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기도 매립
송승언의 『시체공산주의』
1. 지평선
만일 세상을 하나의 반듯한 정사각형으로 상정한다면 송승언의 시는 그것이 완전히 포개어지도록 반으로 접은 후 그 선을 따라 위와 아래를 양분하는 가로선을 긋는 것으로 시작된다. 숲, 언덕, 뒷산, 수풀의 이미지가 확연히 두드러지지만 그 무성함을 들추어낸다면 어떤 식으로든 끝내 마주하게 되는 것은 바로 흙으로 뒤덮인 지면(地面)이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출간된 송승언의 첫 시집 『철과 오크』(문학과지성사, 2015)는 ‘포스트-미래파’ 시기와 맞물려 황인찬의 시와 더불어 세대론으로 독해되는 과정에서 「녹음된 천사」에 나타난 빛의 양상이 중요한 시적 요소로 주목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송승언의 시를 절반만 읽은 것이다.
깊은 숲속의 은밀하고 작은 모닥불의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철과 오크」에서는 나무의 수많은 잎사귀와 그 속에 숨은 새들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숲을 통과하는 수십 명의 아이들이 “끝도 모른 채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딛는’ 곳이 선명하게 각인된다. 식물들은 이 단단한 지평선을 뿌리와 줄기로 가로지르며 무성하게 뒤덮고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땅 파기’는 송승언의 시세계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조건인 지평선을 훼손하는 도전적인 명령이며(“흙을 판다. 명령이 있었으니까.”, 「심부름」) 명령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손에 쥐는 것은 ‘광물’이 주는 낯선 이질감(「나타샤」)이다.
지평선 아래의 “돌의 감정”(「돌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바슐라르를 경유해보자. 바슐라르에게 금속이나 암석, 수목을 가진 대지(la terre)는 물이나 불, 공기의 유동성과 달리 흙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점에서 특수하게 인식되었다. 바로 그 견고한 물질성은 직접적이고 항구적으로 ‘저항’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의지(la volont)’를 이끌어낸다. 물질적 상상력에 있어서 단단함이란 노동하는 인간(homo faver)을 표상하게 한다는 점을 참조하고서야 「철과 오크」의 중요한 시적 주체가 ‘나무꾼’이라는 점, 이 시에서 등장하는 ‘철’의 속성이 도끼와 열쇠로 표상된다는 사실을 낯설게 감각할 수 있다.
2. 공산주의
최근 발간된 송승언의 세번째 시집 『시체공산주의』(독립출판, 2025)를 읽기 전 『철과 오크』를 다시 읽은 것은 제목 속에 있는 ‘공산주의’라는 시어가 섬세하게 독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948년, 바슐라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인간이 지금까지 손에 넣은 최대의 윤리적인 획득물은 노동자의 망치이다.”1) 여기서 망치란 물건을 ‘주조’할 수 있는 인간 투쟁의 산물이면서도 경찰의 곤봉과 엄격히 구분되는 계급적인 것이다. 대장간을 지나며 해머가 철판을 때릴 때 나는 소리를 듣고 고통스러움을 토로하는 루소를 인용하는 대목은 신랄하다. 한가로운 산책자이자 방관자로서 노동자의 생활을 꿈의 차원에서 사유할 때 이 금속성의 소리는 오로지 공포로만 경험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2026년, 기후 재앙의 관점에서 대지에 대한 바슐라르의 몽상이 순진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시멘트로 된 벌집 같은 기하학적인 입방체로 지어진 파리의 건물에서는 꿈을 꿀 수 없다고 했지만2) 1948년의 대지는 화학비료는 물론 방사능으로 뒤덮여 있었다는 점에서 시적 상상력으로서 순수하게 활동하는 ‘흙’의 상상력을 지금도 진지하게 논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시체공산주의』가 묘사하는 노동자의 도구가 바슐라르가 묘사하는 것처럼 결코 무결하지 않다는 점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송승언의 시에서 인간은 “해로운 것들을 모두 죽여버리는 힘”을 가졌고 그 힘은 “우리네 보건 정책에 부합”하는 것으로서(「루프」) 팬데믹의 감각으로 생동하기 때문이다.
초기 시에서부터 뚜렷하게 나타난 ‘땅 파기’ 행위가 이번 시집에 이르러 다른 양상으로 변화했다는 점은 결정적이다. “언덕 너머 노인이 묘를 파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언덕 이미지」의 경우, 땅 파기 행위는 시집의 묘를 파는 장례 행위로서의 매장(埋葬)의 의미를 갖는다. 혹은 전염병에 걸린 돼지들을 묻기 위해 비를 맞으며 큰 구덩이를 파고 있는 포크레인(「포크레인」)은 산 채로 동물들을 묻는 매몰(埋沒)이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파묻기는 매립(埋立)인데, 이는 시쓰기를 일종의 ‘플로깅(plogging)’으로(“따라가며 주웠다/ 쓰다 남은 것들/ 쓰다 버린 것들/ 쓰지 않은 것들”, 「쓰레기 줍기」) 상정하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예우하기 위한 매장과 살아 있는 동물의 매몰을 통한 학살은 전혀 다른 ‘파묻기’이지만 그렇게 지평선 아래에 파묻힌 뒤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폐기물과 뒤섞인다는 점에서 최종적으로는 ‘매립’이 된다. “저 쓰레기들이 세상에 버려진 쓰레기이듯이/ 나 또한 세상에 나뒹구는 쓰레기입니다”와 같은 선언은 어떤 식으로 파묻힌 것들이 시를 쓰고 있는 자신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자기 인식이며 “그러니 적어도 당신과 나는 쓰레기 생태계로 얽혀 있”(「쓰레기」)다는 점에서 연결되어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쓸모없음’과 ‘버려짐’의 방식으로 뒤섞이는 세계에서 시체는 쓰레기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니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는 그 유명한 문구에서 ‘유령’의 자리에 ‘시체’를 대입해보자.
3. 시체-쓰레기
글을 열며 송승언의 시는 지평선을 중심으로 위와 아래로 나뉜다고 썼다. 이번 시집에서 ‘시체’의 위치는 중요한데 그것은 파묻을 땅이 없을 정도로 높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암흑과 생기」에는 “쌓여가는 시체들 보며/ 너무 높다 생각”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시체를 올려다보는 구도에서 “햇빛이 위력적”으로 그려진다는 것은 그동안 송승언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해온 천사가 죽음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주목하게 한다. 이미 첫 시집에서 그는 ‘천사’를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의 익사체로 남은” 존재로(「망원」) 명명한 바 있으며 이번 시집에서 쏟아져내리는 빛이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게 쌓인 시체들을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시적 장치인 것이다.
이렇게 순서대로 읽은 후에야 「시체공산주의」에서 왜 “시체가 된 것들이/ 시체들이/ 시체였던 일부들이/ 공중에서” 흩어지거나 쏟아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더이상 쪼개질 수 없는 가장 최소한의 단위인 ‘개인(Individual)’들은 땅속에 묻힐 저마다의 무덤조차 갖지 못하고 그저 수북하게 쌓인 채로 부패하며 공중에서 뒤섞이는 중이다. 그러나 이 시는 어떤 존엄도 없이 쓰레기 산처럼 쌓인 채 부패하는 광경을 스펙타클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그저 시의 화자는 폭우가 쏟아지는 날의 대합실에서 줄지어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사람들의 행렬을 바라보고 있다. 각자의 목적지에 맞춰 행렬을 이뤄 질서 있게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이 리듬감 속에서 화자는 그들이 곧 “시체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며 이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도 이 행렬의 일부임을 깨닫는다.
그 행렬에는 플라스틱이 섞여 있다(「플라스틱에 남은 영혼」). 생명을 가진 유기체들이 서로 이어져 있어서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식의 생각은 전통적인 것이다. 그러나 「시체공산주의」의 행렬 속엔 무기물과 기계들, 폐기물이 뒤섞여 있으며 그것의 부패 과정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는 순환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식으로도 분리될 수 없다는 것, 현재의 관점에서 인간이라는 종은 “쓰레기 더미에서 쓰레기 먹고/ 죽어 쓰레기 되는 쓰레기 자연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즉 생산수단을 노동자들이 공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태어나고 자라고 살다가 죽은 이후까지도 쓰레기의 일부를 이룬다는 점에서의 공산(共産)인 것이다.
최근 시 읽기 방법에 있어서 신유물론 및 포스트휴먼 담론을 경유하여 수동적인 재료로 간주되었던 사물이나 대상화되어 주변으로 밀려나 있었던 비인간 주체의 주체성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그러나 제이슨 W. 무어는 자본주의는 경제적, 사회적 체계가 아니라 “자연을 조직하는 방법”3)이라는 점에서 인간/동물, 생명/물질, 자연/문화 등으로 분할되어 있던 이분법을 단순히 뒤집는 것은 결코 유효한 정치적 서사 전략이 아니며 두 항목의 관계를 명명하는 개념어의 발명이야말로 시급한 정치적 서사 전략이라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시체공산주의』의 ‘쓰레기 생태계’라는 시적 세계는 자본주의적 생산 주체 및 생산물/폐기물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전면화할 뿐 아니라 전지구화되어온 자본주의적 표상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4. 기도
총 세 개의 장(章)으로 구성된 이 시집의 목차에서 독특한 것이 있다면 「드러누움」이라는 한 편의 시가 ‘종장(終章)’에 따로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논이 넓게 펼쳐진 배경으로 사람들이 화자가 서 있는 쪽으로 돌아선다. 그들이 서 있는 뒤로는 “서산으로 기울고 있는 해의 빛 때문에” 그들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데, 화자가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곤 그들이 모두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잘못 본 것처럼 그들은 사라지고 화자는 “돈 되는 건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는” 땅 위에 홀로 남겨져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너무 쨍한 빛 때문에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송승언의 시에서 자주 반복되는 시적 문법의 일환이다. 그런데 시의 말미에 이르면 뜬금없이 어린 날의 우상이었던 손창섭 작가를 만났다는 경험담이 이어진다. 농장 일로 바빠서 정작 자신에게 관심도 없어서 조금 우울했다는 맥 빠진 농담 같은 일화는 대합실에서 분주히 움직이며 살아 있는 이들을 ‘시체가 될 존재’로 인식했던 것과 정반대로 “그를 실제로 보기 전까지 나는/ 그가 골방에 누워 꼼짝도 않는 사람인 줄만 알았다”고 크게 놀란다. 일반적으로 작가라는 존재는 자신이 쓴 글을 통해 독자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 시에서 화자는 손창섭이 쓴 글이 아닌 ‘농장’에서 그를 조우한 것이다. 그러니 이 시집이 가장 마지막으로 부수는 것이 문학작품이 만든 세계라고 읽는다면 과장일까? 그리고 아무리 꿈꿔도 끝내 만날 수 없었던 이연주 시인의 이름을 더듬게 만드는 것은 이 시집이 자신을 쓰레기 더미로 자처하면서도 끝내 버릴 수 없었던 속삭임 같은 작은 기도라고 읽겠다.
『시체공산주의』는 표지와 면지, 속지를 모두 포함하여 총 69장의 종이로 만들어졌다. 시를 세는 단위로서 이 시집에 몇 ‘편(篇)’의 시가 수록되었는지 소개하기보다 종이의 개수를 센 것은 이 시집이 ISBN이 없는 독립출판물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서지사항에 “사익을 취하지 않는 한 무단 전재 및 복제를 허가합니다.”라고 기재되어 있기에 시들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다양하게 읽히겠지만 송승언이 쓴 시들은 내 이름과 시인의 이름이 나란히 서명된, 내가 소장하고 있는 ‘이’ 시집이 ‘쓰레기 생태계’ 속에서 어떻게 폐기될 것인가를 집요하게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라는 장르가 쓰레기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존재가 되기를 결코 허락하지 않는 『시체공산주의』는 레드 콤플렉스가 지독하게 새겨진 한국어인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이토록 시적으로 전유한다.
만일 세상을 하나의 반듯한 정사각형으로 상정한다면 송승언의 시는 그것이 완전히 포개어지도록 반으로 접은 후 그 선을 따라 위와 아래를 양분하는 가로선을 긋는 것으로 시작된다. 숲, 언덕, 뒷산, 수풀의 이미지가 확연히 두드러지지만 그 무성함을 들추어낸다면 어떤 식으로든 끝내 마주하게 되는 것은 바로 흙으로 뒤덮인 지면(地面)이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출간된 송승언의 첫 시집 『철과 오크』(문학과지성사, 2015)는 ‘포스트-미래파’ 시기와 맞물려 황인찬의 시와 더불어 세대론으로 독해되는 과정에서 「녹음된 천사」에 나타난 빛의 양상이 중요한 시적 요소로 주목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송승언의 시를 절반만 읽은 것이다.
깊은 숲속의 은밀하고 작은 모닥불의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철과 오크」에서는 나무의 수많은 잎사귀와 그 속에 숨은 새들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숲을 통과하는 수십 명의 아이들이 “끝도 모른 채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딛는’ 곳이 선명하게 각인된다. 식물들은 이 단단한 지평선을 뿌리와 줄기로 가로지르며 무성하게 뒤덮고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땅 파기’는 송승언의 시세계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조건인 지평선을 훼손하는 도전적인 명령이며(“흙을 판다. 명령이 있었으니까.”, 「심부름」) 명령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손에 쥐는 것은 ‘광물’이 주는 낯선 이질감(「나타샤」)이다.
지평선 아래의 “돌의 감정”(「돌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바슐라르를 경유해보자. 바슐라르에게 금속이나 암석, 수목을 가진 대지(la terre)는 물이나 불, 공기의 유동성과 달리 흙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점에서 특수하게 인식되었다. 바로 그 견고한 물질성은 직접적이고 항구적으로 ‘저항’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의지(la volont)’를 이끌어낸다. 물질적 상상력에 있어서 단단함이란 노동하는 인간(homo faver)을 표상하게 한다는 점을 참조하고서야 「철과 오크」의 중요한 시적 주체가 ‘나무꾼’이라는 점, 이 시에서 등장하는 ‘철’의 속성이 도끼와 열쇠로 표상된다는 사실을 낯설게 감각할 수 있다.
2. 공산주의
최근 발간된 송승언의 세번째 시집 『시체공산주의』(독립출판, 2025)를 읽기 전 『철과 오크』를 다시 읽은 것은 제목 속에 있는 ‘공산주의’라는 시어가 섬세하게 독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948년, 바슐라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인간이 지금까지 손에 넣은 최대의 윤리적인 획득물은 노동자의 망치이다.”1) 여기서 망치란 물건을 ‘주조’할 수 있는 인간 투쟁의 산물이면서도 경찰의 곤봉과 엄격히 구분되는 계급적인 것이다. 대장간을 지나며 해머가 철판을 때릴 때 나는 소리를 듣고 고통스러움을 토로하는 루소를 인용하는 대목은 신랄하다. 한가로운 산책자이자 방관자로서 노동자의 생활을 꿈의 차원에서 사유할 때 이 금속성의 소리는 오로지 공포로만 경험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2026년, 기후 재앙의 관점에서 대지에 대한 바슐라르의 몽상이 순진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시멘트로 된 벌집 같은 기하학적인 입방체로 지어진 파리의 건물에서는 꿈을 꿀 수 없다고 했지만2) 1948년의 대지는 화학비료는 물론 방사능으로 뒤덮여 있었다는 점에서 시적 상상력으로서 순수하게 활동하는 ‘흙’의 상상력을 지금도 진지하게 논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시체공산주의』가 묘사하는 노동자의 도구가 바슐라르가 묘사하는 것처럼 결코 무결하지 않다는 점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송승언의 시에서 인간은 “해로운 것들을 모두 죽여버리는 힘”을 가졌고 그 힘은 “우리네 보건 정책에 부합”하는 것으로서(「루프」) 팬데믹의 감각으로 생동하기 때문이다.
초기 시에서부터 뚜렷하게 나타난 ‘땅 파기’ 행위가 이번 시집에 이르러 다른 양상으로 변화했다는 점은 결정적이다. “언덕 너머 노인이 묘를 파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언덕 이미지」의 경우, 땅 파기 행위는 시집의 묘를 파는 장례 행위로서의 매장(埋葬)의 의미를 갖는다. 혹은 전염병에 걸린 돼지들을 묻기 위해 비를 맞으며 큰 구덩이를 파고 있는 포크레인(「포크레인」)은 산 채로 동물들을 묻는 매몰(埋沒)이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파묻기는 매립(埋立)인데, 이는 시쓰기를 일종의 ‘플로깅(plogging)’으로(“따라가며 주웠다/ 쓰다 남은 것들/ 쓰다 버린 것들/ 쓰지 않은 것들”, 「쓰레기 줍기」) 상정하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예우하기 위한 매장과 살아 있는 동물의 매몰을 통한 학살은 전혀 다른 ‘파묻기’이지만 그렇게 지평선 아래에 파묻힌 뒤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폐기물과 뒤섞인다는 점에서 최종적으로는 ‘매립’이 된다. “저 쓰레기들이 세상에 버려진 쓰레기이듯이/ 나 또한 세상에 나뒹구는 쓰레기입니다”와 같은 선언은 어떤 식으로 파묻힌 것들이 시를 쓰고 있는 자신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자기 인식이며 “그러니 적어도 당신과 나는 쓰레기 생태계로 얽혀 있”(「쓰레기」)다는 점에서 연결되어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쓸모없음’과 ‘버려짐’의 방식으로 뒤섞이는 세계에서 시체는 쓰레기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니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는 그 유명한 문구에서 ‘유령’의 자리에 ‘시체’를 대입해보자.
3. 시체-쓰레기
글을 열며 송승언의 시는 지평선을 중심으로 위와 아래로 나뉜다고 썼다. 이번 시집에서 ‘시체’의 위치는 중요한데 그것은 파묻을 땅이 없을 정도로 높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암흑과 생기」에는 “쌓여가는 시체들 보며/ 너무 높다 생각”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시체를 올려다보는 구도에서 “햇빛이 위력적”으로 그려진다는 것은 그동안 송승언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해온 천사가 죽음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주목하게 한다. 이미 첫 시집에서 그는 ‘천사’를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의 익사체로 남은” 존재로(「망원」) 명명한 바 있으며 이번 시집에서 쏟아져내리는 빛이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게 쌓인 시체들을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시적 장치인 것이다.
이렇게 순서대로 읽은 후에야 「시체공산주의」에서 왜 “시체가 된 것들이/ 시체들이/ 시체였던 일부들이/ 공중에서” 흩어지거나 쏟아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더이상 쪼개질 수 없는 가장 최소한의 단위인 ‘개인(Individual)’들은 땅속에 묻힐 저마다의 무덤조차 갖지 못하고 그저 수북하게 쌓인 채로 부패하며 공중에서 뒤섞이는 중이다. 그러나 이 시는 어떤 존엄도 없이 쓰레기 산처럼 쌓인 채 부패하는 광경을 스펙타클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그저 시의 화자는 폭우가 쏟아지는 날의 대합실에서 줄지어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사람들의 행렬을 바라보고 있다. 각자의 목적지에 맞춰 행렬을 이뤄 질서 있게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이 리듬감 속에서 화자는 그들이 곧 “시체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며 이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도 이 행렬의 일부임을 깨닫는다.
그 행렬에는 플라스틱이 섞여 있다(「플라스틱에 남은 영혼」). 생명을 가진 유기체들이 서로 이어져 있어서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식의 생각은 전통적인 것이다. 그러나 「시체공산주의」의 행렬 속엔 무기물과 기계들, 폐기물이 뒤섞여 있으며 그것의 부패 과정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는 순환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식으로도 분리될 수 없다는 것, 현재의 관점에서 인간이라는 종은 “쓰레기 더미에서 쓰레기 먹고/ 죽어 쓰레기 되는 쓰레기 자연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즉 생산수단을 노동자들이 공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태어나고 자라고 살다가 죽은 이후까지도 쓰레기의 일부를 이룬다는 점에서의 공산(共産)인 것이다.
최근 시 읽기 방법에 있어서 신유물론 및 포스트휴먼 담론을 경유하여 수동적인 재료로 간주되었던 사물이나 대상화되어 주변으로 밀려나 있었던 비인간 주체의 주체성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그러나 제이슨 W. 무어는 자본주의는 경제적, 사회적 체계가 아니라 “자연을 조직하는 방법”3)이라는 점에서 인간/동물, 생명/물질, 자연/문화 등으로 분할되어 있던 이분법을 단순히 뒤집는 것은 결코 유효한 정치적 서사 전략이 아니며 두 항목의 관계를 명명하는 개념어의 발명이야말로 시급한 정치적 서사 전략이라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시체공산주의』의 ‘쓰레기 생태계’라는 시적 세계는 자본주의적 생산 주체 및 생산물/폐기물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전면화할 뿐 아니라 전지구화되어온 자본주의적 표상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4. 기도
총 세 개의 장(章)으로 구성된 이 시집의 목차에서 독특한 것이 있다면 「드러누움」이라는 한 편의 시가 ‘종장(終章)’에 따로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논이 넓게 펼쳐진 배경으로 사람들이 화자가 서 있는 쪽으로 돌아선다. 그들이 서 있는 뒤로는 “서산으로 기울고 있는 해의 빛 때문에” 그들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데, 화자가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곤 그들이 모두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잘못 본 것처럼 그들은 사라지고 화자는 “돈 되는 건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는” 땅 위에 홀로 남겨져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너무 쨍한 빛 때문에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송승언의 시에서 자주 반복되는 시적 문법의 일환이다. 그런데 시의 말미에 이르면 뜬금없이 어린 날의 우상이었던 손창섭 작가를 만났다는 경험담이 이어진다. 농장 일로 바빠서 정작 자신에게 관심도 없어서 조금 우울했다는 맥 빠진 농담 같은 일화는 대합실에서 분주히 움직이며 살아 있는 이들을 ‘시체가 될 존재’로 인식했던 것과 정반대로 “그를 실제로 보기 전까지 나는/ 그가 골방에 누워 꼼짝도 않는 사람인 줄만 알았다”고 크게 놀란다. 일반적으로 작가라는 존재는 자신이 쓴 글을 통해 독자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 시에서 화자는 손창섭이 쓴 글이 아닌 ‘농장’에서 그를 조우한 것이다. 그러니 이 시집이 가장 마지막으로 부수는 것이 문학작품이 만든 세계라고 읽는다면 과장일까? 그리고 아무리 꿈꿔도 끝내 만날 수 없었던 이연주 시인의 이름을 더듬게 만드는 것은 이 시집이 자신을 쓰레기 더미로 자처하면서도 끝내 버릴 수 없었던 속삭임 같은 작은 기도라고 읽겠다.
『시체공산주의』는 표지와 면지, 속지를 모두 포함하여 총 69장의 종이로 만들어졌다. 시를 세는 단위로서 이 시집에 몇 ‘편(篇)’의 시가 수록되었는지 소개하기보다 종이의 개수를 센 것은 이 시집이 ISBN이 없는 독립출판물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서지사항에 “사익을 취하지 않는 한 무단 전재 및 복제를 허가합니다.”라고 기재되어 있기에 시들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다양하게 읽히겠지만 송승언이 쓴 시들은 내 이름과 시인의 이름이 나란히 서명된, 내가 소장하고 있는 ‘이’ 시집이 ‘쓰레기 생태계’ 속에서 어떻게 폐기될 것인가를 집요하게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라는 장르가 쓰레기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존재가 되기를 결코 허락하지 않는 『시체공산주의』는 레드 콤플렉스가 지독하게 새겨진 한국어인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이토록 시적으로 전유한다.
장은정
@_ice_summer로 검색하면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접근성이 좋은 비평가. 비평집 『침투』(사각, 2021)가 있다.
2026/05/20
79호
- 1
- 가스통 바슐라르, 『대지와 의지의 몽상』, 민희식 옮김, 삼성출판사, 1977, 274쪽.
- 2
- 가스통 바슐라르,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 정영란 옮김, 문학동네, 2002, 114쪽.
- 3
- “녹색 산술과 그 위기 융합의 언어는 자연과 자본주의를 오인하는 것을 넘어선다. 녹색 산술은 현재 전환점의 특정한 산출을 파악할 수 없다. ‘그 경제’와 ‘그 환경’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 자본주의는 경제적 체계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사회적 체계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자연을 조직하는 방법이다.” 제이슨 W. 무어,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