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몸은 네가 숨어 있기 가장 쉬운 장소였지. 그곳에는 커다란 장식장이 있었고 일정한 간격으로 플라스크들이 놓여 있었지. 플라스크의 보존액 속에 담겨 있던 것들을 너는 하나하나 들여다볼 수 있었어.

  실체보다 커 보이던 눈동자들, 퉁퉁 불어 있던 혼잣말들, 좀비가 되어버렸던 애인들, 이 푸른곰팡이는 뭐지? 내 심장인가? 플라스크에 담겨 있던 것들은 독성이 있었지. 너는 그것들을 잘 돌보려 노력했잖아. 정원의 연둣빛 열매들처럼. 너의 플라스크들이

  너인 것은 아니야. 네가 이제
  그러기로 하였으므로. 그보다 너는
  플라스크 바깥에 있는 것들. 너는

  장식장이 없는 반대편 빈 벽, 빈 벽 모서리에 뭉쳐 있는 체크 패턴의 무릎 담요, 그 담요 안에 쓸데없이 모여 있는 온기, 아니 그보다 더 너는 이 공간 바깥의 것들, 너는
  이름표가 붙어 있지 않은 유일한 사물함, 그곳에 아이들이 모아둔 분실물들, 장갑 한 짝과 줄넘기, 삼단 우산과 물고기밥, 아니 그보다 더 너는 경험 바깥의 것들, 너는
  네가 자다가 너도 모르게 움찔거린 순간, 꿈속에서 네가 끝 간 데 없이 걸은 눈길, 그때 네가 쥐고 있는 빈 주먹, 그때 네가 애타게 찾아다닌 빈집, 아니 그보다 더 너는 완전히 네 바깥의 것들, 너는
  갓 태어날 동물의 눈동자, 아직 초점이 잡히지 않을 빈 눈동자, 그 눈동자에 맺힐 물기, 어린 시절들이 섬광처럼 스쳐갈 때마다 눈꺼풀을 껌뻑이는 너는

  네가 보존하지 않은 것들. 네가
  겪지 않은 일들. 빈 공간의
  무한함. 너는 너의 몸
  바깥에 있어. 네가 기필코
  그러기로 했으므로. 너는

  너의 모르는 외부로 걸어나가고 있어. 너의 외부는 네가 가장 작아지는 장소일 테지. 너의 몸을 그곳에 둔 채로 너는 아주 먼 곳까지 갈 수도 있을 테지만 너는 그렇게 하지는 않을 테지.

  여기야.
  네 몸 바깥에서 너는 너에게 말을 걸어보는 중이야.
  너의 몸은 너의 몸을 일으킬 거야. 허공을 둘러볼 거야.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고

  거기도 눈이 와? 왜 말을 안 해줬어? 눈이 온다고?
  눈 오는 거 먼저 보는 사람이 말해주기.
  알았어. 너는 기억해두기 위해 따라 말하지. 눈 오는 거 먼저 보는 사람이 말해주기.

임솔아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겟패킹』, 단편소설 『엄마 몰래 피우는 담배』,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중편소설 『짐승처럼』, 장편소설 『최선의 삶』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 산문집 『다시, 뒷면에게』를 출간했다.

2026/03/04
7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