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너무 많은 리리카의 연애
리리카는 요즘 들어 로맨스 드라마를 보는 일이 불편하다. 에이치가 몰입 중임을 알면서도 일방적으로 정지 버튼을 누른다. 열애설이 터지면 최소 석 달은 한국을 뜨겁게 달굴 청춘 배우들이 눈을 지그시 감고 상대에게 접근하는 관능적 장면에서 영상은 멈춘다. 에이치가 리리카를 본다. 리리카는 설명하지 않는다. 에이치는 의아함을 담아 고개를 얕게 갸웃거리고는 재생 버튼을 누른다. 리리카는 망설임 없이 영상을 재차 정지한다.
“다른 거 보자.”
“지금 이거 보고 있잖아.”
“재미없어.”
“5화까지 잘만 봤으면서.”
“재미없다니까. 이런 건 다 가짜잖아?”
에이치는 리리카의 말투가 공격적으로 변함을 알아차린다. 또 시작이라는 구시렁거림이 정신과 육체 사이의 막을 두드릴 때쯤 리리카는 한숨까지 쉰다. 에이치는 팔 개월간 그녀라는 행성을 향한 탐사를 끝마쳤고 이미 자기 행성으로 귀환까지 완료했다. 한때는 신비의 정토였던 상대가 어떤 논리 체계로 작동하는지 학습이 됐다. 그러니 넷플릭스를 끈다. 궁금한 내용이야 혼자 보면 되는 일이고, 애인의 궤도는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다.
에이치는 리리카가 돌연 변덕을 부리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건 다 가짜잖아’는 그냥 흘려보내선 안 되는 말이다. 어렴풋이 유추한다. 요즘 리리카에게 소홀했을지도 모른다고. 빠른 시간 안에 반성을 완료해야 하는데, 에이치는 역으로 어깨가 좀 펴진다. 여태껏 잘 해왔음을 자부하기 때문이다. 리리카에게 대접한 값나가는 성의와 결이 맞지 않아도 버텨왔던 언행들. 사랑꾼까지는 아니나 남 보여주기에 부끄러운 애인이고 싶지는 않아서 시간과 정성에 옹색하게 굴지 않았다. 리리카를 좋아해서였기도 하지만, 리리카가 탐사자들에게 까다로운 상대임을 알기에 최대한 그 기준을 통과해보고 싶었던 자기만족적 노력이기도 했다. 그러니 에이치를 돌아보게 할수록 리리카만 손해다.
“우리 자기, 다른 건 뭐 보고 싶어?”
“호러영화 볼까. 액션도 좋고.”
“그런 건 집에서 보면 재미가 없어. 큰 화면으로 보는 게 좋지.”
“그냥 봐.”
“알았어. 파묘 볼까?”
“작년에 친구들이랑 영화관에서 봤어. 말했지 않아?”
“그랬었나? 사일런트 힐은 어때. 궁금하다고 했던 적 있었잖아.”
“됐어. 보지 말자.”
에이치가 말없이 리리카를 빤히 바라본다. 애인이라는 역할 탓에 차마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심정을 담아 정말로 빤-히다. 에이치의 인내심은 보통 사람들에 비해 높은 편이고, 연인을 향해서라면 애정이라는 어마어마한 강화 효과까지 적용되어 매우 우수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총량이 정해져 있다. 최근의 리리카는 에이치의 인내심을 이런 식의 사소한 시비로 자주 꺼내 썼다. 에이치는 사과라는 행위에 자존심을 걸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베갯솜을 뜯어놓은 반려견에게도 베개를 거기에 놔둬서 미안하다 꾸벅일 인간이다. 그럼에도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스멀스멀 속에서 역류하려는 짜증을 억누르기 어렵다.
리리카 또한 자신이 막무가내로 분위기를 망치고 있음을 안다. 물론 안다고 바뀌는 건 없다. 솔직함이 관계의 진정성이라 믿는 그녀는 감정 제어에 능숙하지 못하다. 대화를 물리기는커녕 입을 꾹 닫아 토라진 얼굴을 노출하여 에이치를 자극한다. 그건 리리카가 서른셋이라는 나이를 먹기까지 전혀 고치지 못한 방어기제 중 하나다. 방어. 그렇다. 리리카는 지금 뭔가를 막아내고 싶다.
에이치가 성심을 다해온 연인임을 리리카는 부정하지 못한다. 요즘 세상에 찾기 드문 상대라는 점, 외형이 이상형에 부합한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에이치가 가진 것들, 눈에 보이는 요소와 보이지 않는 요소를 포함한 모든 가치의 총체는 과거에 만났던 연인들과 비교할 때 뒤처지지 않는다. 수지타산에 능한 리리카는 내심 에이치를 지난한 연애 사업의 마지막 관문으로 삼고 싶다.
그러니 리리카가 에이치를 들쑤시는 건 단지 심심한 여자의 놀이 본능 따위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리리카 자신도 통제 불능이라 불가해한 오류에 가깝다.
리리카는 휘황찬란한 넷플릭스 메인 화면을 검지 끝으로 무성의하게 헤집는다.
“9월 15일에 뭐해?”
“9월? 한참 남았네. 별 약속 없어.”
“세미 결혼식이 그날이야.”
“저번에 말한 친구? 그럼 그날 우리 못 만나겠다. 달력에 기록해둘게.”
“같이 갈래?”
“어딜?”
“어디긴.”
“결혼식장에?”
리리카가 어깨를 틀어 에이치를 본다. 뜸을 들이되 선명히 답한다. “응, 결혼식장에.” 취향이 아닌 디자인의 운동화를 함께 사자고 강요받았을 때보다 에이치는 더 난처하다. 감정을 적당히 숨기는 것이 연인 관계를 지속하는 비기임을 알면서도 오늘의 그는 리리카처럼 솔직함이라는 카드를 꺼낸다. 딱 잘라 거절하는 것이다.
“나는 세미라는 친구랑 접점이 없어.”
리리카가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콧김을 뿜는다. 노골적인 짜증에 에이치도 빈정이 상한다.
“갑자기 왜? 하객이 부족하대?”
“세미가 하객이 왜 부족하겠어.”
“그러면 내가 갈 이유가 더더욱 없어.”
“결혼식장 같은 곳, 잘 안 가지?”
“가끔 가. 지난달에도 중학교 동창이 결혼했어.”
리리카는 아예 화면을 꺼버린다. 시꺼먼 네모 속에 비뚜름한 각도로 자신을 몰래 흘겨보는 에이치의 눈알이 비친다. 한때 원하는 일을 전부 따라주던 남자가 이제는 사마귀 앞발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게 통탄스럽다. 리리카는 어떡하면 서로의 자존심을 해치지 않고서 대화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지 고민한다. 요즘 들어 자주 해온 고민이다. 그래서 리리카는 요즘 들어 빈번히 불행해졌고, 마음에 없는 행동들을 했으며, 에이치의 인내를 낭비했다.
리리카는 고개를 숙인다. 알아서 기류를 읽으라는 신호이므로 작위적인 움직임까지가 계산된 행동이다. 눈치 빠른 에이치는 그 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왜 그러느냐 물을지 말지 고민하다 모른 척을 해버리면 분위기가 영영 바뀌지 않을 테니 어쩔 수 없이 물으려는데, 리리카가 먼저 입을 연다.
“가면 무슨 생각이 들어?”
에이치는 안다. 이것이 질문이 아니라 문제임을. 정답을 고르는 일은 어렵다. 어쩌면 불가능에 가깝다. 리리카라는 상대는 정교한 판독관이라 무슨 답을 해도 오답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답을 선택해봤자 웬만해선 오답이 된다면 입을 다무는 일이 차라리 유리한데, 그것 또한 아주 안전한 선택지는 못 된다.
문제에 대해 에이치가 아는 힌트라고는 ‘리리카는 결혼을 원하지 않음’이다. 추측이 아니라 사실이다. 리리카는 한국의 결혼제도에 늘 반감을 가져왔고, 근거를 에이치에게 설명한 적이 있다. 합리와 실용에 우매해지지 않게끔 잘 교육받은 현대인이므로 그녀의 설명은 대체적으로 옳다. 리리카 자신도 제도에 관한 주장을 할 때면 신뢰가 가능한 논거들만 끌어왔고, 모호한 주장은 삼갔다. 에이치 또한 절대적 성혼주의자까지는 아니어서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영원히 연애 관계로만 남아도 상관이 없다는 주의다. 그도 이 연애의 끝이 한쪽이 하나의 삶을 닦달하고 어영부영 따라가는 식이 아님에(주체가 둘 중 누가 됐든) 편안함을 느낀다. 돈이나 관계의 기여도 등을 속좁게 우기며 계산하는 놈들과도 다르다. 덕분에 둘은 예민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불편했던 적이 없다.
그래서 문제다.
리리카는 분명 결혼을 원하지 않지만 비혼주의를 선언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에이치에게도 ‘그러나 비혼주의까지는 아니’라고 견해를 마무리한 적이 있다. 은근한 여지를 남겨 상대의 도전 의식을 자극하고자 함이 아니라 정말로 그녀의 견해를 정확히 밝힌 일에 불과하다. 만약 에이치가 그때 리리카의 모순이 납득되지 않는다며 반감을 표현했다면 둘은 필시 다퉜을 것이고 뭐가 됐든 지금과는 다른 결론이 나왔을 터. 리리카는 자기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따라오는 에이치에게 슬슬 염증을 느낀다. 그토록 괜찮다고 평가한 연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은 둘에게서 기인하지 않는다. 원인은 세미의 청첩장에 있다. 세미와 세미의 예비 신랑. 행복해 보이는 커플 일러스트. 혼주와 식장 이름. 약도. 계좌번호. 그것들이 다 원인이다.
세미는 리리카의 오랜 친구이자 마음이 아주 달라붙지는 않아 지인의 카테고리에도 발을 걸치는 여자다. 그녀는 오 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결정했다. 리리카의 최장 연애 기간은 일 년 육 개월이고, 스무 살 때 만난 첫 남자친구라 기록 경신이 이뤄지지 않은 지 오래다. 하지만 연애의 흔적은 리리카에게 압도적으로 더 많다. 리리카가 강박적으로 커플 아이템을 수집할 때 세미는 손가락에 커플링 하나 끼우지 않았다. 물적 상태와 심적 상태의 불일치는 리리카의 불편함을 가중시킨다.
리리카는 세미에게 악의적인 감정이 없고, 그녀의 행복도 바란다. 그러나 세미의 연애 사업은 자꾸만 리리카의 연애에 영향을 미친다. 리리카는 남의 잔치에 국수 그릇은커녕 깨진 유리조각을 들고 가는 비운의 여자로 살고 싶지 않다. 갑갑함의 돌파구를 찾고자 에이치에게 협조를 요청한다.
“무슨 생각이 드냐니깐?”
“그냥 다들 결혼을 하는구나, 나도 나이를 제법 먹었구나, 정도.”
“그게 다야?”
“내가 무슨 생각을 해야 해?”
“나는 요즘 들어 에이치의 마음을 잘 모르겠어.”
“내가 서운하게 한 적이 있어?”
“서운했다라기보다는 에이치의 마음은 해석이 잘 안 된달까.”
“세미라는 친구가 너한테 나쁜 말이라도 했어?”
“전혀.”
“근데 우리 리리카가 왜 이럴까.”
“불안하다는 생각 안 들어?”
에이치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뭐가?”
뭐가. 그 어떤 말보다도 리리카의 성미를 긁는 말이 나오고야 만다. 리리카는 에이치가 자기 의견을 표현하지 않고 단지 질문을 되풀이하는 일을 싫어한다. 불안하다거나 불안하지 않다거나 둘 중 하나만 선택하면 되는 간편한 질문임에도 부연 설명을 요구하는 태도에 리리카는 열이 오른다. 한 번 불이 붙으면 기화점까지 펄펄 끓을 테니 이쯤에서 대화를 끝내야 감정을 소모하지 않는단 걸 알고 있다. 말다툼을 스포츠로 인식하는 뇌는 아드레날린에 취해 리리카를 불구덩이로 민다. 더 말해. 더 티를 내. 더 표현해. 때로는 보여주지 않는 게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이지만 이론과 실적용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자기는 나를 별로 안 좋아하지?”
아아. 에이치가 끝내 탄식한다. 저질스러운 대화의 신호탄이다. 그는 요의를 변명 삼아 화장실로 달아난다.
리리카는 연인의 초라한 뒷모습을 보며 자신의 감정을 실컷 느낀다. 안 좋아해 혹은 여전히 좋아해. 이것 또한 둘 중 하나만 선택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인데 에이치는 그마저도 따라주지 않는다. 무엇 하나 리리카의 뜻을 곱게 받아들이는 일이 없다. 그 태도는 일종의 버튼이라 리리카의 입에서 집요한 물음들을 자꾸 뽑아낸다.
질문을 많이 할수록 달아날 기회도 많아진다. 에이치의 회피를 차단하려면 선택지가 존재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상책인데 리리카는 그 점을 도저히 체화할 수 없다. 사실 리리카가 원하는 건 간단하다. 결코 ‘우리도 결혼할래?’와 같이 거대한 대서사시의 제안이 아니다. 말했다시피 리리카가 결혼에 부정적임은 자명하다.
리리카는 세미가 청첩장을 주며 했던 말을 떠올린다.
‘새로운 삶에 도전하자고 하더라.’
생략된 단어는 ‘함께’다. 세미의 뒤에는 늘 파트너가 있어 단어를 생략해도 의미가 온전히 공유됐다. 불완전한 말로 완전한 문장을 만드는 일. 상황을 설명할 때 생략이 가능하다는 건 제법 큰 행운이다. 리리카는 세미가 두 손으로 따뜻한 밀크티 잔을 감아쥐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식지 않은 밀크티에 입을 살짝 데고선 장난스레 미소 짓던 여유 또한.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소변 줄기 소리는 자주 흔들린다. 에이치는 무엇을 하는지 한참 나오지 않는다. 리리카는 누런 물이 참방거리며 튀는 모습을 생각한다. 단발적인 감정은 내보내도 오래된 욕망만큼은 있는 그대로 내보내지 못하는 자신과, 그럼에도 욕망이 철회되지 않는 처지가 괴롭다. 이 상태에 집중해선 안 된다. 어떻게든 마음을 환기해 자존감이 바닥에 처박히는 일을 면하기. 예컨대 ‘나 안 사랑하냐고!’ 따위의 초라한 질문을 삼가는 게 지금은 최선이다. 그것은 화장실 거울을 빤히 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에이치가 리리카에게 주는 과제이기도 하다.
에이치가 리리카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권태기도 아니다. 단지 에이치는 리리카와 동일하여 자기 자신에게 돌아갈 줄 아는 개인일 뿐이다.
리리카존나사랑해너밖에없어나는너랑결혼하고싶지만너를위해서참을게너무사랑해서아침부터잠들기직전까지나는나이도잊고살아널만나면나는십대로돌아가는기분이야내모든전애인을다합쳐도네가최고야너없으면나는못살아
그러니 이런 고백을 에이치가 리리카에게 말할 일은 평생 없거니와 이렇게 느끼지도 않는다. 도시의 단독자들은 누구도 퇴화하길 바라지 않으니 에이치의 사랑은 이런 모양으로 망가질 리 없고, 리리카 또한 이런 모양으로 사랑해달라 요구할 권리가 없다. 이성적인 두 사람이 만나면 합리적 관계가 완성되는 게 아니라 풍선효과처럼 한쪽이 이성적 사고의 반작용을 경험한다. 노골을 말하자면 이렇다. 리리카는 결혼하지 않으려는 자기주장을 한 번쯤은 상대가 뒤흔들어주길 바란다. 선택이 정말로 옳은지 밤낮으로 고뇌에 빠지게끔 궁지에 몰아줬으면 한다. 리리카가 애정 결핍이라서는 아니다. 이것은 결핍이라는 개인의 사정만으로 정의되는 초라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결혼 ‘제도’의 반대급부로 튀어오르는 사회적 욕망이다. 사랑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사회가 전면에 내세운 ‘제도’를 해체할 길이 없으니 그 지점에서 비롯된 필연적 모순인 셈이다.
이 리리카는 오직 에이치와 함께 있을 때만 나타난다. 에이치는 현시점을 기준으로 유일하게 리리카의 체면을 벗기는 사람이다. 당연 리리카는 자존심이 상한다. 왜 자신이 에이치를 무장해제시키는 게 아니라 당해야 하는지. 이것이 사랑할 줄 아는 여자의 숙명이라면 치욕적이다.
에이치는 수도를 열어놓고 손 씻는 척을 한다. 리리카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지만 공수표로 무거운 말을 입에 올리기는 싫다. 리리카의 복잡한 마음들은 에이치의 속 안에서 철딱서니 없는 변덕 정도로 저며진다. 그도 눈치 싸움을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다만 리리카가 결혼을 먼저 논한다면 이전에 들었던 말들은 모두 잊고 경청해줄 의향 정도는 있다. 에이치는 리리카가 비혼주의자든 아니든 상관이 없다. 그에게 리리카는 그냥 애인이니까.
한참을 꾸물럭거리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리리카가 없다. 아이패드는 이미 커버까지 닫혀 있다. 에이치는 메신저를 확인한다. 우리 생각할 시간을 갖자. 에이치는 오줌발처럼 지지부진한 한숨으로 빈방을 달랜다. 보다 만 드라마를 다시 재생한다. 가짜 사랑이든 진짜 사랑이든 화면 속 연인은 키스를 시작한다. 에이치는 아랫도리에 은근한 자극을 느낀다. 이 장면까지는 같이 보고 보낼걸. 그제야 리리카가 그립다. 왜냐하면 그에게 리리카는 역시 애인일 뿐이라서.
“올 때 삼성카드 챙겨와주라. 프로모션 중이라 그 카드로 결제하면 15퍼센트 할인된대.”
“다른 애들은?”
“우리 중에서 너만 있어. 근데 목소리가 안 좋네. 무슨 일 있어?”
있다고 말하려던 게 전화를 받은 이유다.
“어디 아파?”
딱 그 이유로 불참을 선언하려던 참이다. 15퍼센트 할인이라는 횡재에 들뜬 수지의 기분을 망칠 자신이 없던 리리카는 결국 지갑에 삼성카드를 챙겨 넣는다. 선뜻 가고 싶어 하진 않으면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보호하지도 못하는 유약한 심성이 친구들에게 티가 날까 겁이 난다. 한참 미적거렸으나 혼자인 리리카는 무리 속 리리카를 이기지 못해 침대 밖으로 끌려간다.
가전제품 매장 앞에 모인 친구들을 발견하고 반가운 척 종종걸음으로 뛴다. 이왕 만났으니 평상시처럼 행동한다. 오랜만에 본 친구들은 그간 잘 먹고 잘 살았는지 낯빛이 좋다. 밤잠을 설친 리리카는 독한 미용 제품의 힘을 빌려 간밤의 상념을 숨겼으나 마음의 피로를 가릴 수는 없다.
친구들은 세미에게 줄 로봇청소기를 고른다. 리리카의 삼성카드가 그들의 용기를 키운다. 일곱 자리로 나열된 숫자에 겁먹지 않고 그들은 가장 좋은 기기를 스스럼없이 잡는다. 점심에 따끈한 탕을 먹었는지 직원의 얼굴에도 윤이 난다. 치장 없이 건강해 보이는 사람들과 영 딴판인 리리카는 지나칠 정도로 치장이 된 얼굴에다 시끄러운 속을 가둔다.
“물걸레 청소기도 따로 사주는 게 어때?”
수지가 의견을 추가하자 직원이 빠르게 반응한다. 모델을 소개하는 손짓이 현란하다. 10만원에 달하는 상품권으로 페이백을 해주겠다는 말에 모두의 눈이 커진다. 다들 긍정적인 반응이다.
“세미가 이걸 쓸까?”
“안 써도 사주자. 결혼 선물인데.”
“있으면 편하기는 할 거야.”
“세미가 안 쓰면 남편더러 쓰라고 하면 돼. 청소를 잘 한다잖아.”
지혜와 서연이 수지의 의견에 힘을 실는다. 직원은 냄비 세트를 가리키며 우리를 위해 어디까지 베풀지 설명한다. 결제는 신속하게 끝난다. 가게 밖에서 수지는 모임 통장의 돈을 즉시 리리카에게 이체한다. 리리카는 통장을 확인하는 척 메시지함을 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넷은 카페로 간다. 수지가 직원에게 받은 페이백용 상품권을 빠르게 현금으로 바꾼 덕에 디저트를 양껏 시킨다. 그들은 세미 덕에 오랜만에 콧바람도 쐬고 맛있는 케이크도 먹어 기쁘다며 없는 사람을 칭찬한다. 리리카도 고개를 끄덕인다.
수지가 말한다.
“세미 결혼식이 나한테는 당분간 마지막 결혼식일 것 같아.”
지혜와 서연이 자신들도 동일하다고 응수한다. 리리카가 초코케이크에 포크를 꽂고 한 덩이 뜬다. 휴대폰을 넣어둔 주머니 안은 줄곧 얌전하다. 세상이 고요하면 리리카는 짜증이 난다.
수지와 지혜는 삼 년 전에 비혼과 비연애를 선언했다. 서연은 비혼이지만 연애에는 긍정적인 입장이라 비혼을 이해하는 상대를 만나 더러 연애했고, 지금도 연애 중이다. 상대가 자주 바뀌는 편이라 누구도 서연의 파트너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리리카가 결혼제도에 회의적인 입장을 갖게 된 배경에는 친구들의 영향이 크다. 반면 리리카와 세미는 비혼을 선언하지 않았으며 연애에도 긍정적이다.
요즘의 리리카는 자신과 친구들의 차이점에 집중하는 일이 잦다.
“어제 세미가 올린 사진 봤어? 같이 공방에 갔더라.”
수지가 세미의 SNS를 보인다. 직접 만든 은목걸이 한 쌍의 사진이 있다. 세미와 남편의 이니셜이 각인되어 있다. 리리카도 그것을 본다. 별다른 설명글이 없어 관중으로 하여금 화목한 근황을 유추하게 만드는 게시물이다. 세미의 영리함은 이런 곳에서 티가 난다. 세미는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오직 보여줄 뿐이다. 리리카와 세미의 차이다.
서연이 리리카의 포크질을 보더니 묻는다.
“리리카, 혹시 에이치 씨랑 싸웠어?“
수지와 지혜도 리리카의 허전한 약지를 목격한다. 리리카는 에이치와 아직 헤어지지 않았다. 헤어지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니 신경이 쓰여 반지를 부러 뺐다. 아무렇지 않은 척 케이크를 먹는다. 먼저 에이치에 관해 가타부타 떠드는 건 면이 상하는 일이라 친구들이 진득하게 관심을 가져주길 원한다. 야속한 친구들은 분위기만 파악할 뿐 더 묻지 않는다. 세미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가 오간다. 그마저도 빠르게 전환된다.
그들은 연애나 결혼이 아닌 이외의 것들, 예컨대 직장생활이나 주식 투자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이야기들은 리리카의 관심사에 해당하지 않아 무척이나 길게 느껴진다. 리리카는 상상해본다. 오늘의 주인공이 이 자리에 있고, 자기 이야기를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모습을.
리리카는 괜히 서연에게 묻는다.
“이직한 회사는 어때?”
서연이 기다렸다는 듯 반응한다.
“사람들이 너무 좋아. 사수가 잘 가르쳐주거든. 인사팀에서 일해본 적은 없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금방 적응할 수 있겠어.”
“남자친구는 뭐라고 해?”
“열심히 다녀보라고 하지. 나도 또 이직하기는 싫어.”
“남자친구 집이랑 회사가 가깝다며.”
“응. 나도 회사 근처로 옮길까 해.”
“같이 살려고?”
“아니. 따로. 수지가 몇 년 전에 마곡 쪽에서 살지 않았었나? 살기에 어때?”
대화 주제는 마곡의 주거 질에 관한 품평으로 넘어간다. 어떻게든 서연의 애인 이야기를 꺼내서 자연스럽게 자기 턴으로 이어받으려던 리리카의 묘책은 실현되지 않는다. 마곡이든 마포든 리리카는 재미가 없다. 에이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면 모든 이야기가 주식 투자와 진배없이 느껴진다. 그때 리리카는 언젠가 에이치에게 들었던 정보를 떠올린다.
“마곡에 팰리스오피스텔 있잖아. 신축인데 싸고 깔끔하대.”
서연이 반색하며 되묻는다.
“직접 살아본 친구가 있어?”
내 남-자-친-구-가 거기에 살았대, 마음 같아선 그리 답하고 싶으나 꿋꿋하게 받아친다. 그냥 다들 괜찮대, 하고만.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한 것과 달리 에이치를 숨기고 나니 흥미는 급속도로 식는다. 죄 없는 빨대만 질겅인다.
이 모임에 참여한 리리카는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리리카다. 기념일에 받은 선물을 자랑하지 않고, 생일에 애인과 무슨 일을 할지 설명하지 않는다. 커플 아이템은 가급적 숨겨야 하고 정 보여주고 싶거든 말없이 착용만 하는 일이 최선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오빠’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 일인데 이것은 세미의 특기다. 세미는 세 살 연상과 교제하면서도 친구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오빠라는 호칭 대신 재형이라는 이름만 사용했다. 이제는 리리카도 에이치를 너라고 부르거나 이름으로 부른다.
리리카는 세미를 통해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친구들과 결을 맞출 수 있을지를 학습해왔다. 세미는 리리카에게 사회화의 스승이자 롤모델이다.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 리리카의 불안은 커진다. 오픈북으로 풀던 시험에서 교재를 몰수당한 기분이다.
“리리카는 주말에 뭐 할 거야?”
수지는 대화에서 소외된 리리카를 다시 불러들인다. 리리카에게는 별다른 계획이 없다. 에이치와 적당히 화해하고서 집에서 넷플릭스 드라마나 마저 보지 않을까 싶다. 반면 수지는 홀로 미술관을 갈 것이라 말하고, 지혜는 주말 근무를, 서연은 부동산을 돌겠다고 한다. 세미라면 인테리어 견적을 알아보리라 답할 것이다. 물론 ‘신혼집’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고서.
리리카는 생활을 설명하는 일에 에이치의 이름이 매번 포함되어 있음이 부끄럽다. 친구들을 따라 독립적인 행세를 하고 있지만 그녀의 속 안에는 결코 타인에게서 독립하지 못하는 리리카가 있다. 진실로 비혼을 추구하는 친구들과 같아질 수 없고, 그렇다고 세미와의 한 끝 차이를 좁히지도 못한다. 리리카는 그렇게 설계된 스스로를 그만 생각하고 싶다. 자기 자신을 별 볼 일 없다 생각하면 진실로 별 볼 일 없어진다는 걸 알면서도 리리카는 좀처럼 타인으로 채워진 자기 자신의 별 볼 일을 찾지 못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버텨내는 리리카의 자아는 소중하다. 최대치로 노력하여 현명하고 독립적인 여자를 연기한다. 그녀는 이미 어른임에도 친구들의 눈치를 볼 때만 어른이 된다. 애인과 발맞춰 걸어 어른이 된 세미를 상상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한 복제를 반복한다. 여기의 리리카는 입술에 생크림이 묻었다고 거울을 꺼내 수정 화장을 하지 않는다. 영화배우 이야기를 할 때도 여자 배우 위주로 이야기하고, 저가 쇼핑몰의 거추장스러운 옷들은 경계할 줄 알며, 가방에 가득찬 미용 용품은 숨긴다. 그 모든 결정에 리리카 자신이 아닌 타인이 숨어 있고, 그것을 들키는 일은 부끄러움을 넘어 리리카를 쪽팔리게 만든다. 리리카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른다. 안다 한들 표현할 방법을 생각하지 못한다. 서른셋을 먹고도 어리광부리려는 여자라면, 여기에서 성인으로서의 책무에 두들겨 맞아 임시적으로 빈사상태니까.
물론 리리카의 친구들이 유별나게 엄격하지는 않다. 그들은 리리카에게 뭔가를 강요한 적이 없다. 단지 그들은 정말로 어른이고, 리리카만 아직 어른이라는 미션을 완수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니 연기의 고행은 리리카가 사서 하는 고행이다. 솔직함이 관계의 진정성이라던 그녀의 믿음에도 자아가 있어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셈이다.
수지는 말한다.
“제주도 한 달 살이를 해볼까 싶어.”
지혜가 거든다.
“프리랜서니까 할 수 있겠다. 지금 비수기라 가격도 저렴할 거야.”
서연도 동참한다.
“일주일 정도 같이 살까. 이번 회사는 여름휴가를 칠 일까지 쓸 수 있대.”
그들은 세미라면 어떠할지를 논의한다. 남편과 상의하면 한 달 정도는 수지랑 같이 살 수 있겠지. 이제 막 결혼하려는 사람에게 한 달 살이를 실제로 제안하는 일은 없다. 중요한 건, 세미는 독립적인 여성과 아내라는 두 역할을 자연스럽게 공존시키고 있다.
넷은 카페에서 나온다. 남빛이 어릿어릿한 저녁이다. 각자가 각자의 할 일을 위해 작은 요람들로 이동한다. 리리카도 등을 돌린다. 이상하다. 닮고 싶은 친구들을 떠나야만 리리카는 편안함을 느낀다.
노트북으로 넷플릭스에 접속한다. 에이치와 보던 드라마의 재생 버튼 위에 마우스를 올린다. 뒤 내용이 궁금하지는 않다. 대본으로 연출된 사랑극 따위 둘 중 하나가 죽거나 둘 다 죽거나 둘이 붙어 잘 먹고 잘 살거나 셋 중 하나다. 중요한 건, 대본과 연출이 존재한다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가공하든지 ‘로맨스극’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리리카에겐 가짜다. 9월 달력을 보며 가을에 어울릴 만한 변명을 창조해본다. 그 변명은 가짜임에도 왠지 진짜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주변에는 에이치와 나눈 물건들이 많다. 모두 리리카가 진정으로 원한 건 아니다. 디자인과 브랜드가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물화된 마음만큼 가시적인 안식처가 또 있겠는가. 그것들은 마치 여전히 유효한 사랑의 약속 같아서, 리리카가 문밖을 나서기 전까지 용기를 준다. 수지와 지혜를 만나든 서연을 만나든 설령 세미를 만나는 날에도 진짜 리리카가 여기에 있음을, 그녀 또한 이 사회가 연출해놓은 담론에서 배제되지 않아 사랑받고 있다는 최후의 버팀목이 된다.
리리카는 에이치에게 커플 물건을 사자고, 혹은 사달라고 치열하게 조르던 자신을 떠올린다. 샤넬도 아닌데 뭐가 그리 싫은지 에이치는 종종 난색을 표했다.
‘우리 삼십대야.’
서른셋의 리리카는 아직 태어나지 못한 리리카의 태동을 원한다. 지나치게 오래 장수하는 스물 어드메의 리리카는 작은 가면 안에 큰 몸을 욱여넣고 사느라 지쳐있다. 병약해진 채로 다그친다. 삶은 버티는 일이고, 버티는 일이란 재현되기 위한 분투야. 그 속삭임을 듣고 사는 이상 새로운 리리카는 태어날 수 없다. 기묘한 고통은 반복된다.
리리카는 애정 없이 살아온 적이 없다. 일 년 육 개월의 기록을 넘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상대를 바꿔가며 가장 신선하고 활력 넘치는 사랑만 받아왔다. 그러니 단독자의 역사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친구들에게 더이상 남자와 싸우고 헤어졌다 투정하기가 민망하여 감춰버린 파트너들. 에이치도 그 기나긴 명단에 대기 중일 뿐이다.
리리카는 다짐한다. 다음에는 커플 목걸이를 해야겠다고. 순금으로. 에이치와 아웅다웅하면서도 끝내 값비싼 장신구를 걸칠 자신을 상상한다. 에이치가 사과하면 못 이긴 척 다시 속삭여줄 애정 어린 말들도 마찬가지다. 상상은 멈추지 않는다. 죄악이 멈추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리리카는 계속 너덜해진다. 세상이 고요해서 리리카의 짜증도 지속된다. 팔 개월. 최고 기록의 반토막보다 짧다. 끝내 참지 못해 휴대폰을 든다.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연락을 안 해? 이 새끼랑도 헤어져야지.’
리리카는 좌절과 함께 휴대폰을 멀리로 투척한다. 드라마를 재생한다. 디스패치는 석 달 후 드라마 주연들의 실제 데이트 파파라치컷을 세상에 공개할 것이고, 톱스타들의 열애는 몇 번이고 복제되어 이상향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어쨌거나 리리카의 세계에 가짜 사랑은 차고 넘치도록 준비되어 있다.
청예
병 음료를 마실 때 입구에 입을 안 대고 마시는 사람. 『주와 연』 『오렌지와 빵칼』 『일억 번째 여름』 『라스트 젤리 샷』 등을 썼다.
이 세상 모든 리리카를 응원한다. 타인을 닮고 싶지만 자기 안의 못남으로 끝내 닮지 못하는 상태에 머무는 그녀를. 언젠가 사랑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시되는 시대가 오면, 그녀의 고민도 해소될 것이다.
2026/07/15
8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