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동그란 인사
도호는 오늘도 기차를 탔어.
빵집으로 가는 기차는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기차역에 도착해. 도호는 정해진 번호 앞에 서 있다가 하나, 둘, 셋, 네 걸음 만에 기차에 올라. 빵 만들기 수업을 들으러 갈 때마다 지키는 규칙이야.
기차가 출발하면 오른쪽 주머니에서 울트라 슈퍼 도넛을 꺼내. 지난봄 선물 받은 피규어는 진짜 도넛보다 훨씬 말랑말랑해. 조물조물 만지면 마음이 편안해져.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어. 사실 도호는 빵을 좋아하지 않아. 도호가 좋아하는 건 정해진 순서대로 차근차근 빵을 만드는 시간이야. 정해진 만큼의 재료를 넣고, 정해진 방식으로 반죽을 하고, 정해진 시간을 기다리면 빵이 완성돼.
하지만 빵 만들기 수업에서 도호와 짝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는 없어. 도호가 만든 빵을 먹겠다고 나서는 아이도 없어. 도호는 덩치만 크고 손재주가 없는 편이거든. 물론 이건 도호의 생각이 아니야. 남의 마음에 동그란 구멍이 뚫리는 줄도 모르고 멋대로 떠드는 사람들의 말이야. 연소미라면 절대 듣지 않을 소리지.
소미는 빵집에 들어올 때면 항상 “안녕!” 하고 큰 소리로 인사해. 소미 주변에는 항상 짝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있어. 어쩌다 짝이 맞지 않아서 혼자 반죽을 해야 하는 날에도 소미는 주눅이 드는 법이 없어.
연소미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오늘의 빵 이름 정하기’ 시간이야. 오른손을 번쩍 들고 “사르르 녹아 빵” “햇살이 노릇노릇 빵” “지구 끝까지 구불구불 빵”을 외치는 모습은 정말 멋있어. 오늘도 도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지.
차근차근 물건 챙기는 걸 좋아하는 도호는 가장 늦게 집에 갈 준비를 마쳤어. 실습실 밖으로 나오는데, 소미가 서 있었어.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지.
도호는 물어보고 싶었어.
‘비 오는 거 좋아해? 나는 별론데.’
아니, 이렇게 묻는 게 나을 것 같았어.
‘혹시 누구 기다려?’
아무 소리 못 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소미가 휙 뒤돌아봤어.
“어, 이도호네. 너도 비 좋아해?”
소미가 자기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도호는 깜짝 놀랐어. 어찌나 놀랐는지 고개를 두 번 끄덕였어. 비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이야.
도호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소미는 환하게 웃었어.
“나랑 똑같네? 나도 비가 좋아. 왜 그런지 설명할 순 없지만.”
어른스럽게 말하는 소미가 정말 멋있어서 도호는 바닥만 봤어.
그때 소미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어. 비가 와서 길이 많이 막힌다고, 혹시 기차역까지 올 수 있겠냐고. 소미는 도호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어. 그렇게 둘은 기차역까지 함께 걸어가게 되었어.
우산은 하나, 사람은 둘.
도호는 다른 사람과 우산을 나누어 쓰는 게 처음이야.
다른 사람과 발을 맞추어 걸어가는 것도 처음이야.
소미는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기도 하고, 물웅덩이에 첨벙첨벙 발을 담갔어. 도호도 웅덩이에 뛰어들어 발을 굴렀어. 평소보다 용감해진 기분이 들었지.
기차역 앞에서 엄마 차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소미가 물었어.
“근데 이도호, 넌 고민 있을 때 어떻게 해?”
도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오른쪽 주머니에서 울트라 슈퍼 도넛을 꺼내 보여줬어.
“와, 이게 네 고민 친구구나?”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지만 도호는 고개를 연이어 끄덕였어.
‘너도 고민 친구가 있어?’
이렇게 물어보고 싶은데, 소미가 고개를 푹 숙였어.
“사실은 말이야……”
도호는 소미의 이야기를 들었어.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해서 들었어.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열심히 들었어. 하지만 소미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도호는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어. 소미처럼 근사한 말을 하고 싶은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어.
결국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을 뱉고 말았지.
“아…… 진짜 고민되겠다.”
그 말에 소미의 얼굴이 환해졌어.
“정말? 진짜 그렇게 생각해?”
“응. 나라도 정말 고민될 것 같아.”
빵! 소미 엄마가 차의 클랙슨을 울렸어.
“이도호, 고마워! 덕분에 기분이 훨씬 나아졌어. 내일 봐!”
소미가 씩씩하게 인사를 하는데 도호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어. 그저 손만 흔들었어.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도호는 창밖을 바라봤어. 비가 그치고 서서히 하늘이 개고 있었어. 울트라 슈퍼 도넛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어. 도넛에 세로로 붙은 스프링클 두 개가 눈처럼 보이고, 동그란 구멍이 입처럼 보여.
도호는 처음으로 도넛에게 말을 걸었어.
‘네가 나의 고민 친구야?’
도넛이 대답했어.
‘네가 마음을 털어놓는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도호는 가만히 있었어.
도넛도 더이상 말이 없었어.
다음 날, 도호가 빵집에 들어서자 소미가 큰 소리로 인사를 했어.
“안녕, 이도호!”
모두에게 건네는 인사가 아니라 도호에게 하는 인사였어. 도호가 꾸벅 인사를 하자 소미 주변에 있던 아이들은 작은 물결처럼 인사를 했어. 안녕, 이도호. 안녕, 이도호. 안녕, 이도호.
당황한 도호가 뒤로 물러서다가 사물함에 부딪히자 소미가 입 모양으로 물었어.
‘괜찮아?’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도호는 자리에 앉았어. 빵 만드는 시간에도 자꾸만 소미와 눈이 마주쳤어. 그때마다 도호는 어색하게 눈을 피했지. ‘오늘의 빵 이름 정하기’ 시간이 되었어. 소미는 오른손을 번쩍 드는 대신, 뒤쪽을 돌아봤어. 그리고 도호를 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어.
‘너도 해 봐. 얼른.’
도호가 망설이자 소미는 보이지 않는 북을 두드리듯 양손을 움직였어. 그 모습을 보니 소미가 물웅덩이에 첨벙 발을 담그던 순간이 떠올랐어. 거침없는 소미, 용감한 소미. 소미 옆에 있으면 도호도 용기가 났어. 덕분에 처음으로 발표를 할 수 있었어.
“꾸륵꾸륵 빵……”
선생님은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고 물었지만 도호는 설명하지 못했어. 도호의 의견은 오늘의 빵 이름도 되지 못했어. 그래도 도호는 배시시 웃음이 났어. 소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눈을 피하지 않고 웃을 수 있었어.
도호는 빵집 가는 길이 더욱 즐거워졌어. 빵 이름을 발표하는 일도 몇 번 더 있었어. 한 번도 ‘오늘의 빵’ 이름으로 뽑히지는 못했지만, 도호가 만든 빵을 먹어보겠다는 아이들이 몇 명 생겼어. 도호는 그룹 수업도 신청했어. 소미가 같이 하면 좋겠다고 말했거든.
그룹 수업을 듣고 싶다고 말하자 엄마는 “우리 도호, 친구가 생겼나보네?”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어. 도호의 마음이 오븐 안에서 부풀어오르는 빵처럼 동그랗게 부풀어올랐어. 빵집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울트라 슈퍼 도넛을 손에 쥐고 있으면 도넛이 커다란 열기구처럼 부풀어 올라 도호를 태우고 날아가는 것 같았어. 발 아래로 보이는 세상은 조그맣고 평화로웠지.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그랬어.
그룹 수업을 마치고 뒷정리를 하는데, 보라가 말했어.
“소미가 다음주에 이사 간다니 너무 아쉬워. 이제 못 보는 거잖아.”
도호는 선 채로 굳어버렸어. 그런 줄도 모르고 보라는 화장실에 다녀온 소미에게 물었어.
“이번주 일요일 송별식에 도호도 와?”
소미가 도호를 쳐다봤어. 도호는 재빨리 눈을 피했어. 소미가 다가오자 실습실 뒷문으로 달려나갔어. 주먹을 꽉 쥐고 기차역까지 걸어갔어. 혹시라도 소미가 따라올까 봐, 자꾸만 뒤를 돌아봤어. 하지만 도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어. 찬 바람만 휘 불었지.
집으로 가는 기차가 도착했어. 열차 문이 열렸지만 도호는 꼼짝도 하지 않아. 누군가 도호의 어깨로 치고 지나가지 않았다면, 기차를 놓쳤을지도 몰라.
도호는 주머니에서 울트라 슈퍼 도넛을 꺼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대신 창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빤히 봤어.
‘왜 나한테는 말하지 않았을까?’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도호는 얼굴을 힘껏 구겼어.
‘그럴 만큼 친하지 않아서?‘
참았던 눈물이 터져나왔어. 울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눈물이 흘러.
우리 열차, 잠시 후 소근 역. 소근 역에 도착합니다. 잊으시는 물건이 없도록……
안내 방송을 들은 도호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양 손바닥으로 훔쳤어. 서둘러 일어나 출입구로 나가느라 울트라 슈퍼 도넛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도 몰랐어. 그런 줄도 모르고 도호는 집으로 향했어. 그제서야 알게 됐지. 자신의 고민 친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깜깜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지만 도호는 일어나고 싶지 않아.
처음으로 빵집에 가고 싶지 않아. 이불을 둘둘 말고 애벌레처럼 누워 있자 엄마가 물었어.
“우리 도호, 빵집에서 무슨 일 있었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도호는 그냥 평소처럼 굴기로 했어.
기차에서 내린 도호는 빵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어. 소미와 나란히 우산을 쓰고 걸었던 날과 달리, 오늘은 날씨가 아주 화창해. 먹구름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아. 첨벙첨벙 번갈아가며 발을 담갔던 물웅덩이도 사라지고 없어. 도호의 오른쪽 주머니도 텅 비었지.
도호가 빵집에 들어서자 소미가 한 걸음 다가왔어. 도호는 그대로 뒷걸음질쳤어. 소미가 한 걸음 더 다가오자 밀가루를 보관하는 창고로 들어가 문을 잠갔어. 창고 밖에서 누군가 쿵쿵쿵 문을 두드렸어. 도호의 심장도 쿵쿵쿵 뛰었어. 이 모든 게 자신이 덩치만 크고 손재주가 없고 둔해서 일어난 일 같았어.
‘다 내 잘못이야. 내 마음대로 친구가 됐다고 생각했어.’
누군가 창고 열쇠를 가져왔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어. 선생님은 도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어.
“선생님이랑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도호는 선생님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달려나갔어.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 다시는 빵집에 가지 않았어.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토요일이 되자 도호는 엄마와 함께 기차역으로 갔어.
분실물 보관함에서 울트라 슈퍼 도넛이 도호를 기다리고 있었어. 검은 때가 묻기는 했지만, 도호가 아끼는 울트라 슈퍼 도넛이 분명했어. 도호는 세면대에 미지근한 물을 받아 세제를 풀었어. 보글보글 거품이 솟았어. 그 속에 도넛을 넣고 조물조물 문질렀어.
‘다시는 못 만나는 줄 알았어.’
도넛의 말에 도호는 대꾸하지 않았어. 그저 부지런히 손만 움직였지.
‘너는 내가 없어도 괜찮아?’
도넛이 묻자 그제야 도호가 고개를 가로저었어. 거품 속에서 도넛을 꺼내 가만히 내려다봤어.
세로로 붙은 스프링클 두 개가 눈처럼 깜빡거렸어. 도호도 따라 눈을 깜빡거렸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도넛이 점점 커지더니 커다란 보트가 되었어.
도호는 도넛 보트를 타고 거품이 가득한 바다를 넘실넘실 건너갔어. 저기 반대편에서 도넛 보트를 타고 오는 사람이 보여. 누군지 확인하려고 도호는 눈을 가늘게 떴어. 소미일까, 아닐까.
거센 바람이 불어와 반대편 보트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자 도호는 안달이 났어. 이대로 멀어지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도호는 힘껏 소리쳤어.
“왜, 왜 말 안 했어!”
순간 보트가 멈춰 섰어. 이게 다가 아닌데, 꼭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목이 꽉 막혔어.
도호가 도넛 보트를 타고 출발점으로 돌아왔을 때, 거품은 사라지고 물은 식어 있었지.
일요일 아침, 도호는 처음으로 주말 기차를 탔어.
정해진 속도로 달리는 평일의 기차와 달리, 기차는 점점 속도가 느려졌어.
우리 열차, 앞서가는 열차와의 간격을 위해 잠시 천천히 달리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송별식이 끝나버리는 건 아닐까, 소미가 영영 가버리는 건 아닐까, 도호는 조바심이 났어. 그래도 다른 방법은 없어. 기다리는 수밖에.
도호는 울트라 슈퍼 도넛에게 물었어.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도넛이 대답했어.
‘넌 이미 잘하고 있어.’
빵집은 여느 때와 다르게 알록달록한 풍선으로 꾸며져 있어. 소미는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느라 도호가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해. 도호는 소미를 부르지 못하고 가만히 기다려. 열차가 천천히 달리는 동안 그랬던 것처럼.
드디어 소미가 도호를 발견했어. 소미의 두 눈이 커다래졌어.
“이도호!”
소미가 다가오자 도호가 바닥을 보며 물었어.
“안 가면 안 돼?”
그 말에 소미는 아무 말을 못 해. 우물쭈물하는 소미는 처음이야.
도호가 소미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물었어.
“또 만날 수 있어?”
이번에도 소미는 대답을 못 해. 참 이상한 일이지.
도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고개를 들었어. 소미를 똑바로 봤어.
“우리, 친구 맞아?”
그 말에 소미가 웃었어. 환하게 웃었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야.
도넛 보트를 타고 도호가 애타게 확인하려고 했던, 바로 그 얼굴이야.
소미가 도호의 손을 마주잡았어. 그리고 대답했어.
“당연하지.”
빵집으로 가는 기차는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기차역에 도착해. 도호는 정해진 번호 앞에 서 있다가 하나, 둘, 셋, 네 걸음 만에 기차에 올라. 빵 만들기 수업을 들으러 갈 때마다 지키는 규칙이야.
기차가 출발하면 오른쪽 주머니에서 울트라 슈퍼 도넛을 꺼내. 지난봄 선물 받은 피규어는 진짜 도넛보다 훨씬 말랑말랑해. 조물조물 만지면 마음이 편안해져.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어. 사실 도호는 빵을 좋아하지 않아. 도호가 좋아하는 건 정해진 순서대로 차근차근 빵을 만드는 시간이야. 정해진 만큼의 재료를 넣고, 정해진 방식으로 반죽을 하고, 정해진 시간을 기다리면 빵이 완성돼.
하지만 빵 만들기 수업에서 도호와 짝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는 없어. 도호가 만든 빵을 먹겠다고 나서는 아이도 없어. 도호는 덩치만 크고 손재주가 없는 편이거든. 물론 이건 도호의 생각이 아니야. 남의 마음에 동그란 구멍이 뚫리는 줄도 모르고 멋대로 떠드는 사람들의 말이야. 연소미라면 절대 듣지 않을 소리지.
소미는 빵집에 들어올 때면 항상 “안녕!” 하고 큰 소리로 인사해. 소미 주변에는 항상 짝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있어. 어쩌다 짝이 맞지 않아서 혼자 반죽을 해야 하는 날에도 소미는 주눅이 드는 법이 없어.
연소미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오늘의 빵 이름 정하기’ 시간이야. 오른손을 번쩍 들고 “사르르 녹아 빵” “햇살이 노릇노릇 빵” “지구 끝까지 구불구불 빵”을 외치는 모습은 정말 멋있어. 오늘도 도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지.
차근차근 물건 챙기는 걸 좋아하는 도호는 가장 늦게 집에 갈 준비를 마쳤어. 실습실 밖으로 나오는데, 소미가 서 있었어.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지.
도호는 물어보고 싶었어.
‘비 오는 거 좋아해? 나는 별론데.’
아니, 이렇게 묻는 게 나을 것 같았어.
‘혹시 누구 기다려?’
아무 소리 못 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소미가 휙 뒤돌아봤어.
“어, 이도호네. 너도 비 좋아해?”
소미가 자기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도호는 깜짝 놀랐어. 어찌나 놀랐는지 고개를 두 번 끄덕였어. 비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이야.
도호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소미는 환하게 웃었어.
“나랑 똑같네? 나도 비가 좋아. 왜 그런지 설명할 순 없지만.”
어른스럽게 말하는 소미가 정말 멋있어서 도호는 바닥만 봤어.
그때 소미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어. 비가 와서 길이 많이 막힌다고, 혹시 기차역까지 올 수 있겠냐고. 소미는 도호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어. 그렇게 둘은 기차역까지 함께 걸어가게 되었어.
우산은 하나, 사람은 둘.
도호는 다른 사람과 우산을 나누어 쓰는 게 처음이야.
다른 사람과 발을 맞추어 걸어가는 것도 처음이야.
소미는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기도 하고, 물웅덩이에 첨벙첨벙 발을 담갔어. 도호도 웅덩이에 뛰어들어 발을 굴렀어. 평소보다 용감해진 기분이 들었지.
기차역 앞에서 엄마 차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소미가 물었어.
“근데 이도호, 넌 고민 있을 때 어떻게 해?”
도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오른쪽 주머니에서 울트라 슈퍼 도넛을 꺼내 보여줬어.
“와, 이게 네 고민 친구구나?”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지만 도호는 고개를 연이어 끄덕였어.
‘너도 고민 친구가 있어?’
이렇게 물어보고 싶은데, 소미가 고개를 푹 숙였어.
“사실은 말이야……”
도호는 소미의 이야기를 들었어.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해서 들었어.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열심히 들었어. 하지만 소미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도호는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어. 소미처럼 근사한 말을 하고 싶은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어.
결국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을 뱉고 말았지.
“아…… 진짜 고민되겠다.”
그 말에 소미의 얼굴이 환해졌어.
“정말? 진짜 그렇게 생각해?”
“응. 나라도 정말 고민될 것 같아.”
빵! 소미 엄마가 차의 클랙슨을 울렸어.
“이도호, 고마워! 덕분에 기분이 훨씬 나아졌어. 내일 봐!”
소미가 씩씩하게 인사를 하는데 도호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어. 그저 손만 흔들었어.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도호는 창밖을 바라봤어. 비가 그치고 서서히 하늘이 개고 있었어. 울트라 슈퍼 도넛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어. 도넛에 세로로 붙은 스프링클 두 개가 눈처럼 보이고, 동그란 구멍이 입처럼 보여.
도호는 처음으로 도넛에게 말을 걸었어.
‘네가 나의 고민 친구야?’
도넛이 대답했어.
‘네가 마음을 털어놓는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도호는 가만히 있었어.
도넛도 더이상 말이 없었어.
다음 날, 도호가 빵집에 들어서자 소미가 큰 소리로 인사를 했어.
“안녕, 이도호!”
모두에게 건네는 인사가 아니라 도호에게 하는 인사였어. 도호가 꾸벅 인사를 하자 소미 주변에 있던 아이들은 작은 물결처럼 인사를 했어. 안녕, 이도호. 안녕, 이도호. 안녕, 이도호.
당황한 도호가 뒤로 물러서다가 사물함에 부딪히자 소미가 입 모양으로 물었어.
‘괜찮아?’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도호는 자리에 앉았어. 빵 만드는 시간에도 자꾸만 소미와 눈이 마주쳤어. 그때마다 도호는 어색하게 눈을 피했지. ‘오늘의 빵 이름 정하기’ 시간이 되었어. 소미는 오른손을 번쩍 드는 대신, 뒤쪽을 돌아봤어. 그리고 도호를 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어.
‘너도 해 봐. 얼른.’
도호가 망설이자 소미는 보이지 않는 북을 두드리듯 양손을 움직였어. 그 모습을 보니 소미가 물웅덩이에 첨벙 발을 담그던 순간이 떠올랐어. 거침없는 소미, 용감한 소미. 소미 옆에 있으면 도호도 용기가 났어. 덕분에 처음으로 발표를 할 수 있었어.
“꾸륵꾸륵 빵……”
선생님은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고 물었지만 도호는 설명하지 못했어. 도호의 의견은 오늘의 빵 이름도 되지 못했어. 그래도 도호는 배시시 웃음이 났어. 소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눈을 피하지 않고 웃을 수 있었어.
도호는 빵집 가는 길이 더욱 즐거워졌어. 빵 이름을 발표하는 일도 몇 번 더 있었어. 한 번도 ‘오늘의 빵’ 이름으로 뽑히지는 못했지만, 도호가 만든 빵을 먹어보겠다는 아이들이 몇 명 생겼어. 도호는 그룹 수업도 신청했어. 소미가 같이 하면 좋겠다고 말했거든.
그룹 수업을 듣고 싶다고 말하자 엄마는 “우리 도호, 친구가 생겼나보네?”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어. 도호의 마음이 오븐 안에서 부풀어오르는 빵처럼 동그랗게 부풀어올랐어. 빵집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울트라 슈퍼 도넛을 손에 쥐고 있으면 도넛이 커다란 열기구처럼 부풀어 올라 도호를 태우고 날아가는 것 같았어. 발 아래로 보이는 세상은 조그맣고 평화로웠지.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그랬어.
그룹 수업을 마치고 뒷정리를 하는데, 보라가 말했어.
“소미가 다음주에 이사 간다니 너무 아쉬워. 이제 못 보는 거잖아.”
도호는 선 채로 굳어버렸어. 그런 줄도 모르고 보라는 화장실에 다녀온 소미에게 물었어.
“이번주 일요일 송별식에 도호도 와?”
소미가 도호를 쳐다봤어. 도호는 재빨리 눈을 피했어. 소미가 다가오자 실습실 뒷문으로 달려나갔어. 주먹을 꽉 쥐고 기차역까지 걸어갔어. 혹시라도 소미가 따라올까 봐, 자꾸만 뒤를 돌아봤어. 하지만 도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어. 찬 바람만 휘 불었지.
집으로 가는 기차가 도착했어. 열차 문이 열렸지만 도호는 꼼짝도 하지 않아. 누군가 도호의 어깨로 치고 지나가지 않았다면, 기차를 놓쳤을지도 몰라.
도호는 주머니에서 울트라 슈퍼 도넛을 꺼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대신 창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빤히 봤어.
‘왜 나한테는 말하지 않았을까?’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도호는 얼굴을 힘껏 구겼어.
‘그럴 만큼 친하지 않아서?‘
참았던 눈물이 터져나왔어. 울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눈물이 흘러.
우리 열차, 잠시 후 소근 역. 소근 역에 도착합니다. 잊으시는 물건이 없도록……
안내 방송을 들은 도호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양 손바닥으로 훔쳤어. 서둘러 일어나 출입구로 나가느라 울트라 슈퍼 도넛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도 몰랐어. 그런 줄도 모르고 도호는 집으로 향했어. 그제서야 알게 됐지. 자신의 고민 친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깜깜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지만 도호는 일어나고 싶지 않아.
처음으로 빵집에 가고 싶지 않아. 이불을 둘둘 말고 애벌레처럼 누워 있자 엄마가 물었어.
“우리 도호, 빵집에서 무슨 일 있었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도호는 그냥 평소처럼 굴기로 했어.
기차에서 내린 도호는 빵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어. 소미와 나란히 우산을 쓰고 걸었던 날과 달리, 오늘은 날씨가 아주 화창해. 먹구름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아. 첨벙첨벙 번갈아가며 발을 담갔던 물웅덩이도 사라지고 없어. 도호의 오른쪽 주머니도 텅 비었지.
도호가 빵집에 들어서자 소미가 한 걸음 다가왔어. 도호는 그대로 뒷걸음질쳤어. 소미가 한 걸음 더 다가오자 밀가루를 보관하는 창고로 들어가 문을 잠갔어. 창고 밖에서 누군가 쿵쿵쿵 문을 두드렸어. 도호의 심장도 쿵쿵쿵 뛰었어. 이 모든 게 자신이 덩치만 크고 손재주가 없고 둔해서 일어난 일 같았어.
‘다 내 잘못이야. 내 마음대로 친구가 됐다고 생각했어.’
누군가 창고 열쇠를 가져왔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어. 선생님은 도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어.
“선생님이랑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도호는 선생님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달려나갔어.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 다시는 빵집에 가지 않았어.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토요일이 되자 도호는 엄마와 함께 기차역으로 갔어.
분실물 보관함에서 울트라 슈퍼 도넛이 도호를 기다리고 있었어. 검은 때가 묻기는 했지만, 도호가 아끼는 울트라 슈퍼 도넛이 분명했어. 도호는 세면대에 미지근한 물을 받아 세제를 풀었어. 보글보글 거품이 솟았어. 그 속에 도넛을 넣고 조물조물 문질렀어.
‘다시는 못 만나는 줄 알았어.’
도넛의 말에 도호는 대꾸하지 않았어. 그저 부지런히 손만 움직였지.
‘너는 내가 없어도 괜찮아?’
도넛이 묻자 그제야 도호가 고개를 가로저었어. 거품 속에서 도넛을 꺼내 가만히 내려다봤어.
세로로 붙은 스프링클 두 개가 눈처럼 깜빡거렸어. 도호도 따라 눈을 깜빡거렸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도넛이 점점 커지더니 커다란 보트가 되었어.
도호는 도넛 보트를 타고 거품이 가득한 바다를 넘실넘실 건너갔어. 저기 반대편에서 도넛 보트를 타고 오는 사람이 보여. 누군지 확인하려고 도호는 눈을 가늘게 떴어. 소미일까, 아닐까.
거센 바람이 불어와 반대편 보트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자 도호는 안달이 났어. 이대로 멀어지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도호는 힘껏 소리쳤어.
“왜, 왜 말 안 했어!”
순간 보트가 멈춰 섰어. 이게 다가 아닌데, 꼭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목이 꽉 막혔어.
도호가 도넛 보트를 타고 출발점으로 돌아왔을 때, 거품은 사라지고 물은 식어 있었지.
일요일 아침, 도호는 처음으로 주말 기차를 탔어.
정해진 속도로 달리는 평일의 기차와 달리, 기차는 점점 속도가 느려졌어.
우리 열차, 앞서가는 열차와의 간격을 위해 잠시 천천히 달리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송별식이 끝나버리는 건 아닐까, 소미가 영영 가버리는 건 아닐까, 도호는 조바심이 났어. 그래도 다른 방법은 없어. 기다리는 수밖에.
도호는 울트라 슈퍼 도넛에게 물었어.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도넛이 대답했어.
‘넌 이미 잘하고 있어.’
빵집은 여느 때와 다르게 알록달록한 풍선으로 꾸며져 있어. 소미는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느라 도호가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해. 도호는 소미를 부르지 못하고 가만히 기다려. 열차가 천천히 달리는 동안 그랬던 것처럼.
드디어 소미가 도호를 발견했어. 소미의 두 눈이 커다래졌어.
“이도호!”
소미가 다가오자 도호가 바닥을 보며 물었어.
“안 가면 안 돼?”
그 말에 소미는 아무 말을 못 해. 우물쭈물하는 소미는 처음이야.
도호가 소미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물었어.
“또 만날 수 있어?”
이번에도 소미는 대답을 못 해. 참 이상한 일이지.
도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고개를 들었어. 소미를 똑바로 봤어.
“우리, 친구 맞아?”
그 말에 소미가 웃었어. 환하게 웃었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야.
도넛 보트를 타고 도호가 애타게 확인하려고 했던, 바로 그 얼굴이야.
소미가 도호의 손을 마주잡았어. 그리고 대답했어.
“당연하지.”
위해준
장편 동화 『모두가 원하는 아이』 『만약에 우리 서로』, 그림책 『한 사람』을 썼고, 돌봄 소설집 『너의 오른발은 어디로 가니』에 참여했습니다.
관계 속에서 기대가 어긋나면 ‘여기가 끝이야’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칼 같은 마음이 나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어요.
여전히 그런 뾰족한 마음이 들 때가 있지만, 요즘은 조금 기다려봅니다. ‘여기가 끝이야’라거나 ‘다 소용 없어’라는 마음은, 슬프고 두렵기 때문에 터지는 비명이라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뭐든 잘라내고 싶은 날선 마음이 둥글어지면, 내가 외면한 자리로 다시 돌아가봅니다. 가끔 끝이라고 여겼던 자리에 새로운 시작이 돋아나기도 하더라고요.
어렵게 마주한 시작의 순간이 얼마나 견고하고, 얼마나 오래갈지는 알 수 없어요. 그래도 이런 환하고 동그란 순간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하며 「동그란 인사」를 썼습니다.
2026/03/18
7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