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는 지난 일 년간 적어도 다섯 사람으로서 살았다. 월화수목 나흘간 낮에는 디저트 전문점의 판매원으로, 밤에는 결혼식 사진과 돌 사진을 보정하는 프리랜서로, 주말과 휴일에는 뮤지컬 공연장의 어셔로, 금요일에는 온전히 이완되려는 김이래로, 그리고 이 모든 날의 쉼과 달림 사이사이에는 남편과 사별하고 첫해를 맞은 젊은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종종 의식하며 보냈다.
  그에게는 마음을 터놓고 지낸 친구가 두 명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프랑스에서 만화 그리는 일을 했기에 볼 수 없었고, 다른 한 명은 수녀원에 입회하여 수련기에 접어들었으므로 역시 만나보기 어려웠다. 일로 얽힌 타인들 속에서 바삐 움직인 일들이 그를 지탱해주었다.
  이래는 어디에서나 호감을 주는 인상으로 통했다. 작고 동그란 얼굴에 이목구비가 선명하고 눈빛이 맑아서 가만히 미소만 짓고 있어도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기쁨을 안겨주는 면이 있었다. 말씨는 온순했고 행동은 민첩한 편이었다. 또 물에 젖은 듯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을 느낄 때도, 한줌의 가루로 부스러져내릴 듯 몹시 지친 상태일 때도 겉으로는 티가 잘 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그 점, 여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한은 그렇게 해 보일 수 있는 자신의 기질과 외적인 특성을 감사히 여겼다.
  이래의 남편은 여러 면에서 이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목청이 좋고 체격이 큰 데다 주짓수를 오래했고 테니스를 즐겼다. 스포츠를 전혀 즐기지 않는 이래와는 딴판이었다. 두 사람은 삼 년 연애하고 그보다 짧은 일 년 구 개월을 부부로 살았다. 남편의 이름은 원오였다. 백발이 무성해질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래의 곁을 지킬 마지막 사람이 자신이라고 호언장담하던 남자. 이래는 남편에게서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킬 만한 갖가지 방법을 알고 있었는데, 원오가 그걸 원했기 때문에 점차 계발된 능력이었다. 이제 그 노력은 길을 잃었다. 배우자가 영원한 사랑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도록 다양한 매력을 뿜어내는 일이나, ‘하늘이 두 쪽 나도 나는 당신을’로 시작되는 남편의 숱한 맹세를 빛나는 얼굴로 의심 없이 믿어주는 일.
  이래는 가끔은 원오가 재가 되어버린 게 아니라 해외 출장 중이라고 상상해보기도 했다. 입국 절차가 절묘하게 까다로운 머나먼 이국에서 원오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집을 한 채 얻어두고 진취적인 여성 파트너와 새로운 프로젝트에 몰입하고 있다고. 그러면 아직 식지 않은 사랑의 감정이 그리 비극적이지 않은 형상 속에서 불꽃처럼 아른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영원한 상실이나 아린 상처가 아니라 아슬아슬한 미지를 향해 하늘거리는 붉고 푸르고 노란 에너지 같은 것으로.
  이래가 원오의 장례식을 치른 후 호되게 감기몸살을 앓던 그 봄날엔 비가 자주 내렸다. 그는 냉동 보관해둔 채소로 스튜를 만들어 간단히 요기하고는 식기와 옷가지, 침구들을 솎아내 버리거나 재배치했다. 방과 거실, 화장실의 벽과 바닥을 구석구석 닦고는 싱크대와 전자레인지를 소독했다. 비가 내리는 밤에는 흑백 고전 영화를 골라 틀고 음을 소거한 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빗소리를 들었다. 그런 식으로 열흘이 지나갔다. 감기몸살이 낫고, 제대로 된 식사가 그리워질 만큼 컨디션이 회복되자 그는 조금 용기를 내서 원오가 준 마지막 선물을 발코니에서 가져올 수 있었다.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연회색 양우산이었다. 펼치면 가장자리에 하늘색 물결무늬 두 줄이 나이테처럼 이어져 원을 이루는. 그는 그걸 무릎 위에 올려두고 한참 바라보다가 자신을 채근해 바깥으로 이끄는 힘이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날 이래는 홀시아버지를 찾아갔다. 전셋집의 보증금으로 남편이 남긴 빚을 정리하겠다고 하고는 시아버지의 뜻은 어떠한지 조심스레 물었다. 시아버지는 살가운 성격이 아닌 데다 셋째 아들인 원오를 성에 차지 않는 부족한 자식이라 여겨왔기에, 그는 혹여 마음 다칠 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담담히 받아안으리라 미리 결심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시아버지가 당신의 바람은 이래의 새 출발일 뿐이라는 대답을 주었다.
  “남은 일은 모두 네 뜻대로 처리하면 좋겠다. 협조하마. 나한테는 원오의 여름 선글라스 하나, 겨울 코트 한 벌만 챙겨 보내주렴. 그럴 수 있겠니?”
  “그럴게요, 아버님.”
  “그래.”
  “네.”
  이래는 시아버지가 원오의 여름날과 겨울날의 추억 일부를 잠시라도 어떤 물성으로 치환해 간직해보려는 것일까, 하고 미루어 짐작해보았을 뿐 그 생각을 어떤 질문으로도 꺼내놓을 수가 없었다. 짧은 침묵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는 자신의 가장 연약한 부분과 시아버지의 무른 데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제게 자식이 없으므로 이 관계의 애틋한 접점과 복잡한 감정들이 점점 더 흐릿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이래는 그날 집으로 돌아와 밤새 눈이 붓도록 울었는데, 누구의 잘못도 아닌 현재가 그 밤에는 어떤 실패의 산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눈물은 마지막이야. 눈물은 마지막이야. 눈물은 마지막이야. 그는 원오가 지척에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에게 속삭이듯이 되뇌다가 깊은 잠 속으로 떨어져내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 해가 바뀌었고, 새봄의 꽃들이 만개했다가 시들었다.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지금 그의 통장에는 그럭저럭 몇 개월 쉬어가도 될 만큼의 여윳돈이 모였다. 그는 하던 일을 더 열심히 파고들어 언젠가 작게라도 디저트 전문점을 내보든가, 아니면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공연기획팀의 정직원 자리에 이력서를 넣어보는 일들에 관해 고민해볼 시기라는 걸 알았다. 디저트 전문점의 젊은 사장이 곧 사업을 접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기에 자기에게도 적극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각성이 일었다. 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촘촘히 계획을 짠다는 것에 진심으로 열의를 품지는 못했는데, 이제껏 아껴 품어보았던 가장 오랜 희망이 원오와 행복한 가정을 일궈나가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리던 아름다운 영토가 사라졌기에 무언가를 열성으로 심고 가꾸어나가야 한다는 발상에 도무지 자연스러워지지 못했다. 그보다는 번개가 머리에 떨어진다든가 하는 믿을 수 없는 충격이 가해져 심신을 이루는 세포들의 성분과 배열을 바꾸어놓는 사건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6월의 마지막 주에, 디저트 전문점의 사장이 이래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며 밥이나 같이 먹자고 했다.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은 이미 그만두고 나간 터라 이래에게 편한 금요일을 약속 날짜로 잡았다. 식사 자리는 아담한 스페인 레스토랑이었는데, 꽤 알려진 곳이라 평일 오후 2시 반이라는 애매한 시간대에도 다섯 개의 테이블 중 네 개가 모두 손님으로 차 있었다. 사장은 이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젊은 여자와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랑 함께였다.
  “여기는 친구 찬영이, 얘는 찬영이 아들 승우.”
  사장이 이래를 옆자리에 앉게끔 하고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을 소개했다. 찬영이 웃으며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아침에 미호랑 통화하다 여기까지 따라나서게 됐어요. 실례가 아니길요.”
  미호는 사장의 예명이자 디저트 전문점의 상호이기도 했다. 이래는 언젠가 미호가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친구인데 외향적이고 유쾌하지만 의외로 사람을 가린다고, 가게에 들른 적도 있어서 그쪽은 이미 이래를 봤다고 하던데 혹시 기억이 나느냐고, 키가 크고 말랐으며 주근깨가 난 얼굴에 은테 안경을 썼다고. 이래는 오가는 손님들의 생김생김을 매번 눈여겨보지는 않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웃어넘겼다. 설명만 들었을 때는 막연히 창백한 피부에 붉은 머리칼을 한 여자를 떠올렸는데, 실제로 보니 선탠한 듯한 피부에 검은 머리칼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 옆에 뚱하니 앉은 승우는 볼과 팔다리가 통통했고 색소가 있는 사탕이나 젤리를 먹은 것인지 윗입술과 인중의 일부가 옅은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들은 작년보다 일찍 시작된 무더위, 통창으로 바라보이는 건너편 공원의 나무가 플라타너스일지 백합나무일지 하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인사치레했다. 옆 테이블의 젊은 남녀가 음식이 담긴 접시와 서로의 모습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었다. 레스토랑의 스피커에서는 기타 전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딩딩딩 뜨리리리 딩도르르륵. 이어 중성적인 목소리가 노래했다. 안녕 엘레나. 네 전화번호를 잊어버렸어.
  찬영이 이래 쪽으로 쓱 고개를 들이밀면서 물었다.
  “언니는 고기보단 생선이죠?”
  “네?”
  “고기 안 드시죠?”
  “아예 안 먹는 건 아니지만, 네, 맞아요, 생선이 좋아요.”
  “글쎄 그럴 것 같더라니까요. 그럼 꿀대구 스테이크 추천할게요.”
  “으음. 그거 괜찮겠네요.”
  그들은 빠에야, 문어 요리, 뇨끼, 대구 스테이크, 화이트와인을 시켜 놓고 나누어 먹었다. 대구 살이 부드럽고 담백했으며 소스의 풍미나 꿀의 달기도 적당하니 좋았다. 이래는 입맛에 잘 맞는다고,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찬영은 이래가 무엇을 좋아하고 또 무엇을 꺼릴지를 얼른 간파해내는 것이 즐거운 게임이라도 되는 양 호기심을 드러내며 이것저것 물었다.
  “왼손잡이죠? 노란색이 잘 어울리지만, 옷은 무채색으로 입는 걸 좋아하고요?”
  이래는 흰 블라우스에 검은색 진을 입고 있는 데다 왼손으로 포크를 쥐고 있었던 만큼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는 술에 약하고 특히 와인은 몇 모금만 마셔도 머리가 핑 도는 듯 느껴져서 삼가는 편이었는데도, 어쩐 일인지 물 대신에 계속 와인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찬영이 이래의 반응을 살피다가 이전의 질문을 수정하거나 자기 이야기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대화를 주도해갔다. 그렇게 해서 이래가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반려동물이 없다는 사실을 맞췄고, 사진 보정 일을 겸해왔다는 이야기도 끌어냈다. 이래는 대개의 고객이 최대한의 보정 효과와 최대한의 자연스러움을 둘 다 원하는데, 그 기대치가 사람마다 미세하게 달라서 어렵고도 흥미롭다고 했다.
  “손재주가 좋으신가봐요. 아니지, 센스가 좋다고 해야 하는 건가? 저는 아이랑 시간을 더 보내려고 올해는 되레 일을 좀 줄였어요. 월화수목에 다섯 시간씩만 근무해요.”
  찬영은 소아치과의 치위생사라고 했다. 어렸을 때 치과에 가면 어찌나 덜덜 떨면서 서럽게 울었던지 의사가 진료 중에 집으로 돌려보낸 적도 있는데, 지금은 지레 겁을 먹고 악을 쓰는 아이들의 입속을 끈질기게 잘도 들여다본다면서,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래는 술기운에 볼이 발그레해진 채로, 이 대화에서 슬쩍 뒤로 빠져 있는 미호의 표정을 살폈다. 도쿄에서 설탕공예를 공부하게 될 미호야말로 손재주에 대해서 할말이 많은 사람일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미호는 그와 눈길이 닿을 때마다 빙그레 웃으며 적절한 추임새만 넣을 뿐이었다. 정말로? 좋지. 아니. 그건 맞아. 그리고 찬영 대신에 가리비와 새우의 껍질을 떼어내 승우의 접시에 살만 골라 담아주었다.
  “미호 이모, 이모도 먹어요. 이거, 요거, 조것도.”
  승우는 미호를 ‘미호 이모’라고 불렀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오물오물 야무지게 씹어 먹는 모습이 귀염성 있었다. 엄마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데 심통을 부리지도, 위축되지도 않는 듯했다. 자기를 둘러싼 어른들보다는 레스토랑의 벽에 걸려 있는 투우사와 검은 소 그림에 훨씬 관심이 쏠리는지 그쪽으로 목을 빼며 눈을 굴리곤 했다.
  “승우는 복스럽게 잘 먹네. 저 그림 멋지지?”
  이래가 미소를 머금고 알은체하자 승우가 양팔을 펼쳐 뭐라고 대답하려다 포크를 손에서 놓쳐버렸다. 아이의 흰 티 여기저기에 붉은 소스가 튀었다. 승우는 주먹으로 제 이마와 눈가를 쓱쓱 닦더니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으로 손을 뻗었다.
  “얘, 얘, 그냥 둬.”
  미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이를 말렸다.
  “여기 있어, 여기.”
  이래가 새 포크를 집어 승우의 자리에 놓아주었다.
  “못 말려. 젠장!”
  찬영이 얼굴을 찡그리며 갑자기 낙담하는 조로 내뱉자, 승우가 냉큼 손을 닦고 오겠다고 했다. 레스토랑의 직원이 다가와 바닥에 떨어진 포크를 치우고 빈 와인병을 가져갔다. 미호가 화장실이 있는 2층으로 아이를 데려갔다.
  “못 말린다고요?”
  테이블에 단둘이 남게 되자 이래가 찬영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는 차마 젠장이라는 말은 옮기지 못했다.
  “네?”
  “좀 전에 말이에요.”
  “네. 그런데요.”
  “포크를 떨어뜨린 것뿐인데요. 아이잖아요.”
  “고집쟁이예요. 꼴 보기 싫은 것만 닮았어.”
  “포크가 떨어진 것뿐이에요.”
  찬영이 일어난 일보다 훨씬 커다란 뭔가를 부정하듯이 고개를 가로저었고, 눈시울에 눈물이 어리며 얼굴이 붉어졌다.
  “요새 매일 극기 훈련 중이라서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찬영은 작년에 남편과 지저분한 모양새로 갈라섰다고, 일말의 여지도 없이 ‘완전히 찢어졌다’고 했다. 목소리를 한껏 낮추긴 했지만, ‘찢어졌다’는 단어가 야멸차게 느껴지도록 발음했다.
  이래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찬영이 대화의 창을 다른 데로 거침없이 열어젖혔다. 이래가 남편과 사별한 후 어떻게 지내왔는지, 혹은 견뎌왔는지 만나서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다는 거였다.
  “미호한테서 들었어요. 남편분이 러닝 중에……”
  “쇼크로 갑자기 갔어요.”
  이래는 남의 목소리로 듣고 싶지 않던 말을 얼른 제 입으로 흘려보냈다. 테이블 위에 두었던 왼손을 무릎 위로 가만히 가져왔다.
  “매장에서 선물용 패키지를 포장하는 언니를 봤어요. 반짝반짝하는 금색 포장지를 들고 웃더라고요. 근데 편안하고 좋아 보였어요. 저로 말하자면……”
  찬영은 어려서 만난 전남편과의 모진 인연에 데여서인지 새로운 사람을 볼 때 무슨 전조 같은 걸, 밀물과 썰물처럼 서로를 당기고 밀어내는 기운을, 혹은 특유의 냄새 같은 걸 느끼며 촉을 세우게 된다고 했다. 그 감이 맞는 건지 어떤지를 늘 식품 제조 일자 보듯이 확인하고 싶어진다면서.
  “그냥 그렇게 동동거리면서 살아요.”
  찬영이 한숨을 푹 쉬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이래는 이런 노골적인 질문과 고백을 처음 받아보았기에 불쾌해할 겨를도 없었다. 알딸딸한 취기가 돌았고 심장이 귓가에서 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매주 금요일마다 자신을 잘 돌보려고 했다고 대꾸하고는, 그 말이 너무 뭉툭하고 불친절하게 들리지나 않을까 싶어서 찬찬히 다음 말을 이었다. 그의 생각에 지금 할 수 있는 말들은 실제로 해본 일에 관한 것뿐이었다.
  “요가와 명상을 해봤고, 웨스턴 일렉트릭의 초대형 빈티지 혼 스피커가 있는 음악카페에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들어봤고, 간디 자서전을 밑줄을 그으며 읽던 밤이 있고, 수신자가 없는 편지를 썼고요……”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대청소와 긴 낮잠, 반신욕, 아이쇼핑, 원석 브로치나 비즈 팔찌를 만드는 데 몰두해 잡념을 덜어내려고 했던 건 생략했고, 주말마다 뮤지컬 공연장의 물품 보관소에서 일한다는 사실은 일부러 함구했다. 찬영이 다음 화제를 뮤지컬 무대로까지 끌고 간다면 서로 급격히 피로해질지도 몰랐다.
  “오. 이제 언니는 자의 반 타의 반 좀 쉬어가게 되겠네요. 마침 난 다음 주에 진짜 휴가예요.”
  미호와 승우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테이블에 다시 넷이 둘러앉게 되자, 찬영이 갑자기 명랑하게 굴며 말했다.
  “쉴 때 우리 또 한번 봐야죠.”
  찬영이 전화번호를 교환하자며 가방에서 휴대폰을 찾아 꺼냈다.
  이래는 찬영이 실제로 구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또 제 말 중에 무엇을 귀담아듣고 무엇을 흘려보냈는지, 작은 위안이나 웃음거리라도 찾아냈는지, 아니면 실망감에 진저리가 쳐지는 걸 인내하고 넘어간 것이나 아닌지 살펴볼 수가 없었다. 타이밍을 놓쳤다.

*

나흘 뒤 아침에 미호가 인천공항에서 도쿄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이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래는 주방 식탁에 앉아 휴대폰 어플로 날씨와 미세먼지 농도를 막 확인한 참이었다. 빨래를 말리기에도, 비행하기에도 쾌적하니 좋은 날이 될 것이었다.
  “짐은 다 잘 챙겼어요? 어젯밤에 잠은 잘 잤고요?”
  이래는 공항에서 짐가방을 끼고 서 있을 미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모든 인연의 정확한 엔딩을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건 슬픔일까, 기쁨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짐은 많지 않아요. 잠은 좀 설쳤고요. 지금 생각나는 사람한테 다 전화를 돌리는 중이에요. 행운을 빌어달라고 하려고요. 저만의 징크스 같은 거예요.”
  “부러워요. 잘될 거예요. 건강하기만 해요.”
  “궁금한 것도 있는데 지금 물어봐도 되려나?”
  “뭔데요?”
  “접때 찬영이한테 간디 자서전 이야기했다며요?”
  “아이쿠, 잊어버려요. 제가 별말을 다 했네요.”
  “찬영이가 그 책 두꺼워서 자기는 다 못 읽겠다고, 줄 쳤던 부분 중에서 하나만 알고 싶다고 그러던데 말이죠.”
  “지금 같이 있어요?”
  “아뇨. 절 배웅해주러 왔다가, 아까 집에 갔어요.”
  “아아.”
  “하나만요.”
  “아무리 꿰맨다 해도 상처는 역시 상처다.”
  “그랬어요, 간디가?”
  “내 기억이 맞는다면요.”
  “그게 그 책의 핵심이라는 거예요?”
  “아니,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살면서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게 있다니까, 나도 뭘 억지로 꿰매려고 애쓰지 말아야지, 그러면서 줄을 쳤었죠.”
  “하하.”
  “네. 하하.”
  “찬영이랑 승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 소개한 거예요.”
  “네. 고마워요.”
  “이따가 찬영이가 전화할 거예요, 아마도. 알고 보면 여린 친구예요.”
  “아마도? 이따가?”
  “네. 이것도 징크스니까 어서 오케이라고 해주세요.”
  “네네. 오케이.”
  이래는 통화를 마치고 커피를 내리려고 손을 닦고 원두를 갈았다. 필터에 원두 가루를 덜어 넣고 드리퍼에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었다. 첫물을 다 내리고 나자 그는 마음이 갑자기 조급해졌다. 이런 기다림은 마땅하지 않다는 생각이 찾아들었다. 한 다리 건너 듣는 위인의 명언보다는 그의 목소리가 한 박자 먼저 도착하도록 하는 게 나을 듯했다. 그는 커피 내리기를 그만두고 식탁에 앉아 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이 다섯 번 울리고 난 후 연결되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승우였다.
  “엄마는 지금 전화 못 받아요.”
  “안녕!”
  “누구신데요?”
  돌아보면, 이래는 온전한 자신으로 이완되려는 금요일이 제일 막막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화요일이요.”
  “그래. 지난주 금요일에 우리 같이 점심 먹었는데, 기억나니?”
  “네. 엄마는 지금 샤워해요. 샤워하면 오래 해요.”
  “너도 공항에 따라갔었니?”
  “아뇨. 일찍 일어나는 거 힘들어요.”
  “아, 그랬구나. 그럼 승우는 쉬운 거, 재미있는 게 뭐야? 혼자 있을 때 뭘 하니? ”
  “아무것도 안 해요. 엄마는 저 싫어해요. 엄마는 돈을 좋아해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저는 엄마 안 싫어하고요. 아빠도 안 싫어하고요.”
  이래는 이 문답을 어떻게 멈추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도 그다지 자신이 없었다. 아이는 그에게 어려운 존재였다. 어린 날의 어떤 기억들은 그에게 너무 선명해서 마치 영혼에 새겨진 시간의 각인처럼 남았다.
  “엄마가 아픈 건 비밀이 아니에요. 올 때 오예스 사 오세요. 엄마랑 저랑 둘 다 그거 좋아해요. 여기가 어디냐면……”
  “승우야,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집 주소를 막 불러주려고 하는 거야. 우리 한 번밖에 보지 않았는데.”
  “미호 이모는 사장님이에요.”
  “뭐라고?”
  “미호 이모는 바보가 아니에요.”
  “그래, 알겠어. 이따 점심때쯤 갈게. 괜찮으면 승우가 엄마한테 전해줘. 주소 다시 한번 불러줄래?”
  승우가 주소를 또박또박 말하고서 집에서 가까운 전철역 이름도 가르쳐주었다. 이래는 홀린 듯 주소를 받아적긴 했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이런 게 아이의 짓궂은 장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아이가 스스로 다 완성할 수 없는 문장을 가지고 혼자 애를 쓰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오전 11시 반 경에 이래는 마트에서 오예스 한 상자와 체리 두 팩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계산대에 줄을 섰을 때는 산 것들을 집으로 가지고 가야 할지, 승우네로 가져가야 할지 고민이 되었는데, 다행히도 너무 늦지 않게 찬영의 메시지를 받았다.
  ‘와요?’
  그도 짧게 답신을 보냈다.
  “가요?”
  그러자 찬영에게서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승우가 엉뚱한 말 많이 하죠?”
  “미호 이모는 바보가 아니라고 하던데요.”
  이래가 먼저, 그리고 찬영이 뒤이어 웃음을 흘렸다.
  “혹시 이따 시간이 괜찮으시면 뵈어요, 집은 정말 엉망이라 집으로는 오시라고 못 해요. 다른 데, 더 나은 데서요.”
  “승우가 그런다고 해요?”
  “네. 아이랑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제가 그렇게 좋은 상태가 아니라서 그저 그런 시간만 보내고 있으니까 와서 같이 해주시면 정말 좋죠. 고마워요.”

그들은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시각에 찬영의 집에서 차로 이십 분 거리에 있는 미술관에서 만났다. 이래가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낸 곳이었다. 입구에 희고 커다란 곰 조각상이 서 있었는데, 승우가 그걸 보자마자 열광해서 찬영과 이래 모두 흐뭇해하며 마음을 놓았다.
  세 사람은 곰 조각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몇 장 찍고는 더위를 피해 얼른 실내로 들었다. 최근에 한 재단에서 청소년 그림 축제를 주최했던 모양으로, 행사 현장 사진과 전국에서 모여든 학생들의 그림, 초대 작가 작품들이 건물 안팎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승우는 어느 커다란 그림을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열두 사람이 열두 개의 작품을 이어붙여 완성한 긴 기차 그림이었다. 기차가 실어나르고 있는 것들은 사람처럼 표현된 개, 물고기, 새, 구두, 나무, 금, 하트 문양이었고, 다섯번째 객실에 노인 둘, 청년 셋, 연인 한 쌍이 모여 앉아 있었다. 승우는 그림을 가리키며 저게 뭐냐고 묻지 않고, 기차가 어디로 가는 중이냐고 물었다.
  승우가 기차의 길이를 가늠하려고 양팔을 활짝 벌리고서 첫번째 그림부터 열두번째 그림까지 꽃게처럼 옆걸음으로 걷고 있는 걸 보면서, 이래가 감탄조로 찬영에게 말했다.
  “뭔가 소질이 있는 게 아닐까요?”
  찬영이 대번에 코웃음을 치며 아니라고 못 박았다.
  “미술학원에도 보내보고, 댄스학원에도 보내봤는데, 둘 다 며칠 다니다가 말더라고요. 못 말려. 끈기가 없는 것까지 닮아서는.”
  두 구역으로 나뉜 전시 공간 중 한 곳을 다 돌아보고 나오니 어린이체험학습관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나왔다. 가이드가 승우를 발견하고는 세 사람을 학습관 쪽으로 안내했다.
  유리문 안쪽에서 긴 책상을 나눠 쓰며 가위로 열심히 색종이를 조각내는 아이들 여섯 명이 보였다. 구슬과 반짝이, 색종이로 만화경을 만들어보는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었다. 완성된 만화경에 줄을 달아 목걸이처럼 걸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승우가 안쪽을 넘겨보며 들어가기를 망설이자 찬영이 승우의 등을 떠밀었다.
  “엄마는 저거 너무 갖고 싶네.”
  승우가 이래와 찬영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하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우린 좀 쉬어요.”
  이래와 찬영은 거의 동시에 체험관 밖에 놓인 주황색 빈백을 돌아봤다. 좀 전부터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은근히 주시해왔기 때문에, 그들은 빈자리를 놓칠세라 얼른 그리로 가서 반쯤 눕듯이 몸을 묻었다. 두 사람 모두 웃음이 터졌다.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고, 찬영이 기지개를 켜며 하품했다.
  “미호는 잘 도착했대요. 아까 통화했어요,”
  찬영이 말했다.
  “네.”
  이래가 짧게 대꾸했다.
  “있잖아요, 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지 뭐예요.”
  찬영이 말했다.
  “좋네요.”
  이래가 또 짧게 대꾸했다.
  “누구냐고 물어봐도 되는데요.”
  “누군데요?”
  “의사예요.”
  “음. 같은 병원 의사요?”
  “아니요. 제 주치의요.”
  이래는 승우가 한 말이 떠올랐다. 엄마가 아픈 건 비밀이라고 했던가, 비밀이 아니라고 했던가.
  “저 생각보다 좀 심각해요.”
  찬영이 말했다.
  “짝사랑인 걸까요?”
  이래가 짐짓 장난스럽게 물었다.
  “저한테 의심되는 병이 있대요. 확진 단계는 아니에요. 드문 질환이고, 완치 개념은 없어요. 제 경우엔 좀 오래 두고 지켜봐야 한대요. 운이 좋으면 그럭저럭 괜찮을 수도 있지만, 멀쩡하다가 하루아침에 급격히 안 좋아질 수도 있다고 들었어요. 인생사 너무 복불복 같아요.”
  이래가 병명을 묻자 찬영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그냥 좀 길다고만 대꾸했다.
  “어디가 안 좋은 거예요?”
  “심장. 심장 근육. 병원 가기 너무 싫고 무서워서, 그래서, 그냥 주치의를 사랑하려고요.”
  “다음 진료일 언제인데요?”
  “내달 9일이요.”
  “내가 같이 가줄까요. 그때 시간 괜찮아요. 의사 선생님 미남이시길.”
  “여자 선생님이에요. 약간 매정한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그렇구나.”
  “그렇다고 이미 한 말 취소하는 건 아니겠죠?”
  “아니죠.”
  “고마워요. 그럼 공평하게 언니도 힘들 때 나한테 말해줘요.”
  “음. 안 되겠어요. 남편한테만 해봤던 거라서 그건 많이 곤란해요. 그이가 서운해할 거예요. 나는 시간이 더, 조금 더 필요해요.”
  “맞아요. 그래요. 시간이 문제예요. 필요하고, 문제이고, 또 너무너무 고맙죠.”
  승우가 알록달록한 색종이로 꾸민 원기둥 모양의 종이 만화경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찬영이 그걸 받아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우리 승우, 만들기엔 소질이 있는 걸까요?” 하고서 이래한테도 어서 한번 봐보라고 건네주었다. 이래가 만화경을 눈에 대고 천천히 돌려보니 글리세린에 잠긴 반짝이는 작은 구슬들이 춤추듯이 움직거리며 꽃처럼 피어났다.

그날 밤에 이래는 꿈을 꾸었다. 엄청난 축제일이었고 거리마다 그가 모르는 이들과 아는 이들이 가득했다. 그는 인파를 헤치고 스페인 레스토랑으로 찾아 들어갔다. 두리번거리며 원오를 찾았다. 이래가 간절히 바랐으므로, 아마 그런 이유에서 원오가 홀연히 그의 맞은편 저 너머에 나타났다. 건장한 체격에, 흰색 반 팔과 반바지 차림의 젊은 모습으로. 두 사람의 눈길이 닿았지만 이래는 차갑게 얼어붙어 그에게 손을 흔들 수조차 없었다. 그때 문득 이래는 자기가 매우 늙은 모습이라는 걸 깨달았다.
  삶이 한여름 밤의 꿈 같아.
  이래가 입 모양만으로 말하자 원오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마도 잘 알아들었다는 의미인 듯했다. 그 순간 누군가 레스토랑의 문을 쳐부수고 쳐들어와 이래의 뺨을 쳤다. 이래는 놀랐고 아팠지만, 여전히 웃는 듯이 보이는 원오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마음이 한결 놓이며 가슴속이 시원해졌다. 이제 그는 다른 소망이 찾아와 그를 일으켜주기를 기다렸다. 이를테면, 부서진 문 앞에서 누군가 뺨을 맞고 울고 있을 때, 다른 누군가가 기도하며 그리로 걸어 들어온다는 사실 같은 것을. 그로부터 시작되는 이 축제의 기타 등등을.

기준영

2009년 단편 「제니」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내일을 위한 힌트』 『사치와 고요』 『이상한 정열』 『연애소설』, 장편 『우리가 통과한 밤』 『와일드 펀치』가 있다.

이른 아침에 소설의 첫 문장을 쓰고서 밖으로 나섰다. 사람들이 생의 어느 구간에서든 음률처럼 이어진다면 다행스러울 것 같았다. 이태훈의 앨범 ‘조그만 너를 위한 한 문장’ 중 ⟨앞에 서 있네⟩를 들으며 길을 건널 때, 가로수, 상점, 행인들의 표정이 다른 세계의 풍경처럼 보였고, 몇몇 문장이 더 떠올랐다.

2026/04/15
7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