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모두의 가난
1. 그들에서 나로, 우리의 확장으로
지금껏 빈곤과 아동문학을 단독 주제로 삼은 적이 없다 생각했는데 이번에 문득 깨달았다. 아동문학 평론을 시작한 2000년부터 약 십 년 주기로 이 숙제가 나를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시작은 2000년 김중미의 『괭이부리말 아이들』(창비)이다. 내가 미처 몰랐을 뿐 바로 옆에 엄연히 존재하는 가난과 희망을 가감 없이 보고한 그 작품에 경외심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품었다. 함부로 가난을 아는 척하면 안 되겠구나. 모든 것이 그렇듯 가난 역시 ‘전문가’에게 묻고 배워야 한다. 그것만이 가난한 이들을 욕보이지 않으면서 우리(사실 나)를 천박함에서 구원하는 길이라 말했다.(「쓰레기로 메운 갯벌, 깡통과 떠나는 여행」, 《황해문화》 2001년 봄호) 지금 생각하면 당시 나는 ‘여기’ 있고 가난한 이들은 ‘저기’ 있다고 은연중 선을 그었던 것 같다. 물론 그것이 자만심이나 섣부른 동정심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경계했지만 2000년대 초 아직 부모님 슬하에 있었던 나는 적어도 먹고 사는 걱정과 떨어진 안전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십여 년 뒤 나와 ‘그들’의 경계선이 무너졌다. 실제로 공과금을 못 내거나 쌀통이 빈 것도 아니었는데 머릿속에 가난으로 고립된 나의 미래가 떠올라 가슴이 답답했다. 다행히 최악으로 치닫기 전 늪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 아동문학에도 비슷한 증세가 있었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어린이의 삶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리얼리즘은 자칫 작가 자신은 물론 어린이들에게 가난은 불행, 고립이라는 보이지 않는 무의식을 전파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권정생 문학의 현대적 의미를 찾아보라는 과제가 떨어져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1994)에서 처방전을 찾아보았다. 권정생은 불의로 가득한 지상에 전지전능한 하느님을 내려오게 하여 가난한 이들을 섬기게 하였다. 늙고 철없는 하느님과 젊은 노동자 아들 예수, 그들의 정체를 모르는 가난한 이웃들이 날마다 투닥거리며 정을 나누는 해학의 이야기에 지금 우리 리얼리즘 아동문학이 놓치고 있는 핵심이 있었다. 가난할수록 서로 기대고 함께 웃을 수 있다면 우리는 공포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는 우리 아동문학, 넓게는 한국문학 전반이 되찾아야 할 변혁의 의지였다.(「재미있는 권정생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창비어린이》 2012년 여름호)
그로부터 십여 년이 흐른 2026년 다시 가난을 생각해본다. 이번에는 ‘우리’라는 영역을 확장해보고 싶다. 우리가 ‘우리’라고 부를 때는 어디까지가 ‘우리’일까? 어쩌면 사람만, 서울과 수도권 대도시만, 한국만을 은연중 ‘우리’ 안에 넣지 않았을까? 사람이 제일 힘들어, 도시의 삶은 괴롭지만 벗어날 수 없어, 한국의 어린이들이 제일 불쌍해, 이렇게 말이다. 물론 그것도 맞다. 하지만 그 테두리 밖의 동물, 농촌, 곤경을 겪는 나라의 어린이는 어떠한가? 불행의 크기와 경중을 비교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래된 우화 중에는 천국과 지옥 모두 긴 숟가락만으로 식사를 해야 하는데 천국에서는 긴 숟가락으로 서로 밥을 떠먹여주고 지옥에서는 혼자만 먹으려다 모두 다 굶고 만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가 가진 숟가락의 길이는 어떠하고 과연 우리는 그것을 지혜롭게 사용하여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고맙게도 지금 한국 아동문학에는 자꾸 시야가 좁아지려는 우리의 눈꺼풀을 억지로라도 잡아 올려주는 이야기들이 있다. 가난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는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지만 문학에서 가난은 인간을 겸허한 출발선으로 되돌리는 귀중한 화두이다. 특히 동화에는 이 어려운 화두를 다루는 오랜 비결이 있다.
2. 동물의 모던 타임스1) ―안미란의 『그냥 씨의 동물 직업 상담소』
예전에는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동물들이 목을 축이고 산에는 산토끼가 깡충깡충 뛰어다닌다고 노래했다. 하지만 지금은 산에 사는 굶주린 동물이 마을에 내려오고 찻길을 건너다 자동차에 치인다. 우리나라는 아직이지만 해외에는 민가에 내려오는 곰이 인간을 위협한다는 뉴스가 흔하다. 도시의 새들은 어디서 자고 새끼를 품을까 궁금하다가도 우리집 에어컨 실외기 틈에 비둘기가 둥지를 틀면 골치가 썩는다. 사람이 동물의 터전을 넘보고 헤집어놨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선을 넘은 것은 사람인데 사람들은 동물이 선을 넘어왔다고 적반하장이다. 산과 들에서 자신들의 생태계를 꾸리던 동물들은 옛날 동화와 동요에 있을 뿐 이제는 인간이 주도하는 도시까지 밀려 들어온 동물들의 살림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안미란의 연작동화집 『그냥 씨의 동물 직업 상담소』(창비, 2023)는 도시 생태의 전문가 고양이가 동물들에게 직업과 부동산을 알선한다. 상담소에는 먹고사는 문제로 고충을 겪는 도시의 동물 이웃들이 방문한다. 반려견, 반려묘처럼 인간이 자식처럼 돌보는 동물이 아니라 인간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겨 어쩔 수 없이 도시로 이주한 성체, 또는 일가를 이룬 동물들이다. 도시는 이들에게 공짜로 먹을 것, 살 곳, 의료 서비스 따위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곰은 겨울잠을 자야 할 시기에 편의점과 냉동창고에서 일하고, 자판기 커피에 피로를 풀고, 김치찌개를 먹고 위염에 걸린다. 하지만 수의사는 반려동물과 가축이 아닌 노동자 동물은 자기 소관이 아니라며 곤란해한다. ‘사람인지 동물인지, 만약 동물이라면 그가 일을 하는지, 사랑받는지, 보호종인지, 유해종인지 따지지 않고 치료해주는 곳’(75쪽)이 이 도시에는 없다. 이쯤 되면 이들이 동물인지, 불법 체류 중인 이주민 노동자, 난민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과연 동화는 최첨단 특수효과 같은 것이 없어도 나와 너, 동물과 인간,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허무는 오랜 비법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도시의 동물들에게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우리 자신을 보고, 동시에 이들의 먹이와 살 곳을 빼앗은 가해자인 인간을 낯설게 인지한다. 어린이들은 동화와 동요에서 또래처럼 여겼던 동물들이 사실 자신의 부모 못지않게 힘겨운 생계 전선에 있는 것을 보고 적이 놀랄 것이다. 그리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일과 생활의 관계를 두렵지만은 않게, 그러나 본질은 왜곡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다. 우리는, 아니 어린이는 인간으로서 도시 생태계에 동물을 끌어들인 미안함과 책임감을 느끼고 같은 동물로서는 먹고산다는 것의 실존적 무게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현대 도시는 텃세를 부리는 인간과 먼먼 곳에서 온 인간, 집 안에 있는 의존적 동물과 집 밖의 독립적 동물, 힘들이지 않고 도시의 혜택을 누리는 이들의 허드렛일을 도맡거나 도시의 폐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인간과 동물이 뒤섞여 살아가는 거대한 생태계이다. 생태계의 구성원들은 구획이 나눠지고 교류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상호작용을 하고 그 형태를 변화시킨다. 비록 이 동화에서는 도시 생태계 아래쪽에 놓인 고달픈 동물들이 언제쯤 살림이 피고 두 다리 뻗고 지낼 수 있을까 아득하지만 미미하게나마 모순을 깨닫고 서로를 도울 수 있다면 그곳에 가느다란 희망의 빛이 있다. 후반부에는 이 동물들이 먹고 자고 아픈 일차원적인 삶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 종을 초월한 돌봄으로 한 발 나아간다. 교통사고로 어미를 잃은 새끼 너구리를 곰이 입양하고 고양이 상담사와 새 부부들은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이 또한 동물의 외견을 하고 있으나 고향 아닌 타지에서 뿌리내리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겹쳐 보인다.
이 연작동화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와 많이 닮았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의 나사를 돌리다 정신착란에 걸린 주인공 찰리는 걸인 소녀와 인연을 맺고 행복한 삶을 꾸리려 했다. 하나 온갖 일자리를 전전함에도 매번 사고를 치고 해고당해 둘은 다시 길바닥에 나앉는 신세가 되지만 울고 있는 소녀에게 찰리는 “기운 내요. 웃어요. 우린 해낼 수 있어요.”라며 격려한다. 처음에는 혼자였지만 이제는 둘이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으로 영화는 끝을 맺었다. 『그냥 씨의 동물 상담소』도 종(種)과 크기가 다른 동물들이 언덕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며 일터에서 얻은 냉동 생선을 나눠 먹는 뒷모습을 보여준다. 1936년 찰리 채플린의 시대와 닮은 듯하면서도 이제는 인간만이 아닌 동물들과도 연민과 연대를 함께 해야 한다는 인식의 확장은 그나마 인간이 아주 조금은 철이 들었다는 증거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도시 생태계의 동물들을 마냥 연민으로만 대하기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민가에 내려온 곰이 사람을 살상하고 정부가 총을 든 군인으로 맞서기에 이르렀다. 이는 마치 비인간적인 착취를 견디지 못한 이들이 봉기하는 프롤레타리아트 문학의 재현 같다.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모순과 폐해에 땜질 수정을 하며 간신히 버텨온 것이 현대의 자본주의라면, 거기에 더해 인간의 자연 착취가 한계점을 넘으면서 또다른 비극에 봉착한 것이다. 한국의 동화는 대개 동물을 피해자로 보고 연민의 시선을 거두지 않지만 자연은 선을 넘은 인간에게 무시무시한 반격을 가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대자연의 무서움을 알았던 일본의 동화 작가 미야자와 겐지는 「주문 많은 요리점」에서 정체 모를 존재가 사냥꾼을 유혹하여 스스로 옷을 벗게 하고 튀김옷을 바르게 하는 이야기를 남겼다. 우리 아동문학에도 그만큼 엄중한 문학적 경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야 하는 것은 인간이 선을 넘지 않는 것, 인간 본위가 아닌 동물의 생활고를 지구의 공생자로서 함께 나누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일 테다.
3. 큰 사람이 되려면 ―이금이의 『밤티 마을 마리네 집』
요즘은 서민(庶民)이라는 말을 예전처럼 잘 쓰지 않고 간혹 자신을 과하게 낮추거나 씁쓸히 자조(自嘲)할 때나 쓰곤 한다. 하지만 서민은 결코 낮춤말이 아니다. 국립국어원 사전에 서민은 ‘아무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 경제적으로는 중류 이하의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 되어 있다. 반대말은 아마 ‘기득권층’이 될 것이다. 서민은 중위소득 계층인 중산층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빈민 사이에서 가난하지만 자력으로 생활하는 계층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가급적 상류층이나 적어도 중산층이 되길 바라지만 사실 사회에서는 상류층, 중산층보다 서민층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인구의 가장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전체의 수로 따지면 가장 영향력이 크고(커야 한다!) 이들이 하는 일은 주로 고된 노동이지만 우리 사회의 근간을 지탱하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직접 물건을 만들고, 집을 짓고, 식량을 생산하고, 물류를 흐르게 하고, 환경을 깨끗하게 안전하게 만드는 일도 대부분 서민들이 한다. 서민의 행복도는 국가의 행복도로 이어지고 살기 좋은 복지 선진국일수록 중산층과 서민층의 삶의 수준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요즘은 출생의 비밀, 비비 꼰 가족 관계, 회장님 아들이 실장님 하는 공중파의 일일 저녁 드라마가 판을 치지만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농촌과 도시 서민의 애환을 그린 수작 드라마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금이의 ‘밤티 마을’ 연작의 첫권인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이 출간된 것이 1994년인데 같은 해 명작 서민드라마 〈서울의 달〉(정운경 극본)이 방영되었으니 그즈음은 문학과 드라마 서사에서 서민의 존재감이 가장 정점을 찍었던 시기였다. 리얼리즘 이론을 댈 것도 없이 건강하고 당당했던 서민의 존재는 지금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이금이의 ‘밤티 마을’ 연작은 1994년부터 2025년에 이르는 삼십 년 동안 드문드문 안부를 전해오는 농촌 가족의 이야기다. 원래 작가는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1994) 한 편으로 끝내려 했지만 그 가족의 뒷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독자들 때문에 육 년 뒤 큰돌이의 여동생 영미, 오 년 뒤에는 배다른 동생 봄이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첫권이 나온 지 삼십 년이 되는 2025년에는 또다른 가족 마리네로 밤티 마을의 이야기를 이어간다.(『밤티 마을 마리네 집』, 밤티, 2024) 삼십 년 동안 농촌의 이 가족은 안팎에서 큰 변화를 겪어왔다. 가난으로 아내가 집을 나가고 술독에 빠져 자식들 건사도 못하던 아버지는 고전소설의 박씨 부인 같은 새 아내를 얻어 삶의 용기를 얻고, 장남 큰돌이(대석이)는 새엄마 덕에 집안 형편이 나아지면서 행복과 희망을 실감한다. 어른들 때문에 초년 삶이 이리저리 휘둘렸던 영미는 좀 까칠하지만 그만큼 속 깊은 어른이 되었다. 성인이 된 큰돌이와 영미는 이제 농촌, 시골이 아닌 도시에 나와 살고 고향에는 이제 노인이 된 아버지와 새엄마인 팥쥐 엄마, 간호사가 된 이복동생 봄이가 남아 있다. 농촌에서 나고 자란 어린이가 성인이 된 뒤 직장, 또는 하고픈 일을 찾아 도시로 이주하는 것은 삼십 년 동안 우리나라의 변화상을 반영한다. 주인공인 큰돌이와 영미 남매가 이미 성인, 그것도 도시 사람이 되었는데 농촌소설인 밤티 마을 이야기가 더 이어질 수 있을까, 설령 억지로 이어간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그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영미의 이웃인 네팔 이주민 자녀 마리다.
마리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다세대 주택 옥상에 텃밭을 일구는 어린 농사꾼의 자질을 가졌다. 옥탑방 세입자로 들어온 영미 아줌마의 눈초리가 편치 않음에도 식물들 목이 마를까봐 물병을 매고 옥상을 오르내리며 정성을 쏟는다. 이런 마리를 지켜보던 영미도 조금씩 곁을 내주며 ‘이모’로 호칭이 바뀌고 여름방학에 마리를 자신의 고향 밤티 마을에 초대한다. 도시에서는 물에 떨어진 기름방울처럼 겉도는 것만 같았던 마리는 밤티 마을 어른들의 환대를 흠뻑 받고 그곳에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품는다. 네팔에서 힘들게 한국에 온 마리 엄마는 ‘사람은 큰 데서 많은 걸 보고 살아야 성공할 수 있다’며 반대하지만 결국 그도 밤티 마을의 환대를 경험한 뒤 딸의 진심을 이해하고 농촌에 이주하기로 결심한다. 농촌에 한국 사람은 노인밖에 없고 외국인 이주민과 2세들만 늘어난다며 말로만 걱정하는 사람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본질도 미래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작가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희망의 단초를 잡아낸다. 소중한 먹을거리를 정성껏 일구는 농사가 무엇인지 체득한 마리야말로 우리 농촌을 이어받을 후계자라 선언하는 것이다. 자식이 둘이나 딸린 농촌의 홀아비에게 시집온 얽은 얼굴의 팥쥐 엄마가 착한 심성과 근면함으로 훌륭히 가정을 일구었던 것처럼, 이국에서 홀씨처럼 날아온 마리네가 농촌에 뿌리내리는 것만큼 훌륭한 바통 터치가 없다. 밤티 마을은 기쁘게 마리네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을 내어주고 새로운 마을 구성원,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마리에게 밤티 마을이 필요하고 밤티 마을은 마리네가 필요하다. 폐교 위기와 일손 부족이 심각한 밤티 마을에서 마리네는 당당한 구성원이 되고 거기에 국적은 어떠한 걸림돌도 되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혼자서는 구멍을 메우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삶의 공동체라는 퍼즐을 맞춰가는, 단지 이상적인 꿈이 아닌 실현 가능한 희망이 된다.
도시는 마이더스의 손처럼 만지는 것마다 금으로 변하지만 정작 먹어야 할 것마저 금으로 바꿔 꼼짝없이 굶어 죽는 신세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시대에 농촌에서 자신의 미래를 발견하고, 부모에게 떠밀리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손을 끌고 미래로 나아가는 마리에게 우리 사회의 앞날도 맡기고 싶어진다. 미안하지만 적어도 아동문학에서라면 도시에서 밤늦게 학원에 다니며 의대 입시에 매몰된 어린이와 그 부모에게 우리의 미래를 의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마리 엄마는 ‘큰 사람이 되려면 도시에서 많은 것을 보고 자라야 한다’고 했지만 필시 밤티 마을은 마리를 더 큰 사람으로 키울 것이다. 기득권층으로 나 혼자 올라가는 출세가 아니라 땅에 깊게 뿌리내리는 큰 사람으로 말이다. 그런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점점 더 늘어나 서로 사랑하고 가족을 꾸리고, 우리 사회의 굵은 뿌리와 몸통을 이루길 바란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서민층은 단일한 우중충한 색이 아니라 다채로운 무지개색으로 두텁게 되살아날 것이다.
4. 멀어도 가까이 ―정승진의 『아말과 사마』
미국의 젊은이 중에는 캐나다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이가 적지 않다고 한다. 자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면 굳이 다른 나라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무시하기 십상이다. 짧은 기간 동안 경제력과 문화력이 막강해진 한국도 이제는 자국중심주의를 경계해야 할 때가 되었다. 70년대생인 나만 해도 늘 외국을 궁금해했지만 잘사는 선진국에 대한 동경심만큼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 공감도 그 못지않았다. 정보가 귀한 시절이라 신문, 잡지, 동화, 만화 영화 등에서 얻은 이미지를 누덕누덕 기워 상상하는 것이었지만 그래서 내 마음대로, 더 가까이 지구 반대편 사람들을 친구와 이웃처럼 여겼다. 하나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정보가 넘쳐나고 해외와 접면이 넓어진 지금은 도리어 마음이 통하는 문이 더 좁아진 듯하다. 여전히 뉴스는 지구 어딘가의 총성과 재해, 극빈을 전달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무감정하게 보아 넘기거나 페이지를 바꿔 자기를 즐겁게 해주는 곳으로 넘어간다. 깨인 사람들은 제발 세계 시민으로서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강자들이 초래한 위기와 모순을 설파하려 애쓰지만 이내 세상의 소음에 묻혀버린다. 이럴수록 어린이의 마음을 포기할 수 없다. 문학이 잘할 수 있는 것, 꼭 해야 하는 것은 정보 조각으로 떠내려가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 닻을 내리는 것이다. 기성세대들은 어릴 때 본 〈엄마 찾아 삼만리〉(다카하타 이사오 감독, 지브리 스튜디오 제작)을 기억할 것이다.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한국 어린이들은 가난한 소년 마르코가 배를 타고 대륙을 건너 천신만고 끝에 엄마를 찾는 여정을 날마다 눈물바람으로 응원했다. 지금 봐도 코끝이 찡해지는 명작이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비행기도 인터넷도 없던 거의 반세기 전 추억의 산물이고 자신의 시대에 맞는 소임을 넘치게 해냈다. 더도 덜도 말고 「엄마 찾아 삼만리」처럼 국경의 벽이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같이 애태우며 울다 웃을 수 있는 이야기가 지금이야말로 절실하다.
정승진의 『아말과 사마』(이지북, 2025)은 그에 대한 해답을 하나 보여준다. 난민 소녀 사마는 난리통에 부모를 모두 잃고 그에게 남은 가족은 아기 때부터 함께한 고양이 아말뿐이다. 한국에도 반려동물을 가족이라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마에게는 그 존재가 비교할 수 없이 눈물겹다. 목숨 같은 물 한 병도 나눠 마시며 간신히 난민 캠프에 들어왔지만 동물은 방역을 거쳐야 하기에 둘은 잠시 떨어진다. 그런데 난민이 데려온 고양이를 기삿거리로 노린 기자의 훼방으로 아말은 캠프를 뛰쳐나간다. 기자는 난민의 고양이가 병을 퍼뜨릴 거라는 기사를 쓰고, 난민 소녀가 자유로운 삶을 앞두고 자신의 고양이를 버릴 것이라는 잔인한 시나리오를 짠다. 유일한 가족을 잃은 사마는 좌절하지만 난민 캠프 친구들과 힘을 모아 아말과 다시 만날 길을 찾는다. 흉악범 손에서는 흉기가 되고 요리사 손에서는 도구가 되는 칼처럼, 거짓 뉴스를 퍼뜨리는 미디어는 난민 어린이가 자신의 처지를 직접 세상에 호소하는 창구가 된다. 한편 항구 마을에 들어간 고양이 아말도 텃세를 당하지만 그 또한 용기와 지혜를 총동원해 유일한 가족인 사마를 찾는다. 애타는 우여곡절 끝에 재회한 둘은 더이상 헤어지지 않고 함께 안전한 나라에 정착하고 난민 캠프의 친구들도 각자 외국에서, 캠프에서 미래를 준비하며 자신들의 미래를 찾아간다.
한국 작가가 썼지만 무대는 유럽 어딘가의 난민 캠프와 항구 마을이고 한국인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전문가가 본다면 사실성이 떨어진다 지적할 수 있지만 그 점은 도리어 한국의 어린이가 지구 반대편 난민 어린이에게 가까이 다가서게 한다. 난민 문제에 밝은 당사자나 외국 작가가 쓴 작품을 번역했다면 낯가림이 있는 독자는 아예 거들떠보지 않았을 테고, 한국 작가가 썼더라도 책과 취재에서 얻은 정보 전하기에 치중했다면 이만큼 흥미진진함과 감동은 없었을 것이다. 난민 고아가 유일한 가족인 고양이와 헤어진다. 둘을 갈라놓은 악당은 인종차별과 혐오에 기생하는 거짓말쟁이 기자다. 주인공은 곤경에 처하지만 정의롭고 선한 친구와 이웃의 도움을 받아 결국 재회하고 행복을 찾는다. 현실에 기반을 두면서도 단순명료한 스토리와 메시지를 밀고 나가는 『아말과 사마』는 모처럼 직관적인 재미와 감동, 동시대성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리얼리즘 장편 아동소설이 되었다. 한국에도 가난과 폭력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들이 많은데 지구 반대편 난민 소녀는 남의 다리 긁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까? 큰 고통을 겪는 분쟁지역 어린이에 비하면 한국 어린이는 복 받았다는 식의 그릇된 선민의식, 교만은 더더욱 말도 안 된다. 십중팔구 한국의 어린이들은 나와 닮은, 어쩌면 나였을 수도 있는 지구 반대편 또래 친구의 간절함에 공감하고 그의 용기와 행동을 진심으로 응원할 것이다. 고통과 좌절에 찌든 난민촌, 아프리카 극빈국 아이들의 사진은 연민을 자아내지만 공감보다 이질감을 강화하는 부작용도 있다. 그들도 우리처럼 틈만 나면 공을 차며 놀고 어떻게든 컴퓨터와 인터넷을 하며 21세기 지구 위에 살아간다는 실감이 필요하다. 그 실감과 공감이 있어야 아이들은 이 세상의 난제를 함께 배우고 푸는 커다란 교실의 일원이 된다.
실천윤리학자인 피터 싱어는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출근길 늘 지나가는 연못에 어린아이가 빠져 허우적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연못이 깊지 않다는 걸 알고 있고 물에 들어가 아이를 구하는 건 어렵지도, 위험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러면 새 신발이 더러워지고 양복이 젖고 진흙투성이가 될 테고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가면 직장에 지각할 것이다. 그래도 아이를 구하겠는가? 학생 대부분은 신발, 옷, 지각 따위가 생명과 비교될 수 없으니 아이를 구하겠다고 했다.2) 이 질문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와, 분쟁과 질병, 극빈으로 수많은 생명이 버려지는 나라를 비유한 것이다. 아말과 사마가 정착한 독일처럼 한국도 전 세계 난민이 안전과 자유를 찾으러 오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아말과 사마를 진심으로 응원한 마음이 한국 어린이들 마음에 잠들어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깨울 수 있을까? 그 사마리아인을 깨워야만 우리는 비로소 진정 가난으로부터 해방되는 길 위에 서게 될 것이다.
5. 가난은 미래다
부의 양극화, 고령화 사회, AI와 로봇이 빼앗을지도 모르는 일자리 걱정을 하는 뉴스에 매몰되면 가난에 대한 공포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한국만 해도 지금의 어린이와 젊은이들은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세대가 될 거라는 저주 같은 예상에 좌절하거나 분통을 터뜨릴 때가 많다. 이를 틈타 젠더 갈등, 세대 갈등, 이민자와 난민 혐오, 온갖 갈등과 혐오를 부추기는 거짓과 이간질도 난무한다. 하지만 이 혼란은 동굴에 갇힌 우리가 일렁이는 그림자를 보고 겁에 질린 것일 수 있다. 그림자는 실체를 어느 정도 반영하지만 그것은 모든 진실이 아니고 당장 우리를 죽이지 못한다. 세상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우리는 그 변화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동시에 상호작용하며 변화를 만들어내는 주체이기도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라고 영원하지 않고 그 끝이 있고 그 너머가 있다. 그 너머에서 인간이, 나아가 지구 전체가 더 행복과 해방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가난에 중요한 해법이 숨어 있다. 그렇기에 아동문학은 가난을 우리 모두의 것으로 소중히 다루며 그로부터 싹틔우고 자라날 큰 나무의 이야기를 온 힘을 다해 보여줄 임무가 있는 것이다.
지금껏 빈곤과 아동문학을 단독 주제로 삼은 적이 없다 생각했는데 이번에 문득 깨달았다. 아동문학 평론을 시작한 2000년부터 약 십 년 주기로 이 숙제가 나를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시작은 2000년 김중미의 『괭이부리말 아이들』(창비)이다. 내가 미처 몰랐을 뿐 바로 옆에 엄연히 존재하는 가난과 희망을 가감 없이 보고한 그 작품에 경외심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품었다. 함부로 가난을 아는 척하면 안 되겠구나. 모든 것이 그렇듯 가난 역시 ‘전문가’에게 묻고 배워야 한다. 그것만이 가난한 이들을 욕보이지 않으면서 우리(사실 나)를 천박함에서 구원하는 길이라 말했다.(「쓰레기로 메운 갯벌, 깡통과 떠나는 여행」, 《황해문화》 2001년 봄호) 지금 생각하면 당시 나는 ‘여기’ 있고 가난한 이들은 ‘저기’ 있다고 은연중 선을 그었던 것 같다. 물론 그것이 자만심이나 섣부른 동정심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경계했지만 2000년대 초 아직 부모님 슬하에 있었던 나는 적어도 먹고 사는 걱정과 떨어진 안전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십여 년 뒤 나와 ‘그들’의 경계선이 무너졌다. 실제로 공과금을 못 내거나 쌀통이 빈 것도 아니었는데 머릿속에 가난으로 고립된 나의 미래가 떠올라 가슴이 답답했다. 다행히 최악으로 치닫기 전 늪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 아동문학에도 비슷한 증세가 있었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어린이의 삶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리얼리즘은 자칫 작가 자신은 물론 어린이들에게 가난은 불행, 고립이라는 보이지 않는 무의식을 전파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권정생 문학의 현대적 의미를 찾아보라는 과제가 떨어져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1994)에서 처방전을 찾아보았다. 권정생은 불의로 가득한 지상에 전지전능한 하느님을 내려오게 하여 가난한 이들을 섬기게 하였다. 늙고 철없는 하느님과 젊은 노동자 아들 예수, 그들의 정체를 모르는 가난한 이웃들이 날마다 투닥거리며 정을 나누는 해학의 이야기에 지금 우리 리얼리즘 아동문학이 놓치고 있는 핵심이 있었다. 가난할수록 서로 기대고 함께 웃을 수 있다면 우리는 공포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는 우리 아동문학, 넓게는 한국문학 전반이 되찾아야 할 변혁의 의지였다.(「재미있는 권정생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창비어린이》 2012년 여름호)
그로부터 십여 년이 흐른 2026년 다시 가난을 생각해본다. 이번에는 ‘우리’라는 영역을 확장해보고 싶다. 우리가 ‘우리’라고 부를 때는 어디까지가 ‘우리’일까? 어쩌면 사람만, 서울과 수도권 대도시만, 한국만을 은연중 ‘우리’ 안에 넣지 않았을까? 사람이 제일 힘들어, 도시의 삶은 괴롭지만 벗어날 수 없어, 한국의 어린이들이 제일 불쌍해, 이렇게 말이다. 물론 그것도 맞다. 하지만 그 테두리 밖의 동물, 농촌, 곤경을 겪는 나라의 어린이는 어떠한가? 불행의 크기와 경중을 비교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래된 우화 중에는 천국과 지옥 모두 긴 숟가락만으로 식사를 해야 하는데 천국에서는 긴 숟가락으로 서로 밥을 떠먹여주고 지옥에서는 혼자만 먹으려다 모두 다 굶고 만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가 가진 숟가락의 길이는 어떠하고 과연 우리는 그것을 지혜롭게 사용하여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고맙게도 지금 한국 아동문학에는 자꾸 시야가 좁아지려는 우리의 눈꺼풀을 억지로라도 잡아 올려주는 이야기들이 있다. 가난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는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지만 문학에서 가난은 인간을 겸허한 출발선으로 되돌리는 귀중한 화두이다. 특히 동화에는 이 어려운 화두를 다루는 오랜 비결이 있다.
2. 동물의 모던 타임스1) ―안미란의 『그냥 씨의 동물 직업 상담소』
예전에는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동물들이 목을 축이고 산에는 산토끼가 깡충깡충 뛰어다닌다고 노래했다. 하지만 지금은 산에 사는 굶주린 동물이 마을에 내려오고 찻길을 건너다 자동차에 치인다. 우리나라는 아직이지만 해외에는 민가에 내려오는 곰이 인간을 위협한다는 뉴스가 흔하다. 도시의 새들은 어디서 자고 새끼를 품을까 궁금하다가도 우리집 에어컨 실외기 틈에 비둘기가 둥지를 틀면 골치가 썩는다. 사람이 동물의 터전을 넘보고 헤집어놨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선을 넘은 것은 사람인데 사람들은 동물이 선을 넘어왔다고 적반하장이다. 산과 들에서 자신들의 생태계를 꾸리던 동물들은 옛날 동화와 동요에 있을 뿐 이제는 인간이 주도하는 도시까지 밀려 들어온 동물들의 살림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안미란의 연작동화집 『그냥 씨의 동물 직업 상담소』(창비, 2023)는 도시 생태의 전문가 고양이가 동물들에게 직업과 부동산을 알선한다. 상담소에는 먹고사는 문제로 고충을 겪는 도시의 동물 이웃들이 방문한다. 반려견, 반려묘처럼 인간이 자식처럼 돌보는 동물이 아니라 인간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겨 어쩔 수 없이 도시로 이주한 성체, 또는 일가를 이룬 동물들이다. 도시는 이들에게 공짜로 먹을 것, 살 곳, 의료 서비스 따위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곰은 겨울잠을 자야 할 시기에 편의점과 냉동창고에서 일하고, 자판기 커피에 피로를 풀고, 김치찌개를 먹고 위염에 걸린다. 하지만 수의사는 반려동물과 가축이 아닌 노동자 동물은 자기 소관이 아니라며 곤란해한다. ‘사람인지 동물인지, 만약 동물이라면 그가 일을 하는지, 사랑받는지, 보호종인지, 유해종인지 따지지 않고 치료해주는 곳’(75쪽)이 이 도시에는 없다. 이쯤 되면 이들이 동물인지, 불법 체류 중인 이주민 노동자, 난민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과연 동화는 최첨단 특수효과 같은 것이 없어도 나와 너, 동물과 인간,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허무는 오랜 비법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도시의 동물들에게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우리 자신을 보고, 동시에 이들의 먹이와 살 곳을 빼앗은 가해자인 인간을 낯설게 인지한다. 어린이들은 동화와 동요에서 또래처럼 여겼던 동물들이 사실 자신의 부모 못지않게 힘겨운 생계 전선에 있는 것을 보고 적이 놀랄 것이다. 그리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일과 생활의 관계를 두렵지만은 않게, 그러나 본질은 왜곡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다. 우리는, 아니 어린이는 인간으로서 도시 생태계에 동물을 끌어들인 미안함과 책임감을 느끼고 같은 동물로서는 먹고산다는 것의 실존적 무게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현대 도시는 텃세를 부리는 인간과 먼먼 곳에서 온 인간, 집 안에 있는 의존적 동물과 집 밖의 독립적 동물, 힘들이지 않고 도시의 혜택을 누리는 이들의 허드렛일을 도맡거나 도시의 폐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인간과 동물이 뒤섞여 살아가는 거대한 생태계이다. 생태계의 구성원들은 구획이 나눠지고 교류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상호작용을 하고 그 형태를 변화시킨다. 비록 이 동화에서는 도시 생태계 아래쪽에 놓인 고달픈 동물들이 언제쯤 살림이 피고 두 다리 뻗고 지낼 수 있을까 아득하지만 미미하게나마 모순을 깨닫고 서로를 도울 수 있다면 그곳에 가느다란 희망의 빛이 있다. 후반부에는 이 동물들이 먹고 자고 아픈 일차원적인 삶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 종을 초월한 돌봄으로 한 발 나아간다. 교통사고로 어미를 잃은 새끼 너구리를 곰이 입양하고 고양이 상담사와 새 부부들은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이 또한 동물의 외견을 하고 있으나 고향 아닌 타지에서 뿌리내리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겹쳐 보인다.
이 연작동화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와 많이 닮았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의 나사를 돌리다 정신착란에 걸린 주인공 찰리는 걸인 소녀와 인연을 맺고 행복한 삶을 꾸리려 했다. 하나 온갖 일자리를 전전함에도 매번 사고를 치고 해고당해 둘은 다시 길바닥에 나앉는 신세가 되지만 울고 있는 소녀에게 찰리는 “기운 내요. 웃어요. 우린 해낼 수 있어요.”라며 격려한다. 처음에는 혼자였지만 이제는 둘이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으로 영화는 끝을 맺었다. 『그냥 씨의 동물 상담소』도 종(種)과 크기가 다른 동물들이 언덕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며 일터에서 얻은 냉동 생선을 나눠 먹는 뒷모습을 보여준다. 1936년 찰리 채플린의 시대와 닮은 듯하면서도 이제는 인간만이 아닌 동물들과도 연민과 연대를 함께 해야 한다는 인식의 확장은 그나마 인간이 아주 조금은 철이 들었다는 증거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도시 생태계의 동물들을 마냥 연민으로만 대하기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민가에 내려온 곰이 사람을 살상하고 정부가 총을 든 군인으로 맞서기에 이르렀다. 이는 마치 비인간적인 착취를 견디지 못한 이들이 봉기하는 프롤레타리아트 문학의 재현 같다.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모순과 폐해에 땜질 수정을 하며 간신히 버텨온 것이 현대의 자본주의라면, 거기에 더해 인간의 자연 착취가 한계점을 넘으면서 또다른 비극에 봉착한 것이다. 한국의 동화는 대개 동물을 피해자로 보고 연민의 시선을 거두지 않지만 자연은 선을 넘은 인간에게 무시무시한 반격을 가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대자연의 무서움을 알았던 일본의 동화 작가 미야자와 겐지는 「주문 많은 요리점」에서 정체 모를 존재가 사냥꾼을 유혹하여 스스로 옷을 벗게 하고 튀김옷을 바르게 하는 이야기를 남겼다. 우리 아동문학에도 그만큼 엄중한 문학적 경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야 하는 것은 인간이 선을 넘지 않는 것, 인간 본위가 아닌 동물의 생활고를 지구의 공생자로서 함께 나누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일 테다.
3. 큰 사람이 되려면 ―이금이의 『밤티 마을 마리네 집』
요즘은 서민(庶民)이라는 말을 예전처럼 잘 쓰지 않고 간혹 자신을 과하게 낮추거나 씁쓸히 자조(自嘲)할 때나 쓰곤 한다. 하지만 서민은 결코 낮춤말이 아니다. 국립국어원 사전에 서민은 ‘아무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 경제적으로는 중류 이하의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 되어 있다. 반대말은 아마 ‘기득권층’이 될 것이다. 서민은 중위소득 계층인 중산층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빈민 사이에서 가난하지만 자력으로 생활하는 계층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가급적 상류층이나 적어도 중산층이 되길 바라지만 사실 사회에서는 상류층, 중산층보다 서민층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인구의 가장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전체의 수로 따지면 가장 영향력이 크고(커야 한다!) 이들이 하는 일은 주로 고된 노동이지만 우리 사회의 근간을 지탱하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직접 물건을 만들고, 집을 짓고, 식량을 생산하고, 물류를 흐르게 하고, 환경을 깨끗하게 안전하게 만드는 일도 대부분 서민들이 한다. 서민의 행복도는 국가의 행복도로 이어지고 살기 좋은 복지 선진국일수록 중산층과 서민층의 삶의 수준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요즘은 출생의 비밀, 비비 꼰 가족 관계, 회장님 아들이 실장님 하는 공중파의 일일 저녁 드라마가 판을 치지만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농촌과 도시 서민의 애환을 그린 수작 드라마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금이의 ‘밤티 마을’ 연작의 첫권인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이 출간된 것이 1994년인데 같은 해 명작 서민드라마 〈서울의 달〉(정운경 극본)이 방영되었으니 그즈음은 문학과 드라마 서사에서 서민의 존재감이 가장 정점을 찍었던 시기였다. 리얼리즘 이론을 댈 것도 없이 건강하고 당당했던 서민의 존재는 지금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이금이의 ‘밤티 마을’ 연작은 1994년부터 2025년에 이르는 삼십 년 동안 드문드문 안부를 전해오는 농촌 가족의 이야기다. 원래 작가는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1994) 한 편으로 끝내려 했지만 그 가족의 뒷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독자들 때문에 육 년 뒤 큰돌이의 여동생 영미, 오 년 뒤에는 배다른 동생 봄이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첫권이 나온 지 삼십 년이 되는 2025년에는 또다른 가족 마리네로 밤티 마을의 이야기를 이어간다.(『밤티 마을 마리네 집』, 밤티, 2024) 삼십 년 동안 농촌의 이 가족은 안팎에서 큰 변화를 겪어왔다. 가난으로 아내가 집을 나가고 술독에 빠져 자식들 건사도 못하던 아버지는 고전소설의 박씨 부인 같은 새 아내를 얻어 삶의 용기를 얻고, 장남 큰돌이(대석이)는 새엄마 덕에 집안 형편이 나아지면서 행복과 희망을 실감한다. 어른들 때문에 초년 삶이 이리저리 휘둘렸던 영미는 좀 까칠하지만 그만큼 속 깊은 어른이 되었다. 성인이 된 큰돌이와 영미는 이제 농촌, 시골이 아닌 도시에 나와 살고 고향에는 이제 노인이 된 아버지와 새엄마인 팥쥐 엄마, 간호사가 된 이복동생 봄이가 남아 있다. 농촌에서 나고 자란 어린이가 성인이 된 뒤 직장, 또는 하고픈 일을 찾아 도시로 이주하는 것은 삼십 년 동안 우리나라의 변화상을 반영한다. 주인공인 큰돌이와 영미 남매가 이미 성인, 그것도 도시 사람이 되었는데 농촌소설인 밤티 마을 이야기가 더 이어질 수 있을까, 설령 억지로 이어간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그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영미의 이웃인 네팔 이주민 자녀 마리다.
마리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다세대 주택 옥상에 텃밭을 일구는 어린 농사꾼의 자질을 가졌다. 옥탑방 세입자로 들어온 영미 아줌마의 눈초리가 편치 않음에도 식물들 목이 마를까봐 물병을 매고 옥상을 오르내리며 정성을 쏟는다. 이런 마리를 지켜보던 영미도 조금씩 곁을 내주며 ‘이모’로 호칭이 바뀌고 여름방학에 마리를 자신의 고향 밤티 마을에 초대한다. 도시에서는 물에 떨어진 기름방울처럼 겉도는 것만 같았던 마리는 밤티 마을 어른들의 환대를 흠뻑 받고 그곳에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품는다. 네팔에서 힘들게 한국에 온 마리 엄마는 ‘사람은 큰 데서 많은 걸 보고 살아야 성공할 수 있다’며 반대하지만 결국 그도 밤티 마을의 환대를 경험한 뒤 딸의 진심을 이해하고 농촌에 이주하기로 결심한다. 농촌에 한국 사람은 노인밖에 없고 외국인 이주민과 2세들만 늘어난다며 말로만 걱정하는 사람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본질도 미래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작가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희망의 단초를 잡아낸다. 소중한 먹을거리를 정성껏 일구는 농사가 무엇인지 체득한 마리야말로 우리 농촌을 이어받을 후계자라 선언하는 것이다. 자식이 둘이나 딸린 농촌의 홀아비에게 시집온 얽은 얼굴의 팥쥐 엄마가 착한 심성과 근면함으로 훌륭히 가정을 일구었던 것처럼, 이국에서 홀씨처럼 날아온 마리네가 농촌에 뿌리내리는 것만큼 훌륭한 바통 터치가 없다. 밤티 마을은 기쁘게 마리네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을 내어주고 새로운 마을 구성원,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마리에게 밤티 마을이 필요하고 밤티 마을은 마리네가 필요하다. 폐교 위기와 일손 부족이 심각한 밤티 마을에서 마리네는 당당한 구성원이 되고 거기에 국적은 어떠한 걸림돌도 되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혼자서는 구멍을 메우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삶의 공동체라는 퍼즐을 맞춰가는, 단지 이상적인 꿈이 아닌 실현 가능한 희망이 된다.
도시는 마이더스의 손처럼 만지는 것마다 금으로 변하지만 정작 먹어야 할 것마저 금으로 바꿔 꼼짝없이 굶어 죽는 신세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시대에 농촌에서 자신의 미래를 발견하고, 부모에게 떠밀리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손을 끌고 미래로 나아가는 마리에게 우리 사회의 앞날도 맡기고 싶어진다. 미안하지만 적어도 아동문학에서라면 도시에서 밤늦게 학원에 다니며 의대 입시에 매몰된 어린이와 그 부모에게 우리의 미래를 의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마리 엄마는 ‘큰 사람이 되려면 도시에서 많은 것을 보고 자라야 한다’고 했지만 필시 밤티 마을은 마리를 더 큰 사람으로 키울 것이다. 기득권층으로 나 혼자 올라가는 출세가 아니라 땅에 깊게 뿌리내리는 큰 사람으로 말이다. 그런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점점 더 늘어나 서로 사랑하고 가족을 꾸리고, 우리 사회의 굵은 뿌리와 몸통을 이루길 바란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서민층은 단일한 우중충한 색이 아니라 다채로운 무지개색으로 두텁게 되살아날 것이다.
4. 멀어도 가까이 ―정승진의 『아말과 사마』
미국의 젊은이 중에는 캐나다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이가 적지 않다고 한다. 자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면 굳이 다른 나라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무시하기 십상이다. 짧은 기간 동안 경제력과 문화력이 막강해진 한국도 이제는 자국중심주의를 경계해야 할 때가 되었다. 70년대생인 나만 해도 늘 외국을 궁금해했지만 잘사는 선진국에 대한 동경심만큼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 공감도 그 못지않았다. 정보가 귀한 시절이라 신문, 잡지, 동화, 만화 영화 등에서 얻은 이미지를 누덕누덕 기워 상상하는 것이었지만 그래서 내 마음대로, 더 가까이 지구 반대편 사람들을 친구와 이웃처럼 여겼다. 하나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정보가 넘쳐나고 해외와 접면이 넓어진 지금은 도리어 마음이 통하는 문이 더 좁아진 듯하다. 여전히 뉴스는 지구 어딘가의 총성과 재해, 극빈을 전달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무감정하게 보아 넘기거나 페이지를 바꿔 자기를 즐겁게 해주는 곳으로 넘어간다. 깨인 사람들은 제발 세계 시민으로서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강자들이 초래한 위기와 모순을 설파하려 애쓰지만 이내 세상의 소음에 묻혀버린다. 이럴수록 어린이의 마음을 포기할 수 없다. 문학이 잘할 수 있는 것, 꼭 해야 하는 것은 정보 조각으로 떠내려가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 닻을 내리는 것이다. 기성세대들은 어릴 때 본 〈엄마 찾아 삼만리〉(다카하타 이사오 감독, 지브리 스튜디오 제작)을 기억할 것이다.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한국 어린이들은 가난한 소년 마르코가 배를 타고 대륙을 건너 천신만고 끝에 엄마를 찾는 여정을 날마다 눈물바람으로 응원했다. 지금 봐도 코끝이 찡해지는 명작이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비행기도 인터넷도 없던 거의 반세기 전 추억의 산물이고 자신의 시대에 맞는 소임을 넘치게 해냈다. 더도 덜도 말고 「엄마 찾아 삼만리」처럼 국경의 벽이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같이 애태우며 울다 웃을 수 있는 이야기가 지금이야말로 절실하다.
정승진의 『아말과 사마』(이지북, 2025)은 그에 대한 해답을 하나 보여준다. 난민 소녀 사마는 난리통에 부모를 모두 잃고 그에게 남은 가족은 아기 때부터 함께한 고양이 아말뿐이다. 한국에도 반려동물을 가족이라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마에게는 그 존재가 비교할 수 없이 눈물겹다. 목숨 같은 물 한 병도 나눠 마시며 간신히 난민 캠프에 들어왔지만 동물은 방역을 거쳐야 하기에 둘은 잠시 떨어진다. 그런데 난민이 데려온 고양이를 기삿거리로 노린 기자의 훼방으로 아말은 캠프를 뛰쳐나간다. 기자는 난민의 고양이가 병을 퍼뜨릴 거라는 기사를 쓰고, 난민 소녀가 자유로운 삶을 앞두고 자신의 고양이를 버릴 것이라는 잔인한 시나리오를 짠다. 유일한 가족을 잃은 사마는 좌절하지만 난민 캠프 친구들과 힘을 모아 아말과 다시 만날 길을 찾는다. 흉악범 손에서는 흉기가 되고 요리사 손에서는 도구가 되는 칼처럼, 거짓 뉴스를 퍼뜨리는 미디어는 난민 어린이가 자신의 처지를 직접 세상에 호소하는 창구가 된다. 한편 항구 마을에 들어간 고양이 아말도 텃세를 당하지만 그 또한 용기와 지혜를 총동원해 유일한 가족인 사마를 찾는다. 애타는 우여곡절 끝에 재회한 둘은 더이상 헤어지지 않고 함께 안전한 나라에 정착하고 난민 캠프의 친구들도 각자 외국에서, 캠프에서 미래를 준비하며 자신들의 미래를 찾아간다.
한국 작가가 썼지만 무대는 유럽 어딘가의 난민 캠프와 항구 마을이고 한국인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전문가가 본다면 사실성이 떨어진다 지적할 수 있지만 그 점은 도리어 한국의 어린이가 지구 반대편 난민 어린이에게 가까이 다가서게 한다. 난민 문제에 밝은 당사자나 외국 작가가 쓴 작품을 번역했다면 낯가림이 있는 독자는 아예 거들떠보지 않았을 테고, 한국 작가가 썼더라도 책과 취재에서 얻은 정보 전하기에 치중했다면 이만큼 흥미진진함과 감동은 없었을 것이다. 난민 고아가 유일한 가족인 고양이와 헤어진다. 둘을 갈라놓은 악당은 인종차별과 혐오에 기생하는 거짓말쟁이 기자다. 주인공은 곤경에 처하지만 정의롭고 선한 친구와 이웃의 도움을 받아 결국 재회하고 행복을 찾는다. 현실에 기반을 두면서도 단순명료한 스토리와 메시지를 밀고 나가는 『아말과 사마』는 모처럼 직관적인 재미와 감동, 동시대성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리얼리즘 장편 아동소설이 되었다. 한국에도 가난과 폭력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들이 많은데 지구 반대편 난민 소녀는 남의 다리 긁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까? 큰 고통을 겪는 분쟁지역 어린이에 비하면 한국 어린이는 복 받았다는 식의 그릇된 선민의식, 교만은 더더욱 말도 안 된다. 십중팔구 한국의 어린이들은 나와 닮은, 어쩌면 나였을 수도 있는 지구 반대편 또래 친구의 간절함에 공감하고 그의 용기와 행동을 진심으로 응원할 것이다. 고통과 좌절에 찌든 난민촌, 아프리카 극빈국 아이들의 사진은 연민을 자아내지만 공감보다 이질감을 강화하는 부작용도 있다. 그들도 우리처럼 틈만 나면 공을 차며 놀고 어떻게든 컴퓨터와 인터넷을 하며 21세기 지구 위에 살아간다는 실감이 필요하다. 그 실감과 공감이 있어야 아이들은 이 세상의 난제를 함께 배우고 푸는 커다란 교실의 일원이 된다.
실천윤리학자인 피터 싱어는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출근길 늘 지나가는 연못에 어린아이가 빠져 허우적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연못이 깊지 않다는 걸 알고 있고 물에 들어가 아이를 구하는 건 어렵지도, 위험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러면 새 신발이 더러워지고 양복이 젖고 진흙투성이가 될 테고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가면 직장에 지각할 것이다. 그래도 아이를 구하겠는가? 학생 대부분은 신발, 옷, 지각 따위가 생명과 비교될 수 없으니 아이를 구하겠다고 했다.2) 이 질문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와, 분쟁과 질병, 극빈으로 수많은 생명이 버려지는 나라를 비유한 것이다. 아말과 사마가 정착한 독일처럼 한국도 전 세계 난민이 안전과 자유를 찾으러 오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아말과 사마를 진심으로 응원한 마음이 한국 어린이들 마음에 잠들어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깨울 수 있을까? 그 사마리아인을 깨워야만 우리는 비로소 진정 가난으로부터 해방되는 길 위에 서게 될 것이다.
5. 가난은 미래다
부의 양극화, 고령화 사회, AI와 로봇이 빼앗을지도 모르는 일자리 걱정을 하는 뉴스에 매몰되면 가난에 대한 공포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한국만 해도 지금의 어린이와 젊은이들은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세대가 될 거라는 저주 같은 예상에 좌절하거나 분통을 터뜨릴 때가 많다. 이를 틈타 젠더 갈등, 세대 갈등, 이민자와 난민 혐오, 온갖 갈등과 혐오를 부추기는 거짓과 이간질도 난무한다. 하지만 이 혼란은 동굴에 갇힌 우리가 일렁이는 그림자를 보고 겁에 질린 것일 수 있다. 그림자는 실체를 어느 정도 반영하지만 그것은 모든 진실이 아니고 당장 우리를 죽이지 못한다. 세상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우리는 그 변화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동시에 상호작용하며 변화를 만들어내는 주체이기도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라고 영원하지 않고 그 끝이 있고 그 너머가 있다. 그 너머에서 인간이, 나아가 지구 전체가 더 행복과 해방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가난에 중요한 해법이 숨어 있다. 그렇기에 아동문학은 가난을 우리 모두의 것으로 소중히 다루며 그로부터 싹틔우고 자라날 큰 나무의 이야기를 온 힘을 다해 보여줄 임무가 있는 것이다.
박숙경
아동청소년문학 평론과 번역을 하고 있다. 평론집 『보다, 읽다, 사귀다』가 있고, 현재 계간 《창비어린이》 편집위원이다.
2026/04/15
78호
- 1
- 이 챕터는 졸고 「동물들의 모던 타임즈」(『그냥 씨의 동물 직업 상담소』 서평, 《창비어린이》 2023년 가을호)와 일부 내용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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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 싱어,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가난으로부터 구할 것인가』, 함규진 옮김, 산책자, 2009, 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