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건물의 외부를 찍은 사진. 사진 중간 부분의 외창에는 맞은 편 건물이 반사되어 비치고, 좌측 상단, 우측 하단에는 이 건물의 내부에서 나오는 빛들이 새어나온다.
맞은편 건물 외창을 통해 반사되는 아리아드네 블록 8동의 정경.

2050년 5월, 서울 한복판에는 24년 전의 시간이 박제되어 있다. 옛 테헤란로의 노른자위 땅을 차지하고 있는 11동의 커튼월 빌딩 군락, 이른바 ‘아리아드네 구역(Ariadne District)’이다. 이들은 조감도 상으로는 다른 건물들과 거의 구분되지 않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유리에 덧대어진 판자와, 태양광 패널과, 매립되지 못한 전선에 둘러싸인 기괴한 생태계를 마주할 수 있다.
  이곳은 거대한 콘크리트 뱅크런의 현장이다. 2026년 11월 당시, 아리아드네 재단은 건물 소유권을 쪼갠 STO(토큰 증권)를 담보로 예치하고, 해당 토큰의 가치에 1:1로 연동되는 유동성 코인인 ARD-Note를 발행해 시중에 유통했다. 재단은 코인 시세가 오르면 코인을 추가 발행해 현금을 확보한 뒤 부동산을 더 사들이고, 반대로 코인 가격이 떨어지면 확보해둔 STO를 시장에 매도해 코인을 소각함으로써 가격을 방어하는 민트 앤 번(Mint & Burn) 알고리즘을 채택했다. 그러나 부동산 경기가 침체된 상황에서 코인 시세가 급락하자 연동 알고리즘이 붕괴했고, 휴지 조각이 된 코인을 든 투자자들은 아리아드네 재단 소유 빌딩으로 달려들어갔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났지만 무단 점거 사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재단이 보유한 51%의 STO(실소유권)와 개인 투자자들이 소유한 코인(파생상품) 사이의 법적 괴리 때문이다. 스마트 컨트랙트상으로는 코인 가치가 붕괴될 경우 재단의 STO 51%가 청산되어 코인 홀더들에게 분배되도록 약정되어 있었지만, 법정의 판단은 달랐다. 법원은 “투자자들은 아리아드네 재단의 채권자일 뿐 건물 자체의 지분권자가 아니다”라고 판시했다. 이로 인해 51%의 지분은 파산한 재단의 자산으로 간주되어 지루한 청산 소송에 돌입했고, 49%의 지분을 쥔 기관 투자자들은 해당 자산을 손실 처리하거나 주 소송의 종결을 기다리며 침묵했다. 이들의 지분은 대부분 3% 미만으로 잘게 쪼개져 있었으므로 복잡한 국제 소송단을 꾸리는 수고를 짊어질 유인이 없었다.
  아리아드네 재단은 토큰 발행 주체인 싱가포르 법인과 실제 개발 및 운영을 전담하는 푸에르토리코 법인이 상호 용역 계약을 통해 교류하는 이원화 구조를 통해 책임 소재를 분산해 왔다. 싱가포르와 뉴욕, 푸에르토리코, 서울을 오가는 재판이 24년째 도돌이표를 그리는 사이, 한국 정부는 차악을 선택했다. 법리적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점거민들에게 최소한의 생존 인프라를 제공하고자 한 것이다.


가난을 연기해야 하는 배우들

“우리는 피해자일까요, 아니면 개척자일까요?”
  아리아드네 3동, 과거 글로벌 컨설팅 펌의 대회의실이었던 곳에서 자치위원회 대변인 박동훈(52) 씨가 디지털 칠판을 두드렸다. 화면에는 ‘아리아드네 주거환경개선사업 심사 대비 전략’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떠올라 있었다. 20여 명의 주민 대표가 모인 이 공간은 전쟁기념관의 벙커 체험실을 연상시켰다. 최첨단 드론 택배들이 창문 너머의 상공을 가로지르는 동안 대회의실 안쪽에서는 30년 전의 사무용품들이 각자의 쓸모를 찾고 있었다.
  “시청 조사관들 앞에서는 너무 비참해보여서도 안 되지만, 너무 살만해보여서도 안 됩니다. 이게 핵심이에요. 공무원은 우리가 여기서 나가고 싶어 안달 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자신들의 정책이 먹혀든다고, 최소한 이 정책을 계속 시행할 명분이 생긴다고 착각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자생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도 어필해야 합니다. 그래야 강제 퇴거 명분이 사라지거든요.”
  너무 비참해보이면 현 상태를 유지할 명분이 사라지고, 반대로 너무 안락해보이면 세금을 축내는 악성 무단 점거자 프레임을 피하기 어렵다. ‘복지 제도의 수혜가 필요한 약자’와 ‘사회적 격리가 필요한 위험분자’ 사이의 외줄타기. 그게 이곳의 생존법이다.
  “사실 우리는 생각만큼 불쌍하지 않습니다. 바깥사람들이랑 아주 다르지도 않아요.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죠. 하지만 그래도 다르다고,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유대감이 있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거짓말을 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진짜니까요. 정말로, 여기서만 느낄 수 있는 공기가 있죠. 이거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회의가 끝나고 박 씨는 씁쓸하게 웃으며 담배를 물었다. 24년 전, 대기업 대리였던 남자는 이제 11개 빌딩의 생존 전략을 짜는 전략가이자 빈곤을 연출하는 감독이 되었다. 아리아드네의 다양한 측면을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외부인에게 콘텐츠를—혹은 ‘나는 사회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이다’와 같은 믿음을—제공하는 동시에 거주민의 존엄을 지켜내는 것이 그의 책무다. 번뜩이는 눈빛과 달리 박 씨의 어깨에는 씻을 수 없는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
  “솔직히 인정하겠습니다. 나쁜 건 나쁜 것이고, 여기 사는 사람들한테는 문제가 있습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죠. 단단히 잘못됐으니 정부 돈 받으며 이러고 있는 겁니다. 존엄이 없는 게 당연해요. 하지만 그게, 존엄이라는 게 있긴 있어야 합니다. 기자님이 주말에 쉬고 있는데 갑자기 연구원이니, 취재 기자니, 소설가니, 공무원이니 하는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집 사진을 찍어가는 상황을 상상해보라는 겁니다. 심지어 저번에는 무슨 회사에서, 단체 투어 상품에 아리아드네 관광 일정을 넣고 싶은데 가이드가 가능하냐고 연락이 왔어요. 어처구니가 없죠. 그런데 그걸 또 했습니다. 돈을 준다는데 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이런 식입니다. 내 일상이 소재나 연구주제나 참고자료가 되어버리는데, 살아 있으려면 그런 취급을 감수해야 하고, 심지어 ‘더 잘 해낼’ 방법을 내가 먼저 찾아내야 해요. 그러다보면 모든 게 우스워지고, 삶이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말을 비웃고 싶어집니다. 이러면 또 누가 반박을 하겠죠. 아리아드네에서 나와서 멀쩡하게 일하고 살면 되지 않냐?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우면 우리가 이러고 있겠습니까? 그러게요, 나가면 되는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두운 공간 속, 정중앙에 광고판 이미지만이 빛나고 있다. 검은 옷을 입은 인물이 반짝이는 잔을 들고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아리아드네 5동 후면의 광고판이 25년 전의 광고를 전시하고 있다. 해당 공간은 A사가 출시한 ‘아리아드네 투어 상품’의 일부로, 거주민들의 협조하에 깨끗이 관리되는 중이다.


개미지옥, 혹은 책임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건물 외벽 앞에 심어진 가로수들에 꼬마 전구들이 매달려 있다. 꼬마 전구들이 만드는 작은 빛들이 반짝이는 표면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통해 외관을 새단장한 아리아드네 블록 7동의 풍경. 창문이 대거 교체되었고, 가로수들에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꼬마 전구가 매달려 있다.

아리아드네 7동 14층. 과거 핀테크 스타트업의 서버실이었던 공간을 개조해 사는 김광수(70) 씨의 방은 좁지만 정갈했다. 그는 2026년, 퇴직금을 털어 ARD-Note에 투자했다가 전 재산을 잃고 이혼까지 당한 뒤 이곳으로 흘러들었다. 70세의 그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자신이 어째서 이 유리 감옥에 갇혀 있는지 자문한다. 방 한쪽 벽면에는 2026년 11월 4일, 코인 가격이 1달러에서 0.0004달러로 수직 낙하하던 날의 차트가 포스터처럼 붙어 있다.
  “다들 복잡하다고 그래요. 코인도, 세상도, 법도.”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믹스커피를 휘저었다.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제일 답답한 건, 도대체 누가 날 여기 처박아둔 건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놈의 코인 산 내 욕심 탓인가? 다들 투자는 자기 책임이라고 하니까, 내 잘못이겠지 싶다가도…… 아니, 그래도 이게 다 내 잘못만 있는 건가? 억울한데 누구 멱살을 잡아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개미지옥 같아요.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지는……”
  기독교인들이 세계의 불가해성 앞에서 신의 섭리와 신비를 느끼며 겸허해지듯이, 현대인들은 복잡한 수식과 알고리즘 앞에 무릎 꿇고 시스템의 권위를 받아들인다. 우리는 파생상품과 구조화금융의 작동 원리를 모르는 상태로 펀드에 돈을 넣고, 유가와 환율의 상관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로 경제생활을 하며,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모를지라도 투표장에 나가 한 표를 던진다. 그 신비롭도록 정교한 시스템을,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자연의 섭리처럼 받아들이는 태도는 분명 현대인의 미덕이다.
  그러나 시스템에서 탈락한 이들에게 그러한 미덕은 스스로의 숨통을 옥죄는 족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김 씨는 자신을 거듭 탓하면서도, 무언가 거대한 힘이 자신을 짓누른다는 인식을 언뜻언뜻 내비쳤다. 그러다가 끝내, 정부의 이주 대책을 거부하고 이곳에 남은 이유를 털어놓았다.
  “여기 붙어 있으면 난 그래도 금융 피해자예요. 정부랑 싸우는 사람이고, 해외 기관들이랑 싸우는 사람이고, 이 건물 기둥 하나쯤은 가진 사람이 된다 이겁니다. 근데 저 문밖으로 나가는 순간, 그냥 서울역 앞에 널린 노숙자가 되는 거야. 그게 제일 무서워요. 피해자 딱지까지 떨어지면, 인생이 정말 깡통이 될 것 같아서.”
  공무원들의 행정 전산망 안에서 김 씨는 최우선 구호 대상이자 고위험 취약 계층으로 분류된다. 가능한 한 빨리 시설로 이관되어 적절한 보호를 받아야 하는 노인인 것이다. 반면 미디어 타워가 비추는 바깥세상의 여론은 냉소적이다. 그들의 눈에 김 씨는 투자 실패의 책임을 사회에 전가하는 진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김 씨의 내면에서, 그는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오류에 휘말린 억울한 피해자’다.
  이 세 가지 시선은 모두 사실이지만, 동시에 어느 하나도 김 씨라는 인간의 총체를 담아내지 못한다. 시스템에서 탈락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일이다. 원인과 결과가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논리가 매끄럽게 엮이는 세계로부터 튕겨 나가는 일, 설명할 수 없는 모순덩어리가 되는 일이다. 그렇기에 김 씨를 비롯한 아리아드네의 사람들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알맞은 정체성을 바꾸어 낄 수밖에 없다. 어떨 때는 보호받아야 할 노인으로, 어떨 때는 투쟁하는 채권자로, 또 어떨 때는 막무가내의 점거자로.


미궁에서 태어난 아이들

“아리아드네가 뭐냐고요? 음…… 정의하기 힘들죠. 여기 사는 천 명한테 물어보면 천 가지 대답이 나올 걸요? 그래도 저한테는 일단, 고향. 우리 집. 내 집.”
  과거 백화점이었던 아리아드네 5동의 저층부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빛바랜 구찌 포스터가 칸막이벽으로 쓰이고 최고급 이탈리아산 대리석 바닥 위에서 공기놀이가 벌어진다. ‘아리아드네의 아이들’에게 2020년대의 명품 로고는 부의 상징이 아니라 벽지의 패턴일 뿐이다. 미디어 아트 작가 이수진(23) 씨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녀의 작업실은 과거 VIP 라운지였던 공간이다. 한때 최고급 가죽 소파가 놓여있던 자리에는 용접기와 페인트통이 널브러져 있고, 벽면을 장식했던 마호가니 패널 위에는 스프레이로 그린 난해한 도안들이 덮여 있다. 천장에 매달린 깨진 샹들리에 조각들은 그녀가 만든 모빌의 재료가 되어, 창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날카롭게 산란시키는 중이다.
  “밖에서는 다들 여기보고 썩은 내 난다, 더럽다 욕하잖아요. 맞아요. 여름엔 진짜 최악이고. 그런데…… 묘하게 예쁜 구석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저 깨진 유리 틈으로 들어오는 네온사인을 보고 컸거든요. 촌스러운 빛이 대리석 바닥에 쫙 깔리면, 그게 그렇게 힙해 보일 수가 없어요.”
  그녀는 우리를 2층 구석진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하게 보존된 오브제가 마련되어 있었다.

진열대 위, 마네킹의 발목 부분을 찍은 사진. 마네킹에는 검은 양말과 반짝이는 표면과 얇은 끈 디자인이 돋보이는 슬링백힐이 신겨져 있다.
검고 긴 슬링백힐을 신은 매끄러운 다리가 비현실적인 광택을 뽐낸다.

“이거 봐요, 완전 광택이 나잖아요. 24년 전 백화점 마네킹인데, 상태 좋죠? 여기 사람들 성격 진짜 거친데, 신기하게 얘한테는 손도 안 대요. 전담으로 쓸고 닦는 사람도 있다니까요? 무슨 성모상 모시듯이.”
  수진 씨는 마네킹의 검은 구두를 소중한 듯 어루만졌다.
  “관광객들은 아리아드네 사람들이 돈만 밝히면 무식하다고 싫어하고, 뭐라도 취향이 있는 것 같으면 그것도 싫어해요. ‘세금 축내는 인간들이 꼴에 멋은 부리네’ 같은 심리죠. 참 이중적인데, 그 이중성이 여기에도 똑같이 있어요. 지옥은 지옥인데 예쁜 면도 있고, 아주 못 살 곳은 아니고, 그런데 누구는 골병이 들어 죽는다. 그래도 나는 여기에서 태어났으니까 여길 아주 미워할 수는 없다. 이 이상한 장소를 어떻게 표현할까, 그게 제 고민이죠.”
  빈곤을 떠올릴 때 우리는 으레 깨진 타일과 하수구 악취를 상상하고, 부유함을 말할 때면 매끄러운 대리석과 향수 냄새를 떠올린다. 아리아드네에서는 두 세계가 기묘하게 뒤섞여 있다. 이수진의 말처럼 이곳의 악취는 대리석 위를 흐르고, 곰팡이는 명품 로고 위에서 핀다.

반짝이는 이미지를 담은 미디어들이 블록 형태로 적층되어 있다.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블록은 총 세 개다. 블록의 위 아래는 거울 같은 재질로 이루어져 그 맞은 편에 있는 이미지가 반사되어 보이며, 가로 면들에는 서로 다른 이미지가 보인다.
〈아리아드네의 공기놀이 혹은 어디에도 없는 것〉, 이수진 작품, 실시간 생성형 미디어, 투명 OLED 적층 설치, 일민미술관 전시 중(2050.04~2050.05).

빈곤과 비참의 형태는 시대별로 다르다. 원시인들은 홍차에 설탕을 잔뜩 섞어 마시는 18세기의 영국 노동자를 보며 “정말 신처럼 사는구나!” 하며 감탄할 테고, 18세기의 영국 노동자는 21세기 한국의 고시원을 보며 “나는 오늘도 밧줄에 매달려 밤을 지새우는구나. 나한테도 저런 어엿한 집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며 탄식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풍요와 부의 형태는 세월을 따라 흐른다. 울워스 빌딩의 네오고딕 양식은 어느샌가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고, 1920년대 할리우드의 흑백 영화 속 화려한 파티는 지나간 시대의 흔적에 불과하며, 21세기인은 진짜 상아로 만든 당구공보다 최신형 애완 로봇을 좋아한다. 이로써 풍요와 빈곤은 카두케우스의 지팡이처럼 시간을 감싸 돌며 하나로 얽히고, 그 자체로 과거의 종결점과 미래의 시작점을 내포하게 된다.
  이수진의 작업은 이러한 얽힘 속의 긴장을 파고든다. 그녀의 작업은 아리아드네의 디스토피아적인 현재와 25년 전에 박제된 부유함의 이미지—유명 모델과 명품 패턴들, 반짝이거나 향기롭거나 매끈한 것들, 광고들—를 겹침으로써 파국과 종말에 대한 상상을 전개한다. 이는 현대인의 향유가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동시에, 우리가 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빈곤의 이미지가 순전한 이미지임을 폭로한다.


하나가 될 수 없는 하나

독특한 미감만으로 이곳의 삶을 낭만화할 수는 없다. 고풍스러운 대리석 바닥 아래로는 낡은 상하수도관이 신음하고, 통유리 건물의 고질적인 환기 문제는 위생 및 감염병 문제로 이어진다. 정부가 공급하는 전력마저 제한적이라 층별로 시간제 배급이 이루어지는 이곳에서, 미적 감각은 생존의 고단함을 가리는 얇은 장막일 뿐이다.
  “사람들은 여기를 무슨 테마파크처럼, 혹은 도심 한복판에 설치된 ‘유령의 집’ 콘텐츠처럼 봅니다. 이미지 이상은 복잡하니까 이해하기를 싫어하죠. 문제는 정부도 이걸 정육점에서 고기 자르듯 나누어보려고 한다는 겁니다.”
  서울시 파견 사회복지사 강민지 팀장은 한숨을 쉬며 차트를 넘겼다. 스프레드시트를 통해 명쾌하게 분류된 항목들을 훑는 동안 그녀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지기만 했다. 식사 지원은 여성가족부, 기초 학력 증진은 교육청, 주거 환경 개선은 국토부의 몫이었다. 행정의 언어로는 완벽하게 조립된 복지 시스템이었지만 현실의 아리아드네에서 이 항목들은 서로 나뉜 채 삐걱대고 있었다.
  “부처별 접근은 바우처 제공이나 기초 숙련 일자리 제공처럼 파편화된 복지를 던져주는 데 그칩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 정도로 충분하겠죠. 하지만 이곳에는 일원화된 컨트롤 타워가 필요해요. 하지만 그 시스템은 사실 문서화나 규격화될 수 없는 겁니다. 현장의 사회복지사들이 보고 잡아내야 하는 유연하고 즉물적인 부분들이 반드시 있거든요. 그러면 이걸 국가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솔직히 말해서, 모릅니다. 우린 그저 땜질만 하고 있어요.”
  오래도록 운동을 해온 사람에게는 삼각근이라거나 이두근, 전완근 같은 분류가 익숙하다. 단순히 익숙한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약점을 삶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명확히 분리하고 가다듬을 수 있다. 이번주에는 전완근에 집중하고, 다음주에는 광배를 기르자는 식으로…… 그러나 기초 체력이 부족하거니와 정돈된 일상이랄 게 없는 사람에게는 그런 계획 자체가 무소용이다. 그들은 일어나서 걷는 법, 하나의 일을 꾸준히 하는 법,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법을 우선 배워야 하고, 그 배움의 다른 이름은 삶이다. 관료제적인 편의주의가, 예산 항목별로 쪼개진 접근이 아리아드네 문제에서 힘을 잃는 이유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여기 사는 사람들이 다 같은 ‘아리아드네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비록 이 슬럼의 기원은 24년 전 코인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1세대 거주민들이지만, 그 이후로도 실직, 파산, 혹은 살인적인 서울의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밀려들어온 사람들이 허다하다. 빚쟁이를 피하기 위해 이곳의 익명성을 빌린 사람이 있다. 이곳의 무질서가 주는 해방감 때문에 머무르는 사람이 있다. 다른 삶의 방법을 몰라서 그저 주저앉은 사람이 있다. 어떻게든 떠났지만, 아리아드네에 남은 가족들 때문에 속절없이 끌려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입구는 저마다 다르고 발목을 잡는 사연도 천차만별이다.


아리아드네를 떠나는 길

건물의 바깥 유리벽을 찍은 사진으로, 건물 내부에 있는 장식물과 그 유리벽에 비친 길거리의 풍경이 함께 보인다. 사진의 좌측 면에는 거리의 차와 행인들의 모습이, 사진의 우측 면에는 건물 내부의 금빛 장식물이 또렷하게 보이며 사진의 아래 쪽에서는 도로 위 차들의 이미지와 건물 내부 이미지가 중첩되어 보인다.
아리아드네 5동 1층에서 찍은 바깥 풍경.

정부는 지난 20년간 수차례 아리아드네 해체 및 이주 대책을 논의해왔다. 그러나 실타래는 너무 복잡하게 꼬여 있다. 이제 와서 강제 퇴거를 집행하기엔 이곳을 터전으로 나고 자란 2세, 3세들의 인권 문제가 걸리고, 양성화를 시켜주자니 불법 점거를 합법화한다는 법적 형평성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무엇보다 11개 동, 수천 세대에 달하는 이 거대한 인구를 수용할 대체 부지가 서울에는 없다.
  흥미로운 점은 아리아드네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고립무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상당수 거주자는 주간 통근자로, 아리아드네 단지를 주거지로 삼을 뿐 바깥에서는 평범한 사회인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다. 이곳을 완전히 떠나는 순간 그들은 월세와 관리비에 허덕이는 도시빈민으로 전락하거나 별도의 기초생활수급 자격을 얻기 위해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한다. 불편함과 낙인을 감수하면 불확실한 복잡성을 피할 수 있다는 역설이 이들을 유리 성채에 붙들어둔다.
  가난은 냄새로, 색깔로, 혹은 소리로 재현되어왔지만 2050년의 빈곤은 복잡성으로 정의된다. 부유한 자들은 복잡한 시스템을 고용해 단순한 삶을 누리고, 가난한 자들은 단순한 생존을 위해 복잡한 시스템의 미로를 헤매야 한다. 아리아드네는 거대한 빈곤의 미로이자, 한국이다.

단요, 현다혜

2022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여러 권의 장편소설을 출간했고 종종 평론을 쓴다. (단요)

사진을 찍는다. 중심에서 부스러진 대상을 사진으로 쫓는다. 도무지 보려 해도 볼 수 없는 이미지들을 그럼에도 볼 수 있다고 믿는다. (현다혜)

‘빈곤에 관한, 실제 사진과 결합된 페이크 르포’를 청탁받은 직후에는 다소간 당혹스러웠다. 저널리즘이란 실존인물의 존엄을 보호해야 하는 이상, 더 나아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위해 서사가 재배치되는 이상 어느 정도 허구일 수밖에 없는 포맷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인터뷰를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인터뷰는 ‘실제 인터뷰’와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게 된다. 여기에 대해 고민을 이어가다가 문득 2050년의 미래에 이르게 되었다. (단요)

미래에서도 재현하지 않는 얼굴들, 재현될 수 없는 얼굴들, 이야기들, 결핍들, 가난들, 빈곤들, 고립들, 반복되는 것들, 그런 것들. 매끄러운 풍경들 사이에 모두 숨어있다. 본 적도 없는 미래의 풍경들은 빈틈없는 껍데기다. 숨 하나 못 쉬게 꼭꼭 숨긴다. 도무지 꺼내 비춰볼 방법이 없다. 아무래도 아무것도 없다. 아주 나중의 도시를 산책한다. 음악을 들으면서, 보도블록을 밟으면서, 볼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 그런 것들을 당연하게 지나칠 수밖에 없으면서, 지금의 시간까지 걸어간다. (현다혜)

2026/03/04
7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