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얌마의 기둥 집
얌마의 기둥 집 붕 뜬 도로가 강변을 따라 뻗어 있다. 반듯한 자세로 늘어서서 도로를 떠받치는 회색 기둥들. 그 기둥들 가운데 특별한 기둥이 하나 있다. 마을이 끝나는 곳, 숲이 시작되는 경계에 있는 그 기둥을 만나려면, 다리 밑 산책로를 따라가면 된다. 사람들은 그 기둥에 기댄 채 더운 숨을 몰아쉬거나 강 너머를 바라본다. 그러나 아무도 기둥의 비밀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 비밀을 아는 것은 무언가를 또는 누군가를 놓치고 잠을 설친 당신과 얌마뿐이다.
실룩한 잿빛 방둥이가 강변 산책로로 내려섰다. 핀의 발걸음이 저절로 그리로 향했다. 방둥이가 닮았다. 핀의 고양이도 한쪽 방둥이에 살이 더 쪄서 걸을 때마다 짝짝이가 도드라지곤 했다. (짝방댕이는 2년 전에 떠났다) 흰 나비가 녀석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나비를 쫓아 고개를 돌린다. 핀의 고양이가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던 각도다. 핀은 흠칫 놀랐다.
“뭐야, 저 괴상야릇한 녀석은?”
벌에 쏘인 듯 동그랗게 부푼 코, 빨간 수염. 뾰족한 귀는 스치기만 해도 상처가 날 것 같다. 이마에는 상처가 아문 것처럼 불룩하게 솟은 자리가 있다. 녀석은 핀의 기척을 알아챘을 텐데 시치미를 뚝 뗀 걸음걸이로 가던 길을 갔다. 사람들 몇이 지나갔지만, 아무도 녀석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노을빛이 물결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강변 산책로로 내려선 녀석은 삼 초쯤 강을 바라보더니 풀숲으로 들어갔다. 잿빛 꼬리가 풀더미 위에서 흔들리면서 숲 쪽으로 움직였다. 핀은 멀찍이 떨어져 건들거리면서 뒤따라갔다. 행복한 저녁이다. 지금쯤 친구들은 딱딱한 학원 의자에 엉덩이를 비비고 있을 텐데. 시험 문제집만큼 열린 창문 너머로 이 하늘을 훔쳐보고 있을까. 살랑거리던 녀석의 꼬리가 멈췄다. 녀석이 풀숲에서 나와 한 기둥 앞에 앉아 앞발을 핥아댔다. 고가도로는 그 기둥을 기점으로 오른쪽으로 구부러지면서 강변을 벗어나 산 쪽으로 뻗어 있다. 강물을 어지럽히던 빛이 스러지고 주위가 어스름해진다. 강 건너에 네모난 불빛 기둥이 세워졌다. 녀석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시멘트 기둥에 앞발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리드미컬하게 기둥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야, 넌 스크래치 취향도 참 별나다. 발톱 부러지겠어.”
핀이 다정하게 말을 걸자 녀석이 돌아보았다. 볼록한 이마에 막 솟은 하얀 달빛이 내려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생기다 만 뿔 같다. 핀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녀석의 방둥이를 토닥였다. 녀석이 앞발로 툭 핀의 손을 쳐냈다.
“캭, 버릇없이.”
핀의 손등에 길게 피가 맺혔다.
“미안. 오늘은 좀 만지고 싶어서 그래. 말랑하고 따듯한 그런 거.”
“그런 건 네 주위에서 찾아.”
“근데, 넌, 뭐야?”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핀은 그렇게밖에 물어볼 수 없었다. 녀석이 대꾸도 없이 기둥에 다시 두 발을 올려놓았다.
“너, 이상해. 가르쳐줘. 넌 뭐니?”
“얌마.”
“……”
“얌마라고. 이제 네 세상으로 꺼져줄래?”
핀이 큭 웃었다.
“놀랐잖아. 욕하는 줄 알고. 너 같은 종을 얌마라고 해? 아니면 그게 네 이름이야?”
그때였다. 얌마가 스크래치를 낸 곳에 점 같은 불빛이 나타났다. 반딧불이 같은 불빛은 점점 늘어나 피자만한 동그라미가 되었다. 기둥 속에서 누군가 불을 비추는 것처럼 환한 동그라미다. 얌마가 귀를 쫑긋 세우고 기둥을 한 바퀴 돌면서 주위를 살폈다. 이어폰을 꽂은 사람이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기둥 옆을 달려 지나갔다. 얌마가 둥근 빛 한가운데 앞발을 대자 뻥 뚫렸다. 문 같은 것이 위로 착 올라간 것 같기도 하고 양옆으로 싹 갈라진 것 같기도 했다. 핀의 입이 벌어졌다.
“와, 네 집이구나.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시멘트 기둥 집이야? 숲에 가면 멋들어진 나무 기둥도 많은데.”
얌마가 기둥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다가 핀을 돌아봤다.
“꺼지라구.”
“얌마, 나도 들어가도 돼?”
핀이 미소를 띤 채 물었다. 얌마의 눈에 파란빛이 차오르더니 반짝 했다.
“너 같은 눈빛을 알아. 웃고 있지만, 속에서 뭔가 쏟아질 것 같은 눈빛이야.”
그러더니 기둥 속으로 슥 사라졌다. 때마침 고가도로 위에서 쿨렁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기둥이 얌마를 한입에 꿀꺽 삼키는 소리 같았다. 핀은 얼른 몸을 종이처럼 뭉쳐서 기둥 속에 집어넣었다. 몸이 붕 뜨는 것 같더니 뒤따라오던 빛이 탁 꺼졌다. 핀은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어디서 뿜어져 오는지 알 수 없는 희뿌연 빛이 둥글게 차 있었다. 천장은 어디론가 이어진 캄캄한 터널 같았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기괴한 물체들이 둥근 벽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나같이 묘한 빛깔과 모양을 가지고 있었는데 투명한 선반에 놓인 듯 흔들림이 없었다.
“와, 이게 다 뭐야? 저건 그리핀처럼 생겼다.”
핀이 손을 뻗으려고 했다.
“캭, 함부로 만지지 마.”
얌마가 핀의 팔을 쳐내고 뒷다리를 접으면서 바닥에 방둥이를 툭 내려놓았다. 핀이 긁힌 팔을 문지르면서, 얌마 앞에 앉았다. 얌마의 부푼 코를 유심히 쳐다보다 핀이 물었다.
“넌 상상 속의 동물, 뭐 그런 거니?”
“얌마라니까.”
핀이 벽을 둘러싼 물체들을 올려다봤다.
“저것들은 다 뭔데?”
얌마가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그 위에 못생긴 얼굴을 얹었다.
“보면 몰라? 작품이잖아.”
“와, 네가 만든 거야? 공예가 뭐 그런 거구나. 재료가 뭐야?”
“못다 한 말.”
“못다 한 말이라니?”
“갑자기 누군가 죽었다 쳐. 살다보면 그런 일이 있잖아. 그때 남은 사람들이 미처 못한 말이 있을 거 아냐.”
핀이 말했다.
“그 사람이 죽고 나니까, 그제서 생각나는 그런 말?”
“그래.”
“나 있어. 그런 말.”
얌마가 눈을 반쯤 뜨고 핀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 앞발을 가지런히 세웠다. 그러자 붉은 수염이 둥글게 위로 뻗쳤다. 얌마가 몸통 밑에 깔았던 꼬리를 꺼내 부드럽게 몇 번 흔들다가 핀의 발을 툭 건드렸다. 핀의 발목부터 나른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졌다.
“얌마, 기분이 이상해.”
이상하게 자꾸 아빠 생각이 나서 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더 또렷하게 그 얼굴이 떠올랐다. 숨을 쉬는 사이 속말이 툭 튀어나왔던 그 날, 아빠의 얼굴. 핀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아이씨.”
핀이 두 팔로 머리를 싸안았다.
아빠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그 말은 생각일 뿐이었다. 생각이 말이 되는 건 더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과정을 뛰어넘어서 그 말이 공기 중에 울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핀도 알 수가 없었다. 핀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런 생각하잖아. 저 사람이 없어졌으면 하는 거. 아무리 가족이라도.”
“난 몰라.”
“아빠는, 어른이, 왜 그렇게밖에 못 살았을까?”
“난 모른다니까.”
핀이 얌마의 뾰족한 귀를 쳐다봤다. 거기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몸속 어딘가가 따끔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아빠가 문구점을 차린 지 이 년 만에 문구점은 망했다. 사람들은 삼거리 지하에 생긴 큰 문구 매장에서 쇼핑을 했다. 아빠를 짓누른 것이 빚이었을까. 상처 난 자존심이었을까. 핀은 알 수가 없었다. 아빠는 인생이 끝장난 것 같은 표정으로 지냈다. 엄마가 친구가 한다는 양말 공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조그만 지하 공장에서 엄마는 하루 종일 양말을 뒤집었다. 거리가 멀어서 숙직실에서 지내다가 일주일에 이틀만 집에 왔다. 그럭저럭 집의 경제가 유지됐다. 엄마가 가져온 불량 양말도 신을 만했다. 그 정도면 최악의 상황은 지났다고 생각했다. 핀의 목소리가 기둥 집에 차곡차곡 쌓였다.
“난 아빠가 무언가 하길 바랐어. 가족을 위해서, 아니 아빠 자신을 위해서. 밥을 하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그게 싫으면 산책 같은 거라도 말이야.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일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어.”
그러나 아빠는 아무것도 하려 들지 않았다. 술 먹고, 자고, 술 먹고, 자고. 다음날 술병을 치우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 일이 지겹게 반복되었다.
“내가 아는 아빠는 그보다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는 사이 엄마가 가져오는 불량 양말이 쌓였다. 불량 양말이 쌓일수록 엄마의 얼굴은 더 하얘졌다. 핀이 얼굴을 들어 얌마의 붉은 수염을 쳐다봤다.
“나도 빨간 거 하나 가지고 싶다. 빨간…… 머리칼이나 빨간 귀?”
“지금 네 귀가 빨개지고 있어.”
“어느 날부터인지 집에 아빠가 없는 편이 훨씬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더 행복할 것 같았어. 거추장스럽고 낡은 물건을 치웠을 때처럼 집이 환해질 것 같았어.”
“와, 빨간 귀다.”
“정말?”
핀은 귀를 만지작거렸다.
아빠는 비틀어진 담배꽁초 같았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고 싶었다. 아빠를 볼 때마다 그 생각은 점점 뚜렷해졌다. 아빠가 여행을 떠나서 돌아오지 않거나, 편지 하나 써놓고 새 인생을 찾아서 떠나는, 소설 속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건 그냥 생각이었다니까.”
핀은 새소리를 들은 것 같아 위를 올려다보았다. 캄캄하고 고요한 방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덤프트럭이 지나갔나 봐.”
얌마가 물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 네 바람처럼 사라졌니?”
“응. 갑자기.”
“좋았겠구나.”
“그래. 맞아. 그런데 이상해.”
“뭐가?”
핀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에 속삭이듯 말했다.
“이 세상에서 뿅 사라졌거든. 그런 게 어떤 건지 아니?”
“민들레는 봄이 되면 다시 펴. 사라지지만 사라진 건 아냐.”
“그건 그렇지. 그런데 아빠는 아냐. 사라졌다가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는 게 아니라, 아예 이 세상에서 없어진 거라니까. 아빠랑 이어졌던 세상의 모든 끈이 다 끊어졌다고나 할까?”
“음, 죽었구나.”
오랜만에 엄마가 귀가한 저녁이었다. 곧 들어오겠다던 아빠를 기다리면서 엄마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핀은 불량품 양말 중에서 덜 불량스러운 것들을 고르고 있었다. 휘우한테 한 켤레 줄까. 그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은 엄마가 멍한 표정으로 핀을 쳐다보다가 허둥지둥 집을 나갔다.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때 아빠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길에서 쓰러졌는데 뇌혈관 대동맥인가가 터져 뇌에 피가 가득 찼다고 했다. 뇌사라고 했다. 뉴스에서 가끔 듣던 말인데 핀은 그 말이 잘 다가오지 않았다. 끝났다는 것 같은데 아주 끝은 아니라는 건가. 아빠는 열흘쯤 누워 있다가 떠났다.
“그렇게 아빠가 죽었어. 모르는 사람에게 장기를 주고.”
“그랬군.”
“그렇게 가면 안 되는 거잖아. 몇 마디 말이라도 나누고 가야 하는 거잖아. 나, 가니까 하고 싶은 말 해 봐……”
“죽음의 신이 그렇게 친절하진 않아.”
응급중환자실에서 엄마는 퉁퉁 부은 아빠 손을 잡고 혼잣말을 했다. 죽을 때 청력이 가장 늦게까지 살았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모양이었다.
핀이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묵직한 누군가의 발이 가슴에 얹어진 것처럼 답답했다.
“아빠에게, 사라져, 라고 했던 날, 내가 무척 힘든 날이었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어.”
“네 진심이었잖아.”
“맞아. 그래도 그렇게 뱉어버리고 돌아서려던 건 아니었어.”
그다음에 할 말이 더 중요했다. 아빠는 왜 그렇게밖에 살지 못하는지 퍼부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예전의 웃는 아빠의 모습이 그립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입안에 남은 술이었는지 침이었는지, 아빠가 꿀꺽, 소리를 냈다. 소리가 커서 불쾌했다. 목구멍으로 무언가 넘어가는 소리가 그렇게 싫었던 건 처음이었다. 핀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꽝 닫아버렸다. 핀은 나중에 엄마에게 물었다. 아빠와의 마지막 시간에 무슨 말을 했냐고. 엄마는 자존심 강했던 아빠에게 일부러 상처가 될 말을 골라서 했던 일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때 엄마 말만 하느라, 아빠가 얼마나 힘든지 물어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단다. 그 말은 아빠에게 닿았을까. 핀이 혼잣말을 했다.
“아빠는 거리에서 쓰러지던 순간, 어땠을까.”
“어이쿠, 했겠지.”
“아빠도 그럴 줄 몰랐겠지.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가게 될 줄을 상상도 못했겠지. 나만큼 아니, 더 황당했을 거야. 그치?”
핀이 고개를 들어보니, 얌마 앞에 투명한 구슬이 하나 놓여 있었다.
“웬 구슬이야?”
“이 속에 너의 못다 한 말을 담을 거야. 작품이 될지 모르겠군.”
핀이 갸웃했다.
“내 말을 담는다고? 어떻게?”
“알 필요 없잖아. 자……”
얌마가 다그치듯 핀을 쳐다봤다. 핀이 물끄러미 구슬을 바라보다, 컴컴한 위쪽을 올려다보다 발등을 내려다봤다.
“음.”
핀이 입술을 달싹거리자, 얌마가 입을 벌려 송곳니를 드러내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에옹이나 뭉뭉, 같은 소리는 아니었다. 둥근 코가 부풀어서 자두만큼 커졌을 때, 얌마가 고개를 숙여 구슬에 뿔을 가져다 댔다. 핀이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핀의 입에서 나온 숨들이 반짝이면서 구슬 속으로 들어갔다. 구슬 속에 들어간 숨은 보랏빛과 푸른빛으로 변하더니 두 빛깔의 숨이 꽈배기처럼 꼬였다가 엉클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구슬의 모양이 변했다. 울룩불룩 솟았다가 가라앉더니 꽃잎처럼 벌어졌다. 핀의 목소리는 더듬거리다 떨렸다, 어떤 말은 신음 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다 입을 다물었다. 얌마가 구슬에서 뿔을 뗐다. 얌마가 지친 듯 빨간 수염을 축 늘어뜨리고, 작품을 요리조리 돌려보았다. 핀이 묘한 모양의 물체를 내려다봤다.
“그거야? 내 말이?”
“별일이군. 요즘에 만든 것 중에 꽤 볼만해.”
“그거, 아빠에게 줄 거니?”
“죽었다며?”
“혹시나 해서. 넌 얌마잖아.”
얌마가 한 발로 작품을 요리조리 만지작거리다가 휙 쳐냈다. 작품은 어딘가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핀이 소리쳤다.
“얌마, 뭐하는 거야?”
“충분히 감상했어.”
얌마가 헤어 볼을 토하듯 캑캑거렸다. 그러자 입에서 구슬이 하나 또르르 굴러나왔다.
“이게 진짜야. 자, 말해 봐.”
“뭘? 못다 한 말은 아까 다 했어.”
“오늘, 못한 말. 당장 해야 할 말.”
“그건…… 왜?”
“너도 알잖아.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지금 해야지. 지금 말해야지.”
핀이 눈을 끔벅이면서 얌마를 쳐다봤다.
“나한테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
“착각하지 마. 죽음의 신이 너한테만 친절할 리 없잖아.”
핀이 물끄러미 운동화 끈에 묻은 갈색 얼룩을 내려다봤다. 오늘…… 휘우가 슬퍼보여서, 너 괜찮아, 하고 물어봐 주고 싶었다. 아침에 엄마 어깨에 기대고 싶었다. 아빠 생각이 나서 힘들다고 말하고 싶었다. 핀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어떤 말들을 중얼거렸다. 얌마가 코를 부풀리더니 구슬에 뿔을 가져다 댔다. 핀이 말할 때마다 숨이 구슬 속으로 들어가 아롱다롱한 빛깔로 번졌다. 빛이 어우러지면서 구슬의 모양을 변화시켰다. 이번엔 느티나무 같기도 하고 브로콜리 같기도 한 모양이 되었다.
“아주 좋아.”
얌마가 작품을 앞발로 조심스레 들어올리자, 붕 떠올랐다. 핀이 눈을 떴을 때 얌마가 눈을 파랗게 뜨고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핀이 말했다.
“브로콜리 같잖아.”
“그 말을 네가 해버리면, 작품은 곧 사라질 거야. 아쉽지만, 어쩔 수 없어. 난 그동안만 작품을 감상하는 거야.”
“사라진다고?”
핀이 흘끗 벽 쪽에 빙 둘러쳐진 ‘작품’들을 쳐다보았다.
“그럼, 저것들은 왜 남아 있는 건데?”
“꼭 말해야지 하고선……”
얌마가 분홍 혀를 쭉 내밀고 하품을 했다. 커다랗게 벌어진 입이 얌마의 얼굴을 가렸다.
“아직까지 머뭇거리고 있는 바보들 거지. 나한테는 좋은 일이지. 오랫동안 감상할 수가 있으니까. 아, 피곤하고, 피곤하고……”
“알았어. 갈게.”
핀이 돌아서서 한 발을 내디뎠다. 몸이 살짝 들리는 것 같더니 쑥 아래로 꺼졌다. 둥근 구멍에 몸을 디밀자 기둥 밖에 나와 있었다. 돌아보니 회색 기둥에 암호 같은 스크래치가 나 있었다. 스크래치가 점점 흐려지더니 사라졌다. 핀은 기둥 집을 쓸어보았다. 차갑고 단단하게 닫혀 있었다. 핀은 기둥을 돌아서 어둑한 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갔다. 고가도로 위에서 차 소리가 시끄러웠다. 바퀴에 감겨 가던 달빛이 난간을 넘어 기둥 밑으로 떨어졌다. 핀은 핸드폰을 꺼냈다.
“휘우야, 나야, 핀. 뭐해?”
실룩한 잿빛 방둥이가 강변 산책로로 내려섰다. 핀의 발걸음이 저절로 그리로 향했다. 방둥이가 닮았다. 핀의 고양이도 한쪽 방둥이에 살이 더 쪄서 걸을 때마다 짝짝이가 도드라지곤 했다. (짝방댕이는 2년 전에 떠났다) 흰 나비가 녀석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나비를 쫓아 고개를 돌린다. 핀의 고양이가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던 각도다. 핀은 흠칫 놀랐다.
“뭐야, 저 괴상야릇한 녀석은?”
벌에 쏘인 듯 동그랗게 부푼 코, 빨간 수염. 뾰족한 귀는 스치기만 해도 상처가 날 것 같다. 이마에는 상처가 아문 것처럼 불룩하게 솟은 자리가 있다. 녀석은 핀의 기척을 알아챘을 텐데 시치미를 뚝 뗀 걸음걸이로 가던 길을 갔다. 사람들 몇이 지나갔지만, 아무도 녀석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노을빛이 물결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강변 산책로로 내려선 녀석은 삼 초쯤 강을 바라보더니 풀숲으로 들어갔다. 잿빛 꼬리가 풀더미 위에서 흔들리면서 숲 쪽으로 움직였다. 핀은 멀찍이 떨어져 건들거리면서 뒤따라갔다. 행복한 저녁이다. 지금쯤 친구들은 딱딱한 학원 의자에 엉덩이를 비비고 있을 텐데. 시험 문제집만큼 열린 창문 너머로 이 하늘을 훔쳐보고 있을까. 살랑거리던 녀석의 꼬리가 멈췄다. 녀석이 풀숲에서 나와 한 기둥 앞에 앉아 앞발을 핥아댔다. 고가도로는 그 기둥을 기점으로 오른쪽으로 구부러지면서 강변을 벗어나 산 쪽으로 뻗어 있다. 강물을 어지럽히던 빛이 스러지고 주위가 어스름해진다. 강 건너에 네모난 불빛 기둥이 세워졌다. 녀석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시멘트 기둥에 앞발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리드미컬하게 기둥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야, 넌 스크래치 취향도 참 별나다. 발톱 부러지겠어.”
핀이 다정하게 말을 걸자 녀석이 돌아보았다. 볼록한 이마에 막 솟은 하얀 달빛이 내려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생기다 만 뿔 같다. 핀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녀석의 방둥이를 토닥였다. 녀석이 앞발로 툭 핀의 손을 쳐냈다.
“캭, 버릇없이.”
핀의 손등에 길게 피가 맺혔다.
“미안. 오늘은 좀 만지고 싶어서 그래. 말랑하고 따듯한 그런 거.”
“그런 건 네 주위에서 찾아.”
“근데, 넌, 뭐야?”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핀은 그렇게밖에 물어볼 수 없었다. 녀석이 대꾸도 없이 기둥에 다시 두 발을 올려놓았다.
“너, 이상해. 가르쳐줘. 넌 뭐니?”
“얌마.”
“……”
“얌마라고. 이제 네 세상으로 꺼져줄래?”
핀이 큭 웃었다.
“놀랐잖아. 욕하는 줄 알고. 너 같은 종을 얌마라고 해? 아니면 그게 네 이름이야?”
그때였다. 얌마가 스크래치를 낸 곳에 점 같은 불빛이 나타났다. 반딧불이 같은 불빛은 점점 늘어나 피자만한 동그라미가 되었다. 기둥 속에서 누군가 불을 비추는 것처럼 환한 동그라미다. 얌마가 귀를 쫑긋 세우고 기둥을 한 바퀴 돌면서 주위를 살폈다. 이어폰을 꽂은 사람이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기둥 옆을 달려 지나갔다. 얌마가 둥근 빛 한가운데 앞발을 대자 뻥 뚫렸다. 문 같은 것이 위로 착 올라간 것 같기도 하고 양옆으로 싹 갈라진 것 같기도 했다. 핀의 입이 벌어졌다.
“와, 네 집이구나.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시멘트 기둥 집이야? 숲에 가면 멋들어진 나무 기둥도 많은데.”
얌마가 기둥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다가 핀을 돌아봤다.
“꺼지라구.”
“얌마, 나도 들어가도 돼?”
핀이 미소를 띤 채 물었다. 얌마의 눈에 파란빛이 차오르더니 반짝 했다.
“너 같은 눈빛을 알아. 웃고 있지만, 속에서 뭔가 쏟아질 것 같은 눈빛이야.”
그러더니 기둥 속으로 슥 사라졌다. 때마침 고가도로 위에서 쿨렁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기둥이 얌마를 한입에 꿀꺽 삼키는 소리 같았다. 핀은 얼른 몸을 종이처럼 뭉쳐서 기둥 속에 집어넣었다. 몸이 붕 뜨는 것 같더니 뒤따라오던 빛이 탁 꺼졌다. 핀은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어디서 뿜어져 오는지 알 수 없는 희뿌연 빛이 둥글게 차 있었다. 천장은 어디론가 이어진 캄캄한 터널 같았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기괴한 물체들이 둥근 벽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나같이 묘한 빛깔과 모양을 가지고 있었는데 투명한 선반에 놓인 듯 흔들림이 없었다.
“와, 이게 다 뭐야? 저건 그리핀처럼 생겼다.”
핀이 손을 뻗으려고 했다.
“캭, 함부로 만지지 마.”
얌마가 핀의 팔을 쳐내고 뒷다리를 접으면서 바닥에 방둥이를 툭 내려놓았다. 핀이 긁힌 팔을 문지르면서, 얌마 앞에 앉았다. 얌마의 부푼 코를 유심히 쳐다보다 핀이 물었다.
“넌 상상 속의 동물, 뭐 그런 거니?”
“얌마라니까.”
핀이 벽을 둘러싼 물체들을 올려다봤다.
“저것들은 다 뭔데?”
얌마가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그 위에 못생긴 얼굴을 얹었다.
“보면 몰라? 작품이잖아.”
“와, 네가 만든 거야? 공예가 뭐 그런 거구나. 재료가 뭐야?”
“못다 한 말.”
“못다 한 말이라니?”
“갑자기 누군가 죽었다 쳐. 살다보면 그런 일이 있잖아. 그때 남은 사람들이 미처 못한 말이 있을 거 아냐.”
핀이 말했다.
“그 사람이 죽고 나니까, 그제서 생각나는 그런 말?”
“그래.”
“나 있어. 그런 말.”
얌마가 눈을 반쯤 뜨고 핀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 앞발을 가지런히 세웠다. 그러자 붉은 수염이 둥글게 위로 뻗쳤다. 얌마가 몸통 밑에 깔았던 꼬리를 꺼내 부드럽게 몇 번 흔들다가 핀의 발을 툭 건드렸다. 핀의 발목부터 나른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졌다.
“얌마, 기분이 이상해.”
이상하게 자꾸 아빠 생각이 나서 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더 또렷하게 그 얼굴이 떠올랐다. 숨을 쉬는 사이 속말이 툭 튀어나왔던 그 날, 아빠의 얼굴. 핀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아이씨.”
핀이 두 팔로 머리를 싸안았다.
아빠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그 말은 생각일 뿐이었다. 생각이 말이 되는 건 더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과정을 뛰어넘어서 그 말이 공기 중에 울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핀도 알 수가 없었다. 핀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런 생각하잖아. 저 사람이 없어졌으면 하는 거. 아무리 가족이라도.”
“난 몰라.”
“아빠는, 어른이, 왜 그렇게밖에 못 살았을까?”
“난 모른다니까.”
핀이 얌마의 뾰족한 귀를 쳐다봤다. 거기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몸속 어딘가가 따끔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아빠가 문구점을 차린 지 이 년 만에 문구점은 망했다. 사람들은 삼거리 지하에 생긴 큰 문구 매장에서 쇼핑을 했다. 아빠를 짓누른 것이 빚이었을까. 상처 난 자존심이었을까. 핀은 알 수가 없었다. 아빠는 인생이 끝장난 것 같은 표정으로 지냈다. 엄마가 친구가 한다는 양말 공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조그만 지하 공장에서 엄마는 하루 종일 양말을 뒤집었다. 거리가 멀어서 숙직실에서 지내다가 일주일에 이틀만 집에 왔다. 그럭저럭 집의 경제가 유지됐다. 엄마가 가져온 불량 양말도 신을 만했다. 그 정도면 최악의 상황은 지났다고 생각했다. 핀의 목소리가 기둥 집에 차곡차곡 쌓였다.
“난 아빠가 무언가 하길 바랐어. 가족을 위해서, 아니 아빠 자신을 위해서. 밥을 하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그게 싫으면 산책 같은 거라도 말이야.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일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어.”
그러나 아빠는 아무것도 하려 들지 않았다. 술 먹고, 자고, 술 먹고, 자고. 다음날 술병을 치우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 일이 지겹게 반복되었다.
“내가 아는 아빠는 그보다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는 사이 엄마가 가져오는 불량 양말이 쌓였다. 불량 양말이 쌓일수록 엄마의 얼굴은 더 하얘졌다. 핀이 얼굴을 들어 얌마의 붉은 수염을 쳐다봤다.
“나도 빨간 거 하나 가지고 싶다. 빨간…… 머리칼이나 빨간 귀?”
“지금 네 귀가 빨개지고 있어.”
“어느 날부터인지 집에 아빠가 없는 편이 훨씬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더 행복할 것 같았어. 거추장스럽고 낡은 물건을 치웠을 때처럼 집이 환해질 것 같았어.”
“와, 빨간 귀다.”
“정말?”
핀은 귀를 만지작거렸다.
아빠는 비틀어진 담배꽁초 같았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고 싶었다. 아빠를 볼 때마다 그 생각은 점점 뚜렷해졌다. 아빠가 여행을 떠나서 돌아오지 않거나, 편지 하나 써놓고 새 인생을 찾아서 떠나는, 소설 속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건 그냥 생각이었다니까.”
핀은 새소리를 들은 것 같아 위를 올려다보았다. 캄캄하고 고요한 방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덤프트럭이 지나갔나 봐.”
얌마가 물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 네 바람처럼 사라졌니?”
“응. 갑자기.”
“좋았겠구나.”
“그래. 맞아. 그런데 이상해.”
“뭐가?”
핀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에 속삭이듯 말했다.
“이 세상에서 뿅 사라졌거든. 그런 게 어떤 건지 아니?”
“민들레는 봄이 되면 다시 펴. 사라지지만 사라진 건 아냐.”
“그건 그렇지. 그런데 아빠는 아냐. 사라졌다가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는 게 아니라, 아예 이 세상에서 없어진 거라니까. 아빠랑 이어졌던 세상의 모든 끈이 다 끊어졌다고나 할까?”
“음, 죽었구나.”
오랜만에 엄마가 귀가한 저녁이었다. 곧 들어오겠다던 아빠를 기다리면서 엄마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핀은 불량품 양말 중에서 덜 불량스러운 것들을 고르고 있었다. 휘우한테 한 켤레 줄까. 그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은 엄마가 멍한 표정으로 핀을 쳐다보다가 허둥지둥 집을 나갔다.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때 아빠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길에서 쓰러졌는데 뇌혈관 대동맥인가가 터져 뇌에 피가 가득 찼다고 했다. 뇌사라고 했다. 뉴스에서 가끔 듣던 말인데 핀은 그 말이 잘 다가오지 않았다. 끝났다는 것 같은데 아주 끝은 아니라는 건가. 아빠는 열흘쯤 누워 있다가 떠났다.
“그렇게 아빠가 죽었어. 모르는 사람에게 장기를 주고.”
“그랬군.”
“그렇게 가면 안 되는 거잖아. 몇 마디 말이라도 나누고 가야 하는 거잖아. 나, 가니까 하고 싶은 말 해 봐……”
“죽음의 신이 그렇게 친절하진 않아.”
응급중환자실에서 엄마는 퉁퉁 부은 아빠 손을 잡고 혼잣말을 했다. 죽을 때 청력이 가장 늦게까지 살았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모양이었다.
핀이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묵직한 누군가의 발이 가슴에 얹어진 것처럼 답답했다.
“아빠에게, 사라져, 라고 했던 날, 내가 무척 힘든 날이었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어.”
“네 진심이었잖아.”
“맞아. 그래도 그렇게 뱉어버리고 돌아서려던 건 아니었어.”
그다음에 할 말이 더 중요했다. 아빠는 왜 그렇게밖에 살지 못하는지 퍼부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예전의 웃는 아빠의 모습이 그립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입안에 남은 술이었는지 침이었는지, 아빠가 꿀꺽, 소리를 냈다. 소리가 커서 불쾌했다. 목구멍으로 무언가 넘어가는 소리가 그렇게 싫었던 건 처음이었다. 핀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꽝 닫아버렸다. 핀은 나중에 엄마에게 물었다. 아빠와의 마지막 시간에 무슨 말을 했냐고. 엄마는 자존심 강했던 아빠에게 일부러 상처가 될 말을 골라서 했던 일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때 엄마 말만 하느라, 아빠가 얼마나 힘든지 물어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단다. 그 말은 아빠에게 닿았을까. 핀이 혼잣말을 했다.
“아빠는 거리에서 쓰러지던 순간, 어땠을까.”
“어이쿠, 했겠지.”
“아빠도 그럴 줄 몰랐겠지.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가게 될 줄을 상상도 못했겠지. 나만큼 아니, 더 황당했을 거야. 그치?”
핀이 고개를 들어보니, 얌마 앞에 투명한 구슬이 하나 놓여 있었다.
“웬 구슬이야?”
“이 속에 너의 못다 한 말을 담을 거야. 작품이 될지 모르겠군.”
핀이 갸웃했다.
“내 말을 담는다고? 어떻게?”
“알 필요 없잖아. 자……”
얌마가 다그치듯 핀을 쳐다봤다. 핀이 물끄러미 구슬을 바라보다, 컴컴한 위쪽을 올려다보다 발등을 내려다봤다.
“음.”
핀이 입술을 달싹거리자, 얌마가 입을 벌려 송곳니를 드러내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에옹이나 뭉뭉, 같은 소리는 아니었다. 둥근 코가 부풀어서 자두만큼 커졌을 때, 얌마가 고개를 숙여 구슬에 뿔을 가져다 댔다. 핀이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핀의 입에서 나온 숨들이 반짝이면서 구슬 속으로 들어갔다. 구슬 속에 들어간 숨은 보랏빛과 푸른빛으로 변하더니 두 빛깔의 숨이 꽈배기처럼 꼬였다가 엉클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구슬의 모양이 변했다. 울룩불룩 솟았다가 가라앉더니 꽃잎처럼 벌어졌다. 핀의 목소리는 더듬거리다 떨렸다, 어떤 말은 신음 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다 입을 다물었다. 얌마가 구슬에서 뿔을 뗐다. 얌마가 지친 듯 빨간 수염을 축 늘어뜨리고, 작품을 요리조리 돌려보았다. 핀이 묘한 모양의 물체를 내려다봤다.
“그거야? 내 말이?”
“별일이군. 요즘에 만든 것 중에 꽤 볼만해.”
“그거, 아빠에게 줄 거니?”
“죽었다며?”
“혹시나 해서. 넌 얌마잖아.”
얌마가 한 발로 작품을 요리조리 만지작거리다가 휙 쳐냈다. 작품은 어딘가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핀이 소리쳤다.
“얌마, 뭐하는 거야?”
“충분히 감상했어.”
얌마가 헤어 볼을 토하듯 캑캑거렸다. 그러자 입에서 구슬이 하나 또르르 굴러나왔다.
“이게 진짜야. 자, 말해 봐.”
“뭘? 못다 한 말은 아까 다 했어.”
“오늘, 못한 말. 당장 해야 할 말.”
“그건…… 왜?”
“너도 알잖아.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지금 해야지. 지금 말해야지.”
핀이 눈을 끔벅이면서 얌마를 쳐다봤다.
“나한테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
“착각하지 마. 죽음의 신이 너한테만 친절할 리 없잖아.”
핀이 물끄러미 운동화 끈에 묻은 갈색 얼룩을 내려다봤다. 오늘…… 휘우가 슬퍼보여서, 너 괜찮아, 하고 물어봐 주고 싶었다. 아침에 엄마 어깨에 기대고 싶었다. 아빠 생각이 나서 힘들다고 말하고 싶었다. 핀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어떤 말들을 중얼거렸다. 얌마가 코를 부풀리더니 구슬에 뿔을 가져다 댔다. 핀이 말할 때마다 숨이 구슬 속으로 들어가 아롱다롱한 빛깔로 번졌다. 빛이 어우러지면서 구슬의 모양을 변화시켰다. 이번엔 느티나무 같기도 하고 브로콜리 같기도 한 모양이 되었다.
“아주 좋아.”
얌마가 작품을 앞발로 조심스레 들어올리자, 붕 떠올랐다. 핀이 눈을 떴을 때 얌마가 눈을 파랗게 뜨고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핀이 말했다.
“브로콜리 같잖아.”
“그 말을 네가 해버리면, 작품은 곧 사라질 거야. 아쉽지만, 어쩔 수 없어. 난 그동안만 작품을 감상하는 거야.”
“사라진다고?”
핀이 흘끗 벽 쪽에 빙 둘러쳐진 ‘작품’들을 쳐다보았다.
“그럼, 저것들은 왜 남아 있는 건데?”
“꼭 말해야지 하고선……”
얌마가 분홍 혀를 쭉 내밀고 하품을 했다. 커다랗게 벌어진 입이 얌마의 얼굴을 가렸다.
“아직까지 머뭇거리고 있는 바보들 거지. 나한테는 좋은 일이지. 오랫동안 감상할 수가 있으니까. 아, 피곤하고, 피곤하고……”
“알았어. 갈게.”
핀이 돌아서서 한 발을 내디뎠다. 몸이 살짝 들리는 것 같더니 쑥 아래로 꺼졌다. 둥근 구멍에 몸을 디밀자 기둥 밖에 나와 있었다. 돌아보니 회색 기둥에 암호 같은 스크래치가 나 있었다. 스크래치가 점점 흐려지더니 사라졌다. 핀은 기둥 집을 쓸어보았다. 차갑고 단단하게 닫혀 있었다. 핀은 기둥을 돌아서 어둑한 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갔다. 고가도로 위에서 차 소리가 시끄러웠다. 바퀴에 감겨 가던 달빛이 난간을 넘어 기둥 밑으로 떨어졌다. 핀은 핸드폰을 꺼냈다.
“휘우야, 나야, 핀. 뭐해?”
주미경
동화와 시를 번갈아 만났더니, 둘 다 토라졌다.
속상해서 짜부라진 고양이 얼굴 앞에 내 얼굴을 뉜다.
꼬리로 살랑, 건드리지는 말라고 말한다.
난 더 슬퍼진다.
2021/09/28
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