없는데도 느끼는) 피로감과 무기력은 팔레스타인의 폭력과 우리의 삶이 어떤 식으로건 이어졌으며 타자의 고통과 자신의 취약성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불능의 다른 이름처럼, 잘 모르는 데서 온다는 무관심은 “아무것도 알지 않겠다는 냉혹한 의지, 피해자에게 어떤 공감도 느끼지 않으려는 의지”2)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 현대사에서 이런 집단적 공감 불능은 결코 낯선 일이 아니다. 특히 분단과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은 한국 사회가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반복하고 있던 베트남전쟁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각별히 기억해둘 만하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부터 계속되던 인도차이나의 불안정은 1965년 3월, 미국이 베트남에 지상병력을 투입하면서 본격화됐다. 곧이어 미국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징병제와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이 시작된다. 반전운동의 시작은 미약했지만 마틴 루터 킹이 전쟁 반대 입장을 밝히자 민권운동의 흐름과 연결되며 폭발적으로 확대됐고, 68혁명을 비롯한 반문화운동과 결합하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반전과 평화는 1960년대 중후반의 시대정신이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 모든 흐름과 완벽하게 단절돼 있었다. 일부 국회의원들이 파병을 “용병 수출”이라고 부르며 반대를 표했을 뿐, 반전의 목소리는 전무했다. 한국은 1965년 10월부터 베트남에 지상병력 30만 명을 보냈으며, 파병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관민합일’의 전 국민적인 아찔한 ‘도취’와 ‘축제’의 황홀경”이었다. 여의도광장과 부산항 등지에서 열린 환송식에서는 동원된 학생들이 깃발을 흔들고 축포가 터지며 꽃목걸이를 건 파월 장병들이 군가를 부르며 손을 흔드는 요란한 스펙터클이 이어졌다. 남의 도움만 받던 처지에서 누군가를 돕는 위치로 올라섰다는 자랑스러움에 취했고, 파월 장병을 매력적인 남성상으로 그린 대중가요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인기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국문학자 장세진은 이 당혹스러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한국 엘리트들의 쓴 아시아 기행문을 읽으며 그들의 아시아 인식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추적한다. 그 가운데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첨예한 냉전 질서 속에서도 이웃 일본의 분위기는 아주 달랐다는 사실이다. 일본 시민들은 베헤이렌(ベ平連,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을 결성해 반전 시위를 벌이고 군수물자를 대는 기업을 비판했을 뿐 아니라, 미군 탈영병을 지원해 제3국으로 탈출시키는 등 국경을 넘나드는 반전운동을 벌였다.3) 일본만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미국의 식민지였고 반공 독재자 마르코스가 통치하던 필리핀에서도, 미군의 휴가지로 전쟁 특수를 누리던 또 다른 반공국가 태국에서도 학생사회를 중심으로 상당한 규모의 반전 운동이 있었다. 필리핀과 태국도 정부 차원에서 파병은 했지만 소규모 비전투 인원으로 구성된 구색 맞추기 수준이었다. 한국의 반응을 당시 국제정세와 냉전을 핑계로 합리화하기에는 이웃 나라들과의 온도차가 너무 커 보인다.
그렇다면 더 먼 과거로부터 그 연원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국 정부는 1960년대 중후반 사회적 통제와 국민정신 ‘개조’ 작업을 통해 전 국민 동원 체제를 구축하고, 베트남전쟁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한편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전환할 계기를 마련했다. 이 기간에 이루어진 변화는 현재 한국 사회를 만든 원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강력했다. 또한 이 “싸우면서 건설”하는 불도저식 증산과 안보 체제의 원형은 다시 식민 경험, 그중에서도 만주국 체제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4)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고, 그곳에 국가 주도의 중앙집중식 산업화 계획과 권위주의적 동원 방식을 통한 근대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만주국은 출세할 기회를 찾는 조선 젊은이들을 유혹했고, 그렇게 만주행을 택한 이 중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일권 전 총리 등 후일 한국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있었다. 이들의 내면을 형성한 것은 만주국에서 경험한 건설, 동원, 경쟁, 압축 성장의 권위주의적 근대국가 건설 경험 그리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확립된 아시아 내 인종적 위계화였다.
조선인의 만주행에는 “자신(나라를 잃은 조선)에 대한 혐오”가 깔려 있었고, 만주국으로 간 조선인은 만주국을 구성하는 여러 민족 중 “2등 공민”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지위가 보장되지 않는 불안 속에서 살아갔다. 이런 상황은 1937년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전기를 맞는다. 고학력 조선인에게 군인과 관료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고, “내선일체”를 강화하는 동시에 중국인을 격하하면서 조선인의 2등 공민 지위가 전보다 굳건해진 것이다. 이어 1942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대동아공영권’ 안에서 ‘남방’ 곧 동남아시아까지 포괄하는 인종적 서열화 작업이 시작됐다. 일본인을 꼭짓점에 놓고 “문명화의 정도”에 따라 아시아 각 민족을 위계적으로 배치하는 이 과정에서 오래된 식민지 조선인의 지위는 다시 한번 흔들린다. 국문학자 권명아는 이 시기에 조선에서 생산된 남방에 관한 시와 종족지를 분석하며, 남방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조선인에게 주어질지 모를 새로운 기회에 열광하는 동시에 “야자수 아래 깜둥이” 같은 표현으로 “남방 원주민을 열등한 존재로 집요하게 재현함으로써 조선의 위치를 우월하게” 만들려는 불안을 읽어낸다.5) 이 열광과 불안이 뒤얽힌 분열적 심리야말로 ‘남방’도 조선처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공동의 운명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설 방도만 찾게 만든 것이었다.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은 흔히 생각하듯 동맹인 미국의 요청과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쟁 직후인 1954년부터 지속적으로 베트남 파병을 자청한 것은 한국 정부였다. 전투병력 파병을 구실로 미국의 더 많은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얻어내고, 미국이 주도하는 반공 진영 안에서 더 중요한 지위로 올라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파병이 현실화되자 이를 통해 얻은 모든 자원은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한국전쟁의 참화를 겪은 민족이 비슷한 운명을 반복하던 아시아인에게 총을 겨누며 싸우러 가는데 온 나라가 열광했던 이 모순을 냉정한 “국제정치로 합리화하지 않고, 전후의 폐허를 이기고 ‘성공한 한국’이 안고 있는 본질적 문제”6)로 되돌아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미얀마, 광주 그리고 아시아 곳곳에서
아직 팬데믹의 끝을 가늠할 수 없던 2021년 2월, 미얀마에서 쿠데타 소식이 들려왔다. 군부가 총선 결과에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아웅산 수치가 이끌던 민간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2011년부터 미얀마는 오랜 군부 독재에서 민간 정부로 권력을 이양하는 과정을 불안하게 통과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그 안타까움이 더 컸다. 팬데믹으로 모두의 발이 묶인 상황에서 세계의 눈이 미얀마로 쏠렸다. 온라인에서는 “미얀마를 구하라”(#SaveMyanmar) 등의 해시태그로 지지를 표했고, 2020년부터 이웃 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 네티즌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밀크티동맹”(#MilkTeaAlliance)이 국제적 온라인 연대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한국 사회도 전에 없는 뜨거운 관심으로 미얀마인들의 저항에 연대를 표했다. 한국 정부는 즉각 쿠데타를 규탄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촉구한 것은 물론 미얀마 군부와의 협력을 중단했다. 팬데믹 상황에서 시민단체와 학계가 조직한 온라인 토론이나 강연에 모여든 참석자의 수와 열의는 전에 없이 높았다. 국제 사안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대체로 무관심으로 반응해온 우리 사회에 찾아온 신선한 변화였다.
그중에서도 1980년 광주의 역사적 경험을 2021년 미얀마에서 쿠데타에 맞선 싸움과 연결해 아시아 민주주의의 연대로 확장하려는 움직임이 돋보였다. 한국전쟁을 겪은 당사자이면서도, 베트남전쟁 당시 베트남인들의 싸움에 공감할 수 없었던 과거에 비하면 엄청난 진전이기도 하다. 물론 그 사이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냉전은 오래 전에 끝났고, 한국은 이제 부자 나라가 되었다. 1965년 베트남전 파병 당시에는 1인당 GDP 100달러대의 세계 최빈국이었지만, 2016년 이후 3만 달러 이상으로 증가해,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가진 부국이 됐다. 단기간에 제3세계에서 제1세계 수준의 경제로 도약한 흔치 않은 사례이기도 하다. 눈부신 경제발전 뿐 아니라, 시민 저항을 통해 민주화를 이루고 비교적 안정적으로 민주주의를 유지해온 더 흔치 않은 사례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1980년 광주를 거치며 ‘구원자’ 미국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고, 뒤늦게야 ‘제3세계’를 ‘발견’하면서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게 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발전’ 서사에 대항하는 ‘민주화’ 서사도 확립되었다. 21세기 아시아 각국의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K팝이 울려 퍼지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아시아 청년들은 한국의 1980년대를 민주화의 선례로 학습한다. 그래서 민주화의 성지이자 아시아 민주주의의 중심지를 자처해온 광주와 미얀마의 저항을 연결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더 시의적절한 연대의 몸짓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 ‘연대’가 상상되고 작동하는 방식을 잘 들여다보면, 또 다른 인식의 공백이 드러난다. 특히 한국이 이룬 놀라운 경제적·정치적 성취가 오히려 진정한 연대를 가로막는 인식의 걸림돌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화 연구자 김희윤은 미얀마 쿠데타 직후 광주에서 열린 미얀마 민주화 투쟁 연대를 위한 미술 전시들을 살펴보면서 그 성과와 한계를 지적하는데,7) 그에 따르면 전시에 참여한 기획자와 예술가들의 선한 의도와는 별개로, 전시된 일부 작품은 광주의 “승리한” 투쟁을 미얀마가 따라야 할 모범으로 놓는다. 닮은 점이 있긴 하지만 동떨어진 두 역사적 시공간의 관계가 수직적이고 위계적으로 상상된 것이다. 달리 말해 미얀마 쿠데타를 둘러싼 구체적인 정치적·역사적 맥락에 대한 앎과 고려 없이, 광주(그리고 한국)의 민주화 경로가 마치 미얀마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될 수 있는 경로처럼 제시된다. 이런 일방적이고 시혜적인 관계에서 연대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입장의 동일함이 아니라 한쪽의 일방적인 우위에서 시작된 ‘연대’ 관계는 본질적으로 우열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바로 그 때문에 정확히 어떻게 공동의 목표를 이뤄낼지 상상하는 데 실패한다. 우위를 자처하는 쪽이 상대뿐 아니라 스스로의 어두움을 탐색하고 인정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팔레스타인 문학 연구자 오카 마리는 아무것도 모르던 자신이 팔레스타인을 통해 일본의 식민주의를 만나고, 조선 식민지와 재일조선인, 오키나와와 아이누 문제까지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8) 이처럼 타자를 아는 일은 그와 연루된 스스로의 어둠까지 파악하고 자신을 더 알아가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인은 우리가 받은 일제 식민지배의 피해를 늘 강조하면서도, 일본 점령을 겪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피해에 공감하는 데는 극도로 인색하다. 상당수의 조선인이 일본 제국의 질서 안에서 더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열망하며 점령에 동참했다는 사실도 망각된다. 피해자 한국의 특수성은 강조되지만, 비슷한 처지의 다른 피해자들에게서 보편성을 찾아내고 공감하기는 극도로 어렵다. 그러다 보니 다른 글로벌 남반구에 속한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20세기 중반부터 국민국가를 세우는 고단한 여정에 놓여 있다는 사실 또한 거의 완벽하게 망각된다. 잠시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재편된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분투했던 탈식민 세계의 맥락에 한국을 놓아 보자.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저마다 독립을 위한 여정을 시작했을 때, 그 앞에는 수없이 많은 경로가 있었다. 어느 쪽으로도 나아갈 수 있었고,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만들어질 수도 있었다. 누군가는 운이 좋았고 누군가는 그만큼 운이 좋지 못했다. 한국이 누리는 번영은 한국인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는 여러 우연 덕분이기도 하다. 특히 냉전 상황에서 지정학적·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누린 특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때론 베트남전쟁 파병처럼 다른 사회의 파괴를 거들고, 우리 내부의 구성원과 자연을 착취해서 얻은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먼저 빛나는 성과만큼이나 짙게 드리운 그림자를 돌아보고 세계의 폭력과 불평등에 우리가 어떻게 얽혀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을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성공 모델로 내세우며 과거의 부정한 행위는 무시하고 긍정적인 면만 내세우고 싶은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타자들의 고통을 들여다 볼 때다. 남을 위해서라기보다 우리 스스로가 출구 없는 고립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지난 7월의 태국-캄보디아 국경 분쟁, 9월의 인도네시아와 네팔 등 아시아 각국의 반정부 시위, 이어 국내에서 대서특필된 캄보디아 범죄단지의 충격적 실태 등은 별개인 것 같지만 그물처럼 서로 얽혀있다. 탈식민 국가들 중에서도 미얀마와 캄보디아가 자의 혹은 타의로 택한 경로는 가장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한 것이었다. 미얀마의 버마식 사회주의 독재는 이 나라를 50년 가까이 철저하게 고립시켰고,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 정권은 1970년대에 전체 인구의 4분의 1가량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온 나라를 죽음의 폐허로 만들었다. 쿠데타 이후 내전 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미얀마와 폐허를 재건하기 위해 아무 투자나 마구잡이로 받아들인 캄보디아 같은 허약한 국가의 치안이 미치지 못하는 국경지대에 초국적 스캠 범죄단지가 생긴 것은 필연에 가깝다. 이번 태국과 캄보디아 간의 분쟁은 표면적으로 보이듯 고대 사원의 영유권이 아니라 국경지대의 범죄단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 범죄단지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젊은이들을 유혹하는데, 그들이 쉽게 유혹에 빠진 까닭은 각국이 이룬 발전의 정도와 무관하게 탈식민 아시아 전체가 거의 비슷한 사회적 모순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 모순은 인도네시아와 네팔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Z세대를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든 것이기도 하다. 미얀마나 캄보디아만큼 파괴적이지는 않았지만, 이 나라들 또한 탈식민화 과정에서 전쟁만큼 끔찍한 폭력을 겪었고 기나긴 독재 끝에 큰 대가를 치르고 시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뤄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민주화는 이중의 배신이었다.
2025년 9월, 인도네시아에서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는 계기가 된 젊은 오토바이 배달 노동자 아판 쿠르니아완(Affan Kurniawan)의 비극적인 죽음은 그런 배신의 거의 완벽한 상징이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태어난 2004년은 인도네시아가 1998년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은 해였다. 그가 열 살이 되었을 때, ‘조코위’가 군부와 무관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자 많은 이들은 인도네시아가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10년 동안 인기 있는 대통령이었던 그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임기 말에는 자신의 아들을 군부 독재의 망령 같은 인물의 러닝메이트로 내세워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빈부 격차는 나날이 심해지는데,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주의 엘리트들도 과거 군부 엘리트와 마찬가지로 자식에게 부와 지위를 물려주느라 여념이 없고 그 자식들은 그런 특권을 SNS에 거리낌 없이 과시한다. 반면 대다수의 젊은이에게 플랫폼 노동자가 되는 것 말고는 먹고 살기 위한 선택지가 없다. 그런 젊은 노동자가 배달을 가다 시위를 진압하던 경찰 장갑차에 치어 죽는 일이 벌어지자 그간 쌓인 분노가 터져 나온 것이다. 종교가 다르고, 경제발전의 수준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탈식민 국가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민의를 대변하지 못해 쌓인 불만이라는 공통분모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은 역사의 같은 페이지에 놓여있음을 인식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우리와 세계가 연결된 방식과 층위를 성찰하며 타자에게 응답할 때, 공통의 문제에 답을 찾아 나서는 진정한 연대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에필로그-두 Charlie 사이에서
2015년 온라인을 휩쓸었던 “나는 샤를리다”(#jesuischarlie)는 꼭 십 년 후에 기묘한 방식으로 다시 돌아온다. 2025년 9월, 미국의 우파 활동가 찰리 커크가 연설 중 암살당하자 그의 지지자들이 “나는 찰리다”(I am Charlie)라고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둘러싸고 벌어진 정치적 폭력이라는 점만 본다면, 얼핏 두 ‘Charlie’는 닮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어제 당신이 샤를리였다면 오늘 찰리가 아닐 수 없다”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9) 하지만 실상 두 ‘Charlie’ 사이의 거리는 지난 10년 사이에 변화한 세계의 정치경제적 지형만큼이나 멀다. 《샤를리 엡도》가 인종차별, 극우, 종교적 근본주의를 조롱할 자유와 연대에 관한 것이었다면, 찰리 커크는 죽는 순간까지 인종차별, 극우, 기독교 근본주의적 발언을 할 자유를 옹호했기 때문이다. 더 기묘한 귀환은 서울의 한 우파 집회에 등장한 “우리는 찰리 커크다”(We are Charlie Kirk)라는 팻말이다. 비슷한 처지의 타자에게 공감하기를 그토록 어려워하는 이들이 최상의 연대를 표현한 대상이 우파 백인 남성 기독교 근본주의자와 그가 표상하는 가치라는 사실은 기이하지만 낯설지만은 않다. 닮은 처지의 타자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마비시키고, 강자에게 동일시하기는 한국 현대사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 일이기 때문이다.
박소현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 인도네시아어와 역사를, 싱가포르에서 동남아시아학을 공부했다.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데 관심이 많다. 『다양한 문화의 끝판왕, 동남아시아』를 쓰고, 『비동맹 독본』을 함께 엮고, 『대항해시대의 동남아시아』 『인도네시아 Etc.』 『자카르타가 온다』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2025년 가을 인도네시아의 시위를 둘러싼 ‘국제 연대’ 해프닝이었다. 태국의 한 엑스 사용자가 동남아시아에서 널리 쓰는 그랩Grab 앱을 이용해 시위대에 음식을 보내자고 연대하자고 제안했다. 이 메시지는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널리 퍼졌는데, 어느 시점에 인도네시아인은 무슬림인데 우리가 왜 도와야 하느냐 혹은 거지같이 구걸한다는 식의 모욕적인 인용 게시물이 다수 등장했다. 여기에 마음이 상한 인도네시아인들이 격하게 응수하면서 온라인 국제 연대로 시작한 일이 국제 혐오의 장이 되고 말았다. 이 일과 이어진 캄보디아 범죄단지를 둘러싼 거친 말들은 꽤 오랫동안 내 마음을 흔들었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작전계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이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가, 또 무엇보다 이 시점에 한국인이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런 질문에 답해보려 한 구멍 많은 이 글을 더 많은 대화로 채워나갈 수 있길 바란다.
2026/01/21
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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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muel Osborne, “Ankara bombing: Facebook post asking ‘You were Charlie, you were Paris. Will you be Ankara?’ is widely shared,” Independent, 2016-03-22.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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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쉴 음벰베, 『죽음 정치-증오의 정치에 관하여』, 김은주·강서진 옮김, 동녘, 2025, 201쪽.
- 3
- 장세진, 『슬픈 아시아: 한국 지식인들의 아시아 기행(1945~1966)』, 푸른역사, 2012.
- 4
- 한석정, 『만주 모던: 60년대 한국 개발 체제의 기원』, 문학과지성사, 2016.
- 5
- 권명아, 『역사적 파시즘: 제국의 판타지와 젠더 정치』, 책세상, 2005, 4부 「남방 종족지와 제국의 판타지」. 이 책은 절판되었다가 최근 『역사적 파시즘 체제의 인종주의와 젠더 정치: 젠더사로 보는 전시동원체제』(갈무리, 2025)라는 제목의 전면 개정증보판으로 출간되었다.
- 6
- 김주현, 『전쟁 자본주의의 시간』,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23, 63쪽.
- 7
- Hieyoon Kim, “Standing with Myanmar: The Limits and Possibilities of South Korean Art Activism,” Critical Times: Interventions in Global Critical Theory 7/3, 2024, pp. 377-401. 바로가기
- 8
- 오카 마리, 『가자란 무엇인가-팔레스타인 학살의 역사적 맥락과 집단학살의 본질』, 김상운 옮김, 두번째테제, 2024, 208쪽.
- 9
- Joseph Ataman, “10 years ago ‘I am Charlie’ was born. Now it means something very different,” CNN, 2025-09-27.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