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스스로를 활동가로 소개하는 데에 주저함이 크지 않으나, 시인으로 소개하는 편이 더 익숙한 편이기는 하다.이 글은 시를 쓰고 연대활동을 하는 나에 관한 글이다. 청탁받았던 큰 주제는 ‘연대’였다. 가장 최근 있었던 몇 가지 부끄러운 일이 떠올라 이 글을 쓰기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게 구체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던 이들에게, 그리고 관계적 신뢰를 쌓았던 이들에게 거절감을 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따져보지 않고는, 그리고 정직하지 않고는, 그럼에도 함께한다는 감각을 향해 마음을 열어두지 않고는 이 주제에 관해 잘 쓸 수 없으리라는 게 지금의 내 생각이다. (순진한 성찰일까?) 더듬어가며 연대의 방식을, 방향을 더 배워간다. 열어간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더 알아간다. 감정이나 당위만으로 연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연대한다는 구체적인 의식이 필요치 않은, 자연스럽게 연대와 환대의 자리에 자신을 두는 헌신적인 이들이 있다는 것 또한 나를 부끄럽게 한다. 하지만 타고난 선함이 연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 같다. 연대는 정치적인 감각이 기입된 것이리라 생각한다. 타자의 고통과 내 고통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 연결성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는 동일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책임과 응답, 상호돌봄으로서의 거리 감각이 반영된 연결, 또는 어딘가 엉망진창인 연결. 틈이 있더라도, 이런 상호 연루됨의 인정 및 연결의 시도들은 폭력적인 동일화와는 다르다. 연대는 취약한 서로의 편이 되어주는, 힘이 되어주는 움직임이다. 이 움직임은 결국 정치적인 움직임이 될 수밖에 없다. 고통을 전가받은 이의 고통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도록 체제의 가동을 멈추는 것.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 진행중인 폭력을 멈추고, 예상되는 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 것. 새 기반을 만드는 것. 바꾸는 것. 지켜내는 것. 바로 지금 돌보고, 또 ‘미리’ 돌보는 것.1) 국가의 이름으로, 권위의 이름으로, 관습에 의거해, 힘에 의해 자행되는 살벌한 일들. 존엄과 생명을 짓밟는 일들. 이에 대응하는 일은 힘이 필요한 일이다. 연대는 기꺼이 그 대응에 힘을 실으며 나 또한 연루된 이임을 고백하는, 어쩌면 아주 연약한 일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싶다.
  연대가 필요한 일은, 편취하려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마치 보편적인 이익인 양 둔갑하는 비열함에, 나와 내 가까운 이들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무사안일함에, 소위 정상성이라고 간주되는 일들에 대응하는 일인 경우가 많다. 이때의 연대는 정치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큰 얘기로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놓인 자리를 궁글려 생각해보면서 겨우 조심스레 적어보는 이 글은, 뭐랄까, 어쩌면 별 특별할 게 없는 글일지도 모르겠다. 더 근사한 글을 써야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면서, 내게 밀착된 언어가 아닌 말은 나의 것이 아니므로 벗어두고 더 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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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떠돌곤 한다. 정주하고 싶어서 내가 가진 돈과 머물려는 곳에 필요한 비용을 맞춰보곤 하면서. 그러다 다시 떠난다. 나를 떠밀거나 붙잡는 이 많지 않아도, 굳이 떠난 걸음이었다가 다시 되돌아 온다. 익숙한 풍경 속으로 다시 비집고서. 어느 때엔 활동가라는 이름으로, 또 어떤 때엔 연애와 결혼 진입에 실패한 여성으로서. 또 어느 때엔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해서. 일자리를 찾아서. 도망쳐야 살 수 있어서.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곳을 이주해 다녔다. 정처가 없다는 것에는 익숙해졌더라도, 가려는 곳이 안전한 곳일지는 몰라 못내 마음을 졸였다.
  내가 떠돌던 것에 ‘도망치기’라는 이름 대신에 ‘연대’라는 이름을 붙여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준 건, 최근에 읽고 있는 정홍칼리 작가의 책 『틈새 연대기』(오월의봄, 2025)에서 읽은 문장들이다. 무속인이기도 한 정홍칼리 작가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비명을 지르는 넋”들이 자신의 몸을 두드렸기 때문에,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흘렀던 몸의 증언이자 밀려난 몸의 연대기, 이어 쓰는 연대”2)로서 살고 또 글을 쓰고 있었다.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밀려나 가장 암담한 선택을 하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택했던 떠남의 여정에서 그는 죽을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고 쓰고 있었다. 그는 해방감을, 그리고 그 해방감과 동시에 감각되는 겹겹의, 인간 권력이 구축해낸 또 다른 억압들을 계속해서 알아보게 되었다. 차별과 폭력의 구조에서 억압되었던 이들의 넋이 내는 소리를 듣기로, 그 감각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게 되었다고 칼리 작가는 술회하고 있었다.
  엉망진창인 내 삶도 틈새에 연대하는 마음에 잇닿아 있다고, 내가 바로 그 틈새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조심스럽게 말해보건대, 누군가의 죽음이 나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고. 나의 느림과 빠름이, 나의 고단함과 날카로움이, 나의 우울과 눌림이, 심지어 나의 즐거움이, 당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칼리 작가의 언어를 이어받으면서, 내가 해보려 했던 연대의 심정과 칼리 작가의 심정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완벽하게 같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말이다. 공명. 외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사회에 발 딛고 뒹구는 정치적 존재”이자, “언제나 흐름 속에 놓인 정치적인 몸”. 칼리 작가가 썼듯 “나의 해방은 나만의 몫이 아니다. 사회적 치유 없이는 나의 회복도 없다.”3) 그래서 이 글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사회의 부정의에 관해 정돈된 언어로 잘 말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해방이 연결되어 있고 나는 정치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말이다.
  이와 같은 감각을 구체적으로 탐색하게 된 건 후술하겠지만 내 경우는…… 기후생태위기를 감각하면서부터다. 한편 연결에 대한 감각은 세월호 참사 그리고 그 직후 고구마 줄기가 줄줄이 뽑혀 나오듯 드러났던 당시의 부패한 정치권을 접하면서도 전에 없이 생겨나고 있던 터였다. 많은 이들이 거듭 기억하고 행동해왔듯, 이는 내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학장의 영역에서는 당시 참사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며 ‘304낭독회’가 기획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당시 다 이해되지 않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적 참사 앞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세월호 참사를 온전히 나의 일로 여기고 있다고 여기기엔 내 경우 조심스러운 심정이 컸다. 내 마음을 짚어보면, 가족을 잃은 이들의 압도적인 슬픔 곁에 어떻게 있으면 좋을지 고민하는 심정이 더 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쩔 줄 몰랐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압도적인 슬픔. 그러다가 어떤 든든하고 따뜻한 사회적 품이 만들어져야 할 공공적인 필요성을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처음 어렴풋이 느꼈다.
  참사를 야기한 병리적인 사회와 정치를 바로잡고 돌보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섬세한 목소리들이 수용되는 공론장을 끊임없이 만드는 것. 이미 참여하는 존재로 살고 있음을 아는 것. 공존. 하지만 어렴풋한 감에 그친 채 살았다. 일상으로 돌아갔다고 해야 할지. 공공의 영역에 관한 이해가 점차 생겨가기도 하였으나, 막연한 마음 또한 많이 들었다. (지금은, 그럴수록 약한 나를 드러내며 꾸준히 이야기를 지속해가야 한다는 걸 이해한다. 그게 오히려 내게 힘으로 돌아왔던 경험을 그간 감사하게도 많이 했다.) 당시 내가 적극적으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활동했던 건 아니다. 함께 만들어가는 기억의 시간을, 그 끈을 소소하게 나도 함께 이었다. 일꾼의 자리를 열어주고, 동시대의 ‘문학적 실천’을 사유하며 길을 열어간 앞선 시도들에 감사하다. 세월호 참사 즈음은, 그러니까 2010년대 후반부터 2020년대 초반 그 사이에는 페미니즘 담론이 활성화된 시기기도 했다. 변화의 가능성을 믿으며 함께 분노하고 아파하는 시간이 흘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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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참사는 발생했다. 인재라는 파악이 가능한 사회적 참사들. 2022년 10.29 이태원 참사가 그랬고, 작년 2024년 6월 발생한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가 그랬고, 12월 발생한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참사가 그랬다. 인재였다. 예견됐던 일이다. 한편 전세 사기 피해로 인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들의 소식도 떠오른다. 전주페이퍼의 청년 노동자의 죽음도 떠오른다. 반복적인 죽음 형태. 그리고 새로운 죽음 형태. 이를테면 지표면 온도 상승으로 인해 숱한 생명들이 죽는 것. 전에 없는 폭염 속에서 실외노동을 하며 맞는, 지켜주는 이 없는 죽음. 폭우 속 장애인을 포함한 일가족이 맞이한 반지하 주거지에서의 죽음. 택배 노동자가 빗속에서 배송 중 맞이한 죽음. 사회적 타살.
  여기 쓰지 않은 참사들이 숱하다. 인간의 개발은 대규모 생태학살로 이어져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비인간동물의 재난은 어떤가. 오로지 식용을 위해 공장식 축산업 현장에서 ‘생산’되고 도축되는 돼지의 생은 나와 먼가. 한편 신공항 건설 사업 등 개발사업은 어떤가. 갯벌과 바다를 매립하거나 섬을 폭파해 지으려는 신공항 건설의 경우, 그 건설 예정지는 철새들의 국제적인 이동경로에 속하는 우리나라 주요 철새 도래지들과 위치가 겹친다. 건설 과정에서의 파괴에만 그치지 않고, 생태계를 강제로 변형시킨다. 땅과 바다에서는 죽임당하거나 살던 곳 바깥으로 내몰린다. 새들은 하늘길을 박탈당한 채 충돌의 위험에 노출된다. 이들이 겪을 재난은 어떤가. 여기서 또 다른 사회적 참사를 예견하는 일은 기우나 불길한 저주가 아니다. 이는 거듭 강조돼야 할, ‘미리’ 재난을 막고 생명을 돌보는 아닐까. 국가가 하는 일이라며 그냥 두고 볼 일일까. 국외는 어떤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학살을 정당화하면서 인종 청소를 실행에 옮겨 왔다. 휴전되었다지만 어떤 번복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국제사회는 침묵해왔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계에 역사적 책임이 있는 영국을 비롯한 일부 서구 국가들은 이익을 위해 비열한 태도로 팔레스타인을 대해왔다. 한국 기업인 현대의 굴삭기가 팔레스타인에서 건물을 파괴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참사와 재난의 목록을 짚어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먹먹해진다. 각 사안의 성격은 저마다 다르다. 나는 이 목록을 자본주의적 경제시스템이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수렴해 쓰고 싶다. 물론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조금은 참아본다. 개별 사안의 고유한 맥락들이 뭉뚱그려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시사점을 준다. 동시에 그 모든 맥락에서 내가 비껴 나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예컨대 전세 사기의 경우 가해자는 투자였지 사기가 아니라는 논리를 펼친다. 하지만 그의 ‘투자’로 인해, 피해자는 자살을 택할 만큼 고통 속에서 좌절하고 헤맨다. 사기가 아닌 투자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을까. 이것은 어떤 맥락에서의 현상일까. 부동산을 이용한 시세 차익의 발생이 큰 이윤으로 이어진다는 것. 집을 거주의 개념이 아니라 투자의 개념으로 여기는 것이 보편적으로 승인되고 있는 사회. 그 흐름에 동조해주는 사회의 노골적인 욕망들. 또는 부동산 문제 앞에서 느끼게 마련인 개인들의 무력함. 전세사기 피해야말로 자본이 자본을 낳는 흐름의 한가운데에서, 그리고 자본주의적 욕망을 끊임없이 승인해주는 폭력적인 구조의 사회에서 발생한 피해다. 얼마 전 내가 계약하려 했던 은평구의 한 빌라가 불법 건축물에 해당했고 계약에 나섰던 임대인이 진짜 임대인이 아니라 섭외되어 온 ‘가짜 주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돼, 무리한 계약을 막판에 거둔 것에 가슴을 쓸었던 적 있다. 내가 부동산 사기 피해에서 벗어나 있을까. 내가 당하지 않았다고 안도에 그치는 마음이 못내 쓰리다.
  한편 아리셀 배터리 공장 참사의 경우, 리튬 배터리의 위험성을 파악하고 안전을 기해야 했을 사측이 불량 배터리를 제대로 검수하지 않은 채 눈속임하며 넘어가려 했다. 검사용 시료를 바꿔치기 했고, 납기일에 맞춰 군납하기 위해 무리하게 공정을 가동했다. 여기서 고용자가 확보해야 할 노동자의 안전이 이윤 앞에서 무시된다. 휴지 조각처럼. 생명과 맞바꾼 이윤. 나는 그 이윤이란 것을 발생시키는 지독한 기업의 한 전형을 여기서 본 것 같다. 당시 노동자에게 안전교육도 시행되지 않았다. 또한 현행법상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에는 파견 근로자를 고용할 수 없는데 이 또한 무시됐다. 불법파견이었다. 아리셀 참사를 통해 외국인 노동자에게 위험도가 높고 불안정한 외주 고용 구조의 일자리가 전가되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피되는 노동을,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는 이들이 감당한다. 군납 비리도 드러났다. 국가가 동조한 재난인 셈이다. 나는 이 구조와 무관한가. 층위가 조금은 다르지만, 내가 사용하는 리튬 배터리가 장착된 가전제품만도 여러 개라는 것, 세상이 리튬 배터리로 가득하단 것에 놀란다. 스마트폰, 청소기, 노트북, 전기드릴, 그리고 도로에는 전기 자동차. 나는 리튬 배터리를 사용하는 물품을 쓸 때 이 참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태원 참사는 어떤가.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인파가 몰릴 것이라는 예상이 어렵지 않은 시점이었다. 상황에 빠르게 대처해야 했을 경찰 인력은 분산되어 있었다. 대통령실이 용산으로 이전되면서 용산경찰서 관내에 치안 공백이 있었다는 것이 당시를 설명하는 숱한 목소리다. 이태원 참사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은 쉽게 오해받고 혐오의 대상이 되곤 했다. 굳이 그곳에 왜 가냐고. 악한 곳이라고. 그러나 누구라도 맞닥뜨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국가가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감각.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는 사실 내가 개인적으로 깊은 애정을 가졌던 곳으로, 힘이 될 때마다 연대자들의 걸음에 나의 걸음을 보탰던 곳이다. 국내 성매매 집결지는 성매매가 불법으로 규정되었다는 이유로, 고유한 삶이 있는 존재들의 삶터를 행정당국이 강제 폐쇄해 왔다. 행정대집행을 강행하고, 위선적인 지원제도로 면피하며 성노동 종사자들을 내쫓는 수순을 밟는다. 혐오의 여론을 형성한다. 그러나 성매매 집결지가 폐쇄되는 실질적인 이유는 부동산 논리에 있다. 파주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에서는 강제 폐쇄에 대응해 몸으로 막아보던 성노동자 B 님이 쓰러져 중환자실에 장기 입원하는 일이 생겼으나, 행정당국은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성노동자 B님은 장애가 있는 가족을 홀로 부양하던 상황이었다. 이들을 불법적 존재로 규정하고 배제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심지어 생을 이어갈 수단을 앗아갈 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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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를 더 이어본다. 나는 화성 아리셀 참사 현장을 작년에 찾았다. 혼자서 간 건 아니었다. 추모를 위한, 그리고 아리셀 회사의 대표를 규탄하는 집회가 기획되었고, 연대 버스가 운영돼 전국에서 추모객이 화성으로 모였다. 이때의 연대는 단순히 집회에 참가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으나, 집회에 참여하는 발걸음이 내게 연대로서의 큰 의미를 주었다. 사회의 노동구조와 위험이 약자에게 전가되는 경로를 체감하게 됐다. 아리셀 참사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당연한 그 생각이 마음에 각인됐다. 누구의 것일지 모를, 서럽고 쓸쓸한 감정이 들었다. 또, 이태원 참사 추모문화제를 동료들과 함께 기획해 진행하는 활동을 하거나, 문화연대라는 단체에서 진행한 ‘이태원 기억 담기’라는 활동에 자원해 추모객들이 남긴 메모 편지를 분류하고 아카이빙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참사 이후, 그에 관한 공동의 기억이 서로를 붙잡아주는 사회가 되기를 바랐다.
  한편 기후위기의 경우 직접적으로 내가 피해 당사자이자 가해자이기도 한 그 관계성이 직관적으로 내게 다가온 사안이다. 물이 천장 한쪽으로 모여 고이고, 벽지가 출렁일 때까지 고였다가 내 방으로 뚝뚝 떨어졌던 며칠. 나는 고양이와 둘이서 반지하방에 있었다. 외출도 쉽지 않았다. 내가 비에 갇혀 그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또한 구조적으로 사회와 단절된 채 혼자 견뎌야 하는, 실상 단절이라는 의미에서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상을 이어가는 개인이 바로 나였다. 이와 같은 고립의 현상은 고스란히 기후위기를 가속화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야기한 것이기도 하다. 벗어날 수 없는 구조의 굴레에서, 나는 운 좋게 살아 있지만 누군가는 지구에 해를 끼친 것 없이 삶의 터전과 가족을 잃거나 자신의 목숨을 잃는다.
  누군가에겐 장마에 지나지 않겠지만, 또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어 눈요깃거리로 삼을 수 있는 홍수라는 이름의 진풍경에 불과했겠지만, 누군가에겐 생존이 달린 절박하고 긴급한 일이다. 너무 길었던 2022년의 폭우 쏟아지던 여름. 그 기간 동안, 나는 깊은 고립감과 더불어 물을 공포스러운 감각으로 경험했다. 같은 기간 들려온, 보다 사회적으로 취약했던 여성 일가족이 폭우 속에서 반지하에서 나오지 못해 목숨을 잃은 소식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즈음 파키스탄에서 들려온 대규모 피해 소식도 잊지 않고 있다. 나는 그 소식들에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기후라는 공동의 삶의 조건. 기후위기를 야기한 공동의 체제 조건. 여기에서 벗어나 있는 이는 없다. 우주로 넘어가 새로운 터전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려는 시도가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만은 아닌, 첨단 과학의 시대에 그 또한 시도할 법한 이야기이나, 이는 식민주의의 우주적 확장이다. 또한 지구 내에 게토를 만들어 소수의 부유한 이들만이 안전을 도모한다는 이야기들도 들려온다. 가진 자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이야기다. 지표면 평균 온도가 점차 뜨거워져 가면서 세상은 이제 이전에 알던 곳이 아니게 되었는데, 기후를 이렇게 만든 원인이 따로 있고 너무 큰 피해를 받는 이들이 따로 있다는 그 부정의를 마주할 때마다 화가 났다. 멸절이나 멸종이라는 개념이 쉽게 미학적인 영역에서 이미지로 소비되는 것을 볼 때 당황하곤 했다. 기후위기의 피해를 가장 먼저 입는 것이 비인간동물과 여성, 장애인,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이들이라는 것. 이 관계도를 파악할 때마다 절박한 마음이 든다. 그러다 이 사회를 보면 너무 기묘하게도 조용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최근엔 많은 민감한 이들이 반응해가고 있다는 걸 안다.)
  기후위기를 야기한 이 사회는 끊임없이 착취와 채굴을 일삼고 혼자서 생을 견디도록 하는 사회다. 그 속에서 내가 외로움을 느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과 비인간동물, 그리고 물질 영역 전체에 걸쳐 착취와 채굴은 계속된다. 뛰어난 이성을 자랑하는 인간종이 자본을 쫓고 ‘자원’을 독점하며 살육도 마다하지 않을 때, 문명사회의 일원인 나는 도태되지 않으려고 타자를 경계한다. 스스로를 착취한다.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 탄소를 끊임없이 발생시키는 속도전의 사회. 사회적 성공까지는 못가더라도 그럴듯한 일상을 꾸리는 것마저도 벅찬 일인데, 죽지 않으려면 타자를 나 스스로 배제하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내가 되어야만 한다. 채굴적인 구조에 나 또한 복무하는 셈이다. 내게 있어 소중한 관계들을 쉽게 떨쳐내고 만다. 이뿐일까. 농가에서 태어난 나는 땅을 착취해 대량의 농산물을 생산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구조 속에서 자라났다. 내가 학업을 지속하고 사회생활로 진입하는 동안, 나를 돌봐준 부모님은 땅을 해치고 계셨다. (미국의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에 비할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분들이 의도한 폭력인 건 아니라고 내 입장에서는 말하고 싶지만, 엄밀히 구조를 따져보면 나는 땅에 가한 폭력에 연루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아프게 몇 번이고 고백한다. 또한 고기를 먹는 게 주류 음식 문화가 된 요식 산업, 동물을 수단화해온 시스템 속에서 나 또한 동물을 착취하며 살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기후위기 영역에서의 사회운동을 시 쓰기와 겸하게 되었다. 국내 기후생태 현안을 파악하고, 활동지를 살피면서 이주해가며 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부침도, 배운 것도 정말 많았다. 갯벌을 메운, 대규모 간척지 새만금에 관심이 갔다. 그곳에 원형 갯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작은 수라갯벌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활동가들의 영향이 컸다. 수라갯벌마저 메운 후 그곳에 새만금신공항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있었고, 활동가들 그리고 생명의 편에 선 이들은 그곳을 지키기 위해 가열차게 노력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빛나는 얼굴들을 보았고, 비인간동물이, 철새들이, 갯벌의 생명들이 인간동물을 지켜준다는 생각들을 전해받을 수 있었다. 갑문으로 막혀있는 수라갯벌이 상시 해수유동될 수 있도록 캠페인에 소소하게 함께했고, 그곳에서 어민들을 인터뷰하는 일에도 손을 보탰다. 영화 〈수라〉(황윤 감독, 2023)를 대중적으로 함께 보고 수라갯벌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상영회를 추진하는 일에 손을 보탰다. 자주 수라갯벌이 궁금했고 그리웠다. 아름다운 활동가들도 많이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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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우, 커먼즈를 구축하는 일환으로서의 돌봄 구조에 관심이 있는 편이다. 고립되지 않는 것. 누구도 자신의 존엄을 훼손당하는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으면서 삶의 틀이 안정적으로 꾸려지는 것. 마음이 고려되는 것. 나는 평소 다소 날카로운 편이다. 이 날카로움은 내가 안전한 상황일 때는 그렇게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타자와 나를 상처주는 날카로움은 내가 위협을 느낄 때 나타난다. 나는 쉽게 엉망이 되고 마는 사람이지만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내 모습이 수용되고 서로 의존할 수 있는 안전한 공동체 내에서는, 다시 말해 환대받는 공동체 내에서는 나름대로 겸손히 타자의 목소리에 깊이 경청할 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받은 환대를 타자들에게도 적용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나라는 고립된 존재가 외부로 연결되었다는 건, 누군가 내게 연대해주었다는 의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부와 단절되어 있을 때 열린 사회라는 문에서, 나는 타자를 지키고 돌보고자 하는 선한 의지로 가득 찬, 슬픔과 고통 속에 있어 본 이들을 소소하게 많이 만났다. 그리고 함께했다. 때론 재미를 붙여 흥미로운 활동으로도, 더없이 큰 폭력을 마주해야만 해서 용기를 내는 마음으로도 말이다.
  잘 안될 때도 많았다. 사실 나는 실패한 활동가라고 나를 소개하는 편이 더 편하다. 속했던 단체에서 나와버린 일이 벌써 여러 차례다. 다만 함께하는 활동이 종료된 이후에도, 동료들과 연결되어 나의 속도로 현안에 대응하면서 지낸다. 놓아버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 내가 했던 활동들을 떠올리자니 주로 재난에 반응하며 움직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가다간 누군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는 편에서 말이다. 인간만이 주인 행세를 하는 이곳 지구 행성에 깃들어 삶터를 일구고 살아가는 생명들 편에서 말하기 위해, 내가 기존에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바꿔 갈 필요를 느끼기도 했다. 이를테면 비건 생활을 시작한다든가, 비질 활동에 참여하는 것. 공권력에 의해 삶터와 일터를 잃은 성노동자 편에 연대하고 계속 함께하는 일.
  나는 소수적 감각을 깊이 알아채는 편이다. 가시적이든 은폐되어 있든 ‘차별’이 난무하는 사회에 속해 산다는 것에 민감했다. (그런 줄 알았다. 더 고민하다 보면, 내가 점유해 있는 위치에서 나는 다른 누군가를 소수자로 만들고 있다는 걸 알아채게도 된다. 그럴 때면 내 것을 주장하지 않는 마음도, 동시에 내 고유성을 잘 탐구하며 움직이는 것도 모두 중요하다고 요즘 생각하고 있다.) 또 나는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자 고스란히 인간에게 되돌아올 것임이 자명한 일임에도 자행되는 개발들에 반응했다. 자본과 ‘경제 성장’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 하에 생명의 터전을 참담하게 뒤엎어버리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모두가 폭력의 주체가 되어 누군가를 착취해야만 하는 구조에 우리가 동조하고 있다고 나는 다른 활동가들을 따라서 말하고 있었다. 이 모든 건 기후위기 담론이 파악하는 사회 구조이기도 했다.
  나는 구체적으로는 새만금신공항과 가덕도신공항 건설을 반대하는 일 등에 목소리를 같이 내고자 했다. 처음부터 특정해서 해당 사안에 집중적인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더 생각해보면, 고립되어 있던 내가 시민사회 영역과 연결된 계기가 되었던 관계망을 따라갔다. 관계가 단절되어 있던 시기에 줌 예배를 통해 제주 강정마을에 먼발치서 연대하게 되었던 일, 기후위기 앞에서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활동을 하고자 하면서 함께 공부와 연대활동을 기획하고 수행했던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과 동료 희음을 만난 일, 대학시절 연합동아리에서 알게 되었던 친구 형욱이가 활동가가 되어 각종 사회참여 액션을 기획할 때 옆에서 보조를 맞추었던 일 등, 조금씩 더 구체적으로, 소규모의 다채로운 사회운동 그룹에 참여했다. 매번 배우는 것이 많았고, 감각이 새롭게 바뀌었다. 비인간 존재와 인간의 관계를 새로 정립하는 것에도 크게 관심이 생겼다.

*

그런데 커먼즈는커녕 부정의한 일들이 사회에 차 있다는 그 새삼스러운 사실을 자주, 매번 새로 알게 되어 난감했다. 나는 내가 애도와 경고가 분리되지 않는 자리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부정의한 일이라는 건 주로, 국가나 자본이, 권력이, 그리고 인간 사회의 관습이,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에 관한 감식안을 잃어버린 채 가치가 전도된 채 살아갈 때의 안이함이 함부로 존재의 삶을 훼손하고 지우는 일들이었다. 전남 광양에서 활동가로 일했던, 작년인 2024년은 마침 밀양 송전탑 투쟁 10주기가 된 해이기도 했다. 기존에 활동해왔던 이들이 밀양으로 모였던 작년 6월 8일 즈음해서, 나는 내가 일했던 환경단체를 통해 책모임을 열었다. 그때 읽은, 『전기, 밀양-서울』(교육공동체벗, 2024)은 내게 국가폭력에 대해 선명하게 알려주었다.
  송전탑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도시로 전기를 보내기 위해 송전탑이 건설되었을 지역과 그 땅에 관해서는 생각해본 적 거의 없었다. 또 전기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역시 큰 관심이 없었다. 『전기, 밀양-서울』에서는 송전탑 투쟁의 양상과 의미뿐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책에는 말로만 듣던 탈송전탑 탈핵 운동의 기점이라고 할 이야기가, 결국 국가폭력 이야기가, 그리고 연대 이야기가 가득 적혀 있었다. 2024년 수천 명의 경찰이 투입된 행정대집행이 밀양에서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전력이 밀양과 청도, 홍천과 봉화 등에서 벌인 송전탑 건설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송전탑이 건설된 곳은 매일 웅웅거리는 소음을 내고, 번쩍거리는 불빛을 낸다. 기존에 풍요롭던 산천과 농촌에 균열이 간다. 거기서 살고 있던 주민과 벌, 나비, 풀들이 터전을 잃었다.
  우리가 예사로 쓰는 전기, 없어서는 그 무엇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전기가 사실 어디에서 생산되어 온 것인지, 어떤 과정이 은폐된 채 우리에게 온 것인지 보통은 잘 알지 못한다. 전기가 나에게 오기 위해서는 송전탑과 송전선로가 필요하다. 그런데 송전탑은 고압 전류가 흐르고, 송전탑은 주변에 영향을 준다. 그저 국가가 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쉽게 승인할 수 없는 일이다. 송전탑 건설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지역 공동체가 와해되었다. 최근 기후위기가 주요 이슈가 되면서 재생 에너지에도 관심은 높아졌지만 태양광 발전을 비롯한 재생 에너지 또한 시설물은 토목공사를 통해, 그리고 도시가 아닌 시골과 바다에 세워진다. 송전탑이나 핵발전소를 건설하는 주체들은 건설지를 주인이 없는 땅으로 여긴다. 선주민들에게는 결정권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곳은 주인 없는 땅이 아니다. 그 땅의 ‘주인’인 ‘밀양 할매’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새와 나무와 꽃과 벌들이 그 땅의 주인”이라고 말한다. 송전탑 옆에 꽃과 나무와 새와 벌들을 크레파스로 그리면서, 이들이 진짜 ‘이 산의 주인’이라고”5)말이다. 내가 전기를 쓰는 한 송전탑이 세워진 전국의 각 곳과 연루되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을 점유해버린 고통에 연루되지 않을 수 없다. 마냥 편하게 전기를 쓸 수 없다. 내게서 ‘먼’ 곳의 고통을 상상하고, 또 그 소식들을 살펴야 할 이유다. 빈곤한 상상력을 기경하기 위해 구체적인 공부와 몸을 움직이는 연대가 필요하다. 그 연대는 다시 또 다른 연대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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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대 중반에 시를 처음 쓰기 시작했다. 당시에도 내가 사회와 아주 동떨어져 지내기를 지향하는 개인인 건 아니었다. 속했던 기독교 공동체는, 다행히도 내면과 영성에 관해서뿐 아니라 사회 참여적인 자세를 가르쳐주었다. 그 영향이 내게 깊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세상과 나를 해석할 수 있는 언어가 많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가 쓴 시를 읽고 감상을 나눠주거나 좀 더 사회적인 시선으로 내 시의 발화를 해석해줄 때 좋았다. 존재를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다. 표현하고 싶다기보다는 어딘가에 가닿고 싶었던 것 같다. 쓰는 동안 많이 울었다. 쓰는 시간 안에 깊이 머물러 있었다. 그렇게 시라는 것을 쓰기 시작했다. 시가 아닌 또 다른 형식의 글쓰기였다고 해도 비슷했을 것 같다. 내 마음을 쓰기. 그리고 그 마음이 누군가에게 가 닿는 것. 엉망진창이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을 부려놓고도 시라고 우길 수 있어서, 그래서 시가 좋았다. 내가 아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별 볼 일 없는 일인데, 시를 쓰고 문학을 공부한다는 이유로 내 삶을 긍정해주는 이들이 있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사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문학을 잘 연구해보려는 마음도 먹었다. 다른 이들의 언어를 잘 이해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견디기 어려운, 외로운 시간이 찾아왔다. 시를 통해 무언가 그럴듯한 제도적인 옷까지 입어보려고 탐냈기 때문일까. 대학원 공부에 도전했기 때문일까. 나를 살리던 시는 오간 데 없고, 세상을 단단하게 살아내지 못하는, 생산성 없는 삶을 겨우 부지하면서 주변으로부터 관습으로부터 휘둘리는 나, 생존하려 애쓰는 나, 견제의 날이 선 나, 그런 내가 남아있단 걸 알았다. 시가 더 이상 내게 중요치 않게 되었다. 죽고 싶던 날들이 구체적으로 떠오른다. 문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다른 삶 살기를 꿈꾸지 못하고 있었다. 문학 공부를 지속하고, 꾸준히 시를 쓰다 등단을 했지만, 어찌 된 게 나는 비난받을 게 더 두려웠다. 시가 더는 내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때, 시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거나 위압적인 무엇이었다. 현실적인 생존의 방편 역시 되지 못했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상태로, 가까운 타인들을 많이 떠나보냈다. 나는 인간 살얼음이었고, 가시였다. 깨진 조각들을 겨우 테이프로 붙여둔 유리 사람이었고,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건 진창이었다.
  박사과정 마지막 학기에 겪은 폭우. 코로나 때보다 더 외롭고 끝없이 우울했던 당시의 감각으로 나는 여전히 지낸다. 들려왔던 반지하 참사 소식으로부터, 이어서 사회에 너무 많이 들려오는 고통스러운 소식들을 연결해 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내 최근의 시 속에는, 이 모든 여정이 휘청휘청 흔들리며 들어오고 있다. 휘청임만이 내 시가 될 수 있다는 듯이. 슬프지만 휘청임을 아끼려는 이유다. 더 나아가고 싶다. 내가 쓰는 시 속에서도 나는 번민하고 분노하지만, 그 시 안으로 온갖 연루됨의 파악들이 들어왔으면 싶다. 또, 나는 숨고 싶을 때는 시 속으로 숨을 수 있다. 누군가의 궁극적인 편이 될 수 있는 시를 쓰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 시가 연약함을 아는 이의 언어로 타자와 연결되는 강한 글이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최근 나는 경기도 고양시에 책방을 열었다. 책방 이름은 ‘유월의 숨’. 내가 쓴 시의 제목이기도 하고, 6월에 오픈한 이 책방이 지역 내에 숨구멍으로 역할을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고심 끝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책방을 오픈한 건 사회운동에 더 참여하고 싶으나 내 기질과 성향을 더 잘 파악하면서 움직이고 싶어서였다. 문학에 기반을 둔 내가 사회 현안을 지역 공동체와 함께 나누고 또 같이 참여하면서, 문화 매체를 통한 운동성을 조금이나마 만들어보고 싶었다. 어쩌면 책방으로 조금쯤 숨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건 맞는 말일 것이다.
  지금까지 책방을 오픈한지 4개월 차가 되었다. 아직 운영에 서툴고 부족한 것이 많지만 시도해보고 있다. 최근에는 고양시의 이웃인 팔레스타인 활동가 미니 님을 비롯해 여러 동료분과 함께 책방에서 책모임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하고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음을 느꼈다. 또, 근처에 사는 작가분들 그리고 고양시 산황산을 골프장 증설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시민분들을 만나게 되면서 연결의 소중함을 다시 느끼고 있다. 책방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역량을 쌓아갈 수 있을까? 여전히 어렵지만 어쩔 수 없는 형편이기도 하다. 폐업할 때까지 재미있게 책방을 통해 활동을 이어가려 한다.
  써야 할 원고의 주제로서의 연대는 팍팍한 투쟁의 느낌을 주어 글을 쓰는 내내 앓았다. 어쩐지, 연대라는 키워드를 떠올리면, 나는 내가 했던 연대활동들이 투쟁 현장에서 구호를 외치는 장면으로 수렴되는 종류의 연대들로만 재생되는 것 같다. 물론 나는 집회와 시위 현장에, 광장과 거리에 피켓을 들고 나서는 것이 어렵지 않은 사람이다. 나는 심지어 그와 같은 피케팅에 비장한 마음과 더불어 설레는 마음까지 지니고 참여하곤 한다. 하지만 다정한 연대자 박지호 선생님이 그의 저서 『연대와 환대』(한티재, 2024)에서 쓰셨듯 “모여서 어디 갔다고 다 연대가 아니”6)다. “관계하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를 신뢰하게 하고 확장하게 하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까지고 실패할 따름”7)일 것이다. 또한 연대의 방식은 계속 고민되어야 한다. 박지호 선생님의 말을 곱씹으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연대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우리의 진심을 서로에게서 확인하며, 생명과 비생명을 아우르면서 함께 존재하기를 택하면서.8) 그렇게, 나보다 먼저 나를 환대하고 내게 연대해온 세상을 향해 내 마음을 조심스레 열어가면서.

윤은성

2017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집 『주소를 쥐고』 『유리 광장에서』가 있고, 같이 낸 책으로 시집 『여름, 연루』, 에세이집 『우리 힘세고 사나운 용기』가 있다. 고양시에서 기후생태 독립서점 ‘유월의 숨’을 운영한다.

마감에 많이 늦었습니다. 앞으로도 늦을 것 같은데, 노력하며 지냅니다. 두 고양이 랭보와 냐민, 개 오복과 일상을 공유하면서 잠시 깊은 잠에 드는 일이 많아요. 최근엔 그리 많은 연대활동을 하지 못했는데 연대에 관한 이 글을 썼습니다.

2025/12/03
76호

1
미리 돌본다는 감각은 희음(활동가, 시인)이 쓴 글 속에서, 가덕도 신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활동을 이어가며 성찰한 바에 잇대어 상상해본 것이다. 구체적인 문장은 다음과 같다. "(…) 지금 필요한 것은, 생태와 환경과 생명을 파괴하고 모두의 안전을 위협하는 공항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고 돌볼 수 있는 돌봄 사회의 기반을 만드는 일일 것이다." (희음, 「가덕도는 공항이 아니라 생명이다」, 계간 『작가들』, 인천작가회의, 2025년 9월 15일. 바로가기)
2
정홍칼리, 『틈새 연대기』, 오월의봄, 2025, 8쪽.
3
같은 책, 29쪽.
4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운동(movement)의 언어"라는 표현을 최근 양경언 평론가의 글에서 읽고 마음에 새겨두었다. (양경언,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시적 실천들」, 『현대문학이론연구』 99집, 현대문학이론연구학회, 2025, 299쪽.)
5
김영희, 『전기, 밀양-서울』, 교육공동체벗, 2024, 24-25쪽.
6
박지호, 『연대와 환대』, 한티재, 130쪽.
7
같은 책, 130쪽.
8
같은 책, 131-132쪽 참조.