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나뭇잎 심장
복도에 나무 그림자가 떨어졌습니다.
바람도 떨어졌습니다.
나뭇잎 그림자가 하늘하늘 움직였습니다.
민재가 복도에 들어섰습니다.
나뭇잎 그림자가 민재 몸에 비쳤습니다.
파르르 떨었습니다.
이삿짐들이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커다란 냉장고가 현관문에 탁 걸렸습니다.
“옆으로. 옆으로.”
“앞으로. 앞으로.”
아빠와 삼촌이 냉장고를 들고 기우뚱했습니다.
민재가 다가가 냉장고를 살짝 붙들었습니다.
“하나, 둘, 셋.”
집이 냉장고를 꿀꺽 삼켰습니다.
복도에는 아직 이삿짐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드르륵드르륵, 탁탁탁, 톡톡톡.
시끄러운 소리들이 계속 났습니다.
쾅!
갑자기 거친 소리가 났습니다.
옆집 문이 열렸다가 닫힌 소리였습니다.
아빠와 삼촌이 놀라 옆집을 돌아보았습니다.
504호.
문에 먼지와 얼룩이 덕지덕지 붙은 집입니다.
‘어?’
민재는 조금 전에 이상한 것을 보았습니다.
옆집 문이 열렸던 아주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지팡이 하나가 쑥 나왔다가 들어갔습니다.
가로로 쭉 뻗었다가 사라진 지팡이.
알록달록한 빛깔의 지팡이.
새로 이사한 집엔 방이 두 개였습니다.
큰방을 민재와 삼촌이 쓰기로 했습니다.
작은방을 아빠 혼자 쓰기로 했습니다.
“전에 살던 집이 좋았는데.”
삼촌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전에 살던 집엔 방이 세 개였습니다.
삼촌은 혼자서 방을 썼습니다.
그 방은 엄마가 살았던 방이었습니다.
“나는 혼자 살 집을 구해서 나갈 거야.”
삼촌이 잠자리에 들며 말했습니다.
민재는 이불을 끌어 머리끝까지 덮었습니다.
삼촌이 떠나는 것이 싫었습니다.
아빠와 둘만 살면 너무 조용할 것 같았습니다.
조용하면 무서울 것 같았습니다.
다음 날 눈을 떴습니다.
삼촌은 새벽에 일을 나가고 없었습니다.
“교실 잘 찾아갈 수 있지?”
아빠가 출근할 준비를 마치고 말했습니다.
집에서 나가면 길 건너편에 학교가 보였습니다.
새로 옮긴 학교입니다.
민재는 지난주에 아빠와 함께 학교에 갔었습니다.
담임선생님도 만나고 2학년 2반 교실에도 가봤습니다.
“응.”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빠는 쪼그려 앉아 구두끈을 오래 맸습니다.
그러다가 말없이 집을 나갔습니다.
책가방을 메고 복도를 지날 때였습니다.
옆집 문이 열리고 또 지팡이가 나왔습니다.
민재는 멈칫했습니다.
지팡이는 앙상한 뼈마디 같습니다.
고부라진 손잡이는 늙고 거친 손 같습니다.
지팡이는 곧 집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아이들 앞에 서자 심장이 떨렸습니다.
선생님이 자기소개를 시켰습니다.
민재는 이름만 간신히 말했습니다.
국어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 명씩 돌아가며 동화책을 읽어야 했습니다.
민재는 심장이 심하게 떨렸습니다.
차례가 왔습니다.
22페이지, 아기 토끼 이야기.
민재는 눈앞이 하얘졌습니다.
보이는 대로 읽었습니다.
목소리가 덜덜 떨렸습니다.
선생님이 민재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민재를 바라보았습니다.
민재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엄마.”
동화 속에선 아기 토끼가 엄마를 크게 불렀습니다.
쾅쾅쾅.
가스 점검원이 504호 문을 두드렸습니다.
민재는 복도로 들어갔습니다.
문을 두드려도 504호는 조용하기만 했습니다.
가스 점검원이 문에 스티커를 붙이고 돌아갔습니다.
민재는 스티커를 들여다보았습니다.
도시가스 안전 점검 안내문이었습니다.
‘계속 점검을 안 받으면 가스 공급이 끊길 수 있습니다.’
붉은색 글씨가 눈에 띄었습니다.
민재는 복도에 잠시 서 있었습니다.
504호에서 지팡이가 또 나오나 안 나오나 보았습니다.
바람이 불고 나무가 흔들렸습니다.
창밖에는 5층 높이까지 자란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의 그림자가 복도에 드리워졌습니다.
“지팡이를 기다리니?”
나뭇잎 그림자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민재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창밖 나뭇가지 위에서 새 한 마리가 퍼덕거렸습니다.
밝은 회색빛이 도는 울새였습니다.
민재와 울새는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너도 지팡이를 보았니?”
“보았지.”
“무슨 지팡이야?”
“말할 수 없는 지팡이지.”
울새의 말에 민재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바람이 불었습니다.
나뭇잎 하나가 날아갈 듯이 흔들렸습니다.
“내 심장처럼 떨리네.”
민재가 나뭇잎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울새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오늘 학교에서 동화책을 읽었어.
나는 심장이 떨려서 잘 읽지 못했어.
저 나뭇잎처럼 내 심장이 떨렸지.
너무 슬퍼.”
“그랬구나.”
“내일 국어 시간에도 동화책을 읽어야 해.
생각만 해도 심장이 떨려.”
민재는 그림자처럼 어두워졌습니다.
“심장을 어디서 다쳤니?”
울새가 물었습니다.
민재는 말없이 두 눈을 끔벅거렸습니다.
“내가 울숲의 나뭇잎을 가져다줄게.
그 나뭇잎은 심장을 떨지 않게 해줘.”
“나뭇잎이?”
민재는 귀가 솔깃했습니다.
“우리 새의 세상에는 계절이 하나 더 있어.
울.
봄과 여름 사이에 울이 있어.”
“울?”
“이 계절에 새들은 울숲을 가꿔.
울나무를 키우는 거야.
이 나무의 잎은 특별해.
다친 심장을 진정시켜주지.”
“정말 그런 특별한 나뭇잎이 있어?”
“내 얘기를 들어봐.
아주 먼 과거에 새들은 끔찍한 일을 당했어.
어떤 사람이 땅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어.
불이 하늘까지 치솟아 수천 마리의 새들이 타 죽었어.”
“수천 마리?”
민재는 수를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때 죽음을 지켜본 새들은 심장을 다쳤어.
수만 마리, 어쩌면 수백만 마리, 어쩌면……
심장을 다친 새들은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어.
살더라도 하루하루 불안 속에 있었어.
그 새들을 위해서 울숲을 가꾸기 시작한 거야.
울나무가 자랐고 그 나뭇잎이 새들의 심장을 치료했지.”
“그 울숲이 어디에 있는데?”
민재가 물었습니다.
“인간은 닿을 수 없는 곳이야.”
울새가 말했습니다.
“인간은 인간의 숲을 가꾸어야 하지.”
울새가 다시 말했습니다.
민재는 울새를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울숲에 가서 나뭇잎을 가져다줄게.
그 나뭇잎이 있으면 심장을 안 떨게 될 거야.”
“정말?”
민재는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바람에 나뭇잎들이 찰랑거렸습니다.
“그 지팡이 말이야.”
울새가 말을 꺼냈습니다.
“그래, 옆집에서 나오는 지팡이!”
민재가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명자 아주머니 지팡이야.
504호에는 명자 아주머니가 살아.
문 앞에 있는 화분 보이지?
그 속에 말라 있는 꽃나무, 그게 명자나무야.”
민재는 504호 문 앞에 있는 화분을 바라보았습니다.
화분 속에 작은 나무가 앙상하게 말라 있었습니다.
“나는 매일 명자 아주머니에게 울숲의 나뭇잎을 가져다줘.”
“명자 아주머니에게?”
“나뭇잎을 저 화분 위에 올려놓지.
그러면 명자 아주머니가 지팡이를 뻗지.
나뭇잎을 가져가는 거야.”
“그런 거야?”
“명자 아주머니는 그 나뭇잎이 없으면 안 돼.”
“왜?”
바람이 한 번 나무를 세게 흔들었습니다.
울새가 한 번 흔들렸습니다.
“명자 아주머니는 심장을 다친 새와 같아.”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민재는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복도에 나무 그림자가 비쳤습니다.
나뭇잎들 속에서 울새가 나타났습니다.
“울숲에서 나뭇잎을 가져왔어.”
울새가 나뭇잎 한 장을 떨어뜨렸습니다.
민재는 손바닥에 나뭇잎을 받았습니다.
연둣빛이 도는 여린 나뭇잎입니다.
“이 나뭇잎을 심장에 넣어.”
“어떻게 넣어?”
“심장이 떨릴 때 이 나뭇잎을 가슴에 대면 돼.”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는 조금 자야겠어.
울숲에 다녀왔더니 힘이 다 빠졌어.”
울새가 날개를 움츠리며 말했습니다.
“나뭇잎을 가져다줘서 고마워.
그런데 지팡이는 나왔어?”
민재가 옆집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나왔지.
명자 아주머니는 벌써 나뭇잎을 가져갔지.”
“아, 아쉬워.
지팡이를 보고 싶었는데.”
“지팡이는 언제든 또 나와.”
“그래?”
“꽃을 피우려는 지팡이거든.
하지만 말할 수 없는 지팡이지.”
국어 시간이 되었습니다.
돌아가면서 동화책을 읽었습니다.
민재 차례가 왔습니다.
심장이 심하게 떨렸습니다.
민재는 주머니에서 나뭇잎을 꺼냈습니다.
나뭇잎을 슬그머니 심장에 넣었습니다.
연둣빛이 가슴에 스며들었습니다.
민재는 떨지 않고 동화책을 잘 읽었습니다.
32페이지, 엄마 토끼 이야기.
복도에 나뭇잎 그림자가 떨어졌습니다.
바람도 떨어졌습니다.
나뭇잎 그림자가 하늘하늘 움직였습니다.
민재는 나뭇잎 그림자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잠자는 울새를 깨우려고 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옆집에서 지팡이가 나왔습니다.
알록달록 지팡이.
민재는 조용히 다가갔습니다.
어떤 나뭇잎이 떨렸습니다, 가슴 속에서.
순간 민재는 지팡이를 잡아 확 잡아당겼습니다.
팡!
지팡이 끝에서 뭔가가 터져 나왔습니다.
줄기가 이리저리 뻗고 꽃들이 피어났습니다.
알록달록한 꽃들.
꽃들은 서서히 눈을 떴습니다.
눈알들이 매달린 꽃입니다.
크고 번뜩이는 눈알들.
눈알꽃!
무섭기도 하고 예쁘기도 합니다.
왠지 슬프기도 합니다.
눈알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졌습니다.
민재는 눈물방울 하나를 손에 받았습니다.
차갑고 부드럽습니다.
점점 따뜻해집니다.
민재는 눈물방울을 살며시 심장에 넣었습니다.
울새는 매일 울숲에서 나뭇잎을 물어왔습니다.
민재는 이제 동화책을 떨지 않고 잘 읽었습니다.
옆집에서 지팡이는 자주 나왔습니다.
나뭇잎 그림자는 복도에서 잘 살았습니다.
어느 날 건물 앞에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초록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은 전문가라고 했습니다.
“죽은 나무는 뽑아내야 합니다.”
한 전문가가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울새가 사는 나무였습니다.
“이 나무엔 새가 살아요.”
민재는 얼른 말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아무 대꾸도 않고 돌아갔습니다.
그날 밤, 복도에 달빛이 떨어졌습니다.
달빛을 따라 나뭇잎과 울새가 떨어졌습니다.
“나무를 뽑아낸대.”
민재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다른 나무를 찾아야 해.
보금자리 나무.
울새들은 그 나무를 찾아 지구 반대편으로 가.”
“멀리 떠난다는 말이야?”
“어쩔 수 없어.”
“헤어진다고?”
민재는 울컥했습니다.
가슴이 가늘게 떨렸습니다.
달빛이 사르르 민재 가슴에 스며들었습니다.
“이별은 달빛을 간직하는 일이야.”
울새가 말했습니다.
“나는 너 없이는……”
민재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내가 울숲에 가서 나뭇잎을 가져올게.
짙은 초록색 나뭇잎!
그 나뭇잎은 오랫동안 심장을 떨지 않게 해줘.”
“그런 나뭇잎이 있어?”
“숲속 깊은 곳에 있어서 찾기 힘든 나뭇잎이야.
그 나뭇잎을 너와 명자 아주머니에게 선물할게.”
울새는 서둘러 밤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다음 날이었습니다.
민재는 책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습니다.
복도가 하얬습니다.
나무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습니다.
울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건물 앞에는 커다란 포클레인이 와 있었습니다.
윙윙 소리를 내며 나무를 뽑아내고 있었습니다.
‘울새는 이제 못 와.’
민재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바람이 불었습니다.
나무가 쓰러지면서 그림자를 복도에 던졌습니다.
마지막 인사처럼!
순간 울새가 날아왔습니다.
“나뭇잎을 겨우 한 장 찾아냈어.”
민재 눈앞에 나뭇잎 한 장이 떨어졌습니다.
짙은 초록색 나뭇잎입니다.
민재는 나뭇잎을 손바닥에 받았습니다.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나는 멀리 떠나야 해.
보금자리 나무를 찾은 다음에 돌아올게.”
울새가 말했습니다.
“올 수 있어?
멀어도 올 수 있어?”
“와서 나뭇잎을 흔들게.”
울새는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민재는 축축한 눈으로 울새를 바라보았습니다.
국어 시간이었습니다.
민재에게 동화책 읽을 차례가 왔습니다.
심장이 심하게 떨렸습니다.
민재는 주머니에서 나뭇잎을 꺼냈습니다.
짙은 초록색 나뭇잎.
울새가 떠나며 준 나뭇잎.
‘아!’
민재는 지팡이가 떠올랐습니다.
지팡이는 혼자 울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떨어도 괜찮아.’
민재는 나뭇잎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동화책을 읽었습니다.
덜덜 떨면서 읽었습니다.
42페이지, 달빛 토끼 이야기.
학교가 끝나고 민재는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나뭇잎을 가지고 달려갔습니다.
‘명자 아주머니는 이 나뭇잎 없이는 안 돼.’
민재는 세게 달렸습니다.
옆집에서 나올 지팡이.
알록달록 지팡이.
지팡이에게 나뭇잎을 주러 달렸습니다.
신소영
『단어의 여왕』으로 비룡소 황금도깨비상, 『고래 그림 일기』로 목일신아동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길모퉁이 구름김밥집』 『눈사람이 집으로 들어온 날』 『소녀 H』 『사계절 우리말 사전』 등을 썼고, 청소년소설 『나의 리을 이야기』를 썼습니다.
2026/07/15
8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