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망각을 위한 애도는 가능할까
소멸의 주권과 저항으로서의 유예
집에 돌아오니 아이가 물었어
엄마
데스노트를 갖게 되면 누구 이름을 쓸 거야?
난 내 이름이라고 말했고 아이는 슬픈 표정으로
보내줄게
그렇게 말했지
_백은선, 「데스노트」 부분1)
엄마
데스노트를 갖게 되면 누구 이름을 쓸 거야?
난 내 이름이라고 말했고 아이는 슬픈 표정으로
보내줄게
그렇게 말했지
_백은선, 「데스노트」 부분1)
1. 유언 없는 유서
햇볕이 좋던 8월의 어느 주말, 한 남자가 자살한다. 탄환은 정확히 머리를 관통했고 유니폼을 입은 채 지하 창고에 누워 있는 그는 마치 경기가 끝난 뒤 잔디 위에서 잠들어버린 테니스선수처럼 보인다. 탁자 위에는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은 만화책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놓았는데, 훗날 그의 아내는 남편이 죽음 직전에 골랐을 법한 ‘단서’를 찾기 위해 그 책을 샅샅이 뒤진다. 예언을 듣는 데 실패해버린 선지자처럼 대사 칸의 문장들을 신중히 골라내어 자신의 심증을 ‘자살 가설들’ 파일에 써내려간다. 이미 무수한 가설들이 열 몇 권의 파일로 정리되어 책상 서랍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습은 얼마나 필사적으로 남편의 자살 ‘동기’를 알아내고자 애썼는지 짐작하게 한다. 에두아르 르베의 『자살』 도입부다.2)
남자가 어떠한 유언도 남기지 않았기에 아내에게는 그의 선택을 납득 가능한 서사로 봉합할 인과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이미지에는 해석되어야 할 단서도, 상징으로 표상될 알레고리도 없다. 남자는 그저 자신의 미학적 기획에서 죽음의 현장에 놓일 오브제들의 미적 배치를 고안했고, 오브제 중 하나가 되기를 원했을 뿐이다.(직접 보지 않았음에도, 남자가 연출하고 연기한 그 일인극은 ‘나’로 하여금 창고에서 상연되었을 특정한 장면을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되감게 만든다.) 서사화에 이르지 못해 애도의 완수는 기약 없이 유예된다. 어떠한 해석도 무력화하는 순수하고 비논리적인 투신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아내의 가설 목록은 끝도 없이 길어질 것이다.
이렇듯 애도되는 일에 대한 완고한 거부는 애도 가능성의 주권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미학적 저항처럼 읽히기도 한다. 타의에 의해 사후적으로 부여되는 인과로부터 죽음을 독립시키고, 차라리 미학적3) 사건으로 각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유서의 목적과 형식을 거부하는 반(反)유언이라 할 수 있을까. 해석 가능성을 전제한 서사적 자기 고백이라는, 유언에 대한 기존의 통념은 여기서 힘을 잃는다. 오히려 의도하는 게 있다면 서사적 단절이다. 죽음은 그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보존된다.
2. 사적 애도의 차등화와 애도 양식의 전형성
애도는 산 자가 망자에게 투사된 리비도를 회수하여 안정화하기 위해 슬픔의 기승전결을 구성하는 일이다. 보편적 애도의 패턴에서 산 자는 죽은 자의 생전 행적을 되짚으며 그 생애의 연대기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한다. 이때 죽은 이의 삶은 살아남은 자에 의해―살아남은 자를 위해―선별되고 추출된다. 죽은 이의 생애를 의미화하는 작업은 증거 자료를 최대한 수집하여 그의 행적을 사후적으로 옹호(혹은 추출)하는 변호인의 변론이자 증인의 증언이며 판결 과정을 공유하는 배심원의 감응과 유사하다. (따라서 애도는 망자에 대해 산 자가 빚을 청산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애도는 망자를 기억(함으로써 망각)하기 위한 서사화 작업이다. 흔히 애도는 슬픔을 공유하고 정서적 돌봄을 통해 남은 이들의 삶을 회복시키는 서사를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서사화를 거부하여 리비도 회수와 재투입이라는 프로이트적 포맷에 한정되지 않는 다양한 애도의 형식이 논해질 수 있어야 한다.
애도 방식의 다양화를 요구하는 대표적인 경우는 대상이 ‘애도-되기’ 자체를 거부할 때로, 그중에서도 죽음을 하나의 완결된 양식으로 연출하는 ‘미학적 자살’의 사례를 들 수 있다. 흔히 자살은 비극이나 패배라는 사회적 낙인을 수반하지만, 이 미학자들은 그러한 통념에 균열을 내며 기존의 서사 문법으로 해명되지 않는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이 경우 남겨진 이들은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서사적 자원을 길어올리려 시도하지만, 그때마다 외상의 근원지를 필연적으로 마주하며 서사화에 실패하게 된다.4) 그리하여 고인이 연출한 특정한 이미지만이 언제까지나 재생된다. 그들은 나를 잊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잊고 이 이미지만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아니, 그 누구에게서도 자신에 대한 기억이 모조리 비워질 수 있도록 이 이미지를 연출한 것이다.
서사화를 중심에 두는 프로이트식 규범적 애도 모델은 슬픔을 봉합 가능한 형식으로 완수한다는 암묵적 전제를 또한 내포한다. 이 전제는 일찍이 여러 방향에서 비판받아왔다. 데리다는 우울증과 구분되는 ‘정상적’ 애도가 주체를 타자와 분리 가능한 것으로 상정하며 그렇기에 타자의 타자성을 자아 안으로 삼켜버리는 폭력이라 지적했다.5) 주체가 이미 완결된 것으로 먼저 존재해야만 리비도를 회수하여 ‘정상적으로’ 애도를 완수하는 서사가 가능해지지만, 데리다에게 주체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되는 것이므로6) 애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버틀러는 규범성의 부합 여부에 따라 애도 가능성이 위계화됨을 비판했는데7), 그가 말하는 애도가치 분배에서의 불평등은 살아 있으나 이미 죽은 자처럼 간주되는 경우를 포함한다.8) 아메드는 인정의 구조 자체를 넘어 슬픔에 반응하는 다른 애도 양식들의 발명을 주장했다.9)
이 비판들은 각각의 방향에서 공통된 한 지점을 가리킨다. 서사화와 봉합을 전제하는 프로이트적 포맷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애도의 형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의들이 주로 겨냥하는 것은 공적 애도의 식별 체제로, 사적 애도의 영역에서 애도 가능성의 조건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는 그간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 그 공백을 다양한 상상력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사적 애도 안에서 애도가치를 결정하는 조건 자체를 먼저 물어야 한다.
사적 애도에서 ‘애도 가능성’을 결정하는 지배적인 척도는 사적 친밀성이다. 유대감을 주고받은 기억에 기대어 망자를 ‘애도될 만한’ 사람으로 추인하는 서사화가 주된 애도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연고의 유무와 규모에 따라 존재의 가치가 차등적으로 매겨지는 것이다. 때문에 그러한 자산이 부재한 이들의 죽음은 서사화의 조건 자체를 갖추지 못해 적절히 애도되지 못한다. 그간 여러 문학작품에서 재현된 사적 애도의 여정 또한 주로 고인과 친분이 있거나 그를 소중히 여기는 주변 인물을 통해 발화되어왔다. 이렇듯 죽은 자의 효용 가치10)를 중심으로 그의 삶이 선별되고 배치되므로, 연고가 없어 ‘기억’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들의 죽음, 가령 고립사는 단지 통계적 수치나 사회적 경각심을 위한 표본으로 소모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11)
사적 친밀성에 의거한 애도가치의 차등화가 문제적인 이유를 몇 가지 들어볼 수 있다. 먼저는 죽음 이후에도 생전의 고립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살아 있을 때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기 어려웠던 사람이 죽어서도 애도되지 못한다면, 배제는 삶에서 죽음으로 연장되며 결코 종결되지 못한다. 다음으로는 관계적 효용과 존재의 존엄을 혼동하게 한다는 점이다. 애도가치가 생전의 정서적 기여도, 즉 산 자들이 향유한 정서적 이득의 총량에 의해 달리 평가된다면 인간의 존엄은 그의 고유성에 달린 것이 아니라 관계라는 시장에서 획득한 일종의 ‘성과’와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고립 자체를 자연화한다는 점이 가장 문제다. 연고 없는 누군가의 죽음이 다른 이의 죽음보다 슬퍼할 만한 가치가 덜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건, 삶의 한 존재 형태로서 ‘고립’이 그 자체로 정당한 삶으로 존중받지 못함을 의미한다. 친밀감과 애도받을 자격을 암묵적으로 연결하는 지금의 인식은 삶을 성패의 문제로 환원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사적 친밀성 없이도, 서사적 복원을 경유하지 않고도 가능한 애도의 형식은 존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탐구는 산 자의 양도 불가능한 특권을 증거하듯 번번이 산 자의 몫으로 되돌려지고 마는 애도에 죽은 자의 몫을 조금이라도 돌려주고자 하는 시도이다.
3. 망각(된 삶)을 위한 애도 ―무연고자를 위한 애도
구체적으로, 산 자의 서사화 충동에 저항하는 두 가지 방향을 고심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는 망각된 삶을 위한 애도인데, 무연고자의 죽음에는 고인의 생애를 재구성할 기억도, 증언도, 맥락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서사적 자원의 결손은 타자를 적절한 서사 안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애도의 관성을 반성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동시에 이는 무지의 영역으로 남은 타자의 공백을 섣부른 상상력이나 연민으로 메우지 않는 치열한 윤리적 고민을 요청한다. 황혜경의 「철거」는 한 고유한 생의 흔적이 소멸해가는 자리를 있는 그대로 주목하며 그 곁을 지키는 응답의 방식을 보여준다.
시는 철거가 예정된 오래된 빌라에서 발견된 이전 거주자의 메모들을 나열하며 시작한다. 철거지에서 발견된 유해는 자연스럽게 이 메모의 작성자로 암시된다. 사체 앞에 붙은 ‘오래된’이라는 수식과 맥락 없이 파편화된 문장들은 그의 죽음이 고립사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혼자 사느냐고 묻는 불온한 의도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 질문에 담긴 사람의 기척을 “보살피는 체온”으로 믿고 싶어했던 고인의 심정은 이러한 심증을 뒷받침한다. 주목할 것은 시가 이 메모들을 과거의 유물로 처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장들은 사라지는 중”임을 현재 시제로 기록함으로써 고인의 흔적이 지금 이 순간에도 소멸해가고 있음을 포착하되, 그 소멸에 어떤 의미도 덧붙이지 않는다. 메모들은 해석되지 않은 채 나열되고, 시인은 그 사이의 여백을 구태여 채우려 하지 않는다.‘냉기의 기슭으로 끝까지 떠밀어줘’
‘안아줘도 눈물이 마르지 않을 때 그때는 이미 위험해
무리한 요구를 하는 상대들에게는 도리도리 안녕히!’
‘혼자 살아요? 물음표 뒤에 숨은 의도가 ((( ))) 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왜 혼자 살아요? 보살피는 체온 같았다’
‘기다림의 속도는 마지막에 빨라질까’‘발끈하는 분노는 쓰지 않기로 하자’
‘산책일까 도망일까 여행일까 죽음일까 어디 두고 보자’
‘오래된 무게에서 벗어나야 할 때는 생살을 찢는다는 말과 장거리 경주를 이해하기로 해요 나는 아직도 멀어요’
오래된 빌라에서 오래된 사체 한 구와
남은 문장들이 발견되는 아침에 관한 이야기
해는 또 떠서 오늘이고
문장들은 사라지는 중이고
방은 죽음 이후만을 보여주고 있다
연필 대신 베개를 품에 꽉 안고 있는 손가락뼈들
외롭지 않은 날에는 쓰지 못했을 것이다―황혜경, 「철거」 전문12)
그간 무연고자의 죽음을 다루는 문학적 재현은 대개 두 가지 경로를 따랐다. 고인을 측은한 존재로 위치시키는 동정의 시선 혹은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임을 강조하는 고발의 시선이 그것이다. 그런데 두 방식 모두 고인의 삶을 특정한 서사적 맥락 안에서 해석한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한다. 황혜경의 「철거」가 지닌 변별점은 바로 이 둘 모두를 거부하는 윤리적 중지에 있다. 시인은 해석하고 맥락화하려는 충동을 유보하고자 한다. 고인을 특정한 인과관계 속에 배치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생애가 하나의 매끄러운 서사로 봉합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만약 시인이 고인을 측은한 사람으로 규정했다면, 이는 사적 친밀성을 획득해 질적으로 잘 관리해야만 삶다운 삶이라 여기는 사회적 편견을 시혜적으로 반복하는 일에 그쳤을 것이다. 반대로 그를 사회 시스템의 희생자로만 읽어냈다면 삶의 의미와 가치를 그저 ‘연명’의 차원으로 축소해버렸을 것이다. 시인은 이 죽음을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거나 고인이 어떤 생을 살았을지 상상력을 동원해 재구성하는 대신, 그만의 내밀한 비밀이 담긴 문장들이 그저 그 자리에 존재했다는 사실만을 기록함으로써 그의 해석되지 않을 권리를 보존하고자 한다. 고인의 메모를 ‘사회적 타살’의 증거가 아닌, 어느 대체 불가능한 단독자가 남긴 고유한 문학으로 존중하는 것이다. 이렇듯 타자를 외로운 관찰의 대상으로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공백 곁에 잠시 함께 머물고자 하는 태도는 사적 친밀성이 부재한 관계에서 행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가 아닐까.
물론 베개를 끌어안고 있는 유해 이미지를 배치한 순서는 독자로 하여금 맥락상 고인의 삶을 ‘외로움’이라는 단일한 정서로 읽도록 유도하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배치는 타자성을 온전히 열어두려는 시적 기획에 다소간의 균열을 내며 아쉬움을 남긴다. 어쩌면 이 한계는 타자의 고통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재현의 관성이자, 서사적 구심력을 확보하려는 문학적 타협일지 모른다.
그런가 하면 성다영의 「더 명복」은 고립사 현장을 청소하는 특수청소업자 ‘은철’의 시선을 통해 비극적 서사화라는 관성을 거부하고 슬픔의 정동으로 수행되지 않는 새로운 애도의 가능성을 그려보게 한다.
이 시에서는 은철의 관점과 그를 관찰하는 상위 서술자의 목소리가 교차된다. “은철씨, 은철씨가 정한 이름으로 불러주자” 말하는 건 은철을 관찰하고 있는 상위 서술자인데, 이러한 발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재명명하는 은철의 삶을 긍정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이때 권유의 방향은 독자일 수도, 자신을 향한 다짐일 수도 있다. 사회가 규정한 이름이 아니라 불리기 원하는 이름으로 호명하는 일은 그가 이 세상에 고유하고 존엄한 형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증언하는 일이기도 하다.은철은 전기장판을 끄는 것으로 청소를 시작한다 사람들은 겨울에 꼭 전기장판을 켜둔 채 목 끝까지 이불을 덮고 죽었다
탐폰을 가방에서 꺼내 반드시 앞주머니에 넣는다 뒷주머니에 넣었다가 바지를 내리면서 변기에 빠트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를 왜 남자라고 생각했지 생각하다가 그만 탐폰을 뒷주머니에 넣고 변기에 앉아버렸다 탐폰을 앞주머니에 넣는 남자를 떠올린다 은철의 오래된 이름은 김은영
은영씨, 은영씨를 불러본다 은영씨는 자신의 이름이 싫어서 글을 투고할 때마다 남동생의 이름을 겉봉투에 적었다 마포구 서교동 370-13 203호 김은철
은철씨, 은철씨가 정한 이름으로 불러주자 은철씨는 화장대 옆에 있는 액자 속 남자를 본다 사진 속 남자는 얼굴에 꽃받침을 하고 애인의 어깨에 기대 웃고 있다
화장실은 곰팡이 하나 없이 깨끗하다 이렇게 깔끔한 사람이 자살을 하다니 빌라 주인이 괴롭다 은철씨는 그게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고 빌라 주인이 죽는다면 자살로는 죽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은철씨는 시체가 있던 장판 주위를 뜯어낸다 내가 비염이 있어서 참 다행이야
전화벨이 울린다 애인의 전화다 첫 질문은 자주 같다 이번에는 여자야 남자야 은철씨는 궁금하지 않아 대신 모르겠어 라고 말한다
남자의 집에서 가져온 매니큐어를 바르고 손톱이 닿지 않게 엉거주춤 노트북을 켠다 퇴근 후 블로그에 홍보 글쓰기 고독사 경력 3년 공릉동특수청소
남자는 창문을 빠짐없이 열어두고 나왔는지 떠올린다 남자가 턱을 괴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사랑에 빠질 것 같다 탁자 위 거울에 비친 내가 예쁘다―성다영 「더 명복」 전문13)
그러한 존중의 대상은 마찬가지로 트랜스젠더였던 고인을 포괄한다. 은철과 고인이 겹쳐 보이도록 여러 차례 의도되고 있음을 주목해보자. 먼저 은철의 주소가 명시된 직후 고인의 방으로 배경이 전환되는 연출은 고인 또한 ‘은철’이라는 이름으로 읽히도록, 그래서 은철의 일상에 고인의 생전 모습이 겹쳐 보이도록 의도한다. 마찬가지로 내내 은철이라 명시되던 인물이 마지막 연에서 ‘남자’로 지시되는 점은 고인의 생전 모습에 은철을 겹쳐보도록 이끈다. 탐폰을 챙기고 원고를 투고하고 매니큐어도 바르며 이따금 자신의 외모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것과 같은 소소한 일상이 고인에게도 존재했음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한편 은철은 고인이 남긴 매니큐어를 집에 가져와 바른다. 그런데 이때 고인이 생전에 했을 법한 일상의 동작이 은철의 몸에서 다시 구현되며 의도와 무관하게 독특한 애도가 수행된다. 여기서 애도는 죽은 자의 취향과 정체성이 산 자의 육체에 입혀지며 발생하는, 몸을 매개한 감각의 연속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는 고인의 생을 의식적으로 계승한다기보다, 유품의 물질성이 산 자의 몸과 공간으로 오염되듯 침투해 들어오는 과정에 가깝다. 고인은 그저 지워지는 게 아니라 유품을 매개로 삶(이자 죽음)의 일부를 물려주며, 산 자는 이를 자신의 감각 안으로 이어받는다. 둘 사이에 연고는 없지만, 어쩌면 고인에게는 연고보다 중요했을 퀴어 정체성이 이 이질적인 공유를 가능하게 한다. 그렇기에 거울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예쁘다고 흐뭇해할 때, 산 은철과 죽은 이의 경계가 흐려지며 거울에 비친 화자는 고인의 모습으로도 읽힌다. 이처럼 누군가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넘어 그가 살면서 경험했을 감각들을 이어 ‘사는’ 일은 승인의 형식을 빌리거나 연민과 동정에 호소하지 않더라도 그 삶이 본래부터 존엄했음을 상기시킨다. 감각적 침투로 구현된 이 무심한 겹쳐짐은 망자를 타자화하지 않고 그의 일상을 나의 일상으로 침투시키는, 깊고도 단단한 ‘더(The/More) 명복’이 된다.
4. 망각-되기를 위한 비(非)애도 ―미학적 탈주로서의 자살
통상적으로 애도는 망각된 존재를 기억의 가시적 영역으로 복원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는 질문의 방향을 틀어볼 수도 있다. 왜 기억되어야 할까. 왜 복원되어야 하며, 왜 망각의 심연으로부터 굳이 끌어올려져야 할까. 요컨대, 보편적 애도의 윤리를 논할 때 왜 ‘망각되지 않음’이 당위로 전제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해방과 함께 철저히 지워지길 소망했던 이들을―애도라는 형식을 취하지 않으면서―애도하는 일은 불가능할까.
여기서 산 자의 서사화 충동에 저항하는 두번째 방식으로서 ‘미학적 자살’을 마주하게 된다. 자살자 중에서도 미학적 자살을 감행하는 이들은 스스로 삶을 종결함으로써 시간의 주도권을 찬탈하려 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고유한 형식을 갖춘 미학적 사건의 연출이다. 애도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넘어 자신에 대한 기억도 흔적도 소멸하기를 바라지만, 생전 일화는 산 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인양되어 특정한 의미망에 동원되기 위해 마구 헤집어진다. 이처럼 ‘망각-되기’를 희구하는 이들을 위한 애도의 자리는 좀처럼 마련되지 않는다.
따라서 자살에 관한 논의를 사회적 ‘피해’나 ‘선택’에 따른 책임의 영역에서 미학의 영역으로 옮겨올 필요가 있다. 관련해 오은교는 자살을 불행의 서사로만 고착시키는 지배적 관점이 결국 자살자의 ‘의지’를 문제 삼음을 비판하며, 자살을 “복제와 재현이 불가능한 개별적 사건”14) 이자 “자기동일성의 변용성을 실험하는 급진적인 사건의 장소”15)로 사유하기를 제안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살은 망자가 구체적인 삶의 전사 대신 강렬한 이미지 자체를 각인시키고자 하는 미학적 결단이 된다. 죽으려는 자가 자신의 도래할 죽음을 해석 불가능하도록 설계하여 서사화를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망각-되기를 위한 애도’라는 역설적인 요청이 발생한다. 후술하겠지만 이때 애도는 남겨진 자의 수행이나 윤리적 결단이기 이전에, 죽은 자가 미리 설치해둔 장치의 효과가 된다.
그리고 지난 십수 년간, 백은선의 시는 바로 이 미학적 탈주를 향한 욕망을 집요하게 형상화해왔다.16) 물론 백은선의 화자들은 자살을 실행하는 주체가 아니므로, 그의 시는 미학적 자살의 욕망을 형상화하는 시로 읽을 수 있다. 이때 화자들이 보이는 특정한 내적 동기의 구조는 자신을 규명하려는 타자의 압제로부터 죽음의 권리를 되찾아오려는 존재론적 투쟁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미학적 선택을 가리키지 않는다. 독자로 하여금 죽음의 미학화를 향한 열망과 상시적으로 대면하게 하면서 망각(―되기)을 위한 애도라는 불가능한 실천에 대한 사유를 부단히 요청해온 것이다.
첫 시집부터 그의 화자들에게서는 수없이 끝장나고 부서지고 망가지기를 희구하는 자기 파괴의 성향이 두드러졌다.17) 최근 출간된 『비신비』는 그러한 들끓는 정념들의 과잉이 대폭 줄었으며 죽은 애인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을 다루는 시들이 많아 시집의 흐름을 비교적 일관되게 정돈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백은선의 분기점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건, 백은선이 첫 시집부터 그려온 개인적 상징의 축조 논리와 그러한 미적 설계의 기원이 더욱 분명해졌다는 점이다.
백은선에게서 죽음의 미학화를 향한 열정은 주로 추락 직전의 이미지와 결부된다. “창백한 나의 장면은 허공에서 시작된다”(「픽션다이어리」(3))라는 진술이 암시하듯, 백은선의 시에는 높은 곳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수직적 하강의 시선이 빈번히 드리운다. “가장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 내려다”보며 “천 미터 상공에서 천 장의 종이를 뿌”(「클리나멘」(3))리면 어떠할지 그려보는 시가 세번째 시집의 서시였음은 우연이 아니다. “물에 잠긴 어두운 도시”(「밤과 낮이라고 두 번 말하지」)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최근 시집에서도 발견된다.(“천 미터 상공에서/ 도시를 내려다봤다”(「사랑의 이름」(5))18)
백은선의 화자들이 죽음을 지향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삶의 특정 구간에서 발생한 고통스러운 기억이 무한히 재생되는 일, 곧 불가능한 애도를 반복하는 일에 지쳤기 때문이다. “과거가/ 밤중에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기억의 급습은 화자가 생애를 “이미 다 살았는데/ 처음부터 다시”(「비신비」(15쪽)) 살며 탈진하게 만든다. “내가 꿈속에서 이걸 몇 번이나 반복해 겪었는지/ 모를 거야/ 아무도”(「완벽한 투명」(5))라는 고백처럼, 이러한 괴로움의 되풀이는 삶이라는 게 절대 끝나지 않는 비극의 필름 속에 갇힌 것처럼 느끼게 한다. 현재의 몸과 기억을 통째로 “갈아타고 싶다”(「누가 내 무엇을 가져갔는데 나는 그게 뭔지 모른다」(5))는 갈망은 이런 처지에서 비롯된다. 이들에게 삶의 지속이란 고통스러운 기억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회로 안에 계속 머무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이 위기를 극복하거나 삶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깨진 거울처럼 잘게 부서져버릴 것 같은 마음은 동형적 이미지의 무수한 변주로 쪼개지며 미학적 죽음이라는 지향으로 이어지곤 하지만, 백은선만의 구체적이고 일관적인 미적 설계는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죽음으로만 완성되는 개인적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구현할 형식의 발명을 향한다.19)
화자는 깨진 유리 조각을 치우거나 절벽에서 멀어지는 일에 관심이 없다. 위기를 제거한다는 건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닌 것이다. 통상적인 극복의 서사는 되풀이되는 고통의 회로를 통과해 다른 곳에 도달할 것을 요구하지만, 이들은 그 전제 자체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는 건 그 고통을 재료로 어떤 형식을 만들 것인가의 문제다. 어차피 떨어져야 할 절벽이라면 어떻게 해야 더 완벽한 포즈로 추락할 수 있을 것인지를 고심할 뿐이다. 살아 있는 한 그 이미지는 언제나 미완성일 수밖에 없으며 삶에 의해 계속해서 수정되고 오염될 것이기에, 오직 죽음만이 이미지를 최종적으로 고정한다. 그 불가침의 완결 자리에 자신을 매혹해온 아름다움의 형상이 기입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백은선의 시에서 죽음 지향은 삶의 포기라기보다, 자신의 개인적 이미지를 완결하려는 미학적 구상이라 읽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리고 이는 죽음을 향한 갈망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는 시편들에서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깨진 유리 조각 위에서 텀블링을 연습해
절벽에서 추락의 포즈를 연구해―「소녀 경연 대회」(5) 부분
앞서 본 것처럼 이들의 죽음 지향은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인식과 그로 인한 소진감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 소진은 미학적 구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지하철이 선로를 따라 달려올수록 화자에게는 죽음의 공포나 두려움이 아닌, 아름다움의 실체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미세한 희열이 차오른다. 화자는 지하철 승강장으로 뛰어내려 “은빛 막대”라는 미학적 형상으로 다가오는 지하철에 의해 파괴되기를, 그리하여 눈부신 “빛”이 되기를 희망한다. 파멸의 순간을 아름다움과의 합일로 재편하려는 것이다. 이때 “아무도 읽지 못하는 빛이 되어 (…) 무한히 반사되고 싶”다는 바람은 타인에 의해 해명되기를 거부하고 해석 불가능한 순수 이미지로만 남고자 하는 지향을 드러낸다. 나아가 이는 자신의 구상 속 특정한 이미지를 완성하기 위해 죽음을 요청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죽음이 고통의 도피처가 아니라 생전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아름다움과의 완전한 합일을 실현하기 위한 필수적인 수행이 되는 것이다.살아서 숨을 쉬는 백 년짜리 기계로
방수 처리된 피부와 쉬지 않는 박동으로
(…)
내 몸 어딘가에 종료 버튼이 있어서
그것을 길게 누를 수 있다면
지하철 승강장에 서서
그런 생각을 했다
두둥 두둥, 두근대며 다가오는 은빛 막대의 아름다움
쇠가 부딪히는 소리
누군가 내 등을 세게 밀어줬으면 좋겠어요
아무도 읽지 못하는 빛이 되어 아아아아
무한히 반사되고 싶어―「세계의 배꼽―생일 편지」(5) 부분
어쩌면 이러한 태도는 비극적 위기를 감당할 만한 것으로 길들이고자 사소화하는 방어기제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은선의 시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맥락에서 볼 때 이는 자살의 미학적 배치에 대한 탐구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다. 죽음을 향한 지향이 단발적 충동이 아니라 첫 시집부터 일관되게 구축되어온 미적 설계의 논리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물론 죽음의 미학화 자체는 문학사에서 오래된 주제다. 근대 낭만주의의 죽음 찬미, 데카당스 미학의 아름다운 파멸, 한국 근대문학사의 탐미적 허무주의자들. 이들 또한 죽음 자체를 목적으로 삼기보다 미학적 포즈를 위해 특별한 방식의 죽음을 상상했으며, 그러한 태도는 예술가의 신화화라며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미학은 근본적으로 타자의 시선 안에서 완성된다. 타인에게 전시되고 읽힐 것을 의식한 퍼포먼스인 셈이다.
반면 백은선의 화자들은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타인의 감상과 무관하게 자기 자신에게만 각인될 이미지를 남기고자 한다. 이는 낭만주의적 죽음의 미학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을 향한다. 통상적인 미학적 자살이 삶의 비극성을 미화하기 위해 죽음이라는 연출을 빌려온다면, 백은선 시의 지향은 선후 관계가 전도되어 있다. 이들에게는 아름다움이라는 절대적 가치에 가닿는 것이 삶의 지속보다 우위에 있으며, 그 순수한 미적 상태를 보존하기 위해 오히려 삶의 지속이라는 불순물을 소거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죽음은 어떤 연대기의 서사를 보충하거나 수식하는 데 동원되지 않는다. 삶에 의한 소진은 미학적 의지로 전환된다.
5. 슬픔 출력 기계와 고통에 대한 주도권
그렇기에 미학적 강박에 투신하는 백은선의 화자들이 슬픔에 매혹되는 건 지극히 필연적인 결과로 보인다. 「프랙털」(5)에서 “슬픔을 찾아다니게” 된 이유는 아름다움인 것처럼 암시되고, 「비신비」(15쪽)에서 “장면 속에서 파란 물을 열고/ 걸어나오는 슬픔의 얼굴”은 “너무 아름다워서” 행복을 환기할 정도이다. 여기서 슬픔은 정박된 감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증식하는 생명력을 지닌 존재로 그려진다. 「사랑하는 머리」(5)에서처럼 화자의 내면에서 푸른 숲처럼 무성히 자라나는 슬픔은, 「지옥 체험관」에서와 같이 화자를 반복되는 고통의 궤적 위에 오래 세워두기도 한다. 하지만 백은선에게 슬픔은 그저 자아를 파괴하는 공격이 아니다. 앞서 삶에 의한 마모가 미적 구상에 몰두하게 했다면, 슬픔은 그 아름다움을 구현하기 위해 매번 새롭게 서술하고 탐구할 수 있는 미학적 자원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슬픔이 미학적 자원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에게 슬픔이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이 아니라 내부에서 스스로 증식하는 것으로 경험되기 때문이다. 통제 불가능한 외부의 재난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질지라도, 내 안에서 자라나는 무언가라면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관찰과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삼킨 눈물이 몸속으로 돌아가 피가 되듯(「세계의 배꼽―생일 편지」(5)), 나아가 슬픔은 생의 존재 조건이 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슬픔을 제거하려는 불가능한 시도 대신 ‘슬픔이라는 재료로 어떤 아름다움을 빚어낼 것인가’를 묻는 일이 가능해진다.
이처럼 제거되지 못한 슬픔이 재료가 되듯, 유예되는 죽음이 가능성의 공간을 열기도 한다. 백은선의 시에서 죽음에 대한 간절한 희구가 역설적으로 죽음을 지연(삶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추락하고 싶은 충동을 멈춰 세우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다.
자살 사고가 어떻게 “구원”이 되는지 주목해보자. 이는 단순한 심리적 방어기제가 아니다. 불안을 해소해 이전 상태로 돌아가기보다 죽음이라는 ‘가능성’을 손에 쥔 채 그 긴장을 지속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자기 삶의 주권을 마지막까지 보존하려는 존재론적 입장에 가깝다. 이는 세네카가 말한 것처럼 죽음이라는 출구를 인식함으로써 삶을 긍정하는 태도와는 다르다.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통제권이 ‘아직’ 남아 있다는 안도감은 고통스러운 삶을 조금 더 버티게 하는 미약한 해방감이 된다.20) 즉 백은선의 화자들이 죽음을 구원으로 여길 수 있는 건, 그것이 탈출이어서가 아니라 침범될 수 없는 자율성이 여전히 자기 안에 있다는 감각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선택지가 있는 한 삶은 유예의 주권이 행사되는 자리가 될 수 있다.죽으면 다 끝날 거야
아파트 복도에서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는 밤마다
그런 생각이 구원이었어―「나비 안기」(5) 부분
이는 결코 삶이 죽음보다 우위에 있다거나, 고통을 자원 삼아 내적 성장을 이뤄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소멸의 권리에 대한 깨달음은 삶을 몰입하여 살아내야 할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관찰해야 할 것으로 보게 한다. 언제든 삶이라는 극장을 나갈 수 있지만 결말을 확인하기 위해 객석에 남기를 선택한 이 능동적인 체류는, 타인의 서사가 나의 삶을 규정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나의 삶을 관찰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죽음이라는 최후의 패를 쥐고 있기에 누릴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유예는 결코 무력한 패배도, 비겁한 포기도 아니다. 죽고 싶은 마음은 역설적으로 나를 생의 의지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타인의 해석에 소유당하지 않게끔 붙들어둔다.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 한 나의 삶은 아직 미완이며, 미완인 것은 타인의 서사로 최종 확정되지 않는다. 물론 살아 있는 한 타인의 해석을 완전히 막을 수 없듯, 죽은 이후에도 서사화는 유예 여부와 무관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유예가 보존하는 것은 사후 서사화로부터의 면제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아직 자신의 삶이 타인의 결론으로 봉합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게 한다. 유예는 바로 그 미완성의 상태를 능동적으로 지속하는 주권의 형식이다.
유예는 결국 죽음을 ‘극복’하고 삶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죽음을 타인에게 넘기지 않는 것이다. 죽음을 실행하는 순간 그 죽음은 더이상 내 것이 아니다. 타인의 해석이 도달하고 서사가 덧씌워지며, 나의 죽음은 남겨진 자들의 언어 안에서 의미화된다. 반면 죽음을 아직 실행하지 않는 한, 그 죽음은 여전히 내 손 안에 있다. 그 미확정이 유예의 주권을 가능하게 한다.
언젠가 아내는 이유가 없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죽음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발 딛고 선 풍경이라는 것을.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그가 온 힘을 다해 지켜낸 주권적 소멸일 것이다. 그때서야 보내줄게, 말하는 일이 가능해질지도 모르겠다. 망각을 위한 애도는 그렇게 정답이 아닌 끝없는 질문의 형식으로 (비)완수된다.
최다영
문학평론가. 202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공저로 『한강을 읽는다』 『비평포럼』 『마녀의 독서, 광녀의 춤』이 있다.
자살하는 청소년들이 유서를 남기지 않는 ‘현상’은 자주 문제적으로 다뤄진다. 죽은 이에게까지 ‘납득할 만한’ 해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산 자의 삶이 불가능한 애도라는 고통에서 풀려나 원활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그러나 죽고 싶은 마음은 누군가를 설득해 승인을 얻어내야 할 오류 따위가 아니다.
우리는 그 어떤 삶도 함부로 평가받지 않을 고유한 존엄성을 갖고 있다고 쉽게 말하지만, 지배적인 애도 양식이 그 ‘존엄성’을 사후적으로 어떻게 구성해왔는지 돌아보는 일에는 소홀한 것 같다.
마찬가지로 자살 학교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자살을 배우는 일은 어떻게 죽는지를 넘어 자살이 어떤 불가능한 애도들을 요청하는 사건인지 배우고, 자살 사고를 가지고 있거나 자살자의 연고자인 동료 시민들과 진정으로 함께 살기 위해 노력을 들이는 일이다.
2026/05/20
79호
- 1
- 『비신비』, 문학과지성사, 2025.
- 2
- 에두아르 르베, 『자살』, 한국화 옮김, 워크룸프레스, 2023, 11-12쪽, 14-15쪽.
- 3
- 여기서 ‘미학적’이란 그저 시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타인이 부여하는 의미를 거부하고 죽음의 고유한 형식을 창안하기 위한 미적 지향을 의미한다.
- 4
- 여기서 발생하는 고통은 이중적인 구조를 띤다. 애도를 수행하려면 고인과의 기억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외상적 이미지의 현재적 침투로 인해 번번이 가로막힌다. 억압하려 할수록 반복강박에 의해 더욱 집요하게 귀환하는 이 이미지를 망각하기 위해서라도 애도는 완수해야만 하는 것이 된다. 망각에 이르기 위해 애도해야 하지만 애도하려는 시도 자체가 망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미학적 자살자가 연출한 이미지는 이러한 역설의 구조 속에서 더욱 선명히 각인된다. 물론 여기서 프로이트를 참조하는 것은 앞서 비판한 그의 애도 모델―서사적 봉합으로서의 리비도 회수―과는 다른 맥락에서다. 문제는 기억의 작동 방식에 있다.
- 5
- 왕철, 「프로이트와 데리다의 애도이론―“나는 애도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영어영문학》 제58권 4호, 2012, 289쪽.
- 6
- 진태원,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비판 없는 시대의 철학』, 그린비, 2019, 8-9쪽. 이때 관계는 ‘하나’로의 융합도, ‘둘’의 대립도 아닌 “하나이자 둘, 하나 속의 둘”이며 이는 타자를 내 안에 품되 그를 나의 확장, 나의 일부로 환원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해지는 ‘비(非)-관계’로서의 애도를 말한다. 타자의 죽음은 그 관계의 기원에서부터 이미 출몰하고 있는 것이기에 타자에 대한 애도만이 타자와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고 ‘타자를 책임지는 주체’로서 ‘나’를 성립하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애도는 결코 끝맺음되지 않는 ‘종결될 수 없는 읽기’가 된다. 이것에 관해서는 민승기, 「애도」(《문장웹진》 2018년 3월호)를 참조할 것.
- 7
-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애도의 힘과 폭력』,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13쪽. 나아가 버틀러는 “우울증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집착이 타인의 취약성에 대한 배려로 전이”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슬픔이 공동체적 실천의 지속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출발점이자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같은 책, 61쪽) 죄책감 또한 그에게는 삶의 가능성을 보호하고 재생산하는 보살핌을 위한 기제로 여겨진다.(주디스 버틀러, 『비폭력의 힘―윤리학-정치학 잇기』,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21, 124쪽)
- 8
- 이러한 애도가치의 평등은 사회적 유대와 사회 구조를 조직하는 제반 영역에서의 원칙이어야 한다.(주디스 버틀러, 같은 책, 80-82쪽)
- 9
- 전혜은, 『퀴어 이론 산책하기』,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21, 571-572쪽. 누군가의 상실을 ‘우리’의 상실이라 말하는 일이 책임감을 은폐하는 다른 형태의 폭력적 전유가 될 수 있기에 “타인의 정동을 내 것인 양 가로채지 않는 윤리”에의 강조 또한 잘 알려져 있다.(같은 책, 569쪽)
- 10
- 여기서 말하는 ‘효용’은 자본주의적 생산 가치와 무관하다. 사적 애도가치를 규정하는 척도로서 효용 가치는, 애도하는 자와의 내밀한 관계에서 제공된 정서적 지원 및 유무형의 원조와 관련된다.
- 11
- 그렇기에 다음의 질문을 사적 애도의 차원에서 고심해보자. “누군가를 잃었는데 그 누군가가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면, 결국 그 상실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발생하며 또 애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주디스 버틀러, 같은 책, 64쪽)
- 12
- 『겨를의 미들』, 문학과지성사, 2022.
- 13
- 『스킨스카이』, 봄날의책, 2022.
- 14
- 오은교, 「꿈에 젖은 뇌―문학적 자살학 시론(試論)」, 『제정신병자들』, 문학동네, 2025, 387쪽.
- 15
- 오은교, 같은 책, 397쪽.
- 16
- 백은선은 2012년 등단 이후 지금까지 다섯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1) 『가능세계』(문학과지성사, 2016), (2)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현대문학, 2019), (3) 『도움받는 기분』(문학과지성사, 2021), (4)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문학동네, 2023), (5) 『비신비』(문학과지성사, 2025). 이하 이 시집들에 수록된 작품을 인용할 경우 본문에 작품명과 함께 책 번호를 표기한다.
- 17
- 빈번히 포착되는 ‘물’과 ‘빛’, ‘불’은 아름다움의 상징인 동시에, 대상을 부러뜨리고 파괴하는 위력적인 이미지로 기능한다. 아니, 어쩌면 그토록 파괴적이기에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 18
- 그런데 「퀸의 여름」(3)이 대표하듯,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이 하강의 시선은 자주 수면 아래를 향한다. 깊은 슬픔으로 인해 물 아래 잠기게 되는 것으로 암시되는데(「누가 (…) 모른다」(5)), 이 심해 아래에 백은선의 가장 중요한 개인적 이미지인 ‘물속에 잠긴 숲’이 자리하고 있다.(「변성」 「언플러그드 삭」) 이 숲은 절단된 손목, 부러진 가지 등 고통의 흔적을 매장함으로써 조성되는데, 이는 마치 파편들을 제물 삼는 일종의 제의처럼 보인다. 숲은 대개 심해 아래에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심해로 가라앉는/ 나의 잘린 두 손이 쥐고 있던 것”(「무간나락(無間奈落): 영원한 겨울」(5))이라는 표현은 제물이 심해 속으로 추락하는 이미지를 통해 백은선 시에서 숲이 형성되는 원리와 숲의 자리를 동시에 암시한다. 추락과 매장의 이미지가 백은선에게 그토록 중요한 건, 이들이 백은선의 미적 설계를 추동하는 기원이기 때문이다.
- 19
- 인아영은 백은선 시에서 고통을 형상화하는 발화 형식에 주목하며, 나아가 이를 시인의 고유한 창작 방법론으로 분석한다.(인아영, 「괴로움의 기술」, 『진창과 별』, 문학동네, 2023) 이 글은 그러한 미적 배치에의 열망을 창작 전략을 넘어, 고통에 존재론적으로 묶인 화자들의 내면에 자리한 근원적 강박이자 내적 필연성으로 읽고자 한다.
- 20
- 언제든 끝낼 수 있다는 유예의 안도감은 죽음을 지연시키는 동력이 되는 걸 넘어 다른 생의 가능성을 열기도 한다. 「일그러진 세계의 반영」(5)은 인류 대부분이 네트워크 카스파로 이주한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그레타는 카스파를 파괴하기 위해 해킹을 시도하던 중 근위대에 붙잡히지만, 특정 제안을 수락한 후 위기를 모면하고 안락한 삶을 살게 된다. “단지 이곳을 파괴하려 숨어든 것뿐”이며 “모두 완전히 날 신뢰하게 되었을 때 네트워크를 전부 폭파하면” 된다고 자기 암시를 이어가며 네트워크의 파괴라는 본분 이행을 나날이 유예한다. 이러한 기만의 안도감은 당초 계획에 없던, 네트워크에서의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